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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교회 이현래 목사님 2009년 9월 27일 디모데전서 말씀 - 딤전9
8. 사도직과 그 소명
가. 명령에 따름(딤전1:1-2)
2. 구주이신 하나님의 명령에 따름
바울은 구주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그리고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었다고 하였다. 소망은 세속적 소망과 성경적 소망 두 가지가 있다.
1. 세속적 소망(이방인의 소망)
가. 생존에 필요한 것
세속적 소망은 이방인, 즉 하나님 없는 사람들의 소망이다. 세속적 소망은 어떤 것인가? 입시에 합격해야 되고 장가도 가야 되고 돈도 벌어야 된다. 소망은 한없이 많다. 하지만 아무리 고상해도 그것은 다 육신적 안일과 정신적 평안, 그리고 명예와 영달을 위한 것으로 육신이 생존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다.
옛날 사람들의 소망은 농사를 잘 지어서 논 한 마지기라도 늘리는 것이었지만 요즘은 그런 소망을 가진 사람이 없다. 그렇지만 양상은 달라도 내용은 같다.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는 것이다. 공부를 왜 하는가? 살기 위해서 한다. 옛날에 농사만 지을 때는 공부가 필요없었다. 공부를 하지 않아도 농사를 잘 지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학구열이 높아서가 아니라 공부를 하지 않으면 취직을 못하니까 기를 쓰고 공부를 하는 것이다.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돈 벌 데가 많으면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되지만 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갈 데가 없으니까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생존에 필요한 것일뿐이다.
그것은 영원한 소망이 될 수 없다. 돼지도 그런 소망이 있고 소도 그런 소망이 있다. 먹고 살기 위한 소망은 다 있다. 소는 하루 종일 먹을 것을 찾아다닌다. 그놈은 아침에 ‘오늘은 어떻게 해서 배부르게 먹을까?’ 하는 소망을 가지고 나설 것이다. 소는 하루 종일 풀을 뜯어먹는다. 그래도 한쪽이 덜 차니까 저녁 때가 되면 물을 잔뜩 마신다. 한쪽을 풀로 채우고 한쪽을 물로 채워서 배가 빵빵해져서 집으로 돌아온다. 하루 종일 하는 일이 그것이다. 먹는 소망밖에는 없는 것이다.
나. 영원한 소망이 없음
먹고 사는 일은 소에게나 사람에게나 필하다. 그렇지만 그것을 영원한 소망이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이방인들을 보고 약속의 언약들이 없고(엡2:12), 세상에서 소망이 없다고 한 것이다(엡2:12). 먹고 사는 것은 생존을 위한 것이다. 약속의 언약이 있어야 인생의 소망이 있는 것이다. 약속이 있어야 갈 곳이 있고 할 것이 있다.
그래서 바울은 단호하게 하나님이 없는 세상 사람들을 가리켜서 소망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한 것이다. 대학에 들어갈 소망, 사장이 될 소망은 영원한 소망이 아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소망이 없다. 도를 통해서 도사가 되려는 소망을 가진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은 소망이 아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소망도 없다. 그것은 각자 생존하려고 하는 것일뿐이다. 심지어는 기도를 해서 능력을 받거나 입신을 하는 것도 소망이 아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누구도 소망이 없다. 오직 하나님만 우리의 소망이 되신다. 우리를 지으신 이가 있어야 우리에게 목표가 있고 목표가 있어야 소망이 있는 것이지 지으신 이가 없이 자기 혼자 가지고 있는 목표는 소망이 될 수 없다. 그것은 편하게 살아 보려는 것, 남보다 나아 보려는 것이지 그것을 소망이라고 할 수 없다.
지난 시간에 구원에 대해서 말씀드릴 때 멸망은 지옥불에서 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에서 이탈된 것이라는 말씀을 드렸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멸망 상태에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없다. 잘 먹고 잘사는데 왜 멸망 상태에 있다고 하는가? 하나님의 경륜에서 이탈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경륜에서 이탈되었으니까 하나님께는 무용지물인 것이다.
2. 성경적 소망
하나님이 없으면 소망도 없다. 그래서 성경적인 소망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성경적인 소망의 근거는 하나님의 능력과 그의 신실하심에 근거한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능력이 있는 분이다. 약속을 하면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다. 이것이 성경적 소망의 근거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을 그 백성에게 이루셨고 모세에게 약속하신 것을 다윗에게 이루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출20:2).”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희랍인들처럼 철학적인 이유로나, 사유(思惟)를 통해 신이나 절대자, 또는 절대타자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역사 안에서 그들에게 신실하고 능력있게 행하신 분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또 소망을 가졌던 것이다.
그 나라는 망했지만 그들에게는 그런 하나님이 있기 때문에 소망이 있었다. 비록 현실은 망해서 도저히 재기불능의 상태였지만 약속하신 하나님이 반드시 약속을 지키신다는 것이 선지자들의 소망이었다. 선지자들이 계속해서 하나님 말씀을 선포가 이유가 그것이다. 나라가 망하지 않았을 때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우상을 타파하라고 선포했지만 나라가 망한 후에는 신실하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약속을 반드시 이행하실 것이니까 그것을 기다리라고 했던 것이다. 이것이 메시아 사상이다. 메시아를 기다리다 보니까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렘31:33-34).”라는 말이 나왔다. 완전히 망한 상태에서도 그들에게는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말이 나온 것이다.
