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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형 회보 제2호로 본 球馨日記’는
1974년 1월, 구형 창단 맴버들이 추기복, 차성우를 중심으로 구형회보를 만들었었는데,
그동안 이동수 총장이 보관 중이던 것을,
2007년 12월, 33회 이정호가 복원하였고,
그리고 하원규가 구형 창단 秘話를 추가하여 책자로 만들었습니다.
지난 2012년 12월 구형 창단 40주년 기념일에 맞춰서 책자로 배포하려 했으나
사정상 본 카페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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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형회보 제2호로 본
球馨日記
SINCE 1972
부산대학교 경고동문 야구구락부 球馨
창단맴버/ 박재걸ㆍ김영국ㆍ강성우ㆍ김현룡ㆍ박동기ㆍ박원상ㆍ성재업ㆍ양희권
이동수ㆍ이종인ㆍ정대근ㆍ차성우ㆍ최수일ㆍ최의수ㆍ최창집ㆍ추기복ㆍ하원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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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1. 序詩 (26회 박원상, 2대 주장) --------------------------------- 1
2. 球馨讚歌 (작사 : 26회 차성우, 작곡 : 26회 하원규)--------------- 2
3. 젊은 아이들 (26회 정대근, 3대 총무) --------------------------- 3
4. 球馨略史 --------------------------------------------------- 5
5. 対 在京 釜高팀 回顧錄 (26회 차성우, 3대 주장)------------------- 6
6. J에게 (26회 추기복) ------------------------------------------ 8
7. Meeting 野談 (27회 강영일) -----------------------------------10
8. 追憶을 되새기며 (26회 추기복)-------------------------------- 12
9. 德ㆍ靑 體典 野球記 (26회 양희권, 초대 주장)-------------------- 14
10. 野球가 남긴 榮光된 記錄들 (26회 추기복) ---------------------- 17
11. 하계합숙 : 진하 해수욕장 (27회 박원재, 5대 주장)--------------- 19
12. 구형의 내일 (26회 김현룡, 4대 주장)--------------------------- 22
13. 구형의 얼을 (26회 정대근) ----------------------------------- 24
14. 利害관계를 초월한 精神的인 支柱를 위하여 (26회 차성우)-------- 26
15. 모든 것의 기본이 되는 사실도 모르고서 (26회 박원상, 2대 주장)--- 28
16. 알찬 결실을 맺자 (26회 양희권) ------------------------------- 30
17. 동창회장 격려사 (25회 張大洛) ------------------------------- 31
18. 4부작 야구소설 “끝임 없는 戰場” (26회 하원규)------------------33
19. 구형 창단 秘話 1~5부 (26회 하원규, 초대 총무)------------------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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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序詩 (26회 박원상, 2대 주장)
제 목 : 가난한 기사처럼
고요히 탈을 벗고자 모인 고목들
썩은 둥치이지만
푸른 잎 돋아나듯이
메말라 옥토 아니더라도
우리는 어느 가난한 기사처럼 싸우리라.
서로의 고뇌 털어버리고
全身을 불사르는 태양을 향해 힘찬 배팅을 하자꾸나.
우리는 언제나 배팅 멤버
사랑의 옷을 입은 나약한 사람들
바르게 휘두르리라.
어느 가난한 기사의 부러진 창으로서도.
근본을 생각하고
대지를 박차며 달려라.
우리는 언제나 러닝메이트
대지에 충실한 走者
오직 一念으로 목표를 향해
도루하리라.
뜀박질하리라.
어느 가난한 기사의 쇠약한 말로서도.
이젠 神의 배팅차례
인간 구형은 수비다.
얕고도 깊은 뜻을 잊지 말고
여하튼 막아라.
최선을 다해 고수하라.
자신의 공간을 어느 가난한 기사의 낡은 방패로서도.
지금도 흙을 핥아먹고 동전을 삼키는 어린애인 우리,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악마의 괴성을 창공에 흩어버리고,
장차 짊어져야 할 사명을 하나, 둘 줏어 모으는 사람들.
보라, 내일도 백구는 우리를 향해 날아 온다.
쳐라! 뛰어라! 그리고 막아라!
우리는 언제나 가난한 기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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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球馨讚歌 (작사 : 26회 차성우, 작곡 : 26회 하원규)
球馨讚歌
作 詞 : 차 성 우
作 曲 : 하 원 규
구덕산의 정기안고 달려와,
야구의 참 뜻 알고 뭉친 한 형제들
건아들아 뛰어라, 대지 위에 바람 안고서
쳐라 백구를 하늘 높이, 막아라 멍든 상처로,
땀과 피로 이룩했던 구락부
구형 구형 야구의 건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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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젊은 아이들 (26회 정대근, 3대 총무)
<詩> 젊은 아이들
노란 落葉의 季節
구르는 落葉
黃色의 땅에 投影된 白球의 活氣찬 飛躍
모든 것을 잊어버려라.
너와 나는 명예도, 사랑도, 괴로움도
다 잊어버리고
平凡 속에 非凡해져 간
우린 고맙고 좋은 친구들이었으니깐.
아이들아 모여라.
모임은 모임을 만들고
우정은 즐거운 快樂이 되어
허허한 세상에 가득 차 너희들은 기쁘게 되리.
꼬리 문 雜語의 무덤 속에서도
우리는 그렇게 널 좋아했나 보다.
홀로 하루를 늙어가는 덧 없는 人生의 길을
난 아이들과 함께
너를 생각하며 꾸준히 걸어갈 작정.
못 이룰 모든 일은 잊어버리고
너만의 對話로 孤獨을 잊고 싶구나.
그리고 너의 飛球따라 저 높은 理와 想을 당겨보자.
우린 쓸데 없는 동정은 낙엽에 태우고
진정으로 서로를 사랑할 수 없겠나.
그리고
함께 험하디 험한 세상의 哀路를 걸어가지 않으련.
사랑하기는 쉬워도
사랑받기는 어려운
世波의 風浪 속에
우린 서로를 意志하며 믿는 이단자가 되고 싶었던 것.
친구야,
나의 이 품 안에서
너는 서러움에 겨워 울었다.
내, 너의 눈물을 닦아 주리.
그런 너는 후련하겠지.
그런 후 나는 너를 좋아하게 될꺼야.
우리는 서로가 좋아할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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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球馨略史
1972년 3월 : 경고 동문 26회끼리 야구를 즐기는 모임을 만들자는 양희권 군의
제안에, 이동수, 하원규, 추기복, 최창집 등 16명에 의해 구형이 창단됨.
초대 주장에는 양희권 군, 총무에는 하원규 군이 피선됨.
1972년 8월 : 회원 상호간의 유대 강화와 실력 향상을 위해 경남 함안군 칠서면
이룡리에서 제 1차 전지훈련 실시함.
1972년 9월 : 제 2차 정기총회에서 주장에 박원상 군, 총무에는 이동수 군이 피선되었으며,
김영국 선배(25회)를 감독으로 초빙함.
1973년 2월 : 구형회보 창간호 (12면) 발간
1973년 3월 : 제 3차 정기총회에서 주장에 차성우 군, 총무에 정대근 군이 피선 되었으며,
신입 부원(27회) 포섭과 더불어 정식 서클 등록을 필함.
1973년 4월 : 지도교수로 박재걸 선배교수(19회)를 모셨으며, 동문회와 구형 주최 로
‘경고기별 야구대회’를 개최함.
1973년 7월 : 부산대학교에서 하계합숙훈련을 개최함. (21일~24일)
1973년 8월 : 양산군 서생면 서생리에서 제 2차 전지훈련을 개최함.(16일~20일)
1973년 9월 : 제 4차 정기총회에서 주장에 김현룡 군, 총무에 하원규 군이 피선 되었으며,
정식 구형유니폼을 착용함.
1973년 12월 : 제 5차 정기총회에서 주장에 박원재 군, 총무에 김광철 군이 피선 됨.
1974년 1월 : 구형회보 제 2호(16면) 발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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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対 在京 釜高 팀 回顧錄 (26회 차성우, 3대 주장)
30도를 오르내리는 강더위, 운동장의 초목은 더 없이 푸른 여름이었다.
구형 역시 끝 없이 자라나는 여름과 같이 26회의 내적인 단합과 27회와의 굳건한
결속으로, 막강한 팀이 되었다.
보다 광범위하고 포괄적인 시합을 기원한 우리는 절대적인 정상을 향한 수련과 수
양의 밑받침 아래 외적으로 비약할 첫 시합인 재경 부고 팀과의 시합에 크나큰 의
의를 가졌다.
또한 부고 팀도 역시 우리와 같은 야구 집단이라 친근감을 느끼고 공감할 수 있었
다.
그러나 승리는 절대적인 것, 최선의 노력으로 이겨야만 하였다.
1 2 3 4 5 6 7 8 9 Total
구 형 0 0 1 1 3 2 0 2 2 11
부 고 0 4 0 0 0 2 2 1 1 10
1회 초, 구형의 공격은 득점 없이 끝났고, 1회 말 부고의 공격시 우리 팀 투수 김
학기가 3명을 줄 삼진시켜 간단히 끝났다.
2회 초, 6번인 내가 우전 안타로 출루하였으나 이후 타선의 불발로 득점 기회를 살
리지 못하였다.
2회 말, 부고에게 원 아웃 이후 2안타, 3에러로 4점을 선취당하였다.
이에 우리는 필승을 다짐하고 마음을 다시 추스린 후 시합을 진행하였다.
그리하여 점수는 4회 말까지 4대 2로 추격하였다.
그 사이 우리 팀 투수인 (김학기)가 강속구와 절묘하게 아웃 코너를 찌르는 슬라이더
로 부고의 타봉을 무실점으로 틀어막고 있었다.
역전의 기회는 5회 초에 찾아왔다.
3번 타자 박동기, 4번 타자, 김현룡, 5번 타자 양희권의 연속 안타로 무사 만루가
되었다.
곧 이어 6번 타자로 등장한 내가 절묘한 지점에 좌전 안타를 터뜨려, 2점을 만회하
고 7번 박원재의 적시타로 3루에 있던 양희권마저 홈으로 불러 들여 승부는 5대 4
로 역전되었다.
6회 초, 박원상, 추기복, 하원규의 진루로 이후 2점을 추가하여 점수를 7대 4로 벌
렸다.
6회 말, “기회 다음에는 위기가 온다.”는 속설과 같이 1사 주자 2, 3루의 위기를
맞았으나 우리 내야수들은 점수를 내 주더라도 아웃 카운트를 늘리기 위해 정상 위
치에서 수비를 하였다.
이렇게 하여 부고의 공격을 삼루 땅볼, 유격수 땅 볼로 처리하고 2점 실점으로 막
았다.
7회 말, 우리 구형은 연속된 수비진의 실수로 2점을 실점하여 승부는 7대 8로 재역
전되었다.
이 때는 매우 초조하였으나, 평온함을 되찾고 이후 우리 구형은 8, 9회전에 각각 2
점씩 추가 득점하여 9회 말 수비시, 점수는 11대 9, 2점차 리드하고 있었다.
9회 말, 마지막 수비 시 1사 후 주자 2, 3루를 허용하여 동점 및 역전 패배의 위기
를 당하였다.
우리 투수 (김학기)의 인코너 강속구를 부고 4번 타자가 삼루수 강습 땅 볼을 때렸
다.
3루 주자가 홈에 뛰어들고 있었으나 우리 팀 3루수는 아웃카운트를 늘리기 위해 1
루 송구하여 타자를 아웃시키고, 2사 후 주자는 3루가 되었다.
2사이기는 하나 상대팀 동점 주자가 3루에서 호시탐탐 홈에 뛰어들 기세다.
허나, 우리 투수 김학기가 최종 타자를 삼진으로 처리하여 굴곡 심하고 손에 땀을
쥔 흥분속의 승부는 우리 구형의 11대 10 승리로 끝을 맺었다.
끝으로 26회 못지않게, 27회는 실력을 배양하여 부고 팀과 같은 강팀을 맞이하여
선전분투 이겨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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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J에게 (26회 추기복)
J에게
모래 알 같이 많은 별들이 반짝이는 밤에 이름모를 어느 항구에서 배를 타고 어디
론가 떠나야만 하는 심정일세.
한 인간이 한 인간을 알게 되고 사귀다가 헤어진다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도 서글픈
감정밖에 남는 것이 없는 것 같네.
그래서 가급적이면 대화와 우정과 호의를 거부하려 하지만, 결국에는 미력한 인간
이라는 존재로 귀착되어, 별 도리 없이 체념해 버리고 마네.
보다 고귀하게 살려다 생을 마치는 사람, 평범하지만 생의 의미를 찾지 않고 그 날
그 날의 삶에 만족하다 생을 마치는 사람.
우리는 어느 쪽을 택해야 할까? 구형이라는 폐쇄적이고도 정이 깃든 사회.
부모, 형제, 사회, 모순, 불화를 잊을 수 있는 곳이라면 무한한 영겁의 미세한 일부
분인 우리의 삶을 후회 없이 내동댕이칠 수 있겠지.
그렇지만, 그렇지만....
나는 체념해야 할 운명적인 인간이고, 행동과 이상이 일치하지 못하는 부조리에 사
는 무기력한 인간, 노를 잃어버린 보트는 물결을 역류하게는 되지 못할 뿐더러 그
물결의 흐름에 순응하고 만다네.
의지가 약한 인간은 현실의 흐름에 무기력하게 따를 수밖에 없지 않겠나?
오늘 구형의 주장이던 김현룡이라는 친구가 군대에 갔다네.
늦잠을 자다가 전화 벨소리에 벌떡 깨어서 세수만 하고 D다방에 급히 갔다네.
몇 모이지 않을 쓸쓸한 자리에서 11시부터 저녁 7시까지 서글픈, 정말 서글픈 동석
을 하다가 마지막 남은 기계화된 현대인들의 비장의 무기를 친구를 위해서 물 쓰듯
이 희사했다네.
물론 술집이었지만...
그리고 나서 위, 아래 주머니를 모두 뒤져 남은 잔돈을 끌어 모아 학창 시절 중에
는 마지막 대할 친구에게 은하수 한 갑을 쥐어 주었다네.
항상 믿음직하고 사내답던 그 놈도 마지막 악수를 하고 막상 차에 탈 때만은 술기
운인지, 돌아서서 눈물을 흘리더군.
물론 나도 눈물을 흘린 것은 거짓말 같은 사실이지만...
군대라는 가장 비극적이고 강제적인 집단농장에 친구를 보내기도 벌써 여러 번인
데, 보낼 때마다 서글픈 비애와 흘러내리는 눈물을 Original부터 Cut할 수 없는 것
을 보니, 나도 어지간히 얼간이 같은 놈이고, 모래알 같이 많은 평범한 하나의 인간
임이 새삼 느껴지더군.
Circle이라는 그래도 미우나 고우나 두 햇동안 정들었던 곳을 막상 떠나게 된다
니,,,
역시 나도 갈대와 같은 연약한 인간이로군.
결국 나라는 존재는 인간 이상의, 인간 이하의 그 무엇도 아니로군.
한 햇동안 지나면서 즐거운 일, 짜증나던 일들이 수 없이 많았고 자기 희생도 상당
히 컸을 줄 짐작이 가네.
인생을 살아가면서 제 삼자적인 입장에서 배워야 할 그 무엇을 자네에게서 배운 것
같네.
선배로써 후배와 호흡할 줄 아는 인간이 되어주길 바라네.
靑馬의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다.” 라는 말이 꼭 인생에 있어서의 자
기 희생을 뜻하는 것 같네.
한 햇동안 뒤에서 충분히 돌봐주지 못한 것 매우 부끄럽게 생각하네.
때늦은 인사가 되었지만 새해에는 몸 건강하고 바라는 일들이 소원성취 되길 진심
으로 빌면서 앞으로의 한 햇동안 좀 더 자기 희생을 요하네.
