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대구분 |
족장시대 (아브라함) |
신약시대 A.D.100년 |
기독교공인 300(313) |
고트족 600년 |
종교개혁 1500년 |
윌리암캐리 1800(1792) |
에딘버러 1900년 |
1975년 |
2000년 |
세계인구 (백만명) |
27 |
180 |
190 |
180 |
520 |
900 |
1,620 |
4,100 |
6,100 |
기독교인 (백만명) |
1명 |
1.4 |
14.3 |
39.9 |
100 |
200 |
560 |
1,360 |
1,970 |
복음화율 |
- |
0.8% |
7.5% |
21.5% |
19.4% |
22.7% |
34.5% |
33.3% |
32.5% |
(출처:세계교회의 미래, 패트릭존스톤, 2010)
인류역사상 선교적 돌파는 3번 있었다고 본인은 주장한다. 첫째, 성령강림과 신약성경의 초대교회형성시기(AD 30년~313)이다. 둘째는 로마제국에서 기독교 공인과 고트족이 전도되는 시기까지이다.(313~600) 셋째는 윌리암케리에서 에딘버러 선교대회까지이다.(1792~1910)
첫 번째 선교적 돌파는 오순절 다락방(AD30)에서 120명의 기독교인이 있었지만 AD100년이 되면서 1백4십만 명이 되고, 300년에는 1천4백3십만 명이 되는 예수님의 성육신과 성령강림의 축복과 부흥이 있었다.(대략10%대 도달) 하지만 두 번째 돌파는 20%대 Christendom시대로 기독교인이 되어야지만 공직을 할 수 있었고, 교인이 되면 많은 이득이 있었다. 가짜신자인 가라지들이 교회에 포함되고 양산되는 애매한 시기이기에 진정한 의미에서 부흥의 선교적 돌파라고 칭하기가 어렵다. 어찌되었든 이 시기에 세계기독교인구가 처음으로 20%벽을 돌파 세계인구의 21.5%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AD 600년 이후 윌리암케리의 선교전(AD1800년)까지 약1200 년동안 기독교인구는 20%초반 이상을 넘지 못하며 전진하지 못한, 단지 인구증가율 정도만 신자가 되는 아쉬움이 있었기에 1200 년동안 하나님이 많이 안타까워 하셨을 것 같다. 하지만 드디어 윌리암 케리(Expect great things from God, Attempt great things for God)이후 1900년대에 기독교 인구는 30%를 넘어서며 34.5%로 기독교인구가 증가하는 진정한 의미의 선교적 돌파(Breakthrough)가 이루어진다.
1.2. 역사적인 선교적 돌파는 “어떤 생각”으로 이루어졌을까?
그렇다면 인류역사에서 의미 있는 두 번의 선교적 돌파(Breakthrough)의 역사가 내포하고 있는 뜻은 무엇인가? 성령강림이후 초대교회에서 사도들과 순회전도자들의 영향력은 지대했다.(David Bosch, Transforming Mission, 2000, p.303) 이들은 순례자들이었다. 또한 윌리암케리는 움직이지 않는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에게 마28:19절을 외치며 인도로 나아갔다. 이와 같이 두 번의 선교적 돌파의 공통점은 분명히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히11:13~16)로 대변되는 생활양식인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아간 공통점이 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장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살았던 에녹, 노아, 아브라함 등을 열거하다가 그들의 공통점 즉 한 가지 원칙을 도출하는 것이 바로 믿음으로 이 땅에서 나그네요 외국인으로 살아간 법칙을 말하고 있다.
예수님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내가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요17:18)라고 말씀하시며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거처가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 없다는 나그네 인생론을(마8:20) 말씀하셨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이 땅 위에 오신 예수님은 인류최고의 유목민이셨던 분의 생활양식이요 행동양식을 우리에게도 명령하시고 계신 것이 바로 요17:18절인 것이다. 또한 성령님도 아버지에 의해서 (아들을 통해) 보냄을 받은 존재이시다.(요 14:26, 15:26) 성령님도 역시 인류최고의 여행을 하늘로부터 이 땅으로 하신 거룩한 여행자이시다.
하지만 예수님도 3D 업계에 종사하신 인류최고의 이주민 노동자셨다. 예수님도 현대 이주민 육체노동자들이 주로 담당하는 것과 동일하게 3D 업종에 종사하신 노동자이셨다. 예수님은 죄로 인해서 더럽고(Dirty), 또한 마귀의 시험을 받으셔야 했기 때문에 위험하고(Dangerous),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야 했기 때문에 어려운(Difficult)한 세상에 오셔서 자신이 직접 디아스포라가 되셨으며, 십자가의 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법의 길을 제시하셨고, 우리는 나그네로 살기를 각오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우리를 3H로 변화시켜 주신다. 디아스포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우리는 우리의 영혼이 거룩해(Holy)지고,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과 하나 되고 이웃과 하나(wHole)가 되어서(요17:21~22) 우리의 거룩하고 행복한 집(House)인 천국에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는 집을 만드셔서 우리가 그 집으로 오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예수님이시다.
방정식은 3D + DB:Diaspora Blood(십자가의 피) + DB:Diaspora Belive(우리가 믿으면) = 3H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여행은 끝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여행은 아직 초림과 재림의 긴장사이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상태이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우리의 마지막 여행이 남아있다. 그 우리들의 마지막 여행을 위해서 신약의 세 번째 여행(첫 번째는 예수님의 성육신으로 오심, 두 번째는 이스라엘에서 전도하시며 다니심)인, 예수님이 먼저 천국으로 우리의 거처를 예비하기 위하여서 이동해 가셔서 지금도 우리를 위해서 중보하시고 계시다.(예수님의 부활승천, 행1:9) 네 번째 여행은 우리의 마지막 여행을 위해서 동행자를 보내주셨는데 성령강림이시다.(행2:1~4) 다섯 번째의 여행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파송을 명령하신 현재 우리의 삶의 여행의 근거가 되는 명령이다. 이 여행은 아버지가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17:18)말씀의 시대가 지금의 시대인데, 우리는 편하게 앉아서 정착하고 살아가려고 하는 인간적인 속성이 있다. 여섯 번째의 여행은 제자들과 사도바울이 예수님의 파송명령에 순종해서 모범을 보여주었던 사도행전 이하에서의 전도와 선교여행이다.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따라가야 하는 삶의 양식의 모형이다. 그리고 마지막인 일곱 번째는 우리의 마지막 여행인 이 땅에서 삶이 끝나고 주님께로 가는 천국여행은 우리의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 예수님(요14:1~3)이 미리 준비하신 길을 따라가는 행복한 여행이지만 믿지 않는 자는 지옥으로 갈 마지막 여행이 기다리고 있다.
