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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정적 이미지 탈피를 위해 종교적 상징물을 이용한 이유는 무엇일까?
선정이유: 필리프의 죽음으로 인한 불명예를 제거하기 위해 종교적 상징물 (성모 마리아의 백합, 파란색) 사용하였다. 카페 왕조가 명예를 되찾기 위한 수단으로 종교를 택한 까닭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나눠보고 싶었음
유: 사람들이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기 힘들다고 판단하는 시련과 마주한 경우 다른 존재의 도움을 받기를 희망한다. 이 존재는 타인이 될 수도 있고 반려 동물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존재는 자신을 뛰어넘는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초월적인 힘을 지닌 ‘신’이다. 우리 주변에도 어려운 일을 겪고난 뒤 종교를 굳게 믿게 된 사람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종교는 사람들이 안심할 수 있게 만들어주고 힘이 되어주는 역할을 수행해 왔다. 카페 왕조 또한 필리프 왕자의 죽음으로 인해 만들어진 불명예를 덮을 수 있는 강한 힘을 가진 수단을 찾고 있었다. 그 시대에 왕의 권력에 대항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것이 종교이기에 왕가의 수치를 덮기 위해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고 설명이 완벽하게 되지 않아도 받아들일 수 있는 신의 상징을 사용하고자 하였다고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1) 대표적인 상징물
다빈: 십자가. 십자가의 성스러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형에서부터 비롯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서기관과 바리세인들에게 핍박을 받고 십자가 형이라는 죄를 선고 받은 뒤 갈보리 산으로 올라간다. 사지를 십자가에 못박힌 채, 예수는 6시간 만에 죽고만다. 이 죽음은 성스러운 것이라고 여겨진다. 당대 많은 사람들의 죄를 대신 사하여주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홀로 그 죄를 짊어지고 간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희생은 십자가 형이라는 형태로 이루어졌으며, 그 이후 십자가란 그의 고귀한 희생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원: 조선 왕들을 대표하는 상징물은 용과 봉황이라고 할 수 있는데, 동아시아에서 가장 신성한 동물들로 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을 그릴 때는 신체부위를 직접 그리는 게 아니라 용과 봉황과 같은 신성한 동물로 바꾸어 그리기도 한다. 조선의 베이스 철학은 성리학(유교)지만 도교 문화가 섞여있기에(고려 청자와 조선 백자에서도 도교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음) 하늘의 천재지변이 왕의 어짐에 따라 달라진다는 믿음이 있었다고 한다. 용과 봉황은 하늘의 일을 수행하는 귀한 동물이라 더더욱 왕과 걸맞는 존재라고 믿었을 것이다.
정희: 불교의 대표적 상징물은 수레바퀴이다. 그 의미는 바로 불교의 정신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는 부처가 교법의 수레바퀴를 굴려 중생의 모든 번뇌를 굴복시키므로 비유한 것이다.
진: 이슬람교의 초승달과 별이라고 생각한다. 초승달과 별은 이슬람의 상징으로, 초승달은 꾸란(2:189)에서 언급되어 있지만, 초기 이슬람 국가에서는 이슬람 상징은 아니었다. 초승달 상징은 이슬람 발생 전부터 중동에서는 대중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을 이슬람에서 빌려 사용한 것이다. 별과 초승달은 610년 무함마드가 첫 번째 계시를 받기 전부터 남부 아라비아의 상징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들의 유통화폐로 사용되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현재 이라크, 시리아, 터키, 쿠웨이트,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일부), 이집트, 그리스, 로마, 페르시아 사람들은 초승달 문양을 신적인 상징 및 통치자 권위의 표징으로 사용하였다. 셀주크투르크(1037-1194)가 1064년 아르메니아 대성당을 점령하여 이슬람 모스크로 전환할 때 성당 돔에서 십자가 대신 은빛 초승달을 걸었다. 오스만 튀르크 제국(1299-1922) 이래 모스크 첨탑을 장식하거나 국기 도안에 사용해 왔으며, 상징으로써 많은 이슬람 국가의 국기에 나타났다. 초승달은 무슬림 문화를 대표하는 국제적 상징이 되었다.
2) 종교가 있다면 어떤 상징물을 이용할지 왜 그런지
다빈: 나뭇잎, 자연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푸른 잎이라고 생각한다. 자연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우주 또는 세상에 스스로 존재하거나 저절로 이루어지는 모든 사물이나 현상. 또는, 인간의 세계와 독립하여 존재하는, 우주의 질서와 현상> 즉 사람이 죽는다고 해서, 아프다고 해서 자연도 함께 그러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자연은 항상 독립적이고 변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종교를 믿는 이유는 불안감을 해소할 무언가가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들기 때문에 믿을만한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맹신하고 의지하는 것이다. 자연의 독립성과 불변성 그리고 인간의 종교에 대한 관념을 고려했을 때 나뭇잎을 종교의 상징물로 이용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원: 비둘기, 유엔에서 비둘기는 사랑과 평화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정희: 작약꽃, 작약꽃의 꽃말이 ‘새로운 시작’인 것을 생각해보면, 우리가 죽은 이후에 새로운 삶을 다시 살아갈 수 있다는 뜻으로 선택함. 다음 생에도 환생할 수 있다는 의미를 담았다.
