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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부터 오늘 낮까지 눈이 내리고
강풍이 휘몰아치는 설명절 전날이다.
제설차가 눈을 치운다고 하지만 이미 차를 운행하기 어려운 도로 상태다.
눈 구경하려고 밖으로 나온 현우의 모습(2009년 1월 25일 오전)
이번 명절에 꼼작 못하고 이 산 속에서 지내야될 것 같다.
아랫집 할아버지가 서울 아들네로 명절을 지내러 가셨기 때문에.....
나와 할아버지 한 사람은 남아있어야 마음놓고 집을 며칠씩 비울 수 있었는데.....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바로 서울 아들네로 제사를 옮겨버리신 것이다.
현우가 눈이 오기 전날 내려왔다. 요 며칠 동안 속이 좋지 않고 미열이 있어서
현우 엄마는 못 올 거라고 했는데 .....포항 현우 외가댁에 가기로 하고 서울에서 출발해서
대전까지 버스를 타고 온다고 연락이 와서 나는 대전까지 마중나갔다.
마치 이산 가족이 상봉하는 것처럼 기뻤다!
자칫하면 홀로 명절 동안 지낼 가능성도 있었는데 다행이다.
오늘 쯤 포항으로 떠나려고 했는데
눈 속에 갖혀서 꼼짝 못하고 이렇게 다시 고향생각에 젖어
글을 계속 연재하려고 한다. 옛 앨범을 찾으니 잊고 있던 사진들도 보여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려고 스캔 해서 저장하기도 하면서.....스캐너도
거의 5년만에 다시 꺼내서 사용해 보았는데도 제법 쓸만하다.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아! 양오리를 멀리보고 다리 위에서 있었던 어머니와의 추억 이야기까지 했다.
엄마 등에 엎혀서 하도 울어머니가 나를 냇가로 떨어뜨리려고 했던.....
이 사진 속의 아기가 나일지 형님일지 모르지만 이 분이 어머니시다.
형님이라면 1956년 쯤이고 나라면 1959년 쯤
월곳 선학골 우리집 앞에서.... 연자방아도 보이고....
사랑채를 새로 신축하고 난 후에 찍은 듯하다. 나중에 초가지붕을 걷어내고
다시 기와를 얹었던 이 집은 1997년쯤 형님이 헐어버리시고
새로 서양식 벽돌집으로 신축했다.
이 분이 1987년 6월 17일 돌아가신 할아버지신데 뒤에 보이는 집 사랑채가 기와로 바뀐
것을 볼 수 있다.
제법 규모가 큰 전형적인 경기도 농가집 형태였는데....
지금의 고향 본가 모습이다. 세월의 흐름따라 변해간 집의 형태를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다.
어머니 사진 뒤 배경의 집 이야기를 하다가 우리집의 변천사로 빠지고 말았다.
이야기가 이렇게 밑도 끝도 없이 삼천포로 빠지니..... 뭔 일인지 모르겠다.
외가동네가 저만치 보이는 그 냇가는 여름방학 때 추억이 많은 곳이다.
외사촌들과 함께 여름 물놀이를 하곤 했다.
월곳리에는 물놀이 할 곳이 마땅치 않았던 데 비해서 양오리에는 비교적 물놀이 할 냇가가
꽤 있었다. 월곳리에서 물놀이를 하려면 옥개(?) 방죽까지 가야했고 바다는 예나 지금이나
접근 금지지역이고.....그래서 난 지금도 수영을 잘 못한다. 개헤엄이나 조금 할 줄 알지!
아니면 초여름 모내기 전에 물이 깊은 논에서 헤엄을 쳤던 기억이.....참 깨끗했던 것 같다.
무슨 미역풀 같은 수초도 많았고 우렁이도 있었고 가끔 물뱀이 발뒷꿈치도 물고.....
물론 거머리도 달라붙었다.
