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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물 에세이 ②
아흔아홉 명의 사람들
홍일표(시인)
오탁번 시인
자칭 ‘늙은이애’ 오탁번 시인의 시집 『알요강』을 재밌게 읽었다. 오탁번 시를 얘기할 때 우리말 고유어 활용을 많이 거론하지만 나는 그보다 시에 나타난 유머 감각과 경계 없이 넘나드는 만물 공생의 상상력에 주목한다. 죄송한 표현이지만 선생을 떠올릴 때마다 술 한 잔 걸치고 얼굴이 볼그족족한 장난꾸러기 할배가 눈앞에 그려진다. 당신의 시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시인의 작품 앞에서는 언제나 무장해제가 된다. 원서헌을 거니는 헐렁한 일상복 차림의 슴슴한 시가 경쾌하게 다가온다. 굳이 긴장하거나 골머리를 앓으면서 시를 대할 필요가 없다. 이 또한 아무나 쉽게 이를 수 없는 하나의 경지임에 틀림없다. 이름하여 전복적인 웃음의 코드를 내장한 오탁번 장르의 시라 할 수 있겠다.
오탁번 시인이 작고하기 전의 일이다. 자신의 가묘 앞에 서서 ‘오탁번, 너 / 잘 죽었다’(「그늘집」)고 중얼거리는 선생에게 시집을 받았다는 인사를 하자 뜻밖의 문자가 왔다.
“내 시집을 夕佳軒(정진규 시인이 말년에 머물던 집)으로 絅山兄主 天下라고 서명하여 보내드렸다오. 이게 이승과 저승의 律呂 아니겠소.”
이미 고인이 된 분에게 시집을 보낸 선생의 문자를 받고 잠시 창밖을 무연히 바라보았다. 두 분 어른이 생사를 넘어 화친(和親)과 회통(會通)으로 교우하는 정경이 어른거렸다. 시인의 율려를 되새기면서 정진규 시인 저서에서 오탁번 시인의 ‘죽음에 관하여’에 대해 언급한 조각글 하나를 발견했다.
“병원에서 ‘바지’ 대신 ‘바다’를 한 벌 갈아입고 나온 오탁번 시인. 그는 죽음의 순간마저 해학으로 자리바꿈하는 ‘슬프고 황홀한’ 행간을 우리에게 언제나 나직이 열어 보인다. 글쎄, ‘뿌리’와 ‘바다’가 아무래도 아주 잘 맞아떨어지는 궁합일 듯한데. 그렇지, 바다 그 영원한 모성을 한 번 갈아입으셨으니.”(『향깃한 차가움』 2014, 고려대출판부)
응암동 S
그는 술에 취하면 전화한다. 밤낮의 구분이 없다. 자기가 하고 싶을 때 한다. 전화기가 뜨거워질 정도로 통화를 오래 한다. 그는 지금 망명 중이라고 한다. 알 듯 모를 듯한 말이 끝없이 이어진다. 나는 주로 청자의 입장을 고수하고 그는 화자의 입장이다. 실컷 얘기할 수 있게 적당히 장단도 맞춰준다. 이야기 할 상대가 없어 늘 외롭다고 한다. 그럴 때는 혼자 무작정 걷는다고 한다. 비가 오면 홍상수 영화를 보면서 홍상수답게 늘 같으면서도 늘 다른 방법으로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의미, 가치 등의 말을 믿지 않는다고 한다. 전통이나 고전이라는 말은 더욱 싫어한다고 한다. 고정된 실체가 없는데, 잠시 반짝였다 사라지는 것들인데, 채워지지 않는 환상의 빈 구멍인데, 뭘 믿을 수 있겠느냐고 혼자 중얼거린다.