진: 내가 만약 종교를 만든다면 나무를 상징물로 이용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무는 한 번 심고 자라면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기 때문이다. 나무를 상징물로 선정해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나무를 심게 할 것이다. 그러면 지구온난화 속 환경에도 도움이 되고 집 공기도 쾌적해 질 것이라 생각한다. 나무를 함부로 베고 하는 것은 규제를 할 것 같으나 먹고 살기 위해 나무가 필수적으로 필요한 곳은 자유롭게 나무를 사용하도록 할 것이다. 또 나무에 다양한 종류가 있으나 나는 그냥 나무로만 정해놓고 사람들이 어떤 나무든 이 종교가 떠오를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나무를 통해 마음의 평화도 얻고 지구도 깨끗해지고 화목해지는 그런 날이 오면 좋겠다. 자라나라 나무나무!
2. 프랑스에서 파란색의 의미
선정이유: 파란색은 프랑스 국가의 색으로 선정된 중요성 있는 색이므로 국민들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 지 흥미가 생김.
다빈 : 시간이 지나면서 ”인디고 페라“라는 원래의 천연 울트라마린보다 훨씬 값싼 합성 울트라 마린이 등장하자 대청 농가는 망하게 되었지만 파란색은 우리의 삶에서 보다 쉽게 접할 수 있는 색상이 되었다. 1850년 리바이 스트라우스는 이 값싸고 색이 잘 안빠지는 인디고페라를 이용하여 염색한 두꺼운 천으로 청색의 작업복 바지를 제작하여 광부들이 일할 때 가볍게 입고 빨 수 있도록 하였다. 하지만 인디고 페라의 성능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파란 염색은 할 수 없었고 약간 물이 빠진 듯한 청색이 되고 말았는데 오히려 이런 파란색이 청바지를 더욱 멋스럽게 만들게 되었다. 이후 청바지는 반항적 젊은이들의 표상, 실용적이고 검소한 이미지로 자리잡게 된다. 이러한 이미지는 정치에도 적용이 되었는데 과거 프랑스에서는 반혁명 왕정주의자들의 주요 색으로 사용이 되었다가 점차 중도파의 색으로 변모되었다. 그러다가 제 3 공화국에서는 우파를 상징하는 색으로 사용되어 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보수파의 색으로 변화되었다.
유: 서양은 오래전 파란색을 폄하해온 역사가 있다. 인류의 생활에서 색채의 사용이 가장 빈번하게 드러나는 것은 의생활 속에서이다. 의생활 속에는 단순한 미의 기준 뿐만 아니라 사회의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여러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기에 많은 정보를 준다. 고대의 의생활에서 염료를 얻어 옷감을 염색하는 과정에 푸른색은 어둡고 발색이 약한 색으로 기억되었기에 사용하는 빈도가 매우 적었고 사람들의 반감을 샀다고 해석될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이 이어져 내려온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푸른색에 대한 기피 현상을 볼 수 있다. 푸른색을 미개하고 불길한 색이라 여긴 이들은 푸른 눈을 가진 사람들, 특히 여성들을 불결하다고 생각하고 배척하는 추세를 보였다.특히 로마인들에게 파란색은 야만과 애도, 불안을 상징하였다. 중세 사회에 거의 모든 분야를 지배하고 있는 기독교에서도 고대의 기본 3색인 검정색, 하얀색, 빨간색을 택하였고 초기 교회에 문서에서 푸른색은 찾아보기 힘든 색이었다.성직자, 신학자의 의상에서도 푸른색은 찾을 수 없었으며 색에 대한 해석도 전혀 없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3. 동물, 식물, 색 등 다른 요소들을 통해 알 수 있는 역사
선정이유: 강의 중 문화사가 발달하며 커피나 감자 등 다양한 소재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관심을 가짐.
자기가 원하는 요소의 역사
다빈 : 카펫, 튀르크, 몽골 등의 유목민들은 그들의 거주공간인 천막 자체를 카펫과 같은 방식으로 실을 짜서 만들었다. 또한 천막의 보온재 혹은 장식 목적으로, 카펫을 바닥에 깔거나 벽에 거는 등의 목적으로 사용해 왔는데, 이를 통해 이들이 카펫을 양털로 실을 뽑는 방법을 발견하게 된 이후부터 쭉 사용해왔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카펫 생산으로 유명한 지역들도 과거 이들 유목민들이 거주하던 지역들이다.
이러한 카펫이 유럽으로 도입되기 시작한 것은 십자군 전쟁 이후 이슬람권과 교역이 늘기 시작하면서이며, 북유럽지방에서는 보온을 위한 용도 뿐만 아니라 사치품으로써도 인기가 높았다. 18세기 이후 터키문화가 유럽 귀족층에서 인기를 끌면서 특히 터키 카펫과 페르시아 카펫이 급속도로 퍼지기 시작했다.
원 : 수학(기하), 기하학은 농경과 건축을 위해 고대 역사 때부터 쓰여왔기에 수많은 연구를 이끌어냈다. 메소포타미아의 도시들, 이집트의 피라미드, 모헨조다로와 같은 건축물들부터 나일강 침범을 가로막는 댐 건설 등 여러 부문에서 쓰임을 확인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 때 에우클레이데이스의 피타라고스 정리, 아르키메데스의 도형의 넓이와 부피 공식(포물선과 직선으로 둘러싸인), 고대 중국에서의 일차방정식 활용을 담은 구장산술, 브라만 왕국 때 원에 내접하는 삼각형의 넓이 구하기, 양의 실수 도입과 적분법을 사용한 이슬람까지 역사 속에서 기하학은 빠지지 않고 연구되어 왔다.
