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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찬양예배설교 모음
목자로 오신 예수 요한복음 10:1∼18
우리는 신문이나 잡지와 같은 인쇄매체와 라디오, 텔레비전 같은 음성과 영상매체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거리에도 온통 광고가 넘쳐납니다. 길거리의 현란한 광고물들과 높은 빌딩의 옥상에 전광판이 있고, 심지어 시내버스나 택시에도 광고물이 부착되어 있습니다. 운동 경기장의 펜스는 물론이고 근래에는 컴퓨터 통신이나 인터넷을 통한 정보의 바다가 무궁무진해졌습니다.
이처럼 엄청난 정보의 시대 속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올바른 취사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즉, 마땅히 듣지 말거나 따르지 않아야 할 것은 거절하고, 꼭 듣거나 따라야 할 것은 받아들여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절해야 하는가 하는 안목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가령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목회자의 설교를 의심하면 안 됩니다. 반면에 신문이나 텔레비전의 일방적인 상품광고와 사이비 이단들의 종말론이나 거짓 소리에 현혹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1. 목자와 양에 대한 문화적 이해
오늘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와 믿는 그리스도인과의 특별한 관계를 선한 목자와 양의 비유로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비유를 쓰는 목적은 잘 모르는 사람에게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목자와 양이 한국 문화권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을까요?우리 나라에서 양은 쉽게 볼 수 있는 동물은 아닙니다. 사진이나 그림책에서 보거나 동물원에서 볼 수 있는 처지입니다.
실제로 수백 마리의 양을 목자가 커다란 지팡이를 들고 인도하거나, 이리로부터 양을 지키려고 싸우는 광경을 본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이스라엘의 목축 문화와 풍습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에는 풀이 적기 때문에 먹이를 모아서 울타리 속에 가두고 키우는 것이 아니라, 풀어 놓아서 풀을 뜯어 먹이는 방목을 했습니다. 이러한 울타리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산비탈에 돌이나 바위로 울타리를 만들어 놓은 것이 있습니다. 낮에 자유롭게 방목하고 저녁에 집에 내려오기가 어려우니까 양들을 집어넣고 문지기나 목자가 양을 지킵니다. 이때 잘못 지키면 맹수나 도둑들에게 양이 다쳤습니다.
둘째는 도시 안에서 양들이 편안히 쉴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것인데 여기에는 문이 있습니다. 두 가지 목적이 있는데 밤새 춥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해서, 또한밤중에 이리나 사자 같은 맹수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매일 아침 울타리에서 꺼내어 하루종일 풀과 물을 먹도록 들판에 풀었다가 다시 저녁이면 울타리에 집어넣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를 목자와 양으로 자주 표현했습니다.
가령 사무엘 하 7:8을 보면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에게 “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처럼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서 취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시편 23편을 보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결핍된 것이 없기에 충분하다는 말로 행복하다는 말입니다.
2. 선한 목자의 특성
첫째, 선한 목자는 문으로 정당하게 들어갑니다.
즉, 합리적인 방법으로 당당하게 들어갑니다. 반면에 절도나 강도는 양을 늑탈하러 왔으므로 뒷문이나 담을 넘어서 비정상적으로 들어갑니다. 흥미로운 것은 절도의 경우 요한복음 12:6을 보면 가룟 유다를 도적이라고 부릅니다. 그가 돈궤를 맡은 사람이었으나 그 물질을 훔쳐 갔기 때문입니다.
또 강도의 경우 요한복음 18:40에서 바라바를 강도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한국의 홍길동이나 장길산처럼 유명한 강도였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사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가리켜서 지적하신 것입니다(요 9:4041).
이와 관련하여 무서운 것은 신앙생활을 하는 데 결정적인 방해꾼이 교회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도 가룟 유다가 있었고, 현대에도 가끔씩 언론과 미디어 매체를 통해서 어떤 지도자급의 교인이 잘못한 일이 나타나서 불신자나 초신자들이 시험에 드는 경우입니다. 그밖에도 교회의 분열이나 지역사회에서 덕을 끼치지 못하는 일입니다.
둘째, 선한 목자와 양은 서로의 음성을 알아듣습니다(3절 상).
