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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성지 순례기
1. 기간 : 2002. 1. 7 ~ 1. 16 (9박 10일)
2. 소요 비용 : 1490,000원
공항이용료 25,000 비자비 50$ Tip 50$
3. 일정 (이집트 ,이스라엘)
4. 성지순례의 개요
주님의 소명으로 2001년 9월부터 출애굽기 과정 성경공부를 시작하게 되었고, 신부님의 명해설로 이어지는 신앙학교에서 성경말씀을 좀더 이해하기 쉽게 되었다. 늘 성지순례를 다녀와야 되는데 생각은 있었지만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성경공부를 뒤늦게 하게 됨으로서 성지순례 기회가 왔다.
2002년 1월 7일 20시 45분 KAL로 인천공항을 출발, 이집트 카이로로 향하는 성지순례단은 목사님 4분, 카톨릭 신자 5분, 선생님 2분, 그 외의 교회의 장로님을 비롯해서 총 29명이었다. 우리는 기원전 1250년경 히브리인(이스라엘 민족)들이 어떻게 해서 노예살이를 하던 이집트 땅에서 탈출을 했는지 야훼께서는 억압당하는 백성의 부르짖음을 듣고 그들을 해방시켜 당신과 계약을 맺게 하셨는지 그 현장을 찾아 성지순례를 시작하고 있다.
고대 문명의 발상지였고 많은 제국들이 탐냈던 땅 이집트. 요셉의 가족이 바로의 폭정을 피해 피난와서 살았던 곳. 요셉이 총리였고 하느님의 백성이 430년간 살았던 곳. 수에즈 운하 터널을 건너 출애굽 주 무대인 황량한 광야의 길을 달려 마라의 샘에서 잠깐 내려 그 옛날 오아시스의 종려나무 아래 샘터는 생명의 물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메말라 있다.
이집트 카이로에서 수에즈 운하를 통과, 시나이 반도를 지나 황량한 사막을 하루종일 달려 간다. 마라의 샘, 르비댐을 만나며 바윗산과, 돌산, 모래산과 흙산이 번갈아 나타나는 바란 광야의 메마른 풍경을 내다보며 이스라엘 백성의 원망소리를 듣는 듯 했다. 만나와 메추라기,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아니면 광야는 곧 죽음, 홍해북단의 국경도시를 지나 몇시간을 달려도 여전히 광야.
기원전 13세기 람세스 2세의 폭정 아래 노예 생활을 하는 이스라엘의 백성의 불평불만은 인간적인 불평이 아니었는가 생각해 본다.
시나이산 밑에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가르쳐주신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새벽 2시에 일어났다. 버스에서 가이드 선생의 성경구절에 대한 설명. 기독교 신자들은 성경에 대해서 잘 알고 외우고 있다.
시나이 산에 오르는 길에는 폴란드, 소련, 리투아니아, 영국, 미국 등 여러나라 관광객이 새벽부터 순례길에 나섰다. 일부는 낙타를 타고 올라가고, 일부는 손전등을 켜고 시나이 산의 초생달과 북두칠성을 보며 눈발이 날리는 쌀쌀한 날씨라 아주 추웠다. 낙타를 타라고 호객하는 베드윈들은 10$이라고 소리지른다. 낙타를 타고 1시간 30분을 올라가면 매점에서 내리게 된다. 여기서 시나이산의 750계단을 한 30분 오르게 되면 정상에 도착하게 된다. 우리는 일부는 낙타를 타고 새벽 4시쯤 모세가 올랐던 시나이산 정상 2285m 올라서 산상예배를 보았다.
이스라엘 국경을 통과한 우리는 사해를 지나서 북쪽으로 가고 있다. 사해는 무용지해가 아니다. 이스라엘이 자랑하는 부의 보고, 각종 광물질과 약품원료가 추출될뿐 아니라 인근의 산소농도가 높아 좋은 휴양지, 화장품의 원료로도 사용된다. 쿰란은 성경을 발견한 곳이다. 양피두루마리에 기록된 구약사본이 최근 발견된 쿰란 동굴을 보았고, 유대 민족의 성지 마사다 요새는 3년에 걸친 로마군의 집요한 공격에 저항하던 유대인 전사와 가족 960명이 함락직전에 자결한 곳. “적의 노예가 되느니 명예롭게 죽자” 유대인의 근성을 나타낸 감동적인 고사다. 갈릴리 호수에서 선상 미사, 주님의 첫 번째 기적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가나 혼인 잔치 교회. 팔복산, 가파르나움, 여덟가지 참된 행복의 선상 설교, 게쎄마니 오병이어 교회, 베드로 회개 기념 성당, 성서의 지명과 인물과 사건을 증거하는 기념장소를 방문하고 있다.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를 중심으로 벌였던 복음의 중심지 가파르나움은 예수께서는 이곳에서 여러 가지 크고 작은 기적을 행하시고 활동하신 중요한 장소이다. 예수님 당시에는 제법 큰 마을로서 마을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주로 설교하셨다. 또한 복음 전파의 중심지였다. 그 설교는 생전 처음 듣는 놀라운 것들이어서 나날이 말씀 들으러 오는 사람이 증가하고 이곳에서 베드로의 장모를 치료하고 ,귀신들린 자에게 귀신을 몰아내고, 문둥병과 중풍 환자 모든 환자들을 낫게 하는 기적을 숱하게 보이셨던 곳이다.
주일에는 황야의 언덕에서 야외미사를 드렸다. 집전한 목사님은 익산의 신기 교회의 서용운 목사님이었다. 설교내용은 여권을 안가지고 인천공항에 나와 다음날 집에서 여권을 가지고 나와서 이집트로 같이 떠나지 못하고 다른 경로로 입국하게 된 것에 대해서 하느님 은혜에 감사드린다. 그러므로 광야를 볼수 있었고 너무나 많은 감동을 받았다. 모세에게 신발을 벗게 하시고 음성을 듣는 듯 했다. 하느님께서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아니면 엘리아 예언자가 탈진했을 때 갈릴리 호수 물에 빠진 베드로를 구해주시고 예루살렘, 베들레햄 순례 성지마다 교회 성당의 많은 신자들이 시간을 할애하여 순례하고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가신 길이 동대문 시장 같은 팔레스티나 상점과 또 성지마다 소매치기를 두려워 하는 우리, 종교의 전시장 순박한 성지를 보고자 하는데 철조망을 넘어 쇼핑의 조건으로 베들레햄을 방문하는 우리들. 밝은 팔레스티나 어린아이의 눈으로 예수님을 보게 된다. 촛불을 들고 어린 아이의 미사하는 모습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닌가. 종파 교리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말하고 싶다. 복음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사람들의 벽의 현실을 보게 된다. 에페소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벽을 헐려고(율법) 안식일을 지키고, 모자를 쓰고, 율법에 도전하려는 십자가를 지고 부활이 이방인의 벽을 허물면서 돌아가셨는데 여전히 높은 벽을 실감한다. 하느님의 살아있는 말씀 우리 자신에게 일생의 처음보는 합동미사이다. 형제요 자매 이것이 제일 소중한 성지순례이다.
가이드 선생의 말씀
① 사과 반쪽을 가지고 큰 쪽을 양보하면 자기 삶이 풍성해진다.
② 마음의 눈, 신앙의 눈으로 구름기둥을 따라 이동하고 어두울 때, 추울 때는 불기둥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영광을 얻는다.
③ 마음의 여유를 갖자.
1) 신앙 체험
구약의 출애굽 코스를 따라 성지순례를 함으로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끈 과정과 지역을 체험하면서 마음을 열고, 마음으로 느끼고 신앙의 눈으로 느꼈다. 가파르나움, 예루살렘, 베드레헴, 홍해, 갈릴리 호수, 십자가의 길, 예수님 무덤, 황야의 체험, 황야 산상 미사, 갈릴리 호수 선상 미사, 시나이산 정상에서 새벽미사, 모세에게 십계명을 가르쳐 주신 예수님을 만났다. 또한 기쁨이 넘쳐 사는 보람을 느꼈다.
2) 예수님께 감사드리며 찬미한다.
전 세계인이 하느님의 자녀이다. 이슬람(알라), 기독교(천주교, 장로교), 유대교 등 세계 각처에서 순례자들이 성지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 와서 하느님께서 생활하시고 순례하신 길을 걸으며 신앙심을 두텁게 한다. 기독교인들과 교류하며 성가를 부르며, 성경말씀을 봉독하고 합동미사를 드렸다.
3) 마음을 비우자.
욕심을 버리고 어린 아이가 된 기분으로 신앙생활을 하자. 삶을 풍성하게 우리 가정의 가장으로서 가족의 평화 신앙으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고통에 시달리고 가난한 사람을 위해 희생과 봉사를 할 수 있는 용기를 갖도록 많은 기도를 드려야 겠다. 매년 한 번 성지순례를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계획과 예산을 확보해야 겠다.
5. 성지순례지(이집트, 이스라엘)의 설명
1. 이집트(EGYPT)
햇빛이 넘치는 태양과 흐릴 줄 모르는 창공의 나라 이집트. 그 이집트 중 남에서 북으로, 지중해로 유유히 흐르는 나일강.
이 땅에 인간이 생활하게 된 것을 수십만년이나 되는 구석기 시대였습니다. 얼마 후에 사람들은 나일강이 실어 온 살찐 땅을 이용하여 농업을 시작하고 국가를 만들고, 또 세계 최고의 문명인 고대 이집트 문명을 쌓은 것이다. 기자의 스핑크스를 앞에 하고 나폴레옹은 자기가 이끌고 있는 병사들을 향하여 “여러분 4000년의 역사가 여러분을 지켜보고 있다”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피라미드도, 갈낙의 대신전도, 투탕카멘의 황금 보물들도 오랜 세월을 거쳐 현재에 소생하는 고대인의 메시지를 간직하고 있다.
역사의 나라, 이집트는 언어 풍부하게 말해 옵니다. 그런 꿈과 신비, 시간의 여행에 출발합시다.
세계 4대 문명 중의 하나인(기원전 3000년~기원전 332년 지속) 고대 이집트 문명이 시작된 것은 기원전 3000년대의 일로 나일강을 중심으로 고도의 문명이 탄생했다.
또 이집트의 매력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2개 대륙을 연결하는 교통 요충지로서 지중해와 홍해에 둘러 싸여 있어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 중요한 요소를 갖추고 있다. 예를 들면, 모세가 십계를 받은 곳으로 알려진 시나이 반도의 시나이산(모세산)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성지이다.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은 모세의 궤적을 더듬으며 눈믈을 흘린다. 그 곳에는 마치 구약성서 같은 광경이 펼쳐지고 있으며 하늘 가득 떠 있는 수많은 별들과 유성들이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예수가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기거했던 곳도 바로 이 곳 아수유트 주변이다.
이집트 5000년의 역사는 크게 세단계로 나눈다.
1) 고대 이집트
2) 기원전 332년 마케도니아 알렉산더대왕 침입으로 시작되는 그리스, 로마 지배하의 시대
3) 서기 641년 아랍이 이집트 침입으로 시작한 이슬람시대이다.
<고대 이집트>
古王國, 中王國, 新王國 으로 나누어져 있다. 고왕국시대는 기원전 3000년 경 메네스왕에 의해 처음으로 이집트 전역이 통일되면서 역사가 시작되고 기원전 2650년경 멤피스를 수도로 하는 고왕국 시작 사카라의 유명한 계단 피라미드는 고왕국시대를 창시한 제세드왕에 의해 만들어짐. 이어서 스네르프 왕이나 기자의 피라미드를 만든 쿠푸왕, 카프레왕, 멘카우레왕 등이 등장하면서 고왕국시대는 최전성기에 돌입한다.
기원전 1550년경 드디어 아하메스왕이 학소스를 이집트로부터 추방하고 테베를 수도로 하는 신왕국을 세움. 신왕국시대는 제 18,19,20으로 나뉘어진다.
제 18왕도에서는 우리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투탕카멘왕 등이 등장함.
기원전 1320년경 장군이던 람세스가 왕으로 즉위하고 제 19왕조를 세움. 그 후 한동안 모든 왕에게 람세스라는 이름이 주어져 람세스 1세부터 람세스 2세까지 이어짐.
제 4왕조의 왕들이 전제적인데 비해 그 후의 왕들은 점점 약화되어 스스로의 권위의 중심을 태양신에 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태양신의 숭배는 지상에 있어서 권력을 가진 자 즉 왕에 대한 천상의 존재로서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이때에 그 유명한 피라미드가 건축되기 시작했는데 이 피라밋이 당시 왕들이나 왕의 지배하에 놓여 있다. 백성들이 보기에는 실제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음. 그것은 왕이 백성을 지배하는 신적인 존재를 간주케했으며 그가 이 세상을 떠남으로서 본래 태어나왔던 신에게로 다시 돌아갈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처음에는 이러한 의식들이 오로지 왕을 위한 것이었으나 곧 왕실의 귀족들도 왕의 무덤 주위에 일정하게 줄을 지어 그들의 무덤을 가지게 되었다.
이집트인들은 영혼이 저승에서 계속 살아 가려면 반드시 그 육체가 보존되어야 한다고 믿고 왕들의 시체를 정교한 방법으로 미이라를 만들고 얇은 천으로 그것을 감아 부패를 방지했다. 그들은 육체의 보존만으로 충분치 않다고 믿고 조각가들로 하여금 왕의 두상을 조각하도록 명령, 왕의 절대적 권위와 영원 불멸성을 나타내게 함.
<성서말씀>
(창세기 12.10)
고대에 유복했던 이 땅은 굶주린 성조들이 몸 붙여 살던 곳이요.
(에레미아 42)
패전한 이스라엘인의 피난처이다
(마태오 2.13)
예수께서 피신한 곳이기도 하다.
(출애 1~13장)
막강한 국력을 자랑하던 이집트 제국은 일찍이 히브리인들을 억압하기도 했으나
피라밋의 건조의 동기도 왕들은 다시 환생한다는 종교적 신앙에 있었으며 그들의 시신을 미이라로 만들어서 보관하여 환생에 대비했다.
<이집트의 위인>
쿠푸왕(BC 2550년경)
고왕국시대 제 4왕조의 왕이다. 세계 최대의 무덤인 기자 제1의 피라미드를 건설한 왕으로 유명. 그 피라미드는 2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거쳐서 건설됨.
투탕카멘왕(BC 1361~1352)
신왕국 제 18왕조의 왕. 9세 즉위 18세에 죽은 무명의 왕. 무명이기 때문에 무덤이 도굴되지 않아 박물관 2층 절반의 보물이 발견됨.
람세스 2세(BC 1304~1237)
신왕국 제 19왕조의 왕. 이집트 각지의 신전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놓았을 정도로 자기과시욕이 강했던 왕. 부인은 정실 4명, 측실 200명 이상, 자식도 왕자 공주 합하여 200명 이상이나 되었다고 함. 그의 치세는 67년간 지속. 그는 모세가 이집트를 탈출한 시기의 왕이기도 하다. 당시 왕은 다른 왕국시대와는 달리 국가의 영웅적인 존재. 게다가 군대의 지도자로서 선두에서의 적진을 돌격했으니 건장한 체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알렉산더 대왕(BC 332~323)
그리스의 마케도니아 왕으로 장기원정을 통해 유라시아 대륙에서 아프리카 대륙에 이르는 대제국을 구축. 고대 이집트 말에 왕조의 혼란을 틈타 이집트를 정복하고 대도시 알락산드리아를 건설하였다. 그 후 고대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없는 대형도서관과 박물관을 갖춘 이 거대한 도시는 세계학문의 중심지로서 번영하였다.
클레오파트라 7세(BC 51~30)
그레코 로만시대 프톨레 마이오스 왕조 최후의 왕. 정치에 탁월한 능력을 갖고 이집트 독립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능력과 재능을 발휘했으나 로마군에게 멸망
2. 나일강(THE NILE RIVER)
아프리카의 빅토리아호에서 발원하여 지중해로 흘러드는 세계에서 가장 긴 강으로 길이 6690km. 이집트를 거쳐 가는 길이만도 1280km에 이른다. 나일강 유역은 나일 계곡의 비옥한 흑색 충적토로 인해 고대로부터 농경이 발달하였다. 이 비옥한 충적토는 아스완 하이댐이 완성되기전 매년 여름철 3개월동안 발생하던 나일강의 범람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보면 “북으로 간다”의 뜻으로는 “돛없는 배가, ‘남으로 간다’의 뜻으로는 돛있는 배가 그려져 있다.나일강에서는 배가 하류인 북쪽으로 갈때는 돛이 없어도 강물의 흐름에 따라 떠 내려 갔지만, 남쪽인 상류로는 돛을 올려 바람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3. 카이로(CAIRO)
이집트 수도이자 아프리카 최대 도시인 카이로에는 인구 1200여만 살고 있다. 나일강 삼각주의 요지에 자리잡은 카이로는 눈을 구경할 수 없는 상하의 나라 ,수은주가 겨울에도 10℃이하로 가는 일이 없고 습기가 없어 그늘진 곳에만 있으면 시원하다. 카이로는 현대와 중세가 혼합되어 조화롭고 이그조틱한 분위기가 넘치고 있다.