정희: 후추, 인도에서 로마까지 후추가 전달되는데에 오랜 시간이 걸렸고, 로마까지 도달하는 후추의 양은 매우 적었음. 동방에서 왔다는 점과 더불어 후추의 가격은 매우 높아졌고, 이는 부의 상징으로 자리잡게 됨. 때문에 로마 귀족들은 부를 과시하기 위해 후추를 많이 뿌린 음식을 먹게 됐음. 나중에서야 후추가 흔해지니 부자들은 후추를 소비하지 않게 되고, 이는 유럽인들이 매운 음식을 잘 못먹는 이유중 하나가 됐다고 한다.
진: 옥수수는 감자보다 조금 늦게 유럽에 전해졌다. 보급률 역시 감자에 미치지 못했다. 옥수수가 유럽에 전파된 경로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16세기에 지중해 동쪽 터키와 그리스를 거쳐 발칸 반도로 전해진 듯하다. 옥수수라는 새로운 식물에 대해 알지 못했던 당시 영주와 국가는 옥수수를 소작료 징수대상이라 여기지 않아 세금도 부과하지 않았다. 그 이유로 농민들은 자유롭게 수확할 수 있는 새로운 곡물에 너나 할 것 없이 달려들었고, 옥수수 재배는 동유럽에서 중부 유럽을 흐르는 도나우 강 유역을 중심으로 급속하게 퍼져나갔다. 어디까지나 잡곡 대용식이라는 위치에 머물렀기에 오래도록 잡곡류의 식문화 전통을 이어받은 지역에서는 정착한 반면 맥류로도 부족함이 없던 다른 지역에서는 가축용 사료로 쓰이는 경우가 많았다. 현재 유럽에서 재배되는 옥수수는 대부분 사료용이다.
유: 커피, 커피는 수천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기원에 대한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한다. 정확한 기록이나 책에 나타난 증거가 없기 때문에 대부분 이야기로 전해진다. 대표적인 기원설은 에티오피아 양치기 소년 칼디가 염소들이 빨간 열매를 먹고나면 흥분하여 뛰어다니는 모습을 발견하고 그 열매에 대해 연구하였다는 것이다. 이 열매가 바로 커피 열매였고 이 지역은 에티오피아 근처라고 전해진다. 이후 에티오피아가 아라비아 반도의 국가를 습격하며 커피가 아시아로 전파되었고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서면서 유럽과 교류를 한 이슬람 사람들에 의해 커피를 즐겨마시게 되었다. 초반에 종교적인 이유로 억압되었으나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서 기호식품으로 즐기게 되었다.
4. 진정한 왕의 덕목은 뭘까?
선정이유 : 과거 사냥이라는 것은 왕의 책무를 다하는 것이었고, 힘 용기 사내다움을 나타내는 왕의 덕목 중 하나였다. 이와 관련하여 자신이 생각하는 왕의 자질이란 무엇인지 조원들의 의견을 듣고 이를 역사에 적용하여 탐구해보고 싶었다.
자신이 생각하는 왕의 덕목
1) 왕의 덕목
다빈: 추진력, 생각만한다고 되는 것은 없다. 누구나 이상은 높기 때문에 그걸 올바른 전략과 효과적인 방안으로 실천하고 이뤄낼 수 있어야만 진정한 군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루이 16세의 경우 이상은 높았지만 성격이 우유부단했고, 의지가 부족했으며 자신의 이상을 추진해나갈 능력이 부족했다. 추진력이 없는 군주의 태도는 그를 따르는 이들로하여금 불안과 반감을 살만한 요소가 되었꼬 루이 16세는 마침내 국민공회의 투표결과 반역자로서 단두대에서 처형되고 말았다. 이런 루이 16세의 경우를 보았을 때, 왕이라는 존재는 자신의 직책과 백성들에 대한 책임을 져야만하는 당연한 요소 뿐만 아니라, 그들의 정점에 서서 그들의 의견과 이상을 대표하고 이를 실현해내야만 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추진력이라는 요소는 군주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볼 수 있다.
원 : 플라톤이 말한 이상적인 정치 체제가 있는데, 이는 지배 계급과 무사 계급, 그리고 시민 계급으로 나눈 철인 정책이다. 그의 정책에 따르면, 지배자인 철인은 이성적으로 자신과 국가를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만 하고 사유 재산의 물욕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사실 자신을 생각하지 않고 국가에게 모든 것을 바쳐야 하는 삶은 죽은 삶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통치자라고 한다지만 지배 계층이기 전에 하나의 인간이고 감정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에게 삶을 버리는 사람들이 존재했고 나는 국가의 발전을 위해 가족들에게까지 매몰찬 이런 왕이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정희: 결단력, 왕은 하나의 국가를 이끌어가는 사람이기에 하나의 사건에 대한 조취를 어떻게 취할 것인가를 정해야하는 사람이다. 때문에 결단력이 없는 사람이 왕이 된다면, 이도저도 못한 상태로 국가는 멸먕의 길을 걷게될 수 있다.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어야지...인생을 두 번 살 수 없고, 좋은 기회를 다시 잡는 것은 힘든 일이다. 인생은 결단의 연속이기에, 결단력있는 자만이 성공할 수 있고, 나라를 이끌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진: 나는 왕이 중립을 잘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왕은 모든 결정을 합리적으로 내리고 이를 통해 나라를 운영할 것이다. 이 결정은 신하들의 의견들을 기반으로 할텐데 너무 한쪽에 치우쳐 적을 만들지 않게 중립을 잘 지켜야 한다. 괜히 적을 만들어봤자 좋을게 없다. 왕이라는 자리가 높고 중요한 위치인만큼 사람들의 시기, 질투, 기대를 받고 그만큼 왕의 자리를 탈환하고 싶어하는 신하들이 많을 것이다. 적을 안 만들면 평화가 찾아오고 나라가 평안해진다. 물론 쉬운 건 아니지만.