사실 가정에서 키우는 짐승들은 대부분이 주인의 음성을 알아듣습니다. 저의 경험으로 보아도 어려서부터 키운 진돗개가 주인이 밥을 안 주면 배고파도 참고 다른 사람이 주는 것은 먹지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직 주인 말만 듣습니다. 그런데 음성을 안다는 것은 지난날의 경험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존경과 믿음이 그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를 바르게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스러운 주님의 음성에 나의 삶을 온전히 맡기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본문에서도 양들은 목자의 음성이 이끄는 데로 따라갑니다. 그 음성을 알기 때문에 믿고 따르는 것으로 이른바 ‘전적인 위탁’이라고 하겠습니다. 여기에는 의심이나 염려가 생겨나지 않습니다. 시편 23편에서 볼 수 있듯이 궁극적으로는 푸른 초장이 있는 좋은 곳으로 인도하지만, 가는 과정은 언제나 좋은 길은 아닙니다. 때로는 비탈길도 있고 가시덤불이 있으며, 험한 자갈길을 지나가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과정 중에도 목자를 믿고 인내하면서 반드시 좋은 곳으로 인도할 것을 믿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른 신앙의 자세입니다. 이것은 나를 지금까지 인도하신 과거의 경험에 의하여 위로를 받으며 끝까지 따라가는 순종의 모습입니다.
셋째, 목자는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부릅니다(3절 하).
이스라엘에서는 양을 식용이 아닌 대부분 양털을 얻을 목적으로 사육합니다. 그래서 양의 신체적 특징인 ‘검은 귀’, ‘말총 머리’ 등의 이름을 개인적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아브라함아! 모세야! 베드로야! 하는 개개인을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셨고, 개별적으로 개인적인 문제와 성격 그리고 특성까지도 다 알고 계셨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그 양의 능력에 맞게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어려움이 올지라도 나는 버림받았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양 한 마리도 소홀히 여기지 않으십니다. 이것을 누가복음 15장에서는 백 마리 양 중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끝까지 수고하며 찾아서 돌아오는 목자의 모습으로 하나님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넷째로, 목자는 앞서서 갑니다(4절).
양을 개별적으로 다 불러모아 놓은 다음에 목자가 앞서서 길을 인도하면 양들이 줄줄이 그 뒤를 따릅니다. 이렇게 앞서가는 것이 참된 지도자의 성격입니다. 사실 지도자가 자신은 하지 않으면서 남에게만 하라고 하면 설득력이 없습니다. 주님은 먼저 원수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고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또한 먼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고, 우리에게 그처럼 봉사하라고 하십니다. 그 외에도 먼저 십자가를 지셨고, 우리에게도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제자가 되어 따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선한 목자를 믿고 안심하고 열심히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개인적인 가시덤불이나 국가적인 어려움을 만나더라도 마지막에는 좋은 곳으로 인도하실 것이니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목자가 양을 인도하고 양이 목자를 따라가는 정상적인 행로입니다. 이렇게 목자의 음성을 들으며 따라가는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우리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오후찬양예배설교 모음
생수로 오신 예수 요한복음 4:1∼14
여러분은 자신의 삶이 행복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즉, 나의 삶에 참된 만족이 채워져 있습니까? 일반적으로 인간은 근본적으로 세 가지 욕구가 채워져야 한다고 봅니다.
첫째는 육체적 욕구 또는 생리적 욕구입니다. 이것은 동물적 본능으로 배고픔과 목마름, 의식주 생활이 채워져야 함을 의미합니다. 여름에는 시원한 것이 좋고 겨울에는 따뜻한 것이 좋은, 등이 따습고 배부른 것을 선호하는 것이 이러한 생리적 욕구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는 정신적 욕구와 이것이 발전된 사회적 욕구입니다. 배가 고플 때 돈이 없어서 냉수로 배를 채워도 여유가 있는 마음, 물질적인 소유물은 부족해도 책을 구입하거나 예술·문화활동에 더 중점을 두는 정신적 풍부함 같은 것입니다. 한국의 풍류시인 김삿갓의 물질소유를 초탈한 자유정신 같은 정신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 사랑을 주고받고 격려, 칭찬, 위로, 성취, 안전에 대한 욕구 같은 것입니다.