카이로 아침은 앗잔의 애조띤 음향과 함께 시작된다. 앗잔이란 모스크의 미라렛(천탑)에서 이슬람의 예배시간을 알리는 호소이다. 카이로는 [천개의 미나렛을 가진 도시]로 알려진 도시. 근대 카이로는 많은 구 도시와 파라오의 피라미드, 고대 기독교 사원과 교회, 살라알딘의 시타델, 맘루크 사원, 오토만 술탄등의 유적을 지니고 있다. 5천년 문화가 세 개의 대륙 중심적인 카이로이다.
4.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이집트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 온화한 기후, 눈부신 햇살, 하얀 파도 중동의 어느 곳보다 지중해의 정취가 강하게 배어 있는데, 비록 카이로에서 225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지만 환경과 문화유산은 이집트 어느 지역보다 우수하다. BC 331년 알렉산더 대왕이 세운 이 도시는 그리스-로마시대는 이집트의 수도였다. 알렉산드리아는 “파로스”등대를 심벌로 할수 있는데 파로스 등대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이다. 클레오파트라와 막 안토니가 어려운 관계를 하며 거주했던 도시이다. 그 후에 19세기부터 이 도시는 이집트가 상업과 해상 무역을 확장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5. 룩소(Luxor)
예전에 테베라고 불리던 곳으로 중왕국, 신왕국 시대에는 수도로서 번영을 구가하였다. 중왕국시대 제 12왕조 이후 이지만 전성기를 500년 동안 신왕국시대 제 18~20대 왕조였다.(BC 1570~1080)
중왕국시대까지는 피라미드 콤플렉스처럼 무덤과 장제전, 하안 신전이 하나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신왕국시대로 들어서면서 왕가의 골짜기와 같은 암굴분묘와 핫셉슈트 장제전으로 대표하는 신전으로 나뉘어진다.
룩소는 세계에서 가장 큰 야외 박물관이다.
이 곳에는 이집트 고대문화의 놀랄만한 유물들로 가득 차 있다. 신왕조(BC 1567~1085)시대에는 룩소가 이집트의 수도였으며 이름은 웨세트였다. 후에 테베로 이름은 바뀌어졌고 불후의 명성을 바라는 마음으로 쌓은 모래들과 대리석에 새가 영생을 기원하는 모습, 사원, 왕릉, 궁정은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1) 네페타기의 묘
이집트 여왕들이 묻힌 계곡, 살아있는 듯한 벽화와 비석 새겨진 글씨 등이 유명
2) 툿-앙크-아문 왕릉
BC 1352년 세워진 역대 왕릉 무덤 “왕들의 계곡”에서 가장 유명한 무덤
3) 하쳇숩 여왕릉
이집트를 통지했던 유일한 여성 하쳇숩은 그의 무덤을 “제세르 제세루”라고 불렀다.
4) 카르낙 신전
6. 시나이 반도
지형이 역삼각형으로 생긴 고지대로 약속의 땅으로 통하는 길이며 동쪽변은 아카바만을 사이에 두고 아라비아 반도와 이스라엘에 접하고 남쪽 모서리는 홍해에 면한다. 또 서쪽은 수에즈 운하와 수에즈만을 사이에 두도 이집트와 마주보며 북쪽변은 지중해와 맞닿는다. 따라서 시나이 반도는 아시아 대륙과 아프리카 대륙을 잇는 교량 역할을 한다고 하겠다.
면적 6만 1000km²이스라엘의 2.2배이지만, 몇군데의 오아시스를 제외하고는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 없는 불모지이다. 널따란 광야와 사막에는 층암절벽들이 있으며, 우뚝우뚝 솟은 바위산은 햇빛에 따라 다양한 색깔을 보여준다. 6일 전쟁 후 이스라엘이 점령하였으나 지금은 이집트 영토에 속한다. 이 반도에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야곱, 요셉과 그의 형제들, 그리고 모세와 출애굽 때 40년간 방황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발자취가 남아있다. 광야는 바로 만나의 기적, 마라의 샘, 르비담, 바위에서 솟은 물, 구름 기둥과 불기둥, 시나이산의 십계명 등 구약성서의 감동적인 이야기가 전개된 무대이며 그리스도인 뿐만 아니라 유다교인들과 이슬람교인들 역시 순례를 통해 신앙을 체험함. 모세 기념 성당과 가타리나 수도원, 희랍 정교회 소속 성 캐더린 수도원의 유적들이 길이길이 순례자의 머리 속에 남을 성지들이다. 이곳 지질은 아라비아 사막과 흡사하며 대부분이 사막지대로 형성되어 있다. 북부는 석회암 고원지대이며 남부는 복잡한 구조의 화강암 산악지대. 이다.
7. 시나이산(Mt. SINAI)
시나이산은 모세산 혹은 가발무사라고 불리고 있다. 아랍어로 가발은 산이며 무사는 모세를 뜻한다. 해발 2285m의 높이로 성서에서는 모세가 이 곳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은 성지이다. 시나이산에 오르는 코스는 계단 루트와 카멜루트가 있다. 일반적으로 세인트 캐드리나 마을의 호텔에서 묵고 다음날 새벽 2~3시경 수도원 앞으로 이어지는 카멜루트(1인당 10$)을 통하여 낙타를 타고 갈 수도 있다. 산 정상으로 올라가 일출을 감상하고 산상미사 집전 후 하산하는데 왕복 4시간 이상 소요된다. 특히 시나이산은 출애굽과 직접 관련되는 곳으로서 하느님 발현 장소로 출애굽기와 민수기 도처에서 언급되고 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으실 때 이스라엘 백성은 시나이산 앞에 진을 치고 있었다(출애 19-24장), 모세는 그 계약의 중재자로서 계약을 맺고 하느님의 말씀(십계명)을 받아(출애굽 20.1~24.8) 그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고자 산에서 내려왔다(출애 19.14) 그리고 모세는 시나이산에서 40주야를 지내기도 했다(출애 24.18) 하느님께서 시나이산에서 당신의 모습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이실 때, 우레와 번개가 치고 산 위에 짙은 구름이 덮였으며 그리고 큰 나팔소리가 울려 퍼졌다(출애 19.16) 시나이산에서 연기가 자욱하니 하느님께서 그 불 가운데서 나타나셨고(출애 19.18), 모세에게 특별한 사명을 주셨다고 함(출애 3장) 그런데 시나이산 이외에도 호렙이 하느님의 산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출애3,1; 신명1,2:4 ,10:5,2:1,열왕19,8) 호렙은 히부리어로서 황량한 지역, 사막,광야를 가리킨다.호렙산이 시나이산과 지역적으로 다르다는 근거를 문헌상 찾아 볼수없다. 따라서 시나이산과호랩산은 서로 다른산이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산을 가르킨다고 보는 것이 학자들 사이에 통설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경로가 아직 분명치 않아 확실한 시나이산은 알수없으나 기원후 4세기부터 모세기부터 모세의산 이라고 전해 내려오는 가발 무사(아랍어)의 산이 시나이 산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가발무사는 해발 2285M의 돌산 이다. 그 정상에는 모세가 40일 동안 머물렀다가 하느님께서 돌로된 증거판 2개를 받은 장소가 있는데 그곳에다 모세의 교회를 세웠다.
날씨가 쌀쌀하고 눈발이 날려 아주 추웠다. 정상 매점에서 끓인물을 1$ 주고사서 신라면을 끓여 먹었다.
8. 성 캐더린 수도원(St. Catherine)
시나이산 밑에 있는 희랍 정교회 소속인 성 캐더린 수도원은 기원후294년 알렉산드리아 귀족 가문의 한 여자가 순교한 것을 기념하여 4세기경에 이집트의 기독교인들에 의해 처음으로 세워졌고 그후 527년 비잔틴시대 자스티안 형제에 의해 다시 세워져 지금도 그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이수도원에는 세계에서 제일 오래된 도서관이 있는데 그안에 기원후 4세기경의 루가복음 시리아 사본이 보관 되어있다.
희랍의 알렉산드리아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캐더린은 용모와 학식이 출중했다. 그녀는 예수님을 받아 들이면서 세례을 받고 황제의 우상숭배를 비난, 황제는 여러 학자들을 보내 회유 하려 했으나 그들 마져 예수를 믿게 되었다. 결국 캐더린은 고문을 받고 순교를 하게되었다. 그녀의 시신은 천사에 의해 시나이산 제일 높은곳에 옮겨진다. 이사건 이후 시나이산 수도원이 성 캐더린수도원으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이수도원의 역사적 배경은 3세기 중엽부터 수도사들이 찾기 시작했고 AD330년 헤레나 모후가 불붙은 떨기나무 자리에 성모마리아에게 헌납하는 교회를 지었다.
9. 성 마리아 곱트 정교회(아기 예수 피난 교회)
이곳은 예수 아기와 성모마리아,성요셉이 이집트 피난길에 잠시 머물렀다가 배를 타고 상 이집트로 간 것으로 알려진곳이다. 현재 이집트에는 성가정 일가가 피난 하면서 머물렀다는 장소로 전해 지는곳이 10여군데가 넘는다고 한다. 그중 한곳이 구 카이로에 있는 아브사르카 교회이다. 이곳은 기독교 마을 이라고 하느데 이스람교회가 들어오기 수백년전에 이미 그리스도가 번창해 있었기 때문이다.
*콥트교
원시 기독교중 하나로 그리스 정교회에 속한다.AD37년 세인트 마르코에 의해 기독교의 포교가 시작 되었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고 40년경에 알렉산드리아에 교회의 초석이 마련되었으며 2세기경에는 콥트교회 교도들이 상 에집트 까지 퍼졌다. 콥트교는 모노 피지트(그리스 단성론)를 주장하여 451년의 칼케든 공의회에서 이단 선언을 밭고 있다.
*세인트 조지교회
이교회는 대부분 지하에 파뭍인 형태로 지어져있다. 건물 자체가 상당부분 파손 되어 있으며 내부는 어둠 침침하다. 이곳은 예수 일행이 고난을 피해서 이집트로 건너 왔다고 하는 신약성서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으며 당시 예수 일행이 머물던 장소에 세운 것이 세인트 조지 교회라고 한다.
10.피라미트(PYRAMID)
고대 이집트 왕국 전성기 제4조욍조시대 기원전2500년전 건조된 왕조들의 묘소가 피라미트이다. 대피라미트는 10만명이 동원되어 3개월 교대로 20년에 걸쳐 건조 했다고 한다.(연인원2-3억명)
이집트 전체에서 94개의 피라미트가 발견 되었으며 가장 대표적인 것은 가자지역의 피라미트로서 세계7대 불가사이의 하나인 쿠프왕의 피라미트는 235-268만여개 정도의2.5-10톤의 화강암으로 구성 되었다.
석회암은 모깔담과 기자 남동쪽 15K 지점의 엘뚜르등에서 캐내어 이용 하였다. 화강암에 경우는 카이로 남쪽 850K 떨어진 아스완에서 나일강을 통하여 운반 하였다. 돌을 쌓은 단층수는 원래 210계단 이었으며 현재 남아 있는 것은 203계단이다. 밑면의 길이230.3M 겉표면의 있었던 돌의 17만여개는 아랍과 터키 점령하에서 건축 자재로 재활용 되느라 벗겨졌다.
원래 높이(m) |
현 높이(m) |
밑면 |
부피(m²) |
무게(t) | |
쿠푸왕 |
146.5 |
137.2 |
230.3 |
2,590,000 |
650만 |
카프레왕 |
143.5 |
136.5 |
214.6 |
2,200,000 |
550만 |
멘카우레왕 |
66.5 |
62 |
104.7 |
239,000 |
60만 |
피라미드는 단순한 무덤이 아니라 해시계이며, 달력, 동시에 천문대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지금으로부터 4,500년전 어떻게 이런 엄청난 건축물을 만들 수 있었는지? 단순히 왕의 무덤으로 쓰기위해 만든것인지 아니면 또다른 목적이 있었는지 ,이 모든 돌은 다 어디서 가져 왔는지 등등, 한 개당 돌의 평균 2.5톤의무게, 230만개가 들어간 피라미트는 당시의 토목기술이나 건축기술로 쌓은것 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정교하고 튼튼해서, 앞으로 몇 천년쯤 더 버티기 충분 할 것 이라는 느낌이든다.
또한 이곳으로 무덤장소로 정한 이유는 해가 지는 서쪽에서 태양신을 만나 사후 세계에 이른다는 ,고대 이집트, 이들은 사후에도 신의 심판을 거쳐 영원히 살며 언젠가 육체였던 미이라로 돌아와 환생을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11. 스핑크스(SPHINX)
스핑크스는 고대 동양신화에 나오는 괴물로서 사람의 머리와 사자의 몸체를 가지고 있다. 왕의 권력을 상징하는 모솝으로 표현된 것인데, 이집트, 앗시리아의 신전이나 왕궁,분묘등에서 볼수 있다. 그중에서도 이집트의 기제에 있는 제4왕조 (BC2,650년경) 카프레왕의 피라미트에 딸린 스핑크스가 가장 크고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자연암석응 이용하여 조각한 것인데, 군데군데 보수한 흔적이 있다.C
이 스핑크스의 전설은 여러 민족에게 퍼져 있는데 특히 그리스 신화에서는 에키드나와 오로토로스의 아들, 또는 라이오스의 딸이라는 등 여러 가지 전설이 있다. 그 중에서도 테베의 암산 부근에 살면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아침에는 네 다리로, 낮에는 두 다리로, 밤에는 세다리로 걷는 짐승이 무엇이냐”라는, 이른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내어 그 수수께끼를 풀지 못한 사람을 잡아 먹었다는 전설은 유명하다. 그러나 오이디푸스가 “그것은 사람이다(사람은 어렸을 때 네 다리로 기고, 자라서는 두 발로 걷고, 늙어서는 지팡이를 짚어 세 다리로 걷기 때문에)”라고 대답하자 스핑크스는 물 속에 몸을 던져 죽었다고 한다.
피라미드의 수호신인 스핑크스는 몸체의 길이가 73미터, 높이가 20미터, 머리폭이 4미터나 된다. 스핑크스의 코가 날아가 버린건 나폴레옹이 이 곳을 점령하면서 대포알의 표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12. 오윤무사(마라의샘)
모세의 우물 이라고 부른다. 스에즈에서 54km, 터널에서 홍해변으로 남쪽 26km 지점에있다. 한때 100여개의 우물(샘)과 500여 그루의 종려나무 자리 했던 이곳은 현재 거의 말라가는 우물 하나와 우물터 몇 개가 있다, 그리고 이종려나무외에 다른수종이 보이는데 이나무는 상수리과에 해당하는 에셀 나무이다, “마라” 쓰다는뜻. 홍해변에 위치한까닭에 물이 염수 였을 것이다, 오윤무사를 마라로 간주 하기도 하지만 이지점 보다 80km 남쪽의 “아인 하와라” 지역을 마라로 추정하는 것이 더욱 설득력이 있다, 그것은 홍해(갈대바다)를 건넌후3일 길을 걸어서 도달하였다는 점과 엘림과 근접한 지점 이었다는 접을 고려 할 때이다.
(출애굽15:23)
마라에 다다랐으나 그곳 물은 써서 마실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고장을 마라 라고 불렀다.
(출애굽 15:24-25)
백성들은 모세에게 무엇을 마시라는말이냐고 하면서 두털거렸다. 모세가 야훼 께 부르짖자 야훼께서 나무 한그루를 보내주셨다, 그 나무를 물에 던지니 단물이 되었다. 야훼께서는 바로 여기에서 그들이 지켜야 할 규칙을 주시고 그들을 시험해 보셨다.
