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의 교도소 생활은 다른 정치범과 마찬가지로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이어졌다. 1982년 1월 20일 김대중을 면회한 이희호는 아사히(朝日) 신문 기자와 인터뷰했다. 다음은 일본 아사히 신문의 보도이다.
작년 1월 23일, 대법원의 상고기각으로 사형 확정, 즉일로 대통령 권한에 의해 무기 로 감형된 그 운명의 날로부터 1년, 한국의 김대중 전 대통령후보는 지금 충청북도 청 주시의 형무소에서 차가운 겨울을 나고 있다. 형무소의 특별동이라고 부를 수 있는 1 동에 다만 홀로 실내 온도 10도의 독방에서 부은 다리와 어깨 결림, 그리고 귀울림증 에 시달리면서 독서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작년 8월 광복절과 크리스마스 때 이야기 되던 사면에의 기대는 실현되지 않고 이제는 그런 가능성도 사라지고 말았다.
20일 김대중씨를 면회한 이희호 부인은 다음날 서울시내 자택에서, 「주인은 지병이 겹쳐 2중 3중의 괴로움을 초인적으로 견뎌내고 있습니다. 민주국가에서 이렇게 가혹한 대우가 있을 수 있습니까」라고 호소했다.
이 부인과의 면회는 조그마한 구멍이 여러 개 뚫려 있는 유리 너머로 이루어져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이전과 별로 다름이 없었다고 한다. 김씨도「다리가 많이 붓고, 피부가 당기는 것 같으며, 어깨가 결리고 귀에서 소리가 난다」고 말했다 한다.…
현재 쓰고 있는 독방은 침대가 없어 땅바닥에서 기거한다. 실내의 기온은 10도, 옷을 두껍게 껴입고 추위를 견딘다… 심경은 침착함을 회복했다 한다. 작년 12월 면회 때 김씨는 부인에게 「이처럼 괴롭고 치욕적인 일은 평생 처음으로 미칠 것만 같았다. 왜 나를 살려놓고 있는가 하고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했다. 자고 있을 때도 격한 감정이 끊어 올라 기도로 극복했다. 그러나 지금은 편안하다」고 말했다 한다. (아사히 신문 1982년 1월 23일자)
김대중은 교도소에서 가족들에게 부지런히 편지를 썼다(김대중은 1985년에 미국에서 귀국하자마자 이것을 모아『김대중 옥중서신』이라는 책으로 출판했다). 이에 대해 함윤식은 크게 불만을 토로한다.
김대중씨의 비정함은 그의 저서「옥중서신」을 보면 잘 나타나 있다. 그는 교도소 생활을 하면서 많은 편지를 가족에게 보냈다. 그리고 그것을 책으로 펴냈다. 그 책의 표지부터 끝장까지 아무리 뒤져봐도 나 때문에 고생하는 동지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이나 미안하지는 않더라도 동지들 잘 있는지 안부 한 마디가 없다. 부인, 아들들, 며느리, 조카, 손자, 심지어 집에 있는 똘똘이(김대중씨 집 개 이름)도 잘 있는지 궁금하다는 말은 있어도 동지들 걱정은 한 마디도 없다. 우린 그렇게 똘똘이만도 못하게 살았었다. 아마 서점에서「옥중서신」을 구해 보시기 전에는 독자들은 믿지 못할 것이다. 사람이 먹는 것 가지고 따지면 치사하다지만 좀 얘기를 할까 한다.
우리 비서들은 식사와 김대중씨 가족들의 식사는 완전히 메뉴까지 달랐다. 지금은 그만두고 현재 태평양화학 이사로 재직 중인 전 비서 김형국씨가 75년 경 비서 당시에 이런 인간차별대우를 보고 그 당시 김대중씨 계보 사무실인 화요회에서「김대중씨는 여러 사람 앞에서 민주주의의 상징처럼 말씀하시는데 집에서 가까이 모셔보니 이해가 안 가는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일례로 김대중씨 가족과 비서들이 식사하는 메뉴가 완전히 다르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함윤식,『동교동 24시』서울: 우성출판사, 1987, P237~238)
옥고에 지친 김대중은 1982년 12월 전두환에게 석방을 애걸했다.
