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사단 은 1913년 5월 1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에 의해 창립되었다.
일제 치하에서 나라를 되찾기 위한 민족의 실력 양성에 힘썼고 해방 후에는 민족부흥에 이바지 할 일꾼 양성과 민주사회 건설을 위한 시민 교육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흥사단은 특히 2천년대 한국의 주인이 될 청소년들이 참되고 진취적이며 협동적이고 용기있는 일꾼으로 성장 할 수 있도록 다양한 수련 활동과 사회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흥사단은 서울에 본부가 있고, 전국 20여개 주요 도시에 지부가 조직되어 있으며, 흥사단 의 청소년 학생운동은 아카데미 클럽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중고등학생, 대학생 및 청년 아카데미가 전국의 학교 또는 지역 단위로 조직되어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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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사단의 목적과 이념
<흥사단 목적문>
본단의 목적은 무실역행(務實力行)으로 생명을 삼는 충의남녀(忠義男女)를 단합하여 정의(情誼)를 돈수(敦修)하며 덕(德), 체(體), 지(智) 삼육을 동맹수련하여 건전한 인격을 지으며 신성한 단체를 이루어 우리 민족 전도 번영(前途繁榮)의 기초를 수립함에 있다.
오랜 전통을 가진 우리 민족이 발전적인 민주사회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먼저 국민 각자가 올바른 정신적 자세와 왕성한 부흥 의욕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정신적 자세는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등 사회 모든 분야의 여건의 변화에 영향을 받으나 사람은 또한 환경을 개선 창조하는 원동력을 가졌다.
그러므로 민족을 부흥시키려면 참되고 진취적이며 협동적이고 용기있는 일꾼들이 민족적 사명감을 가지고 일꾼들이 민족적 사명감을 가지고 실천 봉사하여야 하며, 이런 일꾼의 양성을 위한 의식적이고도 계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3대 수련(修鍊)
흥사단은 인격훈련, 단결훈련, 공민훈련의 세가지 수련을 강조한다.
ㅇ인격(人格)훈련은 무실역행 충의용감의 정신으로 덕성을 함양하며, 신체를 단련하여 기력 을 강장케 하며 전문지식 또는 생산기능을 습득하여 건전한 인격을 형성케 하는 일이다.
ㅇ단결(團結)훈련은 신의를 지키고 규율에 복종하며 서로돕고 사랑하여 신성(神聖)한 단체 를 조성케 하는 일이다.
ㅇ공민(公民)훈련은 자주적 정신과 자치능력을 배양하며, 민주주의적 사회식견과 대공복무 (大公服務)의 생활 태도를 육성하여 국민적 품격을 향상케 하는 일이다.
4대 정신(精神)
흥사단은 무실, 역행, 충의 용감의 네가지 정신을 마음의 지표로 삼는다.
O 무실(務實)은 거짓을 버리고 참을 사랑하는 정신이요, 실질을 존중하는 정신이다.
O 역행(力行)은 빈말보다 실천을 강조하고 목표를 향하여 꾸준히 노력하는 정신이다.
O 충의(忠義)는 작은 일이나 큰 일이나 개인적인 일이나 공적인 일이나 모든 일에 정성을 다하고, 사람에 대해서는 신의를 다하는 것이다.
O 용감(勇敢)은 매사에 굳은 의지를 가지고 진취적이며 능동적인 정긴을 발휘하는 것이다. 용감은 탐구와 진리에 사는 정신이다.
5대 공약(公約)
흥사단 단우는 5대공약을 내세우고 이를 일상 생활의 규범으로 삼는다.
첫째, 무실역행, 충의용감의 정신으로 부단히 자아를 혁신하자.
둘째, 동지를 사랑하며 신의를 확수하며 환난상구하자.
셋째, 단을 위하여 일심하며 복종하며 희생하자.
넷째, 범사에 청백하며 맡은 책임을 완수하자.
다섯째, 대공복무의 정신으로 국가 민족을 위하여 헌신하자.
흥사단의 사업과 활동
<회원훈련사업>
흥사단의 가장 기본되는 사업은 회원훈련사업이다. 흥사단의 회원훈련은 학생과 청소년 아카데미의 집회활동과 성인단우들의 월례회 등을 통해 이루어지며, 그밖에 수련회와 각종 행사를 통해서도 훈련 프로그램이 실시된다.
· 아카데미 집회 - 아카데미는 단위 그룹별로 매주 1회씩 정기집회를 가져 강론회, 토론회, 발표회, 봉사회, 견학회, 희락회 등의 프로그램을 실시한다.
·월례회 - 매달 1회씩 지부 또는 분회별로 소속 단우들이 모여 강론과 토론, 세미나, 봉사, 친목 등의 활동을 한다.
·수련회 - 각 그룹별로 또는 연합으로 단우·회원들이 모여 인격훈련과 생활훈련을 위한 동맹수련으로 실시한다.
·각종행사 - 흥사단의 중요한 연례행사로는 도산추모행사(3월), 창단 기념행사 및 전국대회(5월), 지방조직과 부설기관별 창립기념행사 등이 있으며 이들 행사는 전국규모 또는 기관별 개최 한다.
<사회봉사와 공익사업>
흥사단은 회원훈련사업돠 병행하여 청소년 지도육성, 사회교육과 지역사회운동, 연구·출판·장학 등 다양한 사회 공익사업을 전개한다.
· 청소년 지도육성
흥사단은 학생과 청소년 아카데미의 클럽활동을 통하여 건전인격을 수련하고, 사회봉사의 가치관을 습득, 실천하는 기회를 갖도록 지도하는 동시에 일반 청소년을 위한 다양한 교욱 프로그램도 개발 실시하고 있다. 특히 미애 통일한국의 주역이 될 청소년들에게 통일에의 꿈과 의지를 심어주고 올바른 통일관을 정립토록 하기 위한 통일교육 프로그램에 역점을 두고 있다.
·사회교육과 지역사회운동
흥사단의 가장 전통있는 사회교육 프로그램으로「금요개척자강좌」를 꼽을 수 있다. 이 강좌는 시민 교양과 의식 함양을 목적으로 1954년 4월 개강하여 현재까지는 40년 이상 지속해 오고 있다. 각 지방별로는 청소년과 시민을 대상으로 강연회를 개최하거나 교양강좌, 학부모교실, 캠프, 취미·문화강좌 등 다양한 사회교육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청소년상담실과 자원봉사센터 등을 운영하며 건전 교육환경 조성을 위한 캠페인도 전개한다. 또한 흥사단의 본부와 지방 지부들은 바른사회 실현을 위한 시민실천운동과 건강한 지역공동체 문화를 가꾸기 위한 지역사회운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연구·출판·장학사업
흥사단은 부설 연구원 등을 통해 청소년교육, 민족문제, 통일문제 등에 관해 폭넓은 연구 및 교육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기관지 월간「기러기」를 발간하고 있으며 흥사단의 이념과 정신을 보급하기 워한 각종 서적을 출판하여 청소년과 국민에게 정신적 양식을 제공하는 사업도 전개하고 있다. 그밖에 인재육성을 위한 장학사업도 꾸준히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흥사단의 조직과 회원
흥사단이 80여년의 역사 속에서 숱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며 끈질기게 생명을 유지해온 근원은 바로 조직의 힘이다. 한국 사회에 나타났다가 사라진 수많은 조직이나 단체와는 달리 흥사단은 비교적 엄격한 입단 및 서약절차, 입단 후의 각종 동맹수련, 정의돈수, 엄숙한 의식 등을 통하여 양보다는 질을, 형식보다는 내용을 중시라는 조직원칙을 견지해 왔다.
<기관과 조직>
흥사단은 중앙에 본부가 있고 본부 밑에 지부와 위원부를 두며 지부 밑에 분회와 아카데미를 두는 기본 조직체계를 가지고 있다.
<흥사단의 기본 조직체계>
·지부는 특별시, 광역시, 시(군) 등 중요 지역에 설치하는 기본지방조직이다. 통상단우의 수가 30명 미만인 경우 예비지부로 한다.
·위원부는 해외지역에 두는 자치조직이다.
·분회는 지부 밑에 두는 성인 활동조직이다.
·아카데미는 지부 밑에 두는 학생과 청소년 활동조직이다.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 및 청년 아카데미로 구분하고 지역단위 또는 학교단위로 조직할 수 있다.
※ 흥사단 본부의 기관 및 기구
·공의회는 공의원 20명 이상으로 구성하고 일체의 입법사항과 사업계획 및 예산·결산을 심의하고 부여된 각종 선거사항을 처리한다.
·이사회는 이사원 12명 이상을 두고 본단의 사업돠 서무를 관장하며 각 분과위원회에제안된 안건을 심의의결 및 집행하고 공의회에서 승인된 재정을 맡아 운영한다.
·심사회는 심사원 4명 이상으로 구성하고 본단 각급 조직의 업무감독, 회계 사를 실시하며 단우의 청원사항, 징계사항, 선거에 관한 이의신청, 포상에 관한 사항을 심의 의결한다.
·상설 분과위원회는 이사회 산하에 기획분과위원회, 조직분과위원회, 훈련분과위원회, 홍보분괴위원회, 사업분과위원회, 재정분과위원회, 관리분과위원회 등을 두어 소관업무를 처리케 한다.
·특별위원회는 이사회 산하에 통일문제특별위원회, 시민실천위원회, 국제교류협력위원회, 장학위원회 등을 두어 위임업무를 처리케 한다.
·사무처는 실무책임자인 사무총장을 비롯하여 사무부총장, 부장, 차장, 간사 등의 직제와 조직부, 훈련부, 홍보부, 사업부, 관리부 등의 부서를 두어 단의 실무를 집행한다.
·부설기관은 본단의 목적에 부합하는 특수 영역의 사업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운영하고 있다. 본부 부설 기관에는 1989년에 설립한 도산아카데미연구원과 1992년에 설립한 청소년연구원, 그리고 1993년애 개관한 강서청소년회관이 있다.
회원
흥사단 회원은 단우와 아카데미 회원, 일반회원 등으로 구성된다.
▶예비단우 - 흥사단의 목적과 이념에 찬동하여 입단 절차를 밟는 사람.
▶통상단우 - 예비단우로 1년 이상 의무에 부지런한 이, 특별단우 및 명예단우로 2년 이상 재적한 이 중에서 지부 임원회 심사를 거쳐 문답식과 서액례를 행항 사람.
▶특별단우 - 본단으 사업을 후원하는 인사 중에서 이사회, 위원부 및 지부의 결의를 거친 사람.
▶명예단우 - 본부 이사회가 추대하거나 또는 이사회의 승인을 거쳐 위원부 및 지부가 추대하는 사람.
▶아카데미 회원 - 흥사단의 청소년 학생 수련조직인 아카데미에 소속하여 활동을 하는 회원으로서 준회원과 정회원으로 구분된다. 준회원으로 입회 후 일정기간이 지난 다음 입단 절차를 밟아 정회원이 된다.
