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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강 불교의 수행법
불교 수행의 목적은 깨달음(成佛)에 있으며, 깨달음을 얻기 위한 불교의 수행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불교의 수행법이 이렇게 다양한 것은 중생의 근기가 제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자는 자기에게 맞는 수행법을 선택하여 수행함이 좋으리라고 본다.
제7강에서는 불교의 수행법 전반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한다.
1. 불교수행의 4단계(修行四科)
불교수행에는 신(信)ㆍ해(解)ㆍ행(行)ㆍ증(證)의 4가지 단계가 있는데, 이를 불교수행의 4과(四果)라 한다.
(1) 신(信)
부처님께서는『화엄경』에서“믿음은 도(道)의 근원이요, 공덕의 어머니다."라고 말씀하셨다. 믿음은 종교의 생명이요 본질이다. 그런데 불교에서의 믿음은 신을 믿는 종교와는 그 의미가 다르다. 불교에서 믿음이라고 번역되는‘사라다(sraddha)'란 산스크리트어는, 믿음이라는 뜻이기 보다는‘확신에서 오는 신임'이란 뜻이 더 강하다. 불교에서 강조하는 것은‘보라',‘알아라',‘이해하라'는 것이지 맹목적으로 믿으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는 것을 믿고 따르는 것은 어떤 권위에 위압당해서도 아니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의심할 수 없는 진리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믿음은 강요할 수가 없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강요로써 믿게 할 수는 없다. 이해함으로써 가지게 되는 믿음, 다른 말로 하면‘확신'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믿음인 것이다. 진리에 대한 믿음을 바른 믿음(正信)이라고 할 때, 그렇지 않는 믿음은 모두 그릇된 믿음 이 된다. 틀림없다는 확신, 누구나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을 믿는 믿음을 불교에서는 신심(信心)이라고 한다.
(2) 해(解)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스님은“앎만 있고 믿음이 없으면 이는 불신자(不信者)요, 믿음만 있고 앎이 없으면 맹신자."라고 하였다. 불교에서는 불신자도 문제지만 맹신자도 문제이다. 불교를 믿되 바로 알고 믿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믿는 것(信)과 아는 것(解)은 선후의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동시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람은 아는 것만큼 믿고, 믿는 것만큼 알고 있다. 그러므로 불법의 바른 신행을 위해 바로 믿고 바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3) 행(行)
불교를 믿고 바로 이해하였다면 그 진리를 실천해야 한다. 행(行)이 없는 신앙은 참된 신앙인의 자세라고 볼 수 없다. 진리를 실천하는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행동이 뒤따라야 불교의 이상은 실현될 수 있다.
(4) 증(證)
불교 수행의 완성된 단계가 증(證)이다. 불교를 믿고 그 가르침을 바로 이해하고 실천에 옮기면 마침내 증득(證得, 깨달음)이 있다는 것이다. 부처님이 바로 이러한 삶을 성취하신 분이다.
중생의 모든 고통은 진리를 바로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과 거짓을 진실로 아는 잘못된 믿음과 빗나간 생활에 그 원인이 있다. 그러나 바른 믿음과 이해, 적극적인 실천이 있을 때 깨달음으로 완성되어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2. 불교 수행의 요체(要諦)
(1) 3귀의(三歸依)
불교 역시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신앙의 대상이 있으며 그 신앙의 대상이 3보이다. 3귀의란 3보에 귀의하는 것을 말한다.
① 3보(三寶)
㈀ 불보(佛寶): 불보란 부처님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소중한 보배라는 뜻이다. 부처님은 스스로 진리를 꺠달으셨고 또 다른 사람들을 깨닫게 하여 자각(自覺)ㆍ각타(覺他)의 행을 실천하는,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귀중한 존재이기 때문에 보배라고 하는 것이다.
부처님이 꺠달으신 진리는 세월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 따라 다른 것도 아닌 누구에게나 공통되는 행복의 길, 참된 삶의 길이다. 부처님께서 최초로 이 길을 발견하신 것이다. 부처님이 꺠달음을 얻기 전에는 인간은 신의 창조로 이루어졌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신이 인간과 천지 만물을 만들었다고 하면 인간이란 결국 신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공장에서 기계를 만든다거나 완구를 만드는 것은 인간의 필요 즉 쓰임새에 따라 만들었을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인간의 의지보다는 오직 신의 섭리, 신의 눈치만 보고 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자기의 노력과 그 대가로 행복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조물주인 신의 뜻에 의해서만 행복과 불행이 결정된다면 인간의 의사나 노력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이 얼마나 불합리한 일인가? 부처님은 최초로 인간을 신의 종속에서 해방시키신 분이다. 부처님께서 탄생시에“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하신 말씀은 위대한 인간선언이요, 인류의 대평등선언이다. 부처님께서 이런 진리를 최초로 깨달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 중생들을 괴로움에서 건져내어 해탈을 얻게 하시는 사생의 자부요, 인천(人天)의 대도사(大導師)이시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분은 바로 부처님이시다. 그래서 부처님을 보배라고 하여 불보라고 하는 것이다.
㈁ 법보(法寶): 법보란 법이 보배라는 뜻이다. 법(法)을 범어로는 다르마(dharma)라고 한다. 다르마는 원래 사물의 이치ㆍ진상ㆍ진리ㆍ법칙ㆍ도리를 의미하였는데 불교에서 이를 채용한 것으로, 불교에서의 법은 부처님의 가르침 즉 '불교의 교법(敎法)'을 의미한다. 부처님께서는 35세 때 도를 깨달으시고 80세 때 쿠시나가라 성에서 열반하실 때까지 45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으시고 중생제도를 위해 법을 설하셨는데, 부처님의 가르침을 집대성한 것을 경전 또는 불경ㆍ일체경ㆍ대장경ㆍ팔만대장경 등으로 불리고 있다. 법(경전)을 보배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고(苦)에서 벗어나 열반을 증득할 수 있는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경전은 내용상 3장(三藏)ㆍ12부(十二部)ㆍ4법(四法)으로 분류한다.
㉠ 3장(三藏): 경전을 경(經)ㆍ율(律)ㆍ논(論) 3장으로 분류하였는데, 후대에 와서 선(禪)ㆍ밀(密)의 학설이 부가되어 5장으로 이해되기도 하였다.
ⓐ 경(經): 모든 중생들이 마땅히 걸어가야 할 바른 길을 말씀하신 것.
ⓑ 율(律): 세ㆍ출세간 사람들의 생활규범을 설명한 것.
ⓒ 논(論): 경과 율을 해설한 것.
ⓓ 선(禪): 바로 사람의 마음을 밝혀 부처가 되게 한 것.
ⓔ 밀(密): 몸과 입과 뜻의 작용이 그대로 부처의 행인 것을 가르쳐 보인 것.
㉡ 12부(部): 경전을 12부로 나누기도 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수다라(修多羅): 계경(契經)ㆍ법본(法本)이라 번역하는데, 산문체의 경전이다.
ⓑ 기야(祇夜): 중송(重頌)ㆍ응송(應頌)이라 번역하는데, 먼저 설한 산문을 거듭 운문체로 노래한 것이다.
ⓒ 수기(授記): 경중의 말한 뜻을 문답체로 해석하고 제자들의 다음 세상에 있을 일을 예언한 부분이다.
ⓓ 가타(伽陀): 풍송(諷頌)ㆍ고기송(孤起頌)이라 번역하는데, 4언ㆍ7언의 운문체로 구성된 것이다.
ⓔ 우타나(優陀那): 남이 묻지 않는데 스스로 설한 경전이므로 무문자설(無問自說)이라 한다.
ⓕ 니타나(尼陀那): 연기(緣起)ㆍ인연(因緣)이라 번역한 것이다.
ⓖ 아파타나(阿波陀那): 비유로서 은밀한 뜻을 해석한 것이다.
ⓗ 이제왈다가(伊帝曰多伽): 본사(本事)라 번역한다. 부처님이나 제자의 전생 인연을 말한 것이다.
ⓘ 사다카(闍陀伽): 본생(本生)으로 부처님의 전생 보살담을 설한 것이다.
ⓙ 아부타달마(阿浮陀達魔): 미증유법(未曾有法)ㆍ희유법(稀有法)이라 번역하는데, 부처님의 여러 가지 신통력과 불가사의한 힘을 설한 것이다.
ⓚ 우바제사(優波提舍): 논의(論議)라 번역하는데, 교법의 의리를 문답한 것이다.
㉢ 4법(四法): 경전을 교(敎)ㆍ이(理)ㆍ행(行)ㆍ과(果)의 4법으로 나누기도 한다.
ⓐ 교(敎): 경ㆍ율ㆍ논 등의 3장, 성문ㆍ연각의 2승(乘), 성문ㆍ연각ㆍ보살의 3승(乘), 인과ㆍ인연ㆍ일심을 말함.
ⓑ 이(理): 그 속에 들어 있는 진제(眞諦)ㆍ속제(俗諦)의 이치와, 5음(蔭)ㆍ12처(處)ㆍ18계(界)ㆍ4제(諦)ㆍ12인연(因緣) 등의 이치를 말함.
ⓒ 행(行): 5계(戒)ㆍ10선(善)ㆍ6바라밀(波羅密)의 행을 말함.
ⓓ 과(果): 소승불교의 4향(向)ㆍ4과(果)와, 대승불교의 등각(等覺)ㆍ묘각(妙覺)ㆍ불과(佛果)를 말함.