하나님이 있는 사람은 어떤 경우를 당해서 소망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소망이 없다. 소망의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주먹을 믿어라.”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자기가 하기에 달려있으니까 잘하면 살지만 못하면 죽는 것이지 소망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의 힘을 키우려고 하는 것이다. 소망이 없으니까 자기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과 그분의 신실하심은 곧 우리의 소망의 근거다. 애굽에서 인도해 낸 분이니까 소망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분이니까 소망이 있는 것이다. 우리 앞에서 사도들이 경험했던 역사적인 증거가 우리의 소망이 되는 것이다.
가. 이스라엘의 소망
이스라엘의 소망은 포로됨에서의 귀환이었다. 예레미야 16장 14-15절에는 “보라 날이 이르리니 다시는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북방 땅과 그 모든 쫓겨났던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리라” 하였다. 전에는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했지만 이제는 그들을 바벨론의 포로됨에서 귀환하게 하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할 것이라고 한 것이다. 이것이 그들의 소망이었다. 이 소망은 애굽에서 그들을 인도해 내신 여호와에게 근거한 소망이었다. 그때 애굽에서 인도해 내셨듯이 앞으로는 더 큰 일을 행하실 것이라는 것이 그들의 소망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나온 것이 메시아에 대한 소망이다.
2) 메시야에 대한 소망(왕국의 회복과 소망)
예레미야 23장 5절에는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라고 하였다. 그들은 이런 왕이 올 것을 소망했다. 전에 다윗을 왕으로 세우셨듯이 앞으로도 다윗과 같은 왕을 세워서 그 나라의 홀이 영원할 것이라고 하신 약속을 지키실 것이라고 소망했던 것이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이 근거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천 년 동안 자기 땅을 잃고 배회했지만 어디를 가든지 그들은 흩어지지 않고 모여 사는 것이다. 비록 육신적인 소망에 불과하지만 역사상 그들처럼 끈질기게 한 민족을 유지하고 있는 백성이 없는 것은 이 소망 때문이다. 그들이 이천 년 동안 나라가 없이 떠돌아다니며 살았지만 그 민족을 잃지 않았다는 것은 역사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민족 같았으면 다 흩어져 버리고 말았을 텐데 이 소망 때문에 그들은 옛 유대 땅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그들은 그 땅이 완전히 회복될 것을 바라기 때문에 결사적으로 그 땅을 지키고 있다.
나. 교회의 소망
그러나 그 소망은 육신의 소망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래서 교회에 대한 소망을 갖게 된 것이다. 그 땅은 그림자였다. 처음에는 가나안 땅만 생각했고 그 땅에서 영원히 왕노릇하고 그 땅을 지킬 것이라고 알았는데 망하고 나서 보니까 그 땅은 물질적인 땅이 아니라 인격의 땅이라고 해석하게 된 것이다.
교회의 소망은 무엇인가?
1) 하나됨의 소망(엡4:2-6)
첫째는 하나됨의 소망이다. ‘생명나무는 연합을 가져오고 지식의 나무는 분열을 가져오기 때문에 하나됨’이 중요한 것이다. 사탄이 와서 준 지식이 들어올수록 계속 분열을 일으키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생명나무는 연합을 가져온다. 그러므로 연합이 되면 승리인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됨의 소망을 가진 것이다.
교회 안에는 별별 사람들이 다 있어서 내가 잘났느니 네가 잘났느니, 내 계시가 옳으니 네 계시가 옳으니 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 각자의 생각이 달라서 이때는 이렇게 생각하고 저때는 저렇게 생각한다. 그렇게 분열되어 있던 고린도 교회에 바울이 소망을 가졌던 이유는 지식의 나무의 결과는 분열이지만 생명나무의 결과는 연합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연합될 것이라는 소망을 가졌던 것이다.
에베소서 4장 3-6절에는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니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라고 하여 갈라질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하였다. 다 하나이니까 당연히 하나가 될 것 아니겠는가! 다른 하나님을 믿는 것도 아니고 다른 생명을 받은 것도 아니니까 당연하게 하나가 되지 않겠는가! ‘하나됨의 소망’, 이것이 교회의 소망이다.
2)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에 이르는 소망(엡4:13-15)
둘째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에 이르는 소망이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려면 어떤 사람도 한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하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것은 교회로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에 이르는 소망은 교회의 소망이다.
물론 개인도 발전해서 더 나은 분량, 더 장성한 분량에 이르겠지만 우리가 아무리 장성한 분량에 이른다고 해도 개인으로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에 이를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소망은 교회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개인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에 이르기 어렵지만 교회적으로는 쉽다. 내가 비록 새끼손가락이라도 새끼손가락으로서 완전하면 되는 것이다. 새끼손가락이 꼭 엄지손가락처럼 될 이유는 없다. 새끼손가락으로, 손톱으로 완전하면 된다. 한 몸 안에 있는 지체니까 한 몸을 완성하는 데는 다 필요하다. 교회 안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에 이른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고 너무나 당연한 일인 것이다.
