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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듣고 싶다..우승한 뒤 팬들의 환호성을"
-청각 장애 테니스 유망주 이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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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 기자로 생활한 지도 벌써 12년차가 됐지만 이런 경우는 흔치 않은 경험이었다. 인터뷰할 대상자가 듣지 못하는 선수다. 서로 시선도 맞추고 가끔은 재미있는 농담도 오가면서 소통을 해야 재미있는 인터뷰가 되기 마련이지만 이날만큼은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바로 청각장애 3급이라는 어려움을 딛고 국내 남자 테니스 유망주로 각광받고 있는 이덕희(15.제천동중)가 그 주인공이다.
원인을 알 수 없지만 어릴 때부터 들을 수 없는 장애가 있는 이덕희는 인터뷰 약속을 한 날도 어머니 박미자 씨와 함께 동행했다. 이덕희는 상대 입술 모양을 보고 말의 뜻을 알아내는 구화(口話)로 의사 소통을 한다. 그의 어머니는 이덕희의 약간은 불분명한 발음과 입술 모양을 종합해서 아들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파악한다.
따라서 어머니가 없이는 인터뷰를 한다는 것이 사실상 어렵다.
실제로 이덕희는 이날 기자의 입 모양을 보고는 "도저히 못 알아보겠다"며 투덜대기도 했다. 원체 웅얼거리는 말투와 '저질 발음'이 '구화의 달인' 이덕희도 알아듣지 못하는 불상사를 불러온 셈이다. 어머니는 기자의 말을 이덕희에게 전하고, 또 아들의 말을 대신 표현하면서 "꼭 무슨 통역을 하는 것 같네"라며 웃어보였다.
매거진 S의 커버 스토리에는 거의 예외 없이 '일문일답' 형식이 빠지지 않았지만 이번 이덕희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는 도저히 '일문일답'으로 쓰기가 어려웠다. 실제 인터뷰 내용을 그대로 일문일답으로 옮기자면 기자의 질문과 어머니의 '통역', 다시 이덕희의 답변과 어머니의 '통역' 과정을 거쳐야 했기 때문이다.
청각 장애...처음 갔던 병원에서는 정상 판정(?)
![]() 어린 시절의 이덕희 (사진 : 이덕희 제공) |
이덕희의 아버지 이상진 씨의 말이다. 그는 "처음 병원에 가서는 정상이라는 진단을 받았다"고 말했다.
듣는데 문제가 있는 것 같아 찾아간 동네 병원에서 이덕희의 한쪽 귀에 대고 큰 소리 방울을 흔들더라는 것이다.
두 살 아기가 본능적으로 방울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병원에서는 "아무 이상 없습니다"라고 하더란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아무래도 이상했다.
몇 달이 지나 이번엔 큰 병원으로 다시 진단을 받으러 갔다. 이번엔 청천벽력이었다.
대번에 "귀가 안 들린다고 보면 된다"는 간명하면서도 절망적인 진단 결과가 젊은 부모 앞에 놓였다.
"그때 와이프가 둘째를 갖고 있을 때였는데 둘째를 낳자마자 제일 먼저 청력 검사부터 하게 되더라고요."
두 살 어린 동생 동희는 청각이 정상이다.
아버지는 "지금도 덕희는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원인 미상'이라고 한다"며 답답해했다.
청력에 대한 가족력도 없고, 태어나서 병을 앓아 청력을 잃은 경우라면 흔적이 남아야 하는데 그런 것도 없다고 한다.
테니스와 인연을 맺다
![]() 이덕희는 라켓을 잡기 시작한 초등학생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사진 : 이덕희 제공) |
어떻게 보면 테니스와 인연을 맺을 운명이었던 셈이다.
이덕희와 성(姓)과 이름이 모두 같은 이덕희는 한국 테니스 역사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1981년 US오픈 테니스 대회 여자단식에서 16강에 진출하고 1982년에는 투어 대회 우승까지 차지한 이덕희 여사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 여사가 주최하는 이덕희배는 2001년부터 정상급 주니어 선수들이 총출동하는 국제 주니어 대회로 자리를 잡았다.
만일 그의 할아버지가 원래대로 이름을 준희라고 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모래판의 신사'로 불린 천하장사 이준희의 뒤를 이어 씨름 선수로 대성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는 또 야구 선수가 될 뻔도 했다.
그는 네 살 때부터 충주 성심학교에 다녔다. 충주 성심학교는 2002년 청각 장애 야구팀을 창단해 화제가 됐던 학교다.
어릴 때부터 달리기 등 운동에 탁월한 소질을 보인 이덕희를 보면서 충주 성심학교 선생님들이 "너는 초등학교 들어가면 무조건 야구를 해야 한다"고 점을 찍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덕희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손에 쥔 것은 야구 배트가 아닌 테니스 라켓이었다.
