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동산에 올라(1)
글 배 시 창
옛 동산 오르는 길 비탈진 산길
엄마 몰래 살금살금 뒤 따라 오르던 길
그 길은 한숨 쌓인 엄마의 나뭇길
강산이 다섯 번 바뀐 후에야
우리 엄마 나뭇길 걸어 보았네
이 몸도 육십 고개 넘어서 보니
오르는 숨결이 옛날 같지 않구나
숨결 몰아쉬며 가는 길섶에
그 바위 그 소나무 그 자리에 서있네
엄마가 쉬어 가던 바위에 앉아
소나무 가지 열고 내려다보니
숭어잡이 돛단배 흘러나가던
샛강 앞 갈 숲 속
초가삼간 우리 집
이제 그 모습 꿈길에서나 찾을까
강선대 승학산 봉우리만 남았네
통,통,통 추억의 뱃소리
을숙도 휘돌아 명지로 가는 뱃길
우리 엄마 그 배타고 감옥 갈 때에
뱃머리 부여잡고 울부짖던 젓 먹이
어느새 세월 흘러 환갑 나이로구나
광활한 갈 숲 메워 아파트 짓고
뱃길 막아 하구언 만들었네
우리엄마 다시 살아 여기 온대도
정든 땅 길 못 찾아 헤매실 테지
흰 구름 한 조각 승학산 넘어가네
하얀 수건 쓴 우리엄마
나뭇짐 이고 산길 내려가네
나도 뒤 따라 내려가네
어린자식 넘어질까 돌아보고 또 보면서
2007년 5월 25일 하단 앞산에서
(註): 시를 쓰고나니 지나간 일들이 생각난다. 어려운시대에 태어나 가정을 택 할 것인가, 민족을 택할것인가 기로에 서서 고뇌했던 愚湖 裵 在 晃 아버님이 겪어야 했던 불행한 가정사를 적어본다.
일제는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명목으로 한글말살정책을 시도하였다. 그래서 국민학교의 한글교습시간도 없애버렸다. “한민족의 고유한 말과 글이 없으면 알맹이(민족혼)없는 보리쭉정이와 같은 민족이 되고 말 것이다” 生夫인 晩山 할아버지의 탄식을 들어시고 할아버지와 의논끝에 아버지는 배움의 길을 떠난다. 우선 한글보급에 필요한 교육을 받기 위해 상경, 주시경 한글학교와 남궁억 경성학원을 졸업하였다. 그리고 남궁억 선생의 추천으로 황해도 오산학교에 교편생활이 시작된다.이 때가 아버님 나이 20세가 되던해이다. 재직중에 읽은 심훈의 소설 상록수에 감화되어 품은 뜻을 추진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고 교편생활을 끝내고 경남진영으로 낙향할 준비를 하게된다.
낙향하기 육개월 전쯤에 오산학교 설립자이신 姜昇烈 이사장의 무남독녀 딸과 결혼식을 올렸다. 궁궐같은 넓은 기와집에 불편함이 없이 달콤한 신혼생활에 젖어 있던 어머님은 낙향하자는 아버님의 말씀에 충격을 받는다. 떠나는 날까지 눈물로써 밤을 지새었다고 한다. 정던고향, 정던집, 정던 친구 남겨놓고 남편따라 낯설고 물설은 미지의 세계로 떠나야하는 두려움도 있었지만 부양해야 할 부모곁을 떠나야하는 것이 더 가슴이 아팠다. 어머님은 결혼시 이 집에서 자식 놓고 부모님과 함께 살기를 원했다. 그러나 떠나기 싫어도 남편따라 가야하는 것이 출가한 여인들이 겪어야 하는 슬픈 운명이 아닌가.
낙향하여 지모씨를 포함한 동지들과 규합하여 필요한 자금을 모았다. 경남일대 진해, 웅동, 용지, 창원, 대산, 진영지역 등에 한글학교를 세우고 일헌들의 감시망을 피해 으슥한 야밤에 호롱불 밝혀놓고 한글학습과 독립의 중요성을 가르쳤다. 일제말기 까지 지속되었던 한글학교들은 해방이 되자 하나 둘 문을 닫았으며 진해 마천동에 세웠던 개광학교만이 해방 후에 웅동중학교로 개명되어 현재까지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각 지역마다 학교 책임자를 선임하였다. 교장과 같은 역활이였다. 매주마다 동지들과 회합을 가져야만 했고 밤이면 마을마다 계획데로 학습을 시켜야만 했다 .이마을에서 저마을로, 여정이 급할 때는 지름길을 택하여 밤에도 험한 산을 넘어 가며 하루에도 수십리길을 걸어서 이동하여야 했다. 자동차가 귀하던 시절, 이동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했고 많은 시간을 소비해야 했다. 계속된 고난의 행군으로 아버님의 귀가는 미루어졌고 가정은 종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인적이 드문 농가에도 어김없이 계절이 바뀌고 날마다 밤이 찾아온다. 들판의 밤은 더욱더 을씨년 스럽다. 여름밤에 들려오는 지긋지긋한 개구리 울음소리에 귀를 닫아야했고, 한 겨울 엄동설한 기나긴 밤 마다 홀로 지새는 방안에서 울려퍼지는 문풍지소리에 잠을 스쳐야만 했다. 남편이 돌아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어머님은 기다림에,외로움에 지칠데로 지쳐있었다.