▶일반회원 - 단우 이외에 일반시민과 청소년 중에서 자원에 의해 흥사단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
흥사단의 약사
창단기
조국이 일제의 압박으로 합방이란 미명하에 주권을 빼앗겼을 때, 잃어버린 조국을 되찾고 민족의 주권을 회복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난 민족의 횃불이 바로 흥사단이다. 흥사단은 국민의 인격혁명이 독립국가 건설과 민족부흥의 기초임을 각성하고, 조직적으로 무실역행, 충의용감한 건전인격체를 일으켜 나라를 되찾자는 결의로 창립된 것이다. 우리나라는 조선 말 시계 열강들의 식민주의 정책에 희생되어 청일전쟁(1894년), 러일전쟁(1905년)을 거치면거 마침내 1910년 나라를 빼앗기는 국치를 당하였다. 당시 20세 청년으로 미국 유학의 길을 떠났던 도산 안창호는 급거 귀국하여 1907년 구국운동 비밀결가 신민회를 조직하고 그 산하에 1909년 2월 우리나라 청년 학생운동의 효시인 청년학우회를 일으켰다. 이것이 흥사단의 전신이다. 신민회와 청년학회는 일제의 소위 105인 사건 조작으로 해산을 당하고 도산은 다시 해외 망명의 길에 오르게 된다. 1912년 미국으로 건너간 도산은 국민회 중앙총회장으로 활동하면서 국민회와 같은 대중적, 정치적인 운동으로는 핵심 정수분자를 양성할 수 없음을 깨닫고 새로운 운동체의 필요를 느끼게 된다. 그것이야말로 국내에서 시작하였던 청년학우회와 같은 조직의 구상이었다. 국내에서는 신민회의 산하단체 관계였으나 이번에는 오히려 모든 단체나 일반 사회에서 핵심 듍?역할릏 할 수 있는 젊은 정수분자를 앵성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구상에 따라 일으킨 단체가 흥사단이며, 1913년 5월 1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역사적인 창립을 보았다. 창립 당시의 목적은 「무실역행으로 생명을 삼는 충의남녀를 단합하여 정의를 돈수하며 덕, 체, 지 삼육을 동맹수련하여 건전한 인격을 지으며 신성한 단체를 이루어 우리 민족 전도대업의 기초를 준비함」이라 하였으며, 8도 대표(경기-홍언, 강원-염만석, 충청-조병옥, 전라-정원도, 경상-송종익, 황해-민창호, 평안-강영소, 함경-김종림)를 창립위원으로 삼았다.
해방이 되기까지
창단후 단세 확장과 단우 확보에 심혈을 기울이던 본단은 1919년 위 대한 민족의 혼과 얼을 온 세계에 드높이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난 3·1운동을 기점으로 적극적인 전파와 아울러 가혹한 시련을 겪게 된다. 다방면에 걸쳐 민족의 역량을 더욱 준비할 시기로 판단하던 도산은 3·1운동이 일어나자 상해로 건너가 만주, 시베리아, 하와이, 미주 각지에 있는 민족운동 영수들에게 대동단결을 호소하고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상해에 머무는 동안 도산은 중국 방면과 국내에서도 흥사단과 동일한 목적과 정신을 가진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하고 상해에 모여든 진실한 청년들을 중심으로 1920년 흥사단 원동위원부를 1922년 서울에 수양동맹회, 1923년 평양에 동우구락부를 조직하였다. 국내 운동으로 전개된 수양동우회와 동우구락부는 일본의 탄압을 피하기 위하여 인격수양과 민족문화 건설을 못적으로 하였으나 실질적인 모든 사업과 실천내용은 흥사단과 동일한 국내조직이었다. 1925년에 수양동맹회와 동우구락부가 합하여 수양동우회로 되고 다시 1929년에 동우회로 개칭하였다. 그 후 1937년 6월 일본이 만주 사변을 일으키면서 합법적인 수양단체로 인정해 오던 동우회를 치안 유지법을 빙자하여 200영명을 체포, 구금하고 강제 해산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그 유명한 동우회 사건(일명 흥사단 사건)인 것이다. 동우회 사건 이후 흥사단운동은 국내에서는 일제의 삼엄한 탄압 하에 재기하기 어려웠고 다만 미주 활동을 근간으로 해방되기까지 조국광복을 위한 민족의 실력양성 운동을 꾸준히 계속해 나갔다.
해방 이후
1945년 감격의 8·15해방을 맞아 흥사단은 11월 미주와 중국방면에서 귀국한 단우와 국내에 있던 단우들이 회동하려 국내위원부를 발족하고, 국내에서의 운동을 힘차게펼쳐나가게 되었다. 1946년 9월 제1차 국내대회를 기독청년회관에서 개최한 후 단세 확장에 박차를 가하기 위하여 흥사단은 1949년 본부를 국내로 이전키로히고, 옛 미주 본부를 『미주위원부』로 개칭하고 사무실을 로스엔젤레스에 두며, 원동위원부를 상해에 두어 자치하게 하였다. 1949년 10월 제4차 대회를 서울과 부산 양처에서 개최하고 이때 서울 을지로2가 대성 빌딩을 인수하여 『대성문화사』를 창립하였다. 1950년 6·25동란이 일어나자 단은 부산에 임시 연락처를 설치하고, 미주위원부의 도움을 받아 단우간에 서로 돕고 서로 구호하는 운동을 전개하면서 「단보」속간하고 1953년 5월 13일 창립 40주년 기념식을 거행하기도 하였으나 본단의 사업시설과 단우의 희생이 극심하였다. 3년동안 부산에 피난 중이던 임시 단소는 1953년 9월 서울로 복귀하여 단무를 정상화하는 동시에 대성빌딩을 수축하고, 1961년 5·16 군사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연차대회, 젊은 단우의 규합 훈련, 국민교양계몽운동, 「새벽」·「기러기」외 각종 단 서적을 출판하는 등 여러 가지 사업을 추진하였다.
재출발과 발전
1961년 5월 16일 군사정권이 수립되면서 본단도 다른 사회단체들과 같이 일시 활동 정지를 당하였다. 3년간의 침묵 속에서 활동 재개를 기다리던 본단은 1963년 7월 22일 당국에 등록 절차를 마친 후 새로운 의욕으로 청소년 사업인 아카데미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는데, 동년 8월 25일 서울에 청년 아카데미가 창립되고, 이어 31일에는 대학생 아카데미가 9월 14일에는 고등학생 아카데미가 창립을 봄으로써 전국적인 아카데미 운동의 시발점이 되엇다. 1964년 봄 이후 서울, 부산, 대구, 대전, 광주, 인천, 진주, 춘천, 전주, 제주 등지에 분회가 설립되었고, 청주, 천안, 오산, 강릉, 군산, 이리, 부안, 장흥, 해남, 여수, 마산, 진해, 원주, 울산 등지에 아카데미가 조직되었다. 1969년 8월 19일 임의 단체로 활동하던 본단이 문교부(지금의 교육부) 장관의 승인을 받아 사단법인으로 설립되었고, 그 후 1976년 오랫동안 본부로 사용하던 대성빌딩을 처분하고, 1977년 9월 24일 서울 종로구 동숭동 1의 28번지에 새 흥사단회관을 완공 이전하고 새롭게 출발하였다. 1983년 5월 14일 남산 숭의음악당에서 창단 70주년 기념식이 성대하게 거행되었고, 그해 10월 23일에는 단본부 강당에서 제70차 전국대회가 「민족의 주인되어 통일의 길을 닦자」라는 표어를 내걸고 개최되었다. 아울러 창단 70주년 기념사업으로「흥사단 운동 70년사」를 발간키로 하고 편찬위원회를 구성하여 3년 여의 작업 끝에 1986년 1월에 발간을 보게 되었다. 1989년 6월 부설 연구기관으로 「도산아카데미연구원」을 개원하고 1992년 5월에는「청소년연구원」을 개원하였다. 1991년 1월 발전기획 특별위원회에서 이념, 조직, 사업 등 각 분야별로 중장기계획으로서의 「제1차 흥사단 발전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시행에 들어갔다. 1993년 5월 15일, 서강대학교 대강당에서 흥사단 창립 80주년 기념식이 성대하게 거행되었고, 1996년 5월 15일-16일에는 청주지부 주관으로 창단 83주년 기념 전국대회가 "참여와 봉사, 이웃과 함께 겨레와 함께"를 표어로 내걸고 500여명의 단우와 아카데미 회원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흥사단 연혁
1909.2 구국운동 조직 '신민회'(1907)산하에 '청년학우회'를 조직
청년학우회는 근대적 청년운동의 효시이며, 흥사단의 전신이다.
1913.5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 창립
5월 13일 8도 대표를 창립위원으로하여 창립하다.
1920. 중국 상해에 흥사단 원동위원부 조직
1922. 서울에서 흥사단과 목적은 같으나 별칭의 '수양동맹회'창립
목적이 흥사단과 같으나 일제치하에 있으므로 별개 단체로 조직되다.
1923. 평양에 '동우구락부' 조직
1925. 수양동맹회와 동우구락부가 '수양동우회'로 통합
서울과 평양을 중심으로 흥사단의 국내 활동을 전개하다. 1929년 동우회라 개칭하다.
1926. 잡지 <동광> 창간
1933년까지 40호 발행
1937. 동우회 사건
동우회가 일제에 의하여 강제 해산되고 회원 200여명 투옥되다.
1938. 3 창립자 도산 안창호 선생 서거
1946. 1 흥사단 국내위원부 조직
1월 2일 국내위원부를 조직하고, 9월 제1차 국내대회를 개최하다.
1948. 8 흥사단본부 국내 이전, 미주위원부 개설
미국에 있던 본부를 국내로 이전하고 미국은 미주위원부로 개칭하다.
1950. 6 6·25 동란으로 피해와 대응
임원 백인제, 이광수 등 많은 동지가 피납, 피살되고 본부의 문서, 비품과 도서 등이 손실되다. 부산에 임시 본부를 설치하고 계속 동하다.
1954. 4 시민학생 공개강좌로 '금용개척자강좌' 개강
1954년 4월 9일부터 매주 금요일에 강좌를 개최하여 1996년 9월말 현재 1,400회를 돌파하다.
1954. 9 잡지<새벽>창간
1963. 8 청소년 학생운동으로<아카데미 운동>전개
서울에서 '청년 아카데미'와 '대학생 아카데미', '고등학생 아카데미'를 창립. 이후 30년간 전국 주요 도시 학교에 아카데미가 조직되어 수만명의 회원을 배출하다.
1963. 10 서울 및 부산 분회 창립
최초의 지방조직으로 서울과 부산에 분회가 발족되고 이후 인천, 대전, 대구, 광주, 전주, 춘천, 진주, 제주 등 주요 도시에 분회가 설립되다.
1963. 11 흥사단 창립 50주년 기념식
'반세기의 횃불, 민족의 길잡이'라는 표어를 걸고 11월 9일부터 3일간 창립 50주년 기념 행사를 개최하다.