㈂ 승보(乘寶): 승보는 승이 보배라는 것이다. 승을 범어로는 상가(sangha)라고 하는데, 음역해서 승가라고도 하고 간략하게 승이라고도 하며, 화할 화(和)ㆍ무리 중(衆) 자를 써서 화합중(和合衆) 또는 화합승려라고 하기도 하고, 여러 불자들이 화합하는 것이 마치 여러 강물이 모여서 바다를 이루지만 바닷물의 맛은 한가지인 것에 비유해서 바다 해(海), 무리 중(衆) 자를 써서 해중(海衆)이라고도 한다. 다시 말하면 승이란 화기애애하게 모여 사는 부처님의 제자들을 말한다. 그러니까 부처님의 제자란 단순히 스님들만이 아니고 사부대중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부대중이란 비구ㆍ비구니ㆍ우바새ㆍ우바이를 가리킨다. 이 중 비구ㆍ비구니는 출가한 남ㆍ여 스님이며, 우바새ㆍ우바이는 재가 남ㆍ여 신도이다. 이처럼 승가는 출가 승려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출가 2부중과 재가 2부중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승가 곧 스님들과 신도들이 왜 소중한 보배가 되는가 하면 승가가 있음으로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홍포하고 후세에까지 불법을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승가가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 어떻게 부처님을 알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부처님의 제자들을 승보라고 하여 부처님과 똑같이 존경할 뿐 아니라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재가 신도라도 부처님의 정법을 바르게 깨닫고 이를 널리 전하는데 노력하는 사람은 삼보의 하나인 승보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자들은 스님들을 존경해야 함은 물론이지만 신도님 가운데도 남의 모범이 되는 불자는 다같이 존경하고 받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불ㆍ법ㆍ승, 이 3가지 보배는 어느 하나를 따로 떼어 생각할 것이 아니라 부처님(佛)과 부처님의 가르침(法)과 부처님의 제자(僧)가 한 덩어리로 똑같이 공경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더불어 이 세 가지 보물을 밖으로만 찾을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 가운데서 찾아내야 한다.
우리의 청정한 근본자성은 바로 불보이다. 왜냐하면 이 불성은 부처와 중생이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6조 혜능은“깨달으면 부처요, 미(迷)하면 중생이다."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자성 가운데의 불보를 공경하는 마음을 갖고 이 소중한 보배를 찾도록 노력해야 한다. 또 우리의 성품이 법보이다. 왜냐하면 이 성품이 온갖 것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도 6조 혜능스님이 말씀하시기를“선지식아 일체 수다라와 모든 문자로 된 12부 경전이 모두 사람으로 말미암아 있는 것이며, 지혜의 성품으로 말미암아 세워진 것이니 만일 세상에 사람이 없다면 일체 만법이 본래 제 스스로 있을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또한 우리의 4대 육신 가운데서 승보를 찾아야 한다.
우리는 더러는 육신을 천시하지만 이 육신을 떠나서는 부처도 법도 간직할 곳이 없다. 부처님의 법을 전하기 위해서도 이 육신이 있어야 하므로 승보요, 갖가지 인연이 모여서 마음의 명령에 따라 잘 움직이는 이 육신이야말로 참으로 화합이 잘 이루어진 승보인 것이다.
② 3귀의(三歸依)
3보에 대한 귀의(3歸依)는 부처님 당시부터 있었는데, 율장대품에 의하면 그 형식은 다음과 같다.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가르침을 따르는 승가에 귀의합니다. 거듭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거듭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거듭 가르침에 따르는 승가에 귀의합니다. 다시 한번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다시 한번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다시 한번 가르침을 따르는 승가에 귀의합니다.”
왜 3번을 반복하여 귀의토록 하였는가? 그것은 3보에의 귀의야말로 불교 신앙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3귀의를 '귀명3보(歸命三寶)'라고도 하는데, 이 말은 목숨을 다하여 삼보에 귀의한다는 뜻으로, 3보에 자기의 전 인생과 심지어는 하나밖에 없는 생명까지도 바치겠다는 마음가짐을 말한다.
(2) 4홍서원(四弘誓願)
불교도들은 옛부터 4가지 큰 서원을 세웠는데, 이를 4홍서원(四弘誓願)이라고 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중생을 다 건지겠습니다(衆生無邊誓願度)
여기서 중생(衆生)이란 생명있는 모든 존재를 가리키는 것으로, 불교의 구제 대상은 인간만이 아니고 일체중생이다. 그래서 불교를 자비의 종교라 하는 것이다. 생명있는 모든 것들은 다 고통 속에 헤메이고 있으므로, 이들을 다 내가 구제하겠다는 것이 첫 번째의 서원인 중생무변서원도이다.
둘째, 번뇌를 다 끊겠습니다(煩惱無變誓願斷)
중생이 부처가 되지 못한 것은 번뇌(미혹) 떄문이다. 이 번뇌만 여의면 바로 부처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번뇌를 다 끊겠다는 것이 두 번쨰의 서원인 번뇌무진서원단이다.
셋째, 법문을 다 배우겠습니다(法門無量誓願學)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의 근기(수준)에 따라서 법을 설하셨으므로(對機說法), 법문이 한량없이 많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집대성한 것을 경전 또는 8만대장경이라 고 하는데, 그 많은 가르침을 다 배우겠다는 것이 세 번쨰의 서원인 법문무량서원학이다.
넷째, 불도를 다 이루겠습니다(佛道無上誓願成)
이 세상에는 많은 성현의 가르침이 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보다 더 심오하고 높은 진리는 없다. 그것을 이루는 것이 불도[깨달음]이다. 그 불도를 반드시 이루겠다는 것이 마지막의 서원인 불도무상서원성이다.
4홍서원 중 첫 번째의 중생무변서원도는 아래로 중생을 다 구제하겠다는 것이니[下化衆生] 이것은 남이 이로운 것이고[利他行], 두번쨰의 번뇌무진서원단, 세번째의 법문무량서원학은 위로 꺠달음을 이루겠다는 것이니[上求菩提] 스스로가 이로운 것이다[自利行].
여기서 나와 남의 비중을 어디에 더 많이 두느냐 하면, 나보다는 남을 먼저 위하는 것이 대승불교(大乘佛敎)의 근본이념이다. 이렇게 자리행(自利行)과 이타행(利他行)을 닦아 나가면 마침내 불도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 4홍서원의 내용이다. 불교의 궁극적 이상은 개인의 완성과 불국토 건설에 있다. 이러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 맹세가 바로 4홍서원인 것이다.
모든 불ㆍ보살은 공통적으로 이 같은 총원(總願)과 아울러 개별적인 별원(別願)을 갖는다. 별원은 자신만이 갖는 특별한 원이라는 뜻인데, 이것 역시 이웃을 위한 헌신과 구제의 내용을 담고 있다.
별원으로 유명한 것이 아미타불의 48원, 약사여래의 12원, 보현보살의 10원 등이 대표적이다. 아미타불의 48가지 원은, 일체중생을 극락으로 인도하겠으며, 극락에 온 중생을 모두 성불시키겠다는 광대한 원이다. 또 약사여래의 12가지 원도 일체중생의 재앙과 질병을 모두 없애주겠다는 것이다. 보현보살의 10가지 원도 모든 중생을 불법에 귀의시켜 구제하겠다는 내용이다.
총원과 별원은 모두 이웃을 위해 헌신과 봉사를 하며, 남을 즐겁게 하고, 고통에서 구제하겠다는 것이지 자신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겠다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 같은 서원은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졌느냐 아니냐를 따지기 전에, 남을 위해 자신을 내던지겠다는 마음가짐에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 바꾸어 말하면 불교도가 매일같이 이 같은 서원을 반복함으로써, 그와 같은 인격을 완성해 나가는 데 의미가 있다.
(3) 3학(三學)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알아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닦아야 할 세 가지 가르침이다. 3학은 대장경의 수많은 가르침을 계․정․혜로 분류하여 공부하는 이들에게 깨달음에 이르는 지름길을 제시해 준 불교 수행의 요체이다.
①계학(戒學): 계(戒)는 한자로는‘경계한다'는 말인데, 계학은 바른 행위ㆍ바른 습관ㆍ바른 성격 등을 배운다고 하는 뜻이 있다.
좋은 습관은 익히는 것을 선계(善戒)라 하고 나쁜 습관을 익히는 것을 악계(惡戒)라고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계라고 하면 깨끗하고 선한 습관, 곧 선계만을 가리킨다.
계는 불자들이 지켜야 할 올바른 생활규범이다. 계(戒)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그릇된 곳에서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므로 형식적인 계목이 문제가 아니라 올바른 습관을 갖도록 노력하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다.
부처님께서는 열반하실 때, 아난존자가 부처님께“부처님께서 열반하신 후에는 누구를 스승으로 삼아서 공부하오리까?”하고 묻자“계를 스승삼아 공부하라."고 하셨다. 남에게 해로움을 주면서 행복을 바라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다. 그러므로 불교인은 누구나 계를 생명처럼 소중하게 해야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계를 지키는데 있어서 형식보다는 내용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6조 스님은“마음에 그릇됨이 없는 것이 참다운 계(心地無非自性戒)"라고 하셨다.
부처님께서 계를 정하신 이유를“첫째는 교단의 질서를 잡기 위해서요, 둘째는 대중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요, 셋째는 대중을 안락하게 하기 위해서요, 넷째는 믿음이 없는 이를 믿게 하기 위해서요, 다섯째는 이미 믿은 이를 더 굳세게 하기 위해서요, 여섯째는 다루기 어려운 이를 잘 다루기 위해서요, 일곱째는 부끄러운 줄 알고 뉘우치는 이를 안락하게 하기 위해서요, 여덟째는 현재의 실수를 없애기 위해서요, 아홉째는 미래의 실수를 위해서요, 열째는 바른 법을 오래가게 하기 위함이다(四分律).”라고 하셨다.
계에는 5계ㆍ8관재계(八觀齋械)ㆍ10중대계(十重大戒)ㆍ사미10계(沙彌十戒)ㆍ48경계(四十八輕)ㆍ비구 250계ㆍ비구니 348계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여기서는 근본 5계에 대해서만 설명하기로 한다.
㈀ 산 목숨을 죽이지 말라(不殺生戒):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는 다 죽기를 싫어하고 살기를 바란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도 눈물을 흘리며 끌려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친다고 한다. 사람이나 미물이나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은 겉모습은 스스로가 지은 업에 의해서 다른 모양을 하고 있을 뿐 그 본성은 모두 불성을 지닌 존귀한 존재들이다. 부자나 권세를 가진 사람이나 거지나 무식한 사람이나, 사람의 생명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며 가치의 차이가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사람이나 미물이나 그 불성에서 볼 때 절대 자유이며 평등한 것이다.
