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조필제"<cpjae@paran.com>
To: "조만제"<jo38mj@naver.com>
Sent: 11-12-31(토) 15:28:28
Subject : 2012년 새해 건강하세요~~
형님!!!
2011년 신묘년 한 해가 저물고 있습니다.
매년 맞이하는 년말 년시이지만 올핸 유달리 저에게는 특별한 해였던 것 같습니다.
상반기엔 장모님과의 이승에서의 마지막 이별을 눈물 속에 보내는 참담한 시간이 있었으며, 한편으로는 작은 딸의 임신 소식과 외손녀들의 천진 난만한 웃음과 성장을 지켜보면서 즐거운 날도 보냈는 것 같습니다.
이젠 모든것을 추억으로 간직하고, 또 하나의 나이테를 더 해야 하겠네요~
덧없이 흐르는 세월에 저 혼자 천년을 살 것처름 앞만 보고 겁없이 여기까지 달려왔으나, 뒤돌아 보니 기껏 60년.... 이제야 100년을 살지 못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제가 이 세상 태어남을 감사히 생각하고, 길러주신 부모님의 은혜가 깊었음과 철없이 살아오면서 도움, 관심을 가져 주신 주위 모든 분에게 보답도 못하고.. 벌써 인생 2막이 끝나가고 인생 3막을 준비하는 시간이 왔나봅니다.
다가오는 임진년 새해엔(음력) 제가 환갑을 맞게 되는 의미 있는 해입니다.
세월은 어느듯 나를 황혼으로 이끌고 있네요.
남은 세월 탐욕 내려놓고,,,머리 비우고, 가슴 채워가는 삶을 이끌려고 노력하겠습니다.
형님 ~~~
시작한 연하 글이 제 넊두리만 늘어 놓았습니다. 저도 나이 탓인가 봅니다.
느그러이 해량하여 주세요.
밝아오는 임진년 한해도 형님 내.외분의 건강과 소원성취~~만사형통!!!
하시옵길 동생이 멀리서 기원드립니다.
새해에도 복 많이 받으십시요!!!
여불비례!!!
사천에서
동생 필제 올림
@@@ 추신; 형님께서 애써 번역하여 보내주신 아버지 세대의 글 잘 읽고 있습니다.
번역하신다고 노고 많았습니다.
혼자 보기 아깝고 사촌, 멀리 5촌, 6촌까지 함께 하였음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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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 조만제"<jo38mj@naver.com>
To : "조필제"<cpjae@paran.com>
Sent : 11-12-31(토) 20:28:22
Subject : 2012년 새해 건강하세요~~
자네 글 잘 읽었네.
나이를 더한다는게 그 만큼 짐도 더 무거진다는 거네'
나이 어린 자식들과 주변 사람들에게도 나이 값을 하여야 하니까 ,
뿐만 아니라 보아가며 자리도 비워 주어야 하고 본 것도 들은 것도 일일이 내색할 수 없는
결코 쉽지 않는 인고의 어른이 되는 것이라네.
.....그 동안 아버지 세대의 글과 학문을 그냥 쓸모 없는 과거로 치부해 온 나 자신이 너무 죄송하고 미안해서
늦었지만 반성하는 의미에서도 글 속에 담겨있는 의미와 사상과 가치를 찾아내어 일가친척들에게 알리고
아버지 세대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부탁하고 싶네. 요즘은 번역이 완성되면 전체 4촌들에게 또는 관계 있는 재종제 재종질에게까지 우편으로 보내고 있네. 새 해에도 지금처럼 건전한 사고와 건강한 육신을 견지하도록 노력하게.
오늘 저녁에는 아이들 3남매 모여 지 어머니 생일이라고 저녁 먹고 모두 제집으로 떠났네.
작은 아버지께서 큰아버지 상에 올린 제문이 번역되었기로 전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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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文
(省堂遺稿에서)
슬프도다, 형님이시여!
정말 우리 형제 두고 떠나십니까?
지난 날 우리 6남매 80 노경에 이르도록 화목하게 지나는 모습 보는 이 모두가 흠모하며 부러워하였는데 우리 여러 남매 두고 형님 먼저 떠나신다니 이제 누가 우리를 흠모하며 부러워하겠습니까! 아 슬프도다.
형님은 자태와 재주가 남달리 깨끗하고 빼어나셨으며 기품(氣稟)이 밝고 강직하였을 뿐 아니라 용의(容儀)가 단정하고 총명하여 지나는 사람들이 어릴적부터 일반 아이들과 섞여 놀되 장난기 말을 함부로 하지 않았다고 하였지오. 마을 서당에 취학하여 소학(小學) 논어(論語) 맹자(孟子) 등의 서책을 읽었고 한 번 들으면 그대로 외우는 머리여서, 형님은 곧 마을 밖에 나가 공부를 하였으니 소와(素窩) 許 선생 문하에서 경서(經書)와 역사서(歷史書)의 난해한 文理를 익혔고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는지라 소와 선생의 깊은 사랑을 받으셨다. 소와 선생은 종종 말씀 하시기를 ‘너가 나의 선생이다’ 하시었다.