1974. 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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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Meeting 野談 (27회 강영일)
청순한 봄날에 구형 가족이 머스매 냄새 배제코저, Meeting을 했것다.
찾으려 한 장소는 부대 운동장...
“걸팀”과 “배이팀”으로 구성된 야구팀을 응원코자 내왕한 여학생들, 초롱한 눈동자
에 한 가지 끈줄이 눈에 비치는지 입가엔 미소가 차 있것다.
한결같이 머하게 생긴 XX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Game은 끝을 맺고 2차는 약대 뒷
산이었다.
여러 Game을 하는 도중, 이 몸의 아들, 딸, 마누라까지 얻는 중대한 시련이 닥쳤것
다.
아들놈의 시건방진 행동은 말 안 하겠지만 딸년과 마누라가 우째 잘 해보려 했지만
세상의 일이 마음 대로 안되는 지라, 연속적인 Game으로 당체 속닥해 질 수가 있
어야지.
시간은 총알 같은지라, 해는 지려하고 봇짐들을 챙기는데 끈중을 잡았다곤.
손수건 하나 잡아 나중에 찾아오라 했더니만 계집 왈, “니 것도 아닌데 왜 가지려
하는가? 어서 돌려주었으면 한다.”
이것 뭐 하늘이 모해도 분수가 있어야지,
“뭐 이런 XX가 다 있는가 생각해 봤자, 요것은 못쓰겠구나, 뭐 따라오는 맛이 있어
야지, 이건 뭐 땡기는 것뿐이고” 싶었다.
전부 하산 도중이었다.
올라올 때 부대 구경시켜줬으면 싶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지 않겠는가?
이것이야 말로 절호의 찬스, 저게 잘났으면 지가 잘 났지,
못되게 이 몸 앞에서 감히,,,, 야!
이게 또 무슨 일인고, 선배가 지고 가던 콜라병을 떠맡긴다.
선배 말은 이런 땐 모른 체 하겠구만.
안면이 안면인지라 빠른 걸음으로 운반 완료.
본 지점에 다시 와보니 있는 거라곤 나무요 움직이는 거라곤 바람뿐이더군.
그래도 생각이 나면 찾아 오것지 하고 집으로 갔는데 며칠 후 학교에 왔것다.
그러면 그렇지 지가 안 찾아 오고 배길꺼냐?
야! 이것도 착오였것다.
부대 연합 써클 중에 지가 소속되어 있는 서클 모임에 온 것이라나!
아휴! 요년, 그러면 처음부터 모른 체 할 것이지 왜 인사는 땡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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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追憶을 되새기며 (26회 추기복)
어느덧 대학 4년 중의 봄과 여름은 가고 가을이 왔읍니다.
봄날의 잊을 수 없는 일들이 추억의 일기장 속에서 하나하나 얼굴을 내밉니다.
창단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다 떨어진 글러브와 깨어져서 테이프로 감은 배트
로 연습하였던 우리들이 “Vine과의 창단 후 첫 시합” 에서 한 마음, 한 뜻으로 뭉
쳐 4대 1로 승리하였을 때, 감격어린 환호성을 외치던 일, 낙동강 가의 창녕, 남지
에서 낮에는 이글거리는 태양과 악전고투하면서 연습에 몰두하고 밤에는 고주망태
가 되어 고성방가하며 우리만의 성벽을 쌓아 올리던 그 합숙,,,,
경남 학원 26회들과의 4차에 걸친 시합에서 느낄 수 있었던 우리들만의 자기 만족
과 동료 의식, 이동수 군 환송식과 더불어 이루어졌던 “구형회보 창간호의 발간”,,,,
하나하나 그대로 넘기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봄날이었읍니다.
그러나 세월은 무심히 흘러 어느덧 여름이 되었읍니다.
경고 기별야구 시합에서의 감격어린 26회의 승리와 우승, 방학기간 중, 부산대학교
에서 가졌던 재경 부고 동문회와 용호상박의 대결에서 역전과 역전을 거듭한 끝에
11대 10의 아슬아슬한 승리.
영원한 경쟁자인 부고를 이겼다는 자그마하지만 크나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던
승리,,,,
4박 5일 동안의 서생 합숙훈련, 그 동안의 가지가지 많았던 파노라마들,
밤샘을 하고 나서 쑥 들어간 눈에 기아의 정도를 간신히 넘긴 힘 빠진 부원들의 배
팅소리.
그러나 그 중에서도 예외는 있었읍니다.
쳤다하면 항상 뒤로 홈런의 명수인 김현룡 군과 어쩌다 맞았다 하면 1백미터는 족
히 넘어가는 최수일 군, 김현룡 군의 공에 박살이 난 학교 옆집의 판자벽.
곧게 뻗어 전방에 위치해 있던 교사의 슬레이트 지붕을 엄청난 소음과 가속도로 두
들기던 최수일 군,
“제발 총무 좀 살려다오.’’
개학하자마자 등록금 횡령(?)으로 이루어진 “구형 Walkers 유니폼들”
참 그 때는 하늘 높은 줄 몰랐지.
그 뒤에 선배들과의 숱한 시합을 이기고, 지고를 몇 번씩 반복했을 것 같은 기억
들....
하나하나 그대로 묻어 버리기에는 아까운 여름 날들.
어느덧 싸늘한 가을이 오자마자 영원의 친우들이 하나씩 사라져 갔읍니다.
모두들 한결같이 좋은 놈들이었읍니다.
가을이 왔읍니다.
나에게는 가을입니다.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나에게도 의문의 여지를 주는 고뇌의 가을입니다.
왜냐구요?
세찬 바람과 눈보라가 몰아치는 겨울의 전초 기지인 가을이니까요.
어쨌든 새로운 구형에의 영광된 전진을 기원합니다.
“시간 엄수”의 구형타임과 익숙해집시다.
그리고 구형의 자기 희생에 모두 공감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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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德ㆍ靑 體典 野球記 (26회 양희권, 초대 회장)
“덕청체전” 하면 우리 캠퍼스 내에서 매년 있는 慶高 동문 대 釜高 동문의 힘과 기
를 겨루는 축제라 할 수 있다.
즉, 야구, 축구, 배구, 농구, 마라톤, 릴레이의 6개 종목에 걸쳐 서로의 실력을 겨루
는 큰 시합인 것이다.
최종 결과는 3대 3으로 비겼으나 규정상, 축구에서 승리한 부고에게 3년간 간직했
던 종합 우승의 영예를 넘겨주었다.
그러나 양교 동문의 校技라 할 수 있는 野球에서 승리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보
다 기뻤다.
물론 내가 이 글을 적는 목적도 우리 球馨 會員들이 德馨 同門의 일원으로 전원이
체전에 참가하여 야구시합을 승리로 이끌었기 때문에 그 당시의 재미있었고 잊을
수 없는 일들을 회상해 보기 위함인 것이다.
체전 당일 오후 3시에 양교 응원단의 함성과 흥분 속에 덕형 공격, 청조 수비로 야
구 경기가 시작되었다.
1 2 3 4 5 6 7 8 9 Total
덕 형 1 0 1 1 0 1 0 0 0 4
청 조 0 0 0 0 0 1 0 0 0 1
1회 초, 1번 타자 강성우 군이 타석에 들어서자마자 초구를 통타하여, 3루타를 기
록하며 초반 기선을 제압하였다.
이어 3번 타자 박동기 군의 내야 땅볼로 가볍게 1점을 선취하였다.
1회 말, 내, 외야의 완벽한 수비로 삼자 범퇴
2회 초, 말, 양 팀 다 무득점
3회 초, 1사 후 3번 타자 박동기 군이 2루타를 치자 우리 동문들의 응원은 재학 당
시의 응원을 방불케 하였다.
이어 4번 타자 김현룡 군이 너무 크게 한 방을 노리다 오히려 삼진아웃 당하였다.
결국, 2사 후 5번인 나의 차례가 되었다.
꼭 안타를 만드는 것이 응원에 보답하는 것이라 느껴져 3구째 한복판으로 들어오는
강한 직구를, 허리에 힘을 넣어 크게 휘둘렀다.
중견수 깊숙히 날아간 볼은 쉽게 잡힐 것 같았으나, 의외로 코스가 좋아 안타가 되
었고 2루 주자는 홈을 밟아 또 1 점을 추가하였다.
3회 말, 점수를 이기고 있으면서도 쫓기는 심정으로 조금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수
비에 임하였다.
이 때에도 차성우 군, 추기복 군의 기막힌 수비에 힘입어 무실점으로 틀어막았다.
4회전에 접어들면서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하였고, 7번 정대근 군이 우중간을 가
르는 2루타를 터뜨리자, 그간 줄곳 힘찬 투구로서 청조의 타력을 잠재우던 9번 타
자 박원상 군이 절묘한 희생 번트를 하여, 거의 승부를 가르는 1점을 추가하였다.
점수는 3대 0, 드디어 전세는 완전히 우리 쪽으로 기울어진 것 같았다.
6회 초, 계속되는 열화와 같은 응원에 힘입어 8번 차성우 군이 타석에 들어섰다.
해는 어느덧 서산으로 기웃기웃하면서 그라운드에는 어둠이 찾아 들었고, 차성우
군이 친 유격수 앞 땅볼을 상대 수비수의 에러로 차성우 군이 1루 진출하였다.
이어 1번 타자 강성우 군의 2루 땅볼과 연이은 에러로 결국 차성우 군이 홈을 밟
아 승리를 확정짓는 1점을 추가하였다.
6회 말, 청조는 1점을 만회하는 데 그쳐 점수는 4대 1.
7회 말, 청조의 마지막 공격,
청조의 끈질긴 추격으로 우리는 무사, 주자 만루의 절대절명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젠 날이 거의 어두워져 공은 보일락말락하였고, 선수와 응원단 모두 흥분과 초조
감에 휩싸인 가운데 우리 내야진은 전진 수비에 임했다.
이어 나온 청조 타자의 번트 실패로 원 아웃, 다음 타자의 삼진으로 투 아웃, 아직
안타 하나에 몇 점을 허용할 지 몰라 정신이 번쩍번쩍 들었다.
청조의 마지막 타자가 타석에 들어섰으나 어두워서 볼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 때 딱 하는 소리와 함께 볼이 유격수 쪽으로 굴러갔으나 그 어두움 속에서도 우
리 팀의 명 유격수인 박동기 군이 잽싸게 볼을 포구하여 지체 없이 1루수인 나에게
송구하였다.
갑자기 내 눈 앞에 무슨 시커먼 물체가 확 다가오는 것 같았으나, 꼭 잡아내야 한
다는 일념으로 손을 쭉 뻗는 순간, 글러브에 볼이 착 달라붙는 걸 느꼈다.
최종 쓰리 아웃을 확인한 순간 나는 홀짝 뛰지 아니할 수 없었다.
이렇게 좋을 수가,,,
그 때 덕형 응원단에서는 와 하고 괴성을 지르며 서로 부등켜 안고 기쁨에 겨워했
다.
나도, 모든 선수들도 부등켜 안았다.
나로서는 최선의 노력으로 성실히 하였던 경기였기 때문에 입가에 미소가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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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野球가 남긴 榮光된 記錄들 (26회 추기복)
野球가 남긴 榮光된 記錄들
1. 홈런 더비에서 행크 아론의 유일한 경쟁자 윌리 메이스는 22년간의 화려한 선수
생활을 청산하고 은퇴했다.
그의 열광적인 야구팬들은 그가 남긴 660개의 홈런만 고이 간직할 뿐, 그는 쓸
쓸히 유니폼을 벗고 정든 그라운드를 떠났다.
2. 야구의 묘미는 호쾌한 타력에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홈런이 야구팬들의 흥미를 집중시킨다.
이 때까지의 최다 홈런은 보스턴 출신 베이브 루드의 714개이며, 혜성 행크 아
론은 713개를 날려 세기의 신기록을 눈 앞에 두고 있다.
일본의 왕정치는 625개의 홈런을 날려, 여전히 일본 야구의 홈런왕으로 군림하
고 있다.
우리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재일교포 장훈 선수는 330개의 홈런을 기록 중이다.
대신 그는 타율 부문에서는 일본 타자들에게는 불멸의 기록이 될지 모르는 3할
8푼3리4모의 타율을 1970년대에 기록했었다.
그의 앞으로의 활약에 큰 기대를 걸어본다.
3. 고교 야구의 4번 타자 김용희, 대학 야구의 4번 타자 허구연(고려대 재학 중),
대표 선발 4번 타자 박영길(한전 재직 중) 선수들은 모두 모교 출신이자 팀에서
4번을 치고 있어 가슴이 뿌듯하다.
우연이 아니고, 역시 야구 명문교다운 면모를 과시한 것이 아닐까?
4. “최다 홈런”은 앞서 말한 바 있는 베이브 루드의 714개이며, “한 게임 최다
홈런”은 지미 팍스가 기록한 5연타석 홈런, 과연 놀랄만한 기록이다.
5. “초 장거리 홈런”은 역시 베이브 루드가 기록한 178.92Meter(540Feet)이다.
“한국의 장거리 홈런”은 한일은행의 김응룡 선수가 기록한 148Meter이다.
6. “다이아몬드를 한 바퀴 도는데 최단 속도”는 에반슨 스완슨이 기록한 13초
3이다. 보통 한국 선수들은 다이아몬드 한 바퀴 도는데 약 18초~20초 가량 소요된다.
7. “한 게임 최고 관중 수”는 다저스와 화이트 삭스간의 월드시리즈 5차전에 입장한
9만 2천명, 현재 우리나라 유일의 잔디 야구장인 서울운동장 야구장은 관중 수용
능력이 2만여 명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그 때의 관중 수를 짐작할 수 있 을 것 같다.
-, 잠시 쉬어가는 곳
운명은 변화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 방법을 관철하려 한다면 신이 준 운명과
인간의 자유 의지가 일치할 때에는 행복하게 되고, 일치하지 않을 때는 불행하
게 된다.
운명은 정중하게 다루기보다는 난폭하게 취급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운명의 신은 여자이기 때문에,,,,,,<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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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하계 합숙 : 진하 해수욕장 (27회 박원재, 5대 주장)
4박 5일간의 고행(하계 합숙훈련)
1973년 8월 16일 아침, 첫째 날,
날씨도 좋고 기분도 만점, 장비를 챙겨 부산 역에 도착하니 7시 50분, 아무도 보이
지 않는다.
8시까지 나오기로 했으니 몇 명 보일만도 한데,,,
8시 30분까지 그럭저럭 모여 기차에 오르니 모두 10명, 8시 50분 부산 역 출발,
금빛 같은 아침 햇살을 헤치고 기차가 미끄러지듯 나아가니 차창 밖으로는
동해의 푸른 물결이 넘실거린다. 지금부터 고행이 시작되는가 보다.
서생 역에 도착, 장비를 점검하고서 버스를 타고 진하 해수욕장으로 향하던 중에
어떤 아주머니와 방 계약이 이루어진다.
점심 후, 선동 초등학교에서 모처럼 한 달 만에 연습을 하니 몸이 굳어 에러가 속
출, 첫 날 연습에서 기구 파손이 너무 컸다.
배트가 2자루나 부러졌고, 남의 집 담장이 떨어져 나갔으니, 총무인 기복 형의 간
담이 써늘했을 것이다.
연습중지! 대책을 강구해야 했기에 프리 배팅을 없애기로 하고, 주장인 성우 형 아
이디어로 탄생한 세미 프리 배팅으로 전환.