현대는 메시지의 홍수시대다. 설교는 세계적 설교자들이 Youtube속에서 자체 경쟁하는 시대다. 너무나 설교가 많고, 도전도 많이 받지만 그 모든 설교들이 대부분은 은혜 콘서트의 형태로 사라져간다. 그러나 이제는 행동하고 우리 삶의 형태를 가장 단순화해서 나그네로 반응함이 가장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복음을 위해서 내가 있는 곳에서 우리 모든 전 세계 기독교인들이 다 외국인과 나그네인 삶의 형태(Nomad Diaspora Theology)로 일어나서 살아가야 한다. 우리의 비전은 보다 큰 집과 아파트와 내 성공과 내 자식의 성공, 좋은 직장이 아닌 50억 명의 불신자들을 품고 마지막 남은 과업을 믿음으로 외국인과 나그네의 생활양식(Nomad Diaspora Life Style)을 우리 삶의 영역에서 실행할 때 다시 한 번의 선교적 돌파를 볼 수 있는 영광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 땅에서 정착민이 아닌 우리 모두 천국을 본향으로 둔 나그네이다. (요14:2~3, 히11:13~16)
2. 전 세계 환경 변화의 도전에 대한 각 분야주체별 대응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이시고, 주관자시다.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에 시작된 소련과 동구권의 몰락, 동독 붕괴, 중국 개방 등의 일련의 변화가 있었던 지난 30년(1987~2017) 한 세대 동안 하나님이 세계역사를 흔드신 환경 변화가 있었다. 이런 전 세계적인 사회변화에 대하여 각기 다른 주체들인 국가, 이슬람, 기독교, 자본은 어떻게 대응 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표2]. 세계 종교 인구 변동 추이 (단위:백만명)
연도 |
1800 |
1900 |
1990 |
2000 |
2015 |
2025 |
전세계인구 |
904 |
1,620 |
5,292 |
6,123 |
7,325 |
8,003 |
기독교인구 |
205(23%) |
558(35%) |
1,757(33%) |
1,985(32%) |
2,419(33%) |
2,707(34%) |
이슬람인구 |
91(10%) |
200(12%) |
935(18%) |
1,290(21%) |
1,703(23%) |
1,972(25%) |
힌두교 |
108(12%) |
203(13%) |
705(13%) |
825(13%) |
984(13%) |
1,104(13%) |
불교 |
69(8%) |
127(8%) |
307(6%) |
448(7%) |
520(7%) |
561(7%) |
무교 |
0.3(0.0%) |
3(0.2%) |
858(16%) |
655(11%) |
831(11%) |
701(9%) |
중국전통종교 |
310(34%) |
380(24%) |
180(3%) |
427(7%) |
520(7%) |
419(5%) |
자료: World Christian Encyclopedia(http://www.wnrf.org/cms/print_next200.shtml) : 1900년,1990년 International Bulletin of Missionary Research 2015.1월호 : 2015년Status of Global Mission 2013 by Gordon-Conwell Theological Seminary,2013.1월 : 1800, 2000, 2025
[표2]를 거시적 차원에서 관찰하면, 전 세계 기독교인구가 20%대에서 마의 30%대를 돌파하는 환경적 상황을 살펴보자. 산업혁명 이후 18~19세기 서방 열강국가가 무역과 투자를 국가정책으로 국가에서 최고의 아젠다로 설정해서 이 분야에 전력하는 부분과 나가는 해외선교(Oversea Mission)는 그 개념이 서로 일치하였다.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해서 본다면 제국주의적 선교의 흔적도 포함한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오심도 하나님의 때가 차매(갈4:4)의 로마제국이라는 현실이 있었고,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해방도 바사제국의 포로들을 본향으로 보내는 정책이 있었다. 이러한 정책은 분명히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손길아래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최근의 인구이동도 분명히 하나님이 이주하게 하신 것임을 우리는 믿는다.(행 17:26, 사66:18~20)
2.1. ‘국가’라는 시스템
미국의 정치학자 홀리필드(Holyfield)는 국가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 18세기 이전은 안전유지였고, 18~19세기에는 무역&투자의 경제개발 이었으나, 20~21세기에는 이민 관리라고 주장한다. 1760년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제품생산의 급증을 가져왔고 이는 필연적으로 생산된 제품의 국내 판매 뿐 아니라 해외시장확보를 위한 무역의 적극적 장려가 요청되었다. 또한 제품 생산을 위한 기계구입에 필요한 자본의 형성과 투자, 이러한 일련의 경제상황을 운영하는 국가의 경제개발정책이 각 국가에는 중요하게 부상되었다. 또한 이러한 근대의 시작인 산업혁명으로 인구 이동의 증대는 유럽 내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서 인력이 필요한 부분으로 처음 인구의 이동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 그 흐름이 산업화라는 영역이 점차 규모와 영향력이 전 지구적으로 확대 증폭되어서, 인구의 이동이라는 사회변화를 동반하는 양상으로 눈덩이처럼 진행되었다. 또한 게다가 20~21세기에는 서방이 무역투자의 결과로 인해서 국민들은 부의 풍요로움으로 여가를 즐기며 기대수명은 증가하고, 개인주의화되는 것이 극대화 되면서, 자신만을 더욱더 중시하게 되었고, 개인들의 공동체성 상실로 출산율도 하락하고, 이로 인해서 이주는 필연적 이었는데도 국가는 경제적 측면만 집중하여 무역투자국가라는 것에 집착하고, 이민과 국가간 인구이동은 단지 무역투자의 하위개념으로 취급하였다. 세계 각국의 정부들은 자신들의 기준으로 국가 이기주의적인 이민정책을 시행했다. 주로 유럽 국가들은 다문화라는 정책으로 시행했었지만 2005년 이후 유럽 등에서는 다문화정책의 실패를 선포했었다.
이유는 국가의 성격이, 국방국가에서 산업혁명 이후에는 무역과 투자국가로 이제는 이민국가에 이르렀고, 전 세계적 중요한 환경변화는 개인들의 생각과 생활방식이 이민과 신 유목민적 생활양식 즉 Diaspora현상의 심화인데, 이것을 국가라는 시스템은 잘 적응하지 못한 것이 여러 부작용으로 나타나고 있다.
거기다가 사람들은 1648년(웨스트팔렌조약)이후 ‘한 개인에게 일개의 국민국가와 동일국가의 시민권’이 중요 전제 즉 온건한 충성(Undivided loyalty)의 가정이 변화된다. 각 개인들의 다중 정체성, 초문화적 정체성의 대두는 국가주의를 약화시키고 있다.
2.2. 무슬림과 테러리즘
하지만 전 세계적 환경변화에 잘 대응하고 반응한 분야가 있다. 세계화와 스마트폰으로 대표되는 정보화 등의 급속한 세계 환경 변화를 가장 잘 활용한 쪽은 테러리즘과 무슬림이다. 무슬림은 1900년도에 전 세계인구 16억 명중에서 12.4%로 2억 명이 무슬림 신자였으나 2000년에는 13억명 의 신자로 증가해 세계인구의 이슬람화 율이 21%로 증가했고, 2050년에는 25억 명의 신자로 27.4%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무슬림은 1976년 런던에서 이슬람교 국제회의가 개최되었는데, 2080년까지 세계를 이슬람화 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그 첫 번째 대상으로 영국을 선택했다. 테러리즘은 DICT를 가장 잘 활용한 집단이다.