이러한 생명을 자신이 직접 침해하거나, 타인에 의해 침해당하게 하거나 하는 행위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불살생계(不殺生戒)는 생명가치를 경시하고, 인권을 억압하는 모든 구조에 대한 거부를 뜻한다. 폭력과 전쟁은 물론 고문과 같은 행위, 산목숨을 죽이거나 억압하는 모든 비인간적 만행은 영원히 없어져야 한다. 이러한 다짐이 바로 불상생계의 의미이다.
㈁ 도둑질을 하지 말라(不偸盜戒): 이것은 경제생활에 대한 덕목으로, 다른 사람의 물건은 그가 노동의 대가로 얻은 것이므로 그것을 훔친다는 것은 남의 노동의 대가를 훔친다는 뜻이 된다. 따라서 이 불투도계는 자기가 정당하게 행한 노동의 대가만 가지라는 뜻이다.
그 외에 부당이득을 취하는 것은 모두 불투도계를 범하는 것이 된다. 불투도계의 입장에서 보면, 생산하지 않고 여기저기서 이득을 보려고 기웃거리거나, 무위도식하는 행위는 죄가 된다. 또 공직자가 뇌물을 받는다든가, 공갈 협박을 하여 남의 재물을 갈취하는 것, 사기나 도박 같은 것도 다 정당한 경제적 이득이 아니므로 불투도(不偸盜)정신에 어긋나는 것이다. 열심히 일하고 그 대가로 받는 이득이 아닌 것은 모두가 도둑질이나 다름없다.
㈂ 삿된 음행을 하지 말라(不邪淫戒): 이것은 이성(異性) 문제에 대한 윤리적ㆍ도덕적 규범으로 요컨대 부부 이외에는 관계를 갖지 말라는 것이다. 출가자에게는 배우자가 없으므로 일체의 음란행위를 하면 안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불사음계(不邪淫戒)의 정신은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성적(性的)인 상품으로 전락해서는 안되며, 도구화시켜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타인을 똑같은 인격으로 대하지 않고 성적 도구로 생각하는 것은 인간성에 대한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성(性) 관계에 있어서 지금까지 인류는 남성이 힘을 이용해 여성을 종속화시켜 왔다. 인간의 품위를 손상하는 매음행위의 제물이 된 것도 여성이었다. 이렇게 불평등한 관계를 청산하고 평등한 인간관계가 이루어져야 하며, 아울러 어떤 경우에도 인간의 도구화는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 계목(戒目)의 뜻이다.
㈃ 거짓말을 하지 말라(不妄語戒): 이것은 인간의 진실에 관한 불교의 교훈이다. 거짓말은 남을 속이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을 속이는 행위다. 자기 자신에 대해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남을 속일 수 없다. 남을 속이고 진실을 왜곡하면 자기 자신의 지혜의 눈이 흐려진다.
거짓말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이간질을 한다든가 허황된 말을 하는 것, 사실을 침소붕대하거나 아첨하는 것, 듣기 좋은 말만 골라하는 것, 진실을 은폐하거나 왜곡하는 것, 화내는 것 등이 다 여기에 해당한다. 진실과 신뢰는 인간상호관계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다. 그것을 스스로 허물어뜨리는 행위가 거짓말이다. 거짓말은 불신(不信)의 장벽을 높이 쌓게 한다. 말에 대한 책임과 약속을 지키라는 것, 이것이 불망어계(不妄語戒)의 가르침이다.
㈄ 술을 마시지 말라(不飮酒戒): 술을 마시면 맑은 정신을 잃고 정확한 판단력이 흐려져 삿된 생각을 하게 되므로 생긴 것이다.
이 계목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이성을 흐리게 하는 행위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술뿐만 아니라 아편이나 마리화나 같은 것은 인간의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어 올바른 판단을 흐리게 한다. 육신을 병들게 할 뿐만 아니라 정신마저 병들게 한다. 건전한 정신을 병들게 하는 것은 이 밖에도 많다. 관능을 자극하는 음란비디오․저질음악․예술을 빙자한 갖가지 상업적 저질문화가 그것이다. 이런 것에 한 번 중독되면 좀처럼 벗어날 수가 없다. 정신이 좀먹고 건전한 활동의욕이 감퇴되어 마침내 패가망신에 이르게 한다. 불음주계는 요약하면, 언제나 맑고 건전한 정신자세를 잃지 않도록 하라는 가르침이다.
이러한 5계의 가르침은 종교 신자나 성직자 등 특정인만이 지켜야 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공동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지켜해야 할 보편적인 실천덕목이라 할 수 있다.
② 정학(定學): 정은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함으로써 산란하지 않게 하는 것은 말한다. 범어로는‘삼마디(samadhi)'라고 하는데, 음역하여 삼매라고 한다. 8정도의 하나인 정정(正定)과 같은 것으로, 선정이란 말과도 같은 뜻으로 쓰인다. 정은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여 흐트러지지 않게 하는 일종의 정신집중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음의 고요함을 유지함으로써 자기의 본 마음을 찾으려는 것이 참선이다. 참선은 선정을 위해서 가장 좋은 수행방법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꼭 참선만 해야 정학을 닦는 것은 아니다. 염불을 열심히 하여 염불 삼매에 들어서 정을 닦을 수도 있다. 방법은 여러 가지 있으나 목표는 하나이다. 산란한 마음을 한 곳에 모음으로써, 마음을 번뇌로부터 해방시켜 본래부터 간직하고 있는 불성을 찾아내려는 수행이 바로 정학이다.
③ 혜학(慧學): 우리는 누구나 부처님과 똑같은 지혜를 가지고 있지만 어리석은 범부노릇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왜 부처님과 똑같은 지혜가 있는데도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가? 그 이유는 지혜가 있되 그 지혜를 활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그 까닭을 우리가 망상, 뒤바뀐 생각, 집착을 가지고 살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이 망상, 뒤바뀐 생각, 집착을 버리기만 하면 바로 부처님과 다름없이 한량없는 지혜가 드러나는 것이다. 계를 지키고 정을 닦는 것도 다름 아닌 부처님과 똑같은 지혜를 개발하여 유익하게 활용하자는 것이다. 지혜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분수를 알고 사물의 이치를 바로 보고 집착하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지혜에는 다음의 네 가지가 있다.
㈀ 성소작지(成所作智): 10지(十地, 보살이 수행하는 계위인 52위 중 제41위로부터 제50위 까지) 이전의 보살, 2승(二乘, 성문승ㆍ연각승 또는 소승ㆍ대승 등), 범부 등을 이락(利樂)케 하기 위하여, 시방(十方)에서 3업으로 여러 가지 변화하는 일을 보여 각기 이락을 얻게 하는 지혜이다.
㈁ 묘관찰지(妙觀察智): 모든 법을 관찰하여 정통하고 중생의 근기를 알아서 불가사의한 힘을 나타내며, 알맞게 법을 설하여 여러 가지 의심을 끊게 하는 지혜.
㈂ 대원경지(大圓鏡智): 거울에 한 점의 티끌도 없이 삼라만상이 그대로 비추어 모자람이 없는 것과 같이 원만하고 분명한 지혜를 말한다.
㈃ 무분별지(無分別智): 올바르게 진여를 체득하는 지혜이다. 진여의 모양은 우리들의 언어나 문자로는 어떻게 형용할 수도 분별할 수도 없으므로, 분별심을 가지고는 그 체성에 계합할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생각과 분별을 여읜 모양없는 참 지혜로만 비로소 알 수 있다. 이런 지혜를 무분별지라 한다.
서산대사 휴정은 3학에 대해서“계는 마치 도둑을 붙잡는 일과 같고, 정이란 도둑을 얽어 묶는 것과 같고, 혜란 도둑을 죽여 버리는 것과 같다."라고 말씀하셨다. 도둑이란 우리의 번뇌망상이다. 그러므로 계로써 번뇌망상을 붙잡아 정으로 번뇌를 얽어 묶어 굴복하고 혜로서 번뇌를 없애버리는 것이다. 계ㆍ정ㆍ혜는 각각의 수행이기보다는 계(戒)를 닦음으로써 정(定)이 생기고, 정(定)을 닦음으로써 혜(慧)가 생기고, 혜(慧)를 닦음으로써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3. 소승불교의 수행법(37道品)
근본불교 시대의 출가자들이 행하였던 전문적인 수행법으로, 4념처ㆍ4정근ㆍ4신족ㆍ5근ㆍ5력ㆍ7각지ㆍ8정도의 37도품이 있다. 37도품을 37보리분법(菩提分法)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모두 불교의 목적인 보리를 얻게 도와주는 법이란 뜻에서 일컬어지는 말이다.
(1) 4념처(四念處)
4념주(四念住)ㆍ4의정(四意正)이라고도 하는데, 신(身)ㆍ수(受)ㆍ심(心)ㆍ법(法)에 대하여 전도된 집견(執見)을 타파하는 것을 말한다. 즉 우리 범부는 신(身)ㆍ수(受)ㆍ심(心)ㆍ법(法)에 대한 4가지 전도된 견해(四顚倒見)를 가지고 있으므로, 진리의 실상을 증득하지 못하니 이를 타파하여 이 4법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갖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 곧 4념처인 것이다.
① 신념처(身念處): 관신부정(觀身不淨)이니, 우리의 육신이 깨끗하다(淨)고 집착하는 것을 떠나 이 몸은‘부정(不淨)하다고 관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우리의 몸을 상당히 깨끗한 것처럼, 다듬고 살아가고 있지만 사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어느 구석 어느 구멍 하나 깨끗한 것이 없는 것이다. 가죽ㆍ살ㆍ피ㆍ고름ㆍ뼈 등의 물질이 합해져 이루어진 부정물(不淨物)이, 이 몸이다.
② 수념처(受念處): 관수시고(觀受是苦)니, 우리의 마음에 낙(樂)이라고 느끼는 음행(淫行)ㆍ자녀ㆍ재물 등을 보고 참다운 낙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괴로움을 수반하는 것이니, 참다운 락이 아니고 이는 모두‘고통이다'라고 관하는 것이다. 남녀간의 애정이 아무리 좋다한들 이별의 슬픔은 어찌 할 것이며, 부귀영화가 아무리 좋다한들 그 언제까지나 기리 누릴 것인가? 따지고 보면 이런 것은 참다운 락일 수가 없는 것이다.