그 날 밤, 노름판이 벌어져 모두 참가했으나 대거 탈락, 끝까지 밤을 센 위대한 노
름꾼인 대근 형, 기복 형, 현룡 형에게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덕분에 이튿 날 연습에서는 떡이 되었지만,,,,
17일, 둘째 날,
어제와 마찬가지로 반찬 쟁탈전이 전개, 무사히 식사를 마치고서 태풍에도 불구하
고 연습.
덕분에 오후 연습이 없어, 노곤한 몸을 자리에 뉘었으나 잠은 오질 않고 태풍 아이
리스의 숨소리만 거칠게 들려온다.
이 마을은 모래로 덮혀 있어 바람만 불면 모래가 온 동네를 휩쓴다.
그 날 밤부터 또 하나의 걱정거리가 생겼다.
“앵” 모스키토 편대의 공격, 아무리 무찔러도 소용이 없다.
자포자기 상태에서 잠이 들었다.
“우리에겐 내일이 없다, 내일이야 어찌되든 잠이나 자자. 모기넘들이여!”
이 약하디 약한 몸에서 무엇을 바라고 덤비나이까? 부디 살펴주옵소서!
18일, 셋째 날,
아! 내 사지가 폐허가 되었구나.
공습 받았던 곳을 점검하니 팔, 다리, 몸에 평균 10군데씩, 아침에 찬거리를 장만한
답시고 바다에 낚시하러 갔으나, 아직 파도가 세어서 고기가 잡힐 것 같지 않았다.
사람은 빈 손으로 왔다, 빈 손으로 간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 모양이다.
형태가 “라일락의 야구 도전장”을 가지고 찾아왔다.
1,500원의 내기를 걸고, 마침 심심하던 차에 이에 응수, 7대 2로 떡을 만들었으나
콜라 한 병으로 협상, 기분이 나빴으나 점잖은 사람들이 돈 몇 푼에 아웅다웅할
수도 없고, 순순히 수락하였다.
오늘 저녁에도 공습이 있겠지.
그 날 저녁, 한 차례의 술판, 한 차례의 쇼판이 벌어졌다.
19일, 넷째 날,
아침 일찍, 구보 코스로 폭포를 방문한다는 꿈은 사라지고, 9시까지 모두 큰 대자
로 뻗어 주무시니, 오늘 연습도 공쳤군.
그럭저럭 아침을 들고 연습하러 갔으나, 모두 축 늘어져 연습에 막대한 지장을 초
래, 일찌감치 귀가하였다.
오후 연습을 마치고 밖으로 나갔다가 우연히 세현이를 만났다.
끌고 집에 들어오니 모두 반가운 모양이다.
그 날 밤도 딴 밤과 마찬가지로 공습은 시작되었다.
원규 형이 모기장은 쳤지만 너무 더워 나와 잤더니 모기의 레이더에 걸린 모양이
다.
새벽 3시부터 뜬 눈으로 새웠다.
20일, 다섯째 날,
식량도 떨어지고 모기 습격도 심해서 합숙 일정을 하루 줄이기로 하였다.
마지막 연습이라 그런지 모두 열심히 하는 눈치다.
마지막으로 수영도 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기념 촬영과 더불어 장비점검을 끝내고
버스를 타고 나오니 무슨 미련이 남는지 자꾸 뒤돌아보고 싶어진다.
서생 역에 도착하니 영호가 기차에서 내린다. 아슬아슬하게 만났다.
하마터면 죄 없는 녀석 고생시킬 뻔했군.
기차를 타고 해운대에서 내려 음식점에 들어갔다.
주장 성우 형과 기복 형이 나갔다 들어오니 기복 형 시계가 없어졌다.
어디 갔다 왔는지 알만하다.
고마운 마음이 앞선다.
버스를 타고 오면서 모두 아쉬워하며 헤어졌다.
집에 도착하니 며칠간 쌓였던 여독이 잠을 몰고 온다.
아! 자자, 모든 상념을 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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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구형의 내일 (26회 김현룡, 4대 주장)
球馨의 來日 (한 해를 돌아보며)
금번 73년도를 총 결산할 신문을 발행하게 됨을 대단히 기쁘게 생각합니다.
돌이켜 보건데 구형이 창단된 지 어언 2년이 되었읍니다.
야구라는 특수한 관계에 의하여 맺어진 우리 클럽은 처음에 많은 저항감도 있었고
운영상의 어려움, 장비 문제 등으로 트러블이 많이 있었읍니다.
허나 우리는 경고 동문이라는 자부심과 야구의 매력에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가
있었읍니다.
이제 초기의 어려움도 많이 사라지고 내일을 위하여 좀 더 비약할 때가 되었읍니
다.
저는 4대 주장 직을 떠나는 마당에 회원 여러분에게 부탁, 아니 부탁이라기보다
지난 1년 동안 보고 느낀 것을 몇 자 적어볼까 합니다.
야구란 신성한 운동입니다.
놀고 즐기기 위한 운동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신성한 스포츠 정신은 물론이고 신사도, 자기 희생, 단결심, 꾸준한 노력과
굳건한 정신력이 필요한 운동입니다.
여기에 하나의 사회적 윤리가 뒤따르고 있읍니다.
그러나 기실 이것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는 분은 몇몇 되지 않으리라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에 목표를 두고 나아가야 하겠읍니다.
대학은 자유로운 곳입니다.
그런데 구형에는 철저한 명령 계통과 책임감이 뒤따르고 있읍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반 생활에 연장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다음, 구형 3기 회원이 입단하면 이 저항감을 어떻게 해소시켜 운동장에서는 야수
와 같이, 운동장을 떠나서는 다정한 친구가 될 수 있도록 서로가 노력해야 되겠읍
니다.
일단 이 저항감이 해소되면 또 하나의 문제가 있읍니다.
스포츠 클럽으로써는 야구를 한다는 데에 모든 의미가 있읍니다.
그러나 야구인으로써 갖추어야 할 기본기는 누구나 갖추어야 하겠읍니다.
누구나 각기 개인적인 특징이 있읍니다.
잘한다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기본기가 모자라는 회원들을 보아 왔읍니다.
그 중에 저도 한 사람 입니다만 일단 우리가 야구를 위해서 모였다 하면 야구의 역
사, 미, 일의 야구 소식, 국내 실업단의 소식, 그리고 타법, 런너가 1루와 3루에 있
을 때 수비법, 코치의 싸인에 대해 진지하게 연구하는 것도 좋을까 합니다.
야구란 소재가 무궁무진하여 야구의 룰 하나하나가 일상 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
는 것을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두서 없이 되는 대로 몇 자 적어보았읍니다.
지난 1년 동안 성심껏 최선을 다해 왔읍니다마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 것 같읍
니다.
이제 저는 여러분과 작별을 고하고자 합니다.
1년 후, 3년 후, 혹은 영원히 만나지 못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훗날 다시 만나서 한 게임하고 자갈치 시장에서 한 잔 할 때를 기다리면 이만,,,,
구형의 발전과 회원들의 건강을 빌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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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구형의 얼을 (26회 정대근)
구형의 얼을!(야구하는 마음)
떠나는 이는 항상 슬퍼하며 무엇을 바라는 모양이다.
경고를 졸업하고 부산대학교에 들어온 우리들은 자신들의 무력함을 숨기고, 경고의
얼을 살리기 위하여 뜻이 맞는 이들이 모여서 야구를 하고 술잔을 기울이며 항상
헤매는 생활을 하였었다.
절름발이 사회생활이니, 퇴폐적인 모임이니, 술이나 처먹는 탈선 행위로 가득한 모
임이니 하고 많은 비난을 받기도 하였지만 우리들은 관계치 않고 구형을 사랑하여
왔다.
이러한 우리에 속하여 함께 조류를 형성한 지가 어언 2년, 떠난다는 마음을 가지고
되돌아 볼 때 항상 내 곁에 따라 다니면서 나를 위로해 주고, 나의 고민을 해소시
켜 주며, 나의 꿈을 키워 주던 다정한 벗들이 생각난다.
다 떨어진 글러브, 헐은 야구공, 부러져 못 박은 배트, 그리고 우리들의 귀향지인
그라운드.
비록 도피의 집적이었고 나의 합리화였을지는 모르지만 불만투성이로 뭉쳐진 현재
를 낭만적인 과거의 꿈 속에 다시 젖게 할 수 있는 시간을 스스로 얻을 수 있는 것
이고 보면, 이것으로도 나는 만족할 수 있었으며 미래를 위한 준비 단계가 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은 변하고 모임은 이루어져 있는 회원들의 생각에 따라서 목적은 달라
지는 것일까?
지난 해 땐 여학생 얘기를 하면 타락했니 하고 떼라곤 하였는데, 이제는 구형에서
미팅을 하고, 나아가서는 여회원을 모집하는 것이 어떠냐고 할 정도이니, 물론 나도
이러한 생각에 동의를 해야 하겠지.
학생이니깐 수업을 열심히 듣고, 머스마들끼리는 너무나 딱딱하니까 부드럽고도 상
냥한 여자라는 것도 필요하겠지.
묻고 싶다.
구형이라는 곳이 어떠한 모임인가를!
다만 야구를 즐기기 위해서인가? 야구를 잘하기 위해서인가? 딴 팀과 시합해서 이
기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우리들은 교수의 고리탑탑한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 수업도 빠트리고 구형에서 야구
를 했다.
한 놈은 던지고, 한 놈은 받고, 한 놈은 치고, 한 놈은 달리고, 또 뜨거운 태양을 인
식하였는지, 비웃는 자가 있다는 것을 알았는지, 마치 태양이 너무 뜨겁기 때문인
것처럼 상을 찌푸리며 우리들은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였다.
한 놈이 두 놈, 두 놈이 세 놈, 네 놈, 다섯 놈,,,,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그리고 길 옆 술집에서 수많은 주정뱅이들의 입술이 스쳐간 이 빠진 사발에다 나의
입술을 맞추며 나는 미쳐간 것이었다.
우리들은 미쳐갔고 모든 것은 미쳐 있었다.
이러한 것들이 모방에 찬 행동이고 비사회적이고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이제는
구형에서도 그렇게 생각되니, 우리들은 야구를 잘 하기 위하여 야구를 한 것도 아
니고 잘 하였기 때문에 하였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야구를 좋아했기 때문에 야구를 했던 것이다.
그러면 우리들이 야구를 좋아하게 된 것은 무엇때문이었을까?
우리들에게 있어서 야구란 어떠한 존재였을까?
그것은 운동도, 오락도, 자랑꺼리도, 또한 위선도 아니었다.
우리들의 야구란 그 목적을 모른다고 정의하는 것이 더 바른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구형! 구형! 파이팅!을 외쳤을 따름이다.
모르겠다.
다만, 우리들은 야구를 좋아했고, 야구를 사랑하여 왔다.
그리고 오늘도 우리는 야구를 한다.
우리들의 꿈을 향해 던지고, 쏟아지는 비웃음도 받아 넘기면서 불만투성이의 현재
를 쳐 날려 보내고,
그리고 이상을 향해 달려갈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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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利害관계를 초월한 精神的인 支柱를 위하여 (26회 차성우)
그윽히 빛나는 초생달과 외로운 샛별을 벗 삼아 운동장을 오르내릴지 어언 2년이
흘렀읍니다.
혹독한 추위도 우리의 정열을 능가하지 못하였고 뜨거운 태양도 우리의 기개를 추
월하지 못하였읍니다.
여기 정열과 패기를 가진 구형인은 영원이 날으는 打球를 원하였고, 영원히 정지하
는 打球를 원하였읍니다.
知性的인 운동을 통한 우리들은 진정한 기쁨을 만끽하였고, 영원히 날으는 공, 영원
히 정지하는 공을 따라 기다리고 질주하여 忍을 배웠고, 强을 알았고, 力을 얻었읍
니다.
까다로운 규율 속의 생활에서 탈피한 우리는 방황하고 배회하며 구형이란 크나큰
안식처를 얻었읍니다.
확고한 구형의 我城을 구축한 우리는 원시안적인 통찰력으로 앞으로 전개될 삶의
대국에 중요한 포석을 완수하였읍니다.
어떠한 사물, 어떠한 집단이던지 간에 모든 것에는 장점이 있으며, 그에 반한 약점
도 지니고 있읍니다.
그러나 그런 약점도 확고한 이념과 서로 흘러 통하는 脈이 있으면 극복할 수 있고
장점은 더욱 계승되어 훌륭하고 실속 있는 열매를 맺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2년이라는 짧은 기간이지만 구형은 역풍에는 대처하고, 순풍에는 돛을 달아
오늘까지도 이렇게 푸르고 탄력있게 생존하고 있읍니다.
물론 경제적인 곤란과 시간적인 어려움도 있으며 그외 많은 문제점들이 있었지마는
구형은 꾸준히 발전했던 것입니다.
위와 같이 많은 곤란함을 딛고서 일어나 하나의 전환점을 마련한 구형인들은 理念
과 情으로 뭉쳐진 것을 인식하며 게으르고 나태한 자에게는 적이었던 뜨거운 태양,
혹독한 추위를 우리에게는 한 편이자 동료로 할 수 있었읍니다.
우리는 계략적인 포용이 아닌 구형에서 풍기는 포용력과 도량을 가지고서 만인이
관심있게 주시하는 선구자로서 성실하고 거짓 없는 마음으로 구형의 모임이 아까운
시간의 낭비가 되지 않도록 서로 이끌어 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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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모든 것의 기본이 되는 사실도 모르고서 (26회 박원상, 2대 주장)
모든 것의 기본이 되는 사실도 모르고서
과연 나는 구형 속에 어떻게 살아왔던가?
괴로움, 고민이 응결되어 있는 영혼들과 항상 접촉해 왔고(뛰어 놀았고), 정결한 영
혼들과 항상 마셨다.
그리고 집단으로 충실하였고 내 나름대로의 주관으로 행동을 했지만 지나서 생각해
보니,,,,,,,, ,,,,,, ,,,,,,, 수 있는 길을 더 넓히고 빨리 갈 수 있도록 또 다시 만들었
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왜냐구? 하고 묻지 말고 그저 그런 게 있었구나 하고 인정만 해주면 되는 것이다.
사실이지 집단을 창립할 때 모든 집단과 마찬가지로 그 때 당시는 나중에 이 집단
이 자신의 골을 더 썩게 만들고 부패하게, 정말 골속을 들여다 볼 수 없을 정도의
더러운 행위를 골속에서 하리라는 것을 나 자신은 몰랐다.
이제 나는 그런 쓸데 없는 짓을 하지 않기로 계속 채찍질하고 있지만, 나 자신의
나약함 속에서 어쩔 수 없이 행하고 있다고 때때로 느끼고 있지만, 항상 반성해 가
는 마음과 그에 따른 행동을 직접 할 수 있게 나 자신의 마음속에 믿고 있는 것이다.
언제나 말이다.
절제와 몰두의 갈림 길에서 수용과 거부의 두 상태에서 취할 바를 그래도 나 자신
이 생각한 바 대로 선택하고 그대로 행했지만 역시 마음속은 결코 안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느낄 때 무언지 자신이 불완전한 미약한 인간임을 알아챘으나, 남도
자신과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즉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것에 약간의 힘을 입어
나는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아직 나 자신도 돌보지 못한 인간이 어찌 남의 일에 간섭할 수 있는가 하여, 자신
의 길을 먼저 닦기로 하여 내 스스로의 야구도 계속 연마해 나갔던 것이다.
역시 인생과 마찬가지로 남는 것을 공과 허무로만 마음에 남고 육신에 남은 것은
피로와 상처와 쓰라린 고통만이 남았다.
정말 망설여진다.
그리고 모르겠다.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몸을 던지는 우리 인간 말이다.
나는 누구에게든지 소매를 부여잡고 묻고 싶다.
“잊고 사는 게, 모르고 사는 게 좋을까? 아니면 알고서 사는 게 좋을까? 아니면 그
중간쯤을 택하는 게 좋을까?” 하고 말이다.
