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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현의 현대시 읽기
시와 역설‧1
-거짓말쟁이의 역설과 김수영의 시적 윤리
1. 현대시론과 역설 개념
현대시론에서 역설(paradox)은 일반적으로 표현술의 차원에서만 다루어져왔다. 현대시론에서 역설은 “모순을 통한 진리 발견에 기여하며 서로 상반되는 모순을 내포하는 복잡성을 지니는” 시적 표현의 장치로 정의된다.그러나 역설은 원래 웅변술(설득술)에 관한 학문인 고대 수사학(rhetoric)에서 다루어졌던 수사적 개념 중의 하나다. 가장 잘 알려진 역설 중 하나인 엘레아 학파의 ‘제논의 역설’에서 알 수 있듯이, 역설은 표현술보다는 논증에 관한 기술로서 다루어져 왔다. 즉, 역설은 표현의 참신성을 위해 다루어지기도 했지만, 주로 논증술의 차원에서 다루어진 개념인 것이다.
역설의 개념 변화는 중세 수사학의 성격 변화에서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롤랑 바르트의 지적처럼, 중세 시대부터 문학 이념이 시작되면서 수사학은 ‘증거 제시’가 아니라 작문과 문채文彩의 문제와 동일시되었다.공민의 문제들에 관해 말을 잘하는 웅변술에 관한 학문이었던 수사학은 공화국 체제의 종말 이후로 문채文彩를 위한 비유법과 같은 문장기술 연구로 협애화되고 말았는데,고대의 수사학이 논거발견술에서 표현술에 이르기까지의 수사적 기술 전체를 포괄하고 있다면, 현대의 수사학은 은유와 환유와 같은 보다 세밀화된 테제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근래의 이론에서는 비유법과 수사학을 거의 구분하지 않는다는 조나단 컬러의 언급처럼, 현대의 수사학은 고대의 수사학과 달리 현저히 축소되어 비유법 혹은 표현기법에 동일시되는 것이다.역설의 개념 역시 이와 같은 변화의 과정을 따른다고 할 수 있다.
역설은 원래 표현술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 못했다. 주로 아이러니의 하위범주로 다루어져 왔을 뿐이다. 17세기 바로크 시대에도 그러했고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도 역시 아이러니와 혼동되기도 했다. 역설이 현대시론의 중심 개념으로 채용되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는데, 마침내 클린언스 브룩스(C.Brooks)가 시의 본질을 역설에서 찾기 시작한다.
시의 언어가 역설의 언어라는 명제를 쉽사리 받아들이려는 사람은 별로 없다. 역설은 격렬하고 발랄하며 재치가 있는 궤변의 언어여서 영혼의 언어가 되기는 어렵다.
현대시에서 역설의 중요성은 브룩스 이전까지만 해도 그다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셈이다. 그러나 브룩스 역시 역설의 개념을 구체적으로 정의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역설에서 아이러니를 발견하기도 한다. 경이, 아이러니, 모순 등을 역설이 지닌 본질적 요소들로 간주하면서 역설과 아이러니를 중첩시키고 있는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룩스의 역설에 관한 진술이 중요한 까닭은 역설을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진리’와 연결 짓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 말하는 진리는 분명히 역설을 통해서만 접근될 수 있다.”역설이 궤변론자의 웅변술에서 진리를 내포하는 지위를 획득하게 된 것이다.
브룩스 이후로 역설에 대한 구체적 정의는 필립 휠라이트(P.Wheelwright)에 의해 이루어진다. 휠라이트는 역설을 논리학의 기초 명제들 중 하나인 ‘비모순의 원리’로부터 자유로운 진술로 규정한다. 그리고 역설을 표층적 역설과 심층적 역설로 나누는데, 심층적 역설은 다시 존재론적 역설과 시적 역설로 세분화한다.필립 휠라이트에 의한 역설의 분류는 역설을 아이러니로부터 구분되는 개념으로 독립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상식에 반하는 논리로서 궤변의 한 자리를 차지한 고대수사학의 역설과 달리 현대시론에서 중요한 개념적 지위를 획득하게 된 것이다.