셋째는 인간 내면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영적인 욕구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의미 있는 관계를 맺고자 하는 영혼의 갈망입니다. 즉,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라 하겠습니다. 이 영적인 욕구는 다른 두 가지의 욕구보다 근원적이고도 먼저 해결되어야 하는 욕구입니다. 다른 모든 필요에 우선하여 반드시 채워져야 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인간의 이러한 내면적 욕구를 생수라는 비유를 통해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생수가 무슨 영적인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1.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는 예수님 자신입니다.
예수님은 복음 자체이십니다. 그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에 가게 되신 이유는 유대를 떠나서 다시 갈릴리로 가실 때 사마리아로 통행하면 돌아가는 것보다 훨씬 빨리 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의 수가성을 지나가시게 되었습니다. 이때 우물가에서 어떤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게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물을 달라는 말씀을 하시자 사마리아 여인은 깜짝 놀랐습니다.
첫째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수백 년 동안 이방인과의 잡혼 문제와 종교적 순수성 다툼으로 원수관계였던 것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장벽을 먼저 무너뜨리신 것입니다.
둘째는 여자라는 성차별을 넘어선 것 때문입니다. 그 당시에 엄격한 랍비들은 공적으로 여자에게 인사하는 것을 금했습니다. 심지어 랍비는 여러 사람들이 있는 공중 앞에서는 자기 아내나 딸, 누이와도 말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어떤 바리새인은 길에서 여자를 만나면 눈을 감았기 때문에 집이나 담벼락을 받아서 상처가 생기고 피를 흘리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셋째는 이 사마리아 여인이 성적으로 문란한 여인이었다는 점입니다. 이전에 다섯 남편이 있었고 지금 있는 남편도 정식 남편이 아닙니다. 그런데 죄인이라는 이 장애물조차 넘어서신 것입니다. 이처럼 사마리아의 죄악된 여인을 만나신 사건 자체가 계시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복음은 인종과 성차별과 죄인이라는 장벽까지도 모두 뛰어넘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참 생수라는 증거가 됩니다. 여러분은 이 생수를 마시고 살고 있습니까?
2.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는 영적인 생수입니다.
미국의 어느 마을에서 두 소년이 과일 가게에 가서 물건값을 물어보면서 흥정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비싸다고 슬쩍 물러났습니다. 뒷동산에서 그들은 훔친 과일과 몰래 가져온 술과 담배를 먹고 피우며 흥청망청 시간을 보냈습니다. 시간이 지나서 집으로 돌아가는 중에 멀리서 교회의 종소리가 들렸습니다. 한 소년은 “저 놈의 종소리! 듣기 싫어!” 하면서 귀를 막고 걸었습니다. 또 다른 소년은 돌아가신 어머니가 자신이 바른 사람이 되길 기도하시던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방탕한 생활을 그만두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시간이 점점 흘러갔습니다. 이 소년은 교회를 열심히 다니면서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계속 범죄 생활을 즐기던 다른 소년은 절도범에서 강도로 발전하고, 결국에는 살인죄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인생의 마지막이 비참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던 가운데 감옥에 갇혀 있는 친구가 어느 날 신문을 보니 자신의 친구인 클리브랜드가 미국의 2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는 기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간수에게 “이봐, 간수! 클리브랜드 대통령은 바로 어릴 때 내 친구야!”라고 자랑하는 모양으로 말했습니다. 하지만 간수가 대답한 말은 “대통령이 네 어릴 때 친구라도 넌 지금은 엄연히 사형수야. 떠들지 말고 조용히 해!”라는 쌀쌀한 응답이었습니다. 이처럼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과 자신의 정욕대로 산 사람의 차이는 엄청난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생수(The living water)를 이야기하실 때 사마리아 여인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육체적인 물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구약의 전통인 야곱보다 예수님께서 더 크신 분이냐고 되묻기까지 합니다. 그러한 여인이 예수님의 메시야되심을 깨달은 후에 놀라운 변화를 보이며, 동네에 가서 복음의 증거자가 됩니다. 이렇게 진정한 생수는 죽은 조상이나 죽은 전통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라는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영적인 생수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일시적인 만족을 주는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생수가 아닌 영원한 만족을 주는 영적인 생수인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도록 유혹이나 시험이 와도 이겨내야겠습니다.