유: 진정한 왕의 덕목은 옳고 그름을 구별할 줄 아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왕은 자신뿐만 아니라 국가 전체에 책임을 지니고 있다. 하나의 결정으로 인해 국가가 기울 수도, 성공의 길을 달릴 수도 있다. 왕은 주변의 말을 분별하여 옳은 결정으로 나라를 이끌어야 하며 자신의 이익에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 많은 왕들은 이를 제대로 행하지 못하여 나라를 쇠퇴의 길로 이끌었고 나라는 끝내 일어설 수 없었다. 신하의 말을 모두 경청하되 아첨으로 장식된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신념을 가지고 정책 시행을 해야 옳은 왕이라고 생각한다.
2) 해당 왕
다빈: 필리프 2세, 필리프 2세는 루이 7세로부터 왕권을 넘겨받은 뒤 온갖 음모와 술수, 전쟁등의 교묘하고도 정략적인 술수로 강력한 왕권의 중앙집권을 확립하고 대대적으로 국가체제를 정비하는 등 오랫동안 약화되었던 프랑스의 국력을 단번에 끌어올렸으며 프랑스를 강대국으로 올려놓은 왕이다. 그의 이러한 업적은 모두 그에게 생각한 이상을 앞으로 끌고 나갈 수 있는 추진력이라는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원 : 조선 태종, 권력을 위해 자신의 형제들까지 마다하지 않고 희생시켰다. 국가 초기, 왕 교체 시기에 흔들릴 수 밖에 없는 왕권을 앞으로는 보기 힘들 정도로 치켜올렸던 왕이며 다음 왕인 세종이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갖도록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태종이 순순히 형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면 조선은 빠르게 신하들에게 힘이 넘어가 세도 정치로 기울었을지 모른다. 왕권을 굳건히 지키기 위해 일백번 고쳐죽겠다는 정몽주와 왕위를 넘보는 형들까지 가차없이 죽이고 후대들에게는 사랑의 정책을 펼치도록 권유하는 등 관대한 모습을 보였던 그가 진정한 철인이 아닐까 싶다.
정희: 나폴레옹, 나폴레옹은 전쟁을 통해 수 많은 승리를 이끌었으며, 그의 결단력있고 강인한 모습이 그에게 성공을 가져다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만약 그가 우유부단한 성격을 가진 자였으면, 군인도 될 수 없었을 뿐더러, 군인이 되었어도 전쟁에서의 승리를 이끌어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결단력 덕분에 프랑스의 국토는 매우 넓어졌으며, 프랑스의 전성기를 맞을 수 있었던 것이다.
진: 중립하면 또 중립외교를 실시한 조선시대 제 15대 왕 광해군을 빼놓을 수 없다.
중립외교란 광해군 때 실시하였던 외교 정책이다. 1592년 임진왜란 이후 명은 점차 쇠퇴해지고, 1616년 여진족이 세운 후금은 강성해져 명 · 청 교체가 이루어졌는데 광해군을 지지하는 북인 정권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는 정책을 실시하여 전쟁을 피했다. 후금이 명의 변방을 위협하자 명은 조선의 출병을 요구하였는데 이에 광해군은 새롭게 일어서는 후금과 적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현명하지 못하다고 판단하여, 강홍립으로 하여금 출병하게 한 후 정세를 보아 투항하도록 하였다. 중립외교는 좋았으나 서인 세력의 비난 대상이 돼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었다.
유: 루이 9세는 카페 가문의 프랑스 왕으로 기독교적 가치에 영향을 받아 개인의 정치적, 경제적 힘이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 공공복지의 개념을 위해 봉건제의 오용을 완화하고 사적 전쟁이나 복수를 금하고 왕을 중립적인 심판자로 정의했다. 이러한 정책을 펼치고 프랑스를 근대 군주국의 지위로 향하게 한 루이 9세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공공에게 이익이 되는 정치를 한 성왕이라고 바라볼 수 있다.
5. 공권력에 반항하는 시위를 폭력으로만 진압해야 하는 걸까?
선정이유 : 역사학 강의 도중 언급된 프랑스 6·8혁명과 흑인인권운동의 이야기를 듣고 심화 탐구의 다짐을 보임.