서로 지체로 인정해서 우리가 충만해지면 되지 꼭 내가, 네가 충만해지려고 할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성장하지만 몸과 조화를 이루면서 같이 성장하는 것이다. 내 손가락은 자기대로 성장했지만 내 몸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만약 손가락 하나만 길어지거나 귀만 당나귀 귀처럼 자랐으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일이 벌어졌을 텐데 여러분도 적당하게 컸고 나도 적당하게 컸기 때문에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여러분도 나를 볼 때 적당하게 생겼고 나도 여러분을 볼 때 적당하게 생겼지 어느 한 가지만 삐쳐나온 사람이 없다. 적당하고 신기하게 잘 자라서 당나귀 귀도 없고 코주부도 없다. 그래서 장성한 분량이 된 것이다. 코 하나, 입 하나, 눈 하나로는 별것 아니지만 전체로 조화를 이루니까 적당하게 잘 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에 이르는 것은 교회적 소망이다. ‘교회, 연합체, 하나됨’, 이것이 충만에 이르는 길이다.
개인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에 이르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리스도를 모를 때는 개인적으로 가능할 것 같지만 그리스도의 분량을 알면 나 한 사람으로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에 이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지식의 세계도 그렇다. 지식의 세계가 얼마나 넓은지 모를 때는 자기 혼자서 연구하면 될 것 같지만 지식의 넓은 세계를 알고 나면 자기 혼자로서는 도저히 안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자기 혼자 논문을 잘 쓴다고 모든 일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논문들이 모아져서 하나의 과학적 작품이 나오는 것이다. 이것을 알 때 저절로 겸손해지고 자기 일에만 충실하게 된다. 그 넓은 세계를 모를 때는 자기 혼자서 다 하려고 하지만 그 넓이를 알고 나면 도저히 자기 혼자서는 다 할 수 없으니까 하나라도 자기에게 맡겨진 것을 충실히 하게 되는 것이다.
자동차 하나에 삼만 개의 부품이 들어간다고 한다. 혼자서는 삼만 개의 부품을 다 만들 수 없다. 너트를 만드는 사람은 평생 너트만 만들어야 하고 타이어를 만드는 사람은 평생 타어어만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모든 일이 다 그렇다. 그리스도의 큰 분량을 알고 나면 자기 혼자로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을 알고 나면 나 한 사람으로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래서 저절로 겸손하게 되고 남을 인정하게 된다. 새끼손가락도 인정하게 되고 손톱도 인정하게 된다. 발가락도 인정하게 되고 다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에베소서 4장 13절과 15절에는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하였다. 우리는 한 머리 안에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출발해서 도를 닦거나 깨달음을 얻으려고 하거나 선(禪)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자기 혼자 자라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엄지손가락인지 새끼손가락인지도 모르고 자기 혼자 제멋대로 자란 것과 같아서 그것을 도저히 다른 데 붙일 수 없다. 연합을 시켜서 무엇을 만들어 보려고 해도 도저히 작품이 안된다. 한 머리에서 자란 몸이라야 이렇게 아름다운 작품이 되는데 각자 자기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각자 따로 부품을 만들면 어찌 되겠는가? 삼만 개의 부품을 만드는 협력 공장들은 전부 자동차 공장의 지시를 받아서 부품을 만든다. 그러니까 그 부품들을 조합해서 하나의 자동차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만약 협력 공장들이 머리인 자동차 공장의 지시가 없이 각자 너트를 만들고 타이어를 만든다면 그것으로 자동차가 되겠는가? 머리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머리가 있어야 통일이 된다. 그래서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하였다.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안에서 우리는 통일을 이룰 수 있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이 없이는 통일이 불가능하다.
각자 깨달았다 해서 통일이 되겠는가? 각자 도사가 되었다고 해서 연합이 되겠는가? 그런 사람들끼리 만나면 다 자기가 최고라고 한다. 태극권 도장에서도 다 자기가 정통이라고 하고 자기 태극권이 진짜라고 한다. 옛날에 만났던 분은 족보를 보여 주면서 자기가 9대 계승자라고 하며 진 씨 이외의 성으로서는 자기가 처음이라고 하기에 대단한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 다음 사람들도 다 자기가 최고라고 했다. 도사들은 다 그렇다. 자기대로는 다 잘났다고 한다. 그러나 머리가 없다. 각자 자기가 머리인 것이다. 머리만 있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머리가 하나고 몸이 둘이면 몸 하나를 잘라내면 되지만 몸은 하나인데 머리가 둘이면 어떻게 살겠는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안에서 통일이 가능하고 연합이 가능하다. 하나됨이 가능하다. 이것이 교회의 소망이다. 교회는 생명 때문에 하나될 소망이 있고 머리이신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될 소망이 있다.