어제도 한 시간 넘게 통화하였다. 응암동에는 지금 비가 오고 있다고 한다. 이것만이 진실이라고 말한다, 방금 전에 종이 위에 공룡이라고 썼는데 공룡이 사라졌다고 한다. 내가 쓴 공룡은 공룡이 아닌데 공룡이라고 우기는 놈들은 사기꾼이라고 말한다. 어제도 강의실에서 아이들에게 두 시간 동안 사기를 쳤다고 한다. 이거 다 사기고 가짜라며 믿지 말라고 했단다. 가장 무서운 것이 확신이라고, 믿는 순간 허깨비의 노예가 되는 것이라고, 이런 강의를 듣기 싫으면 강의실 밖으로 나가도 좋다고 했단다.
아내와 이혼한 그는 빌라 반지하에서 혼자 산다. 사랑하지 않는데 그를 찾아오는 여자가 있단다. 반찬도 해주고 청소도 해준단다. 필요 없다고 해도 자꾸 찾아와서 그 여자의 후의가 많이 부담스럽다고 한다. 전화가 끊겼다. 다시 벨이 울린다. 그의 낮고 느린 어조의 말이 다시 이어진다. 사이비 종교와 정치에 대한 혐오, 가짜 정의와 진리가 그들의 기호 상품이 되어 싸구려로 팔리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한다. 이제 전화를 끊어야겠단다. 술이 떨어져서 빌라 앞 슈퍼에 가서 술을 사와야 한단다. 술은 그만하고 자라고 했지만 그는 내 말을 듣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는 그이기 때문이다. 그는 오늘 밤도 망명 중일 것이다.
택시 기사
오랜만에 택시를 탔다. 운전기사는 일흔이 넘어 보였다. 머리는 백발에 가까웠다.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이 짓도 30년이 넘어서 그만두려고 했는데 막상 그만두려고 하니 자꾸 망설여집디다. 언제 죽어도 이상한 나이가 아니지만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노후 걱정을 안 할 것 같아서요. 평생 열심히 산 것 같은데 남은 건 17평 빌라 한 채가 전부네요. 매월 먹고 살면 남는 게 없더라구요.
-중학교 겨우 마치고 고등학교는 못 갔어요. 70년도 초에 신림동 달동네에서 대학생들이 운영하던 야학에서 공부한 게 전부예요. 혹시 철거민촌 ‘낙골’을 아세요?
택시를 탄 곳이 신림동 근처라 그곳에 연고가 있는 줄 알고 묻는 것 같았다. 모른다고 하자 그는 계속 자기 말을 이어갔다. 택시는 한강대교를 건너는 중이었다.
-그때 거긴 수돗물이 나오지 않았어요. 화장실도 공용 화장실밖에 없어서 매일 아침 줄 서서 기다려야 했구요. 거기서 사글세방에 살면서 온갖 고생을 다했지요. 구로공단에 다니면서 근근이 살던 때였어요. 지금 생각하면 징글징글해요.”
월요일이라서 그런지 차가 많이 밀렸다. 아무래도 앞에 무슨 사고가 난 것 같다고 하였다. 운전기사의 말은 두서없이 이어졌다.
-손님들 중엔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어요. 얼마 전에 봉변을 당했어요. 젊은 사람인데 술에 잔뜩 취해서 횡설수설하면서 욕을 하는 거예요. 그러시지 말라고 했더니 말대꾸한다고 막 화를 내더라구요. 어이가 없었지요. 술 취한 개라고 생각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더니 자기를 무시하느냐고, 또 시비를 걸더라구요. 어떤 손님은 자기 자랑만 하다 내리는 사람도 있어요. 자기가 민주화 운동을 한 유명한 사람이라며 인터넷 검색하면 금방 알 수 있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대단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내릴 때 택시비가 너무 많이 나왔다며 막 화를 내는 거예요. 미터기를 조작했느니 어쩌니 하면서---.