③ 심념처(心念處): 관심무상(觀心無常)이니 우리의 마음은 항상 그대로 있는 것(常)이 아니고, 늘 생기고 멸하고 하는‘무상한 것'이라고 관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항상하는 줄로 생각하기 쉽지만 자세히 관찰해 보면 이 몸을 움직이고 있는 마음조차 항상 찰나찰나 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찰라에 구백생멸(九百生滅)이 있다고 까지 말하고 있다.
④ 법념처(法念處): 관법무아(觀法無我)이니, 위의 3가지를 제외한 만유(萬有)에 대해서도 실로 실체가 없는‘무아(無我)'라고 관하는 것이다. 실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인연의 화합으로 이룩된 것이어서 본래 어떤 고정된 불변의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어떤 고정불변의 실체가 있다면 그것은 결코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나 아무리 눈을 돌려봐도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일순간도 쉬지 않고 변하고 있다. 그러므로 일체의 제법(諸法)은 무아라고 관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이 4념처인데, 4념처관을 위와 같이 신(身)ㆍ수(受)ㆍ심(心)ㆍ법(法)의 하나하나에 대해 각기 부정(不淨)ㆍ고(苦)ㆍ무상(無常)ㆍ무아(無我)라고 순서에 때라 관하는 것을 별상념처관(別相念處觀), 이것을 전부 합쳐 한꺼번에 관하는 것을 총상념처관(總相念處觀)이라고 한다.
(2) 4정근(四正勤)
4정단(四正斷)ㆍ4의단(四意斷)ㆍ4정승(四正勝)이라고도 하는데, 악을 막아 선을 증장시키기 위한 4가지의 정진을 말하는 것이다.
① 율의정근(律儀正勤 또는 律儀斷): 생기지 않은 악은 미리 방지하려고 부지런히 정진함
② 단정근(斷正勤 또는 斷斷): 이미 생긴 악은 없애려고 부지런히 정진함.
③ 수호정근(隨護正勤 또는 隨護斷): 아직 생기지 않은 선은 생기도록 부지런히 정진함
④ 수정근(修正勤 또는 修斷): 이미 생긴 선은 잘 길러내어 더욱 증장하도록 부지런히 정진함
(3) 4신족(四神足)
4여의족(四如意足)이라고도 하는데, 신족이니 여의족이니 하는 말은 뜻대로 만족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럼 무엇이 뜻대로 만족하게 된다는 것인가?
① 욕신족(欲神足 또는 欲如意足): 위의 4념처ㆍ4정근을 닦은 힘에 의하여 구도의 욕구가 강열하여져 공부하고 싶은 대로 됨
② 정진신족(精進神足 또는 精進如意足): 정진하여 나아가는 힘이 저절로 강성해져 물러감이 없이 계속 나아감.
③ 염신족(念神足 또는 念如意足): 바른 생각이 한결같이 계속되어 나아감
④ 사유신족(思惟神足 또는 思惟如意足): 사유는 곧 선정(禪定)을 말함이니 선정이 마음대로 잘 진행되어 감.
이상이 4신족인 바, 이는 4정근에 의해 닦은 힘으로 억지로 하지 않아도 스스로 공부가 잘 되어 나아가는 과정을 말한 것이라 하겠다.
(4) 5근(五根)
4정근ㆍ4신족을 닦았으므로 더욱 정진하여 얻어지는 것으로, 번뇌를 항복 받고 성도(聖道)를 이끌어 내는데 필요한 것이다.
① 신근(信根): 성스러운 도법(道法)에 대한 신념이 굳어진 것.
② 정진근(精進根): 선법(善法)을 길러나가고 악법(惡法)을 퇴치하는 데 용맹스러워 물러나지 않는 것.
③ 염근(念根): 모든 세속적인 탐욕과 근심 걱정을 여의고 항상 바른 마음을 갖는 것.
④ 정근(定根): 심신이 안정되어 탐욕과 불선법을 여의는 것은 물론 감각적인 희수(喜受)․락수(樂受)마저 여의어, 제4선(第四禪)의 경지에 머무르는 것.
⑤ 혜근(慧根): 4제(四諦)의 이치를 여실히 알아서 바른 견해를 갖는 것
이상은 모두 나무가 땅속에 깊이 뿌리를 박아서 풍우에 흔들리지 않듯이 불법 가운데에 도의 뿌리(根)를 깊이 박아서 세속적인 모든 탐욕과 불선법(不善法)에 흔들리지 않은 자리에 오게 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5) 5력(五力)
5력이라 함은 신력(信力)ㆍ정진력(精進力)ㆍ염력(念力)ㆍ정력(定 力)ㆍ혜력(慧力)을 말하는 것인데, 이는 곧 위의 5근이 이미 불법에 깊이 뿌리를 박았으므로 계속 정진하여 모든 세속적 불선법(不善法)에 동요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불선법을 꺾어 엎어버릴 힘을 얻었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우리가 이제 이런 모든 악법을 꺾어 없앨 힘을 얻었다면 다음은 불교의 궁극목적인 보리를 얻기 위하여 치닫는 수밖에 없다. 그럼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 이에는 7각지(七覺支)가 있다.
(6) 7각지(七覺支)
7각분(七覺分)ㆍ7각의(七覺意)ㆍ7보리분(七菩提分)이라고도 하는
데, 보리의 도를 잘 도와 가는 부분이란 뜻이다. 그렇다고 하여 물론 앞의 것들이 보리의 도를 이루는데 도움이 안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다만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이 7각지는 그 중에서도 가장 보리의 지위에 접근하여 보리를 이루도록 하는데 수승하기 떄문이다.
ⓛ 택법각지(擇法覺支): 지혜의 힘으로 모든 법의 선악ㆍ정사(正邪)를 잘 가려내어 선과 정은 취하고 악과 사는 버리는 것을 말한다.
② 정진각지(精進覺支): 고행같은 쓸데없는 것을 버리고 수행의 바른 길을 따라 일심으로 정진하여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③ 희각지(喜覺支): 일심으로 끊임없이 정진하므로 그 결과 참된 도의 기쁨을 얻는 것을 말한다.
④ 제각지(除覺支): 참된 도의 기쁨을 얻는 데 그치지 않고 모든 그릇된 소견이나 번뇌를 끊어버리고(除), 능히 참되고 거짓됨을 알아서 바른 선법을 계속 길러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⑤ 사각지(捨覺支): 마음이 모든 경계에 평등하여 즐겁고 기쁜 모든 감수작용(感受作用)이 없고 지내는 일을 추억하는 일이 없는 것을 말한다.
⑥ 정각지(定覺支): 고요히 정에 들어 있어서 번뇌 망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말한다.
⑦ 염각지(念覺支): 정(定)과 혜(慧)가 평등하여 일심이 늘 명료한 경지를 말한다.
이상의 것 중에서 만일 마음이 혼침하면 택법각지(擇法覺支)ㆍ 정진각지(精進覺支)ㆍ희각지(喜覺支)로써 마음을 일깨우고, 만일 마음이 들뜨면 제각지(除覺支)ㆍ사각지(捨覺支)ㆍ정각지(定覺支)로써 그 들뜬 마음을 가라앉힌다고 한다.
(7) 8정도(八正道)
8정도란 정견(正見)ㆍ정사유(正思惟)ㆍ정어(正語)ㆍ정업(正業)ㆍ정명(正命)ㆍ정정진(正精進)ㆍ정념(正念)ㆍ정정(正定)으로, 이는 보리를 성취하는데 가장 긴요한 것이다. 앞의 4념처ㆍ4정근ㆍ4신족ㆍ5근ㆍ5력ㆍ7각지는 이 8정도에 들어오는 예비과정인 동시에 또한 이 8정도는 이들을 통틀어 집약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7과(七科)중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것은 역시 이 8정도이다.
4. 대승불교의 수행법
대승불교 시대에는 출가자는 물론 재가불자에게 까지도 널리 권장되었던 수행덕목으로, 6바라밀ㆍ4무량심ㆍ4섭법ㆍ6화경행 등이 있다.
(1) 6바라밀(六波羅密)
바라밀(波羅密)이란, 범어 파라미타(Paramita)를 발음대로 옮긴 말로 번역하면도피안(到彼岸), 즉 저 언덕에 이른다는 뜻을 가진 말이다. 우리가 사는 현실세계가 생사윤회를 거듭하는 이쪽 언덕(此岸)이라고 할 때, 그 같은 고통이 소멸된 이상세계를 저 언덕(彼岸)으로 표현하고 거기에 도달한 상태를 바라밀이라고 한다. 이 같은 생각은 현실에 대한 도피나 염세주의가 아니라, 적극적인 개조 또는 창조의지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저 언덕 즉 이상세계는 사후(死後)의 세계가 아니라 현재의 세계에서 이루어야 할 목표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불교가 목적하는 이상세계를 이룰 수 있는가? 그 방법으로 제시된 것이 다음의 6바라밀이다.
① 보시바라밀(布施波羅密): 자기가 소유한 모든 것을 남에게 아낌없이 베푸는 행위이다. 이러한 자선행위는 원시경전에서도 커다란 공덕으로 설명되고 있다. 대승불교에 이르면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가 특히 강조된다. 무주상보시란 선행을 하고도 그것을 자랑하는 마음을 내지 않는 것을 말한다.
보시에는 재시(財施)ㆍ법시(法施)ㆍ무외시(無畏施)의 3가지 종류가 있다. 재시는 금전이나 재물과 같은 경제적 시여(施與)로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법시는 진리를 가르쳐 줌으로써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것이다. 무외시는 공포나 불안에 떨고 있는 사람에게 안심을 시켜주는 것이다. 이밖에도 장기이식이나 안구기증, 헌혈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러한 보시행위는 주는 자(施者), 받는 자(受者), 주는 물건(施物)이 모두 깨끗해야 한다.