이것은 변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변할 수 있다. 오늘은 이랬다가도 내일은 저럴 수 있다. 그런데 생명이 하나고 머리가 하나다. 그러므로 이것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이랬다 저랬다 하며 돌아다니다 와도 머리는 역시 이 머리이고 이 생명이기 때문에 하나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의 소망은 이스라엘의 소망보다 완전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소망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혜택만을 바라던 소망이지만 교회의 소망은 생명의 소망이므로 확고한 소망인 것이다.
매미가 굼벵이로 7년을 있다가 나온다고 한다. 그것은 생명의 변화다. 굼벵이로 계속 있다가 허물을 벗고 나오면 매미가 된다. 이것을 누가 시켜서 하겠는가? 생명이 그러니까 굼벵이로 7년을 있다가 나오는 것이다. 그렇지만 매미는 매년 똑같다. 7년이 덜된 놈은 땅 속에서 불평불만도 없이 있다가 7년이 되면 무슨 생각이 들어서인지 밖으로 나와서 허물을 벗으면 매미가 된다. 이것이 매미의 생명의 소망이다. 굼벵이는 매미가 될 확고한 소망이 있는 것이다. 초가지붕 속에 사는 놈도 그렇고 갈잎 속에 사는 놈도 그렇다. 어디 살든지 씨가 하나니까 다 매미가 될 소망을 가지고 있다.
잘 먹으면 크게 나오고 적게 먹으면 작게 나오는 차이는 있다. 우리 동네는 산 속에 있는 동네인데도 매미가 없다. 제주에서는 매미가 얼마나 많은지 떼를 지어 날면 참새가 날아다니는 것 같이 많다. 잘 먹은 놈들은 그렇게 되는 모양이다. 그렇지만 큰 놈이든 작은 놈이든 매미로서의 소망은 같다. 제주에 있는 매미나 우리 동네에서 가끔 한번씩 우는 매미나 생명이 하나니까 소망은 한가지다.
교회는 왜 확실한 소망이 있는가? 죽고 다시 난 생명이 하나고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이 하나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됨에 대한 확고한 소망이 있는 것이다.
3)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
셋째는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이다.
교회는 우리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원칙적으로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은 교회를 통해서 드러난다. 교회가 없으면 하나님의 영광은 드러날 수 없다. 옛날에는 성막위에 불로 임하기도 했고 구름으로 임하기도 했으나 지금은 그런 영광이 없다. 하나님의 영광은 오직 교회다.
에베소서 5장 26-27절에는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였다.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세워진다. 왜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자기 자신을 주시는가? 자기의 영광이기 때문이다.
왜 잠자리는 땅에 알을 까고 죽는가? 알에서 잠자리 새끼들이 나오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기 때문이다. 신기하게도 가을의 기운이 오면 잠자리들이 갑자기 나온다. 어느날 갑자기 잠자리 떼가 나오는 것은 작년에 죽었던 잠자리의 영광이다. 잠자리는 바로 이것을 보고 죽었던 것이다. 예수께서 왜 자기 자신을 주셨는가? 교회가 자기의 영광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주어진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시는 것이다. 티나 주름잡힌 것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시는 것이다.
왜 결혼식 날 신부에게 드레스를 입히는가? 그것은 신랑의 영광을 위해서다. 신부가 초라하게 바지차림으로 결혼식에 나온다면 어찌 되겠는가! 신랑이 얼마나 쪼잔하면 신부가 저 모양이냐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많은 돈을 들여서 신부를 최대한 화려하게 꾸미는 것이다. 그래야 사람들에게 자랑할 수 있다. 신부는 신랑의 영광이니까 “내 신부는 이렇게 아름답다.”고 자랑하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21장 1-2절에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라고 하였다. 신부는 신랑의 영광이다.
그리스도의 합당한 배필, 그리스도와 교회,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선악과 이후 교회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연합이, 하나됨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수 없게 된 것이다. 아담을 볼 때 하나님이 영광스러운 분이라고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바벨론을 볼 때, 피라밋을 볼 때 하나님이 영광스럽다고 보이지 않고 바로가 영광스럽게 보인다. 바로는 자기의 영광을 위해서 피라밋을 만들었고 국고성을 쌓았다. 이 세상에는 아무 데도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데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의 영광을 나타낼 장소가 필요한 것이다. 그 영광의 장소가 교회다. 옛날에도 성막위에, 그 백성 위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 그래서 그분은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는 것이다. 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사랑하셨는가, 왜 성막을 귀중히 여기셨는가? 그 패역한 백성을 왜 끝까지 사랑하셨는가? 그 백성이 자기의 영광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영광스럽게 되는 것은 교회의 문제가 아니라 그분의 문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방해하는 아담을 끝내셨다. 그리고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방해하는 바벨론을 끝낼 것이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담을 끝내셨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가짜 허풍선이를 끝내셨다. 그렇지만 바벨론은 아직 남아 있다. 그것은 교회가 끝낼 것이다. 새 예루살렘이 준비될 때, 교회가 완전하게 준비될 때 바벨론은 끝난다.
교회가 진행하고 성장해서 이루어지는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래서 그 성을 영광의 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은 지금은 교회이고 장차는 새 예루살렘이다. 교회는 지금 하나님의 영광으로서 소망인 것이다.