3.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는 성령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가장 강한 욕구와 가장 깊은 필요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다윗은 시편 42:1에서 이렇게 고백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이러한 원초적인 갈망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초막절 끝날에 서서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요 7:3738). 이것을 39절에서는 해석하기를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와서 예수를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성령이 함께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이 약속은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사건 후인 오순절 때를 근거점으로 교회를 통해서 성취되었습니다.
성령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지금도 그리스도인과 함께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인격이십니다. 이 성령을 체험하며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은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여러분은 이 성령을 체험하며 살고 계십니까? 또 성령과 동행하는 만족과 기쁨이 넘치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그런데 성령이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거하시는 성령의 내주(內住)와 그 영광스럽고 역동적인 성령의 능력이 생수의 강처럼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솟아나게 하는 것은 다릅니다. 달리 말하면 단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넘어서는, 성령충만이나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이나 성령을 통해 능력 입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깊이 체험하여서 단지 그 능력을 아는 데 그치지 않고, 성령의 능력에 덧입어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 세상 속에서 승리하여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세상권세를 이기신 주님의 능력을 내 것으로 소유하는 그리스도인의 방법입니다.
여러분은 이 귀한 길에 함께 동참하지 않겠습니까? 무기력하고 소극적인 신앙을 그리스도 안에서 용기 있고 적극적인 신앙으로 바꿔 보지 않겠습니까? 항상 참된 생수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기를 바랍니다.
오후찬양예배설교 모음
종으로 오신 예수 빌립보서 2:1∼11
여러분은 인간이 무엇을 목표로 살아간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인간은 행복한 삶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어떤 것이 진정한 행복이냐고 묻는다면 대답하는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어떤 이는 부유한 삶을, 다른 이는 건강한 삶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높은 지위나 학위 등을 주장하기도 할 것입니다. 문제는 행복하다는 것은 외형적인 소유라기보다 내면의 만족상태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환경적인 요소라기보다는 외부세계를 대하는 사람의 조화로운 태도에 더 가깝습니다.
예를 들어서 돈이 많고 명예가 높다고 다 행복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반면에 외형적인 소유는 없어도 마음이 넉넉하여 기쁨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생이 있습니다. 과연 누가 진짜 부자요, 행복한 사람입니까? 요컨대 스스로 만족하는 마음인 자족하는 생각이 더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112). 이 같은 정신이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행동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따라야 할 바른 길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리스도를 따라가며 그 인격과 삶의 태도를 닮을 수 있을까요?
1.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서는 서로 같은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12절).
이것은 획일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획일성은 밖으로부터 주어지는 압력에 의한 것입니다. 가령 옷을 비슷하게 입고, 비슷하게 말을 하고, 비슷하게 행동한다고 해서 한마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공산주의가 아무리 이념교육을 했어도, 인간은 다양성을 가지고 있기에 동구권이 무너진 것입니다. 오히려 연합은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나오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인이라는 같은 무리에 속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한다는 같은 목표를 가진 하나님의 자녀된 신분을 소유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본문의 2절에서는 이것을 네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첫째, “마음을 같이 하여”라고 합니다. 운동회에서 줄다리기와 같은 공동체 시합은 단결의 힘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보여 주는 본보기가 됩니다. 즉 목적을 같이 하라는 말씀입니다.
둘째, “같은 사랑을 가지고”라고 했습니다. 사랑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하지만 십자가를 통해 나타내신 하나님의 사랑만이 완전합니다. 이제 그 사랑을 가지고 서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셋째, “뜻을 합하며”라고 합니다. 이것은 의지작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에서 승리한 싸움이나 이순신 장군의 계속된 수군의 승리는 백성들과 군사들이 뜻을 합하여 일심단결했을 때 거둔 결과였습니다. 오늘날도 교회는 한뜻으로 합하여 교회의 사역을 실천해 가야 더 많은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넷째, “한 마음을 품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 가룟 유다는 다른 마음을 품었기에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자기 자랑이나 자기 우월감 또는 자기 집착이나 자기 정욕을 버리고, 하나님의 교회를 생각하며 살아갈 때 하나됨의 역사는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개인이나 가정 그리고 교회나 국가와 같은 공동체라도 같은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2.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서는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지신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37절).