2.3. 다국적기업과 금융기관들
그리고 전 세계적 환경변화에 또한 잘 대응한 부분은 다국적기업들과 월가의 금융기관(IMF를 필두로 해서 월가는 자신들의 영역을 급속히 확장시켰다.)들이 최고로 잘 대응했다.
이에 대하여 프랑스 석학 아탈리는 무슬림은 종교적 노마디즘이라고 말하고, 다국적기업과 월가는 상업적 노마디즘이라고 말한다.
2.4. 기독교계
사실 우리 기독교는 변화되어진 환경에 대하여 18세기 19세기에는 잘 대응해서 나갔는데,그 다음 단계인 현지인들 자신들이 움직이는 세계화와 정보화Target is moving에 대한 기독교계의 반응은 부정적 대응과 미온적 대응이 혼재되어져 있다.
첫 번째, 전 세계 기독교의 나가는 선교(oversea Mission)는 비교적 잘 수행했다고 생각된다.
우리 한국교회는 중국과 동구권 등 Oversea로 나아가는 선교로는 비교적 잘 반응해 나아갔다. 아니 하나님이 우리를 준비시키셨다. 1974년 로잔 I에서 랄프윈터박사에 의해 발표된 미전도 종족개념이 보급되기 시작했고, 1989년 로잔 II에서는 미전도 종족이 더욱 중요해졌다. 또한 ‘미전도 종족에게 2000년이 되기 전에 복음으로’로 대별되는 여호수아 Project는, 미전도 종족에게 나아갈 중요한 이유가 되었고, 전 세계 교회들과 선교계가 미전도 종족에게로 나아갔다. 한국도 전 세계 선교계의 이러한 흐름 속에서 세계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1백년 만에 한국선교에서 ‘선교한국’으로 변화되며,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는 나라로 전환되게 되었고, 한국 기독교의 역량은 숫자측면에서 급속히 세계적 선교국가로 그 에너지가 분출되었다.
그러나 두 번째로 전 세계적으로 본다면 기존교회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웃으로 보내주신 외국인 디아스포라들을 잘 품거나 수용하지 못했고 심지어 무시했다.(예수님이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인이 아닌 레위인과 같이) 전 세계 기독교계가 하나님이 새로이 열어주신 기회를 잘 활용해 하나님의 마음을 잘 이해하여 나가는 선교(Oversea Mission)와 더불어 이주민인 Nomad Diaspora 선교를 무슬림들처럼 잘 대응해서 가는 선교와 오는 선교를 서로 잘 네트워크 했다면 1990년대 이후 세계 기독교인 비율이 마의 33%벽에서 정체된 지 100년 된 이 장벽을 돌파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가는 선교와 오는 선교를 통합하는 것의 핵심은 우리와 “나의 정체성을 나그네”에 두고, 이웃들인 Diaspora들에게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타자철학) 디아스포라인 이주민 이웃을 사랑하며, 더욱 전도하고, 세례를 주며, 제자로 삼는 한국교회와 세계교회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표3]. 국제이주자 규모 (단위:백만명, %)
구분 |
1960 |
1970 |
1980 |
1990 |
2000 |
2010 |
2013 |
국제이주자 규모 |
76 |
81 |
99 |
155 |
178 |
214 |
231 |
전세계인구 |
|
|
|
5,290 |
6,115 |
6,908 |
7,408 |
국제이주자비율 |
|
|
|
2.9% |
2.9% |
3.1% |
3.2% |
자료 : International Migrant Stock: The 2008 Revision(http://esa.un.org/migration/p2k0data.asp)
1990~2010 재인용 카슬&밀러, 이주의 시대, UNDESA, 2005 : 1960~1980
*2013년자료는 UN(2013), Trends in International Migration Stock
3. 대한민국과 한국기독교에 주어진 숙제는?
“이주의 시대”라는 책을 쓴 현대 최고의 이민학 학자인 스티븐 카슬(Stephen Castles)이 현재 연구하는 주제가 호주, 터키, 한국, 멕시코를 사례로 “21세기의 사회변혁과 국제이주 연구”를 현재 진행하고 있다. 당대 최고의 학자가 왜 한국을 대상으로 국제이주를 연구할까? 그러한 국제이주의 다이나믹이 대한민국에서 일어났고, 정부도 여기에 반응하고, 국민들도 반응하는 부분이 있었기에 가능한 부분이다.
현재 한국과 일본 등 일부 국가를 제외한 대부분의 OECD 국가들에서는 전체 인구의 10% 이상이 이민자로 구성되어 있는 실정이다. 우리나라도 지속적인 이민자 유입에 대한 논의가 가열될 전망이다. 한국은 심지어 2025년경에는 한국군대가 다문화 군대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국방부에서 나온다. 한국도 인구의 10%가 외국인이 되는 이민사회로의 진입은 여러 싱크탱크에서 예측되고 있다. 한국사회의 미래는 이러한 사회적 환경의 급격한 변화에다가 우리 한국기독교는 급속하게 감소하고 쇠퇴하면서 한국교회 구성원이 다수가 외국인이 포함될 것인데, 이때 교회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이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3.1.이주에 따른 한국사회변화와 반면교사(英&佛) 그리고 성경의 초대교회
영국의 국민투표(2016.6) 결과가 EU 탈퇴로 나타났다. Brexit Shock의 원인에 대하여 현재 세계적인 석학인 Jeffrey Sachs교수 (Columbia대학)는 영국의 1991년 체류외국인비율이 인구의 5.8%에서 2015년 13.1%까지 급증한 것에 대한 영국인의 저항이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이유라 지목했다. 이에 한국도 이것을 잘 비교해 보라고 권고 했다. (조선일보 2016.7.2)
재한 외국인 5백만 명 – 외국인 유입에 따른 사회변화를 한국은 어떻게 준비 대처할까?
현재 외국인 유입에 대해서 한국은 다문화정책 반대 정서 / 경제적 측면에서의 찬성이 공존
갈등하는 대한민국에게 교회는 편협한 국수주의와 집단적 경제 이기주의를 “초월”해서
“예수님의 사랑과 공의”가 표현되는 공존의 공간이 교회임을 증명해야 한다
초대 교회에서 유대인과 헬라인이 공존했던 것처럼 외국인과 한국인의 협력과 공존이 먼저는 교회에서 구현되고 이 같은 Movement는 “사회와 세계”로 확산되어야 한다
영국은 1991년 외국인이 3백만 명이었다가 25년 후(2015)에는 5백만 명이 증가한 8백만 명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영국인의 인식은 외국인과의 공존을 감당할 인식의 변화나 태도의 준비 없이 영국은 자신들의 노동력 필요만 충족시켰다. 결국 영국의 경제적 필요충족과 이주민들의 급격한 유입충격, 영국인의 공존인식 부조화가 충돌한 것이 Brexit이다. Brexit Shock의 혼란에서 한 영국인이 “가난한 사람은 계속 가난하고, 부자는 계속 부자일 것이고, 우리는 외국인 탓만 할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 그리고 이주자 측에서도 불만과 위협이 더욱 누적될 것이다.