우리가 지금 무엇 때문에 이렇게 모여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어떠함이 하나님의 영광을 좌우한다. 오늘 우리의 간증이 하나님의 영광을 좌우한다. 간증을 하면서 쓰잘데 없는 소리나 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지 않는다. 말씀을 듣고 엉뚱한 소리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지 않는다.
내가 말씀을 전하면 그 말씀에 대해서 딱맞는 화답을 해야 되지 말씀은 동쪽인데 서쪽을 화답하면 다른 사람들이 무슨 말씀인지 모르고 마는 것이다. 다른 교회처럼 설교만 하고 말면 증거가 없으니까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간증을 하니까 말씀에 대한 간증을 제대로 하면 영광이 되지만 엉뚱한 간증을 하면 나는 고개를 숙이고 내려가야 한다. 우리의 간증은 그분의 영광을 위한 것이지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왜 변화되어야 하고 보석이 돼야 하는가? 그것은 영광의 성이 돼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변화는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를 위한 것이다. 한 사람이 변화하고 두 사람이 변화하고 자꾸 변화하면 교회는 점점 더 보석으로 빛나게 될 것이고 보석이 많아질수록 교회는 더욱 찬란해질 것이다. 자리가 옮겨진 사람들, 변화된 사람들, 새로워진 사람들이 나올수록 우리는 세상과 분리되게 될 것이고 우리가 더 나은 본향을 향해서 가고 있다는 증거가 확실하게 드러날 것이다. 사람들이 “대구교회에 가 보았더니 사람들이 늘 변화한다.”는 말을 하는 것은 우리에게 더 나은 본향이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이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인 것이다. 나는 그분의 영광이다. 나는 그분의 영광의 소망 안에 부름받아 와 있다. 그래서 교회는 소중한 것이다. 사람들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지만 우주 안에서 하나님께는 대단히 소중한 것이다. 우리는 쉬었다 가려고 올 수도 있고 자기 분풀이를 하려고 올 수도 있지만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에 관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사람에게는 영광이 되는 것이다.
다. 그리스도 안의 소망(소망이신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우리를 자신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과 하나님 우편에 오르심 안에 포함하셨다. 우리의 운명을 지고, 우리의 운명을 가지고 우리를 포함하셨다. 그분이 죽으시고 다시 사시고 하늘에 오르신 것은 우리와 같은 재료를 가지고, 우리가 흙이면 흙으로, 우리가 돌이면 돌로, ‘나’라는 재료로 그렇게 되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에게 포함된 것이다. 그분은 ‘나’라는 재료를 가지고 죽으셨고 ‘나’라는 재료를 가지고 다시 사셨으며 ‘나’라는 재료를 가지고 높이 되셨다. 그러므로 나는 그분 안에 포함되어 있다. 예수님이 꿈이 나타나서 “내가 너를 포함했다.”고 해서 포함된 것이 아니라 그분은 ‘나’라는 재료로 승리하신 것이다.
전에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와 다른 재료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우리와 같은 재료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으니까 우리와 같은 재료인 것이다. 우리는 죄의 종이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렸는데 그분은 우리와 같은 재료를 가지고 승리하셨고 영광을 나타내신 것이다. 우리와 같은 재료를 가지고 죽으셨고 다시 사셨으며 하늘에 오르셨다. 그래서 우리는 자동적으로 그분 안에 포함된 것이다.
그분이 우리 안에서 생명(생활)이 되심으로 그리스도는 우리의 소망인 것이다. 나와 다른 재료를 갖고 죽으셨고 나와 다른 재료를 갖고 부활하셨다면 우리는 그분 안에 포함될 수 없다. 개구리는 아무리 죽어도 나와 상관이 없다. 심지어는 양이 죽어도 감동이 없었던 것이다. 그것과 나는 재료가 다르기 때문이다. 양이라는 놈은 끌어다 놓고 죽여도 가만히 있는 놈이다. 그렇지만 나는 가만히 있지 않고 뻗댈 놈이다. 그래서 서로 교감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다. 그분은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지고 죽으셨고 다시 사셨으며 하나님 우편에 오르셨다. 그래서 그분이 우리의 생명이 된 것이다. 우리도 그 재료를 가지고 살게 된 것이다.
서툰 목수가 연장 탓을 한다는 말이 있다. 삽이 나빠서 땅이 파지지 않는다고 하고 대패가 나빠서 나무가 깎이지 않는다고 한다는 것이다. 익숙한 목수는 같은 대패를 가지고도 좋은 제품을 만들어 낼 수 있고 익숙한 일꾼은 같은 삽을 가지고도 땅을 잘 파낼 수 있다. 재료가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삽이 나빠서, 대패가 나빠서” 하며 항상 재료 탓만 했었다. 움막이 나빠서 지금은 빌딩을 짓고 산다. 움막에서 살다 보니까 “움막이 나빠서 인생이 불행하다.”며 지금은 아파트, 빌딩까지 왔다. 그렇지만 그것으로도 행복하지 못하다. 행복하지 못한 것은 재료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이었던 것이다.