2. 언술주체의 분열과 역설의 자기 지시성
역설이 현대시론의 중요한 개념이라는 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역설이 현대시론에서 중요하게 취급된 배경에는 20세기가 19세기의 합리나 논리, 연속의 개념이 부정되고 불연속의 개념으로 특징되는 시대라는 상황이 자리한다.브룩스가 시인의 진리와 과학자의 진리를 구분하면서 “과학자의 진리는 역설의 흔적이 모조리 제거된 언어를 요구”한다고 썼지만,양자역학(이를테면 ‘슈뢰딩거의 고양이’), 괴델의 역설, 칸토어의 역설 등에서 흔히 언급되고 있듯이 역설은 이미 현대 물리학, 논리학, 수학 등의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는 것이다.
역설의 뜻은 어원적으로 볼 때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의견(doxa)에 반하는 것(para)이다. 널리 알려진 제논의 역설에서 알 수 있듯이, 역설은 분명하게 타당한 추론 과정을 통해서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명제를 가진 진술을 의미한다. 즉 역설은 논리적 해명이 불가능한 진술을 의미한다. 고대 수사학에서 역설은 웅변술과 설득술에 동원되는 논리학적 성격이 강했으나, 이것이 현대시론으로 와서 모순 속에서 진리를 내포하는 진술을 의미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현대시론이 역설의 진리 내포 가능성을 중요하게 다루게 되면서 간과한 것이 바로 역설의 논리적 국면이다. 역설의 논리적 국면은 현대시론에서 또 다른 층위를 확보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그것은 논의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필립 휠라이트의 분류처럼, 역설은 ‘표층적’/‘심층적’ 역설로 구분되고, ‘심층적’ 역설은 다시 ‘존재론적’/‘시적’ 역설로 나뉘는데, 여기서 중요한 역설은 심층적 역설이다. 지금까지의 시론이 간과한 것은 이 ‘심층적’ 역설에 포함되어야 할 ‘논리적’ 역설의 국면이다. 논리적 역설에서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두 층위의 간섭현상이다. 예컨대, 화살은 과녁에 도달하지 않는다는 제논의 역설에서는 운동의 분할과 운동의 지속이라는 두 층위의 간섭이 일어난다. 베르그손은 이 두 층위의 간섭을 해명함으로써 이천 년 간 미해결의 난제였던 제논의 역설을 논파해낸다.운동을 분할 가능한 것으로 이해하는 층위에서는 화살은 과녁에 도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운동을 지속으로 파악하는 층위에서 화살은 과녁에 도달한다. 이 두 층위를 구분하지 못할 때 제논의 역설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즉, 공간은 ‘분할’이 아닌 ‘지속’의 세계다. 지속의 세계를 분할로 인식하는, ‘분절’과 ‘지속’이라는 두 층위의 상호교섭이 작용하는 역설의 구조를 짐작할 수 있다.
역설에서 발생하는 두 층위의 상호교섭이 언술주체에 적용될 때는 주로 ‘자기지시성’ , 혹은 ‘자기언급성’의 양상으로 출현한다. 자기지시성(자기언급성)은 메타의식에 해당하는데, 논리적 역설의 대표적인 예인 거짓말쟁이의 역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어떤 크레타인이 (A)‘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다.’라고 말했다.”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어떤 크레타인’의 말이 참이라면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가 되고, ‘어떤 크레타인’도 거짓말쟁이가 되므로 ‘어떤 크레타인’의 말, 즉 (A)의 문장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다.’는 거짓이 된다. 이런 역설이 발생하는 이유는 (A)의 ‘모든 크레타인’(언술내용주체) 속에 ‘어떤 크레타인’(언술행위주체)이 포함되는 자기지시성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역설의 자기지시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언술행위주체(subject of the enunciation)와 언술내용주체(subject of the enunced)의 개념을 보다 상세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에밀 벤베니스트는 발화하는 행위를 언술행위(enunciation)로, 발화된 내용을 언술내용(enounced)으로 칭하면서 각각의 주체를 언술행위주체와 언술내용주체로 구분하고 있다.다시 “어떤 크레타인이 (A)‘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다.’라고 말했다.”는 상황을 보자. 여기서 언술내용은 (A)문장인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다.’이며, 언술내용주체는 ‘모든 크레타인’이 된다. 여기서 언술행위는 (A)문장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다.’를 진술하는 행위를 말하며, 여기서 언술행위주체는 ‘어떤 크레타인’이 된다. 정리하자면 다음 <표>와 같이 된다.