유럽은 저 출산과 인구감소를 외국인력 유입효과로 해결하고자 하였으나, 프랑스는 외국인이 게토화되고, 사회 불만 세력으로 자리 잡아서 불만은 폭동(2005)으로 표출되고 파리테러의 원동력이 되었으며, 영국(2011토튼햄 흑인폭동)도 다르지 않다. 이러한 시기에 영국교회는 시리아 등 아랍계 기독교인 난민들이 영국교회에 왔는데도, 영국교회는 이들을 거부했다. 이는 교회가 담당해야 할 사회적 기능을 포기한 것이고, 성경의 명령을 교회가 외면하고, 자신만 홀로 살겠다는 것은 복음적 가치를 저버리는 결과였다.
한국의 생산 가능인구는 3,704만 명(2016)을 정점으로 감소하기 시작해 2040년은 2010년의 80%수준인 2,887만 명으로 감소할 전망이다. 즉 현재 노동력부족과 고령화 추세는2040년 이후로도 유지될 것이고, 그렇기에 한국에 외국인의 추가적 유입은 자명하리라 예측되는 현실 속에서 한국은 현재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이 시점에서 국민의식이 건강한 방향으로 잡히고, 외국인 이웃과 함께 건강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한국의 현재 갈등은 좌우 이념대립(남남 갈등)갈등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계층갈등이 존재는 하지만 아직 전면으로 부상되어 분출되거나 현시되지는 않고 좌우대립의 한 요소로 잠재한 채 존재하고 있다. 거기에 외국인과 내국인의 갈등이 발생할 수 있는 환경이 매우 급속히 성장하고 있다. 하지만 서구는 국가주의가 웨스트팔렌조약(1648)이 체결된 이후 세워지기 시작해서, 중요한 국제적 시스템으로 국가주의가 확립되어지는 과정 속에서 민족과 인종갈등, 종교갈등, 이념갈등, 계층갈등에 대하여 국가는 미봉책인 대증요법으로 가리고 유지되어져왔다. 예를 들어, 현재 세계의 각 국가들은 산업혁명이후 지속적인 경제발전과 무역과 투자를 중요한 축으로 세계를 운영하며 제국주의와 전쟁과 평등과 정의와 사랑과 차별과 배제와 선동을 구현하여 왔는데, 대체로 우파는 경제성장정책과 팽창을 보다 중요한 가치로 상정하고, 좌파는 분배와 복지와 정의를 중요한 가치로 설정해왔다. 이것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로 세계를 양분하기도 하였고, 현재는 국가시스템을 운영하는 정치제도로서 좌파와 우파의 진영에서 갈등하고 타협하며 이념갈등, 계층갈등의 양상을 표출하고 이것을 선거와 투표라는 제도로 결정해 왔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사람들의 이동이 점점 자유로워졌고, 민족과 인종갈등이 표출되기도 했다. 한국사회는 좌우갈등만 분출되었고, 점차 계층갈등과 민족과 인종갈등이 현시 될 환경이 자라가고 있는 것이다.
세상은 언제나 문제가 존재했다. 문제 많은 세상에서 예수님과 예수님의 메시지와 교회와 하나님 나라는 이러한 문제점에 아무런 힘이 없는 그런 존재인가? 공산주의자들은 사고가 계속 발생하는 도로에서 교회는 사고가 발생한 후에 사람을 도와주고 구급차 대기시키고 치료해주는 역할만 하지 시스템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고 비난했었다. 교회는 그렇다면 진리일 수 없는 단순한 일시적 처방의 역할만 하는 것일까? 결코 그럴 수 없다. 진리는 사회를 변혁시키고 통합시키는 힘이 있다. 힘이 없어 보이는 것 같은데 힘이 있는 것이다. 로마교회가 그랬다. 박해 시 로마교회에서 초대교회는 힘이 없었지만 힘이 없어 보이는 존재로서 로마를 변화시켰다.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진리를 이 시대에 맡은 자들이다. 우리의 책임은 분명히 예수님의 진리를 이 시대에 알맞게 상황화 시키고 이것을 현실에서 증명하는 증인의 삶이라는 것을 위해서 부름 받았다. 기독교역사는 이것을 증명한다. 즉 완전하지는 않지만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부름 받은 존재이다.
최근 한국에 외국인 유입과 관련해서 국민 인식이 두 가지다. 첫째, 개방열망은 개방을 통해서 국가 경제적 이익을 확대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다. 둘째, 안티-다문화의식으로 외국인 범죄, 인종적 문화적 갈등에 대한 우려다. 현실에서는 두 가지가 모두 병존한다. 안티-다문화의식은 구체적으로 일자리 경쟁에서 밀려난 저소득계층, 국제결혼 피해자 등을 중심으로 ‘국민에 대한 역차별’, ‘반다문화정책’ 정서가 싹트고 있으며, 다문화가족 편중지원 시책들이 이러한 현상을 가속화(반다문화카페 20여개, 회원수 1만여 명)하는 흐름이 있다. 개방 찬성론자들은 외국인 관광객과 해외 환자유치, 외국 기업과 유명 교육기관 등의 투자유치로 경제 활성화를 추구하자는 개방열망의 의견이 존재한다.
[표4]. 한국총인구와 체류외국인증가추이와 예측(50년추이)
구분 | 1990 | 1995 | 2000 | 2010 | 2015 | 2020 | 2030 | 2040 |
한국총인구(천명) | 42,869 | 45,093 | 47,008 | 49,410 | 50,617 | 51,435 | 52,160 | 51,091 |
체류외국인(천명) | 50 | 270 | 491 | 1,261 | 1,875 | 2,500 | 3,200 | 5,500 |
외국인비율 | 0.1% | 0.6% | 1.0% | 2.6% | 3.7% | 4.9% | 6.12% | 10.8% |
*한국총인구는 통계청자료와 통계청 예측자료, 체류외국인은 출입국관리본부자료,
*예측자료(2020, 2030년)는 ‘제2차외국인 정책 기본계획’, ‘외국인정책위원회’, p.20, 2040년은 본인추정
그렇다면 한국은 인구감소로 인한 외국인 인력의 유입에 따른 사회변화에 대한 반응이 찬성과 반대로 병존하고 있는 실정의 현실에서 사회적 갈등이 증폭될 가능성이 농후한 것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다문화사회에 대한 미래준비에서 중요한 점은 사회의식 구조와 이민정책의 기조가 바로 예수님의 사랑과 공의가 표현되는 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형성 초창기는 이스라엘의 민족종교 성격의 유대교에서 세계종교 (로마제국에서)로 변환되며 성장하던 시기였다. 구약에서 신약으로의 전환기였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화두를 던져주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 승천하셨고, 성령님을 보내주셨다. 그리고 남은 제자들은 초대교회에서 성령과 함께 다문화 교회를 이루어간 것이다. 이 시기인 초대교회시대에는 교회 내부에서 유대인과 헬라인의 갈등이 분명히 심각하게 존재했었다. 당시 유대인들의 신학적 사고는 구약의 일원론적 사고, 유일신 하나님이 유대민족만의 구원을 최고의 가치로 두면서 구약성경을 해석했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예수님은 구약 율법의 완성자로서 오셨다.
