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시조(始祖)이하 전직공(殿直公)까지의 6세 실전이라는 것이 고증에 의하여 밝혀젔다.<서기 1760년 경진보(庚辰譜) 간행시>
2,고려말엽에 이르러 (1)호군공파(護軍公派).(2)회양공파(淮陽公派).(3)금주공파(錦州公派)등 3파로 분파되어 내려 온다.
3,석간 휘 운흘공(石磵, 諱 云흘公)은 고려국 말엽 내지 조선국 초기에 걸처 벼슬도 높고 학문이 깊은 문신(文臣)이 었다.우리 풍양조씨로서는 유일하게 고려사 열전(高麗史 列傳)에 수록되신 어른이다.강능 경포대의 홍장(紅粧:기녀)에 얽힌 고사(故事)는 유명하다.또한 그 자제묘지(自製墓誌)는 일대의 명문으로 알려저 있거니와 시조이하 6세 실전의 근원도 그 묘지의 문구인 "나는 태조(太祖)의 신하인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 조맹(趙孟)의 삼십대손이라"한 기록에서 근거하여 산출한 것이다.
5,대언 휘 염휘공(代言 諱 炎暉公)께서는 고려국의 국운이 날로 쇠태해가는 충숙왕(忠肅王),충혜왕(忠惠王)의 시대를 맞이하여 반역신 조적당(曺적黨)의 참소로 원(元)나라에 잡혀간 일이 있었다.
6, 호군 휘 사충공(護軍 諱 思忠公)은 상주파(尙州派)의 분파조(分派祖)가 되신다.정식의 직함은 천우위 중령 호군(千牛衛 中領 護軍)인데 천우위는 6위중의 하나로서 중앙군 조직상의 한 단위이며 의장(儀仗)담당이고 중령은 편재상의 한 단위임을 뜻하며 호군(護軍)은 정4품 무관직(正四品 武官職)이다.공은 상주비연리(尙州飛燕里)에 설단하고 제사를 받든다고 한다.
7,상의 휘 숭공((商議 諱 崇公)은 조선조에서 우리 조씨문중으로는 비교적 높은 관직에 오른 분이다.당시에 중추원(中樞院)은 숙위(宿衛)와 군기(軍機)를 담당하던 관위(官衛)이며 상의원 사(商議院 事)는 중추원에 속하는 종2품 관직으로서 정원은 3인이였다.홍무(洪武)29년(태조5년,1396년3월초7일) 공에게 수여된 왕지(교지=임명장 또는 사령장)가 보관되어 오고 있다.
8,호군공파(護軍公派)는 공의 증손대에서 양대파로 분파되는대 판관 휘 서경공파(判官 諱 瑞卿公派)를 북파(北派)라 하고 사인 서정공파(舍人 瑞廷公派)를 남파(南派)라 한다.
9,북파는 상주읍과 모서면 일대에 분포되어 거주하고 남파는 상주읍과 낙동면 일대에 주로 거주한다.
10,상서 휘 사공공(尙書 諱 思恭公)은 고려 공민왕(恭愍王) 17년(1368년,무신)에 전 밀직부사(密直副使) 김정(金精),김흥조(金興祖),유사의(兪思義),김제안(金齊顔),김구보(金龜寶),이원림(李元林),윤희종(尹希宗)등과 더불어 요승(妖僧) 신돈(辛旽)을 제거 하자는 밀모(密謀)를 하였는대 공은 이 사실을 친히 지냈던 전 홍주목사(洪州牧使) 정휘(鄭暉)에게 상의 하였던바 정휘(鄭暉)의 밀고에 따라 왕의 국문(鞫問)을 받고 유배(流配)되었는데 신돈(辛旽)은 자객을 보내서 도중에서 모두 목을 졸라 죽였다.
11,회양 휘 신공(淮陽 諱 愼公)은 회양공파(淮陽公派)의 분파조(分派祖)이시다.회양은 금강산 서편에 위치한 고을 이름이고 부사(府使)는 지방도시의 시장(市長)에 해당하는 관직이다.원 임천(林川:현 충남부여군장암면)의 덕림(德林)이란 곳으로 은적하여 사시다가 그 곳에 묻히셨는데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자았다는 옥녀직금(玉女織錦)이라는 명당이라고 재미있는 일화(逸話)가 전해지고 있다.배위(配位)되시는 고성 이씨(固城 李氏)의 묘는 춘천시애막동(현 석사동)에 봉안 되었다.
회양공은 태종대왕(太宗大王)의 잠저시(潛邸時)의 사부(師傅)였으므로 태종은 수묘군(守墓軍)15인을 명급(命給)하고 자손을 불러서 나라일에 봉사토록 하였다.
18,한산군파(漢山君派)는 증손대에서 독암공 휘 종경파(獨庵公 諱 宗敬派)와 청도공 휘 종돈파(淸道公 諱 宗敦派)로 분파 되는데 독암공파는 양주,서천,충주,서울,청주,과천,안양,정읍,청양 등지에 분포 되었고 청도공파는 김포,양주,평택,청주,부여,문경,상주,단양,포천등지에 분포되어 거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