별이 총총히 빛나던 칠흙 같은 어두운 초 여름날(5월 7일)밤, 벌판의 하늘에는 별빛만이 총총히 흐르고 있었다.개구리 울음소리가 싫은 어머님은 세살박이 형님을 등에 업고서 집을 나섰다. 행여 오실줄 모르는 아버님 마중을 나가 보려고 질퍽한 동네 논길을 벗어나 풀섶 둑길을 따라 신작로로 가고 있었다. 그 다음날 아침에 너들강에서 어머님과 어린 형님의 시신이 발견 되었다. 실족사 한 것으로 보는 이들도 있었고 집안 사정을 잘 아는 이웃과 친척들은 투신한 것으로 보았다. 죽은 사람은 말이없다.어느쪽이던 본인만이 그 진실을 알기 때문이다. 어머님은 그리운 황해도 고향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한많은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한 가정의 슬픈 이야기다.
조국을 위해 아버님 한몸만 바치려다 가족 두 명을 한꺼번에 잃었다며 한 동안 탄식속에 죄의식속에 빠져 술로써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그 큰 슬픔도 세월이 지나면서 자츰 잊혀져 갔다.
일제가 미터법을 적용했던 시기라 미터법에 생소했던 소작농민들이 지주들로부터 당한 피해규모가 매우 심각했을 때였다. 그렇다고 소작농민들은 항의 할 곳도 없었다. 학생들에게 미터법을 가르치고 학생들로 하여금 義信契를 조직케 하여 일제지주들의 알랄한 착취에 합법적으로 대항하게 하였다. 이일 외에도 한글신문을 만들어 배포 하던 일, 지주들의 소작료 요구가 너무 높아 소작료를 낮추기 위해 흰서리가 내리고 겨울철새들이 날아와 포식하고 있을 때까지 추수를 하지 말도록 소작농민을 선동하여 부산에 있는 경남도청까지 걸어와 몇일동안 연좌농성을 벌인 일등(이 사건은 조선, 동아일보에 대서특필되어 마이크로 필림에 담겨져 보관 되어있슴)이 있은 후 늘 일헌의 감시망 속에 살아오다 해방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우리 아버님은 조국이 해방된 기쁨도 잠시 열강들의 주구들이 벌이던 헤게모니싸움에 아무 이유 없이 희생당한 분이셨다. 김규식 선생의 민족주의이념에 동조하여 반탁을 위한 영남지방 대표로 선임되어 덕수궁에서 연설을 한 것이 씻을 수 없는 죄목이 되었다.
연설내용은 “조선은 조선인의 조선이니 미소는 물러가고 조선은 조선인이 통치하여야 훗날에 후회가 없다”였다. 각 지방에서 참가한 청중들로 부터 박수갈채를 받고 하단하던 중 귀빈석에 앉아 있던 소련대표 스치코프가 갑자기 일어나 유독 아버님에게 소련식 인사를 하였다. 포옹을 하면서 서로 뺨을 비비는 인사였다. 절친한 사이가 아니고는 소련사람들도 그런 장면을 연출하지 않는데도 말이다. 이 장면이 문제가 될 줄이야. 지금도우리 가족들은 이 장면이우리 가족사에 최악의 불행한 사건으로 여기고 있다. 이것이 동아일보에 기사화 되었으며, 이 기사로 인하여 이승만 정권의 모리배 김두한 휘하 광복청년단에 의하여 공산주의자로 누명을 쓰게 된 것이다. 동아일보 기사를 읽고 심각한 사건으로 판단한 아버님은 열차 편으로 부산으로 내려오자 가족이 있는 진영으로 가지 않고 生面不知의 어촌마을인 하단 갈대숲으로 몸을 피신하게 되었다. 일 년 후 진영의 가산을 비밀리에 정리하고 어촌마을 하단에 초가삼간을 짓고 가족들과 합류하게 되었다. 그 이후 정치와는 인연을 끊고 농사를 지으며 詩作으로 노후를 보내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셨다. 그러나 세상은 아버지를 가만히 두지를 아니했다.
하단으로 이주 한 후에도 김해경찰서와 광복청년단에서 아버님의 행방을 계속 추적하였다. 아버님 검거에 실패한 경찰은 유인책으로 어머님을 대신 체포하여 김해경찰서에 3개월간 복역하게 하였다. 어머니 나이 37세, 내 나이 4살 때였으며, 여동생 연옥이를 임신했을 때였다. 아버님의 순수한 애국이 외면당한 채 스치코프와 돌발적인 포옹한번으로 이승만 정권과 5.16 군사정권 말기까지 우리집안의 시련은 끝없이 계속되었다
첫댓글 눈물이 난다...하단 앞산...말만 들어도 눈물이 낙동강처럼 밀려 나는것 같네...잘 계시는지요 멀리 계시니 제발 아프지 마시고 언젠가 고향앞산 바라보면서 옜날 어린날들 이야기하면서 우리 형제들끼리 오손도손 애기 할날 있겠지요...그 어린날들이 많이도 생각나게 하는글입니다 눈물이 납니다 어쩌다가 우린 이리도 멀리 떨어져나와 살아야하는지 팔자타령이 절로 나오기도 합니다만 그래도 몸만은 건강하게 지내야 우리 고향에서 형제끼리 만나지요 건강하세요 오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