② 지계바라밀(持戒波羅密): 선행의 실천을 위해 계율을 잘 지키는 것이다. 계율에는 섭율의계(攝律儀戒)ㆍ섭선법계(攝善法戒)ㆍ섭중생계(攝衆生戒) 3종류가 있다. 보통 5계ㆍ10계 등은 방비지악(防非止惡)을 위한 섭율의계(攝律儀戒)로 지악계(止惡戒)라고도 한다. 이것보다는 적극적인 선행(善行)의 실천을 강조하는 10선계(善戒)가 있다. 살생 대신 방생을 하며, 도둑질 대신 보시를 하는 등 10업을 선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섭선법계(攝善法戒) 또는 행선계(行善戒)라고 한다. 나아가 모든 행위를 중생의 이로움을 위해 행하는 사섭법(四攝法, 보시ㆍ애어ㆍ이행ㆍ동사)과 같은 행위는 섭중생계(攝衆生戒) 또는 이타계(利他戒)라고 부른다.
③ 인욕바라밀(忍辱波羅密): 온갖 모욕과 어려움을 참는 것을 말한다. 물직적인 내핍, 정신적인 욕망 제어가 인욕이다. 남이 나를 해롭게 해도 보복하지 않고 상대를 오히려 불쌍히 여기는 것도 물론 인욕이다.
인욕에는 4가지가 있다. 첫째는 복인(伏忍)으로 비위에 거슬리는 일이 생기면 화나는 마음을 참는 것이다. 둘째는 유순인(柔順忍)으로 어떤 경우를 당하더라도 유순함을 잃지 않는 것이다. 셋째는 무생인(無生忍)으로 보살의 직위에 오른 사람은 성낼 일도, 참을 일도 없게 된다는 것이다. 넷째는 적멸인(寂滅忍)으로 생사고해를 뛰어 넘어 본래부터 고요한 상태를 말한다. 인욕에 관한 유명한 얘기로는『법화경』에 나오는 상불경보살(常不輕菩薩)로, 그는 누가 자기를 욕하거나 꾸짖어도 "나는 당신을 존경합니다. 당신은 미래의 부처님이 되실 분이기 때문입니다."하고 예배하였다고 한다. 인욕은 자기에 집착하지 않고 평화스러운 기분으로 상대에 애정을 가질 때 비로소 얻어 지는 것이다. 남과 융화하기 위해서는 인욕의 태도가 필수적이다.
④ 정진바라밀(精進波羅密): 순일하고 물들지 않은 마음으로 바르게 생각하고 항상 부지런하여 물러섬이 없는 것을 말한다. 즉 안으로 자기완성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밖으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헌신하기를 멈추지 않는 행위다. 바른 정진은 몸으로 착한 일을 하고 입으로 부드러운 말을 하며, 생각은 늘 진리의 세계에 머물도록 해야 한다. 팔정도의 정정진(正精進)도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 정진으로 무장된 사람은 어떠한 역경(逆境)에 부딪쳐도 물러서지 않으며 용기를 잃지 않는다. 어떤 곳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앞으로 나간다면 못 이룰 것이 없을 것이다.
⑤ 선정바라밀(禪定波羅密): 선정은 산란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고요히 사색하는 것을 말한다. 흔히 명상이라든가 마음을 닦는다고 하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평정을 얻어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어지러우면 침착하지 못하고, 침착을 잃으면 판단을 그르치게 된다. 선정을 닦기 위해서는 삿된 생각․허영심․분별심을 버려야 한다. 이러한 선정은 걸어 다니거나(行), 멈춰 있을 때나(住), 앉거나(坐), 누워 있거나(臥), 또는 말하거나(語), 침묵할 때(黙), 고요히 있을 때(靜)에 상관없이 언제나 실행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⑥ 반야바라밀(般若波羅密): 모든 사물의 이치를 환히 꿰뚫어 보는 지혜를 말한다. 이것은 사량분별을 통해 얻는 통속적인 지혜가 아니라, 선정에 의해 얻어지는 직관지(直觀智)이므로 지혜라 번역하지 않고 원어 그대로 반야라 이름하는 것이다. 이러한 지혜는 듣고 배우고 생각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본래 갖추어져 있는 것을 그대로 내보이는 것이다.
이 같은 6바라밀은 대승불교의 수행덕목으로 팔정도와 깊은 관계가 있다. 지계는 8정도의 정어(正語)ㆍ정업(正業)ㆍ정명(定命)을 포함하고 있으며, 정진은 정정진(正精進), 선정(禪正)은 정념(正念)ㆍ정정(正定)과 관계가 있다. 그리고 지혜는 정견(定見)ㆍ정사(正思)와 관계가 있다. 보시와 인욕은 8정도의 어느 항목과도 관계가 없는 6바라밀 특유의 것이다. 이것은 대승불교가 자기수행과 해탈보다는 이웃에 대한 헌신과 봉사에 더 큰 주안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한편『화엄경』에서는 이상의 6바라밀 외에 방편(方便)ㆍ원(願)ㆍ역(力)ㆍ지(智)의 4바라밀을 더 보태어 10바라밀 수행을 제시하고 있다. 방편바라밀은 중생구제를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며, 원바라밀은 보살행의 근본이 되는 중생구제의 서원(誓願)을 세워야 하며, 역바라밀은 어떤 망상이나 번뇌에도 굴복하지 않는 굳센 힘을 갖출 것이며, 지바라밀은 사물의 시비(是非)와 정사(正邪)를 판별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 등이다. 이 같은 바라밀들은 모든 중생구제에 대부분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 특색이다.
(2) 4무량심(四無量心)
6바라밀을 성취한 대승보살이 한없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갖추어야 할 한없이 넓고 깊은 마음가짐이 4무량심(四無量心)이다. 4무량심은 원시경전에도 나오지만, 대승불교의 보살이 가져야 할 마음으로 더욱 강조된다.
① 자무량심(慈無量心): 자(慈)란 일체중생에게 기쁨을 주려는 마음이다. 기쁨을 준다는 것은 세속적인 부귀나 안락, 명예나 쾌락으로 기쁨을 준다는 뜻이 아니라, 올바른 견해와 판단으로 참사랑의 길로 인도함으로써 중생이 항구적으로 마음의 평화를 얻게 하는 것이다. 이웃들에게 항상 기쁨을 주기 위해서는 밝은 미소, 아름다운 말씨도 소중하다.
② 비무량심(悲無量心): 중생의 고통이나 슬픔을 자기의 아픔으로 생각하여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미움과 분노의 불길에 휩싸인 중생이라면 그것을 없애줌으로써 고통을 덜어줄 수 있다. 또 경제적 어려움이나 정치적 억압구조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면, 마땅히 그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구제할 수 있을 것이다. 질병에 시달린다든가 그 외의 많은 이유에 의해 고통에 빠져 있다면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기꺼이 건져 내려는 마음이 비무량심이다. 자(慈)와 비(悲)는 합쳐서 불교의 대명사처럼 쓰이는 자비(慈悲)라는 합성어가 되었다. 자비는 이웃에 대한 동정이란 의미로 쓰이고 있으나 본뜻은 이웃에게 기쁨을 주고(慈), 이웃을 불쌍히 여겨 고통으로부터 구제하겠다는 마음(悲)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를 발고여락(拔苦與樂, 고통의 뿌리를 뽑아버리고 즐거움을 줌)이라 한다.
③ 희무량심(喜無量心): 중생의 기쁨을 함께 기뻐하는 마음이다. 보살의 마음은 대자(大慈)와 대비(大悲)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중생과 자신이 곧 하나다. 중생이 아프면 함께 아프고, 중생이 즐거우면 자신도 즐겁다. 비유하면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은 자식에게 기쁜 일이 생기면 함께 즐겁고,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함께 괴로워하는 것과 같다. 부모가 자식에 대해 이 같은 마음을 갖는 것은 자식과 자신이 일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왜 중생과 나는 한 몸인가? 연기(緣起)의 법칙으로 볼 때, 일체는 상자상의(相資相依)의 관계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자무량심이나 비무량심의 이론적 근거도, 중생과 자신이 한 몸이므로 자비(慈悲)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④ 사무량심(捨無量心): 일체의 탐욕을 버리고 사랑과 미움마저도 버리는 마음가짐이다. 세간사(世間事)는 따지고 보면 나와 남․좋고 나쁨․옳고 그름의 시비에서 생긴다. 이때 중심이 되는 것은 탐욕과 아집이다.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생각하므로 나만 이로우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탐욕과 아집, 이기주의를 버리면 미움도 사랑도 없어진다. 이러한 마음상태가 되어야 비로소 우리는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되고, 어떤 일을 해도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 된다. 남을 이롭게 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이 된다. 인과(因果)의 법칙에 의해 본다면 반드시 선행 뒤에는 복을 받게 되고, 또 남의 이로움은 곧 나의 이로움인 까닭이다.
4무량심은 궁극적으로 불자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하는가를 설명하는 가르침이다. 인간은 결코 단독자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함께 살아가야 하는 존재다. 함께 살아가는 존재는 마땅히 이웃을 기쁘게 하고, 고통을 덜어주며 함께 기뻐하고, 아집과 탐욕을 버려야 한다. 그래야 공동선이 실현된다. 공동선이 실현된 사회가 불국정토이고 그것을 실현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이 보살이다.
(3) 4섭법(四攝法)
불교는 자신의 이익보다는 남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다. 자신은 구제받지 못하더라도 남을 먼저 구제하겠다[自未度 先度他]는 것이야말로 이 같은 이상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흔히 불교의 두 가지 목표를 말할 때 위로는 보리[깨달음]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는 것[上求菩提 下化衆生]이라고 하지만 대승불교는 어느 쪽이냐 하면 하화중생에 더 많은 비중과 의미를 두고 있다. 왜냐하면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곧 자기를 구제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 같은 대승불교의 이상을 가장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4섭법(四攝法)이다.
4섭법이란, 고통 세계의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4가지 방법이란 뜻으로, 어떤 덕목보다 이타적(利他的)인 것으로 구성되어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① 보시법(布施法): 상대편이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아낌없이 주는 것을 말한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경제적인 도움을 주고, 사랑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사랑을 주며, 진리가 필요한 사람에게는 진리를 가르쳐 주는 것이 보시법이다. 중생의 삶이란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을 좋아하는 습성에 익숙해져 있다. 남에게 무엇을 준다는 것, 그것도 조건없이 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가운데 하나가 남이 필요로 하는 것을 아낌없이 나누어주는 것이다. 보시는 애착의 뿌리인 탐욕을 버릴 때에만 가능하다.