13, 르비딤,
현재 “와디 베이란” 또는 “와디레파이드” 로 시나이 반도의 오아시스 종려 숲이 있다. 홍해에사 60km 시나이 산에서 54km 떨어진 이 “바란 오아시스:는 시나이의 진주로 불리은다,
(창세기 21:19)
“하느님 께서 하갈의 눈을 열어주시고 그의눈에 샘이 보였다. 하갈은 큰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아이에게 먹였다”
하갈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장소. 아드로가 양을 치던 장소이며 아말렉족과 싸움을 벌인곳이다, 이곳에는 현재 모세기념 성당과 여자 수도원이 하나 보존 되어 있다.
(출애 17:1)
이스라엘 백성은 회중은 신광야를 떠나 야훼의 지시대로 진지를 옮겨가면서 전진 하였다, 르비딤에 이르러 먹을 물이 엀는것을 보고.
(출애 19:2)
그들은 르비딤을 떠나 시나이 광야에 이르러 그 광야에 진을쳤다. 이스라엘이 그곳 산앞에 진을 친다음.
이 스 라 엘
1, 이스라엘(ISRAEL)
지중해의 동쪽맨끝 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쪽 레바논, 동북쪽 시리아, 동쪽 요르단, 남서쪽에 시나이 사막을 갖고있는 이집트, 그리고 서쪽에 위치한, 아시아, 아프리카, 유롭의 교차로에 위치한 이스라엘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의 유적이 남아있고 예로부터 동과 서가 만나는곳 이었으며 예언자들이 태어낳고 예수 그리스도 가 탄생한곳으로 그분의 불멸의 가르침과 율법을 통하여 3대 일신교인 그리스도교, 유대교, 회교가 일어난 인류가 선과 도덕에 눈뜨게 된곳이다. 유대인들에게는 이곳이 경전의 땅이고 ,과거의 영광이 있는 땅이며 그리스도인들 에게는 예수가 태어나셨고 ,고난을 받으셨으며 ,그분의 거룩한 말씀을 듣고 그분의 기적을 목격했던 땅이고, 회교도에게는 예언자가 하늘에 올라간 승천의 땅인 것이기도 하다..
예로부터 오늘날까지 순례자들이 세계 각지로부터 이 역사와 믿음의땅, 젖과 꿀이 흐르는땅, 어렸을 때부터 들어온 이곳을 직접 보기위해 온갖 고난과 위험, 많은 비용과 시간을 들여가며 찾아오고 있다.
믿음과 사랑의 이 땅은 또한 전쟁과 피와 고통의 땅이기도 하다. 고대로부터 오늘날 까지 전쟁과 테러가 끊일날이 없어 이 성스러운 땅은 피로 물들어져 왔다.
세계 3대 종교의 성지답게 인간의 종교의 혼으로 이루어진땅 이기에, 인간사와 함께 흥망성쇄를 거듭해온 이스라엘, 우리는 하느님을 가슴에 그리며 성서의 무대인 여러 장소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찾아보며, 그 배경과 현장감을 나의 마음을 열고 신앙의 눈으로 , 마음으로, 느끼고 성서를 확인하고 , 나의 신앙을 확인하고, 세계사를 확인하기 위하여 이곳에 순례자로서 야훼의 체험을 경건한 마음으로 주님께 경배하고 기도드리며 느끼고져한다.
*성 지 (THE HOLY LAND) :거룩한 땅
성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시고 생활 하시다가 십자가에 못 밖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땅인 파레스티나마을을 가르키는 용어로써 하느님이 인류사에 직접 관여하신 이스라엘 역사가 이루어진땅을 말한다. 나자렛, 베드레헴, 요단강, 가나, 필립보,가파르나움 , 가이사리아, 갈릴리호수, 타볼산, 여리고, 올리브산, 이외에 성인의 유적지나 순교사적지, 기적이 일어난곳 우리나라는 미리네, 천진암, 베론,새남터, 등이 있다.
*성지순례(PILGRIMAGE)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성스러운땅 즉 성지와 순례자들의 유해가 안치된 곳이거나 성인들의 유적지인 성역을 방문하여 경배를 드리는 신심행위를 성지순례라 한다.
신자들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지를 찾아 전례에 참석 기도하여 그 장소에 얽힌 종교적인 전승을 실존적으로 체험하고 신앙 공동체의 정체성과일체감을 확인한다.
*성지순례의 기원
구약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예루살렘을 향한 순례의 여정 이옛으며 신약시대에 와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 승천후 성모님은 예수님이 승천하신후 매일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가신 그길을 찾아 가셨다고 한다. 이길이 십자가의 길로 가장 처절히 사랑과 눈물로 걸으시면서 아들이 마지막 걸은 길 위에 떨어진 땀방울과 냄새가 십자가상에서 흐린 핏방울의 흔적이라도 찾으려 했을 것이다.
*역사적 변천 과정
① 초기
콘스탄틴 대제(306-337) 와 그 어머니 성녀 헤레나(250-330)는 325-330년에 팔레스티나에서 예수의 무덤을 발견, 그 곳에 성묘 성당을 건축함으로 성지 순례가 활성화 됨. 그 후 예로니모 성인(337-420)에 의해서 이 지역들이 교회의 성지로 자리잡게 된다. 6세기 이후 점차 많은 순교자들의피로 물들어진 로마 순례가 성행되었다가 8세기 이후부터는 성지순례는 신자들의 의무라고 할 정도로 관습화되었다.
② 종교개혁 이후
프랑스 대혁명이후 순례의 르네상스 시대가 전개되었으며 점차 성모님 발현지인 멕시코의 콰달루페, 프랑스의 루르드, 포르투갈의 파티마 등이 새로운 순례지로 신자들의 발길이 끊기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명칭
성서에서 말하는 가나안 땅
가나안 땅 (창세 16.3; 17.8; 민수 34,1-12)
약속의 땅 (창세17, 출애 6.4)
이스라엘 땅 (사무엘 상 13; 19)
유다 (역대 하 24.9)
팔레스티나 (창세 21, 출애 15.14)
오랜 방랑 끝에 약속의 땅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민족은 불모지를 개척하고, 황무지 사막에 새로운 마을을 세우고 기름진 농장, 푸른 숲, 첨단 산업 시설 등을 건설, 2000년 동안의 희망과 약속을 이루려 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주요 역사>
BC 1800 아브라함 가나안 이주
BC 1700 이스라엘 이집트 이주
BC (1300-1250) 람세스 건설 히브리인 부역
BC (1520-1230) 모세, 히브리인 출애굽, 시나이산
BC (1230-1220) 여호수아 요르단강 건너 가나안 정복, 12지파 세움
BC (1330-1010) 사울이 이스라엘 초대왕 등극
BC (1010-970) 2대왕 다윗왕으로 즉위
BC (965-922) 솔로몬이 즉위, 예루살렘 1차 성전 완성, 경배시작
BC (953-930) 이스라엘 왕국 분열
북: 이스라엘
남: 유다 (BC933)
BC 721 앗시리아 사르곤 2세에 의해 북이스라엘 망함
BC 586 시드키야 왕때 바빌론 느붓갓네살 왕이 예수살렘 성전 파괴했고 유다지파는 바빌론으로 끌려감
BC 539 페르시아의 고레스 바빌론 점령
BC 515 제 2차 성전 왕공(예수인 대제관 활약)
BC 350 느헤미아, 에즈라, 역대기, 요나, 시편, 욥기, 말라기 등 완성
BC 334 알렉산더대왕이 팔레스티나 정복
BC 323 알렉산더 바빌론에서 병사 후 그리스 제국 양분(이집트-프틀레메오, 시리아-셀루코스)
BC (320-200) 프틀레메오 왕조 팔레스티나 지배
BC (200-142) 셀루코스 왕조 팔레스티나 지배
BC 63 로마 폼페이우스 장군 시리아 정복, 팔레스티나인 시리아 귀향
BC 43 헤로대 로마 도주 후 BC 37 로마군 지원으로 예수살렘 점령
BC 20 - AD 19 헤로대 성전 중축
BC 4-1 예수 탄생
AD 27 세례자 요한 활동, 예수님 공생활 시작
AD 30 4월 7일 금요일 오후 해지기 전 예수님 처형, 부활, 승천
AD 330 로마에서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천도
AD 326 헤레나 성녀 십자가 발견
AD 570 마호멧 출생
AD 614 페르시아 예루살렘 점령, 교회 파괴
AD 628 비잔틴 예루살렘 수복
AD 638 사라센 오마르 칼리프 예수살렘 점령
회교도가 팔레스티나를 정복
예수살렘을 그들의 3번째 성지로 만듬
AD 1009 파티마 칼리프 왕조의 하킴이 예수 부활교회, 그리스도교르 파괴, 기독교 박해
AD (1096-1099) 1차 십자군 원정
AD (1147-1148) 2차 십자군 원정, 프랑스 루이 7세
AD (1189-1192) 3차 십자군 원정, 영국 리챠드 1세
AD 1244까지 십자군 예수살렘 통치, 몽고인 팔레스티나 침공
AD 1299 터키, 오스만 성립
AD 1517 오스만 이집트 점령, 루터 종교 개혁
AD 1798 나폴레옹 이집트, 팔레스티나 원정
AD 1854 성모 무염시태 교의
AD 1947 이스라엘 공화국 세움
2. 예루살렘(JERUSALEM)
이름조차 아름다운 도시라는 뜻의 예루살렘은 도시 전체가 하나의 유적지이다. 지금까지 쉼없이 발굴이 계속되고 있으며 어느 곳을 발굴하더라도 지하 층층마다 연대가 다른 유물과 유적이 출토되고 있다. 예루살렘은 해발 800m의 유대 산악지대에 발달한 도시로 약 인구 40만명이 살고 있는 이스라엘의 수도이다. 고대 예루살렘 및 유다 왕국의 도읍지 이며 기원전 1000년경 다윗왕이 이 곳을 유대인의 도읍으로 정하고 그의 아들 솔로몬이 화려한 신전을 건설한 이래 유대인에게 있어서 빼놓을수 없는 도시가 되었다. 예루살렘은 그 곳에 사는 사람과 그 곳을 지나가는 사람 모두를 매료시킨다. 유다인 뿐만 아니라 회교도에 있어서도 기독교도에게 있어서도 성스럽고 그리운 도시이다. 그러한 연유로 이 곳을 자기네들만의 것으로 삼고자 다투어 왔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 또는 평화의 근원지라는 뜻을 지닌 이 도시는 히브리어로는 예루살라임, 희랍어로는 예로솔뤼마, 시리아어로는 우루살림이라고 불리며 이집트에서 발견된 텍스트에서는 우루살리뭄 또는 우루슐림우로 표기되어 있다. 회교도들은 예루살렘 도시를 메카나 메디나와 같은 성지로 여겨 엘쿠드스(성지라는 뜻)이라고 칭한다. 기구한 수천년 역사 속에 깊은 인맥을 오랫동안 계속 이어오고 있는 예루살렘은 유다인, 그리스도인, 회교인 모두가 귀중한 ‘성지’(느헤미아 11.1-2)로 여기고 있어 오늘도 수많은 인파의 발길이 그칠 줄 모른다.(이사 2.1-5; 60;1-22)
예루살렘 도시는 지중해 연안으로부터 약 52km 떨어진 지역 해발 720-800 고지에 위치한 곳으로 기흔샘을 제외하고는 샘물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아주 메마른 땅에 자리하고 있으며 서쪽은 힌놈 또는 개헌나 계곡이, 동쪽으로는 키드론 계곡이 위치하고 있다. 이 계곡들 사이에 티로포에옴이라고 칭하는 계곡이 있었는데 모두 뒤덮여져 오늘날엔 겨우 그 흔적밖에 찾아볼 수 없다. 힌놈 계곡과 티로포에옴 계속 사이에는 시온산과 갈바리아가, 티로포에옴 계곡과 기드론 계속 사이에는 오벨산과 모리아 산이 자리한다. 그리고 키드론 계곡 동쪽으로는 올리브산과 스코푸스산이 위치하고 있다.
예루살렘은 구도시와 신도시로 나누어 불려지고 있는데, 구도시는 3000년전 이래의 고대 도시 흔적 위에 서기 16년 오토만 제국의 슬레이만 대제에 의해 세워진 성벽내 도시로 유대인, 기독교인, 회교, 아르메니아 지역으로 이루어진 지역으로 지칭하며 여기엔 성전산, 예수님 무덤 교회(주의 무덤 성당), 통곡의 벽, 최후만찬 기념 성전, 마리아 영면기념 성전(성모 영면 성당), 주기도문 기념 성당, 예수 승천 성당, 도미누스 플레밋 성당, 게쎄마니 성당(만국교회), 베드로 회개 기념 성당, 성 안나 성당, 실로암 샘, 다윗왕의 무덤, 비아 돌로로사(십자가의 길), 갈바리아(해골산의 돌), 예수님의 무덤, 유대인 공동묘지 안토니아섬, 아르메니아 교회, 러시아 교회, 성벽, 엘악사 회교 경당, 역사 박물관등이 있다.
신도시는 구도시 서편에 발달된 신시가지로 이스라엘 국회 의사당, 정부 관공서, 국립 박물관 등이 있는 지역이다.
하느님으로부터 유일신의 보루였던 예루살렘은 사상가들과 예언자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지상의 불의 법칙, 윤리적이고 우회적인 사당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이 곳에서 타오른 새로운 믿음의 불길로 우상숭배와 타락에 빠져있던 수많은 인간들은 정의의 지배와 신앙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되었다. 율법이 시온에서 나온것이며, 야훼의 말씀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유대인들에게는 이 곳은 화려했던 과거와 희망찬 미래의 터전이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수가 지상 마지막 활동을 한 즉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다시 부활한 장소 인가 하면, 회교도인에게는 예언자 마호멧이 승천한 곳이다. 믿음과 평화의 도시이고 가장 성스러운 도시인 예루살렘은 또 한편으로는 폭력과 전쟁 그리고 유혈의 장소이기도 하다. 그 오랜 역사동안 이 곳 후손들은 칼에 의해 무참히 희생되어 갔다. 세계 어디에도 이 곳만큼 많은 전쟁이 있었던 도시는 찾아 볼수 없다. 예루살렘 시내와 그 주변을 걷는 다는 것은 곧 피의 바다 위를 걷는 것과 다름이 없다. 지금까지 이 도시는 50여 차례나 포위당했으며 36차례나 넘게 주인이 바뀌었고 10차례나 파괴되어 왔다. 이 도시가 언급되기 시작된 시기는 아브라함 시대로 평화를 의미하는 살렘으로 성경에 등장한다. 살렘왕 멜기세댁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였다.(창세 14.18) BC 10세기 다윗이 여부스로부터 예루살렘을 점령 수도로 삼았고, 계약의 궤를 도시 안으로 옮겨왔다.
1)올리브산(Mt. of OLIVE) 830m,또는 감람산
올리브산은 키드른 계곡 건너편, 예루살렘동쪽에 위치해 있다. 스크푸스산 남쪽에 이어져있는 해발 830m의 정상에서 바라보는 예루살렘의 아름다운 전경, 아침에는 태양빛을 받은도시가 황금빛으로 빛나고 ,저녁에는 시온산 맞은편으로 가라앉은 태양이 붉게 타오르는 아름다움, 사해까지 펼쳐진 언덕들과 동쪽으로 보이는 모압산맥은 장관을 이룬다.
