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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1장 22~25절 2008년 3월 2일 주일설교요약
자유인은 도를 행하는 자이다.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야고보서 1장 22~25절)
육축 중에 개는 주인을 배반하지 않습니다. 오직 주인에게 대하여 충성만 있을 뿐입니다. 개는 주인의 행동을 조금도 놓치지 않고 주시합니다. 조그마한 손놀림에도 눈을 떼지 않습니다. 오직 주인의 명령만을 기다릴 뿐입니다.
그러나 사람이라는 종은 주인에게 충성스럽게 순종하는 종이 있는 반면에 마음에 불만이 있으면서도 자기 의사와는 전혀 관계없이 순종하는 종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14~30절에는 어떤 주인이 종들에게 각각 그 재능대로 금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는데 한 달란트 받은 자는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는데 오랜 후에 주인이 돌아와 회계할 쌔 세 종은 각각 자기들의 행한 대로 보고하였습니다. 주인은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맡긴 종들에게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라고 말하며 한 달란트 맡은 자에게는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주인의 의도는 종들이 자신의 명령에 순종하느냐 그렇지 아느냐에 있는 것이지 얼마를 남겼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아닙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종들이 곧바로 나아가서 장사하여 유익을 남겼기 때문에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을 받고 한 달란트 받은 자는 남긴 것이 없기 때문에 무익한 종이라고 칭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종들은 각기 순종했기 때문에 칭찬을 받은 것이고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순종치 않았기 때문에 꾸지람을 들은 것입니다.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라는 말에서 주인의 관심은 남음이 아니라 순종에 있음이 명백합니다. 본문에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면만 다루었기 때문에 면밀히 살피지 않으면 한 쪽으로 편향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다섯 달란트로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로 두 달란트를 남겼고 한 달란트로 행하지 않아 그대로 있기 때문에 칭찬을 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만약 성경의 말씀이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종들이 각각 즉시로 나가 장사하여 망하였고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그것을 귀하게 여겨 고이 간직했기 때문에 그나마 한 달란트가 남았으나 그 주인은 사업의 성공과 실패를 따지지 않고 순종하여 열심히 일하며 충성스러운 종들을 칭찬했고, 한 달란트를 잃지 않고 그대로 간직한 종에게는 순종치 않고 열심내지 않음을 꾸짖었다고 기록했다면 얼마나 읽는 독자들이 주인의 의도가 무엇인가를 쉽게 알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있습니다. 어찌되었든지 주인의 의도는 순종에 있지 남음에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이어서 31~46절에도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행하고 그렇지 않음에 따라 복을 받든지 저주를 받든지 결정되므로 한 쪽은 영벌에 다른 한 쪽은 영생에 들어감.”을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도 관심된 말씀은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한 것에 있습니다.
여호수아도 가나안 복지에서 이스라엘 회중 앞에서 “복과 저주, 사망과 생명” 중에서 자신과 족속은 복과 생명을 선택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1:22)
하나님은 인류의 조상인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만을 금하시고 에덴동산의 모든 나무의 실과는 허용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범하는 순간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뱀의 말을 들으므로 범죄 하였습니다.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된 것입니다. 믿음은 듣고 행하는 것까집니다. 하와의 믿음은 뱀의 말을 듣고 행했으니까 뱀을 주인으로 섬긴 꼴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는 순간 사람은 자신을 이미 속인 것입니다.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한 자는 하나님의 종이요, 마귀의 말을 듣고 행한 자는 마귀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표현력이 화려하지 못해서 여러분에게 성경에 있는 정보만을 제공합니다. “툭”소리가 나면 호박 떨어지는 소리 줄 아시고 “척”이면 삼척인 줄 아셔야죠.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종으로서 그분의 말씀이 곧 법이요, 도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분의 도는 오직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입니다.
천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천지만물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타났습니다. 빛이 있으라. 뭍이 드러나라. 당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시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는 등의 모두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생긴 것입니다.