그런데 양오리에는 산넘어 고염산에서 흐르는 냇가의 수량도 풍부했고
자주 물고기를 잡던 그 다리의 냇가는 물놀이 하기에 안성마춤이었다.
4학년 때 여름방학 때였나?
그 냇가에서 놀다가 유리병 조각에 외쪽 엄지발가락을 베이고 말았다.
깊은 상처였는데도 놀 욕심에 대충 초매고 놀았더니 곪는 바람에 그해 여름방학은 망치고 말았다.
그 때는 다쳤다고 어른들께 이야기도 하지 않았던 시절이니.....
지금도 그 상처는 내 왼쪽 엄지발가락에 뚜렷하게 남아 있다.
아마도 병원에 가서 꿰매야했던 깊은 상처였으리라.
이런 상처는 내 오른쪽 무릎에도 한 10센티 있는데 5학년 여름방학 때였는지 모르겠다.
여느때처럼 월곳리 집에서 어른들이 일하는데 새끼줄을 낫으로 잘라드리는 일을 하고 있었다.
발로 밟고 팽팽하게 잡아당기며 낫으로 끊는 작업이었는데 낫이 그만 내 무릎을 탁 치면서 깊은 상처가 생겼다.
그러나 들기름을 바르고 비닐로 감는게 치료의 전부였나 보다.
그 상처가 여름의 습한 조건과 들어맞아서 심하게 곪았고 한 달 내내 고생했다.
병원에 가서 꿰매고 항생제를 며칠만 먹었으면 금방 나았을 것을.....
외가댁에 도착하면 외할머니가 버선발(여름엔 맨발이셨겠지?)로 뛰어나와 반겨주셨다.
자식이 죽으면 마음에 묻는다는데..... 둘째딸이었던 어머니를 33살의 꽃다운 나이에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내고 그 분신인 외손주들을 보는 외할머니의 마음은 오죽했으랴!
사진은 형님을 안으신 어머니와 처녀 때의 막내 이모님
한 동안 외할머니는 우리들을 보자 마자 눈물을 흘리셨다.
마치 자기 딸의 모습을 우리들에게서 그리는 듯이.....
그렇게 환영을 받으며 우리는 외할머니 댁에서 즐거운 여름방학을 보냈다.
외할머니 댁에는 우리와 같은 또래의 외사촌들이 있었다.
누나들로 순녀, 미자,애순, 현순이고 동생들로는 연중, 미연.
어머니가 없었어도 외할머니의 배경은 대단해서 우리는 외가집에서도 기죽지 않고 잘 놀 수 있었다.
외할머니가 없었으면 아마 우리는 외가댁에 갈 이유가 없었을 것이고 간다고 해도 환영받지 못했을 게 뻔하다.
외숙모가 고마우신 분이셨다.
고모도 없는 조카들이 와서 며칠씩 귀찮게 해도 싫은 소리 한 번 하지 않으셨으니.....
호랑이 같은 시어머니(외할머니) 수발 들랴 자기 자식들 챙기랴
종종걸음으로 바쁘게 사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한 살 위 현순 누나는 '총각'이라고 아명(兒名)이 있었는데
아들이 귀한 외가댁에서는 외숙모가 딸만 내리 낳자 넷째 딸을 총각이라고 불렀다.
다음에 아들을 낳으려고.....
그러나 기다릴 수 없었던 외삼촌은 읍내에서 아들을 보겠다고
첩(비하할 뜻은 없음. 마땅한 용어가 생각나지 않아서....)을 얻으신 것이다.
외삼촌은 한량이었다. 읍내에 나가서 인삼거래를 했는지 돈을 많이 벌으셨다.
어머니는 키가 작은 데 비해 외삼촌은 외할아버지 닮으셨는지 키도 크고 잘 생기셔서 여자들이 쉽게 따랐나 보다.
그런데 첩과 사이에 아들을 낳고 나서 몇개월 있다가 바로 외숙모에게서 아들이 태어났다.