“어떤 크레타인이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다.’라고 말했다.” 언술행위주체 언술내용주체 언술내용 언술행위 |
위 표에서 알 수 있듯이 역설의 자기지시성은 언술행위주체가 언술내용을 언급하면서 언술내용주체 속에 자기 자신을 포함하는 것을 의미하며, 바로 이 자기지시성이 역설의 발생 조건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역설의 자기지시성이 현대시에서는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
바로 여기서 주목해야 할 지점이 언술행위주체(subject of the enunciation)와 언술내용주체(subject of the enunced)의 분열로 인한 시의 실천윤리에 대한 자의식이다. 담화과정에서 언술행위주체와 언술내용주체는 필연적으로 분열될 수밖에 없다.(에밀 벤베니스트) ‘화자≠시인’에 기반한 ‘가면의 시학’(김준오)에서는 시인보다 화자가 중요시되므로, 시의 감상과 해석에 있어서 ‘화자’가 해석학적 중요성을 가진다. 때문에 실제 시인(언술행위주체)의 ‘실천윤리’는 시의 해석 과정에서 의미를 갖지 않는다. ‘화자≠시인’에 기반한 ‘가면의 해석학’은 사실상 시인(언술행위주체)을 시(언술내용)로부터 소외‧배제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소외와 배제는 시인에게 두 가지 모순된 권능을 부여하는데, 첫째, 자신의 시적 진술에 대해서 윤리적 책임(시적 진술과 시인의 삶이 일치해야한다는)을 가져야한다는 강박으로부터의 해방이다. 둘째, 시인과 화자의 분열이 은폐됨으로써 오히려 화자가 곧 시인이라는 환상이 자동화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시와 시인의 일치’라는 윤리적 책임으로부터 벗어난 채 작동되는 ‘시와 시인의 동일시’라는 환상이다. 이러한 환상을 깨뜨리는 것이 바로 언술행위주체와 언술내용주체의 분열에 대한 자각이다.
언술내용주체 : 언술행위주체 = 시의 화자 : 시인 |
이와 같은 유비추리는 실천윤리의 시론적 관점에서 충분히 타당한 것이다. 시(시의 화자)와 시인 사이에 일어나는 자기지시성은 분열을 초래하고 이 분열은 실천윤리의 측면에서 자기모순과 역설을 발생시킨다. 시와 시인의 분열 감각은, ‘시인=화자’의 인식틀에서 그 일치 여부에 대한 윤리적 자의식이 뒤따를 때 형성된다. 언술행위주체와 언술내용주체의 분열이 일상적 층위에서 쉽게 망각되고 마는 것은 언술행위주체와 언술내용주체를 잘 구분하지 않는 주체의 습성 때문이다. 과거의 시적 주체는 대체로 시의 화자(언술내용주체)로만 이해되었다. 그러나 현대시의 고백시적 요소에서 알 수 있듯이 시인이라는 언술행위주체의 영향 하에 있는 시적 주체 또한 드물게 존재해왔음을 주목해야 한다. 언술행위주체는 언술내용주체와 분열하면서 윤리적 주체로의 전환 가능성을 암시한다. 이는 주체의 자기 부정과 성찰이라는 윤리적 메커니즘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는 현대시의 중대한 변화 가운데 하나가 아닐 수 없다.