어떻든 좋다.
나는 다시 내 자신에게 묻는다.
“구형 속에서 너는 어떻게 살아왔던가?”
그러자 곧 어디선가, “너는 모르고, 그냥 잊어버리려고. 아니다! 너는 아무것도 모
르면서 너 주위의 커다란 시선을 의식했기 때문이다.”라는 외침이 마음 속으로 파
고 들고 있었다.
글 전체에 흐르는 어둠을 여러분에게 빛으로 읽어 달라는 것은 아니다.
역시 나 자신은 어둠 속에서 항상 살아왔고, 살아갈 것이다.
빛을 그리면서 말이다.
자 여기 또 하나의 갈림길에서 맹목적으로 외쳐본다. 구형! 구형! 이라고 말이다.
미친 개자식 같은 자식이라고 나에게 말해 줄 자가 있다면 나에게 와서 말하라.
나는 왜 여러분이 미치지 않는지 그것을 알고 싶다.
이제는 구형의 앞날을 위하여 한 번 외쳐볼까?
제기랄! 구형 부서져라!
참 어떻게 살아왔더라?
아, 모르고 살아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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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알찬 결실을 맺자 (26회 양희권)
캉 - ! 이게 무슨 소리일까요?
이 회보를 보는 많은 분 중에서도 유독히 그것을 재빨리 알아차린 분들이 있겠죠.
그건 바로 우리 구형회원들일 것입니다.
더욱이 배트에 공이 맞을 때 나는 단순한 금속성의 쾌음만이 아닌 여기에 사내들만
이 느낄 수 있는 정이 깃들여 있다는 점을 강조해 두고 싶읍니다.
대학생이라면 흔히 느낄 수 있는 유들유들 하다는 그런 이미지를 배트로 쳐서 날려
버리고 마음껏 그라운드를 누비며 대지의 맑은 공기를 호흡하고는 땀에 흠뻑 젖은
몸과, 갈증으로 말라버린 입술을 한 잔 술로 녹이면서 잠시나마 현실을 망각해 버
릴 수 있었던 아름다운 옛 추억들을 돌이켜 보면서 “우리들의 바램이 무엇이었던가
를 다시 가슴 속에 아로 새겨보자.”고 외치고 싶읍니다.
돌이켜 보건데, 우리네들의 성장 과정은 마치 새하얀 눈 위를 지나온 발자국 간이
또렷하기만 합니다.
하지만 눈은 언제까지나 녹지 않고 있을 수만 없는 것, 이제 서서히 녹아 들어가고
있는 것 같읍니다.
따라서 우리네들이 만들어 놓은 발자국이 희미해지고 있는 것을 구경만 할 수 없읍
니다.
다 함께 힘을 모아 손이 시리더라도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먼 훗날 후배들에게 훌륭한 귀감이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결코 잊어서는 안될 우리 구형의 염원을 달성할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내들이 학생이란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
다. 결코 구형이 학문에 흥미를 잃은 사람들의 도피적인 모임이 되어서는 더욱 안
될 것입니다.
지와 체를 겸한 우리들이 있으므로 해서 더욱 더 보람 있어야 할 구형이 아닙니까?
먼 훗날 즐거운 삶을 위해서 당면한 어려움을 이겨냅시다!
이것이 구형인의 참다운 멋이 아니겠읍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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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동창회장 격려사 (25회 張 大 洛)
구형회보 제2호 발간을 맞아 지면을 이렇게 할애받게 된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
각합니다.
상당한 이상을 가진 집단이라고 자부한다면 그 집단의 구성인자인 일개인은 그것을
성취시킬 수 있는 상당한 가능성을 가져야 함은 물론이며 또한 일개인은 자기가 속
해있는 집단이 추구하고 있는 바의 가치를 추리, 판단, 분석, 적용하는 소위 가치
종합을 행해 나갈 때(자기의 그것과 상응하느냐를 반문해 보면서) 신봉할 만한 상
당하고 충분한 유효성이 있다고 판단, 느껴져야 할 것입니다.
물론, 본인은 적어도 구형은 모든 면에 있어서 합리적 조화체로서 믿고 마음을 놓
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다소의 불합리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여하히 자부할 수
있는 만큼의 지향적인 가치를 추구, 확립해 나가고 있느냐 일 것입니다.
구형의 경우라면 단순한 취미인 야구를 계기로 경고인들끼리 뭉쳐졌슴은 우선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본인이 너무 경고인이라는 말에 현혹되어 과욕을 부리는가는 모르지만 상호
간에 종교의 영역을 넘고 가치관과 인생관을 경건한 태도로 서로 주고 받을 수 있
는 대화의 광장이 되어 구형을 발전시키고, 더하여 부산대학교에 재학하고 있는 경
고인들을 이끌 수 있고 나아가 부산대학교와 전 민족이 발전할 수 있게끔 투신할
수 있는 용기와 역량과 소임을 개발시킬 수 있는 창조적 보금자리가 되게끔 구형인
들은 협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구형인은 구형인 개개인을 이끌고, 구형인들은 구형의 실제 발전을 위해 유연하고
창조적으로 협력해야 할 것이며, 이 사회 전체의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영역에
걸린 올바른 가치 질서를 확립하는데 창조적으로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더욱이 본인은 어떻든 구형이 수련과 수덕과 수양으로써 “무엇에 대해서, 무엇을
위해서”를 제시하지 못함을 퍽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객관 세계에서의 어떤 성취를
위해 봉사하고 창조하고 생산하여 줄 것을 조야한 입장이지만 간곡히 부탁드립니
다.
물론 구형과 구형인들은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지속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무한한 구형의 발전을 기원하며 지난 날 동문회의 활동 기틀이 되어 주신데 대하여
새삼 심심한 감사를 드리며 앞으로도 피나는 협조를 기대하면서,,,,,,
감사합니다.
197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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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4부작 야구소설 “끝임 없는 戰場” (26회 하원규)
제1부 : 불타는 신념을 모교에 맡긴 채
“아버님, 꼭 이겨서 돌아오겠읍니다.”
자신감에 넘쳐 말하는 유동식의 눈은 영광을 약속이나 한 듯, 영롱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그 약속은 슬픈 약속이었는지도 모를 그런 약속이었다.
“그래, 이 두 손으로 우승컵을 만지고 싶구나. 만약 동식이 네가 결승전을 치르게
될 때에는 이 아비가 직접 올라가 응원할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말하는 그의 아버지는 야구하는 아들이 무척이나 대견스러웠다.
전에는 운동선수라면 질색이었던 그였지만, 그는 동식을 너무나 믿었기 때문에 배
를 곪아가며 집안에 있는 쌀까지 팔아서 아들의 스파이크를 맞추어 줄 정도로 야구
광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동식의 아버지는 후회하지도, 슬퍼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그는 노력 끝에 보람을 찾은 것이다.
그의 아들 동식은 부산에 있는 야구 명문교 D고교에서 없어서는 안 될 투수로 성
장했기 때문이었다.
D고교와 부산의 영예는 동식의 오른쪽 어깨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로 그는 고교 야구의 슈퍼스타가 된 셈이다.
동식의 아버지는 미리 쪄 놓았던 시루떡 열 서너개를 싸주면서,
“동식아, 시합 전에 한 개씩 꺼내어 먹으며 어미를 생각하고 꼭 이기고 돌아오너
라.”
그의 눈은 동식이보다 더 기대와 희망에 부풀어 올랐다.
그 날 오후 6시, 우리는 서울행 준급행 열차 맨 마지막 칸에 자리를 잡았다.
역에서 교장 선생님과 학교의 몇몇 간부들이 손을 흔들었지만 그의 머리에는 아버
지의 영상만이 맴돌고 있었다.
“나를 위해 생을 포기하신 아버지, 결코 이기고 말겠읍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장
하고 떳떳한 아들의 영광된 모습을 보여드리겠읍니다.”
그는 다시 한 번 필승을 다짐하는 것이었다.
기차는 오곡이 익어가는 푸른 10월의 들판을 달리고 있었다.
열차 한 칸을 독차지 한 D고교 야구선수들이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기분으로
들떠서 부르는 노래인지 고함인지 모를 소리와 기차바퀴의 굉음이 그의 귓전을 울
렸으나, 그는 다만 승리를 다짐할 뿐, 침묵한 채로 창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술은 자기가 제일 잘 먹는다고 큰 소리치고는 제일 먼저 나가 떨어지는 병철이가
“요번에 맹호기 대회에서 우승하면 저번에 본 해운대 진주집 아가씨와 더불어 주
거니 받거니 하면서 기분 한번 내어 볼란다.” 하고 지껄이고 있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말썽꾸러기 정무가 대뜸 말을 받았다.
“그러면 나는 옆에 있다가 병철이가 술 먹고 뻗으면 그 아가씨 데리고 신혼여행이
나 가볼까?
어디가 좋을까? 제주도가 어떻냐? 마이애미는? 이불 밑은?”
그러자 마자 온갖 상스럽고 더티한 욕이 오가고 차 안은 더 시끄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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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 승승장구의 북은 울리고
서울 역에 도착 즉시 미리 정해놓은 명성여관에 들었다.
처음 본 서울이었기 때문에 서울은 더욱 그에게 생소하고 어떤 면에서는 신비스럽
기까지 했다.
기찻간에서 떠들었던 병철이와 그외 몇몇도 이부자리에 눕자마자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송 감독은 내일부터 치를 경기 때문에 머리를 싸매며 배팅오더 하며 작전에 골머리
를 앓고 있었다.
감독으로 취임한 이후, 지방예선 통과가 처음 있는 일이어서 타 도 팀들이 실력과
작전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는 고심해야 했다.
송 감독은 여관 밖 벤치로 동식을 불러내었다.
“동식아, 각오는 되어 있겠지?”
“예”
짧지만 결의에 찬 대답이었다.
송 감독은 말을 이었다.
“너는 우리 팀의 기둥이야, 우리의 학교의 명예가 온통 너에게 달려있다는 것을 명
심해 둬. 우리 팀에는 올바른 투수가 없기 때문에 이번 맹호기 야구대회는 네가 완
투해야 승산이 있다. 알겠지?”
“예, 최선을 다하겠읍니다.”
동식은 송 감독이 자신을 그렇게 인식해 주니 반가왔으나, 한편으로는 그의 어깨가
무거워 옴을 새삼 느꼈다.
그 가을 날, 전주 T고교와의 첫 시합에서 동식은 호투에 호투를 거듭하여 안타 2개
로 T고교를 2대 0 셧아웃시켰다.
그 다음 게임인 충청도 명문 P고교와의 대결에서도 D고교는 동식의 완투에 힘입어
1대 0으로 신승하여 동식의 이름은 일약 유명해져 갔다.
다음 날인 10월 11일자 신문에는 제각기 동식의 사진과 활약상이 알알이 박혀있었
다.
대강 훑어보면 다음과 같았다.
“타자에게 경악스러울 만큼 빠르고 위협적인 초강속구가 솟아오르는 황금의 오른
팔”
“인도와도 바꿀 수 없는 신기의 유동식 투수” 등등,
고교선수의 진로는 전통적으로 결승전에서 결정되곤 하였기 때문에 결승전을 하루
앞둔, D고교 선수는 모두 온갖 벅찬 감정에 젖어있었다.
하물며 승리의 역군인 동식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모든 것은 최선을 다 한 후 말할 수 있다.
나는 나의 모든 장래와 그리고 아버지의 장래가 내일의 결승전에 달려 있다는 것을
너무도 명백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꼭 이겨야 한다.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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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 영광의 다이아몬드에 비운의 전보
그 날 저녁 내일의 결전을 위해 충분한 수면을 취하라는 송 감독의 말에도 불구하
고 동식을 비롯한 몇몇 선수들은 가슴이 설레어 잠을 못 이루고 몸을 뒤척였다.
그들이 잠이 든 것은 새벽 2시경이었다.
송 감독은 밤새 책상머리에 앉아 도식까지 그려가며 내일의 결승전에 대비하여 선
수들의 포지션과, 서울의 H고교 팀과 딴 팀과의 대전을 분석하며 H고교 선수 개개
인의 성적과 타율 등을 일일이 체크해가며 작전에 몰두하였다.
내일의 승리는 우리의 타선이 H고교 팀의 황영두 투수를 얼마나 공략하느냐에 달
려있다.
그리고 서울 올라와 타율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는 오영명이는 베스트 나인에서 빼
고 신인 철오를 기용한다.
그리고 나머지는 동식에게 맡긴다.
작전 계획이 끝났는지 그는 담배를 한 개피 피워 물었다.
드디어 결승전의 아침 해는 떠올랐다.
“기상”
송 감독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선수들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들은 오늘의 결전에 들떠서 긴 밤에 잠을 깊게 잘 수가 없었던 것 같다.
시계는 아침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송 감독은 여느 때와 같이 선수들을 아침 트레이닝을 위해 로드워크를 시켰다.
외야수 영식을 필두로 선수들은 여관을 빠져 나갔다.
그들의 뜀걸이는 무척이나 경쾌해 보였다.
그들이 나가고 약 30분 가량 되었을까?
어제의 작전을 되뇌이고 있는 송 감독의 105호실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구십니까?”
거의 반사적으로 그는 대답하였다.
“급한 전보예요.”
심부름 아이의 잠이 덜 깬 듯한, 그렇지만 몹시 급한 목소리에 그는 놀라면서도 학
교나 부산에서 보내온 축전이려니 생각하면서 전보를 받아보았다.
순간 그는 온 몸에 식은 땀이 흘렀다.
아니 온 몸에 전율을 느꼈다고 표현함이 옳을 듯 싶다.
전보 내용은 “아버지 교통사고 매우 위독, 급히 하향 바람”이었고, 수신인은 서울특
별시 서대문구 서소문동 1-48, 명성여관내 유동식, 발신인은 경남 동래군 이윤정,
수신인은 분명 유동식이었다.
“아 어떻게 해야 하나? 동식이 없이 우리는 결코 이길 수 없다. 그렇다고 이런 사
실을 숨길 수는 없지 않은가? 신이여! 이건 너무 가혹한 형벌이 아닙니까?”
“이런 결전의 순간에서 선과 악을 결정해야 함은 나에게는 너무 벅찹니다.”
“이때까지의 피땀어린 노력과 승전고를 대가 없이 버려야 합니까?”
“동식은 우리의 보배입니다. 장래를 약속받은 아이입니다.”
“신이여! 당신은 도대체 선인입니까? 악인입니까?”
“이처럼 착한 동식을 보살펴 주지 못하는 것도 운명입니까?”
이렇게 그는 눈물겹도록 호소를 해 보았지만 결국은 소용 없는 일임을 깨닫고 혼자
결심했다.
“운명의 도전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도전이 너무 클 때는 망하고 마는 것
이다.”
“어차피 모든 것은 운명에 맡겨져 있다.”
“그렇지만 망하느냐, 흥하느냐는 도전과 운명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삶을 위해서 신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동식의 모든 운명은 나의 손에 달려있다.”
“지금 나는 제 3자의 입장이 아니다.”
“나는 엄연히 동식의 보호자로써, 그의 장래에 대해 책임이 있으며 그에 따라 학교
의 명예도 무시해서는 안된다.”
지금 이 시각에도 동식 아버지의 혈압은 떨어지고 있다. 괴롭고 애처로운 방황의
시간이었다.
한 말로 말해 송 감독은 해야 된다는 필연과 해서는 안된다는 부정 속에 헤매었다.
이윽고 그는 결단을 내렸다.
“아버지를 위해서 아들을 희생시킬 수는 없다. 사람의 목숨과 한 시합과 바꿀 수는
없지만 동식이가 간다고 해서 죽을 사람이 살아날 방도는 없지 않을까?”
“동식이도 아버지의 생전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겠지만 할 수 없는 일
이다.”