이러한 태도는 겸손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욕망을 버리고 비이기적인 태도를 개발하여 그리스도를 닮아 갈 것을 촉구한다고 하겠습니다. 이를 위한 몇 가지 지침이 있습니다.
첫째, 이기심이나 허영을 바탕으로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3절 상).
사도행전 5장을 보면 바나바의 선행을 흉내내며 자신의 허영을 채우려다가 거짓말을 한 죄로 죽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이 나옵니다. 이기심이나 허영에 초대교회의 신앙적 순수성이 오염될까 봐서 심판하신 하나님의 극약처방이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선행은 순수한 동기에서 자원하는 마음으로 행해져야 합니다.
둘째, 항상 다른 사람을 나 자신보다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3절 하). 이것은 노력하지 않고 자연적으로 얻어질 수 있는 성품이 아닙니다. 스스로 겸손해지기 위해서 끊임없이 훈련하고 자신의 몸과 생각을 통제하여 싸우는 영적 싸움이라고 하겠습니다. 즉, 섬김의 연습이 꾸준히 계속될 때 가능한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몸소 씻기신 주님의 마음과 연합할 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셋째, 자신의 개인적 이익에 관심을 한정시키지 말고 다른 사람들의 일을 관심의 대상에 포함시켜야 합니다(4절). 달리 말하면 이웃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의미합니다. 한국사회에는 아직도 소년소녀 가장들과 미혼모들 그리고 교통사고나 무서운 병과 같은 문제들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는 이웃들이 많이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들을 구체적으로 돕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본문의 7∼8절은 예수님께서 아래로 내려가는 단계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첫째, 자기를 비웠습니다. 하나님이라는 높으신 형체를 비우셨습니다. 둘째, 종의 형체를 가졌습니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일봉사 같은 흉내가 아니라, 실제로 봉사와 천대와 멸시로 특징되어지는 종의 형체를 취하신 것입니다. 셋째,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넷째,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3.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서는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의 태도를 따라가야 합니다(89절).
예수님의 겸손과 복종의 극치는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 기도를 드리실 때도, 십자가를 지실 때도 자신의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을 우선 순위로 하는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모든 인간의 겸손과 선행은 이 십자가에 비추어 볼 때 교만과 자기의(自己義)로 나타나는 문제를 보입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어두운 마음으로 억지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히브리서 12:2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희생으로 인해서 우리는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순종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여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빌 2:911). 여러분,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전한 주되심을 인정합시다. 나의 근심, 낙심, 마음의 갈등과 고통의 짐을 주님께 내려놓고,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신앙의 길을 가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의 어려움을 변화시키시고, 풍성한 생활의 열매로 바꾸어 주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함께하실 것입니다.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까이 닮아 가는 귀하고도 복된 삶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오후찬양예배설교 모음
빛으로 오신 예수 요한복음 1:1∼8
유엔의 교육, 과학, 문화기구인 유네스코(UNESCO)에서 제작한 「미나 이야기」라는 애니메이션 영화가 있습니다. 그 내용은 서두에 동남 아시아의 한 작은 농촌에 사는 젊은 부부가 문맹(文盲)으로 인한 고통을 받는 것을 보여 줍니다. 남편은 농약에 써 있는 경고문을 못 읽고 작업을 하다가 다쳐서 집에서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더욱이 물건을 파는 행상은 두 부부의 약점을 이용해서 정가보다 훨씬 비싸게 물품을 공급합니다. 그러던 중에 아내인 ‘미나’(Mina)가 열심히 글을 배우게 됩니다. 글을 읽게 된 후에는 농약의 경고문을 보고 위험을 피해 가게 되고, 그동안 폭리를 취하던 장사꾼에게 적혀 있는 가격을 읽어 내어 쩔쩔매게 만듭니다. 그리하여 남편도 건강을 찾게 되고, 온 가정에 기쁨이 넘쳐나게 되는 모습으로 끝을 맺습니다.