아버지 이상진 씨는 "특별히 테니스를 하게 된 계기는 따로 없다"며 "개인 운동을 시키고 싶어 했고 마침 외사촌 중에서 테니스를 하는 아이가 있어서 테니스와 인연을 맺었다"고 설명했다.
육상을 했던 할아버지와 "시골에서 자라 수영이나 뭐 그런 것은 저절로 하게 됐다"는 아버지 등 운동 신경이 남다른 유전자를 물려받은 이덕희는 테니스를 치면서도 빼어난 재능을 보였다.
좀처럼 지지 않는...그러나 험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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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부 랭킹 1위를 놓치지 않았고 세계적 권위를 자랑하는 에디 허 국제 주니어 대회 정상에도 올랐다.
그러나 그 과정이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승부욕이 둘째가라면 서러운 이덕희는 초등학교 시절 상대편 선수와 경기 도중 논쟁을 벌이기 일쑤였다.
선심이 따로 없는 초등학교 대회의 특성상 선수들이 직접 판정을 내리는 ‘셀프 카운팅’을 할 때가 잦은데 이때 상대 선수와 의견 충돌이 자주 일어났다.
게다가 이덕희의 상대는 대개 한 두 살 많은 형이었고 또 이덕희의 말을 상대나 심판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다보니 쉽게 해결될 일도 커져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분한 마음에 울면서 공을 칠때도 많았다.
그 와중에 어머니 박미자 씨의 마음고생도 컸다.
"한 번은 덕희가 2학년 때 4학년 형을 이긴 적이 있어요. 이겼어도 상대 아이가 덕희 때문에 부모님이나 코치 선생님한테 혼날 것을 생각하면 드러내놓고 좋아할 수도 없고 오히려 미안한 마음이 앞섰죠"
하지만 이때 상대편 벤치에서 들려온 이야기는 어머니의 귀를 의심하게 했다.
"뭐가 부족해서 저런 장애인한테도 지는 거냐?"
어머니는 "그때는 정말 참기 어려웠지만 지금은 불편한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단련이 많이 됐다"고 웃으며 "가끔은 '테니스가 뭐기에'라는 생각도 자주 들지만 요즘은 항상 감사하는 마음,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자세를 견지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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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고함 소리로 유명한 마리야 샤라포바(러시아)를 상대하는 선수들의 가장 큰 불만도 "샤라포바의 괴성에 공이 라켓에 맞는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덕희는 들을 수 없는 불리함을 어떻게 이겨내는 것일까.
아버지 이상진 씨는 "우리도 모른다. (이)덕희만의 뭔가가 있을 것"이라고만 했다.
그것은 동물적인 감각일 수도 있고 시각이나 촉각 등 다른 감각이 더 예민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버지는 "시력은 최근 정확히 재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좋은 편이다. 소리보다 빛이 더 빠른 것처럼 덕희도 듣고 치는 것보다 상대의 동작에서 뭔가를 빠르게 읽어내는 것 같다"고 추측했다.
또 촉각도 남들보다 예민하다. 테니스 손잡이는 엄마, 아빠도 손을 대지 못하게 한다.
평소 자신이 잡는 그립이 행여나 달라질까봐 우려해서란다.
테니스 라켓 스트링 텐션도 미세한 차이를 어김없이 알아낸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일부러 몇 번 텐션에 미세한 변화를 줘서 치게 하면 금방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상하다고 그러더라"고 전했다.
중학생이 된 소년..성인 무대와 윔블던을 겨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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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월드주니어 대회 14세부에 국가대표로 나가 한국의 우승에 힘을 보탰고 국제 대회 경험을 점점 쌓은 이덕희는 중2가 된 지난해부터 성인 무대에 본격적으로 도전하기 시작했다.
2012년 2월 한국선수권대회에서는 예선에서 대학생, 실업 '삼촌'들을 연파하고 본선 2회전까지 올랐으며 뉴칼레도니아, 피지, 중국, 인도네시아 등을 돌며 국제 주니어 대회에서 5차례나 우승했다.
또 올해 호주오픈 주니어 남자단식에서는 14세 8개월에 본선 1회전 승리를 따내 국내 선수 최연소 메이저 대회 주니어 단식 본선 승리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올해 이덕희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남자프로테니스(ATP) 랭킹 포인트 획득이다.
그는 4월 일본 쓰쿠바대 국제 퓨처스대회 단식 본선 2회전에 올라 ATP 랭킹 포인트를 따냈다. 불과 15세 나이에 이뤄낸 쾌거였다.
현재 ATP 랭킹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선수 가운데 최연소가 바로 이덕희다.
이같은 사실은 국내 언론뿐 아니라 외국 유명 언론에서도 다뤄졌고 스페인 최대 스포츠 전문지 마르카도 이덕희의 기사를 큼지막하게 실었다.
이 기사를 본 '클레이코트의 황제' 라파엘 나달(스페인)은 자신의 트위터에 "이덕희의 장애를 이겨낸 이야기는 우리에게 항상 도전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다"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그는 호주오픈에 이어 프랑스오픈, 윔블던 주니어 단식에도 출전했지만 아쉽게 모두 1회전에서 고배를 마셨다.