1964. 4 기관지 월간 <기러기> 창간
1964. 6 <흥사단 50년사> 발간
1969. 8 문교부에 사단법인 흥사단 등록
1977. 9 서울 종로구 동숭동에 새 회관 완공, 이전
1949년부터 본부로 사용하던 을지로(명동)의 대성빌딩을 처분하고, 구 서울대 문리대 자리인 동숭동에 현재의 회관을 완공하고 이전하다.
1983. 6 흥사간 출판부 등록
출판사업을 등록하고 <도산전기>외 수십 종의 도서를 발간하다.
1986. 1 <흥사단 운동 70년사> 발간
1989. 6 부설 도산아카데미연구원 개원
민족문제, 통일문제 등의 연구를 목표로 단우와 일반인을 회원으로 설립하다.
1991. 1 제 1차 흥사단 발전 5개년 계획 수립 시행
발전기획특별위원회에서 이념, 조직 사업 등 각 분야별로 5개년 발전계획을 마련, 시행에 들어가다.
1992. 5 부설 청소년연구원 개원
청소년문제 조사연구 사업, 청소년 상담, 청소년 지도 육성에 관한 정책 및 프로그램 개발 등을 목적으로 설립하다.
1993. 5 흥사단 창립 80주년 기념 대회
1993. 5 부설 강서청소년회관 개관
서울시 강서구로부터 회관 위탁 운영 법인으로 선정됨에 따라 흥사단 부설기관 으로 개관하다.
1993. 12 사단법인 흥사단 지부 등록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지부를 법인지부로 등록하다.
1995. 10 청소년자원봉사센터 개설
청소년 자원봉사 활동을 촉진키 위해 본부와 주요지부에 설치하다.
1996. 1 재단법인 도산청소년재단 설립
흥사단 후원재단 설립 규정에 따라 청소년 수련활동 및 문화활동 지원을 목적으로 서울특별시에 등록하다.
1996. 5 창립 83주년 기념 전국대회 개최
500여명의 단우와 아카데미회원이 참가한 가운데 충북 청주에서 '참여와 봉사, 이웃과 함께 겨레와 함께'라는 표어를 내걸고 전국대회를 개최하다.
창립자 도산 안창호 선생
민족의 선각자, 사상가, 국민교육자, 뛰어난 웅변가, 정치가로서의 도산 안창호 선생의 일생을 애국 애족 애민의 삶이었다. 민족의 스승 도산은 민족 역사상의 가장 어려웠던 시대에 태어나 가장 모범적인 생애를 살다 갔다. 1878년 11월 9일 평안남도 대동강 하류 도롱섬에서 안흥국의 3남으로 태어나 1938년 3월 10일 서울대 부속병원에서 서거라기 까지 만 59년 4개월위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도산은 어릴 때 할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웠고, 서당의 선배인 필대은에게서 신사조를 전수받았다. 19세의 청년 도산은 독립협뢰에 가입하고, 독립 협회 관서지부를 조직하였으며, 평양 쾌재정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탁월한 웅변으로 명성을 올렸다. 그는 국민 계몽과 교육을 위해 21세 때 점진 학교, 30세때 대성학교, 47세때 중국 남경에 동명학원을 설립했다. 그는 뛰어난 조직가로 1907년 29세 때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를 결성하여 구국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09년에 청년학우회, 1912년 대한인국민회, 1913년에 흥사단, 1928년에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엿다. 그는 30세가 되던 1908년 평양, 서울, 대구에 태극서관을 세울 것을 계획하고 국민문화 향상을 위한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또한 평양 마산동에 도자기 회사를 설립하여 산업을 일으키는 운동에 모범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국내와 미국, 중국에서 민족독립과 교포들의 생활향상을 위해 활약하였고 1919년에 상해 임시정부 내무총장을 지냈으며 1923년에는 대독립당을 결성하고 중국 남경에 독립운동 근거지로서 이상촌 건설을 시도하였다. 도산의 60평생은 나라사랑, 겨레사랑의 표본으로서 오늘날 정치, 사회, 교육, 문화, 산업 등 많은 영역에 그 영향이 미치고 있다.
흥사단 가입 안내
흥사단의 이념과 목적에 공감하는 사람은 누구나 흥사단에 가입할 수 있다. 흥사단은 성실하게 자기수련을 하며 민족과 사회를 위해 봉사하려는 뜻있는 분들을 환영한다.
▶입단지원 - 입단을 원하는 사람은 단우의 소개로 단우들이 모이는 집회에 방청하거나 단의 출판물을 읽어 입단의 결심을 한다. 입단결심이 서면 입단원서와 입단금을 소속 지부에 제출한다.
▶입단승인 - 입단원서를 제출한 사람에 대하여 지부 임원회의 승인으로 입단이 결정된다.
▶입단식 - 입단승인을 받은 후 단우 월례회, 아카데미 정기집회, 연계행사 등 공식 집회에서 입단식을 거행한다.
* 단우 이외에 일반회원으로 참여를 원하는 사람은 소정의 입회원서를 작성하여 지부나 부설기관 등에 제출하면 된다. 일반회원은 일반 시민과 청소년 중에서 자원에 의해 흥사단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이다.
흥사단 약법
1913. 5. 13제정
1996. 12. 21 7차개정
전 문
오랜 전통을 가진 우리 민족이 발전적인 민주사회를 이룩하려면 먼저 국민 각자가 올바른 정신적 자세와 부흥 의욕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정신적 자세는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등 사회 모든 분야의 여건의 변화에 영향을 받으나 사람은 또한 환경을 개선 창조하는 원동력을 가졌다.
그러므로 민족을 부흥시키려면 참되고 진취적이며 협동적이고 용기있는 일꾼들이 민족적 사명감을 가지고 실천, 봉사하여야 하며 이런 일꾼의 양성을 위한 의식적이요 계속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 주장한 구국이념으로서 민족을 살리는 참된 길임을 확신하는 우리는 자신의 사회적 직무와 위치에 구애됨이 없이 흥사단 운동에 평생을 바치기로 이에 동맹한다.
이 름
제 1조 본단의 이름은 흥사단이라 한다.
목 적
제 2조 본단의 목적은 무실역행으로 생명을 삼는 충의남녀를 단합하여 정의를 돈수하며, 덕, 체, 지 삼육을 동맹수련하여 건전한 인격을 지으며 신성한 단체를 이루어 우리 민족 전도번영의 기초를 수립함에 있다.
실무와 공약
제 3조 본단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훈련을 실시한다.
1. 무실역행 충의용감의 정신으로 덕성을 함양하며 신체를 단련하여 기력을 가장케 하며 전문지식 또는 생산기능을 습득하여 건전한 인격을 작성케하는 일.
2. 신의를 확수하고 규율에 복종하며 호상애호하며 환난상구하여 신성한 단체를 조성케 하는 일.
3. 자주적 정신과 자치적 능력을 배양하며 사회식견과 대공의식을 육성하여 국민적 품격을 향상케 하는 일.
제 4조 본단의 목적을 추진하기 위하여 민력증강에 필요한 각양 민중운동을 전개하며 단우로 하여금 이에 적극 참가하여 봉사적 생활을 체험케한다.
제 5조 전 2조의 실무를 추진하는 필요에 따라 각종 문화회관과 사회사업을 경영하며 모범 부락, 직업학교 등을 설치할 수 있다.
제 6조 본단의 운동의 항구성에 비추어 본단은 정치적 활동에 관여하지 아니한다. 단, 단우는 개인의 자격으로 그 소신과 양심에 비추어 행동하는 자유가 있다.
제 7조 단우의 결의를 부단 제성하기 위하여 공약을 정하고 이를 일상생활의 규범으로 한다.
1. 무실역행, 충의용감의 정신으로 부단히 자아를 혁신하자.
2. 동지를 사랑하며 신의를 확수하며 환난상구하자.
3. 단을 위하여 일심하며 복종하며 희생하자.
4. 범사에 청백하며 맡은 책임을 완수하자.
5. 대공복무의 정신으로 국가 민족을 위하여 헌신하자.
기관과 조직
제 8조 본단 본부에 다음의 기관을 둔다.
1. 공의회는 공의원 20명 이상을 두어 본단의 일체 입법 사항을 의결한다.
2. 이사회는 이사원 12명 이상을 두어 본단의 사업과 서무를 집행하며 재정을 맡아 처리한다.
3. 심사회는 심사원 4명 이상을 두어 본단 각급 기관의 업무 감독, 재정 감사와 상벌 사항을 맡아 처리한다.
제 9조
1. 공의회의 결의로 먼 지역의 위원부를 두어 자치하게 할 수 있다.
2. 공의회의 결의로 중요 지역에 지부를 둘 수 있다.
3. 위원부, 지부 밑에 분회를 둘 수 있다.
4. 통상단우의 수가 30명 미만인 지부는 예비지부로 한다.
5. 지부는 공의회가 정하는 조직규정에 따라 독자적 규약을 정하고 임원을 선임한다.
6. 본부, 위원부, 지부는 학생과 청소년 수련조직으로 아카데미를 설치할 수 있다. 아카데미에 관한 규정은 공의회가 제정 실시한다.
제 10조 본부 이사회와 지부는 공의회의 승인을 얻은 규정에 의하여 분과위원회와 사무처 및 지방 사무국을 둘 수 있다.
제 11조
본단의 본부는 서울에 둔다.
선거와 임기
제 12조 각 기관의 선거와 임기는 다음과 같다.
1. 공의원은 통산단우의 투표로써 선거하되 그 임기를 2년으로하여 매년 반수씩 교체하며 공의회장 1인을 호선하되 그 임기를 2년으로 한다.
2. 공의원의 선거에 관한 규정은 따로이 정한다.
3. 이사원과 심사원은 공의회에서 선임하되 그 임기를 2년으로하여 매년 반수씩 교체하며 이사회장 1인, 심사회장 1인은 공의회에서 선임하되 그 임기를 2년으로 한다.
4. 공의회, 이사회, 심사회에서 부회장 1인을 각각 호선하되 그 임기를 2년으로 한다.
5. 공의원, 이사원, 심사원은 겸임하지 못한다.
단 우
제 13조 본단의 단우는 예비단우, 통상단우, 특별단우, 명예단우로 한다.
1.예비단우는 본단 강령에 공명하여 입단절차를 밟는 사람으로 한다.
2. 통상단우는 만 18세 이상된 예비단우로 1년 이상 의무에 부지런한 이, 특별단우 및 명예단우로 2년 이상 재적한 이 중에서 서약절차를 밟는 사람으로 한다.
3. 특별단우는 본단 사업을 후원하는 인사 중에서 이사회, 위원부 및 지부의 결의를 거친 사람으로 한다.
4. 명예단우는 본부 이사회가 추대하거나 또는 이사회의 승인을 거쳐 위원부 및 지부가 추대한다.
제 14조 통상단우는 훈련과목 수습 성적에 따라 급수를 가질 수 있으되 그 규정은 이사회가 정한다.
제 15조 예비단우가 되고자 하는 이는 소정의 입단원서를 작성하여 지부에 제출하고 그 임원회의 승인을 거쳐 입단한다.
