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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본질
이제 우리는 니케아 신경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논쟁이 많았던 단어로 나아갑니다. 그것은 헬라어 homoousios(호모우시오스)로, “한 본질로서”(of one substance), 혹은 “같은 실체로서”(same substance), “같은 본질로서”(same essence)로 번역됩니다.
한 가지 차원에서 이 단어는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이 단어는 두 헬라어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homos는 “같은(same)”을, ousia는 “본질(essence)” 또는 “존재(being)”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아버지와 homoousios라는 것은 그들이 동일한 “하나님의 본질(Godness)”을 지닌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되게 하는 어떤 “것” 즉, 하나님을 구성하는 모든 속성이 바로 아들에게도 그대로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와 본질상 하나이시며, 존재에 있어서 하나이시고, 공본질적(coessential)이며, 동실체적(consubstantial)이십니다.
주후 325년, homoousios라는 용어는 아직 정확한 의미를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 단어는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에 의해 여러 방식으로 사용되어 왔지만, 아직 누구의 신학에서도 핵심적인 단어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니케아 회의에서 이 단어가 도입된 것은, 주교들이 아리우스(Arius)와 그의 추종자들이 이 단어를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리우스는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알렉산더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들은 영원하지도(co-eternal) 않고, 자존적(self-sufficient)으로도 아버지와 동등하지 않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아리우스파는 나름대로 “아들의 신성”을 말하기는 했지만, 아버지와 본질상(coessential) 혹은 동등(coequal)하다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시점에서, 4∼5세기에 걸쳐 다양한 신학적 전문 용어들이 어떻게 발전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니케아 신경은 하나님의 아들이 다른 hypostasis(위격)이나 다른 ousia(본질)를 가진다는 견해를 정죄했습니다. 주후 325년 당시에는, hypostasis와 ousia가 서로 바꾸어 쓸 수 있는 단어였으며, 둘 다 “본질” 혹은 “실체(substance)”를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hypostasis는 신적 존재 안에서 개별적 자존 실체(individual subsistence), 즉 독립된 위격(person)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위격적 연합(hypostatic union)”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두 본성이 하나의 위격 안에 결합되어 있다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주후 451년 칼케돈 공회 무렵에는, “본성(nature)”을 나타내는 단어들과 “위격(person)”을 나타내는 단어들이 구분되어 사용되었습니다. “본성” 쪽에서는, ousia(본질) 가 신적 본질을 의미하고, physis(속성) 가 그리스도의 두 본성을 가리키며, substantia(라틴어)가 “존재(being)” 또는 “본질(essence)”을 의미했습니다. “위격” 쪽에서는, hypostasis(위격)가 신적 존재 안의 개별적 자존 실체를 의미하고, prosopon(얼굴, 인격) 도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persona(라틴어)가 삼위일체의 세 위격(persons)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요약하면, 삼위일체에는 세 위격(persons) 이 계시며, 그 세 위격은 모두 동일한 신적 본질(essence)을 공유하십니다.
삼위일체에 관한 기술적인 용어들
| 속성 | 위격 | |
| 헬라어 | ousia = 신적인 본질 physis = 속성 | hypostasis = 위격적인 본체 prosopon = “얼굴” 혹은 위격적인 본체 |
| 라틴어 | 본체 = 존재 혹은 본질 | persona = 삼위의 각 위격 |
| 영어 | 본질 속성 본체 | 본체 위격 |
내게는 모두 헬라어일 뿐이다
homoousios라는 용어에 대한 주요한 반대 중 하나는, 그 당시나, 지금도 니케아 신조가 헬라 철학에 지나치게 의존한 그리스도 이해에 기반한다는 것입니다. 비평가들은 “이것이 정말 성경의 예수인가? 사도들의 순수하고 단순한 신앙은 어디로 갔는가? 왜 교회가 이 ‘헬라 철학적 공식들’로 히브리적 종교를 헬라화(Hellenize)해야 했는가? 왜 단순히 성경의 언어만으로 충분하지 않은가?”라고 질문합니다. 이러한 종류의 반론은 4세기 당시에도 흔했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반복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주장들을 어떻게 평가해야 합니까?