김대중이 전두환에게 보낸 석방 탄원서
全斗煥 大統領 閣下
國事에 專念하신 가운데 閣下의 尊體 더욱 健勝하심을 仰祝하나이다.
閣下게서도 아시다싶이 本人은 矯導所生活이 二年半에 이르렀아온데 本來의 持病인 股關節變形症과 耳鳴등 으로 苦楚를겪고있으며 專門醫에依한 充分한治療를받고 자渴望하고있읍니다
本人은 閣下게서出國許可만해주신다면 美國에서二三年 間滯留하면서 完全한治療를 받고자 希望하온데 許可 하여주시면 感謝千萬이겠읍니다.
아울러 말씀드릴것은 本人은 앞으로 國內外를莫論하고 一切 政治活動을 하지 않겠으며 一方 國家의安保와 政治의安定 을害하는行爲를하지 않겠음을 約束드리면서 閣下의善處를 仰望하옵니다.
1982년 12월 13일 金 大 中
편집자 주 : 맞춤법과 띄어쓰기가 틀려도 고치지 않고 원문 그대로 옮겼음. 예)閣下게서도, 아시다싶이, 이르었아온데 등 틀린 한자는 고쳤음
전두환은 이 편지를 받은 지 3일 후 김대중에게 ‘은전’을 베풀었다. 82년 12월 16일 정부대변인 이진희는 성명을 발표했다.
정부는 국가보안법과 계엄법위반죄로 형이 확정되어 청주교도소에 복역 중인 김대중을 서울대병원으로 이송, 지병을 치료토록 조치했다. 앞으로 김대중 본인과 가족의 희망을 참작, 미국에서의 신병치료를 포함하여 가능한 한 관대한 조치를 취할 방침이다. 그의 병원 이송은 과거 앓아 오던 지병이 악화돼서가 아니다. 이 같은 정부방침은 구시대의 잔재를 청산하고 국민대화합을 이룩하려는 제 5공화국의 의지와 全대통령 각하의 인도주의적 배려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미 국무성도 환영 성명을 냈다.
한국의 前 야당 지도자 김대중의 병원 이송 조치를 환영한다. 우리는 全 대통령의 개인적 이니셔티브에 의해 취해진 것으로 알고 있는 이번 조치가 한국의 정치 화합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믿는다.
김대중 석방은 일반인이 알고 있는 것처럼 미국의 압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두환의 단독 결정이었다.
이날 오전 병원 구급차를 타고 서울대병원에 도착한 김대중은 12층 1병동 귀빈 병실에 입원했다. 병원에서 간단한 치료를 받은 후 김대중은 82년 12월 23일 미국으로 떠났다. 김대중은 떠나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한다.
인제 가면
1. 잘있거라 내 강산아 사랑하는 겨레여 몸은 비록 가지마는 마음은 두고 간다. 이국땅 낯설어도 그대 위해 살리라.
2. 인제가면 언제 올까 기약없는 길이지만 반드시 돌아오리 새벽처럼 돌아오리 돌아와 종을 치리 자유종을 치리라.
3. 잘있거라 내강산아 사랑하는 겨레여 믿음으로 굳게 뭉쳐 민주회복 이룩하자. 사랑으로 굳게 뭉쳐 조국통일 이룩하자.
-1982년 12월 23일 미국으로 출발을 앞두고- (김충식 편저,『金大中語錄』1987, P322에서)
전두환은 또한 1982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특사로 광주 사태 관련 수감자 전원을 석방하였다.
김대중 스스로도 기고문에서 필리핀의 아키노 상원의원과 비교하여 자신의 수감생활에 대해 언급했다.
「아키노」씨는「마르코스」대통령의 최대 정적이요 그 때문에 미국에 추방되었지만, 나와는 달리 여행하는 데는 자유스러운 몸이었다. 나는 여권상 여행이 제한되어 미국 밖으로는 나갈 수가 없었지만「아키노」씨는 세계 어디고 마음먹은 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다. 리비아도 갔다 왔고 말레이지아도 다녀왔으며 중남미도 갔다 왔다.