시청 앞에서 택시를 내렸다. 약속 시간보다 많이 늦어 서둘러 뛰어갔다. 이미 참석자들은 다 와 있었다. 뒷자리에 간신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사회자의 말은 귀에 들리지 않고, 택시 기사가 불쑥 내뱉은 마지막 말이 계속 머리에 맴돌았다.
“사람들은 모두 착각 속에 사는가 봐요. 뜬구름처럼 다들 허깨비로 살다 가는 건데---”
박석수 시인
『위저드 베이커리』의 작가 구병모의 문학적 재능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박석수 시인이 아닌가 싶다. 박석수 시인은 1971년 대한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1996년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많은 시와 소설을 남겼다. 그가 『문학사상』 편집장으로 있을 때 전국청소년문학상을 제정하여 운영했는데 1회 대상 수상자가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구병모였다. 그때는 필명이 아닌 본명을 사용했다. 수상자가 결정되고 나서 박석수 시인은 탁월한 재능의 예비 작가를 발견한 기쁨을 자주 말하곤 했다. 흥분과 설렘을 감추지 못하던 그의 모습이 먼 기억 속에서 어른거린다.
박석수 시인이 태어나 자란 곳은 현재 평택시로 통합된 경기도 송탄 지산동이다. 그의 부친이 그곳에서 콩나물공장을 운영했고, 신혼 초에는 인근 좌동에서 현대서점을 운영하였다. 송탄 지산동과 인연이 깊은 시인으로는 정현우 시인과 유이우 시인이 있다. 정현우 시인은 201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첫 시집 『나는 천사에게 말을 배웠지』(창비)를 출간했고, 유이우 시인은 2014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하여 2019년 첫 시집 『내가 정말이라면』(창비)을 냈다. 같은 동네 지산동(芝山洞)에서 서로 이웃으로 지내던 두 시인은 공교롭게도 거의 같은 해에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같은 출판사에서 시집을 출판했다. 그들의 문학적 탯줄이 지산동이라는 동일한 공간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이 신기하고, 더군다나 박석수 시인이 태어나 성장한 곳이라서 더욱 각별하게 느껴졌다.
신장리 할매
“우리 엄니가 바람났슈”
“그게 뭔 소리여. 70 노인이 뭔 바람이 나?”
“사실이유. 안 하던 화장을 하고, 옷도 젊을 때 입었던 옷을 다시 찾아 입고, 난리유, 난리!”
“노인대학 다니시느라고 그러시겄지.”
“아녀유. 진짜래니께유.”
“진짜면 경사 난 거여. 그 연세에 바람 난 건 좋은 것이지. 그야말로 회춘인데, 을마나 좋아. 그냥 모른 척 혀. 서른한 살에 혼자 되셨으니 그동안 얼마나 외로우셨겄어.”
“우리 엄니가 좋아하는 양반이 노인대학 선생님이래유. 아침 밥만 드시면 노인대학으로 달려 가시는 거유. 가끔 무슨 선물도 가져가시는 거 같어유. 알록달록한 포장지에 싼 걸 나 모르게 가방에 넣고 잽싸게 달아나셔유. 뭐냐고 그러면 니가 알 것 없다고 그러면서유.”
“아따 그러면 이참에 시집 보내 드려.”
“그 나이에 무슨 시집이유.”
“노인대학 영감 만나서 회춘하셨는디 눈 딱 감고 그렇게 혀. 요즈음은 그게 효도여.”
“하긴 영감님 만나고 아프다던 다리도 괜찮은지 잘 걸으시고, 잘 웃지 않던 분이 가끔 웃기도 하시는 걸 보면 괜찮은 것도 같긴 혀유.”
“연애는 말이여. 나이랑 상관 없어. 70 넘은 노인도 좋아하는 사람 만나면 가슴이 벌렁거리고, 하루라도 못 보면 애가 타는 법이여. 늙었다고 그런 감정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천만의 말씀이여. 아마 지금 자네 엄니는 하루하루가 행복하고 즐거울 거여.”