1)시위가 일어나는 원인
다빈 : 시위가 일어나는 원인은 사회모순의 원인이 크다고 생각한다. 인권선언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것이 명시되어 있다. 하지만 사회에는 알게 모르게 인종 간 나타나는 멸시, 계급간의 갈등과 같은 인간의 불평등이 드러나는 사회적 현상이 존재하고 있다. 위와 같은 사회모순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자극하고 인간다운 삶을 살 권리가 있다는 인권에 대한 모순이다. 이러한 모순에 분노하여 시위가 발생하게 되는 것은 권리를 얻기 위한 당연한 일이라고
원 : 시위의 근본적 출처는 억울함이라고 생각한다. 사회 계층의 문제를 꼬집기 위해 일어나게 된 중·저산층 인구들의 시위 목적은 막대한 부의 영광을 누리는 소수와의 차별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시위가 노동 인권 보호 운동이다. 이들은 정규직 사원들과의 차별을 느꼈을 지도 모르지만, 대사수는 회사의 경제에 갑작스러운 타격을 맞거나 급진적인 변화 정책으로 피해를 본 이들 일 것 이다. 생계를 유지하기에 바쁜 자신을 같잖은 이유로 해고했다는 억울함에서부터 공동체 시위는 힘을 갖고, 노사 협의를 보도록 이끌어 준다. 차별도 문제지만 결국 차별에서 오는 억울함이 더 크기에 우리는 시위를 하게 된다.
정희: 시위가 일어나는 가장 큰 원인을 ‘불평등’이라고 생각한다. 시위대의 다수는 막대한 부를 가진 자들이 아닌 중,하위층들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바로 오랫동안 국가의 부에서 소외감을 느낀 자들이다. 시위의 본질은 무엇인가. 사람들이 공동의 목적을 가지고 함께 모여 그들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그들은 함께 모으는 힘이 바로 그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불평등이다. 만약 사회에 평등하다면 사회 구성원들이 다툴 필요가 없다. 불평등이 이들은 한 데 모아 그들이 원하는 사회를 만들도록 부추기는 것이다.
진: 시위를 발생시키는 원인은 빈부격차라고 생각한다. 결국 세상은 돈이다. 너무 속물적이라 생각 할 수도 있지만 돈이 없으면 살 수 없다. 돈이 있어야 기본적인 의식주를 충족할 수 있다. 돈이 없으면 삶이 팍팍하고 세상이 부정적으로 보일 것이다. 돈이 없는 이유는 다양할 것이다. 가난의 대물림 일 수도 있고 사업실패, 도박, 등 개인적 이유 일 수도 있다. 사람들은 빈곤한 삶이 아닌 기본적인 생존권만이라도 원해서 거리에 나와 시위를 한다고 생각한다.
유: 시위가 일어나는 이유는 사회의 부조리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공권력에 반하는 시위를 생각해보면 대부분의 시위는 시위를 행하는 집단의 권리를 찾기 위한 목적으로 일어났다. 귀족과 왕들이 권력을 잡고 일반 노동자에게 정치에 가담할 권리나 능력으로 가난에서 벗어날 힘을 주지 않아 일어난 것이 프랑스 혁명이다. 정치적, 경제적으로 보이지 않는 벽이 각 계층을 나눈 사회에서 사람들은 이에 저항하고자 하는 의지를 표출한다. 같은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사회를 알면서도 침묵하는 공권력에 맞서싸워 올바른 사회를 만들고자 시위가 발생하는 것이다.
2) 현대 흑인 인권운동의 방향성과 성격
원 : 미국의 래퍼, 텐타시온의 노래인 “riot”의 가사들을 본다면 요새 흑인들의 인권운동 실체를 끝까지 까내려 준다. 평등과 자유를 외치면서 모순적으로 서양 인들에게 총기를 난사하고, 일반 상업 가게를 불지르고, 경찰들에게까지 폭력을 휘두른다고 한다. 내가 힙찔이어서 힙합의 역사에 대해 조금 아는데, 현재 힙합을 하고 있는 갱스터들의 뿌리는 사실 인권 평등을 위해 평화의 노래를 불렀던 이들이었다. 근데 이들을 이끌었던 흑인 대장이 부득이하게 경찰에게 죽자 분노한 흑인 청소년 무리가 폭력적으로 사회인들을 대했고, 후에 그들이 갱스터가 되었다(랩 가사에 폭력적인 어투로 경찰 욕과 마약에 대해 이야기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한다). 무튼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흑인 인권운동은 초기에 비해 굉장히 의미가 변질되었으며 아직까지도 텐타시온과 같이 자신들을 객관적으로 돌아보는 이들이 없다는 것이다.(수많은 갱스터들에게 일침을 놓았던 텐타시온은 결국 총살로 2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정희: 초기의 흑인 인권운동은 폭력의 형태를 띄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은 폭력과 혼돈 없이 개혁을 이루려는 방향성을 띄기 시작한다. 2020년에 일어난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을 예로 들자면, 그들은 "우리는 억압의 발판이 되지 않을 것이다"며 "검은 미국이여, 내가 그대에게 책임을 묻겠다. 그대는 일어서야 한다. 그대는 싸워야 한다. 하지만 폭력과 혼돈 없이 싸워야 한다"고 연설한 바 있다. 이처럼 시대가 갈 수록 시위의 성격은 비폭력적인 형태를 띄고 있다.
진: 현대 흑인 인권운동 SNS와 함께 전개 된다고 생각한다. 기술 발달과 함께 한국은 물론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일도 1시간 내에 알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그 기반에는 SNS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주로 SNS를 통해 흑인 인권운동을 접했다. 그리고 참여할 수 있는 건 참여했고 유명인들은 물론 내 주변친구들도 활발히 참여한 것 같다. SNS을 통해 전파하고 관심을 갖게 해 쉽게 참여하도록 하는 것 같다.
6. 기록만이 존재한다면 포스트 모더니즘 역사가들의 입장을 받아들여도 되는 걸까?