② 애어섭(愛語攝): 속담에“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고 했다. 말 한마디의 값이 얼마나 큰가를 일깨우는 말이다. 한마디의 말이 비수처럼 가슴을 찌르는가 하면, 봄바람처럼 얼었던 산하마저 녹이는 따뜻한 말이 있다. 애어(愛語)는 당연히 온 천지를 녹이는 따뜻한 말이다. 곤경에 처한 사람, 슬픔에 잠긴 사람, 좌절과 실의에 빠진 사람에게 따뜻한 한마디 위로의 말은 무엇보다 큰 용기와 희망을 준다. 어린이에게 잘못을 지적하기보다는 잘한 것은 칭찬해 주는 것이 더 교육적인 효과가 있다고 한다.‘사랑의 말'이 갖는 위력을 실증해 주는 좋은 사례다. 사랑의 말을 하려면 남의 단점보다는 장점을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 그리고 어떤 잘못도 용서할 수 있는 아량이 필요하다.
③ 이행섭(利行攝): 무엇이든 남을 이롭게 하라는 것이다. 몸으로든 말로든 생각으로든 남에게 이로움을 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다. 무거운 짐을 대신 들어주는 것, 진실한 말로 상대를 신뢰하는 것, 그리고 언제나 남을 위하겠다는 생각, 이 모든 것이 이행(利行)을 실천하는 길이다. 요컨대 세간에서 말하는 선행(善行)을 실천한다면 그것이 이행섭((利行攝)이다. 남을 이롭게 하려는 마음은 남의 입장에서야 한다. 남의 입장에 서면 남이 지금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 수 있다. 남의 입장에 선다는 것은 곧 남과 내가 하나로 일치할 때 가능하다. 남은 남이고 나는 나라는 생각이 있으면 언제까지 남의 입장을 이해할 수 없다. 남의 입장을 이해 못하는데 남이 원하고 필요한 일을 내가 대신할 수 없다. 그러므로 언제나 남의 입장에서 모든 문제를 생각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④ 동사섭(同事攝): 늘 이웃과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화광동진(和光同塵), 즉 빛과 먼지가 함께 어우러지듯 살라는 얘기다. 사람들은 곧잘 자기만 잘난 척하고 자기만 못한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수치로 여긴다. 반대로 잘난 사람, 권세가 있는 사람과 가까이 하는 것을 영광으로 안다. 두 가지 태도 모두 잘못된 생각이다. 사람의 값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릴 것 없이 똑같은 것이다. 생명의 값에 결코 고하(高下)와 다소(多少)가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모든 이웃을 존중하고 함께 어울려 살아야 함이 마땅하다. 높은 사람일수록 자세를 낮추고, 지체가 낮은 사람이라도 자존심(自尊心)을 갖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다. 보살은 이런 태도를 앞장서서 실천해 보여야 한다. 남과 함께 어울려 사는 곳에 평화가 있고 화해가 있으며, 진실한 이해와 만남이 이루어진다.
대승보살, 즉 불교의 이상을 적극적으로 실현하려는 사람은 이상의 네 가지 덕목을 앞장서서 실천해야 한다. 남이 먼저 해야 나도 그렇게 하겠다고 생각하면 세월이 억 만겁을 지나도 더불어 사는 밝은 이상사회를 이룩할 수 없다. 누구보다도 내가 먼저 보시(布施)하고, 애어(愛語)하고, 이행(利行)하며, 동사(同事)를 실천할 때 남도 따라서 실천한다. 보살은 남보다 먼저 실천하는 사람이다.
(4) 6화경행(六和敬行)
6화경(六和敬)이란 원시경전상에는 6위노법(六慰勞法)ㆍ6중법(六重法) 등으로 나오는데 줄여 그냥 6화(六和)라고도 하며, 다수의 행자들이 서로 수행하여 감에 서로 간에 상치됨이 없이 화목하고 그러므로 정이 서로 매우 깊은 6가지의 실제적 방법을 말하는 것이다.
① 신업동화경(身業同和敬) ② 구업동화경(口業同和敬) ③ 의업동화경(意業同和敬): 이상 셋은 각기 신(身)ㆍ구(口)ㆍ의(意)의 모든 행동이 상대에게 이익을 주도록 하여 상화상경(相和相敬)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④ 동계화경(同戒和敬): 청정무구(淸淨無垢)한 계품(戒品)을 가지고 서로 상화상경(相和相敬)하라는 것이다.
⑤ 동견화경((同見和敬): 서로 진리를 연구하여 얻은바 견해를 가지고 상화상경하라는 것이다.
⑥ 동시화경(同施和敬): 자기가 얻은바 여법(如法)의 이익이 있거든 그 이익을 상대에게 공정히 베풀어 주는 것이다.
이상 6화경(六和敬)을 간단히 말하면, 모든 신ㆍ구ㆍ의의 행동으로 또 같이 생활해 나가는 데 있어서 모든 도덕적인 것(戒), 사상적인 것(見), 재리적(財利的)인 것(施)을 상대자에게 서로 베풀어주면 서로 피차에 화목하고 서로가 공경하게 되어 모두의 이익을 가져온다는 것이라 하겠다.
5. 불교의 수행계위(階位)
(1) 소승불교의 수행계위(聲聞四果)
소승불교의 수행의 목적은-물론 일부에선 불(佛)을 목적으로 하는 움직임도 조금은 있었다고 할 수 있지만-어디까지나 아라한이 되는 데 있었다. 이하 소승불교의 수행계위〔 聲聞四果〕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한다.
① 수다원(須陀洹): 수다원은 성문 4과 중 첫 단계이다. 미혹을 끊고 성인의 부류에 처음으로 들어 왔다는 뜻으로 입류(入流)라고 한다. 부처님(佛)과 그의 가르침(法)과 승가(僧), 즉 3보에 대한 잘못된 믿음과 의심을 극복함으써 도달하는 단계이다.
② 사다함(斯陀含): 사다함은 성문 4과 중 제2단계이다.‘한번 갔다 온다'는 의미로 일왕래(一往來)라고 한다. 이 과위에 오르면 하늘이나 인간세계에 한번만 더 태어나서 깨닫고 그 다음에는 열반에 든다. 탐욕과 증오와 미망을 줄임으로써 도달되는 단계이다.
③ 아나함(阿那含): 아나함은 성문4과 중 제3단계이다. 인간 세상에‘다시 오지 않는다'는 뜻으로 불환(不還) 또는 불래(不來)라고 한다. 욕계(欲界)의 번뇌를 모두 끊어 결코 다시 태어나는 일이 없는 성자를 가리킨다. 죽은 다음 색계나 무색계에 나고, 거기에서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이는 앞의 두 단계를 얻은 뒤 감각적 욕망과 그릇된 의지를 이겨내면서 얻게 된다.
④ 아라한(阿羅漢): 아라한은 성문의 마지막 지위이다.‘번뇌의 도적이 아주 없어 졌다'는 뜻으로 무적(無賊)이라고도 한다. 아라한은‘인ㆍ천의 공양에 응한다'하여 응공(應供)이라고도 하며‘다시 태어나지 않는다'고 하여 불생(不生)이라고도 한다.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남자든 여자든 출가해야 도달할 수 있는 단계이다.
(2) 대승불교의 수행계위(52位說)
대승불교에서는 일체중생은 다 불성이 있으므로 깨치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화엄경』에서는 범부가 성불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으로 10신信)ㆍ10주(住)ㆍ10행(行)ㆍ10회향(廻向)ㆍ10지(地)ㆍ등각(等覺)ㆍ묘각(妙覺)을 말하고 있는데, 이를 52위설(五十二位說)이라고 한다.
① 10신(十信): 10신이란 보살이 수행하는 계위인 52위 중 제1위부터 제10위까지의 계위이다. 범부가 처음으로 한 생각 믿는 마음을 내어 대보리심(大菩提心)을 일으킴을 말한다.
㈀ 신심(信心): 부처님의 교법을 믿어 의심이 없는 것.
㈁ 염심(念心): 신심을 일심(一心)으로 생각하여 정진하는 것.
㈂ 정진심(精進心): 쉼이 없이 수행하는 것.
㈃ 정심(定心): 마음의 평정을 얻는 것.
㈄ 혜심(慧心): 모든 법의 자성(自性)이 공(空)함을 아는 것.
㈅ 계심(戒心): 청정한 마음으로 몸과 마음을 잘 지켜 나가는 것.
㈆ 회향심(廻向心): 닦은 바 선근(善根)을 돌려 보리를 구하고, 중생을 건지는데 향하도록 하는 것.
㈇ 호법심(護法心): 3보(三寶)를 보호하여 정법(正法)이 오래 가게 하는 것.
㈈ 불퇴심(不退心): 절대로 물러섬이 없는 마음을 가지는 것.
㈉ 원심(願心): 때를 따라 가지가지의 깨끗한 원을 닦는 것.
② 10주(十住): 보살이 수행하는 계위인 52위 중 제11위에서 제20위까지의 계위이다. 10신(十信)의 위를 지나서 마음이 진제(眞諦)의 이치에 안주하는 위치에 이르렀다는 뜻으로 주(住)라 한다.
㈀ 초발심주(初發心住): 불퇴전(不退轉)의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
㈁ 치지주(治地住): 이미 낸 보리심에 의해 정진하여 3업(三業)을 청정히 하는 것.
㈂ 수행주(修行住): 일체법(一切法)을 관찰하는 지혜를 깨끗이 하는 것.
㈃ 생귀주(生貴住): 성법(聖法)에 의해 일어나는 존귀한 것으로 생사 열반을 요지(了知)하는 것.
㈄ 구족방편주(具足方便住): 방편을 가져 닦는 바 선근(善根)이 모두 중생을 교화하고 이익되게 하여 열반을 증득하도록 하는 것.