저자는 세 가지 짧은 응답을 제시합니다..
첫째, 신약 성경 자체가 이미 헬라 철학의 개념과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으며, 그 개념의 발전을 예견하고 있습니다. 가장 유명한 예로, 예수 그리스도는 “로고스(Logos)”, 즉 “말씀”으로 불리며,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고 하고, 1장 14절에서는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선언합니다. 또한 빌립보서 2장 6절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형상(μορφή, morphe)”으로 계셨다고 말하며, 히브리서 1장 3절은 아들이 “하나님의 본체(ὑπόστασις, hypostasis)의 정확한 형상”이라고 말합니다. 적어도 hypostasis라는 단어는 성경 단어입니다. 이 외에도, “하나님의 신성(divine nature)”(롬1:20), “신성의 충만(fullness of deity)”(골2:9), “본성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by nature are not gods)”(갈4:8) 등이 등장합니다. 디모데전서 1장 17절은 “영원하신 왕,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는, 오직 한 분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약이 마치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지 않은 순수한 언어”로만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초대 교회는 철학적 용어들이 문화적으로 중요한 시대 속에서 존재했으며, 그러한 단어들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결론짓는 것은 역사적 맥락을 무시하는 일입니다. 초대 교회의 삼위일체 신학자들은 단지 사도 바울과 다른 사도들이 한 일을 계속했을 뿐입니다. 그들은 “헬라인들의 언어를 찬탈”하여, 그 용어들을 참되신 하나님을 설명하는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둘째, 교회는 아리우스가 제기한 주장들에 응답하는 과정에 있었습니다. 아리우스 자신이 이미 철학적 용어와 범주들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반(反)아리우스파가 이해하기 어려운 신학 공식을 만들어 상대를 혼란시키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리우스파가 이미 성경에 없는 전문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주장은 교회가 신중하고 지적으로 대응하지 않고는 무시할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셋째, 우리는 성경적 진리를 요약하고 보호하기 위해 비성경적 단어들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아타나시우스가 350년경 『니케아 정의의 변증(Defense of the Nicene Definition)』에서 주장한 요점입니다. 아타나시우스는 사람들은 같은 성경적 단어를 사용하면서도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오늘날 표현하자면, “같은 단어지만 다른 사전(Same vocabulary, different dictionary)”을 사용하는 셈입니다. 모든 신학자가 같은 단어로 같은 뜻을 말한다고 가정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비성경적 단어들이 오히려 성경의 가르침을 명확히 드러내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 단어들을 사용하는 것이 옳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 단어들을 싫어한다면, 문제는 단어 그 자체가 아니라, 성경이 실제로 가르치는 내용에 대한 우리의 불일치일지도 모릅니다. 주교들은 니케아 신조를 가능하면 성경의 언어로만 표현하기를 원했으나, 단순히 성경 구절을 반복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이단들도 “성경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신앙고백을 거짓으로 인정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정확한 신학적 전문 용어가 필요했고, 바로 그 이유로 “homoousios”라는 단어가 필요했습니다.
이름 속에 담긴 의미는 무엇인가?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homoousios(“본질이 하나이다”)라는 단어가 포함된 이후에도, 아리우스 이단이 제기한 신학적 문제들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 결정적인 단어는 이후에도 계속되는 논쟁의 초점이 되었습니다. 니케아 이후 몇 년 동안 본질적으로(말장난이 아니다) 네 개의 신학적 그룹이 형성되었습니다.
1. 아들과 아버지가 homoousios(“본질이 하나”)임을 강하게 확증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니케아 신조가 그렇게 고백했듯이, 호모우시아파는 아들이 하나님의 본성을 함께 나누신다고 믿었습니다.
