황강재 의 번와 와 대문채 건립
대종회 이사 예 진 해
통덕랑 신자겸자공의 후손들이 세운 황강재의 보수 공사를 마무리하고 나서
여러모로 배우고 느낀점에 대해서 피력 하고자 합니다.
우선 위 사업에 대해 물심 양면으로 협조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황강재는 경북 청도군 매전면 내동에 있으며 동쪽은 운문산 준령의 병풍처럼
펼쳐진 육화산(675m)이 있고 서쪽으로는 강건너 새들을 지나 전설 어린 오리산이 있으며 앞은 밀양 강의 지류이고 운문호에서 주류로 흘러 내려오는 동창천이
변산을 빗겨 휘감아 들어오고 남쪽으로는 황강산이 솟아있는 그아래 기슭에
위치해서 동학이 그윽하고 계산이 수려한 명당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족성이 모여 친목을 도모한 것 뿐만이 아니고 일제 강점기 를 비롯해서
과거 경제적 어려운 시기에는 서당이나 야학당으로 많이 이용되기도 했습니다.
건립후 세월이 흐름에 따라 훼손이 되어 보수하고 개축을 하여 관리를 해 왔습니다.
그후 또 수십년의 세월이 지나고 나니 낡고 훼손이 심했는데 지난 경인년 묘제때 10세손 성락이 본동에 거주하면서 면밀히 관찰한 결과 훼손 뿐만 아니고
누수의 위험도 있어 보수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발의를 해서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경인년 11월 21일) 이 사업을 진행하기 위해서 추진위원장을 10세손
임해, 총무는 10세손 광해 를 추대했습니다.
논의한 결과 선조님의 유산을 보존해서 후손들이 대대로 문중 행사에 이용하기
위해서 번와 와 대문채 개축까지 실행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실행 계획에서 임원들이 몇차례 모여 의견을 교환하기도 했으며 결국 산하 여러
후손들의 협력과 총무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일을 잘 추진해서 원만하게 완성하게 되었으며 그 다음해 (계사년 3월 23일) 예씨 대종회도 본재에서 개최하기도
했습니다.
본 기고는 전술한 사업 추진중 배우고 느낀점들을 기술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현시대의 시류에 적응해 살면서 많은 분들이 애족심으로 물심양면으로 협조해주신것에 대해서는 긍지를 느끼지 않을수 없습니다.
아쉬움이 있다면 협조를 하면서 협조하는 자신이 전술한 신자겸자조 통덕랑
과는 어떤 관계인가? 그분은 어떤 분이며, 또 그분은 황강재와는 어떤 관련이
있는 가도 확실히 알지 못한 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얕은 식견이지만 사료를 살펴 보면 영남루 대지의 문헌을 인용하면
선생의 휘가 신겸이고 조선 영조때 통덕랑을 지냈으며, 부계군 예낙전 선생의
후예이고 본관은 의흥이다.
학문이 깊어 그 문행이 높았다한다. 후손들이 선생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해서
청도군 매전면 내동에 있는 황강산하에 황강재를 세워 받들고있다. 라고 게재
되어있고 묘는 북 대전 구산 기룡 자좌 상분 으로 되어있습니다.
또 다른 기록에 의하면 황강재는 내동파에 의해서 건립 되었다고도 묘사되어
있습니다. 우선 난해의 소지가 있을 법한 말들을 이해하는데는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필자의 추측으로는 다음을 생각할수 있습니다.
신자겸자 조의 직손 에는 장손 덕장, 차손 덕빈, 삼손 덕기 조의 삼형제분이
계셨는데, 세월이 흐름에 따라 후손들이 이주해서 정착한곳이 원인이 된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장손조 측의 후손들은 청도 이서 대전을 중심으로 정착했고
차손조측의 후손들은 반수는 대전에 반수는 내동에 거주했고,반면 삼손조 의
후손조는 거의가 내동에 정착했던 것입니다.
정축보를 살펴보면 각각 직계들의 맨 끝난에 있는 남 여 인구수를 살펴 보았더니 장손 대 차손 대 삼손의 남자 수의 비가 대략 1대6대9이고 여자수의 비가
1대7대13 비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후손은 내동에 거주하는 인구수가 어느곳 보다 훨씬 많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내동파란 말이 나지 않았나 여겨집니다.
물론 이것은 자녀들이 외지로 나가지 않은 시대의 통계이며(정축보)에 의거
지금 거주하는 것과는 많이 다를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부터 사십여년전 어른들께서 신자겸자조의 후손인 우리는 내동파
라 하기 보다는 통덕랑공파라고 하자 했는데 이를 주장한 측이 차자조 후손들
측에서 했는데 이를 전체 후손에게 전달이 잘 되지 않았기 때문에 본 사업에
협조를 하면서도 잘 알지 못한 분이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물론 통덕랑이란 봉작을 거론하니 정일품 대광보 국승록대부를 비롯해서 정헌대부 통정대부 봉정대부 와 같은 대부봉작에는 비교할봐 못 되지만 타성 문중을
예를 들면 김해 김씨 삼현파 통덕랑종중, 안동 김씨 통덕랑공종문회, 영일 정씨
통덕랑공, 한양조씨 통덕랑파 등등과 같은 각 문중 마다 통덕랑파가 수없이 있는데 우리 통덕랑 후손이 사실데로 통덕랑이라고 하는 것은 당연 지사 라고
봅니다. 과거 군주 왕정시대는 철저하고 엄격한 신분제 사회라서 관직이 종 9품을 해서도 그 자손들이 받들고 기리는데 통덕랑으로서는 소홀이 할수없는 것이
아닐까 덧붙여 예병철씨 인터넷 까페에 의하면 우리성이 오래 됨에도 불구하고
인구수가 적어 희성이 된것은 아마도 조상님들이 큰 화를 입지 않았나 하는 추측의 글을 보았는데 일리가 있는 주장입니다.
또 통덕랑이란 봉작이 중시조공의 관직(찬성사 종일품)과는 너무도 차이가 크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차제에 그리 많지 않은 신자겸자조의 후손들은 통덕랑 신자겸자 공의 후손이라는 것을 잊지말고 명심하기 바랍니다.
위 사업 황강재 번와 와 대문채 건립에 있어서 열과 성을 다해 도와주신 모든
분께 재삼 감사를 드리며 또 앞으로 이를 보존하는데 다같이 각별히 보살피고
관심을 가져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