그 사람은 국내에 있었을 때 투옥 당해서도 나와는 전혀 다른 감옥 생활을 했다. 나처럼 그도 사형선고를 받아 투옥되었지만 해군병영에 수감되어 있으면서, 신문이나 텔레비젼을 다 보고, 수영하고, 먹고 싶은 것을 다 먹었다고 한다. 거기다 가족이 매일 면회할 수 있었으며 부인이 1주일에 한번씩 자고 갔다. 그의 막내딸은「아키노」씨가 수감되어 있을 때 생긴 자식이었다. 내 경우 수감되어 있는 동안 신문 한 장 못보았고, 가족 면회는 한달에 한번 10분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며 한달에 한 번 편지쓰는 것 외에는 일체 글쓰는 일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김대중, “미국 체류 2년의 회고”,『신동아』1985년 7월호)
김대중은 교도소에서 좋은 대접을 받고 싶었고 먹고 싶은 것이 많았던 모양이다. 민주화 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어린 남녀학생들이 부지기수인데 이들 중 교도소에서 신문도 못보고 먹고 싶은 것도 못 먹었다고 독재정권의 비인간적인(?) 대우를 성토한 이가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누구도 안한 행동을 잘한다는 점에서 김대중의 취미는 새 역사 창조이다.
민주화 투쟁으로 옥고를 치른 사람은 너무나 많다. 이들 중에 수감 생활에 지쳐 전두환에게 다시는 반정부 투쟁을 하지 않겠으니 풀어달라고 애걸한 이는 한 사람도 없다. 김대중의 편지를 보면 다른 수감자들은 좋은 시설에서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기타 여러 가지 인간적 권리를 누리며 옥살이를 하는 데 김대중만 특별히 나쁜 시설에서 특별히 나쁜 대우를 받은 것 같다. 나이 많은 사람도 어린 사람에게, 지도자라는 사람들도 어린 학생들에게 배워야 할 점이 있다는 것을 김대중은 잘 보여주고 있다.
반정부 시위로 구속된 이들 중 간수에게 고문과 구타를 당하지 않은 이가 드문 데 김대중은 간수에게 시달린 적이 없다. 민주화 운동의 기본자세는 고난을 감내하겠다는 것이지 옥살이가 힘들다고 불평하거나, 좋은 대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김대중이 공산주의자라는 말이 얼마나 허황된 낭설인지 알 수 있다. 40년이 넘도록 고달픈 옥살이를 하면서도 정치적 신념을 굽히지 않는 비전향 좌익 장기수들은 골수 공산주의자들이다. 좌익이 모두 김대중 같다면 가혹한 형벌을 규정한 반공법은 존재 가치를 상실하므로 마땅히 폐지해야 한다.
얼핏 보면 김대중과 비슷한 역정을 보낸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 대통령의 삶을 살펴보자.
1918년 7월 18일 템부 부족 족장의 아들로 태어난 만델라는 족장직 세습을 거절하였다. 백인에 맞서 흑인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서는 흑인도 신학문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고, 대학에서 법률을 전공하였다. 1942년에 흑인으로는 최초의 변호사가 된 그는 1944년에 아프리카 민족회의(ANC)에 가입하였고 ANC 청년동맹을 결성하였다. ANC 청년동맹은 전투적인 투쟁단체였으며 ANC도 이에 영향을 받아 전투적이 되었다. 그러나 간디의 영향을 받은 만델라는 비폭력 노선을 견지했다.