3. 김수영의 역설과 시적 윤리의 심층
한국시사에서 시와 시인의 분열을 가장 예민하게 자각한 시인이 바로 김수영이다. 김수영은 시인의 윤리(언술행위주체)와 시의 윤리(언술내용주체)를 일체화하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자학과 풍자를 극단까지 밀고 갔던 시인이다. 때문에 김수영의 시에서는 ‘역설’의 양상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김수영의 역설은 비유법 차원의 역설과는 거리가 멀다. 김수영의 역설은 자기지시성에 기반한 (거짓말쟁이의) 역설 구조를 보여준다. 김수영은 언술행위주체와 언술내용주체 사이에서 벌어지는 자기지시성을 통해서 역설을 자주 구사한다. 그의 시와 시론에서는 이러한 역설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죽음과 사랑의 문제는 말할 필요도 없이 만인(萬人)의 만유(萬有)의 문제이며, 모든 문학과 시의 드러나 있는 소재인 동시에 숨어 있는 소재로 깔려 있는 영원한 문제이며, 따라서 무한히 매력 있는 문제이다. <사람은 죽을 곳을 알아야 한다>고 하지만 이 말은 시에도 통한다. 어떻게 잘 죽느냐─이것을 알고 있는 시인을 <깨어 있는> 시인이라고 부르고, 이것을 완수한 작품을 <영원히 남을 수 있는 작품>이라고 우리들은 항용 말한다.
그런데 조금 더 따지고 보면 <사람은 죽을 곳을 알아야 한다>는 말은, 사람은 자기만이 죽을 수 있는 장소와 때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 되는데 이 말을 시에다 적용하는 경우에는 <자기 나름>으로, 즉 자기의 나름의 스타일을 가지고 죽어야 한다는 말이 된다.
이렇게 말하면 영리한 독자는 또 독창성에 대한 <다람쥐 쳇바퀴 도는> 식의 강화(講話)로구나 하고 눈살을 찌푸릴지 모르지만 모든 시는 ─ 마르크스주의의 시까지도 합해서 ─ 어떻게 자기 나름으로 죽음을 완수했느냐의 문제를 검토하는 방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모든 시론은 이 죽음의 고개를 넘어가는 모습과 행방과 그 행방의 거리에 대한 해석과 측정의 의견에 지나지 않는다. 죽음과 사랑을 대극(對極)에 놓고 시의 새로움이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시라는 것이 얼마만큼 새로운 것이고 얼마큼 낡은 것인가의 본질적인 묵계를 알 수 있다.(밑줄-인용자)
김수영 시론이 갖는 모호성의 본질은 인용문의 밑줄 친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다. 김수영은 고매하고 지조 있는 죽음을 사유하고 있는데, 이 죽음을 “시에다 적용하는 경우”에는 “자기의 나름의 스타일을 가지고 죽어야 한다”는 말로 진술한다. 곧이어 “이렇게 말하면 영리한 독자는 또 독창성에 대한 <다람쥐 쳇바퀴 도는> 식의 강화講話로구나 하고 눈살을 찌푸릴지 모르지만”이라고 독자의 비판의 의식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상 김수영의 자의식에서 비롯된 자기비판이다. 어쨌든 위 인용에서 중요한 것은 “모든 시는 어떻게 자기 나름으로 죽음을 완수했느냐의 문제를 검토하는 방법”이다. 이때 죽음은 매우 예민한 문제가 된다. 김수영은 죽음을 시인(언술행위주체)과 시의 화자(언술내용주체) 경계선 위에 걸쳐두고 있는 것이다. 죽음의 테마를 다루는 김수영의 시론은 항상 이처럼 첨예한 긴장감을 지닌다. “진정한 참여시”는 “행동주의들의 시”임에도 이들이 “추구하고 있는 것은 하나의 불가능이며 신앙”이 되고 마는 이유는 “외부”(언술행위주체)와 “내부”(언술내용주체)의 분열 때문이며, 그래서 시인은 “외부와 내부는 똑같은 것”, 그리고 “그것은 죽음에서 합치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요컨대 김수영의 시론은 죽음을 중심에 두고 있으며, 그것은 궁극적으로 “죽음을 극복하는 시”, 즉 죽음을 시(언술내용주체)의 것이 아니라 시인(언술행위주체)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차원을 지향한다. 그러나 진정한 참여로서의 죽음의 문제는 시인에게 쉬운 일이 아니다. 바로 여기서 시인(언술행위주체)과 시(언술내용주체)의 분열이 발생하며, 이 두 층위의 자기지시성에 의해서 역설의 고통이 발생하게 된다.