“그렇다고 아직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도 아니니까, 살아계실 수도 있다.”
“그러나 동식이의 운명은 다시 올 수 없다. 동식이의 장래를 위해서 이 전보는 없
애야 한다.”
그는 이렇게 결심하고 나서, 죽음을 각오한 사병과 같이 비장해졌다.
그는 결심을 하고 나니 속이 후련해졌다.
그리고 몇 분 후, 로드 트레이닝에서 동식을 선두로 선수들이 하나, 둘, 여관에 돌
아왔다.
결승전은 오후 6시 무궁화 구장에서 나이트 경기로 벌어지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남아있었다.
시합을 대비한 연습을 위해 송감독을 비롯하여 선수들은 보조 운동장을 향해 택시
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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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부 : 마운드에 우승과 생애를 걸고
연습에 열중한 나머지 송 감독은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다.
아니 일부러 모든 것을 잊기 위해서 오로지 그는 연습에 열중하였던 것이다.
4시부터 관중은 운동장에 모이기 시작하였다.
H고교 응원단들은 대대적으로 동원되어 외야 스탠드의 삼 분의 일 가량을 점거하
고 있었고, D고교 응원단들은 3루측 덕아웃 오른 편에 약 30명 가량 있었다.
그 중에는 부인과 가족을 동반한 사람도 몇 명 눈에 띄었다.
정각 6시가 되어 휘황한 나이트 불빛 아래 양교 선수가 입장하고 상례적으로 페넌
트를 교환하고 다음에 심판의 주의사항을 들은 후, 불펜에 집합하였다.
송 감독은 선수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절대 당황하지 마라. 심판의 편견은 각오해야 한다. 그리고 타석에서 볼은 끝까지
골라내라.”
D고교의 선공으로 시합은 시작되었다.
송 감독의 작전은 3회전까지는 상대팀 투수의 구질을 선수들이 눈에 익히라는 것이
었다.
예상대로 선수들은 4번 타자 정무까지도 선구에만 열중하였다.
송 감독의 귀에는 거짓말같이 3만 관중의 함성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다만, 공이 배트에 맞는 “딱” 하는 소리만 들릴 정도로 그는 시합에 몰두하고 있었
다.
6회전에 들어서자 관중들의 동태는 초반의 설레임에서 흥분으로 변하여 갔다.
시합 도중 불상사가 생기면, “죽여라.” 밟아라.” 심지어는 “묻어라.”라는 말까지도
거침 없이 오갔다.
6회 말, 동식의 노히트노런에 쐐기를 박은 것은 선두 타자로 나온 H고교의 3번 타
자인 박문규이었다.
그는 동식의 초구 인코너 직구를 당겨서 좌익선을 타고 흐르는 3루타를 만들고 만
것이었다.
무사 주자 3루, H고교로 보아서는 절호의 득점 기회였다.
송 감독은 좌타자인 4번 최종길을 걸려 보내라고 작전 지시를 하였다.
물론 좌 타자는 좌 투수에 약하다는 정설대로 송 감독은 좌완 투수인 이규혁을 원
포인트 릴리프로 쓰려 하였으나 믿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주자는 무사 1,3루가 되었다.
다음 타자에게 초구를 어떻게 던지냐 하는 것이 승부를 결정지을지도 모르는 일이
었기 때문에 신중을 기하여야 하였다.
도루할 기미가 보이자 초구는 피치아웃 하기로 결정했다.
예상대로 1루 주자는 도루를 위해 질주하고 있었다.
포수의 송구가 기가 막혔다.
자연 태그로 2루로 뛰던 주자를 아웃시켜, 1사 주자 3루, 여전히 실점의 위기는 계
속되었다.
이어 등장한 H고교의 6번 타자는 동식의 빠른 볼에 삼진을 당하고 말았다.
송 감독은 일순간 한숨을 쉬었으나, 위기가 끝난 것이 아니었다.
긴장이 풀려서 일까? 긴장 끝에 해이가 오는 것은 인간망상의 철칙이런가?
이어 등장한 H고교의 7번 타자를 동식은 투 스트라익 노 볼까지 빠른 볼로 윽박질
렀다.
동식이 승부를 너무 서둘렀던 것일까?
제 3구 아웃코너 꽉 찬 볼을 중견수 앞에 떨어지는 적시타로 연결하고 말았다.
1대 0, 동식은 망연자실, 눈앞이 캄캄하여 쓰러질 지경이었다.
경기를 리드해 나가자, H고교 응원단들은 신이 난 듯 흥분의 도를 넘어 광란의 경
지에까지 다다랐다.
게임은 끝났다, 끝까지 싸워라, 그야말로 극과 극을 이루는 응원의 소리는 어둠으로
덮힌 먼 산 너머까지 메아리쳤다.
엎치락 뒤치락 열전 끝에 경기는 9회 초로 접어들었다.
4번 타자 정우부터 타순이 시작되었다.
송 감독은 어떻하든 살아만 나가라고 정무에게 당부하였다.
신은 결코 저버리지 않았다.
정무는 사구를 골라내어 1루에 진루하였다.
노아웃 일루, 기어이 실오라기 같은 동점 및 역전의 기회를 잡았다.
5번 타자 병철이는 송 감독이 철석같이 믿는 타자이었으나, 초구를 노린 것이 3루
땅볼이 되었으나 다행히 2루로 진루가 되어 결국 보내기 작전이 되 버린 셈이다.
6번 타자 명수가 볼을 잘 골랐는지, 아니면 상대 투수가 긴장하였는지 사구를 골라
내어 원아웃, 1, 2루의 찬스가 계속된다.
이 때 송 감독은 작전 타임을 걸고 1, 2루 런너들을 불러들여 직접 작전 지시를 한
다.
무슨 지시인지는 모르나 아마도 선수들의 런너 플레이를 주의시키는 것 같았다.
관중들은 흥분이 되서 그런지 앉아서 관람하는 사람이 없이 거의 대부분 자리에서
일어난 상태다.
이어 등장한 7번 타자 남수는 어이없게 삼진을 당하고 만다.
송 감독은 맥이 풀리고 말았다. 관중 속에서도 실망의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등장한 8번 타자 철호는 이번 대회에서 타율이 상승일로에 있었으나, 송 감독
은 과감한 용병책을 썼다.
철호를 빼고 영명이를 대타로 내세웠다.
투아웃에 1,2루.
관중들은 오랜만에 결승다운 결승을 보는 것 같이 마지막 순간을 위하여 온 시선을
영명의 타격에 집중시키고 있었다.
볼카운트 원 스트라익 투 볼, 영명이는 이미 상대투수의 직구는 포기하고 오로지
커브를 노리고 있었다. 제 4구, 역시 노리던 커브볼이 들어왔다.
영명이는 힘차게 배트를 휘둘렀고, 볼은 보기 좋게 좌익수를 훌쩍 넘어버렸다.
2루 주자는 홈인하였고 뒤따르던 1루 주자 명수도 홈을 향하여 막 3루 베이스를
돌고 있을 무렵, 볼은 좌익수에서 3루 수비수에게 연결되고 있었다.
홈 플레이트 10미터 전방에서 명수는 필사의 슬라이딩, 볼과 거의 동시에 홈을 파
고 들었고, 순간 주심은 큰 동작으로 세이프를 선언하였다.
대타 작전이 주효하여, 역전 및 D고교의 감격어린 우승으로 경기가 끝나려는 순간
이다.
9회말 H고교의 마지막 공격을, 다시 원기를 회복한 동식의 멋진 투구로 3 타자를
연속삼진으로 돌려세우고 꿈같은 중앙대회 우승을 손에 거머쥐었다.
영광된 승리에 도취되어 그간 어려웠던 시간들에 대한 보상을 받으려는 듯, 선수들
은 환호하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송 감독을 하늘 높이 헹가레쳤다.
시상식에서 동식에게 최우수 선수상이 수상되었다.
누구도 이의를 제기치 않는 당연한 수상이었다.
송 감독의 눈가에도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동식의 눈에도,,,,
송 감독은 이러한 승리에 대한 기쁨 속에서도 동식에게 아버지의 위급함을 알리지
못한 양심의 가책을 받아야 하는 본인이 일순간 괴로워졌다.
다음 날 아침 기차로, 선수들은 부산에 도착하였다.
선수들은 개선장군처럼 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역사를 빠져 나갔다.
교장선생님께 인사를 한 다음, 각자 뿔뿔히 집으로 흩어졌다.
오후 5시에 학교의 자축연에 참석키로 하고서,,,,,,
자축연을 먼 발치에서 지켜 보고 있던 송 감독,
송감독, 그의 손에는 사표가 쥐어져 있었다.
한 아이의 장래와 명예를 위해 그는 희생된 것이다.
이제까지 그는 야구와 싸워왔지만, 지금부터는 인생과 싸워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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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구형 창단 秘話 1~5부 (26회 하원규, 초대 총무)
제1부 : 야구 첫걸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꿈 같은 대학 1년 시절을 보내던 때.
어느 모임이든 첫 모임이 언제부터였는지, 누가 시작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1972년 봄 날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야구를 좋아하고 하고 싶어 하는 동기 몇이서 동네 야구가 다 그렇듯 집에 있는 야
구글러브 하나씩 들고 야구장(그 때는 부산대 대운동장 귀퉁이에 있는 야구장)에서
취미로 연습하며 시작한 것이 구형의 초기 모습이었다.
대학 1학년 교양 과정부 소속이었던 우리들이 자연스럽게 개교 기념 야구시합에서
같이 하며 자연스럽게 같이 어울려 야구를 하게 되었다.
야구 배트 하나, 새 공 하나에도 벌벌 떨던 시절에 그 당시로서는 취미로 시작한
아마츄어 팀이 유니폼을 갖춘다는 것은 정말 꿈 같은 이야기였으나 야구에 대한 열
정 하나로 그 꿈을 실현하였다.
등록금이 3~4만원 안팎이던 시절, 돈 1,000원이면 막걸리 한 되에 꼼장어 2접시를
주던 시절이고 유니폼 값이 10,000원 정도였던 것 같다.
구형 구락부라는 말은 야구 球자에 향기 馨(경고 덕형관에서 따옴)으로 정하자는
양희권 동기의 의견을 좇아서 정했고 워커스(WALKERS)는 구덕 상징인 우직하지
만 끈기 있는 학교 상징 똥구두를 말하는 워커에서 따왔다.
창단 초기 맴버로는 건축학과인 나를 포함하여 수학교육과 이동수(울산대 교수), 수
학교육과 정대근, 사학과 추기복, 수학교육과 양희권, 국문학과 박원상, 금속공학과
성재업(불광도원), 수학교육과 차성우(한전 재직 중 작고)등 8명이었다.
초기 회장은 양희권이 맡고 내가 총무를 맡았는데 2학년 초쯤 토목공학과 김현룡
(전 현대산업개발 부장), 기계설계학과 박동기(대신빌딩), 약학과 최수일(동명대 교
수)동기가 참여케 되고 야구 좋아하던 25회 김영국 선배를 비상근 감독격으로 영입
하고 박재걸 수학교육과 교수님(19회)을 지도교수로 모시게 된다.
초기에는 많지 않은 야구 구성원으로 인하여 시합 때마다 그때그때 야구 좋아하는
동기들을 임시 땜빵으로 메웠다.
경영학과 강성우(국제종합건설), 의예과 이종인(이종인 신경내과원장), 행정학과 최
창집(부산대 법대), 행정학과 최의수(개인사업) 동기 등이 잠시잠시 구형과 함께 한
동기들이다.
초기 클럽 당시 야구방망이 살 돈이 없어서 부숴진 부분에 못질을 해서 쓰고 너덜
너덜해진 공으로 연습을 하였다.
연습과 시합이 끝나면 야구방망이와 글러브, 베이스를 학교 바로 앞에 있는 성재업
동기의 집까지 옮기는 것이 일이었다.
피곤에 축 처진 몸으로 무거운 장비를 옮기는 일을 서로 눈치껏 싫어하곤 했지.
일정한 회비도 없이 그때그때 돈 가진 사람이 주머니를 털어서 눈치껏 비용을 내곤
했었지.
막걸리 집에서는 막걸리 한 두 주전자에 두부찌게 한 냄비이고 자금 사정이 그래도
괜찮은 날은 맥주집에서 맥주 한 두잔 팝콘을 안주삼아 먹는 것이 전부였다.
별도 클럽실이나 마땅한 장소가 없었던 우리들은 동기 집을 돌아가며 미팅 장소로,
작업 장소로 이용했다.
특히 차성우 동기와 추기복 동기의 집에 신세를 끼친 적이 많다.
기복 동기, 원상, 내가 밤새 가리방(철필 등사기)을 긁어 스텐실로 신문도 발행하고
구형 노래도 만들고 밤새는 줄도 몰랐다.
그 당시 부산대 무지개문 앞에서는 귀가 아프게 시끄러운 맥주 집 하나, 막걸리 집
달랑 하나, 서점 서 너개가 우리들 놀이터 전부였다.
그래서 우리끼리 야구연습이 끝날 때는 학교 앞 막걸리 집에서 한 잔하고 타 팀과
의 시합 후는 18번 버스(합동버스) 제일 뒷칸을 전세내어 자갈치시장으로 진출하곤
했었다.
부산대에서 유일하게 여학생이 없는 클럽으로서 그 모자람을 보충하기 위하여 미팅
도 하고 그 여학생들과 정기적 모임도 갖고 요즘의 소위 MT도 갔었다.
돈이 없어서 민박집 방 한 칸에 10명이 같이 잠을 잔 적도 있다.
동기들과 사랑과 우정사이에서 고민도 많이 했고, 지금은 지난 이야기지만 가슴 아
픈 사연도 많았다.
우린 그렇게 야구로 인하여 울고 웃으며 대학생활 클럽활동을 애정과 낭만의 세월
을 보냈다.
돌이켜보니 아름다운 젊은 날의 추억들이다.
특히 서생 여름캠프 때 일이 제일 생각난다.
민박집 아주머니가 10명 선수에 국수 5인분 정도만 삶았다.
까맣게 때가 낀 시골집 대청마루에 쏟아 흘린 국수 가락도 서로 먹는다고 난리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저녁에는 민박 집 마당에 캠프 파이어를 하고 둘러 앉아 막걸리 마시며
밤새 노래를 불렀었지.
조개껍질 묶어♫ 그녀의 목에 걸고♬
물가에 마주앉아♩밤새 속삭이네♪
저멀리 달 그림자♫ 시원한 파도 소리♬
여름 밤은 깊어만 가고♩ 잠은 오질 않네.
실제 시합에 있어서는 그 때 내가 투수 앞 땅볼을 치고 1루 달리는 것을 포기한 적
이 있었다.
뒤에서 팀원들이 얼마나 뭐라 했는지 40년이 다 되가는 지금까지 그 기억이 난다.
동기고 친구고 친선 경기지만 최선을 다하지 않는데 대한 질책이었다.
시합을 지고 이기고 문제가 아닌 그런 열정이 당시 우리에게 있었다.
다만, 그 당시 사진기 있는 동기들도 없고 사진 인화 비용도 만만치 않아 사진 한
장 없이 그 때 그 시절 장면들이 우리들 가슴속에만 면면히 간직하고 있다.
내게 그 때 그 흔한 사진 한 장 없는 것이 유감이다.
부산고 동문과의 시합, 서생, 남지에서의 여름 캠프 등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일화를 소개하면 한 번은 내가 주선하여 5:5로 미팅을 하게 되었다.
6신가 약속시간인데 5시가 다 되어서도 야구장에서 3명은 교섭이 되었는데 한 명
이 모자랐다.
그래서 야구장에서 이리저리 뛰고 있는데 박원상 동기가 집에 가려는지 어슬렁거리
는 것이 보여 사정하니 집에 꼭 일찍이 가야 할 사정이 있다는 것이다.