1948년 흑백 분리정책인 아파르트하이트 정책이 국민당 정권에 의해 실시되자, 만델라는 이에 저항했고 결국 5년간(1956-1961) 투옥되었다. 1959년 국민당 정권은 흑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하기 위해 ‘통행법’을 만들었다. 흑인들의 항의 시위에 국민당 정권은 발포했고 69명이 죽었다(샤프빌 학살). 백인 소수 정권은 1960년 ANC를 불법화했다. 만델라는 비폭력 노선을 포기하고 1961년 11월 ANC 무장 투쟁조직인 ‘민족의 창’을 결성했다. 만델라는 내부 밀고자에 의해 1962년 8월 다시 체포되어 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963년 국가전복 기도 혐의로 다시 재판을 받고 1964년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만델라는 종신형을 선고받고 다음과 같이 최후 진술을 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흑인이건 백인이건 그 안에서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나라이다. 민중의 뜻에 뿌리를 두지 않는 어떤 권위라도 정당화할 수 없다.… 나는 백인들의 지배에 대항해 투쟁해 왔다. 또 흑인의 지배에도 대항해 왔다. 나는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사회의 이상을 소중히 여겨왔다. 필요하다면 그것을 위해 기꺼이 죽을 각오가 돼 있다.
1990년 석방될 때까지 그의 수형 생활은 험난했다. 절해고도인 로벤 섬으로 끌려가 쇠사슬에 묶인 채로 채석장에서 돌 캐는 작업까지 해야 했다. 그 오랜 수감 생활에도 만델라는 열악한 교도소 환경에 불만을 나타낸 적이 한번도 없었고 동지들의 안부에 신경을 썼다.
국제적으로 거센 비난을 받자, 백인 정부는 1984년에 20년이 넘게 수감중인 만델라에게 정치를 재개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면 풀어주겠다는 조건부 석방을 제시했다. 만델라의 인격에 감복한 백인 간수들은 정치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나간 후 정치를 재개하더라도 부도덕한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정부의 요구를 들어주고 나갈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만델라는 흑인 인권운동을 포기할 수 없고, 부도덕한 백인 정권이라 하더라도 그에 맞서 거짓 약속을 할 수 없으며, 또한 많은 동지들이 옥고를 치르고 있는 가운데 혼자만이 나갈 수는 없다고 하면서 조건부 석방을 거절하였다. 만델라가 “자유로운 사람만이 협상할 수 있다. 죄수는 어떠한 계약도 맺을 수 없다.”고 말한 일화는 유명하다. 국제 여론과 경제 재제에 견디다 못한 백인 정부는 1990년 2월 11일 조건없이 만델라를 석방하였다. (만델라의 수형생활은 모두 합치면 30년이 넘는다) 만델라는 1993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흑인 인구가 절대 다수인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아파르트하이트를 철폐하고 보통선거를 실시하면 흑인정권의 탄생은 불문가지이다. 그런데도 백인 가운데 강경한 아파르트하이트 지지자였던 드 클레르크 대통령은 만델라를 석방하고 흑백화합을 위해 만델라 정부에서 부통령직을 맡았다.
백인들은 흑인의 보복이 두렵지 않았겠는가. 백인들이 정권을 내준 오직 한 가지 이유는 만델라의 인격과 능력에 대한 절대적 신뢰감이었다. 30년이 넘는 옥고를 치렀어도 화합을 외친 만델라를 백인들은 완전히 믿을 수 있는 - 집권한 다음에 말을 뒤집고 돌변하여 백인을 박해할 사람이 아닌 - 인물로 여긴 것이다. 여기에다 백인에 대한 보복을 주장하는 흑인 과격파를 통제할 수 있는 만델라의 정치 역량도 믿었다. 만델라라고 고달픈 수형생활에서 벗어나 자유를 맛보고 가족을 보고 싶지 않았을까. 그는 진정으로 大義를 위해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다.
만델라와 김대중을 비교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김대중은 자신의 기고문과 인터뷰에서 교도소에서 풀려 미국으로 떠난 경위를 설명했다. 다음은 월간지『신동아』에 기고한 기고문의 시작부분이다.
나는 왜 미국으로 가야 했던가? 1982년 12월 13일로 기억한다. 그날 오후 청주교도소에서 복역중인 나를 아내가 면회왔다. 예정에 없던 면회였다. 아내의 말인즉 당국에서 병치료를 위해 내가 미국에 가는 것이 좋겠다고 제의해와 그 일을 상의하러 왔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제의를 한마디로 거절했다. 병치료를 한다면 국내에서 해도 충분할 것이요, 고국을 떠나고 싶은 생각이 없기 때문이었다. 아내는 알았다고 대답하면서 돌아갔다.