결국 첩의 아들이 장손으로 호적에 올라가게 된 것이다.
첩은 세상을 다 얻은 거 같았겠지만 외숙모는 기가 막혔을 것이다.
지금은 어떻게 집안 관계가 정리되었는지 모르지만
끝까지 여필종부를 택한 외숙모가 모든 재산을 관리하는 것을 보면 그 애증의 관계는
조강지처의 승리로 끝났는가 싶다.
외삼촌은은 젊었을 때 읍내 부인과 늘 살림을 하고 양오리 본처에게는 거의 오지 않았다.
그래도 동생 미연이 하나 더 생겼으니 첩을 얻고도 본처를 아주 멀리는 하지 않으셨나 보다.
하지만 조강지처는 조강지처인가?
말년에 당뇨병 등으로 합병증을 얻어 고생하실 때는 양오리 본처의 수발을 받다가 돌아가셨다.
내가 37세에 서품받고 원주로 떠나기 전에 찾아뵈었을 때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계신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장례식에도 못 가 뵈었다. 젊었을 때 당신 마음대로 사시더니
죽음에 임박해서는 몇 년을 꼼짝없이 방 안에 갇혀지내시는 불행한 말년을 보내셨다.
외숙모는 한스러운 삶을 사시다가 마지막에 조강지처의 대우를 받고 지금까지 외가댁을 지키며 사신다.
외할머니도 한(恨) 많은 세월을 사셨단다.
이름은 '한갓난'이다. 아들 둘을 낳고 외할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뜨시자
상당히 많은 재산을 관리하면서 식솔들을 이끌어나가셨다.
키가 5자(1미터 50센티)도 안되는 것을 보면 우리 어머니는 외할머니를 그대로 닮으신 것이다.
어머니 처녀 때 직은 사진. 아 사진은 마치 내 여동생의 어릴 때 모습과 비슷하다.
이렇게 해서 외할머니에게서 어머니가 어머니에게서 여동생으로 이어지는 계보는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외할머니는 90세가 넘어서 돌아가셨다. 큰 딸(큰 이모)도 바로 옆에 살았는데 큰 이모부도 돈이 좀 생기자
바람이 나서 이모를 자주 찾아보지 않았다. 다만 막내딸(작은 이모)만은 학교 선생에게 시집을 가서 지금까지
부평에서 잘 살고 있다. 외할머니는 큰 딸이 늘 고생하는 모습을 곁에서 늘 보면서도
둘째 딸은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난 것을 가슴에 묻고서 얼마나 한(恨)이 많으셨겠느냐만
장수의 축복만은 받으신게 분명하다.
아! 우리 어머니도 외할머니의 절반의 세월만 사셨어도 얼마나 좋았을까!
이모님이 두 분이 계셨지만 이상하게 우리 형제들은 고모님들과는 가깝게 지내면서
이모님과는 거의 왕래를 하지 않았다.
둘째 딸인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면 큰 이모나 막내 이모가 더 우리를 보살피려고 했을 텐데.....
우리 형제들은 할머니가 키우셔서 그런지 고모님들과 지금도 아주 가깝게 지내는 편이다.
그마저도 난 자주 찾아뵙지도 못해서 늘 마음에 걸린다.
외가댁의 역사를 내가 잘 이해 못하는 부분이 있어서 혹시 돌아가신 분들에게나 살아있는 분들에게
누가 될지도 모르지만 내 입장에서 정리하고 싶은 외가댁 이야기이니 넓은 마음으로 용서해 주기를 바라면서....
외가댁에서 방학마다 지냈던 추억들은 월곳리에서와 다르게 뭔가가 흥분되고 기대되는 일들이 많았다.
그 때는 참외나 복숭아 같은 여름과일을 사먹는게 쉽지 않았던 시절이었는데도 외가댁에서는 자주 먹을 수 있었다.
그만큼 여유있는 동네였다.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양오리는 화문석의 원산지다.
화문석은 주로 안여자들의 일거리였다.