내 사정부터 먼저 봐 달라고 사정사정하여 겨우 허락을 받았다.
아마 잠시 참석하고 머리수만 채우고 원상 동기는 일찍 가는 것으로 그렇게 합의가
된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참으로 인생은 묘한 것이다.
그 미팅 파트너가 지금 원상 동기의 마누라가 되어 딸 둘 잘 낳고, 잘 살고 있으
니....
후배들에게 바라건데,
운동시합을 하다보면 시합에는 꼭 이겨야 하고 이길려고 하면 야구를 잘하는 동기
들이 경기를 주도하게 되는데 그러면 야구를 좋아하나 야구를 못하는 동기들이 소
외될 수 있다.
그런 동기들에 대한 배려가 꼭 필요하다.
우리 모임 목적이 야구 자체를 좋아할 뿐 야구가 종착역이 아니기에..
우리가 야구 하나로 만나서 야구 아닌 일로 지금까지 35년 이상을 만나는 것처럼.
사랑하는 후배들..
우리 동기들이 이미 우리의 아들, 딸들이 우리가 처음 만난 그 때의 나이 이상이
된 지금,
반백의 나이에 온백의 머리를 하고 인생의 종착역을 향하여 저물어가는 때에,
지나온 35년의 추억을 되돌려주는 후배들.
지금까지 우리의 클럽을 유지 발전해 온 후배들이 무엇보다도 자랑스럽다.
후배 여러분들의 건승을 빌며 다시 만날 때까지...
2007년 10월 7일 아침에
1972년을 되돌아보며
구형 1기 하원규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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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 추억의 그라운드
경고하면 야구와 공부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최근에 거론되었던 해운대 센텀시티 인근 부지로의 경고 이전 계획이 취소된 것도
그 곳 부지가 야구장을 할만큼 운동장이 넓지 않은 사실이 중요한 요인이 된 것만
봐도 그렇다.
공부만 하는 학생들은 이기심만 키워지는데 반해 야구가 운동경기의 하나에 불과하
지만 단체 및 사회성을 강요하며 사회 구성원으로서 인간을 성숙케 하는데 그만한
게 드물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구형 생활 중에서 서너차례 여름 캠프를 간 적이 있는데 지금은 없어졌지만 광복동
입구 2층 수다방에서 구체적 계획을 짜곤 했었다.
다방 내에 담배 연기가 자욱하고 음악은 차라리 소음 수준이어서 상대방과 대화도
힘들었는데 중요한 사항은 꼭 그기서 만나 의논했다.
그토록 시끄러운 환경에서 어떻게 이야기를 나누고 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
다.
그런 와중에서도 메모지를 DJ에게 건내 주고 듣고 싶은 음악도 신청했었는데 팝송
으로는 California dream, Highway star, Black & White, 포크송으로는 편지, 고
래사냥, 토요일밤에, 아침이슬 등이 주요 신청곡 종류다.
지금은 합숙 훈련을 각자 승용차편으로 떠나 호텔이나 콘도를 숙소로 정하고 운동
장도 빌릴 수 있었겠지만 그 때 우리들은 있는 장비, 없는 장비 모두 각자가 챙겨
열차 타고, 버스 타고 먼지 날리는 시골길을 달려 시골학교나 모래 사장에 텐트를
치고 시골 집에 민박하며 훈련 겸 캠핑을 했었다.
그 기서 식사는 하얀 쌀밥에 알콜로 예열하고 펌프질해야 하는 등산용 석유 버너로
요리한 된장찌개가 유일한 반찬이었다.
낮에는 땡볕아래 치고 받고 달리며 밤에는 백사장에 누워 밤 하늘의 별을 헤며 휴
대용 전축에 LP판 레코드판을 걸어놓고 막걸리에 김치. 두부. 새우깡 안주로 조용
한 여름의 밤을 보냈다. 요즘과는 격세지감을 느낄 것이다..
보통 캠퍼스 생활에 있어서는 시합 후 피곤한 몸, 문리대(지금의 인문대) 앞 잔디에
앉고 누워 상대방에게 서로 심한 욕설을 주고 받으며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 그 날
의 유일한 놀이요, 카타르시스였다고나 할까.
그 시절, 돈 좀 있는 학생은 청자 담배를 피우고, 없는 사람은 개나리를 피웠는데
우리들은 한 개피를 나눠 핀 것은 물론 꽁초도 많이 피웠다.
때론 담배 피우는 것을 멋으로 생각하고 때론 어른 흉내의 겉멋을 낸 측면도 없지
않았으나 ‘식후 불연초면 3초 후 즉사’라는 농담이 생길 정도로 밥 먹고 난 뒤나 술
좌석에서의 담배 맛 또한 끊을 수 없는 달콤함이 있었다.
식사는 도시락을 싸 다녔고 문창회관에서 100원 정도하는 씨락국과 같이 먹는 것
이 점심이었다.
그리고 수업은 교수님은 강의실에서 진행하시고 학생들은 문창회관에서 카드를 곧
장 하곤 했는데(^^) 이모, 추모, 정모, 차모, 김모 군 등의 구형 맴버들이 주로 마이
티나 기루다 같은 카드 게임에 빠졌었다 .
그 때 대학 캠퍼스에서는 카드 게임이 전국적으로 만연할 때였고 사회적으로 이슈
화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의 포카나 고스톱과 달리 도박 아닌 시간 떼우기 오락과 단순한 두뇌싸
움 게임 정도여서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고 나중에는 오히려 머리 회전을 좋게 한
다고 권유할 지경에 이르렀다.
단지 강의실에서, 식당에서 심지어 차안에서 삼삼오오 시도 때도 없이 하는 것과
종종 대출(代出)이 문제가 되기는 했는데 지금은 그들이 교수되어 학생들 대출자
찾아낸다고 고민할 것이니 세월이 흐르긴 많이 흐른 모양이다.
그런 반면 야구에 있어서는 실제 경기외에 야구 규정집으로 정확한 규칙을 습득하
고 연구, 토론한 점도 다른 클럽과 달랐다.
야구 규정을 면밀히 살펴보다보면 그 자체가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야구야말로 규
정이 까다로운 만큼 정말 합리적이고 신사적인 스포츠임을 깨닫게 된다.
인필더플라이(이프페어)라던지 스트라이크아웃 낫아웃규정 등을 보면 명백하다.
교양과정부 때, 특히 기억에 남는 일인데 철학 시간으로 그 당시 괴짜교수였던 윤
노빈 교수가 수업 시작 전 중간고사 성적을 전원, 발표한다.
B학점도 거의 없는데 이동수 동기만 혼자 92점 A학점을 받았다.
일등이라고 이동수를 호명하며, 소개하는데 이 학생, 아직 등교도 하지 않은 상태...
ㅉㅉ
그런데 소개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가 등장하며 자기에게 무슨 욕이나 하는 줄
알고 영문 몰라 어리둥절하고 머쓱해 하던 표정이 지금도 생각난다.
내게는 대학생활 중 생생이 기억하는 몇 안되는 소중한 추억의 장면이다.
다른 과목의 성적은 제대로나 나왔는지 모르겠는데 수학과 철학 과목만 유독 출중
하여 그 과목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었으니 세월과 인생의 의외성에 놀랄 따름이다.
데카르트와 피타고라스가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사실도 실감나고...
학과공부 이야기를 조금 더 하자면,
구형 동기 중 학점과 성적 걱정이나 공부에 대해 예민하거나 고민한 사람은 없었
다.
더구나 입학 당시 최수일 동기 약대 수석 합격, 강성우 동기 상대 수석 합격, 김기
표(법무부 차관)동기가 법대를 수석 합격했었는데 구형이 아닌 김차관을 제쳐놓고
서라도 그 당시 다른 운동클럽이 받고 있던 놀기 좋아하는 좀 덜된 모임이라는 선
입견따윈 구형에게는 남의 일이었고 팀 전력과 더불어 클럽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
하였었다.
지금에야 구형에 선후배도 있고 해서 클럽 운영에 윤활유 역할을 하고 있겠지만 우
린 선배는 물론 없었고 지도 교수와 운영을 의논할 그런 오지랖도 없었으며 세상
물정도 몰랐다.
지금 생각하니 그만큼 순수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선, 후배의 관계에 있어서 졸업생들은 재학생 후배를 아끼고 좋아하며 물질적 도움
은 줄 수 있겠지만 그 후배들이 오히려 선배와의 자리를 부담으로 생각할 수도 있
음을 선배들이 알고 그들을 배려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 다음 후배들이 선배들의 그 뜻을 가슴 속으로 느낄 때 구형이 한 단계 더 성
숙하게 되는 것이다.
PC도 없고, 돈도 없던 시절, 사진도 없고 남겨진 기록조차 하나 없는데도 내가 40
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뒤, 그나마 구형에 관한 기억을 비교적 세세히 말할 수 있
는 것은 대학 생활 중의 소중한 추억이고 구형에 대한 애정외는 달리 설명할 근거
가 없다.
그 해, 우린 야구 좋아하는 동문들이 야구 클럽 활동을 했을 뿐 구형이 35년의 긴
세월을 이어 갈 것을 꿈꾸지도 않았으며 구형의 첫 번째 역사가 되는 특별한 의미
도 깨닫지 못했다.
만약 그 의미를 알았다면 1972~1973년의 구형 창단 초기의 역사를 이렇게 머릿
속에만 담아 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당시 구형 구성원 누구도 입에 올리지는 않았지만 우리 가슴 면면이 야구를 하
는 함축된 마음가짐이 있었다.
“야구는 취미로 하되 그 이상이며 절대 주가 되지 않는다.”
2007년 11월 1일
구형 1기 하원규 씀
PS : 요청에 의해 앞으로 한 2번 정도 더 구형 창단 초기의 스토리를 올릴 계획으
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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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 선수마다 한 몸이 되어
한참 구형이 탄력을 받을 때, 골수 맴버이며 주축이던 이동수 동기가 군대에 입대
하게 된다.
그의 송별회를 위해 학교 무지개문(구 정문)을 조금 지나 한적한 시골 버스 정류장
의 낡은 점방같이 후줄그레한 식당 안쪽 내실 방에서 막걸리 회식이 열였다.
나는 그곳에서 난생 처음으로 술을 마셔봤고 담배 피우는 걸 배웠다.
정확히 1973년 2월 6일의 이야기다.
어떤 동기들은 고등학교 재학시부터 학생지도 주임이시던 변사또(변윤기 선생님)와
괴뢰군(박태현 선생님)의 감시를 피해 구덕산에 숨어 담배 피운 것을 무용담으로
여겨었지만 나는 대학 1학년 말까지 술, 담배 모르고 있었는데 바로 그 날 처음으
로 술, 담배를 배웠으니 날짜를 정확히 기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렬로 배치된 식탁 위에 막걸리 주전자가 놓여지고 안주로 찌게와 밥 반찬 정도가
준비되어 있었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익어갈 무렵.
내가 이동수 동기를 위해 기타 반주로 김세환의 ‘옛친구’를 불러주었다.
노래방 등 시설이 없었던 시절, 젓가락과 막걸리 사발이 유일한 악기였을 때 기타
반주는 지금 같으면 최고급 오케스트라였다.
"하얀 모래 위에 시냇물이 흐르고
파란 하늘 높이 흰구름이 나리네
지난 날 시냇가에 같이 놀던 친구는
냇물처럼 구름처럼 멀리 가고 없는데
다시 한 번 다시 한 번 보고 싶은 옛친구"
그 뒤 군대 입대하는 동기들 환송회는 한 번도 없었다.
무엇이든 첫째는 항상 대접을 받고 잘 기억된다.
구형의 핵심이던 이동수 동기가 그렇게 빠져 나갔지만 없으면 없는 대로 강해지는
끈끈함이 우리에게 있었고 최수일, 김현룡, 박동기 동기 등이 합류하여 최강 라인을
구축하며 비상하게 된다.
창단 맴버들의 야구 포지션과 플레이를 되돌아보니,
투수 박원상(최수일, 박동기, 차성우), 포수 하원규(최의수), 1루수 양희권, 2루수 정
대근 3루수, 이동수 유격수, 차성우(박동기), 외야수 추기복, 김현룡, 성재업, 최창
집, 이종인, 강성우 등으로 짜여졌었다.
투수 박원상 동기는 강력한 커브가 주무기이며 ‘오빠야’란 별명에서 보듯 늘 어른스
럽고 성실한 플레이가 그의 단골메뉴인데,
최수일 동기도 내, 외야수(투수) 올라운드 플레이어이며 투수로서는 깡마른 체구에
서 품어 나오는 속구에 호쾌한 타격 폼으로 팀 전력의 큰 축을 담당했었다.
포수인 최의수 동기는 자주 나오지는 않았어도 성실한 플레이만큼 얼굴 보조개에
미운 구석이라고는 없었던 동기였다.
나는 포수 포지션으로 실력이 뒤받침되지 않아 가끔 세도우 플레이, 노룩 송구 등
으로 재미있는 야구로 만회하려 했는데 매번 외야로 좌천(?)되었고 주로 재정, 총무
일을 맡아 부지런함으로 시합의 부실함을 대신했다.
1루수 양희권 동기는 구형 유일의 좌투좌타 선수로 대접받았으며 실제 사무라이 타
법인데 1루를 달릴 때는 바람을 가르며 다리를 찢는 1루 수비는 단신인 우리에겐
따라 할 수 없는 묘기가 되고,
2루수 정대근 동기는 안정된 수비에 발 빠른 풋워크가 전매특허이고 헛스윙하면 언
제나 ‘어이쿠’ 소리를 내며 어색함을 대신한다.
3루수 이동수 동기는 숱도 많지 않은 머리를 휘날리며 댓시할 때 바닥을 긁는 듯한
글러브질이 특별하고 런닝 스로우로 송구할 때는 짜릿한 쾌감이 들 정도로 경쾌하
다.
승부에 집착하는 스타일이다.
유격수 차성우 동기는 착실한 폼으로 에러 없이 수비의 핵이고 1루로 뛸 때는 전력
질주하며 나와 함께 당시론 드물게 스코아 북을 기록하기도 했다.
사실상의 감독 겸 주무 역활을 했었다.
박동기 동기는 투수 겸임 유격수가 제 포지션인데 축구, 테니스 등 만능선수로 시
합 땐 큰 믿음을 줬던 선수이다. 출석율이 높지 않아 중요 시합이 있는 날이면 테
니스장에 가 있던 그를 찾으러 다니곤 했다.
외야수 김현룡 동기는 가끔 터지는 장타가 특징이고 큰 키로 성큼성큼 1루를 달리
는 폼이 우스꽝스럽기도 하지만 매번 구형 사기를 북돋우는 분위기 메이커였다.
그와 함께 팀내 양대 꺽다리였던 추기복 동기는 주로 좌익수를 맡았는데 구부정하
고 엉거주춤한 동작에서 덩치에 비해 단타가 많고 평소 카드게임 때와는 달리 선수
들의 본헤드 플레이에 대해서는 인내심이 많았다.
성재업 동기는 외야를 담당했는데 작은 키에 조용히 뒷정리를 하는 친구이고 심부
름도 마다하지 않아 경기 후 야구장비 운반도 도맡아 하였다.
최창집, 이종인, 강성우 동기는 잠시잠깐 얼굴을 내민 구형 맴버이며 특히 강성우
동기가 부산고 동문과의 시합에서 1회 1번 타자로 나서서 3루타를 치고 나가 선취
득점한 장면은 지금껏 잊혀지지 않고 생생하다.
경기에서는 구형이 4대1로 승리했다.