그런데 그 다음날 나는 이야기가 끝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다시 면회 온 아내 말이, 어제 동지들과 상의해본 결과 모두들 제의를 받아들여 미국에 가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어서 다시 권유하러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내가 미국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동지들이 결론을 내린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내가 당국의 제의를 받아들여 미국에 가야만 함께 투옥된 다른 동지들이 다 석방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점, 둘째는 71년 선거유세 때 있었던 자동차사고 때문에 생긴 고관절 변형증을 미국에 가야만 안심하고 제대로 수술받을 수 있다는 이유였다.
아내의 간곡한 권유에 나도 마음이 움직였다. 내가 미국에 감으로써 과연 나로 인해 투옥된 동지들이 석방될 수 있다면 이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나는 아내를 따라온 정부측 사람에게 미국 가는 것을 승낙했다. (김대중, “미국 체류 2년의 회고”,『신동아』1985년 7월호)
이 인터뷰에서 김대중은 미국행과 관련하여 세 가지 요점을 제시하고 있다.
1. 아내가 12월 13일 면회 와서 미국행을 권유했으나 거절했고 그 다음날 다시 와서 권유하기에 받아들였다. 2. 미국행은 전두환 정권이 먼저 제의했고 아내가 권유해서 승낙했다. 3. 자신이 이를 받아들인 이유는 다른 동지들의 석방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김대중의 주장은 세 가지 다 사실이 아니다.
1. 김대중은 12월 13일 ‘대통령 각하’ 전두환에게 신병치료차 미국에 보내달라고 ‘각하의 선처’를 앙망하는 탄원서를 보냈다. 12월 13일 찾아온 아내의 미국행 권유를 거절하고 그 다음날 받아들였다는 자신의 말과 어긋난다. 2. 김대중은 탄원서에서 “本人은 閣下게서出國許可만해주신다면 美國에서二三年 間滯留 하면서 完全한治療를 받고자 希望하온데 許可하여주시면 感謝千萬이겠읍니다“라고 씀으로서 자신이 미국행을 ‘앙망’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것은 “당국에서 제의해와… 이 제의를 한 마디로 거절했다가…그 다음날 아내의 간곡한 권유에 나도 마음이 움직여…아내를 따라온 정부측 사람에게…승낙했다“는 진술과는 맞지 않는다. 3. 김대중은 탄원서에서 오로지 ‘완전한 치료를 받고자 희망’ 또는 ‘충분한 치료를 받고자 갈 망’한다고 했다. 이것이 “다른 투옥된 동지들이 석방될 수 있다면 이를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라는 표현하고 맞나. 김대중은 동지들의 옥고에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 다.
-82년 12월 형집행정지로 감옥에서 풀려나와 미국으로 떠나면서 ‘다시는 정치활동을 않겠다’는 내용을 탄원서에 쓰셨다는데… 그리고 그걸 놓고 배신을 했다고 주장하는 측도 있는데, 그게 어떻게 된 겁니까?
“그걸 갖고 정부측에서 거짓말했다고 그러는데 그건 사실과 다릅니다. 첫째 내가 미국 가겠다고 요구한 일이 없습니다. 정부가 나보고 가달라고 한겁니다. 석방은 해야겠는데 국내에 놔두면 문제가 있으니까 미국 가달라고 한겁니다. 그때는 박정희 시대에 다친 고관절 상태가 나빠져서 미국에 치료를 하러 가야 했지만 그런데도 내가 거부하니까 이 사람들이 내 처를 설득시킨 겁니다. 내가 가줘야 광주 사람들이 풀려 나온다는 겁니다. 대개 크리스마스니 3․1절이니 이런 때 석방이 되는데, 그때(크리스마스)를 놓치면 또 서너달 간다구요.