주님께서는 ‘나’라는 재료를 가지고 승리하셨다. 우리는 사탄을 물리치려면 기도를 많이 해야 하는 줄 알았고 영력이 있어야 하는 줄 알았으며 마음 수련을 해야 되고 도를 통해야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재료를 가지고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라고 하심으로 사탄을 이기셨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 누구나 이 말을 할 수 있다. 나도 할 수 있고 여러분도 할 수 있다. 그전에는 이 말을 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추운 겨울에 얼음판에 앉아서 기도하다가 무릎이 상한 사람이 많다. 요즘은 영성을 높이려고 영성훈련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게 해야만 될 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이 어떻게 돌로 떡을 만들어 먹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 사람이지 떡으로 사는 것이 사람인가?”라고 하면 간단하지 않은가! 성전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고 하면 “어떻게 성전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것이냐? 내가 어찌 하나님을 시험할 수 있다는 말이냐?”라고 하면 간단하다. 예수님은 나와 똑같은 재료를 가지고 승리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나의 생명이 되신다.
1) 하늘에 속한 영적인 복을 누림(엡1장 참조)
참 생명은 하늘에 속한 영적인 복을 누리게 된다. 하늘에 속한 영적인 복은 이 생명에게 주어진 복이다. 이 생명에게 유증된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해당이 되는 사람의 것이다. 그러나 해당이 되지 않는 사람에게는 자기 것이 아니다. 물은 낮은 데 고인다. 하나님의 축복도 낮은 사람에게 임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축복하기를 원하시지만 하나님의 축복이 갈 데가 있고 못갈 데가 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마5:3). 하나님의 축복은 가난한 자에게 흐르게 되어 있다. 가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축복이 임할 수 없는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서 인생이 변화되었으면 그것은 가난하기 때문이다.
누가 가난한 자이고 누가 부자인가? 하나님의 말씀이 없을 때는 이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고 저 사람은 부자인 것 같았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오고 보니까 우리는 다 가난한 자들이다. 사실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자들이다. 세상의 말을 들어 보면 “나는 저 사람보다 부자다. 저 사람은 나보다 부자다.”라고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보면 사람은 다 흙이다. 우리는 다 가난한 자들이다. 원래 빈그릇인 것이다. 빈그릇에는 무엇인가가 담겨져야 한다. 세상은 엉뚱한 것을 담아 놓았기 때문에 자기가 부유하다고 생각하나 빈그릇에는 담아야 할 것을 담아야 한다. 잔치집에 가 보면 음식이 여러 가지 많지만 다 정리하고 씻어 놓으면 다 빈그릇이다. 음식은 어디로 가고 없고 그릇만 남는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하늘에 속한 영적인 복은 누가 받는가? 가난한 사람이 받는다. 무슨 재주가 있어야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능력이나 은사가 있어야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가난한 사람이 받는다.
가)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아들들이 됨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찬미할 사람이 필요한 분이다. 누가 찬미하겠는가? 가난한 사람이다. ‘나는 축복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인데 받았구나. 나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인데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셨구나.’라고 아는 사람이 하나님을 찬양하지 ‘하나님은 괜히 간섭을 하는구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찬양을 할 수 없다. 많이 안다고, 도를 통했다고 찬양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받았을 때 찬양을 할 수 있고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아들들이 된 것, 이것이 영적인 복이다.
나) 하나님과 교통하는 인격체로 복귀하기 위하여
하나님과 교통하는 인격체로 복귀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 곧 죄사함을 받은 것이다.
기도를 열심히 한다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무릎을 치고 소나무 뿌리를 뽑는다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소나무 뿌리를 뽑으면서 억지를 쓰면 귀찮으니까 하나님께서 들어 주실지는 몰라도 하나님과 교통은 안된다. 하나님과 교통하려면 교통할 수 있는 인격으로,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그 인격으로 복귀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아무리 해도 하나님과 교통이 안된다. 그러니까 기도를 해서 교통을 하려고 하다가 헛것을 보거나 헛소리를 듣는 것이다.
하나님과 교통하는 인격체로 복귀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다) 하나님의 창조세계 안에서 중심이 되기 위하여
하나님의 창조 세계 안에서 중심이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안으로 통일되어야 한다. 나 혼자서는 창조의 중심이 될 수 없다. 인간이 창조의 중심이 되려면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안으로 통일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안으로 통일 된 것’, 이것이 교회다. 우주의 중심이다.
라)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기 위하여 하나님의 기업이 됨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려면 하나님의 기업이 돼야 한다. ‘하나님의 기업’은 하나님이 무엇을 생산하시기 위한 땅이다. 농사를 지어서 소출을 거두기 위한 땅이 기업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마치 밭처럼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을 생산해 내는 것이다. 그런 기업이 되는 것, 이것이 복이다. 신령한 복, 영적인 복, 하늘에 속한 복이다.