세월이 너무 흘러 가물가물한데 후배 기수로는 구형 2기 김광철(수학교육과), 박원
재(기계공학과), 오세현(화학과), 3기 이우사(건축학과), 송명석(금속공학과), 4기 김
태명(무역학과), 박기찬(무역학과), 5기 이진광(경영학과), 내 15번 유니폼(기억나는
배번 양희권 10번, 성재업 18번, 박원상 1번, 추기복 7번)을 물려준 구형 6기 김광
호(건축학과) 정도 생각난다.
이우사는 허슬플레이로, 온 다이어몬드를 휘젓는 구형의 이만수로 캠퍼스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고 삼진 먹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대범함(?)이 남달랐으며 송명
석은 투수로 공은 빠르지 않으나 노련함이 돋보였고 반면에 김광호는 구형 최고 구
속을 자랑했으나 구질은 단순했다.
박원재는 주장을 맡을 정도로 성실하고 신임이 깊어 구형 주역이었고 오세현은 붙
임성이 좋아 선후배 사이 가교 역할을 했었다. 김광철은 선, 후배 틈새에서 고생하
며 바빴고 수비에 열중하다 송구 골대에 부딪쳐 앞 치아에 중상을 입는 불상사도
겪어 구형 부상 1호를 기록했다.
묵직한 투구의 김태명, 활기찬 포수 박기찬, 최고 따까리 역할하며 고생고생했던 이
진광 선수는 당시 강력했던 상과대학 야구팀 소속으로 전력 보강과 구형 역사의 수
레바퀴에 없어서는 안될 보석 같은 후배들이다.
부산대 야구장 위치였던 지금의 기계기술 연구동에는 공동연구 기기동 쪽으로 개울
과 언덕이 있어서 공이 그 곳으로 넘어가면 찾는 일이 보통 성가신 일이 아니었다.
공 찾는 사람이 정해진 것도 아니고 비싼 공을 안 찾을 수도 없는데 시합은 진행해
야 하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야구공이나 배트가 그리 귀한 물건도 아니며 파울 볼, 홈런 볼은 으레 관중
몫인데다가 공수 교대 직전, 잡는 공도 관중석으로 던져 주는 것이 통상 예가 되었
지만 그 당시만 해도 공 하나가 아쉬울 때였다.
하물며 옛날에는 공식 야구대회에서조차 비싼 공 값으로 인해 파울 공이 운동장 바
깥으로 넘어가면 구덕운동장 장내 여자 아나운서가 여지 없이 방송을 해대곤 했다.
“볼 좀 넘겨주세요. 볼 좀 넘겨주세요.”
지금은 들을래야 들을 수 없는 추억의 소리다.
재학시절, 구형이 경남중학교 운동장에서 야구시합을 한 적이 있는데 상대팀의 깊
은 외야 플라이를 좌익수였던 추기복 동기가 잡아 정확한 송구로 온 더 베이스(테
그-업)한 주자를 홈에서 거의 횡사시킬 뻔한 대형 사건(!)이 있었다.
그런 플레이는 프로팀에게도 쉽지 않는데 아마 팀으로서는 대단한 집중력이고 무서
운 경기력이었다.
나는 그 경기에서 당초 포수를 맡고 싶었으나 2루수를 맡아서 아쉽고 섭섭해 했던
기억이 난다.
경기가 끝나고 인근 선술집에서 추기복 동기와 술 마시며 술 기운에 소리 내어 운
적이 있다.
그 일 때문인지 아님 경기 중 속상한 일이 또 있었던지 오랫동안 눈물이 멈추질 않
았고 술이 취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학교나 사회나 야구든 직장일이든, 친선
이든 친구간이든 간에 실력 있는 자만이 대접받고 살아남는다는 냉혹한 사실을 우
리도 모르게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닐까?
누가 강요하지도 않고 마음에 안 들면 안 나오면 그만인데 그런 것을 생각조차 하
지 않음은 그 때 어린 탓도 있었겠지만 야구장에서는 오로지 야구만 생각하는 집념
을 심어준 것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기는 일은 드물고 패배가 계속 되풀이 되어도 그런 섭섭함 뒤에 피는 열정이 그
당시 강한 구형 모습이었다.
경고 졸업 당시 우리 동기는 440명 정도였는데 서울의 소위 SKY대학 등 수도권대
학에 280~320여명 이상이 진출하고 기타 50명 정도 타 지역 대학에 입학한 반면,
부산대 입학은 60~70명 정도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사회, 동창회 각 요로에서 부산대 출신들이 극성적 활동을 하고 있음을 보
면 60명 남짓한 재원을 가지고 15명의 구형 야구 클럽을 구성한 것도 우연이 아니
고 야구가 지닌 유별난 매력과 구형 구성원들의 노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마, 그 때는 한참 고교 야구가 날리던 시절이었으니 관심도 높았었겠지만....
내년 3월까지 모교인 경고 야구장에 잔디도 깔고 야간 나이터시설도 하고 동문이신
LG 구본무 회장으로부터 5억원을 기부받아 구덕 공원쪽 야구장에 합숙소와 휴게실
도 짓는다고 한다.
앞으로 우리 구형이 모교 구장에서 야간 나이터로 야구시합도 자주 하며 선후배간
우의를 다지고 생활에 활력소도 찾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다른 후배와도 그렇지만 구형이 태어날 때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세대인 경고 45
회 이상의 동문들과 우리 동기들이 한 자리에 앉아 세대를 넘어 화제를 공유하며
구형이야기를 같이 나눈다면 이 아니 가슴 설렌 일인가?
그 때가 기대된다.
2007년 11월
구형 1기 하원규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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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부 : 야구와 친구 차성우
잘 아다시피 구형 창단 시 야구단 이름을 지을 때 공 球에 낄낄이집 덕형관의 향기
馨을 본 따서 구단 이름을 정했었다.
그러나 공 球에는 축구공, 야구공, 배구공, 농구공, 하다못해 당구공 등 많은 구기
종류가 있어서 마땅하지 않을 수 있었는데도 팀원 전원이 공 球라 하면 당연히 야
구공 球로 생각하며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그만큼 야구는 경고의 구기이자 운동종목 이상이며 언제나 우리의 화두이다.
1972년 5월 10일경, 개교기념 축제행사 중 1학년 야구시합 때의 일이다.
교양과정부 C6반 소속이었던 우리들.
내야에 땅볼을 굴리거나 공을 조금만 높게 띄워도 무조건 살아나가던 동네야구 수
준이었던 시합에서 구형이 5명 이상이나 같은 반 소속이었다는 것은 더 할 수 없는
큰 힘이었다.
조선공학과 김석근(경동 FRP조선 대표) 동기가 포수를 하고 나와 양희권, 이동수,
정대근이 각각 투수, 1루, 유격수, 2루수를 했었다.
근근히 우리 팀이 3점 정도를 리드하고 있었는데 상대팀에게 무사만루의 기회를 주
고 말았다.
그리고 다음 타자에게는 스리 볼, 노 스트라이크.
오로지 스트라이크를 넣어야 되겠다는 생각, 하나뿐이었다.
그 후 다행히 상대방이 범타로 끝나서 위기를 극복하고 이긴 적이 있는데 지금도
TV로 스포츠 중계를 보면서 그런 카운트가 되면 그 때 심정이 떠오를 때가 있다.
물론 상대방이 나쁜 공을 건드려 주는 운도 있었겠지만 그 운도 자기 자신이 노력
하지 않으면 결코 기회가 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걸 깨닫지 못했다면 백 번 이겨도 소용이 없는 일이다.
그리고 양희권 동기와 서로 포지션을 맞바꿔 내가 1루수가 된 뒤 상대팀 선수가 친
3루 땅볼이 1루로 악송구되었다. 마침 1루쪽 스탠드를 맞고 튀어나온 공을 내가 맨
손으로 잡아 2루로 던졌고 정대근 동기가 정확히 테그 아웃시켰다..
지금, 지금 아니면 그 다음, 그 다음 아니면 그 다음 다음은 잘 할 수 있다는 친구
에 대한 믿음이 중요하며 그 믿음으로 팀웍이 이루어진다.
승패는 그 다음 일이다.
1루에 그냥 있었어도 2루는 대개 그냥 거저 도루할 수 있는데 순간적인, 쓸데 없는
욕심이 일을 어떻게 그르칠 수 있나 얼마나 가슴깊이 느꼈길래 지금까지 그 시합을
이렇게까지 기억하고 있겠는가?
야구는 생활이고 인생이다.
우리가 그 대회에서 우승했는데 부상으로 소고기 국밥 식권이 나왔다.
국이래야 씨레기국이나 미역국이 고작이었던 시절이므로 소고기 국밥이 얼마나 귀
하디 귀했을꼬.
내가 1학년 교양과정부 반 대항 야구시합에 대하여 위와 같이 장황하게 이야기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 시합들이 구형 창단을 확고히 하는 모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야구공은 난큐(軟式球), 중큐(中硬式球), 홍큐(硬式球)의 세 종류가 있으며 전부 일
본어이다.
그 어원은 軟, 中의 일본식 발음이 각각 난, 중인데 비해 硬式球는 실제 시합에 쓰
이는 야구공이라는 뜻에서 홍큐(本球의 일본식 발음)로 불려지게 된 것이다.
우리들은 대부분의 시합에서 중큐를 썼고 홍큐는 그 당시는 너무 비싸서 부산고와
의 대전 등 중요 시합외는 몇 번 사용 못했다.
그 홍큐도 너덜너덜한 헌 공뿐이고 하얀 홍큐 새 공은 아예 만져본 적도 없었는데
요사이 나는 그 때를 생각하며 방에서 할 일 없이 새 홍큐 야구공을 만지작거리며
매끈한 감촉에 참으로 좋은 기분을 느끼곤 한다.
그 당시에 비해 지금 우리가 얼마나 잘 살고 있나 요새 세대는 잘 모른다.
1988년경, 경부 합동 야구시합도 구형이 주체가 됨은 물론이다.
서울서 동창회도 하고 경부 대항 야구도 하면서 우애도 다지고 건강도 위하고....
부부동반하여 서울행 열차를 타고 7~8시간을 가도 동기끼리, 부인끼리 이야기하며
가는 길이라 별로 지루하지 않았다.
야구시합이 끝나고 또 축구도 하고 저녁에는 재경동창회 동기 회장이었던 김성일
(부산상선 대표)이 베푸는 회식 자리에 모두 참석하여 즐겁게 보낸 기억이 난다.
부산대학교 앞 한식당 겸 주점 1곳, 디제이가 있던 음악 주점 1곳, 대학 서점 등
서점 2곳, 효원 당구장 이외 별다른 상가가 없었던 그 때와 지금은 최고 환락가가
된 수많은 상가와 변해도 너무 변한 대학교 주변.
휴대폰도 없고 심지어 집에 전화도 없던 시절에 어떻게 연락하였는지 엇갈린 약속
으로 뭔가 곤란했던 기억이 별로 없는 것 보면 문명의 이기들이 무엇인지 되돌아보
게 된다.
지금은 휴대폰만 없어도 상호 연락에 큰 불편을 느끼는데 집 전화마저 없다면 만나
는 것은 고사하고 연락도 제대로 할 수도 없을 것이며 요즘 세대는 그 불편함을 알
기도 힘들 것이다.
통행금지가 있던 때, 라면이 쌀밥보다 사먹기 힘든 때, 교통체증이란 말이 없던 때,
양담배 피는 것을 금하던 때, 외국인을 외계인 보듯 하던 시절을 살았던 우리와 지
금 세대의 후배 사이, 시공을 뛰어 넘어 공유하며 변함 없는 것이 무엇일까?
그게 구형 말고는 그리 없을 것이다.
기억에 나는 일 하나만 더 소개하자면 1972년, 대학교 입학 후 얼마 되지 않아 한
명, 두 명 학교 야구장에 각자 가지고 있던 글러브를 들고 나와 야구 연습을 할 즈
음 박원상 동기와 난큐로 공을 주고 받은 적이 있다.
그 때 나는 그로부터 커브 볼의 실체를 알게 되고 더욱 더 야구의 매력에 빠지게
됐다.
야구의 커브가 베르누이의 법칙(혹은 마그누스의 효과)에 의한 것이란 것도, 딱
100년 전인 1872년, 캔디 커밍스에 의해 처음 시도되었다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었
다.
이전에 부산중학 신경식 군(전 OB베어스 1루수)이 한 동네 살았는데 동네 골목에
서 서로 공받기 놀이를 하면서 그가 던진 커브를 두어 번 받았었다.
그와 같이 동네에서 같이 놀면서 별 볼 일 없는 후보 선수라 한심해 보였던 그가
프로야구 원년 맴버로, OB베어스의 4번 타자로 대활약한 것을 보면 세상만사 새옹
지마란 생각이 든다.
우리가 명문 경고를 야구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듯이 구형 이야기에 차성우 동기를
빼놓을 수 없다.
구형 클럽 창단의 산파역을 했을 뿐만 아니라 대외관계, 대인관계, 선수생활 모두
약방의 감초 이상으로 구심점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그가 없었다면 구형은 창단 초기부터 형태 없는 전래가요처럼, 야사 같
은 처지로 초라하게 좌초하여 그 뒤 후배들에게 지금의 기회조차 주지 못했을지 모
를 일이다.
사람 좋고 항상 웃는 얼굴이어서 그의 곁에는 사람이 많이 모였는데 사람 좋은 사
람 먼저 하늘에서 데려간다던가.
그런 그가 한전 재직 중 또 대학 석사 과정과 강의 등으로 받은 이중삼중의 스트레
스에 기인한 병마와 1년 정도 싸우다 재발 후 6개월 체 지나지 않아 유명을 달리
했다.
작년, 나는 그런 그에게 천상에 글을 올렸다.
차성우가 이 세상과 영원히 작별한 지도 15년의 세월이 지나갔다.
그와 친하지 않은 동기가 있으랴 마는 부산대학에 같이 입학하여 야구를 하면서 그
리 친할 수밖에 없는 사이가 되었다.
성우는 사귐성도 좋고 인간성도 매우 좋아 그의 근처에는 항상 친구들이 들끓었다.
궂은 일도 마다 않던 친구.
그러던 성우가 백병원에 입원하던 날, 황달끼가 엄청난 노란 얼굴에도 그 때도 웃
는 얼굴이었다.
그는 수술을 받고 항암 치료를 받으면서도 자신을 잃지 않고 꿋꿋했었다.
중환자들이 입원해 있는 병실에 엄청난 고통으로 마약인 몰핀을 척추에 맞으면서도
그는 자신을 잃지 않고 웃음도 잃지 않았다.
나는 웬만한 성자가 아니면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환자가 그렇게 처연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안 것은 그에게서 배운 깨달음이다.
나도 그 이전 3년 전부터 몸 컨디션이 안좋아 동창회도, 모임도 잘 나가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러던 그가 굳이 우겨서 우리 집에 왔다.
나를 치료해 주겠다고 하면서 부항기를 들고 와서 직접 가르쳐 주고 갔다.
자기는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고 어쩌면 내일도 기약할 수 없는 처지면서....
하루 치료받고 괜찮아지겠냐마는 나는 친구의 우정에 감동하여 울었다.
1991년 어느 추운 12월 겨울날 그는 홀연히 떠났다.
내 친구 성우야. 먼저 간 걸 후회 말아라.
인생사 새옹지마. 괴롭고, 어렵고, 아프고, 싸우고....
멀지 않은 장래에 니가 있는 곳에서 다 만날 것을 알면서도 세상 삶에 미련을 버리
지 못하고 살고 있는 우리보다 너가 더 행복하였는지 모를 일이니.
그가 세상을 하직한 후 동기들은 미망인을 도우기 위해 모금도 하고 지금도 친구들
10여명은 기일이 되면 그를 찾아간다.
죽었지만 행복한 친구.