여러분은 주변에서 아직도 한글을 읽지 못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문명 세계 속에서 글을 읽지 못하면 어두운 세계에 속하는 것처럼 답답하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또한 외국여행을 해 보면 영어나 중국어 같은 외국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사람이 별세계의 사람처럼 존경스럽기까지 합니다. 이처럼 지식은 사람에게 빛을 줍니다.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고, 활용할 수 있는 힘이 지식 속에 들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 27:1)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사도 요한의 경우에는 영적 생명인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들의 빛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렇다면 이 빛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1. 예수님은 생명의 빛이십니다(4절).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알게 하신 분입니다. 이것을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고 말씀합니다.
인간이 만든 종교가 세상에는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지식과 깨달음으로 하나님을 바르게 알 수는 없습니다. 단지 반딧불처럼 약간의 영적 지식을 알 뿐입니다. 중세의 사상가 토마스 아퀴나스의 경우에도 인간 이성의 힘인 ‘자연법’을 강조하면서도, ‘자연법’은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한 ‘영원법’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라고 자연계시의 한계를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설명해 주는 한 예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왕이 신하들 앞에서 벽에다 선을 하나 쓱 그었습니다. 그리고는 신하들에게 말했습니다. “잘 들어라! 지금부터 그대들은 내가 이 벽에 그어 놓은 줄을 짧게 만들어 보아라. 단 이 줄에 절대 손을 대서는 안 된다.” 신하들은 모두 고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손을 대어 조금 지운다든지 해서 짧게 할 수 있겠는데 도저히 달리 해볼 방법을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 지혜로운 사람이 일어나 나가더니 왕이 그어 놓은 선 바로 밑에 선을 하나 더 그었습니다. 그 선은 왕의 것보다 더 길게 그었기 때문에 왕이 그린 선이 짧아 보이는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예수님은 나중에 그린 선과 같은 세상의 빛이십니다. 인간이 만든 종교의 힘을 뛰어넘어 진정한 진리를 보여 주시는 능력자이십니다.
2. 그리스도의 빛은 어두움을 이기는 힘입니다.
요한복음에는 빛(포스:헬라어)이라는 단어가 21번이나 사용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어두움은 상대적인 단어로 나타나 있습니다. 여기서 어두움은 빛에 대하여 적의를 품고 있고, 선을 미워하는 모든 자들의 자연적인 영역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거절하는 완고한 무지를 나타내는 모습입니다.
본문의 5절에서는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어두움은 혼돈이고 부자유한 무질서 상태라 하겠습니다. 반면에 예수를 믿고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정리된 사람은 살아가는 생활이 정리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고 말씀하신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 빛을 받은 공동체인 교회는 살아 있는 능력을 가지고 세상 속에 존재해야 합니다. 저는 죽어 있는 상태인 거대한 고래가 힘없이 해안가에 밀려 나와 있는 광경을 텔레비전으로 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살아 있는 연어는 거친 물살과 떨어지는 폭포수를 뚫고 상류로 거침없이 올라가는 것도 보았습니다. 이처럼 교회는 살아 있는 역동적인 공동체의 모습을 보이며 성장해야 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자녀인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의 빛입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믿는 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 5:14)고 선언하셨습니다. 그 밖에도 “너희는 세상 속의 소금이 되라.”, “누룩이 되라.”고 말씀하셨는데, 요컨대 이것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역할을 사명으로 주신 것이라 하겠습니다.
조선시대 숙종 때 조태억이라는 분이 경상관찰사로 있었습니다. 관내를 순시하던 중 언양 객사에 묵게 되었습니다. 그때 밖에서 누군가 다급하게 불렀습니다. “여보게 대년이! 대년이! 내가 지금 관원들이 막아 들어가지 못하고 있네!” 대년(大年)이란 조 감사의 자(字)였기에 뛰어나가서, “어이구, 자네 왔는가? 어서 들어가세.” 하고는 영접했습니다. 남루한 옷차림의 손님을 반갑게 맞으니 관속들은 죽마고우인가 보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 사람이 있는 가운데 정담을 나누며 진수성찬으로 저녁도 잘 먹었습니다. 이윽고 주위 사람을 물리치고 함께 잠자리에 누웠습니다.