화문석을 짜는 마을이었기에 양오촌이나 간촌에 가면 늘 여자들의 밝은 웃음 소리가 들렸다.
우리 동네에서는 처녀들이 읍내주로 견직공장에 취직하여 돈을 벌러 다녔는데
양오리에서는 화문석을 짜는 일이 쏠쏠했기 때문에 아가씨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아가씨들이 많으면 총각들도 타지로 떠나지 않는 법! 마을엔 늘 활기가 넘쳤다.
여느 집을 기웃거려도 왕골 말리는 광경이 보일라치면
집 안 대청마루에서는 어김없이 화문석짜는 아녀자들의 이쁜 모습들이 눈에 띄였다.
한 여름이면 농촌에 돈이 궁해지는 게 다반사인데 양오리에서는 현금을 쉽게 만질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화문석 하나에 수십만 번의 손놀림을 해야하니 얼마나 힘들었겠냐만
그 동네의 여유있는 삶이 어린 내 눈에는 마냥 부럽게만 보였다.
우리집에는 막내 고모까지 서울로 대학 갔다가 초등학교 교사로 떠나버리고 난 후에는
젊은 여자들을 한 동안 볼 수 없었는데.....양오리에는 우리 어머니 또래의 여자들이 많았다.
우리 형제를 보고 어머니와 친했던 분들은 알아보고 안스러워하던 기억도 난다.
나도 그분들의 모습에서 어렴풋이 어머니의 흔적을 찾아보기도 하고.....
간촌 마을 언덕에는 공회당도 있었는데 일제시대에 지어진 목조건물이다.
이곳은 청춘남녀의 사랑이 은밀하게 이루어지던 곳으로 연애소문도 많이 들렸다.
하지만 새마을 운동의 여파로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옆에는 이상화라는 같은 나이 친구도 있어서 함께 어울려 놀기도 했다.
1970년대 전후로 베이비붐 세대인 우리 또래는 농촌 어딜가나 바글바글했으니
지금 우리 아들녀석처럼 심심해서 다시 도시로 떠날 필요가 없었다.
설명절에 덕유산 집에 와서도 심심한 끝에 할 수 없이 공부하는 현우의 이런 모습은 우리기 어린 시절에는
있을 수 없었다. 점심도 굶고 동네 애들과 마음껏 뛰어놀 수 있었는데.....
이 녀석은 심심하니까 무슨 일본만화영화에서 나오는 하야테 라이거라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이 그림은 보기만 해도 머리가 빙빙 돌 정도로 복잡하다.
외가댁 동네는 1980년대 이후 심한 격동기를 겪어야 했다. 나도 중학교 때까지는 방학때마다 가다가 고등학교
이후부터는 거의 외할머니를 찾아뵙지 못했다.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화문석 짜던 처녀들은 더 이상 농촌에 머물러 있지 않게되었고
여유가 생기자 공부한다고 도시로 도시로 떠나 버린 것이다.
우리 사촌들도 결혼하면서 다 떠나버리고 외가댁에도 외할머니와 외숙모(청상과부처럼 살았던 거나 마찬가지니)
두 청상과부만 남아서 집안 살림을 꾸려나가고 있었다.
간촌 마을에서는 화문석 짜서 농가수입을 올리는 것이 줄어들자 소나 돼지를 기르기 시작했다.
한 두마리씩 기르는 것이 아니라 집 주위에 축사를 세우고 수십마리씩 기르니
풍요롭고 웃음꽃피던 마을은 순식간에 가축분뇨의 냄새로 진동하게 되었다.
나도 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끊임없이 고민하며 방황하던 시기를 보내고
거의 20여년 만에(37세) 찾아갔더니 마을은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활기가 사라진 지 오래고
마을엔 몇 몇 사람들만이 소와 돼지를 키우며 생활하는 여느 농촌풍경과 다를 바 없었다.