예수님은 질문에 구약 요약을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마22:37~39)말씀으로 요약해 주시는데, 신약의 핵심이 새 언약에서는 구약사랑(나의 몸 즉 나의 기준과 같이 사랑하라)을 초월해서, 이웃 사랑에 대하여서 예수님 자신이 우리를 사랑해 주신 것과 같이 너희가 서로 사랑하는(요15:12) 타자의 개념을 말씀해 주시고 명령하셨다. 또한 초대교회의 초창기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이해가 너무나 어려워서 많은 이단들도 나왔고, 구원의 대상도 유대인만의 구원에서 세계 열방 만민(이방인)의 구원으로 회심하는 것은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도 힘들어했다. 자기중심적 생각에서 타자 중심적 생각으로의 가치전환도 너무나 힘든 것이다. 사실 선교사님들 중에서도 현지인들의 시각이 아닌 자신의 시각을 벗어나지 못한 경우를 본다. 초대교회의 다문화적인 배경으로 인한 갈등이 다방면에서 즉 신학적, 사상적, 정체성 측면, 교회구성원의 다문화적 배경의 갈등은 극도로 치달았다. 초창기 기독교는 이 많은 갈등을 성령과 하나님 나라 복음으로 극복하며 초대교회의 토대를 완성하였다. 이처럼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다민족 다문화의 성격을 함유하며, 그 토양에서 형성된 것이다.
초대교회에는 많은 다문화의 갈등 노출을 성령과 하나님 나라 복음으로 치유되었는데 현재 우리는 왜 상실했는가?
그 이유는 첫 번째, 하나님나라를 눈에 보이는 기독교국가로 대체한 것이다(유목적 교회를 정착민적 세상권력 추구형으로 변질시켰다). 기독교가 로마제국 내에서 공인되고 합법화된 이후 제국의 종교로 자리 잡는 과정에서 기독교 본래의 정신을 망각하고 현실에 안주한 것 즉Christendom의 편안한 방패막 속에서 유목적 정신을 상실하고 정착화와 정치 권력화 되는 과정 속에서 일어났다. 이러한 정신을 망각하고 정착화 되는 방향으로 진행되다가 종교개혁으로 신학적 정신이 먼저 제자리를 찾고 이것이 윌리암케리에 의해서 생활양식에도 바른 위치를 되찾게 되었고, 이제는 선교사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든 신앙인들이 이러한 신앙의 유목민화를 이루어야 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두 번째는 다양성과 다문화의 전통을 제국주의적 단일성으로 대체한 것이다. 이는 초대교회가 제국으로 자리 잡고 중세를 거치면서 고착화되고 맥가브란의 동일집단의 원리에 의해서 더욱 견고하게 되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이 성경을 계시해주신 문화권에는 분명히 유목문화가 존재했다. 이스라엘은 유목문화와 정착 농경문화가 함께 있었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그리고 예수님은 유목민이시기도 했는데, 로마로 복음이 넘어가면서 유목민의 시각에서 보아야하는 성경해석은 외면한 채 정착민의 시각에서만 성경을 1700년 동안 해석했었다. 지금시대는 우리는 나그네로 살아가야하는 시대인데, 정착민으로서 편안하게 살아가려고 하다 보니 성경계시의 원래의 부분을 망각하고 상실하고 있었다. 성경을 주신 그대로의 시각인 정착민뿐만 아니라 유목민의 시각에서 볼 수 있는 해석학적 접근이 필요하다.
패트릭 존스톤은 ‘세계 교회의 미래’라는 책(p.190)에서 성경은 구약의 장막(유목민적) 거주 언급이 가득한데, 현대 기독교 선교는 유목민들을 전도하고 제자 삼는 일에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유목민 공동체를 세우는 경우가 드물다고 하며 어떻게 하면 토착 유목민 교회가 증가하고 늘어나도록 할 수 있을까? 라고 질문하는데 매우 통찰력 있는 질문이라 생각된다. 나는 이 질문에 유목민적 시각에서 성경을 다시 해석하야하고, 신유목민으로 전지구가 채워지는 추세 속에서, 우리가 이것을 하나님이 제시해주시는 삶의 생활양식으로 실천하면 엄청난 파급효과 즉 하나님나라가 속히 임하게 되는 핵심적인 KEY라고 생각한다.
한국사회도 [표4]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1990년 한국체류외국인이 약5만 명으로 전인구의 0.1% 수준이었지만 50년 후면 5백만 명을 넘어서 전 인구의 10%를 넘어가는 현상으로 급격하게 사회가 변화되어질 것이다. 즉 5만 명이 50년 만에 500만 명으로 100배 증가하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총인구중 외국인이 10%를 넘어서면 그 사회는 이민사회로 규정한다. 한국은 서구의 국가들이 경험한 경제발전도 빨리빨리 문화로 최단기간에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는데, 동일하게 한국은 인구구성의 변화도 서구열강이 오랜 시간에 걸쳐서 변화되어진 것을 50년 반세기만에 5백만 명으로 증가하게 될 것으로 추정된다. 외국인 유입의 급격한 증가라는 한국의 사회변화는 거스를 수 없는 MEGA-trend이고, 사회에 이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가지 말라고 반대해도 자동적으로 가겠지만, 그 역사의 진행으로 인해서 발생하는 아픔과 부작용은 지속적으로 사회의 각 분야에서 광범위하게 확산될 것이다. 서구유럽제국들이 이주민을 경제적인 이유에서만 받아들이고 인식은 거기에 따라오지 못해서 발생하는 문제점들을 한국도 그대로 답습할 것인가? 이러한 문제점은 이미 2000년 전에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전환되어지는 초대교회에서도 존재했고, 아마도 현대보다 더욱더 심각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환경 속에서도 교회는 성령과 복음으로 그 아픔을 극복한 영적자산을 내포하고 있는 밭에 숨겨진 보물이요 숨겨진 진주와 같은 것이 교회라는 공동체이다.