올리브산은 유대인과 그리스도교인들에게는 의미가 깊은 곳이다. 유대인 들에게는 이곳에서 예언자 하가이, 즈가리아, 말라기가 묻인곳으로, 그리스도교인 들에게는 예수님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의 현장으로 기억 되는 곳이다. 올리브산과 예루살렘은 상당히 인접해 있다. 사도행전1,12에 의하면“그 뒤 사도들은 그 올리브라고 하는 산을 떠나 안식일에 걸어도 괜찮을 거리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올리브산은 예루살렘에서 안식일에 걸을수 있는 거리라고 하니 대략 1km정도 떨어진 가벼운 산책거리쯤 되지 않았나 짐작이 간다. 예루살렘 시가지가 해발 720m정도 되고, 예루살렘시 동쪽에 위치한 이 올리브산은 100m정도 더 높다고 하니 해발820m 이상이 된다고 하겠다. 오늘날 이곳에는 많은 주택들이 즐비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산”이라는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이곳 올리브산은 한때 다윗왕이 압살롬의 소동으로 인해 피신해 지냈던곳(사무엘하15,30-32)이고
‘속죄의 날’에는 이곳에서 번제를 드리기도 했다.(민수19,1-10)
즈가리아와 에제키엘 예언자는 이곳 올리브산을 신현(神現) 의 장소로 언급하고 있다.(즈가14,4)
무엇보다도 이곳 올리브산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발자취를 두루깊게 남겨진 곳으로 그리스도인들 에게는 아주 중요시 되는 성지 이다. 예수께서 베다니아에게 머무르시는동안, 예루살렘 성전에 오고 가실때마다 올리브산 고갯길을 밟으셨다.(마르11,1-27), 한때는 예수께서 예루살렘 시가지를 내려다 보시며 눈물을 흘리시기 까지 하셨고(루가19,37:41-44), 예루살렘 성전을 내려다 보시고 세말에 대한 이야기를 제자들에게 하신 곳 역시 이곳 올리브 산이다.(마르13,1-37), 또한 올리브 산 어느 언덕에서 밤을 지세우기 까지 하셨는데 (루가21,37), 이 언덕을 가르켜 게쎄마니 동산이라 부른다. 이는 히브리어 갇세마님(기름틀)의 희랍어식 발음이다. 이동산은 올리브 산 서편 하단부에 , 예루살렘 구시가지의 성벽 바로 맞은편으로 대략 40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예수께서 자주드나드셨던 곳으로 제자들에게는 두루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루가22,39: 요한18,1-2)
이곳은 또한 예수께서 죽음의 공포와 불안속에서 고뇌하시며 온갖 정성을 다해 성부께 기도 드린곳이요, 유다의 배신으로 인해서 유다 군사들에게 체포되신 곳이기도 하다.(마르14,26-50)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가셨던 곳 역시 올리브 산 어느 부분이다.(사도1,6-12), 이런 유서깊은 곳에 기념성당과 소성당이 자리하고 있어 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곳이다.
올리브산 남서쪽, 좀더 정확히 말해서 예루살렘 성전 바로 건너 편에는 그리스도인들, 유다인들, 그리고 회교도들의 공동묘지가 넓게 자리잡고 있다
2)게쎄마니 동산(The garden of GETHSEMANE)
게쎄마니 동산은 성지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장소이다..
이곳은 올리브산 기슭에 위치하며 오늘날에도 2,000년 전의 모습과 같다. 키드론 계곡을 사이에 둔 맞은편 언덕에는 도시가 번창해 왔지만 이곳은 예수가 살았던 시대. 이후로 전혀 변화가 없이 그 모습을 유지해 왔으며 올리브 나무들도 그때의 것인 것 같다. 사도요한은 이곳을 키드론 개울 너머의 동산이라고 불렀으며 예수가 즐겨 찾아 기도 하신곳 이다. “예수께서는 늘 하시던대로 그 집을 떠나 올리브산으로 올라 가셨다.(루가22,39), 이곳에서 예수는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고난의 밤을 지낸 곳으로 다가올 운명에 대해 고뇌하면서도 모든 인류의 죄를 짊어지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힐 것을 결심한 곳 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일이 아니라면 이잔을 제게서 거두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루가24,42), 이 기도가 끝난 뒤 유다가 대사제들이 보낸 무리들과 함께 와서 그를 배신 하였다.(마태26,47-56: 마르14,43-50: 요한18,3-12: 루가22,47-50) 그러자 제자들은 예수를 버리고 도망갔다.”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라는 즈가리아의 예언이 실현 되었다. 이어 예수는 가아파의 집으로 끌려갔고 다음날 십자가에 못 박혔다. 게쎄마니 동산에는 그 수령을 알수없을 정도로 오래된 여덟그루의 올리브 나무가 있다. 어떤 식물학자들은 이들의 나이가 3,000년 정도 되었다고 한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70년경 티투스황제가 예루살렘을 점령했을때 예루살렘 외곽의 모든나무를 잘라 버렸다고 한다. 이 나무들이 이 시기에 용케 살아 남았다면 예수시대의 바로 그 나무들일 것이다. ”이 올리브 나무는 죽지 않는다.“(플리니) 이 나무들은 지금도 열매를 맺고 있다.
3)게쎄마니 대성당(Chrch of ALLNATION)또는 만국교회
375-395년에 데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건축된 교회 였으나, 614년 페르시아 침입시 파괴 되었으며 8세기에 지진으로 또다시 파괴 되엇다. 현재 교회는 1,924년 세워진 것으로 가능한 옛 모습을 재현코자 했기 때문에 4세기 종반의 바실리카 모양이나 비잔틴 시대의 모양과 벽의 자취가 그대로 남아있다. 한편 이성당은 세계 16개국에서 보내온 헌금으로 1,924년에 짓기 시작 1,924년 완성한 성전이다 .그래서 “만국교회”라 부르기도 한다. 예수께서 잡하시기 전날밤 , 최후의 만찬을 마치신후에 키드론 시내 건너편 “게쎄마니라는 곳에 이르렀다.(마르14,32),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 속에 고뇌 하셨던 예수님의 체취가 담긴곳(마르14,32-42)이라고 하여 ‘고뇌의 성전’ 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성당을 찾아오는 순례자의 눈길을 끄는 것은 성전 안의 엄숙한 분위기와 제대앞에 놓인 바위이다. 이바위는 곧 예수님의 체취가 깊숙이 담긴 것으로서 그성흔을 말해 줄뿐 아니라, 아름다운 실내 장식과 자주빛창에 의해 여과되어 흐르는 흐릿한 조명은 기도와 명상의 분위기를, 고뇌 속에 온 정성을 다해 성부께 기도드리셨던 예수님의 모습(마태26,39: 마르14,35: 루가22,41)을 생각케 해주기 때문이다. 그다음에 눈에 띄는 것은 비잔틴 시대 성전의 바닥에 깔렸던 모자이크와 잔존해 있는 성전의 벽이다. 아주 아름답게 가꾸어진 성당정원에는 올리브나무가 상당히 많은 편인데, 그것들 중 여덟 그루는 예수님 생존시대부터 있었다고 한다.
4)도미누스 플레빗 소성당(DOMINUS FLEVIT)
도미누스 프레빗이란 ‘주께서 눈눌을 흘리셨다.’는 뜻인데 게쎄마니 대성당에서 동쪽으로 대략 300m 정도 떨어진 거리에 위치한 프란치스코 수도회 소속 성당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해서, 이 성당은 올리브 산중턱에 위치해 있다. 예루살렘 성전을 위시하여 구 시가지를 한눈에 바라볼수 있어 아주 관망이 좋은 곳이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그 도시를 내려다 보시고 눈물을 흘리시며 한탄 하셨다. (루가19,41-44),
6세기경 이 자리에 비잔틴 양식의 기념 소성당이 자리하고 있었고 ,1,955년 페허가 된 이 성당 자리에 다시 성전을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5)주기도문 기념성당(The church of the PATER NOSTER)
주기도문이 시작되는 라틴말을 따서 이름을 지은 교회로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치신 곳이며 에루살렘의 완전한 파괴를 예언하고, 재림과 세상의 종말을 예고했던 장소에 세워졌다(마태24,1-3:루가21,5-7) . 4세기에. 콘스탄티 대제가 예수님의 말씀을 기리기 위해 이곳 올리브산위에 처음으로 교회를 세웠으며, 614년 페르시아 침공시 파괴되고 12세기 십자군에 의해 다시 세워졌으나 다시 회교도에 의해 파괴되었다. 현재의 성당은 1875년 프랑스에서 카토릭의 카르멜파 수녀들을 위한 수녀원과 같이 건립 한 것으로 수녀원 건물 벽에는 한국어를 포함 세계 62개 국어로 주기도문을 번역하여 새겨져 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가르쳐 주셨다.“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온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 하듯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마태6,9-13:루가11,2-4)
6)예수 승천 기념경당(The chapel of the ASCENSION)
올리브산 정상 즉 엘투르라고 칭하는 아랍인들의 마을이 있는곳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회교에 속한 소경당으로 예수님 승천의 장소로 알려져 있다. 383년 귀족출신 포이메니아가 비잔틴의 성당으로 세워졌으나, 614년 페르시아에 의해 파괴된후 676년에 재건 되었으며, 1,009년 하킴에 의해 또다시 파괴되었다. 1,152년 십자군에 의해 다시 팔각형의 경당을 재건 아드스딩 수도회가 사용하고 있던중, 1,198년 살라딘이 회교경당으로 개조, 현재 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회교경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예수승천에 관해서는 루가복음사가 만이 전해주고 있다. “예수께서 그들을 베다니아 근처로 데리고 나가셔서 두손을 들어 축복 하시면서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 가셨다.(루가24,50-52: 사도1,1-12), 이 경당 안에는 예수께서 승천하실 때 남겨 놓고 가셨다는 예수님의 오른쪽 발자국이 찍힌 바윗돌이 잘 보관되어 있으나, 역사적인 신빙성은 전혀없고, 십자군 시대의 유물로 보고 있다. 670년경 이곳에 순례왔던 프랑스 주교 이르쿨프는 먼지위에 찍힌 예수님의 발자국이 예수수승천 성당안 중앙에 잘 보존되어 있다고 전한다. 회교도들은 놀랍게도 예언자 이샤(예수)의 승천을 경앙하고 있어 하나의 역사적인 사건의 기념으로서 보관하고 있다고 하겠다. 예수승천 축일때만 그리스도교인들은 이곳에서 예수승천기념 신심 예절을 거행할수 있게 되어 있다.
7)베드로 회개 기념성당(ST PETERIN GALLICANTU)
일명 닭우는 사도 베드로성당, 키드론 계곡이 내려다 보이는 이 성당은 1,931년 대제사장 가아파의 집 이었다고 전해지는 장소에 승천 수도회가 세운 것이다. 제자에 의해 배신당한 예수가 게쎗마니 동산에 끌려와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아침 첫 공판을 받은 곳이 바로 이곳이다.(마태26,57-63,마르14,53-65,루가22,54-55,63-71: 요한18,12-14,19-24), 그리고 닭이 두 번 울기전에 세 번 부인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을 알고 사도 베드로가 통곡한 곳도 이곳이다. 승천 수도회가 이곳을 발굴해본 결과 이곳이 가아파의 집터임을 확증 했다.
거의 완벽하게 보존된 히브리 도량형과 맷돌, 토굴, 앞마당,종들의 거처, 비잔틴 교회의 잔재들이 발견 되었다. 또한 교회 왼편에 옛 계단이 발견 되었는데 ,이 길은 예수시대의 것으로 믿어진다. 이 길은 게쎗마니에서 윗도시로 들어가는 지름길 이었기 때문에, 이길을 예수님께서 밟았을것이 분명하다. 예수시대에는 이곳은 예루살렘 성안에 있었다.
8)예루살렘 대성전(TEMPLE MOUNT )
눈부신 황금색 빛나는 지붕에 팔각형으로 지어진 오늘의 회교 대사원(쿠브베트 에스 삭흐라)과 엘 앜사 (EL AKSA)사원이 자리한 지역을 아랍인들은‘하람 에쉬 사리프’(숭고한 성역)라고 부른다. 바로 이 지역은 한때 예루살렘 대성전이 자리 했었다. 이 성역은 현 예루살렘 구시가지의 1/6에 해당하는 넓은 지역이다. 서쪽길이 490m, 동쪽길이 474m, 북쪽길이321m, 남쪽길이283m, 나 되는 방대한 구역이다.
유대인들과 회교도들의 전통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사악을 희생제물로 제사를 지내려 했다던 모리야산(창세22,1-22)이 바로 이성역 안에 위치했다고 한다.
다윗(기원전1,004-986)은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왕국의 중심으로 만들었다.(사무하5,9)
예언자 가드에 의해 다윗은 야훼께 속죄 제사를 지내고자 제단을 세운적이 있었다.(사무하24,18-25)
오늘날 회교 대사원 안에 넓다랗게 자리하고 있는 바위가 바로 그 제단 이었다고 한다. 그 바윗돌의 크기는 길이13.5m,폭10.8m ,높이1.8m가량 된다. 다윗은 또한 키럇여하림에 있던 “계약의궤”를 모세가 출애굽때 사막에서 만든것으로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야훼와 맺은 계약의 상징 이었고, 동시에 경신도구 였다. 모세의 십계판, 만나, 그리고 아론의 지팡이가 계약의궤 안에 안치 되었다고 한다. 모세가 만든 계약의궤는 여호수아가 “약속의땅” 가나안으로 이주할 때 가져와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옮길 때 까지 키럇여하림에 안치 되었던 것이다. 다윗의 치세 말엽 여부스인 아라우다가 타작마당으로 사용하던 황무지 산을 사들였다.(사무하24,18-25), 그리고 야훼의 제단을 세운뒤에 하느님께 성전을 지어 바치려고 했으나 이 계획은 그의 아들에 의해 이루어 졌다. 그의 아들 솔로몬은 웅장한 성전을 세우고 수입해온 나무와 구리, 금으로 화려하게 꾸몄다. 솔로몬은 야훼께서 거쳐하실집, 곧 성전을 지어야 했었다.(열왕6), 이 화려하고 웅장한 성전은 B.C587년 느부갓에살이 예루살렘을 함락시킬 때 파괴 되었고, 성전내의 여러 보물들과 경신도구들은 바빌론으로 옮겨졌고, 전쟁에 진 유대인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가 유배생활을 했다.
50년이 지난후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왔고, 즈르빠벨에 의해 비교적 작은 규모로 성전이 다시 세워졌다.(에즈5,1-6) 그 뒤 헤로데왕이 그가 저지렀던 과오를 희석 시키고 유대인의 환심을 얻기위한 일환으로 기원전 20년경에 파손된 성전을 모두 헐고 다시 새롭게 지었다. 수만명의 인부들이 동원된 엄청난 공사의 결과로 성전터에 두배나 넓어졌으며, 솔로몬 성전의 장엄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능가한 성전을 건설했다. 이공사는 B.C20년에 시작 A.D64년에야 비로소 준공을 보았으며, 헤로데가 만든 이성전은 예수가 직접 보셨던 성전이다. 이렇게 화려했던 성전도 유다전쟁(66-70)에 파괴 되었고 페허가 된 성전터에 135년 유대인이 두 번째 반란이 실패로 끝난 뒤 하드리아누스황제는 이 자리에 쥬피터 신전을 세워 하느님을 모독했다.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폐허가 된 성전터는 하느님께서 저주받은 곳으로 여겨졌다.(마르13,1-2), 그래서 이곳이 돌 무더기 뿐인 폐허가 되었다. 636년 회교도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그들은 이 산의 돌무더기를 깨끗이 치웠다. 그리고 칼리프 오마르가 이곳을 예언자 마호멧이 날개달린 말을 타고 승천한 곳으로 정하고 이 곳에 회교사원을 지었다.
691년에 옴마이드왕조의 칼리프 압드엘 말리크는 오마르가 세운 작은사원을 지금의 사원으로 개축 하였다. 알라신의 예언자 마호멧이 승천 했다는 바위가 있는 회교 대사원은 메카에 있는 카바 ,메디나에 있는 예언자의 무덤과 함께 회교도 들에게는 3대성지중에 하나이며 또한 회교 세계의 가장 아름다운 사원중에 하나이다. 지난 1,300년 동안 회교 대사원은 수차례 보수 되었으나 그외형은 691년 이후 거의 변하지 않았다. 1,099년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정복했을 때 이 사원은 ‘주의성전’으로 개조 되었다. 1,187년 십자군이 패하고 철수하자 88년동안 성전 꼭대기에 빛났던 십자가는 제거되고 그 자리에 회교의 반달이 다시 올라졌다. 그 이후는 지금까지 이 회교 대사원은 회교 사원들 중에 가장 정교하고 인상적인 건축물로 손꼽히고 있다. 이 사원의 외형은 정팔각형으로 각변의 길이20m, 직경60m, 중앙돔 높이가 35m가 된다. 지붕은 합금된 알루미늄판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낮에는 눈이 부시게 빛난다.
이곳은 작은 충돌이 일어난다면 곧바로 중동전으로 연결된 만큼 이스람,유대인에겐 절대절명의 중요한 장소이다. 이스라엘 군인은 문까지만 지킬뿐이고 내부는 이스람 자치경찰에 의해 철저하게 통제되고 있다. 내부에는 마호멧의 밤의 여행을 기념한 알 아크사 모스크, 이사악을 번제 지내려 했던 바위이자 마호멧이 승천할 때 놓았던 성스러운 바위, 솔로몬의 성전 지정소, 마굿간, 메시아가 오실 때 까지 영원히 닫혀 있는 황금문, 예수께서 마귀의 시험을 받으시던 성전의 담벼락 등이 있다.