어린 시절 외가댁에서 지냈던 아름다운 모습도 이제 추억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다행인 것은 요즘 다시 웰빙 바람을 타고 손으로만 짜는 강화 화문석의 가치를 인정받았는지
외가동네에 화문석문화관이 생기고 농촌체험 같은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사람들 때문에 다시 활기를 되찾고 있다.
어머니가 양오리에서 월곳리로 시집오실 때
가지고 오신 혼수품 중에 화문석이 아직도 집에 보존되어 있을만큼 화문석은 친환경수제품이다.
내 어머니를 낳아주신 외할머니 댁이 대대로 잘 살아간다면
그 후손인 내 마음은 잠시 겪었던 어린 시절의 슬픔을 훨훨 날려 버리고 한바탕 웃을 수 있을 것 같다.
어쨌든 이제는 무언가 어머니의 흔적을 더욱 아름답게 승화시킬 나이가 된 것 같다.
그래서 언젠가 고향에 가거든 반드시 외할머니 묘소를 찾아뵙고 한 참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그리고 흙 한 줌을 떠서 덕유산 집으로 가지고 오려고 한다.
가능하면 외가댁에 심겨져 있는 나무 한 그루를 가지고 와서 심어야겠다.
월곳리 본가에서는 이미 여러가지 나무를 가지고 와서 심었으니.....
반백년을 살고 나서야 이런 날개짓을 할 수 있게되었으니 참으로 어리석지만
늦게나마 다행이다 싶다.
그래! 이제부터 새로운 삶을 출발하는 것이다. 현재의 나는 과거에 행복했던 삶의 결과만은 결코 아니다.
과거에 불행했던 삶도 내 삶 속에는 그대로 녹아들어 있음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외할머니 댁 가는 길에서 아련히 떠오로는 어릴 때의 추억들은 시공(時空)을 초월해
"지금 여기서" 나와 내 가족의 삶 속에 늘 남아 있으리라!
((외가댁 가는 길이 무슨 소설처럼 되어버렸다.
초등학교 동창들과 이야기를 나누려고 시작했는데 쓰다보니
내 삶을 정리해보는 기회로 변해버렸음을 이해해 주면 좋겠다.
우리 친구들도 각자 자기의 추억을 정리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첫댓글 ^^* 인찬 친구님의 옛 이야기에 울 8회는거움을 되찾았답니다. ^^ 현우의 자상한 아버지 역할이 정겹게 묻어나는 참 좋은 아빠네용.^^ 그나 저나,, 포항을 갔어야 사람이 살아가야 되는 이유를 더 실감하였을텐데,,,, 그 넘의 눈땜에... 난,, 지금 친정에서 조카들이 시간을 잊은채 게임을 하면서 거워하고, 어른 남자 4명도 정신없이 놀이에 빠져있어 오늘밤,, 잠은 반납을 하여야 할듯...
오두가도 못하는 산골에서 명절에 얼마나 외로웠어?ㅋㅋ 7~ 80 년도에 화문석 강화에 특산물이였고 강화에서만 생산된 수공예품이였지 ! 나도 군대 제대하고 잠시 쉬는동안 명석 친구와 같이 화문석을 짜 팔아 놀러 가곤 했단다 ! 명석 친구도 화문석 잘 짜었는데, 왕골 심어 초 여름 새벽에 왕골을 따서 째서 창고에 연탄을 피워 말리고 푸른빛 나는 왕골을 바랜다고 물에 적셔 햇빛에 말리면 탈색되어 땟갈좋은 흰색이 되고 빨,주,토,초 파,남,보 물감드려 무늬를 놓고 또 마령이라는 (바닷가에나는 풀)것을 째서 말리면 흰빛이 나 학 무늬에 넣어 만들곤 했지, 하지만 이젠 화문석 짜는 모습을 강화에서도 볼수 없어 애석 하기만 해 !