마) 하나님을 경험함(앎)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 이것이 하늘에 속한 영적인 복을 누리는 것이다. 부르심의 소망을 아는 것이고, 기업의 영광의 풍성을 아는 것이며,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아는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되심을 아는 것이다. 부르심의 소망을 아는 것은 참 사람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고, 기업의 영광의 풍성을 아는 것은 인생의 경영을 알게 되는 것이며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아는 것은 참 믿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비록 피조물로서 하나님을 아는 데 한계가 있지만 우리가 그분을 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그분을 모르고 혜택을 받는 것과 그분을 아는 것은 다르다. 옛날에 고아원 아이들은 연필도 받고 지우개도 받았지만 누가 보내주었는지 몰랐다. 자기에게 그것을 보내 주는 분이 누구인지, 어떤 마음인지 알고 받았다면 얼마나 감사하겠는가! 같은 연필을 받아도 그 마음을 알고 받으면 행복할 것 아닌가! 옛날에는 국산 연필과 미제 연필은 차이가 많았다. 국산은 잘 부러졌는데 미제는 그렇지 않았다. 보내준 사람을 모르니까 연필이 좋다고만 생각했지 은혜에 감사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생활비에서 1$씩 5$씩 모아서 보내 준 사람의 마음을 알면 받는 사람이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그러나 그 마음을 모르면 도움은 받아도 행복하지 않다. 그런즉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한다는 것은 놀라운 축복인 것이다. 영적인 축복 가운데 가장 큰 축복이다.
그분과 동역할 때 우리는 그분을 경험하게 된다. 심지어는 전도를 하러 나가서도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 누군가를 구원하려고 노력할 때 하나님의 마음을 경험하게 된다. 아기를 낳으면 엄마의 마음이 생기듯이 사람을 구원하려고 하면 하나님 마음이 생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마음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가만히 있는 사람은 하나님 마음을 경험할 수 없다. 이웃집에 말씀 테이프나 전도 책자라도 갖다 주는 사람이라야 경험할 수 있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경험할 수 없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 이것은 산 경험이다. 우리는 이렇게밖에 하나님을 알 수 없다. 그분과 동역하면서 그분이 원하는 일을 하면서 그분의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2) 선한 일을 위한 새로운 피조물이 됨
그리스도 안의 소망 두 번째는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한 일은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일이다. 하나님의 선한 일은 수없이 많지만 크게 나누면 한 새사람으로 지어지는 것, 하나님의 권속이요 하늘의 시민이 되는 것, 하나님의 거처로서의 성전이 되어가는 것이다.
한 새사람으로 지어지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일이다. 하나님의 권속이요 하늘의 시민이 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일이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당신의 가족이 되게 하고 싶어하신다. 하나님의 거처로서의 성전이 되어가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일이다. 하나님은 아예 우리 속에 와서 살기를 원하신다.
3) 새로운 신분으로 전환됨
그리스도 안의 소망 세 번째는 새로운 신분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가) 후사요 지체로서 하나님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엡3:6)
이것은 후사요 지체로서 하나님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어도 그 약속에 참예할 자가 없으면 그 약속은 공허한 약속이 되고 만다. 선물을 준비해 놓았는데 받을 자가 없으면 선물을 준비한 자가 공허해질 것이다. 잔치를 베풀어 놓았는데 손님이 오지 않으면 잔치집 주인은 공허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후사요 지체로서 하나님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되는 것이 새로운 신분은로 전환되는 것이다.
그리고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는 것, 그리스도를 남편의 사랑과 그 자신으로 받는 아내가 되는 것, 하나님의 원수와 싸우는 전사가 되는 것이다. 이 이상의 복이 없다.
우리의 장래는 이미 그리스도께 속해있음으로 그리스도의 어떠하심이 곧 우리의 소망이다. 그분만큼 되는 것,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다. 우리는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인가? 요한일서 3장 2절에는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라 하였다. 우리는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인지 모른다. 그런데 그가 분명히 나타나실 것이니까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는 그의 존재를 그대로 보게 될 것이다. 그분의 어떠하심을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와 같이 될 것이다.
우리는 그분을 본 대로 된다. 그를 어떤 분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본 것만큼 되는 것이다. 그분을 병 고치는 분으로 본 사람은 병을 고치는 사람이 되고 물 위를 걷는 분으로 본 사람은 물 위를 걷는다. 예수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우리 인생이 결정되는 것이다. 그분을 보는 것만큼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가 왜 이렇게 천차만별인가? 보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보아도 사랑을 보는 사람도 있고 피를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거기서 내 인생이 끝났구나. 내 인생도 저렇게 끝나는구나. 저것이 내 인생이구나.’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보면 그렇게 된다. 그런데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라고 하였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어떠하심에 따른 혜택이 소망이 되었으나 우리의 소망은 그리스도 자신의 어떠함과 그가 얻으시고 성취하신 모든 것의 근거인 그분 자신이 우리의 소망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광야에서 만나를 주신 것에 대한 소망을 가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 자신의 어떠함과 그분이 얻으시고 성취하신 모든 것의 근거인 그분 자신을 알고 있다. 그분이 얻으신 것만이 아니라 그렇게 얻게 된 이유를 알고 있다.