9)통곡의 벽(WESTEN WALL)또는 서쪽의 벽
유다인은 이곳을 신앙의 원천 이라고 믿는 중요한 장소이다. 비롯 그들은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지만 3,000년 전통을 가지고 있고 하느님이 선택한 백성이라는 긍지를 갖고 있다. 시온산에 남겨진 60m의벽, 웅장함을 뽑내던 헤로데의 성전을 향해“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너는 예언자를 죽이고 ..., 너희 성전은 하느님께 버림을 받아 황폐해지리라” (마태23,37-39: 루가13,34-35)라고 예언하시던 그시절의 돌담(지하 17단과 지상7단)이 남아 있는 흔적이다. 70년 로마의 디도장군에게 멸족당한 이래 흐트러진 유대인에겐 이 한뼘 남은 담에서 통곡하는 것마저 금지 되었고 1,878년만에 이스라엘을 재건 하였으나 이곳이 요르단 땅이 되는 회한을 남겼다. 그러다가 1,967년 6월전쟁의 승리로 근 2,000년만에 되찾은 벽에는 전세계의 유대인 수백만이 연중 찾아와 순례하고 이스라엘 민족이 정신적, 종교적 중심으로 경외의 장소이다. 이스라엘 군인의 삼엄한 소지품 검문을 통과하여 광장에 들어서면 곧 바로 황금빛 이스람 사원의 웅장한 건물 아래의 담벼락과 마주한다. 왼편은 남자들, 오른편은 여자들의 기도장이며, 이스라엘인 남자는 반드시 키파(작은모자)를 써 여호와 하느님을 경외하고 여자는 어깨와 무릅을 드러나지 않도록 가려야 한다.
10)최후 만찬 기념성당(THE LAST SUPPER)
이곳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가진곳이다.(마태26,17-33: 마르14,12-16: 요한13,26-30: 루가22,7-13), 바로 이 장소에서 예수께서 부활한후 제자들 앞에 그 모습을 두 번 보였고(마태28,16-20: 마르16,14-18: 루가24,36-49: 요한20,19-22;23;24;29), 제자들이 성령을 받기도 했다.(사도2,1-4),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본거지가 시온산에 있었으며 그들은 1세기 무렵, 이곳에 성당을 세웠다. 이성당은 전쟁터에서 벗어난 지역인 관계로 70년과 135년에 일어났던 전쟁에서 살아 남을수 있었고, 비잔틴 시대에는 더욱 확장 되었다. 이교회가 초대교회라는 점이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온것이요, 야훼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온것이다.’라는 이사야 예언과 결부되어 “성스러운 시온” 교회로 불리워졌다.
시온산의 이름도 이 교회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614년 페르시아인들에 의해 파괴 되었고,12세기에 십자군에 의해 두 개의 교회가 연결된 형태로 재건되기도 하였다. 1,176년에 아래 경당이 다윗의 무덤이 자리했던 곳으로 확인 되었고, 1,333년 나폴리왕 로베르또와 왕비 산치아는 이집트 술탄 말렉 알 니시르 마호멧으로부터 매입하여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넘겨 수도원과 고딕식 건축양식의 기념 성전을 짓게 하였다. 이층으로된 이 기념성전을 ‘예수의 최후만찬 기념성당’이라고 불렀다. 지상층에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요한13,1-20)을 기억하는 경당,그리고 사도 토마(요한20,24-31)경당이 있었고, 윗층에는 최후만찬(마르14,12-26)기념경당과 성심강림(사도2,1-13)기념경당이 있었다. 그러나 이기념성전을, 1,552년에 터어키인들에 의해 그리스도교인들이 윗경당에서 쫒겨난 이후 이곳은 뾰족탑이 세워지고 회교도의 기도소리가 울려 퍼지는 회교사원으로 변모 되었다. 근 400여년동안이나 회교사원으로 사용하다가 1,948년에는 이스라엘 정부이 손에 넘어감으로써 그 운명은 또 달라졌다. 지상층에는 다윗무덤이 자리한 곳이라하여 유다인들은 자기네들의 시나고가와 탈무드 학교를 만들고 윗층에 잇는 성심강림 기념경당을 폐쇄시켜 버렸다. 그러나 최후만찬 기념경당은 모든 종파를 초월하여 누구나 자유로이 출입할수 있도록 개방하고 있다. 하지만 이 건물 안에서는 어떠한 종교적행사는 법적으로 금해져 있다. 단지 성목요일과 성령강림 대축일에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씀의전례만 예외적으로 허용되고 있다.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는 강제로 빼았긴 기념성전과 수도원 건물을 되찾으려고 백방으로 노력해 봤으나 모든 것이 헛수고였다.
그리하여 1,936년에는 기념성전터 바로 옆에 조그마한 부지를 매입하여 기념성전과 수도원 건물을 지었다. 이 건물이 오늘날 라틴 계통 그리스도인들의 최후만찬 기념성전으로 사용되고 있다.
최후만찬 기념성전과 마리아 영면 기념성전이 위치하고 있는 성역은 시온산의 핵심부분에 속하며, 그리스도교인들에는 초대교회에 공동체의 발상지로 아주 귀중한 성지라고 하겠다.
11)십자가의 길(THE VIA DOLOROSA)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셨던 전통적인 길이다. 지금도 유다인들은 이길을 성역화 하지않고 그대로 두고 있다. 길은 좁고, 길 양쪽에는 가난한 아랍인들이 토산품을 파는 영세상이 즐비한 혼잡한 길이다. 최후만찬에서 십자가의 길까지를 의미 합니다. 로마총독 이었던 본시오 빌라도로부터 사형선고 판결을 받고난 뒤 채찍아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메고, 그가 못박힐 장소인 골고다언덕(갈바리아)까지 14번을 쓰러지거나 멈추었던길로 슬픔의 길인 장소이다. 오늘날 순례자들이 행하고 있는 십자가의 길은 1,294년 리칼두스신부님에 의해 처음으로 그 위치가 설정 되었다. 안토니아성(제1,2처)에서부터, 골고타(제10-14처)까지 그 사이에 일곱 개의 장소(제3-9처)를 적절하게 만들어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토록 했었다. 그후 1,540년경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에 의해 오늘날 ‘예수의 십자가의길’이 확정 되었다. 따라서, 오늘날 순례자들이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면서 행하는 ‘예수 십자가의길은 예수께서 직접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가셨던 바로 그 길이러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예수 수난의길을 소중히 여기고 기억하는 하나의 상징적인 길이라고 하겠다. (오늘날 행하고 있는 ’십자가의길‘중에서 복음에 근거를 둔 내용은 아래와 같다.
제1처:(마태27,22-26)-예수님의 사형언도
제2처:(요한19,16-17)-십자가를 지신장소
제3처:(루가23,26)- 첫 번째 넘어지심.
제5처(마태,27,32)----시몬이 십자가를 다시 짐
제8처:(루가23,28-31)-예루살렘의 여인을 위하여 말씀하심.
제10처:(요한19,23-24)-옷을 벗기우심.
제11처:(요한19,18)---십자가에 못 박히심
제12처:(마태27,50)---숨을 거두심.
이곳 수난의길에서는 매주 금요일 오후3시에 프란치스코 신부님들이 이끄는 행렬을 볼 수 있다.
12)예수의 무덤성당(THE CHRUCH OF THE HOLY SEPULCHRE)
골고타와 예수의 무덤이 위치 했던 곳에 오늘날 기념 대성전이 세워져 있다. 이곳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죽으시고 묻히신 곳이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흔적이 담긴곳이다. 그래서 이곳 기념성전을 “예수의무덤”또는“ 예수 부활 기념성당“ 이라고 부른다. 예수께서 묻히신 곳은 골고타 근처에 있는 정원의 새 무덤 이었다.(요한19,41-42), 그 무덤은 바윗돌을 깍아서 만든것으로서 무덤 입구에는 커다란 석문이 놓여져 있었다. 그 무덤의 주인은 당시 유다 최고회의의 한 의원인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이었다. (마르15,43: 루가23,33), 그는 예수를 몰래 따르던 자였고(마태27,57:요한19,38), 자기 동료 니고데오와 함께(요한19,39), 예수의 시신을 무덤에 안치한 자였다.(마태27,58-60: 마르15,46: 요한19,38-40), 예수의 무덤은 커더란 석문으로 굳게 닿혀졌고, 경비병은 그 무덤을 지키고 있었다. (마태27,62-66), 그러나 안식일 다음날 무덤에 가서 봤더니 큰 이변이 일어났다. 굳게 닫혀진 석문은 열려 있었고 그 무덤 안은 텅 비어 있었을뿐만 아나라, 죽음에서 깨어나신 예수님을 만난 이들도 상당수에 달했다고 한다.(마르16,1-8: 마태28,1-10: 루가24‘1-12: 요한10,1-10), 예수님 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다는 그 사실은 경비병들의 증언을 통해 대사제들과 원로들에 까지도 알려졌었다.(마태28,11-15). 성서에 의하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 당하신곳 해골(GOLGOTHA)이란 곳 이었다.”몸소 십자가를 지시고 성밖을 나가 히브리말로 골고타라는 곳으로 향하셨다. 골고다 라는 말은 해골산 이란 뜻이다.“(요한19,17)
골고타는 예수시대에는 성벽밖의 볼모지였고, 유대인의 처형장소 및 무덤지역으로, 주로 무덤들이 즐비해 있었다고 한다. 예수께서 못박히신 곳은 당시에는 성 밖이었으나 “예루살렘에서 가깝기 때문에 많은 유다인드이 와서 ...”(요한19,20), 예수님이 못박히고 묻히신지 11년후인 44년에 헤로데 아그리파왕이 새로 성벽을 세워 이 지역이 도시안에 위치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아홉 개의 커다란 가족 무덤을 발굴해 냈고, 그들중 여섯 개는 오늘도 볼수있다. 골고타는 대략 40m가량 높은 언덕이었으리라고 지형학자들은 추측한다.예루살렘이 해발 720m가량 되니 그 언덕의 높이는 해발 760m가량 된다고 하겠다. 이 언덕은 바윗돌로 메꾸어진 채석장으로서 마치 해골처럼 보였기 때문에 골고타란 명칭이 붙여지지 않았나 여겨진다.
지금은 골고타와 예수 무덤의 원래 모습이 사라진지 이미 오래되었고 다만 그 자리에 위치한 기념 성전만 볼수 있다. 기념 성전 주변에는 수많은 상가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성전이 위치한 지대는 서쪽지대에 비해서 상당히 낮기 때문에 과연 이곳에 골고타가 자리해 있었을까? 하고, 의문을 갖지 않을수 없다. 그렇지만 역사적 신빙성은 크다.
예수께서 인간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 당하신 그 골고타 언덕을 에워싸고 있는“ 예수의 무덤성당”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자 313년 최초로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드린, 동 로마제국의 콘스탄틴 대제의 어머니 헬레나왕비가 갈바리아와 무덤위에 처음으로 세워졌다.콘스탄티누스 시대의 이 웅장한 기념 성당은 614년에 페르시아인들에 의해 파괴 되었고 그 후 대 수도원장 모데스투스가 작은 규모로 재건 하였으나 1.009년에 칼리프 하킴에 의해 다시 파괴 되었다. 이 성전의 파괴가 십자군 원정에 주요 원인이 되었다. 1,048년 에 콘스탄티누스 모노마쿠스에 의해 성전이 재건 되었고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 1,149년에 현존하는 성전이 세워졌다. 이와같이 , 1,600여년간의 세월을 묵묵히, 숱한 고난과 복원을 거듭하면서 예루살렘의 흥망성쇄를 지켜봐 왔다. 교회내에는 골고다언덕,예수님의무덤을 비롯하여 성서의 구절과 결부된 숱한장소들, 헤렌나 왕비에게 바치는 성전, 십자가 파편을 찾아낸 물 저장고 등, 빠뜨릴수 없는 중요한 장소들이 가득차 있다
기념성전 안에는 여섯 종파들이 운집해 살고 있다. 로마카토릭(프란치스코 수도회가 대표역활),희랍정교회, 아르메니아 정교회가 주로 특권과 우선권을 갖고있고, 시리아 정교회, 콥트 교회, 그리고 에디오피아 정교회는 사실상 더부살이를 하고 있는 셈이다. 여섯 종파들의 관계는 정치,종교적으로 서로 얽히고 설켜 있어 한마디로 말하기 어렵다. 1,757년에 법률상으로 확정을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하나의 기념성전이 갈기갈기 찢어진 셈이 되었다.
현재 갈바리아 정상에는 두 개의 경당이 있다. 이중 한 경당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린 곳으로 추정 되는 곳이며 희랍 정교회가 관리 하고 있다. 다른 경당은 예수의 옷이 벗겨지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현장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로마 카토릭이 소유 하고 있다..천주교에서는 처형된 장소보다 묻히신 장소를 중요시 한다. 그 이유는 죽으셨다가 부활 하셨으므로 부활신앙을 믿기 때문이다.
3.베들레헴(BETHLEHEM)
베들레헴은 고대 메소포다미아 지방과 이집트를 잇는 중간 지역으로 예루살렘 남쪽 8km에 위치한 해발 780m되는 언덕위 아랍도시 이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장소로 워낙 유명 하기 때문에 수많은 순례객이 찾는곳이며 성탄절때는 세계에서 모여든 순례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이다. 베들레햄은 AD330년 콘스탄틴황제에 의해 세워진후 십자군시대를 거쳐 현재까지 잘 보존되어 있다. 또한 이곳에는 이스라엘의 두 번째 임금 다윗 (BC1010-970)이 태어나서 목동으로 자란곳, 그리고 사무엘이 어린 다윗을 왕으로 선정 했다는 전설 (사무엘상 16:1-13)
“내가 너를 베들레헴에 사는 이새라는 사람에게로 보낸다. 그의 아들 가운데서 내가 왕으로 세울 사람을 하나 보아 두었다.
예수성탄성당은 작은마을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웅장하다. 1500여년전 비잔틴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세웠을 때의 모습 그대로다. 좁은 입구로 들어서면 어두컴컴한 그리스정교회식 성당이 나타난다.
그제단 밑이 예수가 탄생한곳 온통 시꺼멓게 그을린 동굴이다. 목동들이 말이나 양떼와 함께 생활하며 겨울을 나던 마굿간이다. 예수가 태어난 자리엔 은으로 만든 “베들레헴의별”이 새겨져 있다. 10평 가깝게 꽤 널찍한 동굴 여기저기에서 나직한 기도소리와 카메라 셔터 소리가 뒤섞여 울린다.
요즘 이스라엘과 파레스티나에의 폭탄테러 분쟁으로 순례지의 순례객이 거의없다.
우리 순례객30명외에 러시아 ,나이지리아 .리투아니아등 얼마 안되는 순례객으로 어디를가나 한가하게 자세히 성지를 볼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베들레헴에 예수성탄성당(유스티니아누스)은 그리스, 아르메니아,가톨릭, 3개교단으로 나누어져 관리하고 있다. 성탄절 전야미사를 지내는곳은 가톨릭에서 예루살렘 주재 라틴계 가톨릭 총대주교님이 매년 기념미사를 집전하며 전 세계 텔레비젼에 방영 되고 있다.
4..갈릴리호수(THE SEA OF GALILEE)
믿음의 땅 이스라엘에서는 갈릴리호수는 전세계 관광객들이 빠짐없이 찾는 성지중의 성지이다. 땅을 가르고 물을 솟구쳐 사막의 목마른 인간에게도 고루 내리신 창조주 하느님의 은혜 갈릴리! 이름 모를 풀과 나무들로 둘러쌓인 잔잔한 호수 ,그주위에 평화롭게 산재한 어촌마을 호수일대를 덮고있는 온화하고 상쾌한 공기, 이와같이 갈릴리호수 일대는 단순한 종교적 가치만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북단 헬몬산에서 발원한 북요르단 강물이 흘러들어 형성된 내륙 호수인 갈릴리는 이나라 식수와 농업용수의 70% 가까이 공급하는 “젖줄”이다.
남북길이 21km, 전체둘레 52km, 바다수면보다 212m, 이상 낮고 ,수심이 50m가 되는 호수이다. 연중 거의 비가 내리지않는 갈릴리호수 주변은 3000년전부터 전략적 요충으로 쉴세없이 전쟁터가 되었던 곳이다. 예수님의 행적과 관련 갈릴리 북쪽 호수일대가 성지 들이다. 요르단강 서쪽4km 지점에 위치한 가파르나움도 그 대표적인 고대도시의 유적중에 하나이다. 예수 복음 전파의 중심지로 연일 세계 각지역에서 모여든 순례자,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는 이곳엔 4세기경에 세워진 유대교회당, 베드로의집, 유적위에 세워진 베드로 교회가 유명하다.