나는 그의 마지막도 같이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의 묘소에도 잘 가지 못하지만 그의 묘지를 지날 때마다 그 옆, 그 앞 망
자들의 묘비에는 1910년생~1920년생이 대부분이건만 유독 차성우 묘비에는 1954
년생이라는 글이 선명하여 가슴을 아프게 한다.
이 살벌한 세상, 메마른 세태에 진정한 친구, 옛친구가 보고 싶다.
12월 7일, 그의 16주년 기일에 구형을 통해 그를 다시 되돌아본다.
앞으로 구형이 50년, 100년 이어질 때 분명 중간중간 고비가 있을 것이다.
그 때마다 위기가 곧 기회라는 말을 깨달아야 한다.
야구를 하며 즐기고 감동하며 우정을 키우고 시합이든 세상사든 어려울 때는 “위기
는 기회다.”라고 생각하며 이를 극복해야 한다는 말이다.
정말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날 때도 끝나기 전엔 끝난 것이 아니며 그것도 아니면
자식대에 기회가 계속되는 것이므로 결코 희망의 끈을 놓아서는 안된다.
불같이 살다 간 일본 프로 야구 히로시마 카프의 승부사 츠다 츠네미(津田 恒美)
투수에 관한 이야기를 여기 인용하면서 구형야구 위기 때에 극복의 참 예로 삼았으
면 한다.
1991년 시즌이 시작되기 전, 히로시마의 미래는 장밋빛이었다.
당대 최고 철벽 투수진에, 타격에서도 최강 타선이었고 마무리 투수도 바로 전 해
부상을 극복하며 최고 투수로 재탄생한 히로시마의 수호신 츠다가 있었다.
구원투수 츠다는 오로지 사나이답지 않다는 이유로 유인구 하나 던지지 않고 언제
나 150km의 직구 승부만을 고집했으며 야구 강속구에 대한 열정과 배짱 하나로
일본 최고가 된 전설의 투수이다.
그러나 시즌 초의 엄청난 기대와 달리, 츠다는 시즌이 시작하자마자 2게임 연속 구
원에 실패하고 급기야 말기 뇌종양으로 쓰러진다.
츠다의 병명이 알려진 후, 히로시마 선수단은 급전직하 초상집 분위기가 됐고 모두
다 올 시즌은 다 끝났다고 여겼다.
팀의 수호신이 시즌 초 쓰러졌고 재기불명이니 그럴만도 했다.
하지만 팀원들은 그와 같이 싸울 것을 다짐하며 오히려 똘똘 뭉치고 단결하게 되었
다.
그 결과, 시즌 종반에 마침내 주니치를 따라잡은 히로시마 카프는 홈구장에서 역전
우승을 달성하고 선수들은 중병환 중의 츠다와 우승의 기쁨을 함께 한다.
92년 새해. 츠다는 다시 재기를 위해 트레이닝을 하고 강속구도 뿌리며 부활에 성
공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재기를 꿈꾸며 재활에 열중하던 그는 마지막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그 다음
해인 1993년 7월 20일 숨을 거둔다.
이 때 그의 나이 겨우 32살이었다.
츠다의 사후 딱 7년 뒤인 2000년 7월 20일, 히로시마 시민구장.
카프의 홈 경기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는데 스피커에서는 난데 없이 선수교체의 방
송이 흘러 나왔다.
“히로시마 카프 투수 교체입니다. 투수, 츠다. 등번호 14번…”
경악하는 관중들...
그런데 츠다의 기일에 이 무슨 안좋은 일인가라고 외치던 관중들의 눈에 불펜에서
마운드를 향해 힘차게 뛰어나오는 한 소년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의 빨간 카프 유니폼 등에는 분명 츠다.
14번이라는 글씨가 커다랗게 쓰여 있었다.
그 때사 상황을 짐작한 관중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마운드 위의 소년은 다름 아닌 이제 열 한 살이 된 츠다의 아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츠다에게 또 다시 기회가 주어지는데 그 소년은 멋지게 와인드 업을 한 후
홈플레이트를 향해 아버지가 그토록 던지고 싶어 하던 강속구를 힘차게 던졌다.
아버지의 전설을 이어 던진 것이다.
2007년 12월 7일
구형 1기 하원규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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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부 : 마지막 애정을 부탁하며
지난 10월, 경고 구장에서는 우리 기수와 기별 야구대회 19회 선배님 간에 야구시
합이 있었는데 환갑을 넘긴 연세에도 불구하고 왕성한 체력과 구력을 자랑하며 우
리들과 대등한 시합을 한 적이 있다.
핸디 3점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나는 대타로 나서 유격수로 뛰었다.
30여년 만에 글러브를 처음 끼어 보았는데 막상 제 포지션에 서 보니 1루가 까마
득하게 멀어 보였고 그 뜻 모를 두려움은 곧 현실로 나타났다.
런닝 때는 다리가 꼬이고 1루 송구도 원 바운드나 투 바운드로 던질 수밖에 없는
처지에 세월의 무상함을 깨닫게 되었다.
민방위가 끝났을 때 홀가분한 마음 반, 이제 청년이 끝났다는 서운한 마음 반이었
다면 그 날 경기가 끝났을 때는 중년의 세월도 끝나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 다음 날 야구대회 준결승전에서는 우리 동기들이 36명이나 참석하여 참여 열기
는 매우 높았으나 유니폼 입고 완전무장한 27회에 비해 중구난방의 옷차림에 16회
같은 플레이를 했으니 지는 것은 당연지사. 2대 8로 기권 패했다.
결과적으로 비정규직(?)으론 결코 그들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며 이번 기회에 아
예 상설 야구팀을 구성하자는 제안이 있었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이육구(26회 야구단)로 팀 명칭을 정했으며 지난 11월 11일 창단했다.
창단 기금과 장비도 마련했고 유니폼도 맞추고 회비도 받으며 경고, 경중, 동의대
학, 경성대학 야구장 중에서 사용계약을 체결하기로 했다.
하지만 구형처럼 긴 역사를 이어가지는 못할 것이 뻔하고 나이 한계때문에 끝이 있
는 것도 분명하지만 우리가 지금이라도 운동하면서 동기간 친목도 도모하고 자기
건강도 돌본다면 그 건 운동 이상이 될 것이다.
더구나 언젠가 기회가 되어 구형 후배들과 야구 시합이라도 한다면 그것 또한 시합
이상이 될 것도 분명하다.
1973년 구형 유니폼을 맞출 때의 사연이다.
모두 아는 이야기겠지만 유니폼은 소속감을 느끼게 할 뿐만 아니라 팀웍과 경기력
도 향상시키는 효과가 있다.
지금은 유니폼 한 세트 맞추는데 대략 10만원 정도로 큰 부담이 없겠지만 그 당시
실정으로는 없는 살림에 상당히 고가였던 유니폼을 맞춘다는 것은 가당치 않은 일
이었으나 우리는 그것을 해내었다.
모두 다 어려웠던 시절,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어서 처음, 유니폼
주문 전 우리 동기들 중 그게 가능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총무였던 내가 일을 맡아 추진하였는데 실제로 가정형편이 안 좋아 유니폼 대금을
내지 못한 친구도 있었다.
내가 어찌어찌 해결하여 전원 유니폼을 맞추게 되었으나 누가 대금을 냈고 누가 대
금을 못 내었는지 지금까지 말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 후 동기 중 누구도 내게 묻지 않았고 알려 하지도 않았다.
지금 같으면 결산서 없다고 불평불만이 컸을 터인데 우리는 서로서로 이심전심으로
믿고 이해하고 있었던 같다.
요새 점심을 굶는 아이들에게 무료 급식을 주는 학교가 많다는데 그 무료 급식도
급우들 모르게 준다고 한다.
그 아이의 자존심을 고려한 때문이다.
그 당시 우리에게 돈은 없어도 그런 진한 우정과 배려가 있었다.
1992년과 1997년, 나도 그렇고 우리 동기들은 뜻밖의 일을 겪게 된다.
다들 후배들로부터 각각 구형 20주년 구형회보 발간 원고 부탁과 25주년 기념식이
경고 교정에서 있으니 참석해달라는 초대를 받은 것이었다.
무단히 어려웠던 70~80년대 누구나 먹고 살기 어려워서 졸업하고 대학 때의 클럽
활동에 관여하는 것은 시간적 여유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한마디로 사치였던 때를
우리는 살았다.
졸업 후에는 사는 것이 바빠 야구는커녕 학교하고 담 쌓은 지 오래고 단지 차성우
동기의 기일에 한 번씩 만나는 것외는 구형 역사를 챙길 처지가 아닌 터에 그 구형
이 면면이 역사를 이어 와 20주년, 25주년이 됐다는 것이다.
놀라움과 함께 반가움이 확 밀려왔다.
오래 전에 책갈피에 몰래 끼워두고 잊어버린 돈을 어느 날 갑자기 발견한 그런 기
분이었다.
차성우 동기가 공진우 등 간간이 후배들과 접촉하기는 한 모양이었으나 그가 저 세
상으로 가고 나서는 그마저 두절된 상태였으니까..
1991년, 차성우가 몹쓸 병으로 낙명하고 난 뒤 우리 동기들은 10년 넘게 매월 적
금을 부어 미망인에게 전달하며 구형의 끈끈한 정을 유지하여 왔다.
지금은 천연잔디 위에서나 야간 나이터 시합도 한다고 이야기 들었으나 우리 때는
그건 꿈이었고 그때그때 시합 전에 그라운드 정리와 준비도 직접 하였다.
발 걸음걸음으로 대충의 루간 거리를 측정하고 그라운드가 딱딱한 것은 물론 잔돌
이 많은데 시합 전 미리 줍기는 해도 공이 땅볼로 굴러 올 때는 불규칙 바운드가
공포에 질릴 정도였다.
다행이 공이 중큐라서 맞아도 아픔은 지금보다 좀 덜하지만...
그런 시합 후 무지개문 앞 비탈길을 삼삼오오 떼지어 내려올 때는 달콤한 피로가
즐거웠다.
우리 동기들이 그동안 시합에 이용한 야구장으로는 초기는 부산대 야구장, 수산대,
외국어대 구서동 구장, 경남중학, 부산기계공고, 서생중학교, 해양대학, 광안중학 등
이 기억나고 후기에는 동기들이 재직 중이던 시내 중, 고등학교 운동장도 이용했다.
누구 하나 타격이라든지 수비라든지 자세를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어서 모두 자기
자신이 비결을 터득할 수밖에 없었다.
하체가 뒷받침이 안되면 타격이나 송구에서는 축이 흔들이는 셈이니 힘이 안 실리
는 것이고, 수비 때도 다리가 꼬이고 볼을 제대로 따라 갈 수 없어서 경기력이 떨
어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나도 팔로 하는 야구가 하체 보강이 중요한다는 정도는 알았으나 이 사실을 실감한
것은 이번 기별야구대회 때였다.
돌이켜보니 우리는 이기기 위해서 시합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시합을 하면 이겨야 하
는 경기를 했다.
승리가 목적이 아닌 수단일 뿐인 그 것이 구형 야구의 본질 아니었나 생각한다.
1973년, 어느 날 야구 시합을 마치고 광복동.
야구 시합이 끝난 뒤 우리 동기들은 종종 광복동 입구 할매집 다락방에서 비빔국수
로 식사를 하고 자갈치시장 난전에 앉아 꼼장어 안주로 소주와 막걸리를 마시곤 했
다.
그 날도 우리 모두 시내에 있었는데 그 때 술도 마셨고 세월도 흘러 어떤 상황이었
는지 정확히 기억에 없으나 무슨 일 끝에 내가 같이 있던 친구한테 “니가 그럴 수
있나?”라고 불평 같은 한마디를 했으나 그가 대뜸 귀찮다는 듯 “그럴 수 있다.”라
고 대꾸한 것은 기억난다.
아마 내가 술이 되어 한 말 또 하고 하여 그랬을 수도 있는데 그도 술을 마신데다
가 감정 끝에 불쑥 내뱉은 것이고 30여년 전 일이라 벌써 잊었을 것이나 나는 그
후 한 동안 잊지 못하고 내내 괴로워했던 적이 있다.
그러니 특히 부부간에도 그렇지만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아무리 기분이 상해도 마
지막일 것 같이 상처 주는 말은 농담이라도 절대 해서는 안된다.
뱉은 말 한 마디는 순간적으로 없어지나 말한 사람의 후회와 들은 사람의 상처는
길게 남는다.
또한 아무리 선배로서 후배를 아끼는 마음에서라 하더라도 내가 선배때문에 불편해
했던 것을 후배에게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
더 나아가서 후배는 보배같이 여기고 선배는 빈 배같이 마음을 비워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 한 배를 탄 동지들이기 때문이고 구형이 지금까지 이어져 온
이유이다.
우리들은 구형 창단시 부산대 써클 중 유일하게 대표자에게 회장 대신 주장이라는
직함을 썼으며 주장은 장수로, 선수는 참모가 됐고 전장에서는 전부 일반 병사로
구분 없이 전쟁에 임했다.
그 과정에서 어떤 때는 사랑과 어떤 때는 섭섭함으로 긴긴 시간을 같이 보내면서
우정이 더 깊어지고 짙어졌다.
마지막으로 후배들에게 말한다.
우리가 무슨 깊은 인연으로 서로 만났는지 모르겠으나 난 곳이 같은 형제처럼, 구
덕산과 금정산 정기를 공통분모로 하여 우리 서로가 그 인연 계속 이어가기를 다짐
하며 또 그대들에게 그러길 원한다고.
구형 창단이야기를 끝내며,
구형 1기
하원규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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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하사장 좋은 자료 올려주어서 고맙소. 40여년 전의 우리 모습을 보니 감개가 무량하군요. 원상이가 시를 지었다는 것은 그럴듯하지만 대근이가 또 이렇게 멋진 시를 적었는지는 몰랐네. 친구들의 옛 모습이 지금과 거의 다르지 않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고.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그때의 순수한 마음들을 그대로 거의 지키고 있는 오늘의 우리들 모습에 자랑스럽기도 하군. 하지만 이제 나이가 더욱 들어가면서 좋은 방향으로 자신을 변화시킬 필요도 있는 것 같소. 더욱 행복해 지도록 더 열심히 살아갑시다.
옛모습에서 오늘의 우정을 새삼 느껴봅니다.
몇 년 전에 구형 홈페이지에서 보았던 내용을 다시 보게 되니까 또 다른 감회가 느껴지네요. 수고가 많았던 원규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어떤 부분은 기억이 나지 않기도 하지만, 40여년 전의 옛 모습들이 아련히 떠오릅니다. 역시 세월이 많이 흘렀나 봅니다.
정말 감개무량합니다. 근데 내가 시도 쓰고, 산문도 쓰는데 시는 좀?? 우리 집사람이 구형회보 보고는 나의 대학생활을 조금 알수있는것 같다고하고 구형이라는 써클에 왜 그리도 우리들이 목메이는 이유도 좀 알수가 있다는구나. 우리 집사람 왈 구형이라는 써클이 너무 멋지다는구나. 구형 여러 친구들 너무 고맙다. 그리고 원규글중 일지같은 내용은 다시 생각을 핸거냐, 일기라도 써 놓았던거냐???
구형비화(1~5)는 그때 일기나 쪽지같은게 있으면 40년전 물건이라 뜻깊을 것인데 당연히 하나 없고 머릿속에 기억 나는 것.. 글로 옮긴 것입니다. 기억력 문제가 아니라 그 땐 구형이 연애고 공부고 생활이고 오락이고 대학생활의 전부였으니까 기억에 생생 있을 뿐입니다. 우리 친구들이 그 때 일을 기억하고 우리가 예삿 친구들이 아니었구나 여기며 소원하고 서운한 일 없이 지내며 또 환갑 넘은 울들, 앞으로 젊은 우정을 더 돈독히 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