사람들은 내 말을 믿지 않는다
시평詩評의 칭찬까지도 시집의 서문을 받은 사람까지도
내가 말한 정치 의견을 믿지 않는다
봄은 오고 쥐새끼들이 총알만한 구멍의 조직을 만들고
풀이, 이름도 없는 낯익은 풀들이, 풀새끼들이
허물어진 담밑에서 사과껍질보다도 얇은
시멘트 가죽을 뚫고 일어나면 내 집과
나의 정신이 순간적으로 들렸다 놓인다
요는 정치 의견이 맞지 않는 나라에는 못 산다
그러나 쥐구멍을 잠시 거짓말의 구멍이라고
바꾸어 생각해 보자 내가 써준 시집의 서문을
믿지 않는 사람의 얼굴을 사마귀나 여드름을─
그 사람도 거짓말의 총알의 까맣고 빨간 흔적을 가진 사람이라고─
그래서 우리의 혼란을 승화시켜 보자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일본 말보다도 더 빨리 영어를 읽을 수 있게 된,
몇 차례의 언어의 이민을 한 내가
우리말을 너무 잘해서 곤란하게 된 내가
지금 불란서 소설을 읽으면서 아직도 말하지
못한 한 가지 말─정치 의견의 우리말이
생각이 안 난다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의 부피가 하늘을 덮는다 나는 눈을
가리고 변소에 갔다 온다
사람들은 내 말을 믿지 않고 내가 내 말을 안 믿는다
나는 아무것도 안 속였는데 모든 것을 속였다
이 죄에는 사과의 길이 없다 봄이 오고
쥐가 나놀고 풀이 솟는다 소리없이 소리없이
나는 한 가지를 안 속이려고 모든 것을 속였다
이 죄의 여운에는 사과의 길이 없다 불란서에 가더라도
금방 불란서에 가더라도 금방 자유가 온다 해도
- 김수영 「거짓말의 여운 속에서」 전문(1967.3.20)
김수영의 많은 시들이 그렇겠지만, 이 시는 김수영의 역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우선 1연을 보자. “사람들이 내 말을 믿지 않는다”고 했을 때 “내 말”은 시인의 자신의 “정치 의견”이다. “시평詩評의 칭찬”과 “시집의 서문을 받은 사람”조차도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 이유는 언술내용주체(화자, 서술자)와 언술행위주체(시인)의 간극 때문이다. 김수영(언술행위주체)은 시를 쓰면 쓸수록 자신의 언술내용주체를 도저히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 있게 된다. 여기서 비롯된 윤리적 자의식이 자기 폭로의 시를 자주 촉발하게 되는 것이다. 시인으로서의 삶이 거짓이라면, 시인이 쓴 시와 시론 역시 거짓이 될 수밖에 없다. 시를 쓰고 시론을 쓸수록 시인은 거짓으로 가득 차게 된다. 그렇다면 글을 안 쓰는 게 상책이고 일본어보다 서툰 한국어 글쓰기가 자기 보호책이 되기도 하지만, 시인은 결국 “우리말을 너무 잘해서 곤란하게 되”고 말았다고 고백한다. 이 ‘곤란함’은 “아직도 말하지/ 못한 한 가지 말―정치 의견의 우리말”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바로 그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정치 의견의 우리말이 생각 안 난다”고 말하고는 곧바로 “거짓말 거짓말”이라고 자신을 힐난한다. 그리하여 “거짓말의 부피가 하늘을 덮”게 되고 “사람들은 내 말을 믿지 않고 내가 내 말을 안 믿”게 된다고 진술한다. 김수영은 죽음에 이를 수 있는 글쓰기의 한계선을 넘지 않는 스스로를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시에서 가장 중요한 역설의 문장이 출현한다. “나는 아무것도 안 속였는데 모든 것을 속였다”. 이 역설의 문장에 김수영의 시적 수치심이 자리 잡고 있음은 물론이다. 시인의 침묵은 때로는 모든 것을 속였다는 자기반성을 초래한다. 김수영은 아무것도 속이지 않았지만 혁명과 죽음의 윤리 위에서는 모든 것을 속인 것이 된다. 그리고 다음 문장. “나는 한 가지를 안 속이려고 모든 것을 속였다”. 이 역설의 문장에서, 모든 것을 속여서라도 안 속이려고 했던 “한 가지”는 무엇을 말하는가. 바로 시인으로서의 양심이 아닐까. 김수영은 양심을 안 속이려고 열심히 글을 썼으나, 그것은 “모든 것”을 속인 것이 되었고 그 “모든 것”에는 자신의 양심마저 포함된다. 시인의 양심을 충족시키려 했던 모든 글쓰기가 결국은 자신의 죽음이 빠진 거짓의 글쓰기였다는 자각을 이 역설의 문장은 드러낸다. 다시 말해 시인의 양심을 실천하기 위해서 열심히 글을 써왔으나 결국 그 글들이 모든 것을 속인 것이 되었다는 자각 말이다.