가파르나움 바로 옆에는 프란치스코 수도회 교회가 위치한 탑가지역과 만난다. 이른바 “빵5개와 물고기2마리로 5000명의 식사를 해결한 기적(五餅二魚)을 형상화한 모자이크 바닥이 새겨진 기념성당, 또 호수위로 125m 작은언덕에 세워진 주 예수께서 갈릴리호수에서 부는 맞바람을 이용하여 군중에게 온화한 목소리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신 산상수훈의 현장 팔복교회, 이밖에도 갈릴리호수 일대는20세기초 이스라엘 재건의 원동력이된 키브츠(공동체농장)들이 많이 자리한 지역으로 이곳에서 쉬어가는것도 큰 즐거움이다.
이 호수에는 잉어,정어리,메기,숭어,가 많아 지금도 물고기를 어망으로 잡는다. 우리도 유람선을 타고 갈리리호수를 떠나기전에 한 선원이 그물을 던져서 걷어 올리니 그물이 짖어질 정도로 많은 물고기를 건졌다.
예수님 시대는 모든 교통의 중심지로 교통이 편리하고 땅이 기름 졌으며 아름다운 경치와 온천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사람이 거주했었고 또한 많은 사건의 현장이 되기도 하였다.
이 호수 주변에는 9개의 도시가 있다. 예수님의 성서에 기록한 대부분 활동과 가르침 그리고 기적을 이곳에서 행하였다. 베드로,안드레아,요한과 그밖에 제자들을 부른곳도 이곳 호수가에서 였고(마태4.18-20)예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걸어 가시다가 베드로라는 시몬과 안드레아 형제가 그물을 던지고 있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하시자.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풍랑을 잠재우고(마태8,23-27) 예수께서 배에 오르시자 제자들도 따라 올랐다. 그때 마침 바다에 거센 풍랑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뒤덮이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곁에 가서 예수를 깨우며 “주님 살려 주십시오, 우리가 죽게 되었읍니다.”하고 부르짖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그렇게도 믿음이 없느냐? 왜 그렇게 겁이 많으냐? 하시며 일어나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자 사방이 아주 고요해졌다.”
호수 위를 걸으시고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치신곳(마태 15,29-30) “예수께서 그곳을 떠나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서 산에 올라가 앉으셨다,그러자 많은군중이 절름발이와 소경과 곰배팔이와 벙어리와 그 밖에 많은 병자를 예수의 발 앞에 데려다 놓았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다 고쳐 주셨다.”
5.마사다((MASSADA)
엔게디 남쪽 16km지점,사해의 서해안으로 부터 약4km 되는 유대광야에 마사다 암반요새가 우뚝 솟아있다.
길이800m,넓이200m, 높이가 사해 해면에서 600m이고 깊은 협곡으로 둘러 싸여있어 이 성벽에서 아래로 약100m까지는 깍아 놓은 듯이 절벽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천혜의 절벽 요새가 되어있다.
순례객은 먼저 이 요새의 역사적 전승 내용을 영화로 감상한후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간다.
마사다는 히스몬가의 통치자에 의해BC142-63에 건축 되었고 BC66년까지 그의 후손들이 관리 하였다.
이 요새의 내부에는 창고들과 병영,병기고,빛물을 저장하는 저수지와 왕궁의 각종 편의시설들이 있었다.
그후 AD70년에 로마군의 티투스장군에 의해 파레스티나 전 지역을 함락 당하고 예루살렘이 초토화 되었을 때 유대인 지도자 엘리아잘 벤 야이루가 이끄는 유대인 열성당원들 약960명이 이 마사다 요새로 피신하여 로마군에 저항하면서 민족적 항쟁을 3년동안 하다가 AD73년에 960명의 남자와 여자들이 끝내 로마군에 포로가 되기 보다는 죽음을 택한곳으로, 로마군에 항복 하지않고 집단 자결을 하였다. 그중에 두여자와 다섯 아이들이 숨어서 살아 남았기 때문에 그들의 최후를 알았다. 이 비극적인 전설같은 실상은 오늘날 전승 승화되어 이스라엘의 불멸의 성지가 되었다. 현재 이곳은 이스라엘 장병들의 선서식장으로 활용 되고 있다.
6.사 해(THE DEAD SEA )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약35km떨어진 곳에 사해가 있다. 지구상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갖인 바다로 수면 높이가 지구 평균 수면보다 400m 아래에 있으며 ,염분 함유량이 보통 바다물의 7배가 짜서 쓴맛이난다. 사해는 요르단강 남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길이 80km,넓이 17km,수면이 해저 400m, 수중 고형물질이 25%,비중이 1.17로 수영을 하지 않아도 물에 뜬다. 젊은 목사부부,신혼부부는 날씨가 쌀쌀한데도 사해 바다에서 수영을 했다. 나도 양말을 벗고 들어가니 바다물이 아주보드럽고 맛은 쓰다.
사해바다물은 피부병에 좋다고하며 인체에 유익한 각종 광물질이 다량으로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자연 건강 치료을 위하여 전세계인 찿아오고 있다. 사해 주변에는 많은 온천장과 함께 휴양 리조트들이 많이 있다.
이곳에는 어떤 생물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죽은바다, 즉 사해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또 선입견으로 지저분하게 생각하지만 막상 와서보니 물이 너무 깨끗하고 바닷물이 새파랗고 아름답다.
7.쿰 란(QUMRAN)
사해의 서북 연안에서 1.3km 떨어진곳에 있는 쿰란은 1,947년부터 유명해 지기 시작했다. 1,947년 5월 사해의 서쪽지역에서 길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헤매던 베두인 양치기 소년이 이시대의 최대 발견인 그 유명한 사해 두루마리를 발견했다. 모하메드 에디브라는 이 아랍 양치기는 잃어버린 양을 찾던중 사해의 서쪽 해안 절벽지대의 동굴속에 무심코 돌을 던졌다. 그러자 무엇인가 깨지는 소리에 놀란 이 양치기는 이 동굴에 마귀가 살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무서워서 도망쳐 버렸다. 다음날 그의 사촌과 같이 다시 동굴에 들어갔다. 이굴안은 길이 8.5m, 넓이 3m의 큰굴 로써 양치기는 그안에서 8개의 항아리를 발견 했는데 그중 몇 개는 뚜껑이 덮여 있었다. 이것을 바같으로 가져와 금이 들어있기를 기대하고 열어 보았으나 그들이 이해 할 수 없는 글자가 쓰여진 가죽 뭉치만 있는 것을 보고 실망해 버렸다. 그안에는 총 7개의 두루마리가 들어 있었는데 양치기 두소년은 그것을 팔기위해 베두인족장과 함께 베드레헴으로 갔다. 그리고 골동품상 칼릴칸도라 하는 시리아인에게 두루마리 세 개를 팔았다. 모하메드와 족장은 돈을 더 받을 욕심에 몇군데를 더 기웃거렸다. 아주 귀한 것 이라고 우기는 족장의 말에 골동품상은 그길로 이스라엘의 성 마르코 수도원 사무엘 대주교를 찾아 갔다. 한동안 두루마리를 살펴보던 대주교는 할말을 잊은채 어쩔줄을 몰라했다. 그의 눈은 뭐라 말할수 없는 놀라움으로 가득차 있었다. 대주교는 두루마리에 씌어진글은 히브리글 일것이라는 말과 함쎄 5파운드에 사겠다고 했다.
사무엘은 이두루마리가 어쩌면 구약성서 원본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구약은 유대인들의 가장 성스러운 경전이다. 이것은 야훼 하느님이 당신께서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약속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야훼의 계시를 담고 있다.
이쿰란 주위의 동굴들에서 기원전 2세기경의 히브리어 성서사본과 성서의 주석서들이 발견, 여기서 발견된 성서들을 “사해사본” 또는 쿰란사본 이라고 한다. 쿰란 주변 11개의 동굴에서 발견된 사해사본 가운데 두루마리 형태로 잘 보존 되어 있는 것이 불과 10개 뿐이며 나머지는 수없이 많은 조각으로 발굴 되었다. 이들중 1/4은 구약사본이며 나머지는 구약주석, 신학서,쿰란 공동체의 규율집들로써 대부분 양피가죽이나 파피루스 위에 고대 히브리어로 적어 놓은 것 들이다. 이들중 가장 유명한 것은 가로,세로 0.3mx 7.2m인 이사야의 두루마리이다. 이후 요르단왕국 암만 박물관장 하성교수와 성소 연구소장 프랑스 드보신부(R. DEVAUX)와 많은 베두인 사람들은 두루마리의 높은 가치를 알고 사해 서쪽지역을 뒤지기 시작했다. 드보신부는 무하마드와 아메드,그리고 그곳 베두인들을 데리고 먼저 두루마리가 발견 되었던 동굴근처를 수색하였다.
1,952년 이지역에서 30개나 넘는 동굴을 찾아내고 그안에서 900개가 넘는 두루마리를 발견 하였으며 쿰란에서 90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곳 4호 동굴에서 가장많은 필사본이 발견 되었다. 그중에는 파피루스에 쓰여진 두루마리 이외에 구리에 쓰여진것도 두 개 있었다. 또 바위아래 깊은 땅속에는 옛도시의 흔적과 두겹으로된 성벽, 그안에는 저수지와 급수시설,공동묘지등도 발견 되었다. 이곳이 요세프스를 비롯한 고대의 역사가들이 언급하고 있는 유대교의 한 종파인 엣세네집단의 수도원 였다. 기원전 200년부터 기원후 70년까지 쿰란공동체(엣세네파)라는 유대교도의 일파가 이곳에서 공동생활을 하던 수도원터로 사용한 흔적이 여러곳에서 발견 되었다.. 이교단은 금욕적인 종교단체로 유대교의 전통과 관습을 중시하는 생활을 하였다.
“사해두루마리”는 그뒤로 엘리자 수케닉박사의 아들이자 1.963년에 마사다 요새를 찾아낸 야딘(YADIN)교수가 사무엘 대주교의 두루마리를 25만$에 사들여 모두를 이스라엘 정부에 기증 했다. 지금은 이사본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이스라엘 국립박물관내의 사해사본 보관소에 전시되어 있다.
8.예리고(JERICO)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성곽도시 예리고는 예루살렘(해발760m)에서 동쪽 40km,사해 북동쪽 13km지점, 유다광야에 자리잡고 있으며 아름다운 오아시스의 도시이다. 이곳은 예로부터 비옥하고 기름진땅으로 오렌지, 바나나, 키가 10여m가 넘는 종려나무들이 많아 “종려나무의 도시(” 신명기34,3 )라 일컬어 지던곳이다. 지금부터 약 3,000년전 모세를 따라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 ) 40년 광야생활을 청산하고,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의 지휘아래 약속의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첫발을 디덨던 도시이다. 물이 귀한 사막 한가운데 물이 솟아 나오는 술탄을 비롯하여 여러개의 샘을 가지고 있어 주변 풀 한포기 없는 황량한 유다광야와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는 아름다운 도시로 천연적으로 사람이 거주하며 살기에는 최적의 장소이며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길목이기도 하다. 이곳은 요르단 계곡 (해발 -225m)에 위치하고 있어 여름에는 매우 덥고 건조 하지만 겨울에는 매우 온화한 날씨를 가지고 있어 각종 꽃들의 향기가 진동한다. 또한 고고학적으로 볼 때 땅이 기름진 이곳은 기원전 7,000-10,000년전 문명의 요람지 였으며 지금까지 발견된 도시중 세계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도시로 추정된다.
헤로데왕은 이러한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 이도시에 자신의 별장을 두고 오랫동안 머물러 지냈으며 그의 삶도 여기서 끝을 맺었다.
예리고는 현 시가지 중심부에서 서쪽으로 2km쯤 가면 툴률아부엘 알라이크 사적지가 킬드하천 북쪽과 남쪽에 자리 잡고 있다. 일찍이 하소모니아 왕가에서는 하천 북쪽언덕에 별장을 지었다. 그러나 헤로데왕(기원전37-4년 재위)은 기원전 35년 하스모니아왕가를 제거하고 별장을 차지하여 개조하고 그옆에 엄청난 이중궁전을 건설했다..킬드하천 북쪽과 남쪽에 각각 궁전을 지은 까닭에 이중 궁전 이라고 한다. 헤로데는 여기서 기원전 4년에 사망했다. 그후 그는 남쪽에 320m정도되는 경마장과 반원형 야외극장을 만들어 3,000여명의 군중이 경마구경을 하도록 했다. 헤로데의 또 한가지 사적은 헤로데궁전(툴률아부엘 알바이크)남서쪽에 키프로스 요새가 있다. 헤로데는 기원전 37년 정권을 쟁취하자마자 이요새를 튼튼히 하고 자기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키프로스”로 명명했다. 그는 항상 모반을 염려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유사시를 위해 곳곳에 요새를 건설해 두었다.
발굴작업 결과 신석기 시대에 속하는 성, 성벽, 둥근망대를 이곳에는 시대별로 쌓여진 지층들이 고스란이 보존 되어 있는곳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로 밝혀 졌다.
1,952-1,958년 영국의 여류 고고학자 캐서린 캐년에 의해 발굴된 자료를 근거로 볼 때 기원전 8,000년전 중석기 시대부터의 유적이 발견된 곳으로 , 수많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 이도시의 잔해가 쌓여 높이가 약24m,넓이가 약12,000평이나 되는“TELL”(이야기)이란 언덕을 구축했다.
예리고의 역사기록은 기원전13세기경 이스라엘민족이 약속된땅에 도착함으로써 시작된다. 이곳은 여호수아가 요르단강을 건넌후 처음으로 이스라엘 민족에 의해 정복된 도시이다.(여호 6), 예리고는 가나안 점령의 교두보 였다. 여호수아는 예리고성을 불태워 함락시킨후 후세에 이곳을 재건할 사람들에대해 저주를 내렸다.“이성을 짓겠다고 나서는 자는 야훼께서 저주를 받으리라.맞아들을 죽이지않고는 기초를 놓지못하고 막내아들을 죽이지 않고는 성문을 달지못하리라.(여호6,26), 몇세대가 지난후 베델사람 히엘이 예리고를 재건 하려 했을 때 이 여호수아의 저주가 그에게 내려졌다.(열왕기상 16,34),이후 예언자 엘리사는 주민들의 간청에 의하여 샘터에 가서 소금 한줌을 뿌리며 말하였다.”야훼꼐서 말씀 하신다. 내가 이물을 정하게 하리라“(열왕기하2,21), 예리고의 푸른 오아시스의 생명수인 이샘은 역사를 통하여 자주 등장하고 있으며 엘리사의 이름을 따서 ”엘리사의 샘“이라고 불렀다. 이샘은 옛예리고에서 길건너편에 있으며 당시 사람들의 만남의 장소로 이용 되었기 때문에 과월절에 예루살렘으로 떠나곤 했던 예수가 여러차례 머물렀을것으로 추측된다. 예로부터 이도시는 순례자들의 통로로써 물과 음식을 얻기에 적절한곳 이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 가시기도하고 하였으며 ,반대로 예리고에서부터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시기도 하였다. 이길 사이는 유대광야가 놓여있는 일반적으로 위험한길 이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 하셨다.”어떤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 사람이 가진 것을 모조리 빼았고 마구 두둘겨서 반쯤 죽여 놓고 갔다.“(루가10,30)
예리고 서편 유다광야는 예수께서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후(마태 31,1-17),요르단강에서 멀지않은 이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다.(마르코,1,12-13), 예수가 우리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인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의 손에 넘어가 사형선고를 받을 것이다. 그리고 이방인들의 손에 넘겨져 조롱과 채찍질을 당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게 될것이다.(마태,20,17-19) 라고 말한곳도 이곳 이었다고 추정 할 수 있다. 예리고에서 예수가 거지 소경을 눈뜨게 했고(루가18,35-420,(마르코10,41-52), 또 키가 작은 세관장 자케오가 예수를 보기위해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 있는 것을 보고 예수가 “자케오 얼른 내려 오시오 오늘 내가 당싱의 집에 머물러야 하겠읍니다.(루가19,1-10)라고 말한곳도 이곳이다. 예리고에는 과거 유대인과 사나고그인이 산 흔적들은 있으나 현재는 요르단 국적응 지닌 아랍인들이 살고 있는 도시이며 팔레스타인의 정치중심지 이다.