의무와 권리
제 16조 예비단우와 통상단우의 의무는 다음과 같다.
1. 본단 약법, 규정 및 결의에 복종하는 의무.
2. 본단 각 집회에 출석하는 의무.
3. 본단 재정을 부담하는 의무.
4. 본단 교육 및 훈련 과정을 정수하는 의무.
5. 본단 기관잡지를 구독하는 의무.
제 17조 단우의 권리는 다음과 같다.
1. 통상단우는 선거, 피선거, 제의 및 표결권이 있다.
2. 예비단우, 특별단우, 명예단우는 발언권만 있다.
회 의
제 18조
1. 공의회는 매년 1차 정기로 공의회장이 소집하고 임시회는 회장이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 또는 공의원 3인 이상의 요청이 있을 때 회장이 소집한다.
2. 공회장이 유고하거나 위에 말한 회의 소집 요청에 불응할 때는 이사회장 또는 심사회장이 회의를 소집하고 임시 의장을 선거하여 회의를 진행할 수 있다.
3. 이사원, 심사원은 공의회에 참석하여 발언할 수있다.
제 19조 이사회는 수시 이사회장이 소집한다. 이사회장이 유고할 때는 이사원 중 한사람이 소집하고 임시의장을 호선하여 회의를 진행할 수 있다.
제 20조 심사회는 심사회장이 수시 소집한다. 심사회장에 유고할 때는 심사원이 회의 소집을 요청하였으나 회장이 불응할 때는 심사원 중의 한 사람이 회의를 소집하고 임시 의장을 호선하여 회의를 진행할 수 있다.
제 21조 단우의 수련과 단결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본부 또는 위원부는 해마다 전국대회 또는 지역대회를 개최한다.
제 22조
1. 본단의 재정은 다음과 같다.
가. 입단금은 각 지부의 기금으로, 서약금은 본부의 기금으로 편입한다.
나. 대회기부금은 본부의 사업기금으로 적립하고 공의회가 의결하는 예산에 의거하여 사용한다.
다. 기관잡지 대금은 본부의 출판사업비로 수입하여 사용한다.
라. 의무금은 각 지부의 사업비와 경상비로 사용한다.
마. 경위금은 각 지부에서 적립하여 경위사업에 사용한다.
바. 기본금에서 생기는 과실은 공의회가 결정하는 예산에 의하여 본부나 지부의 사업비, 경상비 등으로 사용한다.
사. 본부, 지부는 사업비와 경상비 지출을 위하여 의연금은 모집 사용할 수 있다.
2. 입단금, 서약금의 금액은 공의회가 결정한다.
3. 의무금, 경위금의 금액은 지부가 결정한다.
4. 공의회의 결의로 재정 수입의 일부를 본부 기금으로 편입할 수 있다.
5. 이상에서 말한 각종 재산관리는 사단법인 흥사단에서 한다.
상 벌
제 23조 단우 중 모범이 되거나 공적이 있는 사람은 본부 심사회 또는 하부조직의 결의로 포상할 수 있다.
제 24조 단우가 의무를 이행하지 아니하거나 본단 목적에 위배되는 행동을 하거나 본단 체면을 손상한 경우에는 심사회 또는 지부의 결의로 경고, 견책, 정권, 출단 등을 행한다. 이상 징계 처분은 받은 단우는 심사회에 항고하거나 재심을 청구할 수있다.
부 칙
제 25조 본 약법의 수정은 공의회 의원 재적 3분의 2이상의 찬동을 얻어야 한다.
제 26조 본 약법에 관련된 각종 규정은 이사회가 제정 실시하되 공의회는 이를 수정 또는 취소할 수 있다.
제 27조 본단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사단법인 흥사단을 법인체로 둘 수 있다.
<부록>
서 약 문
나○○○는(은) 오늘부터 흥사단의 정신을 생명으로 삼고 동맹수련과 민중운동에 몸소 참가하여 우리 민족을 구하는 거룩한 사업에 내 일생을 바치며 여러 동지들과 함께 괴로우나 즐거우나 처음의 뜻을 변함없이 끝까지 분투 노력하기를 기약함으로써
첫째, 무실역행, 충의용감의 정신으로 부단히 자아를 혁신하기를 맹약하오며,
둘째, 동지를 사랑하고 신의를 확수하며 환난상구하기를 맹약하오며,
셋째, 단을 위하여 일심하며 복종하며 희생하기를 맹약하오며,
넷째, 범사에 청백하며 맡은 책임을 완수하기를 맹약하오며,
다섯째, 대공복무의 정신으로 국가 민족을 위하여 헌신하기를 맹약하옵니다.
년 월 일
성명 인
의식과 상징
1. 필요에 따라 본단의 이름위에 "민족부흥운동"이라는 관사를 사용할 수 있다.
2. 본단의 상징은 기러기로 한다. 기러기는 떼 지어 날으므로 단결의 뜻을 나타낸다.
3. 본단의 기장은 사(士)자를 기러기 모양으로 도안하여 다음과 같이 정한다.
4. 기장을 단추로 만들 때에는 윤곽을 두지 않고 황색 또는 금빛으로 하되 날개의 길이를 5mm내외로 한다.
5. 단기는 네 가지 색깔로 하되 황색은 무실, 홍색은 역행, 백색은 충의, 청색은 용감의 정신을 나타낸다.
원형속에는 백색, 사(士)자는 홍색
가나 : 나다 = 3 : 2
가나 : 가아 = 4 :1 (야)는 전체의 중앙
원의 크기는 (나다)의 1/2로 하고 중심점은 (아아)(어야)의 교차점에서 왼쪼긍로(어야) 1/20 옮겨져 있다. 그 직경은 (아아)의 외반, 사(士)자의 날개 끝이 (어야)선상에서 원 둘레에 거의 닿게 한다.
6. 단대는 넓이 9cm, 길이 170cm 가량으로 하고 양끝 5cm를 삼각형으로 한다.
7. 단대의 색깔은 다음과 같이 정한다.
통상단우 - 황과 홍 예비단우 - 황과 청
특별단우 - 황 명예단우 - 청
8. 명패는 넓이 7cm, 길이 4cm 가량으로하여 다음과 같이 구별한다.
통상단우 - 황 예비단우 - 홍
특별단우 - 청 명예단우 - 백
9. 서약례와 거수례때의 거수방법
(가) 오른손의 손가락을 붙여 새끼손가락이 앞으로, 엄지가 뒤로가게하여
(나) 팔꿈치를 옆으로 벌리지 않고 수직면에 들어
(다) 손전체가 얼굴보다 앞에 있고 손 끝이 이마의 중심까지 올라가게 한다.
10. 동지사이의 인사는 거수로 하고 악수는 하지 않는다. 윤회악수때에는 거수를 생략한다.
11. 동지간의 호칭은 "군(君)"으로 한다.
흥사단은?
흥사단 은 1913년 5월 1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에 의해 창립되었다.
일제 치하에서 나라를 되찾기 위한 민족의 실력 양성에 힘썼고 해방 후에는 민족부흥에 이바지 할 일꾼 양성과 민주사회 건설을 위한 시민 교육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흥사단은 특히 2천년대 한국의 주인이 될 청소년들이 참되고 진취적이며 협동적이고 용기있는 일꾼으로 성장 할 수 있도록 다양한 수련 활동과 사회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흥사단은 서울에 본부가 있고, 전국 20여개 주요 도시에 지부가 조직되어 있으며, 흥사단 의 청소년 학생운동은 아카데미 클럽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중고등학생, 대학생 및 청년 아카데미가 전국의 학교 또는 지역 단위로 조 직되어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도산의 사상
도산의 사상도산이 활동하던 시기는 우리 겨레가 오랜 기간의 봉건 생활에서 쌓여온 여러 폐단들을 미처 다 해결하지 못한 가운데, 다시 일제의 침략을 받아 그 지배 아래 신음하던 때였다. 그러므로 하루 빨리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나 민족 독립국가를 세우고, 근대적 발전을 이루어 세계사의 진전에 발맞춰 가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이 같은 과제에 대응해, 도산의 사상적 모색 또한, 우리 겨레의 독립과 번영이라는 데 초점이 모아졌다. 따라서 그 본질은 역시 한국 근대 민족주의라는 한 마디 말 속에 집약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편의상, 그의 사상은 크게 세 갈래로 나누어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이미 앞에서 말했듯이, 독립전쟁준비론과 민주국가건설론과 흥사단운동론이 그것이다.
가. 독립전쟁 준비론
도산의 독립 운동 방안은 흔히 '준비론'으로도 불리는 독립 전쟁 준비론이었다. 그는 귀국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907년 5월 12일 수많은 청년 학생들을 앞에 두고, 그의 명연설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이른바 삼선평연설(三仙坪演說)을 행하였다. 본래 약소국이었던 일본이 38년 간의 오랜 준비 끝에 마침내 러시아를 이긴 예를 들면서, 그는 우리의 국권을 침해하는 일본과 언젠가는 치뤄야 될 전쟁에 대비해 반드시 승리할 수 있도록 다 함께 힘을 모아 준비에 나서자고 역설했다.
그가 한말 미국에서 돌아와 신민회 결성을 제안하면서, 처음으로 주장하기 시작한 독립전쟁 준비론의 구체적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1) 을사조약으로 말미암아 일제의 보호국으로 전락해 버린 우리 민족이 국권을 다시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들과 싸워서 이기는 것뿐이다.
(2) 우리의 힘만으로 강력한 일본을 이기기는 어렵지만, 언젠가 그들이 다른 강대국과 충돌하는 때를 기회로 활용하여 전쟁을 선포하고 참전하면 승전국의 하나가 되어 독립이 가능하다.
(3) 그러므로 장차 반드시 닥쳐올 일본과의 전쟁에 대비해 승전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근대적 실력을 미리 준비해 두자는 것이었다.
국내에서 오래 떠나 있던 그가 신민회의 결성에 비교적 쉽게 성공한 것을 보면, 그의 독립 전쟁 준비론이 당시의 애국지사들에게 매우 큰 설득력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다. 즉 그가 귀국하기 전의 국권회복운동이 이미 그 한계를 뚜렷이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1905년 11월의 을사조약 체결로부터 시작된 한말 국권회복운동은 주로 유생(儒生)들이 주도한 의병운동과 신지식인 지사(志士)들에 의한 계몽운동의 두 갈래로 전개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우선 국권회복이라는 공통의 목표를 갖고는 있었지만, 그 방법론과 지향이 달라 서로를 비판하며 반목하고 있었다. 또 각각의 내부를 들여다 볼 때도 큰 약점들을 갖고 있었다.
먼저 의병 운동의 경우에는, 일제와의 직접적인 무력 대결을 그 본질로 하면서도, 장비와 훈련에서 전근대적 낙후성을 면하지 못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유생 지도부와 평민 대중들 사이에 신분적인 이질
감이 컸고, 전국적 통일조직이 없는 분산활동으로 일본에 비해 실질적인 전투력은 매우 약했다. 특히 싸움에 나선 유생들은 성리학에서 강조하는 의리관념에 지배되어 승패를 절대적으로 중요시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현실적으로는 이미 패배를 각오한 투쟁이었던 것이다.