현재 한국에도 외국인 혐오 정서가 여론으로 형성되어져 가고 있는 시점에서, 또한 외국인 유입 찬성론도 사실은 단지 국가와 나에게도 이익이 되니까 수용하는 나의 확장의 차원에서의 찬성이다. 성경에서 제시하는 것은 이러한 것을 넘는 차원이다. 한국사회가 초기단계 차원의 인식이 아니라 이러한 것을 초월하고, 교회가 이 부분에서 본질적 역할을 충실하게 역할을 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즉 초대교회의 정신을 회복해, 교회가 먼저 외국인과 한국인의 담을 부수고, 복음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교회에서 먼저 협력과 공존이 이루어지고, 이 흐름이 국가정책과 의식문화영역에서도 증폭되어, 사회전반과 전 세계로 확산되어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교회는 한국과 세계를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는 새벽별의 역할을 감당하게 되는 것이다.(많은 사람을 옳은 길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단12:3)
3.2. 재한 디아스포라사역의 역사와 전망
한국사회에서 통합의 모델이 될 수 있는 역사적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교회라는 공동체가 국내에 유입된 외국인을 어떻게 품어왔고 현재까지의 역사는 어떻게 진행되었는가를 간략하게 살펴보자.
한국에서 다문화교회 사역의 역사가 이제는 25년을 지나고 있다. 초창기 당시에는 외국인노동자와 불법체류자라는 단어가 더 익숙했었다. 외국인노동자사역은 1992년5월에 서울자양동성당에서 필리핀노동자사역으로 시작됐고, 1992년 12월 갈릴리교회, 94년에는 온누리교회가 시작했다. 이주민사역이 약25년의 시간이 흘러서 이제는 1세대라고 이야기하는 30년을 바라보고 있는 시점이다.
현재 한국내의 다문화 교회는 대략 3가지 유형으로 나뉠 수 있다.
첫째, 한국교회 내에서 소속된 부서로서의 외국인예배다. 한국교회 내에서 외국인예배 부서는 최소한 외부적으로는 존재감 없는 부서로서 가장 먼저 구조조정과 폐쇄의 대상이 되는 예배다.(명성교회)
둘째, 단일 언어권 외국인교회다. 대체로 100명 미만(대체로 한 언어권으로 모이는)의 자립하기 어렵고 힘든 상황의 외국인교회다.(부천몽골교회)
셋째, 다중언어권 외국인교회다. 이는 김해성목사와 유해근목사의 경우와 같이 주로 외국인들만 있고, 주력민족과 그 외의 몇 개 나라가 각각의 언어권별로 모이고, 카리스마 있는 리더의 역량으로 어느 정도 자립한 교회다.(갈릴리교회, 나섬교회) 이와 같이 한국에서 다문화교회라 할 때 현재는 3종류로 나눌 수 있다.
현재 한국사회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형태의 다문화교회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다. 즉 현재 한국에서 다문화교회라고 불리는 세 가지 교회의 중요한 공통점은 외국인들이 한국인과 동등하게 성도로서 생활하며 동역함을 현실적으로 이루지 못했다는 동일한 약점이 있다.
한국은 1987년 민주화이후 임금이 올라가고 소득수준이 올라감에 따라서 3D업종에서 인력난이 발생하고, 대외적으로는 88올림픽과 86아시안게임으로 한국의 대외이미지가 상승하였으며, 한국이 UN가입과 북방외교, 한중수교 등의 대외관계개선의 효과는 외국인 노동력, 특별히 비전문 외국 인력이 한국에 유입되는 요인이 되었다. 한국에서 외국인 노동력이 제공되고 있었지만 이와 관련된 법적장치가 부재였었다.
1991년에 한국은 ‘해외 현지법인 외국인 산업기술연수제도’라는 명칭으로 최초의 외국인력 도입에 관한 법적 체계를 마련하기 시작했다. 이 제도는 일본의 연수생 제도를 그대로 모방하여 실시했다. 일본의 산업연수생과 같은 제도는 유럽의 독일이 전후복구를 위해서 1950~1970년대까지 초청 근로자를 지중해 연안 국가에서 정주형이 아닌 순환(rotation) 되도록 하는 정책으로 대표되는 형태의 유럽형 외국인력 도입형태인 것이다. 한국은 초창기인 1991년에 외국인인력활용제도를 처음 도입해서, 현재는 고용허가제의 형태로 존재한다. 이런 종류의 제도의 취지는 인력도입국가가 나 자신만의 경제적 이익 필요를 충족시키려는 인식이 국가 전체적 인식으로 설정된 것으로 한국도 초창기 외국인 인력에 대한 국가정책기조에서(1991~2006) 주로 나타났다. 교회는 이때 외국인들에 대하여 나그네를 대접하는 환대정신(Hospitality)으로 국가정책기조인 단순필요 충족이라는 측면보다는 인식과 실천면에서 우위에 있었고, 90년대와 2000년대 초반까지는 외국인 노동자로 대표되는 외국인 이주민들은 교회에 많이 몰려왔었다. 이는 국가 정책보다 교회가 살아있었다는 증거였을까?