선정이유 : 역사학 강의에서 포스트 모더니즘 역사가들을 배운 후 전통역사학자들과 비교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듦.
전통역사학자들이 중시하는 가치관 : 전통 왕조의 역사와 기록(사료)을 사실인지 밝혀내고 과거를 있는 그대로 밝혀내야함.
포스트 모더니즘 역사가들이 중시하는 가치관 : 기존의 흐름에서 중요시되던 경제학을 배제하고 문화들에 대해 알아가며 언어로서 역사는 다르게 해석될 수 있음.
1) 자신의 가치관(이중택일)
원: 역사는 과거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역사가들이 강조했던 언어의 활용과 주관적 해석은 진실을 흐리게 한다. 현재 존재하는 역사가(사료에 의존하는) 절대적인 진실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확신할 수 없는 과거에 주관적 해석을 더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역사가들은 후대에게 내려갈 사실적 전달의 방해물이 된다. 역사를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는지는 개인의 자유다. 하지만 그 행위가 다른 이들에게 혼동을 주는 것이라면 결코 좋은 시선으로만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오리엔탈리즘이나 흑인 혐오적인 편견은 주관적 해석에서 비롯된 잘못된 역사적 해석에서 나왔으며 아직까지도 많은 폭력을 내고 있다. 시간이 흘러 많은 것들이 발전했지만, 평등과 사랑에 기반이 되는 세상을 위해서는 우리가 기술적 사료들을 통해 진실을 판가름하는 고전주의적 역사가의 시선을 가질 필요가 있다.
유: 과거의 기록자에 의한 글만이 존재할 때 역사에 대한 서술을 해야 한다면 전통역사학자 중 랑케의 주장처럼 사실만을 선별하여 기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역사는 인간의 행위로 일어난 사실을 기록을 통해 연구하는 학문이기에 누군가의 주관적 견해가 반영되지 않은 기록으로 거듭나야 한다. 사건에 대한 기록은 해당 사건에 대해 우세를 차지한 집단의 입장에서 쓰인 것이기 때문에 중립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할 수 없다. 그렇기에 현대의 역사가가 먼 과거에 일어난 사건에 대한 판단을 하고 다시 기록할 때 승리자와 패배자의 관점을 모두 배제하고 일어난 사건 자체만을 다룰 수 있어야 한다. 중립적으로 기록하는 것이 역사학자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과거의 사건으로부터 교훈을 얻거나 판단하는 것은 다른 분야의 연구자가 선례로 그 사건을 채택하지 않는 이상 마음대로 행하면 안될 것이다.
7. 자신의 죽음의 가치관은?
선정이유: 역사학 강의 주제인 ‘서양의 죽음' 수강 후 조원들의 가치관이 궁금해짐
신이 있다고 믿는가?(천국,지옥,극락)
다빈 : 신은 존재한다. 다만 그 신이라는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를 우리가 인식하고 있지 못할 뿐이다. 애초부터 신이라는 것은 어때야 하는지의 규범조차 인간이 정한 것이다. 인간을 구원하고 모든이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고, 만인에게 축복을 내려야만 한다는 것은 인간이 규정한 바에 불과하다. 우리가 종교를 믿는 것은 마음 한구석, 어딘가에 기대고 싶어하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우리가 기댈만한 존재는 하느님도, 알라신도, 부처도 아닌 그 무언가 일 수 있다. 아직 우리가 우주와 심해의 극히 일부분만 알고 있고, 죽음에 대해 거의 알고 있지 못하는 것처럼, 신에 관해서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유: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종교에서 인간을 비롯한 생물은 신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삶에서 발생하는 일에는 신이 관여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인간은 신이라는 추상적인 존재와는 별개로 살아가는 존재이다. 생물은 자연에서 복합적인 작용에 의해 단순한 형태의 생명체에서 시간이 지나며 많은 진화 과정을 거쳐 포유류에 이르기까지 복잡한 생명체가 탄생한 것이다. 인간은 주체적인 존재이며 다른 존재가 그 삶에 관여하여 보이지 않는 힘을 행사하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천국, 지옥, 극락과 같은 사후세계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미래 세계는 인간들이 가진 두려움에 의해 만들어진 환상이며 위안을 얻고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유지해 온 개념이라고 본다.
원: 니체가 말했지만 신은 죽었다. 하나님이 정말로 사람들을 위했다면, 유대인들만 선택해서 구원하려고 했던 걸 보면 굉장히 모순이 된다. 불교 또한 동아시아 국가의 군주들 모두 자신이 부처라고 자처하는데, 그냥 종교는 지배자로서 자신들의 입지를 다지기 위한 수단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준다. 종교는 모두 평등과 사랑을 주장하지만 당시의 사람들은 신분제라는 불평등한 사회 속에서 살았고 혐오 범죄가 끊이지 않는 사회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이는 종교가 사람들을 구원하지 못했다는 증거이고, 존재하지 못한다는 걸 입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가 추앙받는 이유는 사후세계에 대한 의심 때문이다. “신과함께”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죽은 이후 세상이 존재한다는 설정의 소설과 영화를 많이 접해왔다. 소설은 소설로만 받아들여야 하는데, 죽은 이후엔 종교가 삶을 보장해준다는 걸 혹하고 믿어버린거다. 종교의 논리대로라면 우리는 “쥬라기 월드”처럼 공룡에게 희생당할 위험에 처할 것이고, “에일리언”처럼 외계인의 침공으로 멸망할 것이고, “투모로우”처럼 지구온난화로 하루아침에 죽어버릴 것이다. 공동체의 문제를 다루는 후자의 영화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종교한테는 유난하게 믿는 사람들이 정말 이기적이라고 생각하고, 나는 그냥 나를 믿고 세상을 살아갈 것이다.