반면, 계몽운동은 도덕과 의리에 못지 않게 시기와 역량을 헤아리는 이른바 탁시양력(度時量力)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하고는 있었으나, 침략적 제국주의 시대에 직면하여 근대적 무력을 앞세운 일제에 비해 그 힘이 너무도 미약했다.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와 서우학회(西友學會) 그리고 한북학회(韓北學會) 등의 단체들이 비록 국권회복을 표방하며 활동하고 있었지만, 그에 관한 아무런 구체적 전망을 갖고 있지 못했다. 단지 실력양성론에 입각해 주로 교육을 통한 대중계몽에 종사하는 한편, 정부를 상대로 몇 가지 건의 및 청원을 했는데, 물론 아무런 성과도 기대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일제의 침략을 저지하고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의병운동과 계몽운동의 장점을 계승하면서, 동시에 그 한계들을 보완할 수 있는 새로운 논리의 개발이 시급히 요청되고 있었다. 도산의 귀국은 이같은 요구가 절실하던 때의 일이었는데, 1907년 초 귀국 직후 그는 당시의 객관적 요청에 부응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도산이 제안한 독립전쟁 준비론에 입각해 결성된 한말 신민회의 구국운동은 끝내 우리 나라의 식민지화를 막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그의 일관된 주장이었던 독립전쟁준비론은 식민지 시대의 우리 독립운동에서 여전히 가장 유력한 방안으로 계승되고 있었다.
나. 민주국가 건설론
도산은 우리 겨레가 하루빨리 일제를 몰아낸 다음에는 살기 좋은 나라를 세워 영원토록 번영을 누리면서 세계평화에도 기여해야 한다는 큰 희망을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의 이상적 국가에 대한 간절한 꿈은 때에 따라 여러 가지 다른 말로 표현되어 나타나곤 했다. 한말에는 '독립 자유의 신국가' '유신(維新)한 자유문명국'이란 말을 썼으며, 3·1 운동 후 임시정부에 참여하면서는 '모범적 공화국의 건설'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또 그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잃어버린 옛나라를 찾아 복스러운 새나라를 세우자'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기초로 한 신민주국(新民主國)'이라는 표현도 볼 수 있다. 이들 모두가 그의 이상적인 민족국가에 대한 진지한 구상 속에서 나온 말들이었다.한말 일제시기에 도산이 염원했던 자주독립의 민족국가는 물론 대한제국의 계승이나 부활은 아니었다. 그가 세우려 했던 것은 당연히 입헌공화제의 근대민주주의 국가였다. 그는 이미 앞에서 말한 바 있는 삼선평연설을 통해, 군주제국가에 대한 철저한 비판의식과 국민주권사상을 명확히 보여 주었다. 그는 청년학생들에게 망국의 원인이 국가를 왕의 개인소유물처럼 여겨왔던 절대군주제의 낡은 정치제도에 있었다고 날카롭게 지적하고, 이제는 종래의 신민의식(臣民意識)에서 벗어나 모든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라는 국민의식을 확고히 할 것을 강조하였다. 심지어, 그는 아직도 대한제국의 관리가 되겠다고 생각하는 청년이 있다고 하면, 이는 망국의 심부름꾼이나 되려는 것이라면서 마땅히 신국민이 되어 신국가건설의 간성이 되라고 권고하였다.
그가 주도해 만든 신민회의 정치적 목표가 일제의 침략을 물리친 다음, 전혀 새로운 공화국가를 세우려 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때 당시의 국호가 대한제국이었고 또 도산이 늘 우리 스스로를 일컬어 대한이라는 말을 썼던 사실을 감안해 보면, 곧 그가 세우려 했던 국가는 대한민국(大韓民國)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도산의 대한민국 건설의 목표는 한말 신민회 운동을 통해서는 결국 실현되지 못하였다. 대신 10여 년 후 상해에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로 극히 불완전하게나마 실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1919년 6월 28일 임정의 각료로 추대된 인물들 가운데 유일하게 내무총장에 취임한 그는, 취임연설에서 항구적 세계평화에 기여할 수 있는 '모범적 공화국'을 건설하자고 주장하였다.
한말 신민회 때부터 3·1 운동 후 임정 시기까지 도산이 생각했던 대한민국의 정치.사상적 성격은 특히, 미국을 모델로 삼은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임시정부의 헌장에는, 사유재산의 보유와 영업활동의 자유 및 언론.집회.결사.출판의 자유 등 국민들에 대한 제반 시민적 자유의 보장이 명기되어 있었다. 즉, 자본주의체제의 바탕 위에서 각종의 시민적 자유가 법률로 보장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모습으로 나타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 도산의 독립국가 구상은 자유민주주의의 대한민국을 건설하려는 것이었다고 하겠다.
그런데 시민적 자유 민주주의 국가를 지향했던 도산의 건국구상은 1920년대 중후반에 이르러 사회 민주주의 국가건설론으로 큰 변화를 겪게 된다. 그 같은 변화의 직접적인 계기는 1926년 7월 이후 중국에서 그가 앞장섰던 좌우합작의 대독립당운동에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
2∼3년 간의 대 독립당운동 과정에서 이루어진 도산의 새로운 독립국가 구상은 1927년부터 그가 주창했던 대공주의와도 직결되어 있는데, 정치적 자유를 근본으로 하면서도 정치·경제·사회적 평등을 매우 강조하는 특징을 가졌다.
대공주의는 도산이 독립운동가들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로 분열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정립한 것으로, 민족국가의 틀 속에서 사회주의의 이념을 최대한 수용하기 위해 정치·경제·교육의 평등을 강조한 평등주의적 사상 체계였다. 민주주의가 본래는 자유와 평등을 함께 담고 있는 개념이었지만, 역사적으로는 그것이 주로 부르주아 시민계급의 자유를 보장하는데 그친 한계를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그는 전민족을 대상으로 정치적 자유는 물론이고, 경제사회적 평등의 실현을 더욱 비중 있게 반영해 좌우가 합작할 수 있는 민족운동 목표를 설정하려 했던 것이다. 즉, 정치적으로 보통선거제, 경제적으로는 토지 및 대생산기관의 국유제와 교육에서의 국비 의무교육제 실시로 전민족 평등을 보장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안으로는 정치적 자유를 바탕으로 하되 특별히 사회경제적 평등이 강조된 신민주국을 건설하고, 나아가 밖으로는 민족간 국가간 평등에 기초해 불평등한 제국주의적 세계 질서를 극복함으로써 평화세계를 지향한다는 것이 1920년대 후반 이후 도산의 새로운 건국론이었다. 이 점을 특히 현대국가에서의 체제와 이념이라는 면에서 말하면, 순수 자본주의 체제나 전체주의적 공산주의 체제의 국가와는 구별되는 사회 민주주의적 성격의 국가 건설론이라 할 수 있다.
도산의 대공주의에 입각한 사회 민주주의적 후기 독립국가 구상은 먼저 한국독립당의 강령에 반영되었고, 그 후에도 임정을 비롯한 민족주의 각 단체의 정치사상이 되었다. 그러나 해방 후 임정세력이 외세와 극좌·극우세력에 몰려 몰락함으로써, 현실정치에 제대로 이어지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다. 흥사단 운동론
도산은 그의 생애를 통해 한말 신민회 시절 평양에서 세운 대성학교(大成學校)를 비롯해 몇 개의 학교를 세웠으며, 동시에 청소년 훈련을 위한 단체로 청년학우회와 흥사단을 별도로 만들어 이끌었다. 특히 도산이 1913년 미국에서 조직한 흥사단은 한말의 청년학우회를 계승한 단체로서,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청년학우회와 흥사단을 만든 목적은 그가 직접 작성한 규약 속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고 볼 수 있다. 흥사단 약법의 목적 조항은 다음과 같다.
본단의 목적은 무실역행(務實力行)으로 생명을 삼는 충의남녀(忠義男女)를 단합하여 정의(情誼)를 돈수(敦修)하고, 덕.체.지 삼육을 동맹수련(同盟修練)하여 건전한 인격을 작성하고, 신성한 단결을 조성하여 민족전도대업(民族前途大業)의 기초를 준비함에 있음
도산이 청년학우회와 흥사단을 설립한 것은 위에서 보듯, 주로 동맹수련이라는 방식을 통해 건전한 인격과 강한 단결력을 가진 인물들을 양성함으로써 민족전도대업의 기초로 삼겠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기초'라는 말의 구체적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따라서 흥사단운동의 목적을 좀더 분명히 알기 위해서는 우리 겨레의 독립과 번영을 궁극적 목적으로 했던 도산의 민족운동론 체계에 대해 알아둘 필요가 있다. 그는 작은 수첩에 그의 민족운동론 체계를 도표형식으로 잘 요약해 두고 있었다. 이를 통해 그의 민족운동론 체계를 살펴보면, 그 속에서 기초로서의 흥사단운동이 무엇을 뜻하는지 쉽게 알 수 있다.
그는 우리 민족운동에 대해, (1) 기초 (2) 진행준비 (3) 완전준비 (4) 진행결과 (5) 완전결과라는 다섯 단계를 설정해 놓고 접근하고 있었다. 이를 그의 기록에 따라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기초는 신애.충의.용감.인내 등의 덕목을 갖춘 인물들을 공고히 단결하게 해 민족운동의 간부들로 육성하는 단계이다.
(2) 진행준비는 위의 간부들이 조직적으로 학업단(學業團)과 실업단(實業團)을 만들어 활동하는 단계이다.
(3) 완전준비는 학업단과 실업단의 활동에 의해 각 부문의 전문인재가 배출되고 재정이 비축되는 단계이다.
(4) 진행결과는 드디어 독립전쟁을 결행하고 동시에 그 과정에서 민족정권을 수립하는 단계이다.
(5) 완전결과는 마침내 일제를 구축(驅逐)해 광복을 실현하고 이상적인 민족국가를 건설하는 단계이다.
이제 이해의 편의를 위해 위의 다섯 단계를 셋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기초단계는 위의 (1)에 해당되는데, 자질 있는 청년들을 모아 조직적으로 인격훈련과 단결훈련을 시켜 민족운동의 간부집단으로 양성함을 말한다.
둘째, 준비단계는 위의 (2)와 (3)인데, 기초단계를 통해 배출된 핵심 인물들이 조직적인 교육 및 경제 활동으로 장차의 독립운동과 독립 후의 국가 건설에 소요될 전문 인재 및 재정을 확보해 가는 것을 말한다.