당시 초창기의 활동가들은 대부분이 목사들이였으며, 이들의 또 한가지특징은 1980년대에 노동운동을 하던 사회운동가들이였다. 즉 초기 6인방 김해성, 유해근, 인명진, 서경석, 박천응, 최의팔과 같은 분들의 공통점은 목사였다. 이들은 2006년 전까지는 한국의 외국인정책에 영향을 끼치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었다. 즉 과거 1980년대 독재시절에는 이분들의 활동은 한국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주었고, 1990년대 이후에는 민주화되어지고 나서 이 분들의 활동영역이 노동과 인권운동에서 외국인의 인권과 관련된 분야로 변경되었다. 예를 들면, 94년1월 경실련 강당에서 산재 사망을 이슈로 이주노동자들이 십자가를 걸고 농성을 해서 94년 3월 산재 적용조치를 정부가 시행하도록 관철시켰으며, 95년1월에는 네팔 산업연수생들이 피켓과 쇠사슬을 감고 제도 개선을 명동성당에서 요구해서 정부는 95년2월에는 최저임금 적용과 폭행 금지를 포함하는 관리지침을 관철시키기도 했다. 그러므로 인해서 불쌍한 긍휼신학이 자리잡게 된다.(1995~2006)
그러나 2006년 한국은 하인즈워드의 열풍이 있었다. 그 이전에는 혼혈인하면 한국인들의 인식은 튀기와 양공주라며 멸시했었다. 그러나 하인즈워드 열풍은 한국인들의 인식의 변화를 가져왔다. 한국과 외국인사이의 혼혈인이 열등한 존재인 튀기가 아니라 박찬호와 같이 돈을 많이 버는(98년 IMF 사태 이후 한국은 구조조정 등으로 국민인식이 돈이 더욱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는 인식의 전환이 있었다.) 스포츠 스타인 미국의 미식축구 슈퍼스타 하인즈워드로 인식하게 되었다. 즉 현실 속에서 나보다 돈을 많이 벌어서 성공할 수도 있는 혼혈인으로 바라보는 관점이 형성되고 위상이 변화되었다. 당시 노무현 정부는 이와 같은 사회적 인식의 변화를 바탕으로 외국인 지원 대책을 쏟아내고 그 대상은 주로 한국인 남자와 결혼한 외국인 여자를 지원하는데 집중해서 총력을 펼쳤다.(2012년 결혼이민자와 자녀에게 지원예산 1,183.9억 원으로 외국인정책 시행계획의 사회통합분야예산의 95%)
[표5]. 한국의 외국인 정책, 사역자신학, 대중과 교회 인식의 시대별 구분
시대 | 기 간 | 사역자 신학 | 일반대중인식 | 국가 정책 개념 | 이주민본인인식 | 일반교회인식 |
도입기 | 1988 ~ 1991 | 정의로운 인권운동 (인명진, 유해근 김해성 등) | 생각 없음 멸시, 무시 | 법과 제도 부재( ~91/10) 91.11.해외투자기업 외국인 산업연수생 제도 | 인식 결여 단순한성공 Korea Dream | 완전 별개의 사람으로 인식 |
1992 ~ 1994 | ||||||
94년1월 산재당한 이주노동자 14명이 산재 사망 이주노동자들의 십자가를 걸고 해결요구 농성돌입(시정) 95/1/9 네팔 산업연수생 13명이 명동성당에서 ‘우리는 노예가 아니다’ 의 피켓 쇠사슬을 감고 농성(정책 반영됨) | ||||||
혼란기 | 1995 ~ 2000 | 나그네 신학(게르) |
멸시, 무시, 불쌍하기에 도와줄 사람 | 국익우선원칙 (인권문제 속출) 고용허가제(2003.8) |
억압받는 존재를 표출 | 도와줄 긍휼과 전도의 대상 선교사로 파송하자 |
2001 ~ 2005 | 선교적신학 | |||||
2006년 하인즈워드광풍(혼혈인이 과거에는 저급하게 대우해 군대입대도 불가했으나 박찬호와 동일하게 된다는 사실을 인식) | ||||||
성숙기 |
2006~2012 |
선교, 게르, 성공 |
멸시, 긍휼, 공존 이중적 기준 |
다문화주의 06 재한외국인처우개선법 07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출범 08다문화가정지원법 08제1차외국인정책기본계획수립시행(08-12) |
사회일원으로 생각 |
전략적 접근
주도권은 국가로 (외국인근로자지원센타 등) |
2012년5월 이자스민 한나라당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이 되었음 | ||||||
혼재기 |
2012~? |
제자양육/ 성공(행사:예수팬클럽) |
상생 경쟁 대립 고립 |
이자스민 국회의원(2012.5) 다문화주의에서 이민정책으로 상생 / 실용 / 억압 |
상류사회로 적극진출 |
이중적 태도 (선교의 대상, 긍휼의 대상, 차별의 대상) |
출처: 이해동, 삼위일체적 이주민 사역, 총신대 M.Div.석사논문, 2009 수정
이때부터 유네스코 헌장에 나오는 다문화라는 단어가 더불어 유행하기 시작했다. 유네스코는 2001년 ‘세계문화다양성 선언’(Universal Declaration on Culture Diversity)후 이에 기반하여 2005년 제33차 총회에서 “문화다양성협약”을 채택하였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제2조는 “우리 사회가 점차 다양한 사회로 변화해 감에 따라, 공동생활의 의지뿐만 아니라 다원적이고 다양하고 역동적인 문화 정체성을 지닌 개인과 집단 사이의 조화로운 상호 작용이 반드시 보장되어야 한다. 모든 시민을 포용하면서 모든 시민이 참여하는 정책은 사회적 통합과 시민 사회의 생명력과 평화를 보장한다. 따라서 문화 다원주의는 문화 다양성의 실현을 보장하는 정책의 표현이다. 민주적 체계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문화 다원주의는 문화 교류에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공공 생활을 지탱하는 창조적 역량을 강화하는 데 기여한다.”는 내용이다.
우리나라도 2010.2 국회에서 문화다양성 협약을 비준하여 7월 정식 발효하였다. 정부는 2006년 이후 다문화가족 지원센터, 외국인근로자 지원센터를 전국에 본격적으로 설치 운영하여서 실제적으로 그 이전까지 교회와 시민단체가 담당하던 외국인과 관련된 인권적, 사회적 기능을 국가가 대체하였다. 또한 외국인들도 그들 자체 역량이 증가해서 교회의 도움 없이 외국인 자신들의 커뮤니티인 몽골타운, 차이나타운 등과 같은 자신들의 사회관계망 형성으로 교회의 필요성이 감소했기에 외국인들이 한국에 오면 교회를 거쳐 가던 1990년대와 2000년 초대의 재한외국인 문화가 소멸되어져 갔다. 다문화가 다원주의적 가치를 전제하는 다문화가 국가와 사회에서 정의하는 다문화이다.
하지만, 필자는 이를 삼위일체 하나님 상호간의 페리코레시적 연합이 우리 인간사 이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나라, 코이노니아적 다문화가 올바른 다문화라고 주장한다.
정리하면, 80년대 말과 90년대 초에 외국인 노동자들이 한국에 갑자기 몰려왔고, 정부는 91년에 일본을 모방한(근본적으로는 독일) 산업연수생제도의 법규를 도입하였지만, 이는 노동을 노동으로 인정하지 않고 연수로만 보는 인권에 문제가 많은 제도였기에 하나님의 정의를 가슴에 품고서 목숨을 걸고 노동운동을 하던 초기 6인방의 노동인권운동가 목사님(인명진 목사 등)들에게 정부와 투쟁하며 정책 제안과 투쟁을 할 여지를 만들어 주었다. 특별히 중국동포들은 숫자도 대규모이고, 한국인의 정서상 같은 핏줄이라는 동일한 연대감도 일반대중에게 작용하는데 외국인과 같이 취급하기에는 법과 제도의 허술함의 또 다른 영역을 포괄하며 중국국적의 조선족들 사역은 크게 부흥하였고, 정부와 사회에 이슈를 제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2006년 하인즈워드 광풍 이후 한국민들이 이론적으로 다원주의의 다문화를 표방하며 그동안 정부가 하지 못했기에 교회와 시민단체들이 감당하던 부분을 정부예산으로 다문화가족 지원센터 등을 건축하고 운영했으며, 외국인들은 그들 자신들의 사회적 관계망을 한국 내에 구축하였기에 교회는 그 역할이 대폭 축소되었다.
현재 한국의 이주민 사역과 한국교회와 관련된 문제점을 나타내고 있으며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한 가지 실례가 있다.