단 둘이 남게 되자 조 감사는 말합니다. “임자는 누구며 나를 어디서 보았는가? 내가 임자의 목소리를 듣고 친구도 친척도 아닌 줄 알았지만 다급함이 간곡하여, 나 역시 법도 밖의 행동을 하였으니 연고나 들어 보세.” 그러자 선비는 무례를 사과하면서 사연을 말했습니다. “저는 한양에 사는 벼슬 없는 선비인데 궁색한 데다 집안에 장례가 계속되어 빚이 많아 헤어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70년 전 조상대에 도망친 노비가 언양고을에 숨어 살며 자손이 매우 번창하다기에, 종의 몸값이라도 받으려고 찾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신분을 감추고 살던 노비의 후손이 은밀히 자객을 보내 죽이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다급한 나머지 궁여지책으로 조 감사가 묵고 있는 곳으로 뛰어들어왔습니다.”는 것입니다. 다음 날 그 선비가 다시 옛 종의 집에 찾아가니 그들의 태도가 달라져 있었습니다. 감사의 친구인지 알고 스스로 수천 냥을 거두어 바치니, 노비문서를 태워 주고 한양으로 돌아와 빚도 청산하고 제법 형편이 풀리게 되었습니다. 후일 조 감사가 좌의정까지 오르니 늘 찾아와 지난일을 고마워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진정한 신앙은 이렇게 실천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그것도 의무감이나 책무로서가 아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행해야 할 것입니다. 작은 불꽃이 여러 개가 모이면 큰 불을 일으키듯이, 그리스도인이 여러 사람 모여서 힘을 발휘한다면 세상 속의 빛으로 사명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이제 그 빛을 받아 주님과 동행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빛의 자녀된 신분을 드러내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러할 때 어두움의 권세가 물러나고 세상이 변화되는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복된 선택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후찬양예배설교 모음
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 요한복음 6:35∼51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은 불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영생을 얻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생명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육신의 생명입니다. 건강한 신체는 누구나 바라는 좋은 조건입니다. 이것을 보존하는 것도 그리스도인의 바른 몸 관리입니다. 둘째는 영혼의 생명입니다. 이것은 보다 근원적인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은혜의 선물로 얻는 것입니다. 이것을 영원한 생명이라고 하는데 줄여서 영생이라고 부릅니다. 이 두 가지 생명을 요한복음은 함께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떡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배경은 유대인들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오천 명이 양식을 먹고 난 후 출애굽 때의 만나와 비교한 데 있습니다. 육신의 양식을 먹다 보니 그만 영혼의 양식을 망각하고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예수님을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여기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참된 양식인 생명의 떡이라고 구원의 차원을 선포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생명의 떡에는 무슨 신앙적인 교훈이 있을까요?
1. 떡은 목숨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입니다.
인간의 육신은 하루라도 먹지 않으면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간혹 금식하는 분들이 계시지만 대개는 물은 마시면서 기도합니다. 사실 원래 금식은 음식 냄새를 맡아도 안 되고, 물도 먹지 않는 단식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아랍인이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대개 한 끼나 하루 정도 금식을 하지 우리처럼 일주일, 한 달, 40일 이렇게 길게는 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무리하게 40일 금식기도를 하다가 금식중이나 금식이 끝난 후 후유증으로 죽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금식의 형식만 남고 그 본질이 빠진 안타까운 사건이라 하겠습니다.
교회에 나오는 많은 신앙인들의 기도를 내용으로 파악해 보면, 상당수가 물질적인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주로 어떤 내용의 기도를 하고 계십니까? 나 자신이나 가정의 만사형통이 주된 내용이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바른 신앙의 자세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된 핵심은 유대인들이 육신의 양식이라는 관점으로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야로 보고 있는 문제입니다. 여기에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양식이 필요한 것을 인정하시면서도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생명의 양식이라는 것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산상수훈을 보면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 6:3132)고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떡이 목숨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시지만, 그보다도 중요한 하나님의 나라와 의(義)를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떡은 꼭 있어야 할 것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라는 영혼의 양식이 더 중요함을 늘 생활의 현장에서 기억하며 신앙인의 길을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2. 예수님은 영생하는 양식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요 6:31)라고 말합니다. 즉, 그들이 원하는 표적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반복해서 내려 주셨던 만나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제 40년이 아닌 단 한 번 주셨고, 그것도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아닌 오천 명을 대상으로 주셨으니 더 큰 표적을 보여 달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이 원하는 떡은 생명의 양식이 아니었습니다.