정희: 정말 오래된 질문이다. 만약 신이 없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다. 죄에 대한 행위도 사람에게만 들키지 않는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신이 있다고 믿는 순간부터 우리는 누군가 보지 않는다고 해서 함부로 행동할 수 없다. 신이 보고있기 때문이다. 그렇담 신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의 존재 여부는 내 생각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신을 찾는다. 인간의 한계와 죽음 앞에서 나약해지는 인간상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죽으며, 죽음 이후에는 심판이 있다는 것을 성경에서는 강조한다. 인간을 신을 떠나 행복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닐지도 모른다. 자신의 지식 밖의 진리에 대한 공백을 신이라는 존재로 채우기 때문이다. 죽음 이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것은 확실하다고 나는 믿고있다. 하지만, 신의 존재 여부에 대한 질문에는 나는 답할 수 없고, 확신할 수도 없다.
진: 나는 신이 존재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기독교로 가면 하나님이 유일신이라 하고 불교로 가면 부처님이 유일신이라고 주장하는데 다들 자기들 종교가 유일신이라 주장하면 이 주장 자체가 모순되지 않나 싶다. 그리고 항상 신의 존재는 과거에만 증명되는게 의문이다. 신화 같은 것도 마찬가지 인 것 같다. 과거보다 훨씬 기술도 발전하고 종교를 믿는 사람들도 많아졌을 텐데 아직도 과거에 적힌 성경이나 불경을 보면서 머무르는 게 이상하다. 신이 정말 존재한다면 지금 세계적으로 분쟁이 넘쳐나고 빈부격차가 심한 이 세상을 구제 해줘야한다. 그리고 세상 갈등의 원인의 대부분이 종교 때문인데 과연 신이 이정도까지 갈등을 하는 걸 원했을까싶다.
자신의 죽음에 대한 가치관
다빈 : 죽음이란 참 무서운 것이다. 물론 수많은 주변인들의 죽음을 통해 느낀 바가 있긴하지만 직접 경험해본 것이 가장 크다. 나는 평소에 빈혈이 너무나도 심한데다가 초등학교때부터 계속되오는 편두통 때문에 평소 머리나 눈이 자주 아픈편인데, 가끔 자리에 오랫동안 앉아 있다가 일어나거나, 햇빛이 조금 밝다고 느껴질 때마다, 눈 앞이 하얘지면서 그 시점의 기억이 없다. 주변사람들의 말로는 잠시 기절해 있었다고 한다. 나는 이게 무섭다. 어느 한순간에 죽어버릴 것만 같아서 너무 무섭다. 그래서 한동안은 밤에 이대로 자면 일어나지 못할까봐 잠도 못자던 때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일찍 죽었으면 좋겠다라든지, 오래살아서 뭐하냐는 식으로 말하는데 나는 그 말들이 정말 이해안된다. 막상 그들도 죽을 때가 되면 살려달라고 빌거면서, 아직 그런 위기를 느껴보지 못해서 그런 말이 나오는 건가 싶다.
찬주: 나는 모태 크리스천이었기 때문에 아주 어렸을 때부터 ‘천국’에 가기 위해서 세례를 받고, 기도문을 외우고, 미사를 봤다. 솔직히 나는 하느님과 신을 믿지 않으면 이상할 정도의 환경이었던 것 같다… 나는 유치원도 천주교 유치원을 나왔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신에게 기도하는 습관을 가졌었다. 내가 내 이름을 쓰는 것을 배우기 전부터 신에게 내 자아를 의탁하길 바란건 너무 어른들의 욕심이 아닌가? 좀 머리가 컸다 싶었을 때부터 나는 종교를 믿지 않기 시작했다. 나는 죽으면 무로 돌아간다고 생각한다. 친척 중에 수녀님이 계신데, 여전히 나에게 성당에서 미사 참여하는 것을 권유하신다. 그러나 나는 신을 믿는 것은 인간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나약함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초등학생 때 성당에 가는 것을 거부하며 아빠에게 신에 대한 내 생각을 말한 적이 있다. 특히 친가 쪽이 천주교에 진심이셨기 때문에..솔직히 내 생각에 혼란스러워 하셨던 것 같다………..솔직히어이없삼
아니그리고 성당에서 신부한테 자기 죄를 고백하는 고해성사가 있거든 근데 솔직히 다 까고 나면 인간 대 인간인데 지만 남의 비밀 듣는 것도 웃김
아무튼 나는 인간에게 영혼이 있다는 것도 의심스럽다. 나는 문과인 극히평범한 고등학생이라 잘 모르지만 어떤 전기적 메커니즘일 뿐이지 않을까 싶다.