9.요르단강(THE RIVER JORDAN)
요르단강은 동쪽의 사막과 약속의 땅을 나누는 강으로 사철 눈이 녹지않는 헤르몬산(814m)에서 발원하여 갈릴래아 호수를 거쳐 사해에 이르고 있다. 이강은 가장 낮은 계곡을 흐르는 강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이계곡은 수만년전에 지각이 무너져 밀고 들어감으로 형성된 것이라고 한다. 헤르몬산 아래에서 시작하여 사해로 흘러 들어가는 요르단강은 특이한 물줄기를 형성하고 있다. 갈릴래아 호수에서부터 사해까지의 계곡을 ‘엘 그호르’(가라 앉은 지역)라고 부르는데 그 길이가 단지 105km밖에 되지 않지만 꼬불꼬불 돌아 흐르기 때문에 총길이는 260km나 된다.또 강의 평균폭이 30m나 되었으나 현재의 강폭은 8-15m로 비교적 좁은편이다. 고대 요르단강은 매우 크고 자주 범람 하기도 하였다. 특히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행렬이 요르단강을 건느던때의 기록 가운데“그 궤를 멘 사람들이 요르단강에 이르렀다. 마침 추수절이 되어 둑에까지 물이 넘쳐 흐르는데 ...” (여호3,15) 하여 요르단강이 우기(10월-3월)에는 항상 큰 강으로 변하곤한 모습을 짐작할수 있다. 현재는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수자원인 갈릴래아의 하구에 수문을 장치하여 요르단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물을 통제하기 때문에 요르단강의 모습은 볼품없게 변하여 순례자들에게 실망을 준다. 그러나 팔레스티나에서는 가장 크고 긴 강이다. 이강은 헤르몬산 네곳에서 지하수가 솟아 요르단강이 형성되어,사해로 흘러 들어 가기 때문에 엘 우르단(내려오는강)이라는 뜻을 가져 요르단 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강물의 원천 네곳은,나흐르 바니야스, 엘레단, 바라그히트, 하스바니 인데 ,니흐르라는 말은 ‘시냇물,개울,수로’라는 뜻이다.오늘날도 이곳 근처에는 푸른 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으며 ,시냇물이 곳곳에 흐르고 있어 피서 하기에는 아주 적절한 곳이다. 요르단강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 야르덴, 아랍사람들은 엘 우르단 이라고 부른다. 요르단강에는 세 개의 호수가 있다. 상류에 위치한 호수가 훌레호수다. 이 호수의 이름은 오늘날 지도상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30년전 이스라엘사람이 이 호수를 개간하여 농터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부터 16km가량 떨어진 호수가 그 유명한 갈릴래아 호수이다. 이 호수는 길이 21km,폭이 13km나 되는 아주 방대한 호수다. 그래서 갈릴래아 바다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갈릴래아 호수에서 105km가량 떨어진 곳에 사해가 위치해 있다. 사해는 요르단강 물의 종착지 이다. 길이가 85km이고 가장 넓은 폭이 18km나 된다.
요르단강은 구약시대 뿐만 아니라, 신약시대에도 성스럽게 여겨졌다. “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두르고, 양식으로 메뚜기와 들꿀을 먹는..” 이렇게 요한이 나타나, 요르단 강변에서 설교를 하고 세례를 주고 있었다. “그 때에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유다 각 지방과 요르단강 부근의 사람들이 다 요르단강으로 요한을 찾아 가서 자기죄를 고백하여 세례를 받았다.”(마태3,5-6),그때 예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갈릴래아로부터 요르단강으로 찾아 오셨다.“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시자 홀연히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성령이 비들기 모양으로 당신 위에 내려 오시는 것을 보았다. 그때 하늘에서 소리가 울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3,16-17, 마르1,9-11, 루가3,21)이와 같이 요르단강은 새로운 복음의 시작을 알린 곳이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곳으로 알려진 사해 북쪽 예리고 가까운 곳의 요르단강에는 현재 알렌비(ALLENBY BRIDGE)가 있어 이스라엘과 요르단을 오가는 국경통과소가 있다. 예수가 세례를 받은곳은 예리고에서 동쪽으로 약 8km 떨어진 곳이라 전해지고 잇다. 예수께서 이강에서 셰례를 받았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성스러운 강이 되었으며, 예로부터 그리스도교인들이 경건한 마음과 믿음으로 이 강물에서 몸을 앃었다. 수많은 순례자들이 요르단강에 와서 하얀 가운을 걸치고 목욕을 한 뒤 이옷을 그들의 수의로 사용하기 위해 집으로 가지고 가기도 한다. 예수가 세례를 받은 장소 근처에서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민족이 이 강을 건너 침입해 들어갔다. ”야훼의 계약궤를 멘 사제들이 요르단강 한복판 마른 땅에 서 있는 동안 온 이스라엘이 마른 땅을 밟고 건너 결국 온 겨레가 다 요르단강을 건넜다“(여호3,17),또한 예언자 엘리야가 불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 간곳도 이 근처이다. ”난데없이 불말이 불수레를 끌고 그들 사이로 나타난는 것이었다. 동시에 두 사람 사이는 떨어지면서 엘리야는 회오리바람 속에 휩싸여 하늘로 올라 갔다.(열왕하2,11), 그리고 아람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이 이 강에서 몸을 씻어 문둥병을‘ 고친곳도 이곳이다.“나아만은 하느님의 사람이 일러 준대로 요르단강으로 내려가서 일곱번 강물에 들어가 몸을 씻었다. 그러자 새살이 돋아 그의 몸은 마치 어린아이 몸처럼 깨끗해졌다.”
요르단강은 구약성서에 180번,신약에서 15번 언급되고 있는 성지이다.
10.가파르나움(CAPERNAUM)
가파르나움은 요르단강 상류에서 갈릴래아 호수로 흘러 들어가는 지점에서 서쪽으로 4km 떨어진 위치에 있는 고대도시 이다. 이곳은 성서 이전부터 아코(ACRE)에서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목이라 병영과 관청이 있었다. 당시 이곳은 다마스커스에서 비단과 향료를 가져오고 게네사렛지방의 과일을 가져가는 상인들로 붐볏다. 그래서 군인,상인과 이방인을 포함한 여행자들의 왕래가 많은 길목이라 선교적 차원에서 중요한 위치였다. 나자렛이 예수의 고향이라면 가파르나움은 예수의 활동 주거지로 제2의 고향으로 삼았던 곳이다. 그후 가파르나움에서 20개월동안 그의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복음을 전했고, 많은 기적을 통해 그의 사랑과 전능을 보여 주었다. 가파르나움에는 베드로의 집이 있었는데 예수는 이곳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다.
가파르나움은 “예수의 도시”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호수를 건너 자기 동네로 돌아오시자”(마태9,1) 또는 “예수의 집이 있는곳” “며칠 뒤에 예수께서는 다시 가파르나움으로 가셨다. 예수께서 집에 계시다는 말이 퍼지자”(마르2,1) 이라 불릴 정도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자주 드나 들었던 곳이다 .따라서 갈릴래아 지방에서 활동한 예수를 보도하는 복음서에는 이곳이 매우 자주 언급된다. 하지만 구약성서나 그리스도교 이전에 문헌에는 이곳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다. 가파르나움 이란 명칭에 대하여는 여러 학설이 있지만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 설에 의하면,그명칭은 경계지역,또는 제한구역이란 뜻을 지닌 히브리어 ‘케파르 테쿠민’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한다. 이에 반해 두 번째 설은 ‘나훔의 마을’ 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케파르 나훔’(Kfar nahum)에서 연유한 것 이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나훔은 인명을 가르킨다고 보고 있다. 특히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이 “고통에 잠긴곳이 어찌 캄캄하지 않으랴? 전에는 즈불룬 땅과 납달리 땅을 천대하셨으나 장차 바다로 가는길 , 요르단강 건너편 외국인들의 지역을 귀하게 여기실 날이 오리라. 어둠속을 헤매는 백성이 큰 빛을 볼 것입니다. 캄캄한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쳐 올 것입니다.(”이사8,23, 9,1) 가파르나움 이곳에서 이루어졌다고 여긴다. 이곳에서 예수는 무엇보다도 어부출신의 그의 제자들 시몬 베드로, 안드레아,야고보,요한을 사람 잡는 어부로 부르셨으며(마태4,18-22,,루가5,1-11, 마르1,16-20, 요한1,35-42)그리고 가파르나움은 다른 어느 도시 보다도 예수의 기적이 가장 많이 행하여 졌으며,비유로 많은 것을 가르치셨다 “.악령들린 사람을 고쳐주시고(마르1,21-28, 루가4,31-37), 열병으로 누워잇던 시몬 베드로의 장모치유(마태8,14-17,마르1,29-31, 루가4,38-41), 중풍환자의 치유(마태9,1-8,마르2,1-12,루가5,17-20), 나병환자의 치유(마태8,1-4,마르1,40-45,루가5,12-16) 죽었던 야이로의 딸 소생의 기적 (마태9,18-26,마르5,21-43, 루가8,40-56), ”벙어리를 고치셨으며(마태9,32-34,),“오그라든 손을 펴게 하셨다”(마태12,9-14,마르3,1-6,루가6,6-11),어느 고관의 아들 치유(요한4,46-53), 백인대장의 종의 치유(마태8,5-13,루가7,1-10,요한4,43-54) 등등
예수시대의 이스라엘은 헤로데왕의 아들 안티파스가 통치하고 있었다. 이곳은 로마의 식민지에 불과 했지만 예수는 이곳에서 “새로운 가르침”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설교,,기적을 행하여 당시 율법학자들과 비교 될 수 없는 예수의 놀라운 권유와 가르침에 많은 사람들이 감탄 했던것이다.“예수의 일행은 가파르나움으로 갔다. 안식일에 예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 가르침을 듣고 놀랐다. 그 가르치는 것이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마르1,21-22,루가4,31-37)
예수의 제자들이 “라삐, 묵고 계시는 데가 어딘지 알고 싶습니다.”하고 말하였다. (라삐는 선생님이라는 뜻이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와서 보라고 하시자 그들은 따라가서 예수께서 계시는 곳을 보고 그 날은 거기에서 예수와 함께 지냈다. 때는 네시쯤이었다.(요한1,38-39,마태4,18-20,마르1,16-18,루가5,1-11), 예수의 놀라운 가르침 특히 “생명의 빵”에 관한 예수의 놀라운 가르침,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 하셨다.“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응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이것이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빵 이다.. 이 빵은 너희의 조상들이 먹고도 결국 죽어 간 그런 빵이 아니다,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6,22-59)
그에게 온 수많은 사람들을 낫게했다(마태8,16-17,9,36-38) 그러나 이런 여러일을 행하였던 예수는 꾸짖기 시작했다. “너 가파르나움아 ,하늘에라도 오를성 싶으냐?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다. 사실 네 가운데서 행한 기적들을 소돔에서 행했더라면 그는 오늘까지 남아 있었을 것이다. 실상 너희에게 이르거니와 심판날에 소돔땅이 너보다 더 수월할 것이다.(마태11,23-24), 결국 은혜를 모르는 가파르나움은 예수의 예언대로 되었다.
가파르나움은 예수의 메시지“회개하라”라는 말씀을 받아 들이지 않은 대표적인 도시로서 심판날에 소돔보다 더 무거운 벌을 받게 될 것을 선언 하기도 하였다, 예수의 사역지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가파르나움,코라진,베싸이다등의 도시는 비잔틴시대 이후 더 이상 도시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 하였다. 가파르나움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은 적중하여 이미 그도시는 파괴되어 잊혀진지 오래 되었으나, 1,838년 미국 탐험가 에드워드 로빈슨이 이도시를 처음으로 확인한후 여러 차레 발굴을 통하여 알려지기 시작했다. 현재 까지 남아있는 회당은 그 기초만이 예수 당시의 것이며 석회석으로 이층 구조로 남아있는 건물은 4-5세기의 것이다. 이도시는 6세기무렵 지진으로 인하여 도시 전체가 파괴 되었지만 다시 복구되어 10세기경까지 번영을 누렸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또 6세기에는 베드로의 생가터 위에 교회가 세워졌다. 그러나 638년 아랍의 침략으로부터 보호받은 교회는 746년 또 지진으로 인하여 파괴 되었다.
가파르나움은 1,905년 독일의 고고학자에 의해 발굴되어서 가파르나움 옛회당을 발견하게 되었고, 1,926년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의해 마무리 되었다. 이들의 발견중에서 도 가장 중요한 것은 이지역에 있었던 회당의 유물들이다. 최근에는 베드로의 집터위에 5세기경에 세워졌던 유적 들을 발굴 하였다. 그러나 현재도 거의 폐허 상태로 당시의 건물 흔적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1).빵의 기적 기념성당(TABGHA)
타브가(희랍어 HEPTAPEGAI)-“7개의 샘물” 이란 의미를 지닌 희랍어 “헤프타 페곤 ”을 아랍어로 옮긴 “아인엣 타브가”라고 부른다. 오늘날 “타브가”라고 칭하는곳은 갈릴래아 호수의 서북쪽연안, 곧 가파르나움에서 남쪽으로 3km 떨어진 지역이다 .옛날에는 이지역에 실제로 일곱 개의 샘물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 볼수 있는 것은 그것들중에 다섯 개의 흔적 뿐이다.
네 복음서에 모두 언급하고 있는 유일한 기적 가운데 현장에 세워진 기념교회로 이곳 타브가에는 예수께서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이 넘는 군중을 배불리 먹이셨다는 사실.(마태14,13-21,마르6,30-44,루가9,10-17,요한6,1-14)을 기리는 기념성전이 자리잡고 있다. 350년경에 처음으로 이곳에 기념성전이 들어 섰으나 419년 지진으로 파손 되었다. 그후 성전을 보수 되었으나 551년에 있었던 대지진으로 다시 파괴되었으며 ,614년 페르샤군과 637년 회교도 침입으로 인해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리고 페허로 1,300여년동안 방치 되었다가 1,911년에 기념성전터를 발견했고 1,932년에는 독일의 고고학자 A.E 마더와 A.M쉬나이더에 의해서 비잔틴 시대의 성전에 있던 모자이크등 여러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이곳에서 발굴된 모자이크는 팔레스티나 지역에서 발굴된 것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화려하고 아주 셈세하게 만들어진 모자이크의 일부가 기념성전 안에 잘 보관되어 있다. 특히 제단 앞에 놓여진 모자이크 즉 빵을 담은 바구니 양쪽에 물고기가 새겨져 있는 모자이크는 그야말로 일품이다. 또 성당 바닥에는 호수지역의 새,물고기, 짐승,꽃들을 묘사한 아름다운 모자이크도 있다. 이 기념성당은 1,982년에 비잔틴 양식으로 지어진 것인데 오늘날 이 성지의 관리는 독일계 베네딛도 회원들이 관리하고 있다.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마르6,30-44)
사도들이 돌아와서 자기들이 한일과 가르친 것을 예수계 낱낱이 보고 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서 함께 좀 쉬자.”고 말씀 하셨다. 찾아오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들은 음식을 먹을 겨를 조차 없었던 것이다.
예수일행은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을 찾아 떠났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일행이 떠나는 것을 보고 그들이 예수의 일행이라는 것을 알고는 여러 동네에서 모두 달려나와 육로로 해서 그 들을 앞질러 그 곳에 갔다.
예수께서 배에서 내려 군중이 많이 모여 있는 것을 보시고 목자없는 양과 같은 그들을 측은이 여기시어 여러 가지로 가르쳐 주셨다.
어느덧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
그러니 군중들을 헤쳐 제각기 음식을 사먹도록 농가나 근처 마을로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자 제자들은 “그러면 저희가 가서 빵을 이백 데라니온 어치나 사다가 먹이라는 말씀 입니까/”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지금 가지고 있는 빵이 몇 개나 되는가 가서 알아 보아라” 하셨다. 그들이 알아보고 돌아와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하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군중을 풀밭에 떼지어 앉게 하라고 이르셨다.
군중은 백명씩 또는 오십명씩 모여 앉았다.
예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드시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셨다. 그리고 물고기 두 마리도 모두 사람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빵조각과 물고기를 주워 모으니 열두광주리에 가득 찼으며
먹은사람은 남자만도 오천명이나 되었다.