중요한 것은 김수영 시의 역설이므로 이를 보다 명료하게 살펴보자. “나는 아무 것도 안 속였는데 모든 것을 속였다”가 드러내는 역설은 언술행위주체로서의 ‘나’와 언술내용주체로서의 ‘나’의 균열에서 비롯된다. 이 문장은 이어진 문장으로서의 겹문장이다. 이를 두 개의 홑문장으로 나누면 다음과 같다.
(A) 나는 아무 것도 안 속였다
(B) 나는 모든 것을 속였다.
(A) 문장의 ‘나’는 시적 화자로서의 ‘나’, 즉 언술내용주체로서의 ‘나’에 해당한다. (B) 문장의 ‘나’는 실제 시인으로서의 ‘나’, 즉 언술행위주체로서의 ‘나’에 해당한다. 언술내용주체인 시적 화자가 언술행위주체인 시인을 언급해낼 때, 시적 화자이기도 하고 시인이기도 한 ‘나’는 아무 것도 속이지 않은 존재이자 모든 것을 속인 존재가 되는 역설을 구현해내는 것이다. 시적 화자(언술내용주체)와 시인(언술행위주체) 사이에 일어나는 자기지시성은 앞서 언급한 거짓말쟁이의 역설과 동일한 구조를 보여준다. 거짓말쟁이의 역설과 마찬가지로 김수영의 시에서도 ‘자기지시성’(자기언급성)의 문제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역설이 발생할 까닭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역설의 문장에서 주체는 언술행위주체와 언술내용주체라는 두 층위로 분열된다. 김수영의 시세계 속에서 언술내용주체와 언술행위주체의 관계는 시와 시인의 관계와도 같다. 즉 앞서 언급했던 다음과 같은 유비추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언술내용주체 : 언술행위주체 = 시의 화자 : 시인 |
언술내용주체와 언술행위주체가 교섭하는 순간, 자기모순과 역설이 발생한다. 김수영의 시에서 그것은 ‘시인’(언술행위주체)이 자신의 ‘시의 화자’(언술내용주체)를 좇아가지 못한다는 자기 인식에서 비롯된다. 그러니까 시가 곧 행동이 되지 못한다는 부끄러운 자의식에서 역설이 발생하는 것이다. “나는 아무 것도 안 속였는데 모든 것을 속였다”. 언술내용주체(시의 화자)로서는 아무 것도 안 속였으나, 언술행위주체(시인)로서는 모든 것을 속였다는 고백이 바로 김수영의 역설이다. 알려진 것처럼 김수영은 4월혁명 이후 시와 시인의 분열 증상을 극심히 앓은 바 있다. 주로 김수영의 후기시에서 발견되는 역설은 바로 이 논리적 역설, 즉 거짓말쟁이의 역설로 인한 것이다. 김수영의 시에서 발견되는 역설의 양상은 현대시론의 윤리적 심층을 형성한다고 할 수 있다.
박대현
2005년 부산일보에 문학평론이 당선됐다. 평론집으로는 『우울한 것의 추락』, 『혁명과 죽음』, 『황홀한 아파니시스』 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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