2. 또 다른 사람들은 아들과 아버지가 homoios kat’ ousian(“본질에 따라 유사하다”)고 말하길 선호했습니다. 이것은 전자의 견해와 정반대처럼 들릴 수 있지만, 그들이 말한 의미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아들이 하나님과 “정확히 같다”라고 믿었습니다. 왜 그들이 “같다(same)” 대신 “비슷하다(like)”라는 말을 선택했는지는 곧 보게 될 것입니다.
3. 또 다른 사람들은 아들과 아버지가 homoios kat’ energian(“행위에 따라 유사하다”)고 믿었습니다. 즉, 이 호모이안파는 아들이 하나님과 같은 방식으로 행동한다고 주장했습니다.
4. 마지막으로, 아들과 아버지가 heterousios(“본질이 다르다”)라고 믿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이 헤테로우시아파는 아들이 하나님의 본성을 소유하고 있다고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두 공식은 니케아가 보호하려던 신앙과 명백히 상충했습니다. 반면 처음 두 공식은 동일한 것을 지키려는 시도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들과 아버지가 동등하게 하나님이시라는 점을 말입니다. 그러나 세 번째와 네 번째 공식은 다른 것을 주장했습니다. 아들과 아버지는 동등하게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비록 아버지와 아들이 창조, 섭리, 구속 등 동일한 일들을 수행하더라도, 그들은 본질적으로 같은 존재유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심지어 정통적인 지도자들 가운데서도 homoousios에 대해 확신하지 못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350년대에 이르러서야 아타나시우스가 니케아의 언어를 절대적이고 확고하게 지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단 확신하게 되자, 그는 니케아 신조의 가장 유능하고 중요한 수호자이자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아타나시우스에게 homoousios는 다음의 점들을 지키기 위한 가장 좋은 표현이었습니다. 아들의 ‘출생’은 인간의 출생과 같지 않습니다. 아들은 피조된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리우스가 말했듯이 “그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아타나시우스가 죽은 뒤, 지도력의 바통은 세 명의 카파도키아 교부들, 카이사리아의 바실(Basil of Caesarea), 그의 형제 닛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 그리고 그들의 가장 친한 친구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Gregory of Nazianzus)에게 넘어갔습니다. 처음에 그들은 homoousios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망설임은 아리우스에 대한 동조와는 전혀 관련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카파도키아 교부들은 강력한 반(反)아리우스파였습니다. 그들이 염려한 것은 homoousios가 물질적인 의미를 내포할 위험이었습니다. 만일 두 위격이 한 본질을 공유한다고 한다면, 그것이 두 사람이 공통된 근원(예: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두 형제)에서 비롯되었다는 뜻입니까? 혹은 두 위격이 어떤 선재하는 물질로부터 동일한 본질을 나누어 가졌다는 의미입니까? 무엇보다도, 카파도키아 교부들은 “동일한 본질”이라는 표현이 아들이 아버지의 일부라는 인상을 줄까 염려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homoousios는 신적 본질이 나누어지는 것처럼 오해될 위험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의 플레이도(Play-Doh) 공을 반으로 나누면 두 개의 동일한 공이 생깁니다. 이 둘은 같은 본질을 가졌지만, 그것은 나눔과 분할을 통해 생긴 동일성이기 때문입니다. 카파도키아 교부들은 homoousios가 바로 그런 식으로 이해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바실은 처음에는 homoiousian(“본질에 따라 유사하다”)의 강한 형태가, 아타나시우스가 homoousios(“본질이 하나이다”)로써 지키고자 했던 진리를 조잡하고 물질적인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으면서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아들의 본성이 아버지의 본성과 정확히 같다(homoios)”라고 말함으로써, 니케아 정통이 의도한 바를 표현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바실은 homoiousian이 새로운 문제들을 불러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본질에 따라 유사하다”(라는 표현이 작동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뒤에 반드시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라는 단어가 붙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라는 말이 쉽게 생략되거나 간과될 수 있고, 그 결과 사람들이 “유사하다(like)”를 “같다(same)”의 부정으로 오해할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바실은 “결국 우리는 ‘유사하다’라는 말을 아주 희미하고 근본 원형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유사성에도 자주 사용한다. 그러므로 나는 ‘본질이 같다’라는 표현이 왜곡될 위험이 더 적다고 생각하므로, 나 역시 이 용어를 채택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사벨리우스주의(Sabellianism), 즉 양태론(modalism)의 문제가 남아있었습니다. 이 이단은 아버지와 아들이 단지 하나의 신적 존재의 다른 양태일 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하나의 본질(one substance)”이라는 말이,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하나님이 단지 다른 가면을 쓴 것이거나, 다른 존재 양식으로 나타난 동일한 하나님이라는 뜻으로 오해될 것을 염려했습니다. 바실은 homoousios가 아리우스주의와 사벨리우스주의를 모두 배제할 수 있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동일한 본질을 공유하지만, 수적으로 하나(numerically one)는 아닙니다.