또 가족들이, 내가 빨리 가서 수술을 받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앉은뱅이가 된다는 겁니다. 또 둘째 아들(김홍업)이 그때 공교롭게도 예비역 장군이나 전직 국영기업체 장들의 딸들하고 결혼상대가 돼서 두번이나 결혼을 못하게 됐는데, 세 번째로 대구출신 감사위원장의 딸과 알게 돼서 결혼하려는데 그것도 안되고….“
-왜 안됐습니까?
“신부감 부모들이 내 아들하고 결혼을 못시키는 거죠. 그래서 저(김홍업)도 결혼을 단념하고 미국에 가려고 하는데 여권이 또 안나와요. 그러니 아들이 30이 넘어서 나 때문에 결혼도 못해, 취직도 못해… 이러고 있는데 정부에서 내가 가면 보내주겠다는 겁니다. 그래 내가 승낙을 한 거예요
그리고 감옥에서 형집행정지로 나오게 되면 예외없이 정치를 안한다는 걸 쓰고 나옵니다. 정치 않겠다는 약속은 나만 한게 아닙니다. 2․12후에 정치 않겠다는 사람들이 이 정부에 지금 앉아 있지 않습니까? 그거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죠.“ (오효진, “행동하는 양심, 김대중,”『월간조선』1987년 8월호)
1987년 6․29선언이후 가진 월간 조선과의 이 인터뷰에서도 김대중은 몇 가지 논점을 제시하고 있다.
1. 전두환 정권이 미국에 가달라고 한 것이지 자신이 가겠다고 요구한 일이 없다. 2. 가족들이 빨리 미국 가서 수술을 받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앉은뱅이가 된다고 말한 것도 미국에 가게 된 이유다. 3. 교도소에서 형집행정지로 나오게 되면 예외없이 정치를 안하겠다는 각서를 쓰고 나오므 로 정치 안하겠다고 썼다. 4. 정치 안 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정부 인사들에 비하면 자신의 위약은 아무것도 아 니라는 점이다.
이 해명 중 1은 앞에서 해석한 글과 중복되므로 분석을 생략한다.
2는 이해하기 어렵다. 의사가 검진한 것도 아닌데 한 달에 한 번 면회 오는 가족이 어떻게 상태를 잘 알 수가 있나. 김대중의 질환은 다리의 고관절 변형증인데 이 병이 악화되면 하반신 불구가 되는지도 의문이다. 김대중의 기고문에 따르면 미국에서 의사들도 수술할 필요가 없다고 했고 김대중은 그에 따라 치료를 받지 않았다.
3은 다음과 같은 문제가 드러난다. 김대중은 정치 안하겠다는 내용이 담긴 위의 석방 탄원서를 형이 집행되고 있던 12월 13일에 썼다. 이 사실은 교도소에서 형집행정지로 나오게 되면(김대중이 형집행정지로 나온 날은 12월 23일) 예외없이 정치를 안 한다는 각서를 쓰므로 자기도 썼다는 말과 모순이 된다. 김대중은 질문자 오효진이 탄원서를 쓴 시점을 정확히 모르고 물어 온데 대해, 그것을 맞받아 형집행정지 시점에(12월 23일) 통상적 관례에 따라 썼다고 즉석에서 둘러댄 것이다.
4는 상대방이 거짓말하니 자기도 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상대방의 부도덕을 핑계 삼아 자신의 신념과 양심도 팽개칠 수 있거나, 아니면 스스로 지키지 않을 약속을 신념과 양심처럼 위장할 수 있는 자임을 드러낸 말이다.
김대중은 1992년 1월『사회평론』과의 대담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정운영 : 1982년 미국으로 망명할 때, 당시의 실력자인 전두환 씨에게 화해 내지 용서를 구하는 듯한 문건을 발표한 적이 있지요? 그 뒤 김 대표의 주변에서는 그 문제에 대한 언급을 꺼리고 있는데, 진짜로 그것을 스스로 썼습니까?
김대중 : 미국에 병 치료를 가게 해 주면 거기서 정치 활동을 하지 않고 치료에 전념하겠다고 쓴 것은 사실입니다. 그 때는 그것을 쓰지 않고는 출국이 되지 않는 입장이어서 그렇게 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그것을 안 썼으면 좋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그 때로서는…….