셋째, 운동단계는 위의 (4)와 (5)로서, 준비단계에서 확보된 재정과 인재를 바탕으로 독립전쟁을 결행함과 동시에, 민족정권을 세운 다음, 광복을 달성하고 번영된 민족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말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흥사단 운동론은 도산의 총체적 민족운동 구상 속에서 가장 기초를 이루고 있었다. 요컨대, 그것은 장차 독립운동과 건국사업에 헌신할 지도적 인물들을 양성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이 때 그가 민족운동의 지도적 인물들에게 가장 중요하게 기대했던 것은, 건전한 인격과 그에 바탕을 둔 단결의 능력이었다. 그리하여 인격훈련과 단결훈련이 그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라. 도산이 오늘에 주는 교훈
도산은 말 그대로 오로지 나라와 겨레를 위한 삶을 살았다. 그의 60 평생은 그 전반은 나라를 지키기 위한 노력에 두어졌으며, 후반은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한 싸움에 바쳐졌다.
"개인은 제 민족을 위해 일함으로 인류와 하늘에 대한 의무를 다한다." 라고 애국애족적 인생관을 밝힌 바 있는 그는, 실제로 평생을 자신과 가정의 편안함을 돌보지 않고, 오직 위기에 처한 나라와 겨레를 구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쳤다. 그리하여 "밥을 먹어도 독립을 위해, 잠을 자도 독립을 위해" 노력하다가 마침내 두 차례의 옥살이 끝에 타계했던 것이다. 말로써만이 아니라 몸으로 직접 앞장서 실천하는 모범을 보여준 진정한 애국적 지도자였다.
그는 죽은 뒤에도 일제의 엄격한 감시 때문에 겨우 망우리의 허름한 묘소에 묻힐 수 있었다. 해방이 되어서야 비로소 기념사업회가 만들어져 전기 발간 등 그를 추모하는 여러 사업이 펼쳐졌으며, 1963년 정부는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하였다. 또 1973년에는 서울에 그를 기념하는 도산공원이 만들어져 그의 무덤도 옮겨졌다. 한편 일찌기 그가 민족운동간부의 양성을 위해 만들었던 흥사단이 지금까지도 활동을 계속하고 있으며, 그의 사상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해 도산 사상 연구회도 만들어져 있다.
도산이 세상을 떠난 지 이미 반 세기가 지났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완전히 과거의 인물만은 아니다. 그의 독립운동상의 업적은 지난 일로 치더라도, 그의 인격과 사상은 아직도 우리에게 살아 있는 유산이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 나라 근.현대의 여러 인물들 가운데서 가장 성실한 자세와 정직한 마음씨를 가졌던 참으로 인격적인 지도자로 알려져 있다.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그를 '겨레의 스승'으로 부르며 추앙하는 까닭은 물론 그의 고매한 인격을 길이 본받자고 하기 때문이다.
그는 청년학생들에게, "죽더라도 거짓이 없으라, 농담이라도 거짓말을 말아라, 꿈에라도 성실을 잃었거든 통회(痛悔)하라"고 가르쳤다. 심지어 그는 일제와 싸우는데 있어서조차도 떳떳하고 정당한 방법으로 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가 하려고 하는 위대하고 신성한 사업의 성공을 허(虛)와 위(僞)의 기초 위에 세우려고 하지 말고, 진(眞)과 정(正)의 기초 위에 세우려고 하자"고 했다. 그는 어려운 시기에 험난한 투쟁의 일생을 살면서도 한결같이 성실과 정직을 몸으로 실천함으로써 민족의 사표가 되기에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인격적 모범을 보여 주었다.
한편, 오늘날 우리에게는 민주주의의 완전한 실현과 민족통일의 평화적 달성이라는 과제가 주어져 있다. 자유와 평등이 조화를 잘 이루어 모든 국민이 자유롭고 고르게 살 수 있는 참된 민주주의 국가야말로 우리 모두가 바라는 사회이며, 그것은 곧 도산이 그렸던 바람직한 민족국가의 모습이기도 했다. 동시에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이질적인 양체제를 접목시켜 평화적인 방법으로 분단을 극복할 수 있는 통일이념의 모색이 시급한 과제로 대두되어 있다.
이 때 우리는 도산의 주장들 가운데 하나인 민주국가 건설론의 내용과 그 변화과정에 대해 새삼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특히 그가 독립운동가들 사이의 좌우 이념 대립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하나로 대독립당 운동을 전개하던 과정에서 주장한 대공주의 사상은, 오늘의 민주화와 민족통일이라는 과제를 푸는 데도 큰 참고가 되리라 생각된다.
그의 흥사단 운동론은 당시에는 비록 건전한 인격을 갖춘 민족운동의 간부양성에 그 초점이 있었다. 하지만, 거기서 도산이 강조했던 무실.역행.충의.용감의 네 가지 덕목과 주인의식.민주적 단결 등의 정신은 오늘날 민주사회의 지도자는 물론 일반 시민들이 공통적으로 가져야 할 가치이기도 하다. 따라서 소수 지도자 양성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거의 그대로 민주 시민 교육의 지침으로도 활용될 수 있다고 여겨진다.
오늘날 우리는 단지 도산의 지난날 업적을 기리는 데서 그칠 것이 아니라, 그의 높은 인격을 본받는 동시에, 그가 남긴 사상의 참뜻을 되살리는 데 더욱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도산의 생애와 업적
가. 출생과 성장
도산은 1878년 11월 9일 평양에서 가까운 평안남도 강서군(江西郡)에 있는 대동강 하류의 도롱섬에서 안흥국(安興國)이라는 평민 농사꾼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여덟살까지의 아이 적에는 집에서 글을 배웠고, 아홉 살에서 열세 살 까지는 여느 집 아이처럼 소먹이는 일 등의 집안일을 거들면서 마을의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다.
그런대로 공부다운 공부를 한 것은 열네 살에서 열여섯 살까지의 3년 동안으로 김현진(金鉉鎭)이라는 이웃 마을의 선비에게서 였는데, 물론 당시의 전통적인 학문인 유학이 주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시기에 그는 그의 생애의 방향을 정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끼친 두 사건을 겪었다.
먼저, 같은 서당에 다니던 필대은(畢大殷)이라는 몇 살 위의 동문선배로부터 당시에 새롭게 보급되기 시작하던 신학문에 접하게 된 사실이다.
다음, 그가 열 여섯 살 나던 1894년 평양에서 청일전쟁(淸日戰爭)을 목격한 일이다. 이 때 그는 일본과 청나라가 마음대로 우리 나라에 들어와 싸우는 것은 우리에게 힘이 없는 까닭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필대은과의 뜻깊은 사귐과 청일전쟁을 보며 얻은 깨달음을 통해 그는 그때까지의 평범한 생활을 깊이 반성하였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나라와 겨레를 위해 일생을 바치겠다는 결의를 다지게 되었다.
나. 독립 협회와 공립 협회 활동
평범한 환경에서 태어났던 도산이 우리 나라 근대 민족 운동의 흐름 속에 처음으로 뛰어든 것은 독립협회 활동에 가담하면서부터 였다. 비록 1년여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는 독립협회의 평양지회 설립에 중요 인물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고,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에서의 뛰어난 연설로 상당한 대중적 명성도 얻었다. 그러나 1898년 후반 독립협회운동이 가장 활발했을 때 갓 20세였던 그는 아직 청년 실행간부의 한 사람이었을 뿐 협회의 주요 방침 결정에 직접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주도적인 위치에 있지는 못했다. 반대로 이 때 그는 우리 나라 근대 민족 운동의 큰 봉우리 가운데 하나인 독립협회 지도층의 근대화론과 민주주의 사상 그리고 민족주의에 영향을 받으며 정신적으로 크게 성장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가 나름대로 하나의 독자적인 사회세력을 결집하여 주도하는 자리에 서게 된 것은 미주의 교민사회에서 공립협회를 만든 다음부터였다. 즉 1902년 유학을 위해 미국에 갔던 그는 그곳 동포들의 어려운 처지를 보고 생각을 바꾸어 공부를 포기하고 교민지도에 나섰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막 형성되고 있던 초창기 미국 교민사회에서 대중적 지도자로서 성장해 공립협회의 초대 회장이 되었다. 공립협회는 1905년 4월에 창립되어 그가 귀국하기까지 직접 이끌었던 2년 미만의 단기간에 600명의 회원을 모았다. 또 3층건물을 회관으로 가졌으며, 매월 두 차례 공립신보(共立新報)를 발간해 당시로서는 국내외를 통틀어 매우 힘있는 단체 가운데 하나로 자라났다. 비록 유학이라는 본래의 목적은 이루지 못했지만, 그의 생애에서 공립협회 활동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먼저, 그가 평생을 민족운동에 종사하는 동안 늘 인적·재정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튼튼한 지지기반을 쌓게 되었다. 동시에 그가 전생애에 걸쳐 거의 일관하여 견지했던 민족운동 방안들은 대체로 이때 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 신민회 활동
도산이 미국에 있던 5년 동안 국내정세는 날로 위기가 깊어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동지들과 진지한 상의 끝에 본격적인 구국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귀국하기로 결심하였으며, 1907년 초 귀국 길에 올랐다. 이 때 그의 가슴 속에는 이미 국내에서 전개할 구국운동의 새로운 목표와 방법론과 조직형태가 그려져 있었다. 즉, 민주공화국가건설(民主共和國家建設)이라는 민족운동의 목표와 독립전쟁준비론(獨立戰爭準備論)이라는 국권회복의 방법론과 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 조직안이 그것이었다.
귀국 즉시 그는 양기탁(梁起鐸)·전덕기(全德基)·이동휘(李東輝)·이 갑(李甲)등 국내 신지식인 계열 계몽운동의 핵심인물들을 찾았다. 그의 새로운 구상을 설명하면서 비밀결사를 조직하는 일에 착수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한말 애국지사들의 구국운동을 보이지 않는곳에서 총지휘했던 신민회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신민회의 총감독에는 비록 대한매일신보사(大韓每日新報社)의 총무였던 양기탁이 추대되었지만 그 조직과 활동을 실제로 이끌어간 중심인물은 물론 도산이었다. 이는 곧 그가 마침내 우리나라 근대 민족운동의 중심적인 위치에 서게 된 것을 뜻하였다. 1907년 11월 당시 우리나라를 실질적으로 통치하던 통감 이토가 애국지사들을 달래기 위한 공작의 일환으로 그를 초대해 오랜 시간 면담했던 것도 물론 이 때문이었다. 도산은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신민회를 중심으로 전국의 애국지사들을 규합해 가는 한편, 그들로 하여금 교육·언론·산업 등 여러 부문에 걸쳐 다양한 표현사업들을 벌이게 하였다. 그리하여 1911년 이른바 105인 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당할 때까지, 약 3년간 그가 주도했던 신민회운동은 비록 나라를 지키는 데는 실패하였지만 일제하의 독립운동에 커다란 원동력이 되었다.
라. 대한인 국민회와 흥사단 활동
1909년 10월에 안중근(安重根)이 만주의 하르빈역에서 이토를 총살한 사건이 일어나자 일제는 그 배후인물의 한 사람으로 도산을 지목해 검거하였다. 약 두 달 간 갇혀 있으면서, 그는 심한 고문을 받았지만 끝까지 관련사실이 없다고 버텨 풀려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국내에서는 더 이상 활동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몇몇 동지들과 함께 국외로 망명할 것을 결정했다.
