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교회를 나가기 처음 나간 것은 1.4 후퇴로 고향인 황해도를 떠나 연평도로 피난왔던 4살 때부터다. 먹고 살기 힘든 시절, 교회는 유일하게 내게 먹을거리와 즐거움을 주었던 곳이다. 교회에서 미군 식품을 나눠주었기 때문에 미제 초콜릿은 물론 기회가 좋으면 공책도 얻을 수 있었다. 이것을 얻기 위해서 교회 출석을 했지만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별다른 거부감이나 저항감 없이 신앙생활도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다.
처음 신앙은 매우 열정적이고 순수했다. 부흥회에는 앞에 앉아서 열렬하게 은혜를 사모했다. 새벽기도를 위한 종치기는 어린 시절의 즐거운 추억이다. 새벽공기를 가르며 달려간 예배당에서 가장 오랜 동안 기도했고 나보다 더 오래 기도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게 싫어서 자리를 지키기도 했다. 질투심도 많았고 그만큼 순수한 신앙을 가졌던 때다. 그런 신앙의 순수성은 군대 들어갈 때까지 유지되었다.
나는 중학교 때부터 탤런트에 대한 꿈을 가졌다. 이상하리만큼 주변의 친구들도 내게 성우나 아나운서, 배우가 될 소질이 있다고 말해 주었다. 어쩌면 그런 격려와 도전이 나를 탤런트의 길로 가게 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나는 어디를 가든지 내 꿈을 하나님께 아뢰고 그렇게 되기를 열망했다.
그래서 내가 늘 묵상했던 말씀은 요한복음 14장 1절과 14절이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이 말씀은 내 신앙을 뒷받침하는 두 기둥이 되었다.
하지만 내 삶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군대에 들어가면서 11년 동안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었다. 군악대로 선발되어 악기를 다루면서 화려한 무대의 맛을 본 뒤로 나는 그 맛에 취해 살았다. 무대에서 관객들로부터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은 짜릿한 흥분을 맛보게 한다. 결국 군대를 핑계로 하나님을 내 삶에서 떠나보냈다.
1972년 MBC 탤런트 5기 공채에 100대 1의 경쟁을 뚫고 합격을 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무명이었다. 무명은 가난을 의미했다. 군대를 제대하고 결혼을 했지만 나는 가정을 꾸려나갈 돈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텔레비전에 출연을 했지만 대사 한마디 없는 지나가는 사람이나 포졸 1, 2, 3 등의 역할이 전부였다. 당시 출연료는 800원 정도로 입에 풀칠하기 힘든 적은 돈을 받았다.
첫 아이가 태어났지만 끼니를 거를 때가 많아 아내는 제대로 먹지 못해 젖이 잘 나오지 않았다. 돈이 없어 우유도 못 샀다. 아내는 쌀 씻은 물로 미음을 만들어 먹이기도 했다. 이런 미음이 맛있을 리가 없었다. 미음을 아이가 먹지 않고 뱉어내기도 했다. 쌀 항아리가 바닥을 드러낼 때마다 아내와 아이에게 미안했다.
아기를 위해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약혼반지와 결혼반지 등 각종 가재도구를 전당포에 맡기는 일이었다. 그 때만 해도 전당포는 정말 다양한 물건들을 돈으로 바꾸어 주었다. 결혼할 때 준비한 혼수들은 아기 우유와 가계 살림을 위해 하나둘씩 전당포로 사라졌다. 나는 언제나 전당포 근처까지 물건을 들고 가면 나머지는 아내가 해결했다. 전당포 근처에 서성이고 아내는 전당포에 들어가 돈을 구해왔다.
하나님을 떠난 내 삶은 전당포에 새 삶을 의지했던 것이다. 어려운 삶을 살면서도 나는 여전히 하나님께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나님을 의지 하지 않는 새 삶은 생각보다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한 고개를 넘으면 또 하나의 고개가 앞을 가로막았다.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 삶이 황폐하다는 사실을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나는 방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참으로 오래 참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때가 차기를 기다리고 계셨다. 내 무명의 탤런트 시절은 드라마 <들장미>를 통해 종지부를 찍었다. 적어도 <들장미>는 탤런트로서 새로운 꽃을 피울 수 있는 가뭄 끝에 내린 달콤한 빗줄기였다. 덕분에 나는 더 이상 아기 우유 걱정과 밥 걱정은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얼굴이 알려지고 인기가 높아지면서 내게 술대접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나는 그 향락에 기꺼이 내 몸을 맡겼다. 술 도락에 빠지면서 술 냄새는 내 몸의 일부가 되었다. 결국 '할렐루야'가 아닌 '헬렐레'를 외치는 불신앙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계속 상하게 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나를 계속 기억하셨다. 당시 인기 있었던 드라마 <간난아이> 작가 이재호 씨가 있었는데 그는 내 고등학교 선배였다. 선배는 나를 볼 때마다 "교회에 다녔던 사람이 왜 안 나가? 빨리 나가라"고 말했다. 결국 나는 11년 만에 하나님 곁으로 돌아왔다. 술에 찌들었던 방황의 골짜기를 지나 자연스럽게 다시 은혜의 초장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이 싫었다. 집사 직분을 받았지만 예배만 드렸다. 목사님의 눈길을 피해 기둥 뒷자리를 즐겨 찾았다. 교회에 나갔지만 나는 여전히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셨다. 세상과 교회에 두 곳 모두에 양다리를 걸치고 변화 없는 신앙생활을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내 마음은 찜찜하기만 했다. 내 양심을 두드리는 성령의 음성을 애써 무시했다. 그리고 아무 일이 없는 척 신앙생활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내게 매우 강한 톤으로 말씀하셨다.
"1.4 후퇴 때 내가 너를 보호해 주었고 장티푸스 병에서도 널 구해주었다. 네가 나에게 구했던 탤런트 직업도 하게 해주었다. 그런데 너는 나에게 무엇을 주었느냐." 하나님께서는 내 모든 삶을 돌보고 계셨다. "너는 나에게 무엇을 해 주었느냐?"라는 말씀이 가슴 속 깊이 박혔다.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사실 1.4후퇴 때 북한에서 남한으로 넘어 오는 일은 목숨을 건 일이었다. 전쟁의 피난길은 죽음의 길이기도 했다. 피난 도중에 폭격과 굶주림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그 길에 하나님께서 동행하시고 보호해주신 것이다.
연평도로 피난을 왔지만 전쟁 중이라서 그런지 그곳은 전염병이 창궐했다. 장티푸스가 나돌았던 것이다. 장티푸스는 동네마다 죽은 시신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게 한 무서운 병이었다. 나도 염병이라고 하는 장티푸스에 두 번이나 걸렸다. 그러나 번번이 그 병을 이기고 목숨을 건졌다. 그렇지만 한 번도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서야 내 과거의 모든 고난 속에 빛들이 우연이 아님을 깨달았다. 1.4 후퇴 때의 포화 속에서 무사히 피난을 했던 그 길가, 장티푸스에서 살아난 것도 모두 하나님의 도우심이었다.
그런 사실을 깨닫고 나니 불순종의 삶을 살았던 나를 볼 수 있었다. 내 힘으로 병에서 살아난 것이 아니었다. 내 능력으로 탤런트가 된 것도 아니었다. 결혼도, 가족의 축복도 내가 이룬 것이 아니었다. 나는 지난 모든 삶 가운데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살았던 죄들을 회개했다. 하나님은 나를 충성된 종으로 다시금 이 땅을 살도록 허락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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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말....너무나 열심히 전도하시는 장로님....늘 본받고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