아리우스주의에 대항하여, 니케아 정통은 “아들이 아버지와 동일한 본질이라면, 그는 아버지의 피조물일 수 없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만약 아들이 한때 존재하지 않았던 적이 있다면, 그는 영원한 아버지와는 다른 종류의 존재임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사벨리우스주의에 대항하여, 니케아 정통은 “아들이 아버지와 동일한 본질이라면, 그는 단순히 아버지의 또 다른 나타남(manifestation)일 수 없다. 어떤 존재도 자기 자신과 homoousios(동일본질)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반드시 구별(distinction)이 있어야 한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점은 단순히 아들의 정체성뿐 아니라 아버지의 정체성을 위해서도 중요합니다. 만약 아들이 영원하지 않다면, 아버지도 영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버지는 결코 ‘아버지’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참 하나님으로부터 나신 참 하나님
결국 homoousios(“본질이 하나이다”)라는 단어는 신약성경이 분명하게 증거하는 진리, 즉 하나님의 아들이 완전한 하나님이심을 수호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으로 인정되었습니다. 다음의 말씀들은 그 사실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 요한복음 1장 1∼3절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말씀은 하나님이시니라”라고 합니다. “태초에”라는 표현은 우리를 창세기로 되돌려 보내며, 육신이 되신 그 말씀(로고스)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바로 그 하나님이심을 알려줍니다.
• 요한복음 8장 58절에서 예수께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I am)”라는 신적 호칭을 사용하십니다. 청중들이 그 엄청난 선
언의 의미를 즉시 알아차렸기에, 그들은 돌을 들어 예수를 치려 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 마태복음 26장 63∼65절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을 “인자”라 부르시며 또 다른 신적 칭호를 사용하십니다. 그의 말을 들은 자들은 그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그를 신성모독으로 고발합니다.
• 마가복음 2장 5∼7절에서 예수께서 중풍병자에게 “네 죄가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셨습니다. 이 또한 신성모독이라 여겨졌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만이 죄를 사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 누가복음 24장 51∼52절에서 예수께서 승천하실 때 제자들은 그에게 경배(worship)를 드립니다. 이것은 피조물에게 결코 바칠 수 없는 행위이며, 단순한 피조물이라면 감히 받을 수도 없는 예배입니다.
• 요한복음 20장 28절에서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합니다.
• 디도서 2장 13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위대하신 하나님이요 구주”로 불리십니다.
• 고린도전서 8장 6절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신 신앙의 중심(신6: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이시니”) 한가운데에 두며,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한 신성을 가지신 분으로 선포합니다.
• 요한계시록 22장 13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끝이라”라고 선언하십니다. 이 말씀은 전능하시며 영원하신 하나님 자신만이 사용할 수 있는 언어입니다.
이 모든 귀하고 영광스러운 진리를 어떻게 요약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말해야 할 것도, 말할 수 있는 것도 많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진술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으로부터 나신 참 하나님이시며, 지음받은 분이 아니라 나심을 받은 분이시며, 아버지와 본질이 하나이신 분이시다”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