그는 처음 만주와 러시아의 접경지대에 농장을 개척해 독립운동의 기지로 만들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망명한 동지들 간에 의견이 일치되지 않자 결국 그는 가족과 튼튼한 지지기반이 있는 미국으로 가게되었다.
당시 미국에는 그의 도착 직전인 1910년 5월 통합교민단체로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가 만들어져 있었다. 이는 공립협회를 비롯한 미국 본토와 하와이의 각 한인단체가 합쳐진 조직이었다. 처음에는 북미 지방총회와 하와이 지방총회만이 있었으나, 계속하여 시베리아 지방총회와 만주 지방총회도 설립되었다. 그리하여 1912년 11월에는 도산의 주관으로 4개 지방총회 대표자가 모여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결성하고, 그를 중앙총회장으로 선출하였다. 이로써 해외의 전교민이 그를 대표자로 하여 하나의 조직 속에 결집한 셈이었다.
국내가 일제의 완전한 지배하에 들어간 상황에서 도산은 전체 민족을 대신해 해외에 사는 교민들이야말로 현실적인 독립 운동의 기반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우선 해외한인의 총단결을 가장 우선적인 과제로 여겼는데, 이제 그 목표의 일단은 이룬 셈이었다. 중앙총회의 결성선포문에서 "...형질상 대한제국은 이미 망하였으나, 정신상 민주주의 국가는 바야흐로 발흥되며 그 희망이 가장 깊은 이때..."라고 말한 것은 이 같은 그의 뜻이 반영된 것이었다.
어쨌든 해외 한인의 대동단결이라는 과제를 일단 해결한 그는, 다음 해인 1913년 흥사단을 조직하였다. 흥사단은 국내에서 그가 세웠던 청년학우회의 취지를 계승한 것으로 민족운동의 간부를 양성하려는 목적에서 만든 청소년 훈련단체였다. 흥사단은 미국에 본부를 두었는데, 3·1운동 후에는 중국과 국내에도 회원을 확보해 지부를 설치했다.
마. 임시 정부와 국민 대표회 활동
1918년은 특히 약소 민족들에게 세계정세 변화에 대한 기대감이 높았던 해였다. 1차 대전이 끝나고 파리에서 강화회담이 열릴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우리 교민들 사이에서도 독립운동에 대한 열기가 고조되었는데, 이에 도산은 아직 그 시기가 아님을 말하고 좀더 실력배양에 노력할 때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듬해 예상치 못한 3·1운동의 소식에 접하게 되자 그는 일제의 총칼을 무릅쓰고 맨손으로 총궐기한 국내 동포들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독립운동에 착수할 수 밖에 없다고 결심했다. 그리하여 그는 국민회의 대표 자격으로 중국에 건너갔다. 1919년 5월말 그가 상해에 도착했을 당시에는 그곳에도 이미 임시정부가 조직되어 있었으며, 그는 내무총장에 선임되어 있었다. 그는 당초 정부 형식이 아닌 정당 형식의 독립당 결성을 주장했다. 하지만 임시정부 수립은 이미 기정 사실로 되어 있었고, 청년들은 그의 취임을 강력히 재촉하였다.
그는 첫 각료로 취임해 국무총리 대리를 겸하면서, 아직 명의상의 정부에 불과한 임정의 실체를 갖추는 데 전력을 쏟았다. 국민회에서 가져온 자금으로 정부청사를 얻고 각료로 추대된 각지의 인물들을 초치하였으며, 독립신문 발간과 독립 운동 방략 작성을 주도했다.
무엇보다도 이 때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일단 수립된 임정을 권위 있는 전 민족의 최고 지도기관으로 만들어 장기적인 독립운동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상해 임정 외에도 이미 연해주에 대한국민의회 정부가 조직되어 있었고, 서울에서도 한성정부의 구성이 발표되어 있는 실정이어서 그 통합이 시급하였다. 그는 3개월에 걸친 헌신적인 노력 끝에 결국 9월에 들어 통합을 이루어냈다. 이후 통합 임정의 국무총리인 이동휘를 비롯하여 각부 총장들이 차례로 취임하고 대통령 이승만(李承晩)까지 합류함으로써, 일단 임정은 독립운동의 최고 지도 기관으로서 면모를 갖추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그러나 임정의 중심인물이 되어야 할 이승만과 이동휘 간에는 갈등과 대립이 심각했다. 그의 적극적인 중재에도 불구하고, 먼저 이동휘가 임정을 떠났으며, 이승만도 미국으로 가버렸다.
도산은 임정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전체 독립 운동자가 한번 크게 모여 다시 의견을 결집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임정을 사퇴한 그는 국민대표회 개최를 위해 노력했다. 마침내 1923년 초부터 국민대표회가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마저 새정부창조론·임정개조론·현상고수론 등으로 갈려 끝내 유회되고 말았다. 이에 그는 5년 간의 활동을 되돌아 보며, 재충전의 기회를 갖기 위해 1924년 말 일단 미국으로 돌아갔다.
바. 대 독립당 운동과 한국 독립당 활동 그리고 순국
1년 반 가량의 미국체류 끝에 1926년 5월 말 다시 상해에 도착한 그는 이제 좌우 합작의 대 독립당운동(大獨立黨運動)에 앞장서게 되었다. 좌우합작론은 1924년경부터 국내외에 걸쳐 제기되었는데, 아직 구체적인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산발적으로 논의되는 데 그치고 있던 좌우합작문제를 중국과 만주에서 본격적인 실천운동으로 끌어올린 사람이 도산이었다. 상해 도착 후 한 달 여가 지난 7월 8일 140명의 동포가 모인 가운데 그가 행한 '임시정부 문제와 우리의 혁명운동에 대하여'라는 연설이 그 출발을 알리는 신호였다.
도산의 주도로 시작된 좌우 합작 운동은 한동안 활발히 추진되다가 실패로 끝나, 1920년대 말 중국에서의 한국독립 운동계는 결국 민족주의자들의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과 사회주의자들의 한국독립운동자동맹(韓國獨立運動者同盟)으로 나뉘어지고 말았다. 한국독립당은 상해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우리 나라 민족주의 정당이었는데, 도산계(서북파, 흥사단계)와 이동령계(기호파, 임정계)를 주축으로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 28명이 발기인으로 참가했다. 도산은 강령 기초위원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그의 대공주의(大公主義)에 입각한 한국독립당의 강령을 결정했다. 후일 그가 국내로 압송된 후 한국독립당에 모였던 인물들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지게 되었지만, 임정을 비롯한 모든 민족주의 단체들은 도산의 뜻이 반영된 강령만은 대부분 그대로 계승하였다.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도산은 오래 기다리던 기회가 오고 있다고 판단하여 본격적인 반일투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독립당 결성이라는 목표와도 관련하여, 한국 대일전선 통일동맹을 추진하던 그는 윤봉길 의거의 여파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끌려들어 오게 되었다. 도산은 4년 반에 걸친 두 차례의 감옥생활 끝에 얻은 병이 악화되어 1938년 3월 10일 경성대학(서울대) 부속병원에서 만 59년 4개월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도산 안창호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1878-1938) 선생은 우리나라 근대 민족운동의 큰 지도자이며 또 뛰어난 민족주의 사상가였다. 그는 우리 겨레가 일제의 침략과 지배아래 고통받고 있을 때 위기에 처한 나라를 지키고 또 독립을 되찾기 위한 구국독립운동에 앞장섰다.
그는 한말에 독립협회에 가담해 활동했고, 미국에서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조직해 지도했으며, 다시 국내로 돌아와서는 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해 애국지사들의 구국운동을 뒤에서 총지휘했다.
합병을 눈앞에 두고 망명을 떠난 그는 1910년대에는 미국에서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를 이끌었고 흥사단을 조직했다. 이어 3·1 운동이 일어나자 중국에 건너간 그는 임시정부의 기초를 확립하고 국민대표회(國民代表會)를 여는 데 힘썼으며,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만들었다.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본격적인 반일 투쟁을 위해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을 결성하려고 노력하던 중, 그는 불행히도 이듬해 일제 경찰에 체포당해 국내에 끌려오게 되었다.
국내에서 두 차례의 옥고를 치른 끝에 그는 결국 해방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도산은 쉴 새 없는 구국독립의 실천 활동 속에서도, 한편으로 우리겨레가 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이며, 더 나아가 살기 좋은 이상적인 나라를 만들어 영원히 번영을 누릴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나름대로 깊이 연구하였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 결론을 얻게 되었다.
먼저 그는 우리가 일제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적절한 기회에 그들과 전쟁을 해서 승리하는 데 있다고 보아 최소한의 근대적 무력을 준비해 두자는 독립전쟁준비론을 정립했다.
동시에 그는 독립을 이룬 다음에는 모든 국민들이 자유롭고 고르게 잘 살 수 있도록 참된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민주국가건설론을 갖고 있었다.
또 독립을 이루고 민주국가를 세워 번영을 누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민족을 위해 헌신할 지도적 인물들의 양성이 중요하다고 본 그는 민족운동 간부의 양성을 위한 흥사단운동론도 폈다.
도산연보
1878 :
11월 9일 평남 강서군 초리면 7리 봉상도(도롱섬)에서 안흥국(安興國)의 3남으로 태어남. 아버지는 빈농의 선비로 당 27세, 어머니 황씨는 당 32세,형은 치호(治浩).
1884 : 6세
평양 대동강면(大洞江面) 국수당(國水塘)으로 이사. 가정에서 한문수학. 동생 신호(信浩) 태어남.
1886 : 8세
한문 서당에서 수학하는 한편 열 다섯 살 때까지 목동(牧童)생활. 이 무렵인 1890년 전후 황해도 구월산을 두루 여행함.
1889 : 11세
부친 별세.
1890 : 12세
평양 남부산면 노남리로 이사. 서당에서 황해도 안악 출신 청년 선각자인 연상의 필대은(畢大殷)과 교유.
1894 : 16세
상경하여 서부대정동 소재 구세학당(救世學堂; 일명 元杜宇學校)에 입학. 이 예수교 계통의 보통학교에서 공부하며 예수교 장로회 입교. 필대은을 신앙으로 인도함.
1896 : 18세
구세학당 졸업 후 조교.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조부의 주선으로 전 훈장 이석관(李錫觀)의 장녀 이혜련(李惠練; 당 13세)과 일방적인 약혼이 되었음을 알고 파혼을 주장하나 관철되지 않음.
1897 : 19세
동생 신호와 약혼녀 혜련을 데리고 상경하여 이들을 정신여학교(貞信女學校)에 입학시킴. 독립협회(獨立協會)에 가입. 동회가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로 발전함에 따라 필대은 등과 평양에서 동 관서지부(關西支部)를 발기. 여름, 평양 감사 조민희(趙民熙) 등 수백명이 운집한 평양 쾌재정(快哉亭)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고 첫 열변. 18조의 쾌재(快哉)와 18조의 불쾌(不快)를 열거하며 민중의 새로운 자각을 호소함.