중국인 조선족 가정교회의 K목사님이 90년대 초반에 한국에 들어와서 비닐하우스에서 교회를 세워서 공동생활하며 500여명이 출석하는 교회를 이루기도 했으나 현재는 한국으로 오는 중국인들이 열악한 비닐하우스 환경을 감내할 마음의 여유가 없기에 그 교회는 완전히 소멸되어졌다.
현재 상태는 중국인이 한국에 1백만 명이 거주하는데 한국교회는 이들을 전도하거나 품을 생각을 할 여유가 없이 자신의 생존도 바쁜 상태이다. 이것은 현재 영국 교회와 무엇이 다른가? 중국인들은 이제 자체적인 한국 내에서 사회적 자본을 구축하여서 운영되어지고 있으며, 재한중국교회들도 이민생활로 고단하고 새로운 환경이기에 전도하기 좋은 상태를 초기에는 잘 활용되었으나 이제는 다 과거가 되었다. 현재 중국 본토의 기독교인 비율은 약7.92%이고, 패트릭존스톤에 따르면 중국인 디아스포라들이 전 세계적으로 3천만 명에서 기독교인 비율도 약 25%로 이야기한다. 몽골의 경우도 기독교인구가 전체인구의 1.72%(Operationworld)이지만 재한몽골인의기독교인비율은3.33%이다. 한국도 한국 본토보다 해외 디아스포라들이 기독교 신자가 되는 비율이 몇 배 높다.
이와 같이 한국, 중국, 몽골의 해외거주인 디아스포라들은 본국에서보다 예수를 믿는 비율보다 몇 배 높다. 하지만 한국 거주 중국인은 현재 1백만 명중에서 기독교인은 중국 본토의 7.92% 보다 크지 않고 반대로 매우 적다. 90년대 초반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말이다.
또한 거기다가 재한 외국인교회가 기존에 본국에서 예수님을 믿던 사람이 한국에 와서 교회는 찾아서 다니는 사람들이 대다수인 상황, 즉 국제적인 신자 수평이동 현상이 발생하였다. 전도가 잘 되지 않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물론 미얀마, 캄보디아의 경우는 교회에 나오는 부흥이 있기도 하지만 국내 체류 외국인 2백만 명 전체적으로 본다면 현재는 재한 외국인사역, 다문화교회에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한 상태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어디로 가야하는 지를 모르고 이주민들의 생각과 인식은 변했는데, 또한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빨리 변화를 받아들이는 집단이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이주민들인데, 그들을 데리고 과거 10년 전 20년 전의 사역방법으로 비닐하우스에서 외국인을 맞이하는 것과 같은 형태로 있는 것이 현재 일부 한국대형교회에 속해서 예배드리는 재한 이주민사역교회들의 현실이기도하다. 물론 이러한 섬김 자체도 귀하기도 하지만 이주민들에게 단순히 이미용, 무료진료의 단순하고 일회적인 시혜성 정책으로 기초욕구만 충족시켜주는데 만족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한국교회가 외국이주민들에 대하여 정확한 복음 제시와 한국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협력하고 디딤돌이 되어주며 한 단계 진일보한 인식과 행동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즉 한국이 서구 교회를 닮아가고 기독교가 쇠퇴해가는 흐름은 이주민 사역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재한 외국인사역이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하나님이 주셨던 불은? 어떻게 하면 다시 부흥할 수 있을까? 어디로 가야하는가? 초대교회의 다문화를 연결할 수 있었던 교회의 잠재력은 어떻게 하면 되찾을 수 있을 것인가?
결국 하나님이 한국에 최근 이주민을 대폭적으로 주신 것은 축복이지만 아직 한국 교회는 그 가치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교회 역사적으로 두 번의 선교적 돌파가 일어날 수 있었던 정신은 분명히 나그네, 거룩한 나그네라는 나의 정체성을 가지는데서 그 역동성을 찾을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 나그네 인데 어떤 나그네인가? 다윗이 말년에 지었다고 알려진 시편 39:12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말해준다. “나는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이며 나의 모든 조상들처럼 떠도나이다.(시39:12하) 나는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입니다. 주와 함께 있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요한복음 17장은 대제사장으로 예수님이 인류를 위해서 하신 기도이다. 여기에 마지막 부분에 예수님도 17:18에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우리를) 세상에 보내셨다. 그리고 17:21절에서는 보냄 받은 우리가 어떤 생각과 행동으로 살아가야 하는가의 말씀을 주신다. 즉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해달라는 것이다. 즉 다윗이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가 자신의 정체성이었다면, 예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적 연합을 이 땅 가운데서 우리가 이루고 살아가면 하나님 나라가 이 땅 가운데서 먼저는 개인인 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임하게 되는 것을 말씀하시고 명령하신 것이다. 그리고 다 하나가 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이웃 사랑을 내 몸 사랑하는 구약의 기준이 아닌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과 같이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내 기준이 아닌 타자 기준으로 사랑하는 것)을 실현하는 것이 페리코레시적인 것이 나에게 이루어지는 코이노니아요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사도요한에 의하여서 요한일서 1장3절에서 제자로서 실천한 구절이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명령을 받은 제자인 사도요한이 예수님의 말씀처럼 너희로 우리와 사귐(fellowship:코이노니아)이 있는 것이고, 이 사귐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요한복음에서 명령하신 것을 반복적으로 사도요한이 실천하고 있는 것을 설명하는 것으로 요한복음에서는 방식이 Top-Down 방식이었다면 요한일서에서는 Button-Up방식이라는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 상호간의 페리코레시스적 연합이 먼저 교회에서 중국인과 몽골인과 한국인 상호간의 사이에서 코이노니아로 나타나야한다. 초대교회는 분명 예수님의 메시지인 하나님 나라 복음으로 유대인과 헬라인이 다문화가 하나된 공간이었다.
이렇게 ‘주와 함께 가는 나그네’(시39:12)가 이루어지는 다문화가 교회에서 먼저 예수님으로 다민족이 하나가 되고(요17:21), 각자의 마음속에 주님을 모셔 들이는 자리는 타자인 외국인도 또한 연약한 존재들도 받아들일 수 있는 자리가 된다. 이러한 것이 초대교회와 같이 사회적으로 Movement가 된다면, 5천만 명과 5백만 명의 사람들이 예수로 하나가 된다면, 하나님이 우리 한국에게 주신 5백만 명의 외국인들은 진정한 축복이고, 이것은 가는 선교와 오는 선교가 서로 연합되고, 서로가 하나가 되는 장이 실현된다면 전 세계적인 기독교인 비율, 마의 30%의 벽을 넘는 선교적 돌파가 일어나게 되는 힘이요 축복이 될 것임을 믿고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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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트릭 존스톤, 세계교회의 미래, IVP, 2010, p.88.
설동훈, 외국인노동자와 한국사회, 서울대학교출판부, p.423
Operation world, 중국
패트릭 존스톤, 세계교회의 미래, IVP, 2010, p.201.
재한몽골교회기독교인 1천명/2015년말 재한몽골인 30,527명 = 3.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