㈅ 정심주(正心住): 불ㆍ법ㆍ보살 등을 찬탄하거나 비방하여도 결코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
㈆ 불퇴주(不退住): 불․법․보살 등을 있다고 하거나 없다고 하여도 마음이 결코 물러섬이 없는 것.
㈇ 동진주(童眞住): 신(身)ㆍ구(口)ㆍ의(意) 3업(三業)이 동자(童子)의 순진함과 같이 되는 것.
㈈ 법왕자주(法王子住): 모든 법(法)에 장애가 없어 지혜가 법왕자(法王子)와 같은 것.
㈉ 관정주(灌頂住): 왕자(王子)가 관정식(灌頂式)에 의해 왕위에 나가는 것처럼 지혜가 구경(究竟)에 달하는 것.
③ 10행(十行): 보살이 수행하는 계위인 52위 중 제21위에서 제30위까지의 계위이다. 보살이 이타(利他)의 수행을 완수코자 중생제도를 위해 노력하는 지위를 10으로 나눈 것.
㈀ 환희행(歡喜行): 기쁜 마음으로 행하는 것.
㈁ 요익행(饒益行): 중생을 이익 되게 하는 것.
㈂ 무진한행(無瞋恨行): 성내고 한탄하지 않는 것.
㈃ 무진행(無盡行): 끝없는 행을 하는 것.
㈄ 이치난행(離痴難行): 어리석고 혼란한 행이 없는 것.
㈅ 선현행(善現行): 하는 일 마다 착하게 나타나는 것.
㈆ 무착행(無着行): 집착 없는 행을 실천하는 것.
㈇ 존중행(尊重行): 누구든지 존중하며 살아가는 것.
㈈ 선법행(善法行): 착한 법을 실천하는 것.
㈉ 진실행(眞實行): 진실한 행을 하는 것.
④ 10회향(十廻向): 보살이 수행하는 계위 중에서 제31위에서 제40위까지의 계위. 지금가지 닦은 자리이타의 여러 가지 행을 일체중생을 위하여 돌려주는 동시에, 이 공덕으로 불과(佛果)를 향해 나아가 오경(悟境)에 도달하려는 지위.
㈀ 구호일체중생이중생상회향(救護一切衆生離衆生相廻向): 보살이 선근(善根)을 닦되, 이 선근(善根)으로 널리 일체중생이 고해를 벗어나게 하리라는 원으로, 마음을 항상 평등하게 가져 중생에 차별을 두지 않고 설사 중생이 보살에게 원해심(怨害心)을 내더라도 중생의 고통을 대신 받아 그들로 하여금 다 해탈케 하는 것.
㈁ 불괴회향(不壞廻向): 모든 부처님과 보살의 가르침에 무너지지 않는 믿음을 내어 그를 항상 수지(受持)하고 결코 물러섬이 없어 중생으로 하여금 일체지(一切智)를 얻게 하는 것.
㈂ 등일체제불회향(等一切諸佛廻向): 모든 부처님의 회향의 도(道)를 따라 배움에 3업(三業)이 부처님과 같아서 불(佛)의 행한 바 원(願)을 다하고자 하는 것.
㈃ 지일체처회향(支一切處廻向): 모든 선근공덕을 닦고 익힘에 그 선근공덕력이 모든 부처님과 중생의 처소에 이르러 이익되게 하는 것.
㈄ 무진공덕장회향(無盡功德廻向): 모든 공덕을 구족하고 어리석음(愚痴)과 뒤바뀐 생각(顚倒)를 영원히 떠나 집착하는 바가 없어 모든 불찰과 중생계를 깨끗하게 하므로 다함이 없는 공덕을 얻는 것.
㈅ 수순견고일절선근회향(隨順堅固一切善根廻向): 불(佛)ㆍ법(法)ㆍ지(智)ㆍ보리(菩提)에 수순하여 대자비(大慈悲)를 길러 불(佛)의 소행(所行)과 같이 하는 것.
㈆ 등수순일체중생회향(等隨順一切衆生廻向): 위의 것이 출생사심(出生死心)을 닦는 것을 위주로 한 것임에 비하여 이에서 부터는 세상에 나아가 교화(敎化)함을 주로 한 것이니, 만약 나눈다면 위의 것은 보리회향(菩提廻向)이라 하겠고, 여기서 부터는 중생회향(衆生廻向)이라 할 것이다. 이는 대비(大悲)를 주로 하여 위의 6바라밀 중의 닦은 바 지혜의 힘으로 생사의 고해에 들어 중생을 교화하고자, 그들의 근기를 따라 같이 행하며 그를 이롭게 하는 것이다.
㈇ 진여상회향(眞如相廻向): 진여(眞如)가 일체에 두루함과 같이 원력(願力)이 일체에 두루하여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보리심을 얻게 하여, 마음에 일체 동요나 장애가 없게 하는 것.
㈈ 무착무박해탈회향(無着無縛解脫廻向): 모든 선근(善根)에 가벼운 마음을 내지 않고 존중하는 마음을 내어, 집착도 없고 얽매임도 없는 해탈의 마음으로 보현(普賢)의 자재력을 성취하고 선근행(善根行)으로써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일체지(一切智)에 들게 하는 것.
㈉ 등법계무진회향(等法界無盡廻向): 보살은 이 위(位)에 이르면 법사(法師)의 위(位)에 있어서 능히 광대한 법을 베풀고, 대자비를 성취하여 세간을 엄정(嚴淨)하고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정도에 안주토록 하는 것.
⑤ 10지(十地): 보살이 수행하는 계위인 52위 중 제41위로부터 제50위까지의 계위이다. 이 10위는 부처님의 지혜를 생성하고 능히 갖추어 움직이지 아니하며, 온갖 중생을 짊어지고 교화 이익하는 것이 마치 대지가 만물을 싣고 이를 이롭게 함과 같으므로 지(地)라 한다.
㈀ 환희지(歡喜地): 항상 기쁜 마음으로 사는 것
㈁ 이구지(離垢地): 마음의 떼가 없이 청정한 마음으로 사는 것
㈂ 발광지(發光地): 밝은 빛을 발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
㈃ 염혜지(焰慧地): 불꽃과 같은 지혜를 개발하는 것
㈄ 난승지(難勝地): 참기 어려운 일을 잘 참고 이겨내는 것
㈅ 현전지(現前地): 부처님 마음을 항상 앞에 드러내는 것
㈆ 원행지(遠行地): 끊임없이 정진하며 행동하는 것
㈇ 부동지(不動地): 흔들림이 없는 마음을 얻는 것
㈈ 선혜지(善慧地): 보살이 이타행을 완성하여 지혜의 작용이 자재로운 것
㈉ 법운지(法雲地): 진리의 구름을 일으켜 세상을 시원하게 하는 것
⑥ 등각(等覺): 법운지의 위 자리로, 등각(等覺)이라 함은 불(佛)의 정각과 동등하다는 의미이다. 불타의 신통을 나투면서 항상 본경(本境)에 머무르나 아직은 불타라 할 수 없어서 불타의 비하면 보살이나, 10지에 비하면 불타인 것이다.
이 위에 이르면 보살로서는 최후신(最後身)이기에 일생보처(一生補處)보살이라고도 하며, 불위(佛位)에 가까웠다는 의미에서 린극(隣極)이라고도 한다.
⑦ 묘각(妙覺): 지극히 묘한 각이라는 뜻이니 일체 번뇌를 다 끊어 없애고 지혜가 원만하여, 스스로 깨닫고 또 남도 깨닫게 하는 모든 각행이 원만하여 불가사의한 무상정각(無上正覺)의 불위(佛位)이다.
6. 불자의 신행생활
불자의 신행생활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그리고 개인의 능력에 따라 실천수행을 얼마든지 달리할 수 있다. 그러나 궁극적인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해탈과 그 개인이 살고 있는 사회의 정화에 있음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1) 예불(禮佛)
부처님에 대해 아침저녁으로 존경과 귀의를 표명하는 것이 예불이다. 예불은 일반적으로 사찰에서는 새벽과 낮, 저녁에 한다. 부처님에 대한 예배는 인류에게 구원의 빛을 비추어 준데 대한 감사와 존경의 귀의에서 하는 것이다. 예불은 특별한 의식문(儀式文)이 있으므로 그것을 통해 이 같은 귀의심을 표명한다. 불교를 신행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이 예불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가끔 불교는 마음의 종교이므로 마음을 깨치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말을 하는 사람이 하는데 이런 태도는 옳지 않다. 오히려 마음의 종교이므로 마음을 경건히 하고 예배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2) 참회(懺悔)
우리는 생활 속에서 의식적ㆍ무의식적으로 많은 죄악과 허물을 짓고 살아간다. 이러한 잘못을 뉘우치고 반성하는 의식이 다름 아닌 참회이다.
『육조단경』참회품에“선지식이여, 이것이 무상참회(無相懺悔)이니라. 참(懺)이란 어떤 것이며 회(烸)란 어떤 것인가? 참이란 지나간 허물을 뉘우침이니 전에 지은바 나쁘게 지었던 미련한 것, 교만하고 허황한 것, 시기․질투하는 것 따위의 죄를 다 뉘우쳐서 영원히 다시 아니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며, 회란 뒤에 오기 쉬운 허물을 조심하여 다음부터 있을 나쁜 짓인 미련함과 교만하고 허황함과 시기․질투 따위의 죄를 미리 깨닫고, 영원히 끊어서 다시는 짓지 않도록 하는 것이니 이것을 합하여 참회라 하느니라. 범부들은 어리석어서 다만 지나간 허물은 뉘우칠 줄은 아나 앞으로 있을 허물은 조심할 줄 모르므로, 지나간 죄도 없어지지 않고 새로운 죄가 잇달아 생겨나니 이러고서야 어찌 참회라 할 것이냐?"라는 말씀이 있다.