우리 아버지 농업으로 자수성가하고 근검저축하시어 점차 삶이 나아지자 형님은 집에서 효심으로 부모님 모시었으니 부모님 뜻에 거스르는 일을 한적이 한 번도 없으셨다.
고향인 함안 신창으로 분가하신 이후에는 낮이면 용인(傭人-머슴)으로 농사를 지으시고 밤이면 옛 성현(聖賢)의 책과 글을 읽고 사람을 대함에는 반드시 친근함과 至善으로, 물건을 대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의(義)로움을 생각하였으며 사람의 선행을 보면 반드시 당겨주고 사람의 나쁜 행위를 보면 못들은 것으로 하였으니 이를 알게 된 원근의 사우(士友-글방 친구)들은 형님을 유덕군자(有德君子)라 칭찬하였다.
선조를 위하는 마음가짐 또한 유별하시니 9대조 이하 선영(先塋)에 석물(石物-상석)을 놓고 아버지 못 다하신 뜻 이어 여러 곳에 의물(儀物-조선을 위한 제사장비)을 빠짐없이 갖추시었다.
또 매년 드리는 묘사(墓祀)와 향례(享禮)에 쓸 자금 마련을 위해 위토답(位土畓)1)을 마련하고 선조 간송(澗松)선생의 독서하시던 정자인 합강정(合江亭)이 비바람에 쓰러질 지경에 이르렀음으로 이를 복구하기 위해 밤낮 없이 걱정하시다가 각처의 일족을 찾아 이에 대하여 상의하고 지원을 얻어 이를 중수하시었다. 또한 송정(松汀)리에 남호재(南湖齋)를 지을 때도 형님은 자손들로 하여금 해마다 조금씩의 곡물을 축적하게하여 7년만에 이를 준공하였으니 이 모두가 형님의 성력(誠力) 덕분이다.
아버지께서 병석에 드셔 여러 해 고생을 하셨는데 그 때 형님은 의령-함안 40리길을 걸어서 3일이 멀다하고 왕래하시며 시병(侍病)하고 탕약(湯藥)을 다려 올리시았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신묘(辛卯)년2) 납월(臘月) 3)별세하시었다. 형님께서는 주야로 애곡(哀哭)하시며 상례(喪禮) 범절(凡節)을 주문공(朱文公)4)의 가례(家禮)에 좇아 조금도 어긋나지 않게 행하시었다.
신위는 의령 나의 집에 모셨는데 매월 삭망(朔望)때면 바람이 불거나 비가 와도 3년을 하로 같이 내왕하셨으니 이를 본 의령 함안 사람들은 모두가 형님의 효행을 칭송하였다.
슬프도다. 형님의 청아(淸雅)한 인품, 학문의 재주는 판탕지세(板蕩之世)5) 를 만나 쌓아 온 그 큰 포부를 펼쳐 보지도 못하고 말았으니 안타깝도다. 예로부터 선인(善人)에겐 재앙이 뛰 따른다 하더니 지나간 세월 우리 형님이 겪은 고난은 말로 다 형언할 수 없도다.
슬하에 딸 일곱을 두었는데 늦게사 아들 하나를 얻어 애지중지 하던 차에 지난 봄 80연세에 며느리를 보고 손자까지 보았는데 그 자미 하늘이 몰라 주는도다. 몇일 신고(辛苦) 끝에 별세하시니 어찌 이 슬픔을 참으리오, 우리 집 동량(棟樑-기둥)이 부러졌으니! 아무래도 우리 집의 가운(家運)이 다 되었나 싶어 슬프도다.
형님 생존 시에 써 놓은 서책이며 상자에 담아 놓은 글들을 우리 형제가6) 수습하여 유고(遺稿)로 정리하여 이제 인쇄에 넘길 준비를 다 끝내었으니 형님은 이를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제상을 물리기전에 제가 형님 영전에 조그마한 제(祭)를 하나 따로 차려 올리고 미숙한 문장을 제문으로 지어 읽으며 통곡하나이다. 영혼이 계시거던 흠향하옵소서.
사제(舍弟) 鏞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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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萬濟가 아는 대로 주석을 달았음
1)선영(先塋)을 지키고 관리하며 묘사를 차리기 위한 농토
2)6. 25 동란 다음 해인 1951년
3)음력 섣달(12월)
4)중국 송 나라 성리학자 주희(朱熹)를 일컬음
5)板蕩之世란 어지러운 세상을 말함, 전통적 과거제도는 1894년으로 종료됨
6) 쌍생형제분을 지칭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