앗! 화문석에 대해서 거의 전문가 수준이시군! 난 옆에서 보기만 했지 잘 몰라. 물론 왕골 째서 말리고 거둬 들이는 것을 많이 해 보았지만.....인삼밭 지붕에 많이 말렸던 기억이.....선환친구에게 그런 아기자기한 추억이 있었다는 게 신기하네..... 참 섬세한 작업과정인데....20대 중반의 건장한 청년들이 앉아서 화문석을 짰다는 추억 사진이라도 한 장 있었으면 좋겠네 ㅎㅎ
옛추억의 글 잘 읽었슴다. 그리고 어머님의 모습뵈니 가슴뭉클하며 정말 아련하게 기억되는 모습이야 그 모습에서 인순이의 그림자가 있고 처음 현우 엄마의 모습을 보았을때의 느낌도 보이는데 할아버지의 정겨운 모습 또한 기억난다. 희끗 희끗 하고 긴 수염을 보며 왜 수염색도 하얗게 나냐고 질문하기도 했었는데 외가댁을 상세하게 기억하는 글을 보니 어머님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절절하구먼
지금까지 살아가면서 어쩌면 내 삶의 화두였던 것 같아 이제 그 화두의 끈을 서서히 내려놓을 수 있엇서 기쁘고 이렇게 글로 정리하고 나니까 더 이상 혼란스럽지 않고 속이 후련한 기분이야 이런 글을 읽어주는 친구들이 있다는 게 너무 고맙기 그지 없다. 아마 읽어줄 사람이 없었다면 이런 글을 쓸 필요도 없었구.....그러면 난 그 화두를 무덤 속까지 가지고 가야겠지 울 친구들과 함께 긴긴 겨울밤을 이야기하면 지낼 수 있어서 너무 좋다
그래 너의 글을 읽으면서 가슴 뭉클한 부분들이 옛날의 그리움으로 자리잡는다. 이렇게 옛일을 서슴없이 쓸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편안해 졌다는거겠지 하여간 나도 너무 좋다
좋다니 나도 좋다.....
인찬후배의 글을 보니 고향의 향수를 비롯해 참 많은 것을 느끼게 합니다. 내가 경남 사천비행장에 2년여 기간동안 근무했던지난 시간이 있었음에 후배의 근황을 진작에 알았으면하는 아쉬움을 또한 가져봅니다. 하지만 가끔 대한성공회 부산교구 산청교회에 수양쌓으러가니 기회가 된다면 들러가리라... 정말 리얼한 가족 계보소식으로 인해 마음의 고향을 그리는 기회를 준것에 감사를 표합니다. 참! 37세에 서품을 받았고 아들까지 있다면 성공회 신부님? ... 더욱 더 궁금하구만~~~
아! 선배님 기억이 아련합니다. 상익 아저씨네 갈 때 자주 뵙기도 하고....늘 제게 잘 대해 주셨던 기억도.....성공회에 열심히 다니시는군요. 다음에 저희집에 오시면 여러가지로 지난 이야기도 나누시고 ㅎㅎ 정말 반갑고 감사합니다.
인찬친구!?너무소중한 엣추억의글 . 가슴깊은 곳에서 스며나오는 아련하고 때로는가슴 뭉쿨한~~~눈물 까지 훔쳐가며 뎃글까지 꼼꼼이 읽고나니 쾌 많은 시간이 지났네요. 하여간 시간이 흘렀으니 과거인것을 앞으론 너.나. 할것없이 잘살다 위에 계신분이 부르시면 가야할 인생인것을 ```
과거의 잘못된 삶도 결국은 현재의 나를 이루어낸 역사라는 걸 이제야 느껴요 경님친구를 만나게 되어 또 하나의 인생의 동반자를 얻게 되니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몰라요 무심했던 나를 친구로 받아주는 동창들의 환대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행복하고 기쁘다오 오늘 나도 다시 한 번 내가 쓴 글을 읽어보니 좀 애절한 내용이 많네요 기쁜 추억을 써야 하는데 그런게 로 없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