세상을 살면서 아무런 죄악을 짓지 않고 살기 어렵다. 그러므로 항상 끊임없이 반성하고 다시는 그러한 죄업을 짓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만약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스스로 합리화시키고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는 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진실한 삶을 살려는 불자의 자세가 아니다. 또한 참회의 의미에서 보았듯이 지은 허물을 뉘우치기만 할 줄 알고 마땅히 앞에 다가올 허물을 경계하여 끊을 줄 모른다면 그것은 더욱 더 어리석은 행위라고 할 것이다. 자기반성과 비판 속에서 스스로 행위를 주체적ㆍ능동적으로 고쳐나가 발전시키는 것이 불자의 자세인 것이며, 궁극에는 그러한 근원이 되는 탐욕과 어리석음과 교만함을 남김없이 제거하여야 하는 것이다. 참회는 이러한 진실한 삶으로 회귀하려는 자신의 의지의 표현이므로 자신의 허물을 들추어내기를 꺼리지 않고, 스스로 드러내어 질책받고 뉘우치는 주체적 행위이며, 이것을 발로참회라고 한다.
(3) 자자(自恣)와 포살(布薩)
참회의 생활 속에서 불자로서의 청정함과 성스러움을 유지하고 재확인하는 동시에 죄를 지었을 때 참회하여 청정성을 유지하려는 의식으로 자자와 포살이 있다.
이러한 의식은 부처님 당시부터 지속되어온 성스러운 의식으로, 포살은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모든 비구가 모여 장로가 계본을 읽고 그 동안의 생활 속에서 계에 어그러진 행위를 하였을 때는 대중들 앞에 나와 위반한 사실을 고백하고 참회를 하는 형식으로, 계본은 한 항목마다 3번 되풀이되었고, 계를 어기지 않은 사람은 잠자코 앉아 앞으로도 계를 잘 지키는 다짐을 하게 하는 의식이다.
포살에 있어서 계본은 출가자와 재가신자의 수가 다른데 출가자는 대략 250가지의 계율이 있었고 재가신자는 5계에 대한 발로참회로 포살을 이끌어 갔다. 또 하나의 행사인 자자는 우안거(雨安居)의 마지막 포살인(15일)에 행해지는 법회로 자진해서 자기가 지은 죄를 지적해 달라고 동료 비구들에게 청하는 것으로, 동료 비구들은 상대방을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따스한 애정에서 잘못을 지적하고 또한 잘못을 지적받은 비구는 기꺼이 그를 받아들여 자신의 생활자세를 반성하고 고쳐 나가는 것이다.
이 같은 자자와 포살은 현대식으로 말하면 자기비판과 상호비판으로 화합승가의 애정어린 충고 행위와 청정함을 지키려는 치열한 자기수행의 모습인 것이다.
(4) 기도(祈禱)
종교적 신행생활로서 기도라는 것이 또한 깊은 뜻을 지니고 있다. 기도는 주로 어떤 소원을 성취하는 것이 그 주가 되지만 그 소원을 성취한다는 것이 기도라는 행위에 의하여 이루어질 수 있느냐고 반문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는데 기도하는 의식은 불․보살님께 예배하고 공양하고 경을 읽고 염불을 하면서 지성으로 그 소원을 빌면 그로 인하여 흩어지고 복잡하던 정신이 통일되어 하나의 신념이 굳어지며, 불․보살의 특수한 힘이 아니라 하더라도 자기 스스로가 무엇인가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의 정신력이란 신비한 것이다. 특히 한곳에 정신을 집중하면 할수록 특수한 능력이 발휘한다. 예부터 기도하여 소원을 성취했다는 영험담이 많이 있다. 그것을 타력으로 보겠지만 타력을 있게 한 것은 자력이다. 우리가 불ㆍ보살의 위신력을 인정하는 이상 그 감응력도 인정하여야 한다.“지성이면 감천” 이 라는 말이 있듯이 지성심이 능히 신불(神佛)을 감응케 하는 것이다. 불ㆍ보살의 힘을 전파에 비한다면 기도의 힘은 안테나, 수신기와 같다. 저쪽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기능이 마련되어야만 되는 것과 같이 자력 없는 타력은 있을 수 없다.
(5) 간경(看經)
글자 그대로 진리의 말씀이 담긴 경전을 읽는 것이다. 경을 읽을 때는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자세를 바르게 하고 정신을 차려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한다. 경전(經典)은 단순한 책이 아니라 신앙의 대상이므로 책상 위에 놓고 읽어야 하며, 병이 들었을 때와 같이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누워서 읽거나 하면 안 된다. 또 많은 경전을 읽었다고 나태하지 말고 한 가지를 반복해서 자주 읽다보면, 읽을 때마다 의미가 새롭게 느껴진다. 가르침의 의미가 새롭게 느껴지는 것에서 종교적 인격이 성숙된다.
(6) 참선(參禪)
아침, 저녁 시간을 정해 조용히 명상하는 것이다. 참선(參禪)을 오래 하다보면 정신이 집중되고 맑아진다. 보다 전문적인 선수행(禪修行)은 화두(話頭)를 가지고 전심으로 참구하는 것이다. 초심자는 시간을 정해 아침ㆍ저녁으로 하는 것이 좋으며, 나중에는 언제 어디서나 실천에 옮기면 된다.
(7) 염불(念佛)
부처님의 모습을 늘 생각하는 것이다. 마음속에 거룩한 부처님의 모습을 늘 떠올리고 부처님께 귀의하면, 경건하고 밝은 생활을 할 수 있다. 부처님을 떠올리며 명상한다고 해서 이를 관불(觀佛)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 방법은 잡념이 생길 수 있으므로 나중에는 더 쉽게 입으로‘석가모니불이나‘관세음보살'을 반복해서 소리내어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입으로만 부르면 마찬가지로 잡념이 생기므로 부르는 소리를 자기의 귀로 반드시 들어야 한다. 자기 소리를 자기가 들어야 일념이 된다.
(8) 주력(呪力)
주(呪)라 함은 주술의 뜻으로써, 범어 다라니의 단구를 진언, 장구를 대주 또는총지라고 한다. 진언이라 함은‘부처님의 진실어'라는 뜻이며, 총지라 함은 일자일구가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진언․총지․주술의 교의의 수행법을 주로 한 것을 밀교 또는 진언종이라고 한다. 이 밀교에서는 대일경ㆍ금강경 등을 소의경전으로 하는데, 그 경은 법신불인 대일여래의 설법이라 한다. 또한 이 교파에서는 몸으로는 비밀인을 맺고 입으로는 진언을 외우며 마음을 관법을 닦으면 부처의 경지에 들어가서‘즉신성불’한 다고 주장한다.
이 같은 불교수행은 특별히 어렵거나 반대로 쉬운 것이 아니다. 꾸준하게 노력하고 성의를 다하는 사람에게는 결코 어렵지 않다. 반대로 끈기를 갖지 않고 게으른 사람은 아무리 쉬운 것이라 해도 어렵기 마련이다. 늘 마음의 고삐를 늦추지 않도록 해야 한다.
7. 불자의 일과(日課)수행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시작되며 긴 세월도 하루하루가 쌓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하루가 나의 인생 전체의 기초가 되는 것이며, 이것을 무시하고서는 1년 후도 10년 후도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신앙생활도 하루하루의 꾸준한 규칙적인 수행에 의해 불과(佛果)를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1) 아침 수행
아침 시간은 하루 중에 가장 중요한 시간으로 가능한 한, 일찍 자리에 들고 일찍 기상하여 자기에 맞는 일과를 진행한다. 우선 아침에 일어나면 세면하고 옷을 단정히 하고 기도한다. 집집마다 부처님을 모신 불단을 마련하면 좋으나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청결한 장소를 마련하여 정성스럽게 염불이나 기도하는 것이다.
염불수행 할 경우 금강경 또는 관세음보살보문품ㆍ약찬게 등을 한 후 관음정근이나 아미타불정근을 하고, 기도할 경우 천수경으로 시작하여 관음정근이나 지장정근 또는 아미타정근을 한다. 마칠 때 발원문을 외우고 반야심경을 외우면 된다. 즉 스스로 때에 알맞은 방법을 선택하여 한결같이 수행하면 모든 일에 장애가 없고 원하는 바가 성취된다.
(2) 직장 또는 가정에서의 수행
직장에 나가 일을 하거나 가정에서 일을 할 때에도 부처님을 잊어서는 안된다. 사사불공(事事佛拱, 일마다 불공 아님이 없음)이며, 처처시불(處處是佛, 곳곳에 다 부처님이 계심)이라는 말이 있듯이 모든 일을 할 때는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자세로 정성과 성의를 다하여야 하며, 자신의 일에 자랑과 긍지를 갖고 보람된 열매를 거두도록 한다.
여러 가지 일이나 환경에 대하여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며 특히 3독심(三毒心, 욕심ㆍ성냄ㆍ어리석음)이 일어나지 않도록 한다. 직장이나 가정을 하나의 청정한 도량으로 생각하여 그곳에서 나의 발전과 인격의 성숙을 도모한다. 우리가 처해 있는 직장과 가정이 8정도(八正道)를 실천할 수 있는 좋은 실습장인 것이다. 또한 어떠한 역경이나 난관에 처하더라도 당황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곧 부처님의 무한한 위신력을 생각하며 의지한다. 부처님의 큰 지혜와 자비 앞에는 불가능이 없다.
(3) 저녁 수행
아침에 하는 수행 중에서 시간만을 조정하여 봉행한다. 오늘 하루가 무사히 끝마쳤음을 감사드리고 잘못은 참회하며 기도를 올린다. 그날 있었던 모든 일들을 마음속으로부터 비워내며 무심하고 담담한 마음으로 염불하면서 잠자리에 든다. 그러면 나쁜 꿈을 꾸지 않고 편안한 잠을 잘 것이며 아침에 일어나면 상쾌하게 된다. 이것은 잠자기 전에 고요히 염불하면 의식은 잠들어도 잠재의식에서는 계속 염불하게 되므로 밤새도록 나쁜 꿈 없이 염불 공부하게 된다. 그러므로 아침에 일찍 일어나게 되고 또 일어나면 자신도 모르게 기쁨으로 충만되어 또 다시 아침 수행을 행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저녁 수행을 계속하면 오래지 않아 하루 종일 일하면서도 잠재의식에서는 공부가 되어 이생에서 해탈하고 불법을 깨달아 절대적인 자유를 얻게 된다. 따라서 이 저녁 수행법은 매우 중요하며 잘 알고 실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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