1898 : 20세
11월 서울 종각에서 열린 만민공동회에서 칠대신(七大臣)을 탄핵하고, 6개조의 정치혁신안 건의.
1899 : 21세
강서군 동진면 암화리에 점진학교(漸進學校) 설립(이 초등학교는 한국인 손으로 설립된 사학의 효시이며, 남녀공학의 최초임). 하천 매축공사(埋築工事)로 황무지 개간 사업에 종사.
1902 : 24세
김 마리아 외숙 김윤오 주선, 밀러 목사 주례로 서울 제중원(濟衆院;세브란스)에서 이혜련과 결혼 후, 다음날 부부 동반으로 인천항을 출발, 동경에서 1주일을 체류한 후 도미의 길. 하와이 근해에서 아호(雅號)를 도산(島山)으로 함. 10월 14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 가정 고용인으로 청소하는 일 등 노동일에 종사하며 미국 소학교에 통학.
1903 : 25세
샌프란시스코에서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근교 하변(리버사이드)으로 이사. 아내를 학교에 보냄. 9월 23일 재미 교포의 단결과 계몽을 위해 한인친목회 조직, 회장에 피선됨.
1904 : 26세
기독교단에서 경영하는 신학강습소에서 영어와 신학 수업.
1905 : 27세
4월 5일 한인친목회(韓人親睦會)를 발전시켜 공립협회(共立協會) 창립. 초대 회장이 됨. 11월 공립협회회관 설립. 11월 20일 순 국문판 [공립신문(共立新聞)]발행. 장남 필립(必立) 태어남.
1906 : 28세
샌프란시스코에 대지진이 일어나 패시픽가에 있는 공립협회 회관이 불타 오클란드에 임시 본부 설치(이듬해 돌아옴).
1907 : 29세
동경거쳐 환국. 동경 체류 중 한국인 유학생 단체인 태극학회(太極學會)에서 애국 웅변으로 청중을 감격케 함. 귀국 후 서울에서 이갑 등과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 창립. 평양에 대성학교(大成學校)를 비롯하여, 평양· 서울· 대구에 태극서관(太極書館)을 두고 평양 마산동 자기회사(磁器會社) 설립. 이등박문과 회견하고 소위 안도산 내각의 조각 제의를 일축함.
1908 : 30세
교육에 몰두하는 한편 경향각처를 순행하며 유세. 국민조직화운동 전개.
1909 : 31세
국내 최초의 청년운동단체인 청년학우회를 창설. 육당 최남선이 중앙총무로 도산을 도와 실무 담당. 안중근의사 사건으로 서울 용산 헌병대에 수감되었다가 두 달만에 석방됨.
1910 : 32세
총독부의 내각 조직 제의를 다시금 일축하고 4월 7일 행주 출발, 국외 망명의 길을 떠남. 이때 '거국가(去國歌)'를 남김. 이갑 등과 위해위(威海衛).북경.청도 거쳐 상해.블라디보스톡 등지 유랑. 산동성 청도에서 독립 운동자들과 합동하고 청도회담을 개최했으나 그 결과는 암담. 한일합방으로 청년학우회 해산.
1911 : 33세
북만 밀산현에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세울 계획이 여의치 못해 러시아.독일.영국 등을 거쳐 도미(渡美) 망명. 가족과 재회. 추정 이갑이 위독하여 500달러의 치료비 보냄.
1912 : 34세
11월 샌프란시스코에서 해외 지방총회를 망라한 대한인국민회(Korean National Association) 중앙총회 조직, 초대회장에 선임됨. 한편 민족 부흥운동을 위한 청년 엘리트 단체의 필요성을 절감, 하변(리버사이드)에서 로스앤젤레스로 와서 첫 동지 송종익과 흥사단 약법을 상의하고 정원도.하상옥.강영소 등 세 동지를 얻은 후 흥사단 조직에 착수. [공립신문]을 [신한민보]로 제호를 바꿔 속간. 차남 필선(必鮮) 태어남.
1913 : 35세
청년학우회 후신으로 흥사단(興士團) 창립. 발기인은 전국 8도를 대표하는 25인의 동지로 함.
1914 : 36세
국민회가 캘리포니아 주지사로부터 정식 사단법인 인가를 받음. 로스앤젤레스로 가족과 이사. 장녀 수산(繡山) 태어남.
1917 : 39세
송종익.임준기 등과 함께 북미실업주식회사 설립. 주로 하와이.멕시코.쿠바 등지를 다니며 흥사단 조직 운동 강화. 차녀 수라(秀羅) 태어남.
1919 : 41세
상해 임시정부 내무총장에 취임. 국무총리 대리. 연통제, 독립 운동 방략 제창. 임시 정부 기관지 [독립] 발간. 내각 개편으로 국무위원 노동국 총판(國務委員 勞動局 總辨)이 됨.
1920 : 42세
상해 임정을 강화하여 독립운동 중심 세력의 통합에 주력하는 한편 흥사단 원동위원부(遠東委員部) 설치. 미국 국회 의원 동양시찰단 일행을 북경에서 맞아 한국 독립 협조를 호소함.
1921 : 43세
임시정부 세력 통일에 노력해 온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인책 사임. 상해에서 국민 대표회 발기.
1922 : 44세
서울에 수양동맹회(修養同盟會), 평양에 동우구락부(同友俱樂部) 발족을 지시. 국민회 분쟁 격화, 하와이 지방 총회를 해체하고 하와이 한인 교민단 조직됨.
1923 : 45세
봄에 상해에서 국민대표회 개최, 동 부회장이 됨. 그러나 동회가 개조와 창조파로 대립되어 결렬되자 대독립당 결성과 독립 운동 근거지 이상촌 건설 계획 수립.
1926 : 48세
미주에서 다시 중국에 건너가 가을부터 만주 길림성 일대를 답사하며 이상촌 사업 추진.
1927 : 49세
길림에서 군사 행동 단체의 통일과 대독립당의 결성을 토의 중 동지 200여 명과 함께 중국 경찰에 감금되었다가, 중국내 사회여론이 비등하여 20일 만에 석방.
1928 : 50세
이동녕.이시영.김구 등과 상해에서 한국 독립당 결성. 이때 대공주의(大公主義)제창.
1931 : 53세
만주사변으로 만주에서의 이상촌 계획을 단념하고 남경서 토지 매수.
1932 : 54세
일본의 중국 본토 침략 정책에 따라 독립 운동 근거지의 건설 계획을 재검토 중인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구 폭탄 사건으로 이날 오후 프랑스 관헌에 피체되어 일경(日警)에 인도됨. 6월 7일 인천에 호송되어 서울로 압송, 4년 실형을 받고 서대문.대전 감옥에서 복역.
1935 : 57세
2월 대전 감옥에서 2년 반 만에 가출옥. 지방 순회 후 평남 대보산 송태산장에 은거.
1937 : 59세
6월 28일 동우회(同友會) 사건으로 흥사단 동지들과 함께 일경에 피체. 11월1일 서대문형무소 수감. 12월 24일 신병으로 보석 출감.
1938 : 60세
3월 10일 자정, 경성대학 부속병원에서 간경화증으로 서거. 망우리에 안장됨.
1962 :
건국공로훈장(3.1절) 추서.
1969 :
부인 이혜련 여사 별세(4월 21일).
1973 :
11월 10일 도산 95회 생신과 흥사단 창단 60주년을 맞 아 관민의 정성으로 만들어진 도산공원에 망우리 공동 묘지의 도산 유해와 미국의 이혜련 여사 유해를 이 안장(移.安葬)하다.
1978 :
9월 27일, 도산 탄신 100주년 기념 대회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성대히 거행
1988 :
3월 10일, 도산 서거 50주기 추모식을 서울 류관순 기념관에서 거행.
1998 :
11월 9일, 도산 서거 60주기, 탄신 120주년을 기념하여 도산공원에 도산기념관을 건립.
도산 일화
위대한 지도자가 누구요?
이리하여 안창호는 공부하겠다는 꿈을 버리고 교포의 집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몸소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의 행동을 교포들이 의심하고 비웃기도 했으나 차차 그를 환영하게
되었다. 그는 손수 비로 쓸고 훔치며 창을 닦았다. 또 헝겊과 철사를 사다가 창에 커튼을 만들
어 달았다. 또 한편 문앞에 화분을 놓거나 꽃씨를 뿌리고 부엌과 변소까지도 깨끗이 치웠다.
안창호는 청소부가 되어 교포들에게 봉사 한 것이다. 이 일은 몇 달이 되지 않아 교포들의 생
활을 새롭게 하였다. 그것은 다만 거처의 바깥 모양만 변한 것이 아니라, 그 정신과 생활에까지
변화를 주었다. 교포들은 어느새 면도를 자주하고 옷을 깨끗이 빨아 입게 되었으며 이웃에 방
해가 되지 않도록 이야기도 나지막하게 하였다. 또 이웃 사람이 싫어하는 냄새나 소리도 내지
않게 되었다.
[양놈들에게 왜 눌리느냐? 그들이 뭐라 하건 내 마음대로 하겠다] 던 동포들도, 서로 이웃을
위하는 것이 문명인의 도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 한국인 한 사람이 미국인에게 불쾌한
생각을 주면, 이것이 전체 미국인으로 하여금 우리 민족 전체를 불쾌하게 생각하도록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안창호의 이 같은 노력과 열성은 드디어 동포들의 신뢰를 받게 되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상의하러 왔고 또 그를 집에 청하여 식사도 대접하였다. 안창호는 이러한
신뢰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며 묵묵히 청소부와 심부름꾼의 일을 해 나갔던 것이다. 동포들의
신뢰를 얻은 안창호는, 다시 동포들에게 인삼 행상의 구역을 공평하게 정해 주고, 또 가격 경쟁
을 하여 값을 떨어뜨리는 일이 없게 하였다. 그리고 한국 교포에 대한 미국인의 부당한 행동에
대해서는 발벗고 나서서 싸웠다.
이러한 효과는 곧 미국인들에게도 알려졌다. 그리하여 어느 미국의 실업가 한 사람은 자기 집에
드나드는 한국 교포를 붙들고,
[당신네 나라에서 위대한 지도자가 온 모양인데, 그 지도자는 누구요?] 하고 물었다.
[어째서 그러십니까?] 교포가 이렇게 묻자 그 실업가는,
[한국인들의 생활이 새로워졌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지도자 없이는 이렇게 될 수가 없소]
하고 대답하였다.
[안창호라는 지도자가 왔습니다.] 이렇게 대답하자 미국 실업가는 그를 만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지도자가 백발을 흩날리는 노인이 아니라 젊디젊은 청년인 것을 보고 다시 한 번
놀랐다.
그 미국 실업가는 안창호의 공적을 크게 찬양하고, 한국인을 지도하는 데 사용할 건물 하나를
무료로 제공하겠다고 자청하였다. 그 결과 한국인 최초의 회관이 생기고 이 회관을 중심으로
민족 운동 단체인 공립 협회가 탄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