2).베드로 수위권 성당(Church of toe primacy of st. peter)
빵의 기적성당과 같은 지역에 있으나 프랑스교구여서 담장이 처져 있다. 이 기념성당은 갈릴래아 호숫가를 따라 500m 가량 북쪽으로 걸어가면 베드로 수위권 성당( 또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발현 기념성전)이 나온다. 이곳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갈릴래아에 다시 오셔서 고기잡는 어부로 되돌아와 생업에 종사 하셨다. 예수께서는 호숫가에 서 계셨으나 베드로 일행은 알아 보지 못했다. 그때 갈릴래아지방으로 돌아온 베드로는 어느날 저녁, 다른 제자들과 함께 고기를 잡으러 배를 타고 갈릴래아호수로 나갔다. 밤새껒 그물을 쳤으나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그런데 새벽녘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호숫가에 서 계셨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제자들이 그물을 다시 던져 보았더니 끌어 올릴수 없을 만큼의 많은 고기가 잡혔다는 것이다. 그러자 베드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알아 보게 되었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제자들과 함께 숯불에 생선을 구워 나누어 먹기도 했다.(요한21,1-14),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서 계셨고, 제자들과 함께 숯불에 구운 생선을 나누어 먹었던 장소에 현재의 기념성전이 세워졌다 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발현 기념성전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바로 이곳에서 베드로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로부터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요한21,16)라는 명령과 함께 수위권을 받았다고 여기기 때문에 베드로 수위권 성당이라 불리게 되었다.. 또 예수께서 부활하신 뒤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은 이것이 세 번째 였다.(요한21,14), 예수님이 발현 하신것은“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요한20,11-18) ,”안식일날 저녁 제자들에게“(요한20,19-23)이렇게 세 번 발현 하셨다.
오늘날의 기념성당은 1,934년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의하여 새로 건립 되었다. 이성전 안에는 소위“그리스도의 식탁”이라고 불리는 바위 덩어리가 잘 보존 되어 있는데, 이바위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빵과 숯불에 구운 생선을 나누어 먹었다고 한다. 고고학자들에 따르면 ,4세기 때부터 이곳에는 기념성전이 암반위에 세워져 있었는데,1,263년 회교도들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어 폐허로 방치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칠백년이란 세월이 지나고서야 오늘의 기념성당이 다시 세워진 것이다.
3).산상 수훈 기념성당(THE MOUNT OF THE BEATITUDES)
이곳은 예수께서 불멸의 산상수훈과 진복팔단을 행한 장소로 가파르나움 위쪽 125m 작은 언덕 위에 세워진 성당이다. 타브가로부터 완만한 구릉지대를 따라 올라가면 쉐이크 알리 라는 언덕에 도착하게 된다.. 예수께서 갈릴래아에서 부는 맞바람을 이용하여 우리에게 온화한 목소리로 복음을 들려주던 장소이다.
.바로 이언덕에서 예수께서는 많은 군중에게 아주 특별한 산상설교.(마태5-7장)를 하셨다. “여덟가지 참된 행복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3-10)을 특히 참된행복을 기리는 뜻에서 1,930년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팔복음을 상징 팔각형으로 기념성당을 세웠다. 산에서 내려다보는 갈릴래아호수는 아름답다. 산밑에 야외 극장식 벌판을 바라보면서 이천년전에 복음의 현장을 상상할수 있을 만큼 그모습은 변화가 없어, 수천명의 군중들이 운집하여 예수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우렸을 때 모습을 상상하기에 충분한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 장소라는 느낌이 든다.
마태오 복음사가가 전해주는 예수의 산상설교는 편집자에 의하여 예수의 여러 가지 가르침이 한데 모아진 것이다. 마르코 복음서나 특히 루가복음6,17-49와 11-12장 까지 비교해 보면 더욱 잘알수 있다. “산상설교” 라 불리게 된 것은 예수께서 산에 올라가 군중을 가르치셨다.“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 가 앉으시자 제자들이 곁으로 다가 왔다. 예수께서는 비로소 입을 열어 이렇게 가르치셨다.”(마태5,1-2)고 해서 이다.
11.나자렛(NAZARETH)
나자렛은 이스라엘에 비옥한 농경지 이스르엘 평야 북쪽, 갈릴래아호수의 남서쪽 24km 지점 ,작은 언덕에 위치한 작으도시로, 티베리아스에서 31km, 하이파에서 39km 떨어진 해발 375m정도의 산으로 둘러 쌓여 있다. 나자렛은 동정녀 마리아가 그리스도를 잉태한 곳으로 유명한 성지이다. 베드레헴에서 예수님을 낳은 마리아는 남편 요셉과 이곳으로 돌아와 생활을 시작했던 곳이다. 나자렛은 예수께서 출생후 잠시 애굽으로 피난 했던 때를 제외하고는 태아에서 부터 유년기를 거쳐 성년이 되기까지 일생을 보낸 고향이다. 이곳에서 예수는 다른 어린이들과 마찬가지로 거리와 언덕에서 뛰어놀며 그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예수가 활약하던 그당시 그지방 주민들의 대부분은 유다민족 이었으며 ,지중해 연안의 모든나라와 같이 로마제국의 지배에 있었다. 예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 성서를 읽고 복음을 전했으나 그의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하였다..“저 사람은 목수가 아닌가? 그 어머니는 마리아요, 그 형제들은 야고보,요셉,유다, 시몬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다 우리와 같이 여기 살고 있지 않은가?”하면서 좀처럼 예수가 행한 기적들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마르6,3), 그를 목수라 부른 것으로 미루어 보면, 그는 이곳에서 세상에 알려지지않은 30년을 목수일을 하며 지냈다. 나자렛의 좁은거리와 언덕들은 30년동안 이곳에서 지냈던 예수의 당시 모습과 같을 것이다. 베들레헴 말 구유간에서 태어난 예수님은 헤로데왕의 박해를 피하여 애굽으로 피난 갔다가, 주의 사자가 이르는 대로 이스라엘 땅에 되돌아와서 정착한곳이 그 부모의 고향이기도 한 나자렛이다. 복음사가들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유다인들은 예수를 가리켜 ‘나자렛 사람’ 이라고 했다.“베드로가 대문께로 나가자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는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이 사람은 나자렛의 예수와 함께 다니던 사람이오“ 하고 말하였다.(마태26,71:,루가18,37:요한18,5-7:마르1,24), 탄생지 베들레헴보다 나자렛이 예수가 더 부각된 셈이다. 예수께서 공생활에 들어가시기전 전까지는 나자렛에서 상당히 오랫동안 사셨기 때문일 것이다.
나자렛은 지형적으로 볼 때, 사방이 야산으로 둘러 싸인 지대가 높은 분지요, 다른 도시나 마을과의 교류가 거의 없이 차단된 지역으로서 매우 한적한 곳이다. 역사적으로 볼때도 나자렛은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곳이다. 구약성서에서도 판관기13,5-7을 제외하고는 나자렛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다.“이미 하느님께 바쳐진 나자르인이다.”,
예수의 시대에도 나자렛은 사람들의 관심거리가 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필립보가 나타니엘을 찾아가서 “모세의 율법서와 예언자들의 글에 기록되어 있는분”을 만났는데, 그 사람은 나자렛 출신이라고 말하자, 나타나엘은 “나자렛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나올수 있겠소?‘ 하며 의아해했다.(요한1,45-46),사실상 나자렛은 예수로 인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나자렛이란 명칭은 히브리어‘나자르(지키다. 수호하다)’에서 영유 되었으며, 희랍어와 라틴어식 발음을 따른 것이다. 오늘날 아랍사람들은 엔나스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나츠랏이라고 부르고 있다. 나자렛은 ‘수호자’또는 ‘파수꾼’ 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예수님의 청소년 시절을 잘 은닉했기 때문에 그런 명칭이 나오지 않았나 하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지형적으로 볼 때는 나자렛은 우뚝 솟아있어(루가4,29) 이스르엘 평야를 지켜 주고 있는 듯하다. 예로부터 적들의 공격을 막아 주는 파수꾼의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그런 명칭이 주어졌으리라 여겨진다. 나자렛은 당시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은 산골에 불과 했는데 ,복음서에는 나자렛은 “도시”라고 보도하고 있다.(마태2,23,루가1,26)“나자렛이라는 동네에 살았다.”나자렛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고 기적들을 행하여도 받아드려지지 않았다. “사실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루가4,24), 예수를 해치려 했던 첫 번째 사건도 이 곳에서 일어났다. 회당에 있던 사람들이 예수의 비판과 엄한 설교를 듣고 “회당에 모였던 사람들은 이말씀을 듣고 는 모두 화가 나서 들고 일어나 예수를 동네 밖으로 끌어냈다. 그 동네는 산위에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를 산 벼랑까지 끌고가서 밀어 떨어뜨리려 하였다.”(루가4,28-29) 그언덕은 오래전부터 ‘추락산’ 이라고 불려지고 있다. 그 일이 있은후 예수는 나자렛을 떠나 가파르나움으로 가서 사셨다. 나자렛은 예루살렘, 베들레헴과 더불어 세게의 순례객들이 많이찾는 성지이다.
1).성모 영보 기념성당(The church of ANNUNCIATION)
나자렛의 대표적인 순례지는 성모영보 기념성당이다. 이곳은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 예수님이 탄생 하리라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는 장소에 세워진 성당이다.
4세기 로마 콘스탄틴 황제때에 처음으로 세워 졌는데 614년 유대인들에 의해 파손, ,그후 11세기에 십자군이 나자렛을 갈릴래아를 수도로 삼으면서 큰규모의 교회가 세웠었다. 그리고 13세기에 아랍의 통치로 인해 성지순례가 힘들었다. 1,620년 프란치스카신부가 이터를 사들여 새 교회를 건축하였으나,1,955년 다시 파괴되었다. 지금의 바실리카 성당은 이태리 건축가 죠반니 무치오가 설계, 1,960년부터 짓기 시작하여 1,969년에 완성 되었다. 교회 벽면에는 전 세계에서 보내온 성화 들로 가득차 있고 양쪽으로는 마리아가 가브리엘 천사에게 수태고지를 받은곳에 제단이 있는데 바닥이 모자이크로 아름답게 장식 되어있다. 그는 한 교회 위에 또 하나의 교회를 얹어 , 안에서 서로 통하게 설계함으로써 옛 교회의 유적을 고스란히 보존케 하였다.이 성전을 짓기 전에 벨라르미노 바가티신부(고고학자)는 1,954-1,965년까지 11년 동안이나 고고학적 발굴을 했었다. 수많은 동굴,물저장 장소, 곡식 저장소, 기름틀, 포도즙을 짜내는 틀뿐만 아니라 비자틴 시대의 성전터도 찾아냈다. 성전안에 잘 보수되어 있는 소위 성모영보 동굴은 헤로데 시대에 속하는 가정집인데 마리아가 이곳에서 살았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이동굴안에 위치한 중앙 제대에는 라틴어로 “이곳에서 말씀이 육이 되셨다”라고 씌어져 있다. 이제대를 가르켜 성모영보 제대라고 칭한다. 이 동굴 안에는 상당히 오래되어 보이는 두 개의 커다란 기둥이 서 있다. 하나는 마리아의 기둥(북쪽에 위치), 다른 하나는 가브리엘 천사의 기둥(남쪽에 위치)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 마리아와 천사가 서로 마주보며 서 있었던 곳이라고 프란치스코 수도회 어느 수사님이 설명하여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성모영보 기념 대성전에서 북쪽으로 100m 가량 떨어진 곳에 성가정 또는 성요셉 성당이라고 불리는 기념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12.무기또(Megiddo)
무기또는 이스라엘의 가장 비옥한 이즈르엘평야의 남쪽에 자리잡고 있다. 또 이집트에서 지중해 연안을 따라 메소포타미아지방에 이르는 바닷길(비아마리스:Viamaris)목으로 이즈르엘 평야 중에서도 동서남북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의 요지이며 전략적 요충지이다. 고대에 제국의 군대는 이곳을 통과하여 지나 갈 수 밖에 없었고, 가나안 땅에서도 역사적으로 많은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구약성경에서도 이도시는 여호수아가 기원전1,230년경 이스라엘 백성을 거느리고 요르단강 서편, 약속의 땅을 점령하여 열두 지파에게 나누어 주었다.(여호12,7), 므기또 도성도 여호수아가 점령한 도성 이었고(여호12,21), 기원전1,130년경에는 불레셋족에 의해 점령 되었다가 기원전 1,004년경 다윗왕에 의하여 다시 이스라엘 왕국에 합병 되었다. 북부 팔레스티나에 위치한 이즈르엘 평야는 불레셋 사람들과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 교전이 자주 있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이 평야를 지켜주던 도성은 무기또, 다아낙,이즈르엘. 벳산 이었다.(열왕상4,12), 다윗의 아들 솔로몬왕(기원전 965-928)은 무기또의 중요성을 감안 이곳을 강화 시켰고 이 지역을 행정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솔로몬왕은 이스라엘 왕국에 열 두 장관을 두었는데, 무기또는 이즈라엘 광야를 에워싸고 있는 다른 도시들과 함께 다섯 번째 지방이었다(열왕상4,12), 당시 무기또는 야훼 하느님의 성전과 솔로몬 왕국을 갖춘 도시로서 그 지방의 수도였다.(열왕상9,15) 그러나 923년경 애급에 시삭은 무기또를 파괴하었고 ,그후 아합왕때 재건 되었다. 유다왕 요시아는 북진하는 애급왕 파라오느고와 이곳에서 맞아 싸우다가 기원전609년 전사한 곳이며, 최근인 1,917년 영국의 엘엔비장군이 터키군을 패배 시켜 승리로 이끈 곳도 무기또이다. 요한 묵시록에 기록된 “아마겟돈”은 무기또라는 히브리말을 희랍어로 옮긴 말이다. 무기또는 1,925-1,939년에 미국 시카고 대학 동양연구소에 의해 발굴되어 그 실체가 들어났는데, 약16,000평의 땅을 발굴한 결과 20개의 도시가 위아래 수직으로 겹쳐져 있는 유적지 들을 발견하였는데 각 도시의 유적들은 각 층마다 잘 보존되어 있었다. 이중 가장 중요한 것들은 450필의 말과 150대의 전차를, 수용할수 있었던 큰 규모의 마병장 이다 .이것을 일반적으로 “솔로몬의 마병장”이라고 부른다. , 이곳은 기원전 4,000년 전부터 도시가 형성 되었으며, 가나안 원주민들이 만들었던 신당(High place)식 신전, 식량 저장소, 놀랄만한 상수도 시설, 솔로몬때 건설한 성벽,성문, 관저, 등이 발견 되었다. 그리고 뛰어난 기술로 만들어진 수로시설이 있는데 수직 갱도를 40m나 파 내려간 다음 그곳에서부터 65m정도 떨어진 성벽 바깥쪽 샘까지 터널을 만들어 물을 끌어 들였다. 그리고 샘은 침입자들이 발견하지 못하도록 흙으로 덮어 위장해 놓았다. 이것은 3,0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잘 보존되어 있다
13.가나(CANA)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가나로 거론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나자렛에서 티베리아로 가는 길목에서 6.4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매우 작은마을, 이곳이 가장 유력한 곳으로 받아 드려지고 있다. 공관 복음사가들의 전승에 의하면 세례자 요한이 투옥된 다음에 예수의 활동이 시작된다.“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 갈릴래아에 오셔서 하느님의 복음을 전파하시며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 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 하셨다.”(마태4,12-17: 마르1,14-15: 루가4,14-15) ,그러나 요한 복음사가의 기록에 따르면 세례자 요한이 투옥되기 전부터 예수의 활동이 시작된다.(요한3,24), 세례자 요한이 ‘요르단 강 건너편 베다니아에서 활동할때(요한1,28),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갈릴래아지방 가나에 가서 ,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첫 번째 기적을 행했던 곳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에게는 잘알려져 있는 지역이다.“물은 어느세 포도주로 변해 있었다.”(요한2,1-12),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유다지방에서 한동안 세례를 베풀었다.(요한3,22-23), 그후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갈릴래아지방 가나로 다시 가서 거의 죽게된 고관의 아들을 고쳐주는 두 번째 기적을 행하였다.(요한4,46-54), 예수의 이 두가지 기적들은 당시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정체를 드러내 주었고 동시에 예수를 믿도록 해 주는 표징이었다.(요한2,11:4,53), 그래서 갈릴래아 지방 가나는 오늘날도 그리스도인의 시선을 모으는 곳이다. 가나에는 기적을 기념하는 두 개의 성당이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