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건국대학교 축산대학에서 그를 처음 만났습니다. 체구는 나와 비슷했으나 문학소년의 티를 감추지 못한 연약한 인상이었습니다. 용돈도 충분치 않던 시절이라 학창시절 우리는 함께 대학 도서관에서 주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ROTC 과정을 함께하고 임관 병과를 지원할 때 우리는 길지 않을 병영생활이기에 편한 곳 말고 다양한 경험 쌓을 수 있는 보병 병과를 지원하여 함께 육군 보병학교 초급장교 과정을 수료하고 각각 다른 사단으로 배치되었습니다.
30개월 군 복무를 마치고 전역한 나는 문학 소년 같던 그가 장기복무를 지원한 것을 알고 무척 놀랐으나 우리는 각자 선택한 삶의 여정을 부지런히 걸어왔습니다.
나는 농협중앙회 사무직원 공채시험에 합격 서울 시내 은행 점포에서 금융업무에 종사하다가 태동하는
한국 낙농업의 최 전선이었던 농협중앙회 서삼능낙농시범목장으로 배치되었습니다.
맏아들 낳고 목장 사택에 살고 있을 때 그는 아직 미혼으로 보안대장 전용 찦차를 타고 찾아와 반가운 해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정된 그의 결혼 절차에 따라 나는 신부 댁에 혼인 예물을 전달하는 함재비 역할도 했습니다.
호주와 미국 대사관에서 해외 근무를 마친 그는 대령으로 진급하여 그 당시 장성으로 진급이 무난했던 논산 육군훈련소 참모장으로 부임했습니다. 그리고 졸업 후 입대하려고 대학생으로 호주에 체류 중인 그의 외아들을 호출하여 입대 시켰습니다.
나는 훈련 과정이 끝나면 그는 아들을 육군 본부나 카투사로 배치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들을 최 전방 보병사단으로 배치하였습니다. 배치된 사단 보충대에서 지급받은 군복이 너무 작아 교환하려고 보급창에 간 아들은 행방 불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후 군복 지급 업무를 담당했던 하사관도 의문의 죽음을 하였습니다.
부모 된 사람이면 이때 이상갑 대령의 심정은 조금이라도 이해할 것입니다.
그는 장성 진급도 포기하고 전역하여 아들을 그리워하며 지내다가 심장에 이상이 생겨 심장 수술까지 받으며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먼저 간 아들 그렇게 그리워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이제는 자네 마음이라도 추스려야지. 대학시절 우리는 가끔 시도 써 보지 않았느냐? 대학 문예창작 교실도 여러 대학에 설치되어 있으니 그곳에서 자네의 숨은 문학성을 찾아보면 어떨까?”
못난 친구의 충언을 받아드린 그는 중앙대학교 문예창작반에 입교하여 그의 아들을 사모하는 시작에 열중하다가 우리와 작별하였습니다.
최근 자식을 위해 그와는 정 반대의 길을 걸으면서도 승승장구해 온 이들의 이야기를 매스컴에서 접할 때 마다 나는 그의 죽음이 더욱 더 안타깝습니다.
오늘 나는 표현하기 어려운 착잡한 심정으로 그의 안식처를 다녀왔습니다.
사랑했던 아들과 하늘 나라에서 행복하게 지내 길 기원하며
첫댓글 아니 아들 사건은 미제사건입니까?
의문의 죽음이네요.
그리고,
이지묵을 아시겠군요.
중,고 동창입니다.
그리고 사촌 형님이 송은기입니다.
저의 아버지께서도 농협 맨이십니다.
반갑습니다.
친구를 잊지못하는 임의 마음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