“그렇긴 한데 어제는 잔뜩 화가 나서 집에 오셨더라구유.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었냐구 하니께 좋아하던 영감이 다른 할매랑 화춘옥에서 짜장면 먹었다는 얘기를 들으셨대유. 그러면서 요즘 영감탱이들은 한 살이라도 젊고 예쁜 할매 좋아한다면서 막 험담을 하시더라구유.”
“거 있잖여. 보톡슨가 뭔가 있다는디 그거 해드려. 주름도 없어지고 십 년은 더 젊어진다고 하더만.”
“아따, 형님은 남의 일이라고 함부로 얘기하시네. 그것도 다 돈 들어가는 일이잖유. 한두 푼도 아닐 텐디---.”
“아녀. 그렇게 비싸지 않은 것 같어. 요즘 할매들은 툭하면 병원 가서 눈썹 문신도 하고, 보톡스도 맞고 그러더구먼.”
“암튼 저렇게 즐겁게 노인대학 다니시면 좋을 텐데 혹시라도 영감님과 틀어져서 잘못되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도 들어유.”
“그러니께 용돈도 팍팍 드리고, 옷도 사 드리고 혀. 영감님하고 여행도 다녀오시라고 하구.”
“알았슈. 저기 우리 엄니 오시네. 내일 다시 들를 게유.”
이순자 작가
1년 전에 나온 이순자 유고 산문집 『예순 살, 나는 또 깨꽃이 되어』 를 읽는 내내 고압전류에 감전된 것 같았다. 지은이는 무명의 작가였다. 그는 나이 50 중반에 경희사이버대 문창과에 입학하여 뒤늦게 문학을 시작했고, 작고 전까지 글을 썼다. 등단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았지만 그는 이미 뛰어난 작가였다. 그의 산문집을 읽으면서 왜 이런 탁월한 문장가가 여지껏 재야에 묻혀 있었나 싶었다. 안타까웠다. 유명작가의 글과 비교해도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호스피스, 요양보호사, 청소부, 기초생활수급자 등으로 고단한 삶을 살면서 겪은 일들이 한 권의 책 속에 묵직한 감동으로 담겨 있다. 청각장애인으로 많은 상처를 안고 살았지만 어설픈 감상이나 연민은 어디에도 없다. 아프고, 뜨겁고, 치열한 삶의 이야기들이 현학적 수사나 허세 없이 진솔하고 정련된 문장으로 기록되어 있다. 어떤 산문은 잘 짜인 단편소설로 읽히기도 했다. 「첫사랑」 「우리 막둥이 삼촌」 「순분할매 바람 났네」 「돌봄」 「실버 취준생 분투기」 등은 읽는 내내 가슴이 저리고 먹먹했다.
이순자 작가는 타계 직전인 2021년 제16회 전국장애인문학제에서 「순분할매 바람 났네」로 대상을 수상했고, 이어서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문학상 논픽션 부문에 「실버 취준생 분투기」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그는 당선 통보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심근경색으로 갑자기 숨을 거두었다.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한 지인들이 유고를 모아 산문집 『예순 살, 나는 또 깨꽃이 되어』 와 시집 『꿈이 나를 찾아와 불러줄 때까지』를 펴냈다. 이제 막 문학적 성과를 드러내기 시작했던 터라 그의 갑작스런 죽음이 더욱 애틋하고 각별하게 다가왔다. 한동안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순자 작가의 유고 산문집을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다닐 것 같다.
홍일표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하였다. 시집 『매혹의 지도』, 『밀서』, 『나는 노래를 가지러 왔다』, 『중세를 적다』 , 『조금 전의 심장』, 청소년 시집 『우리는 어딨지?』, 평설집 『홀림의 풍경들』, 산문집 『사물어 사전』 등을 펴냈다. 제8회 지리산문학상, 웹진 시인광장 「올해의 좋은시상」, 매계문학상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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