이덕희를 만나다
윔블던 1회전에서 탈락하고 귀국한 이덕희는 최근까지 제천 집에서 휴가를 보냈다.
가족들과 2박3일간 여행을 다녀오기도 한 이덕희는 "아빠랑 낚시도 해봤지만 너무 재미가 없었다"며 손사래를 치기도 했다.
몸 관리에도 각별해 래프팅을 해보자는 가족들의 제의에 "다치면 안 된다"며 단칼에 선을 그었다고 한다.
이날 인터뷰에서 만난 이덕희에 대한 느낌은 거침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달의 트위터를 봤을 때 소감을 묻자 그는 엄마에게 "또 얘기해야 되느냐"며 짜증을 냈다.
하도 똑같은 질문을 자주 받아 같은 대답을 하기도 지겹다는 의미다.
이번 윔블던에서 두 살 더 많은 정현(17.삼일공고)이 주니어 남자단식 결승까지 오른 것에 대해 묻자 그는 "내가 고1인 내년에 결승까지 올라 (정)현이 형보다 더 어린 나이에 기록을 세우겠다"고 당차게 답했다.
그는 정현에 대해 '라이벌'이라고 표현했다.
여기서 '라이벌'은 앙숙이라기보다 '동반자'에 가까운 의미로 읽혔다.
어머니 박미자 씨는 "(정)현이는 자기가 세웠던 최연소나 그런 기록들을 (이)덕희가 깨면 더 자극받아 열심히 하고 덕희는 또 현이가 윔블던 결승에 오른 것을 보면서 '자기는 1년 빨리 더 결승에 가겠다'고 하니까 서로 도움이 되는 관계 아니겠어요"라고 말했다.
지난달 김천퓨처스에서는 정현과 이덕희가 한 조를 이뤄 복식 준우승의 결과를 내기도 했다.
![]() 지난 6월 15일 경북 국제테니스연맹(ITF) 남자퓨처스 복식 준우승을 차지한 정현(왼쪽.삼일공고)과 이덕희(제천동중) (사진 : 대한테니스협회 제공) |
하드 코트에서 주로 연습을 하다보니 윔블던과 같은 잔디 코트에는 적응에 어려움을 겪기 마련이다. 그래도 가장 우승하고 싶은 대회는 윔블던이라고 한다.
이유를 묻자 "코트가 예뻐서"라는 것이 그의 대답이다.
코트 밖에서는 여느 중학교 3학년생처럼 귀여운 모습도 찾아볼 수 있다.
좋아하는 연예인을 묻자 "티아라 지연"이라고 답했다. 어머니 박미자 씨는 "이목구비가 크고 시원하게 생긴 스타일을 좋아한다. 예쁜 여자 좋아하는 건 다 똑같더라"며 웃었다.
좋아하는 선수를 묻자 로저 페더러(스위스)를 오래 좋아해왔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는 페더러의 모든 것이 좋다고 한다. 외모부터 시작해서 경기 운영 스타일, 패션까지 하나도 빼놓을 것이 없다는 것이다.
요즘 부진에 빠진 페더러를 보면서 안타까워하고 있다는 것이 어머니의 귀띔이다.
"그래도 나달이 트위터에 언급까지 해줬는데 요즘은 나달이 더 좋은 것 아니냐"고 다시 묻자 "그래도 나달은 2위"란다.
그러더니 이내 "나달이 2위라는 사실을 알게 하면 안된다"고 걱정을 늘어놓는다.
올해 윔블던 다큐멘터리를 찍으면서 만난 앤디 머리(영국)가 식당에서 먼저 아는 체를 하며 인사를 해줬다며 기뻐하기도 하는 영락없는 '중딩'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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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올해 윔블던 경기를 치르고 나서는 처음 엄마, 아빠에게 "관중이 너무 많아 떨리더라"고 하더란다.
매니지먼트를 맡고 있는 S&B 컴퍼니 이기철 대표는 "덕희는 평소 의사 소통에 따른 불편함이나 아쉬움을 별로 느끼지 않는 편"이라며
"다만 나중에 윔블던과 같은 큰 대회에서 우승하면 관중석에서 나오는 박수와 환호성은 듣고 싶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이덕희의 현재 ATP 세계 랭킹은 923위, 주니어 세계 랭킹은 33위다.
그는 "올해 안에 ATP 랭킹 500위, 주니어는 10위 안에 드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현재 키가 174cm인 그는 지금도 키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으며 181cm까지는 클 것이라는 진단 결과가 있다고 한다.
이덕희는 8월이 되면 다시 외국 대회 출전을 재개, 관중의 함성과 자신의 꿈이 기다리고 있는 테니스 코트를 향해 달려간다.
![]() 최고의 지원군 어머니와 함께. 부모님과 가족들은 이덕희의 성장을 돕는 가장 큰 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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