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4.3 길 위에 서다
'이념은 지배욕의 산물이다'
라는 진실을 우리의 역사를 통해 배웠습니다. 정치적 이념은 대한민국의 역사고 현재도 진행형인데 우리는 이와같은 편향적 이념에서 반드시 벗어나야 진정한 민주주의가 실현이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제는 어떤 정치세력도 이땅에서 그들만의 지배논리에 편향된 이념을 내세워 편을 가르거나 흑백논리로 위화감을 조성하는 일들이 일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좋은 정치는 정치가 보이지 않으면서 순리에 따라 막힘없이 흘러가는 세상이라고 믿습니다.
이념의 명분으로 고통받고 희생된 무고한 사람들을 보고 고뇌했던 제주의 강요배전을 Tankeyman님이 포스팅을 해 주신데 이어 북한의 세계적인 판화가 함창연과 1980년대 민중미술 작가 오윤, 프로이센이 낳은 천재적 여류작가 케테 콜비츠를 포스팅 합니다.
#함창연(1933.12.1~1999)
#1980년북한공훈예술가
#근현대작가로유일한국보지정20점
자강도 송원군 출생
1949년 평양미술대 도안학부 입학, 국비장학생으로 폴란드 뽈스까 와르샤와 미술대에 유학 1960년 귀국 후 평양미술학교 교수 35년간 재직.
그는 군 입대 후 거제 포로수용소의 처참한 광경들을 보여주고 담아내고 피가 낭자한 학살의 흔적이 흑백의 판화에서도 강렬하게 보여준다.
-1959년 독일 라이프찌히 세계판화콩쿠르에서 피카소와 함께 금메달을 수상[밭갈이]
-오스트리아 국제미술판화대회 금메달[화전민]
-비엔나국제미술 전람회 동메달.
함창연은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작가로 러시아미술백과사전에서 겸재,단원과 함께 한반도의 뛰어난 미술가로 소개되고 있다.
함창연의 작품을 보면 목판화, 아쿼틴트, 에칭, 석판화, 인그레이빙,,,의 판화기법과 잉크 드로잉, 유화까지 자유자재로 드나들고 있는 것이다.
함창연의 작품은 그 예술성을 높이 평가받아 북한에서 그의 대표작 20여점이 국보로 지정되었고 근현대 작가의 작품이 국보로 지정된 예가 없었다는 사실만으로 단연 최고의 작가다.
지금 국내에 소개되고 있는 작품들은 대부분 밀알미술관의 전시했던 작품들이고 남서 울은혜교회 원로 홍정길 목사는 신동아학원 이사장이자 밀알미술관 대표로 북한의 어린이들을 돕는 지원을 하면서 북한의 미술품을 수집했고 함창연을 국내에 알리기 위한 250p 분량의 화집을 냈다.
#밀알미술관
1999년 홍정길 목사 개관
강남구 일원로 90
북한 작품 500여점 소장
전선으로 1959
애인
이별 1978
건설자 처녀 1985
남녀 뒷모습
함창연의 딸
지리산 유격대 1982
여인 1984
자화상 1956 수채
함창연의 작품은 1980년대 한국의 민중미술과 상응한다.
그때의 민중미술 판화작가들이 북한 작가이자 해외파인 함창연의 작품에 영향을 받았는지는 모르지만 여류화가 케테 콜비츠의 판화 작품과 프롤레타리아적 정신에서는 공히 영향을 받고 있다.
함창연의 작품에는 철저한 사회주의 혁명정신이 담겼다.
이만큼 실감나게 혁명적인 시대정신을 구현한 작가가 있던가.
내 눈으로 한국의 근 현대에서 이만큼 강렬하게 마음을 울리는 작가를 보지 못했다.
간단한 도구에 의한 함축적이고 간결한 표현이야말로 기능적인 능숙함과 함께 깊은 통찰력을 요구하는 것이다.
판화의 가장 기본적인 기법이지만 더도 덜도 아닌 절실한 심정을 간결하고 설득력있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오윤
1946~1986
서울대 졸
1976년 선화예고에서 조소지도
1979년 '현실과 발언' 발기인 참여
1980년 제1회 '현실과 발언 동인전'
1983년까지 흑백 목판화로 일관
1985년 대형 걸개그림 '통읽기원도' 제작
1986년 간경화로 요절
#케테콜비츠
1867년 프로이센 동부 쾨니히스베르크 태생.
외할아버지는 1848년 시민혁명 이후 민주헌법 제정에 참여.
기성 교회의 권위와 남을 배척하는 복음주의를 거부하고 합리주의와 윤리의식을 강조하는 자유 신앙 운동을 펼쳤다.
10대부터 미술수업을 받고 판화가 막스클링크의 영향을 받았고
1980년대 한국의 민중미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
'미술이 아름다움만을 고집하는것은 삶에 대한 위선이다'
엥겔스와 친교를 나누던 큰오빠와 당대 진보주의의 영향으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길을 간 케테 콜비츠(1867~1945)라는 여성 화가다.
그녀의 아버지가 '삶에는 즐거운 일도 있단다. 근데 왜 너는 이렇게 어두운 면만 그리니?' 그는 4 나중에 에밀 졸라의 '미(美)는 추(醜)한 것이다'라는 말과 함께 프롤레타리아를 그리고 싶다는 욕망을 품은 것은 오직 땀 흘려 일하는 자만이 아름답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콜비츠는 1867년 프로이센의 괴닉스베르크에서 건축 기술자의 딸로 태어나고, 베를린 예술학교에서 그림 수업을 받았다.
24세 때 의료보험 조합 의사인 칼 콜비츠와 결혼하고 평생을 함께했다.
자신 속의 신성(神聖)을 찾고 성숙하는 것, 바로 '노래하는 뱀처럼 언젠가 너의 삶이 전체적으로 완벽한 음향을 발견할 때까지' 나아가고자 했던 콜비츠였다.
1980년대 우리 민중 미술계에서 불길같이 일어난 목판화 운동에서 콜비츠의 흔적은 뚜렷하며 늘 죽음을 동경하던 콜비츠는 '나를 죽음에 내어주는 걸 상상하면 두려움과 낯섦을 느낀다' 고 했다.
콜비츠는 1945년 4월 22일, 종전을 며칠 앞두고 눈을 감았고 1951년 그를 기리는 기념비가 동베를린 뵈르터 광장 공원에 세워졌다.
* 본 포스팅의 이미지와 일부 내용은 구글과 네이버의 기사와 자료를 토대로 정리한 것입니다.
#Ego
부정과 긍정은 동전의 양면이다.
어떤 행위나 표현도 '이것만이 정답이다'라는 극단적 논리에 빠지지 않는 것이 통찰력이고 곳 '중도'를 가는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현상이 아니라 어떤 목적을 가진 위선이 작용하고 있는지를 이성적으로 통찰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미술은 결국 시대를 이끄는 능력과 실재적 자연을 통해 느끼는 작가의 감정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사변이적 기예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