김대중의 석방과정에 대해 리차드 워커(Richard Walker) 당시 주한 미국대사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全文은 자료집 참조).
《1982년 9월 23일 하오 3시에, 이희호(Mrs. Kim Dae-jung)가 유명한 여 변호사 이태영 그리고 미국 선교사이자 나의 좋은 친구인 소니아 스트론(역주 : 1999년 현재 이화여대 영문과 교수)을 帶同하고 내 집무실을 찾아와서, 김대중씨가 신병 치료를 위해 석방되어 미국에 갈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간청했다.
이태영씨는 -그녀의 아들 정대철씨는 당시 김대중 지지자였다- 내가 이미 이 문제에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김대중의 처는 내가 김씨의 석방시키는데 도와준다면, 남편 김씨가 다시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도록 맹세하는 데 일조하겠다고 약속했다(Kim's wife promised me that if I could help secure his release, she would join him in pledging that he would never again engage in politics.).
나는 그녀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나는 김씨 문제로 한국 정부와 상대하면서 정치적 자산의 많은 부분을 쏟아 붓고 있었다.
나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전두환씨 주변에는 김대중씨를 다루는 한국 정부의 방식이 국제적으로 명분을 얻기 어렵다는 것을 이해하는 개화된 사람들(modernizers)이 적지 않았다.
나는 당시 내가 외무장관 이범석과 노신영 국가안전기획부 부장에게 가지고 있는 설득력을 이용했다. 이 두 사람은 나의 견해를 청와대에 전달했다. 또 청와대에서는 나의 오랜 친구인 함병춘이 김이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갈 수 있도록 전씨를 잘 설득했다. 1982년 12월 16일 DJ는 석방되어 서울대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그날 나는 세 명의 친구와 전 대통령에게 그의 결정에 감사하는 편지를 보냈다. 전씨의 결정은 청와대 강경파들의 반대에 직면했었다. 청와대는 또한 외환관리법 규정보다 훨씬 많은 돈을 가지고 미국으로 가게 해달라고 요청해 온 DJ와의 까다로운 거래에 말려들었다.
나는 전과 김의 관계가 좋지 않음을 알았다.
DJ에 대한 전 대통령의 적대감은 김대중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일그러지는 그의 표정에서 그대로 드러났는데 이 같은 적대감은 오래된 지역감정에 따른 고질적인 불신과 경멸감 때문에 더욱 강해진 듯했다.
이러한 전의 적개심은 나의 업무를 어렵게 만들었다. 아무튼 청와대의 몇몇 인사는 나의 고충을 이해했으며 조용한 외교를 펼친 노력을 높이 평가했다. …》
1986년 가을 전두환은 기자들과 점심식사를 하면서 보도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직설적인 말을 많이 했는데, 김대중 미국 망명에 관해서도 언급했다.
“김대중씨 미국 보낼 때 미국에서 아무도 부탁한 바 없다. 미국의 압력으로 보냈다 하지만 내가 보냈다. 측근들도 반대했다. 보낸 이유는 병을 고치겠다고 해서 인도적 이유와 김대중씨의 실상을 알기 위해서였다. 김대중씨가 정치를 안하겠다고 친필로 편지를 보내왔다. 병만 고치면 여생을 조용히 보내겠다고 했다. 부인 이희호씨도 불러서 만났다. 치료에 필요한 돈 다 바꾸어주도록 경제장관에 지시했다. 7만 달러를 바꾸어 갔다. 그리고 함께 데리고 갈 사람 모두 데리고 가라고 했다. 이희호 부인은 남편의 재판이 억울하다고 했다. 이에 우리나라 사법부를 모욕하지 말라고 했다.
사내새끼라면 의리 지켜야, 양심이 있어야 한다. 미국 사람들도 ‘부서진 레코드’ 라고 한다. 똑같은 말만 되풀이한다는 뜻이다. 그런 사람과 내가 대화를 해? 양심이 썩어서 탈이다.“ (1986년 9월 10일 청와대 출입기자들과의 오찬에서),
전두환은 양심이 없는 김대중과의 대화 협상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