원: 사람들은 죽음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사후세계에서 좋은 삶을 보내기 위해 살아있는 이들이 애도하는 그런 풍습이 세계적으로 널리퍼져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건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냥 수정으로 태어난 사람이고 노화로 인해 뇌의 기능을 다하여 죽을 것이다. 죽음은 뇌의 정지로 몸이 제 기능을 못하는 것이다. 영혼이 하늘로 가거나 요단강을 건너는 건 소설 속 설정일 뿐이고 아직까지 입증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자연적 사건을 인간의 이성으로는 알 수 없다는 말로 우리의 이성을 믿지 못하게 하기에 사후세계와 같은 초인간의 경지를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성을 가졌기에 이성으로 아는 것을 넓혀야 하며, 이성으로 부족하다면 더 넓은 경지로 우리의 지성을 넓혀야 한다. 죽음은 이성적으로 따졌을 때 그냥 허무한 결말이고, 초자연적 세계관에서는 또다른 세계로 가는 과정일 뿐이다.
정희: 수많은 사람들에게 죽음이란 슬픈것으로 여겨지고,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한다.
나도 주변 사람의 죽음을 경험했고, 그 당시의 마음 또한 착잡하고 무거웠다. 어제까지만 해도 내 눈앞에서 숨쉬고 웃고 말하던 사람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버렸다. 처음에 그 사람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 머리가 멍해졌다. 믿기질 않았고, 장례식에 도착해서 절을 하기 전까지도 세상이 나를 향해 몰카를 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더라. 장례식장에 있으면서 죽음에 대해서 천천히 곱씹기 시작했다. 죽으면 어디로 갈까. 내가 죽으면 그 후에는 어떻게 될까.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러자 두려움이 나를 찾아왔다. 죽은 후에 나 자신이라는 존재는 아예 사라져버리는 것인가. 나의 의식은 무로 돌아가는가. 그러자 생각이 나더라, 막연함이라는 두려움의 답은 결국 인간을 절대적인 존재인 ‘신’에게서 찾게된다는 사실을. 하지만, 나는 종교를 믿지 않는다. 그 누구도 죽음에서 돌아온 사람이 없는데, 우리가 무엇을 믿고 실제로 존재하는지 알지도 못하는 절대적 존재에게 우리의 운명을 맏기고 기도하는건가. 차라리 나 자신을 믿고 말지. 아 걍 모르겠다. 죽음에 대해서 아직 생각해보지 않아서~~
진: 한 번 죽을 고비까지 가서 살아나보고 싶다. 그래서 잠깐 죽었을 때 내가 뭘 보고 뭘 느꼈는지 말해보고 싶다. 사후세계란 과연 존재하는지 너무 궁금하다. 그냥 사람들이 만들어낸 픽션 그 자체가 아닌가 싶다. 결국 인간의 머리에서 인간이 믿고 싶은대로 만드는 거 같다. 난 죽으면 그냥 고요할 것 같다. 그냥 천국 지옥 그런 것도 없이 고요한 상태. 영혼 자체도 없고 그냥 그 자체. 죽으면 그만이다. 더 이상 만날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는 한 때 존재했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딱 그정도.
8. 쉬제르의 역사 묘사에 대한 자신의 생각
선정이유: 책의 챕터 2의 필리프 사망이후 쉬제르의 사건 묘사에 대해 읽으면서 죽음에 대한 강의와 관련해 그의 역사의 묘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자신의 역사관은 어떤지에 대해 대화하고자 함.
랑케, 콜링우드, 카 등 자신이 정해서 카이사르 혹은 필리프, 루이 6세, 루이 7세 등 평가해보기
책읽고 대화하기 활동을 자신이 지지하는 역사의 관점으로 서술해보기
다빈 : 물론 쉬제르의 생동감 있고 다른 이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역사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역사라는 것은 일단 기본적으로 객관성이라는 것이 존재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쉬제르의 역사묘사는, 특히 ‘파리 근교에서 말을 타고 있었다’라던가, ‘해질녁’에 죽었다라는 표현은 다소 상투적이고 모호해보인다. 이런 표현은 대중의 심리를 흔들기 위해, 그리고 왕실의 비밀을 대중들에게 최대한 숨기기 위함이 담겨 있다는 것이 책의 분석이다. 하지만 이러한 쉬제르의 역사묘사는 너무나도 주관적인, 왕실에게 유리하게 기술된 역사이다. 이러한 역사의 관점은 다소 콜링우드의 역사 관점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2021년 7월 15일 정다빈이라는 학생은 책 ‘돼지에게 살해된 왕’과 전날 들은 ‘죽음으로 알아보는 서양사’로 프랑스 문화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려 노력했다. 그녀는 보다 매끄러운 대화와 정확한 주제 이해를 위해 책을 3번 이상 정독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그녀는 조원들과 함께 8개의 질문을 작성하여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고, 자신만의 의견을 내세우며 보다 다채로운 생기부 작성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유: 2021년 7월 15일 역사학에 대한 강의를 들은 6명의 학생이 3학년 프랑스어과 교실에 모였다. 1교시부터 4교시까지 ‘돼지에게 살해된 왕’이라는 미셸 파스투로의 저서를 정독하는 시간이 주어졌으나 대부분의 학생들은 모든 시간을 책을 읽는 데 사용하지 않았다. 1시간의 점심시간을 가지고 모인 6명의 학생들은 자신이 책을 읽으며, 또는 전날 강의를 들으며 만들어둔 질문을 공유하고 투표를 통해 8개의 질문을 선정한다. 각 질문을 언급하고 세부적으로 대화할 주제를 선정하는 시간을 가진 뒤 질문을 제기한 본인이 선정 이유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제시했다. 저녁 시간이 되기 전까지 학생들은 질문에 대한 생각을 근거를 찾아 답변을 마련하고 공유하는 시간을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