출애굽기 16:1∼36을 보면 만나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되어 있습니다. 첫째로 만나는 하늘로부터 온 떡입니다. 농사를 지은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떡가루 비슷하게 생긴 밀가루와 꿀을 섞은 맛이라고 합니다. 놀라운 일은 이렇게 40년 간 만나를 먹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전히 모세를 원망하고 불신앙적인 삶을 산 것입니다. 둘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야가 오시면 다시 하늘로부터 만나가 내릴 것으로 외경을 근거로 믿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관점에 대해서 예수님은 바른 해석을 해주고 계십니다. 첫째, 이 만나는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온 것으로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요 6:32). 둘째, 진정으로 영원한 생명의 떡은 자신이라고 선포하십니다(요 6:35). 사실 광야생활 가운데 만나를 먹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양식이었고 썩는 양식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베들레헴’은 떡집이라는 의미가 있어서 귀한 영적 교훈을 주기도 합니다. 따라서 생명의 근원인 예수 그리스도를 양식으로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의 의미는 예수를 믿고 살아가는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초대와 그 말씀들을 거절하는 것은 영생을 놓치고 죽을 수밖에 없음을 상징합니다.
3. 생명의 떡은 먹어야 삽니다.
요한복음 6:52∼59에 나오는 피와 살은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피는 생명을 나타내는 유대사상의 표현입니다. 이 피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예수께서는 자신의 피를 마시고, 자신의 살을 먹지 않으면 생명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요 6:53). 이러한 생명의 떡이신 예수를 믿으면 우리의 마음이 참된 만족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조선시대의 청백리(淸白吏)란 물처럼 맑고 비단처럼 깨끗한 관리라는 뜻으로 극소수의 사람만 뽑혔는데, 이것은 벼슬의 높음보다 명예로운 이름입니다. 그 중에서도 박수량(14911554)은 성품이 신중하고 깨끗했으며 충실한 책임감이 있는 벼슬아치였습니다. 그는 중종에게 적서를 차별하지 말고 인재를 기용하자는 옳은 주장을 거침없이 했던 사람입니다. 나주 목사와 함경도 관찰사 등을 거치고 육경의 지위에 오르기까지 40년 간 관직에 있었습니다.
명종 때 세도가였던 영의정 윤원형이 박수량을 미워하여 파면하라고 모략한 일이 있습니다. 왕은 몰래 암행어사를 보내어 과객으로 변장시켜 며칠 간 조사해 본 후, 평소 먹는 음식도 볼품없고 집안 식구들도 모두 청빈하며 집도 비바람을 겨우 피할 정도인데 그것마저 셋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사의 보고를 들은 명종은 감탄하고 자신의 외삼촌이기도 한 영의정을 불러 야단을 치고 박수량의 벼슬을 올려 주었습니다. 그가 청렴하게 살다 63세에 세상을 떠나니 명종은 초상을 치를 수 없는 형편을 감안하여 국비로 부담케 하고, 특별히 그의 청백함을 세상이 다 아니 글을 새길 것 없이 그냥 백비(白碑)를 세우도록 하였습니다. 박수량의 비석만이 무덤의 비석에 글씨가 없는 것으로 유일하게 오늘날까지 전해 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청백리와 같은 좋은 성품을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소유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마시는 영적 연합을 이룬 사람에게 가능한 일입니다. 또한 주기도문에 나오는 것처럼 생명의 양식은 매일 먹어야 할 떡입니다. 나아가서 자기만 먹을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나누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육신의 양식은 비록 썩는 것이지만 영적인 양식은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생명의 떡을 먹기에 영적인 성장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장하는 열심을 나타내는 복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