왜 물이 고이는가? 물이 고인 것을 보고 ‘왜 여기 물이 고여있을까? 기적이구나.’라고 생각하면 기적이 되고 말지만 ‘여기가 웅덩이라서 물이 고여있구나.’라고 알면 물이 고일 웅덩이를 파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어떠하심의 근거가 어디 있는가? 어째서 저분은 저렇게 되신 것인가? 이 근거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 목사님이 말씀하시는데 어디서 저런 말씀이 나오는가?’ 이것을 자세히 보고 근거를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얻으시고 성취하신 모든 것이 어디서 온 것인지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분은 하나님 아들이니까 그런 일을 성취하셨다고만 알면 소용이 없다. 근거를 알아야 한다.
참 하나님 안에서 참 소망이 있다. 우리의 대표자, 나를 포함하신 그분 안에서 확고한 소망이 우리에게 있다. 그분은 나와 똑같은 재료를 가지고, 나를 가지고 죽기도 하셨고 사시기도 하셨고 승천하시기도 하셨다. 이 얼마나 확실한 소망인가! 흙을 가지고 벽돌을 찍었다면 흙으로 벽돌을 찍는 것이 확실하지 않은가!
아담은 있는 그대로 알수록 절망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은 모르는 것이 좋다. 아담을 너무 알다 보니까 너무 절망이 되어 허무주의가 나온 것이다. 소설이 그렇게 나온 것이다. 아담을 있는 그대로 찾아보려고 하다 보니까 절망에 빠져서 태양이 쪼이는 것이 너무 지루해서 사람을 죽이는 ‘이방인’ 같은 소설이 나온 것이다. 아담은 볼수록, 알수록 더욱 절망이다. 그 마지막은 바벨론이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있는 그대로 알면 알수록 소망이 생긴다. 더 자세히 알수록 더 소망이 생기고 더 확실히 알수록 더 소망이 확실해진다. 그 생명으로, 그 자리에서 새 예루살렘이 되는 것이다. 그 죽으심의 자리에서 부활도 있고 승천도 있다. 그 자리에서 영원한 생명도 있고 그 자리에서 새 예루살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알면 알수록 더욱 소망이 생긴다.
우리는 신성한 성질과 신성한 신분을 받았다. 그리고 장차는 성질과 신분뿐만 아니라 모양과 위치도 얻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다. 우리가 받은 신성한 생명이 모양을 갖추게 될 날이 올 것이다.
아기가 뱃속에 있을 때는 쥐새끼 같아서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그런데 그것이 모양을 갖추면 사람이 된다. 모양을 갖출 것이라는 소망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열 달 동안 태아를 뱃속에 넣고 있는 것이다. 만약 태아가 모양을 갖추지 않는다면 뱃속에서 지렁이 한 마리가 꾸물거리는 것 같을 것이다. 그러면 징그러워서 어떻게 살겠는가! 그런데 비록 지금은 굼벵이 같고 지렁이 같고 쥐새끼 같지만 장차 사람의 모양을 갖추게 된다. 그래서 열 달 동안 배부르게 하고 다니는 것이다.
우리는 신성한 모양과 위치를 갖게 될 것이다. 신성한 모양, 이것을 우리는 새 예루살렘에서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변할 수 없는 소망이다. 굼벵이가 매미가 되듯이 난자와 정자가 만나면 사람이 된다. 이것이 소망이다. 생명은 이런 소망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소망이다. 이 소망은 그분의 어떠하심에서 근거한 것이다.
하나님의 혜택에서 근거한 소망을 가졌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말로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너무나 가난했고 약했기 때문에 그것이라도 붙들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소망은 그런 소망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바로 내 운명 안에, 내 생명 안에 오셨기 때문이다. ‘나’라는 재료로 시작된 일이기 때문이다. 공장이 다른 데 있지 않고 내 속에 있으며 다른 재료로 한 것이 아니라 ‘나’를 재료로 한 일이기 때문에 어차피 내가 될 것 아닌가! 그 러므로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원한 소망이고 확실한 소망이다. ‘나’라는 재료를 가지고 시작하셨으니까 결국은 나인 것이다. 이 확고한 소망에서 흔들리지 않는다면 신성한 생명의 모양과 위치를 얻을 것이다.
우리는 이 확고한 소망을 전하기 위해서 명령을 받은 사람들이다.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처럼 우리도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어 온 세상에 이 복음을 전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과 동역하는 동역자들이 되기를 바란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아브라함 안에서 우리를 불러내시고 이스라엘 속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백성들 속에서 우리를 왕국으로 세우시고 성막을 건축하게 하시며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사심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이제 우리를 교회로 부르셔서 하나되게 하시는 소망 안에 있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당신은 우리의 소망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영원한 소망입니다. 당신이 그러하심이, 당신이 그렇게 하신 것이 바로 우리에게 소망입니다. 당신이 죽으신 것이 우리의 소망이고 당신이 다시 사신 것이 우리의 소망이고 당신이 하늘에 오르신 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이 소망 안에서 온 세상에 보냄을 받은 사도로, 당신에게서 파송된 사도로 세상에 나가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