만물이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이라야 그 도에 행하리라. 그러나 죄인은 그 도에 거쳐 넘어지리라.” (호14:9)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다했으니 오직 주를 향하는 일향일심(一向一心)이 아니고서는 모두 거짓입니다. 영의 일은 흑백논리가 명확합니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지 이것도 저것도 아닌 불확실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종말이 오기 전까지는 오래 참으시는 분이지만 일단 심판에 들어가면 냉혹하십니다. “내가 너를 종시 모른다. 불법을 행한 자여” 베드로에게도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은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을 얻을 표지만 미련한 자들에게는 걸쳐 넘어지는 것입니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1:25)
마13:44절에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는 말씀은 복음을 듣고 곧 잊어버린 자가 아니요 즉시로 예수를 좇고 믿는 자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제자들도 대부분 “나를 따라 오너라”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시로 좇았던 사람들입니다. 씨 뿌리는 비유처럼 옥토에 떨어진 씨만이 제대로 된 열매를 맺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진리요 길이요 생명 그리고 부활이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진리로서 자유케 하려고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자유 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형제들아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고전7:20~24)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같이 아니하노라.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 함이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후3:13~18)
모세가 시내 산에서 내려왔을 때에 그의 얼굴에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감히 무서워서 모세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 얼굴을 수건으로 가리어주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회중에 설 때는 그 얼굴을 수건으로 가리우고 하나님의 성막에 들어가서는 수건을 벗었다고 했습니다. 모세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은 율법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율법은 생명을 주기 위한 법이었지만 오히려 사망에 이르는 법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율법은 두려움의 대상이었지만 그 속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생명이 여전히 유효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모세의 얼굴에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생명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수건으로 가리어서 사실은 그 영광과 생명을 취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를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입니다. 왜냐 하면 모세가 하나님의 성막 안에서는 수건을 벗었음이 이를 증명합니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는 말씀을 받음으로 우리는 자유 함을 얻게 된 것입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 함이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3:17~18)
우리는 아무 공로 없이 단지 예수 믿는 그 믿음 하나로 자유 함을 얻은 자유자로 자유케 하시는 자유 함에 놓인 것입니다. 그분이 부르신 그 모습 그대로 그 형편대로 부름을 받고 아멘 하면서 좇아가면 자유 함을 얻은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기록된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자유 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종에게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하는 여자에게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 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기록된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 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4:21~5:1)
이는 믿음으로 얻은 자유 함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유 함을 묘한데 사용합니다. 교회 안에서 마치 고린도 교인들의 교만한 자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구주십니다. 그런데 요즘 교인들은 예수님을 자기 집 사환으로 여기며 자기 자신을 치장하는 장식품 정도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믿음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긍하며 자기 믿음과 관계없는 초대형 교회를 자랑하고 앵무새처럼 조잘거리는 목사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판단 받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사랑이란 눈곱만큼도 없는 사람이 무슨 그리스도인입니까? 신앙인과 종교인을 구분 못하는 이들이 오히려 모세의 얼굴에 수건이 벗겨질까 여전히 염려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5:13~15)
진정한 자유는 행하는 것입니다. 행하지 않는 자는 곧 자유 함이 없음을 자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이사에게 내는 셋돈도 베드로가 잡은 고기 입에서 얻은 한 세겔로 내셨습니다. 세상에서 정해진 제도와 율법 등을 예수님은 몸소 지키셨습니다. 생후 팔일 만에 할례도 받으시고 세례요한에게 세례도 받으시고 세금도 내셨습니다. 자유 함은 의무를 지키며 권리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부자가 돈에 대하여 자유 한 것 보았습니까? 오히려 한 푼을 잃을까봐 염려하지 않습니까? 과부의 두 렙돈이 왜 인정받고 칭찬을 받습니까? 그의 생활비 전부이기도 하지만 그 돈은 진정 과부의 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소위 교인들은 자신에 대하여 후하고 세상에 대하여 인색합니다. 더욱이 교회에 대하여는 더욱 후하며 하나님에 대하여 더욱 인색합니다. 말이 웃기지요.
그리고 교인은 예수를 제대로 믿지도 못하면서 대단한 믿음이 있는 양 뽐냅니다. 모든 것을 예수 믿는 것으로 잣대를 삼습니다. 얼마나 웃기는 일입니까? 이에 다음의 말씀이 권면하며 교훈합니다.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악행 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뭇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벧전2:13~17)
그리스도인들은 정신 차려야 됩니다. 정말 교인이라는 사람들 보면 개와 돼지보다 못하다고 생각한 적이 한 두 번이 넘습니다.
“의의 도를 안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벧후2:21~22)
자유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도를 듣고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요 그 말씀을 듣고 행하며 그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디, 주의 말씀을 듣고 행하여 진정한 자유자가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