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연재물은 취금헌 박팽년 선생 탄신 6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순천박씨충정공파종친회가 발행하고,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송은석이 지은 [충정공 박팽년 선생과 묘골 육신사 이야기]라는 책의 원고이다. 책의 처음부터 순서대로 차근차근 시간 나는대로 게재토록 하겠다. 강호제현들의 많은 관심과 질책을 기다린다.
7. 400년 전 선인과의 교감, 이호민의 시(詩)
필자의 집에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TV가 없었다. 어림잡아도 TV가 없었던 기간이 10년은 훨씬 넘은 것 같다. 처음에는 TV가 없는 덕을 톡톡히 봤다. TV가 없어진 뒤로는 가족들이 각자 자신의 시간을 좀 더 유용하게 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스마트폰’이 등장하면서부터는 이러한 혜택이 다 사라져 버렸다. 가족들이 손에 그 이상한 기기(?)를 들고 각자 자기 방으로 들어가고 나면, 다음 날 아침이나 되어야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TV가 있을 때 보다 오히려 더 못해진 것이었다. 그나마 TV가 있었다면 하루에 한 번씩이라도 한자리에 모이기는 했을 텐데…
그래서 필자는 그 이상한 기기(?)를 병적으로 싫어한다. 솔직히 시간을 과거로 되돌릴 수만 있다면 스마트폰이 없었던 그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을 정도이다. 그래서일까. 필자는 아직까지도 ‘2G’폰에 ‘018’번호를 고집하고 있다. 그 덕에 요즘 가는 곳 마다 ‘시대에 뒤쳐진 사람’이라며 욕을 많이 얻어먹고 있다.
‘아! 정말이지 나 돌아가고 싶다!’
1. 하빈 땅을 우습게 알지 말라
2000년도에 개봉된 영화중에 ‘동감[김하늘·유지태]’과 ‘시월애[이정재·전지현]’라는 영화가 있었다. 이 두 영화의 공통점은 모두 시공간을 건너 뛴 러브스토리라는 점이다. 전자는 20년의 시간차를, 후자는 바닷가의 한 집을 배경으로 하되 역시 시간차를 두고 주인공 남녀가 러브스토리를 펼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두 영화에는 각각 ‘무전기’와 ‘편지’라는 중요한 소재가 등장한다. 사실상 각자가 살고 있는 시간과 공간상의 차이로 인해 현실 속에서는 도저히 연인이 될 수 없었던 두 남녀. 하지만 그들은 ‘무전기’와 ‘편지’라는 매개체를 통해 사랑을 꽃피워간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과거에 대한 후회’ 그리고 ‘현재에 대한 불만족’이라는 굴레를 벗어나기 힘들다. 그래서일까. 위 영화들과 같이 시공간을 넘나드는 스토리들이 대체로 사람들에게 잘 먹혀드는 것 같다. 그런데 늘 옛 것에 대한 무한한 동경심을 품은 탓일까? 필자는 위 영화의 주인공처럼 가끔 시공간을 초월하여 선인(先人)과 교감을 한 적이 있다. ‘시월애(時越愛)’가 아닌 ‘시월감(時越感)’ 말이다.
필자는 묘골 육신사에서 해설을 할 때, 특히 대구시민이 그 대상일 때 반드시 전달하는 메시지가 있다. 그중 하나가 ‘하빈(河濱)’이라는 지명에 대한 것이다. 하빈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골’의 하빈을 말하는 것이다.
유가(儒家)에서 최고의 성인(聖人) 두 분을 꼽으라면 당연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을 들 수 있다. 요임금은 순임금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요즘의 상식과는 달리 이 두 사람은 혈연관계가 아니었다. 한마디로 일면식도 없는 남남이었던 것이다. 그때만 해도 그랬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왕위를 넘기는 식이 아니었던 것이다. 천하에 수소문하여 왕이 될 만한 인재를 찾은 뒤 그에게 왕위를 넘겼던 것이다. 그렇다면 요임금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은 순임금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유가(儒家)의 경전에 의하면 왕위에 오르기 전 순임금은 ‘역산(歷山)’에서 농사를 짓고, ‘하빈(河濱)’에서 질그릇을 구웠으며, ‘뇌택(雷澤)’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살았다고 한다. 사실 이 텍스트는 유가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뤄지는 텍스트인데, 이에 대한 좀 더 자세한 내용은 뒤에 나올 ‘도곡재’ 편에서 다시 다루기로 하자. 여하튼 역산·하빈·뇌택이라는 지명은 성인인 순임금이 한때 은거한 곳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이른바 때를 만나기 전까지 ‘잠룡(潛龍)’이 거(居)한 땅이란 뜻이다.
“여러분!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을 우습게 아시면 안 됩니다. ‘하빈’이라는 지명은 지금으로부터 약 1,200년 전인 신라 경덕왕 때 처음 사용되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다사지(多斯只)’라고 불렸죠. 그런데 한 가지 주목할 점은 하빈이라는 지명이 지금으로부터 약 4,300년 전에도 중국 땅에 있었던 지명이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순임금이라 불리는 유가의 성인이 살던 땅으로 말입니다. 이렇듯 하빈은 오랜 역사와 더불어 유가적인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닌 땅입니다.”
그런데 옛날에도 이와 같이 하빈에 대해 필자와 똑같은 생각을 가진 인물이 여러 명 있었다. 예를 들면, 뒤에 다시 이야기가 되겠지만, 이곳 하빈면 묘골 출신의 도곡(陶谷) 박종우(朴宗祐)[1587-1654]가 그러하다. 자신의 호에 질그릇 ‘도(陶)’자를 사용했으니 말이다. ‘하빈에서 질그릇을 굽다’는 텍스트와 딱 맞아 떨어지지 않는가! 그런데 박종우 외에 또 한 명의 인물이 더 있다. 바로 오봉(五峯) 이호민(李好閔)[1553-1634]이다.
2. 태고정에 걸려 있는 스마트폰 보다 더 스마트한 시(詩)
현재 태고정에는 ‘태고정’·‘일시루(一是樓)’ 같은 대자(大字) 편액을 비롯한 몇 개의 작은 현판들이 게시되어 있다. 그런데 그중에는 앞서 이야기한 대로 이곳 하빈 땅과 묘골에 대해 필자와 똑같은 생각을 지녔던 한 선인의 시판도 있다. 바로 오봉 이호민의 시판이 그것이다.
태고정 대청에 걸려 있는 오봉 이호민의 시판
이호민은 자가 효언(孝彦), 호는 오봉(五峯), 본관은 연안이다. 문과 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했으며, 직접 명나라에 가서 명나라 원군을 불러들이는 데도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하지만 광해군 시절에는 정치적으로 탄압을 받았으며, 인조반정 이후에 다시 조정의 원로로서 후한 대접을 받았다. 그런 그가 임진·정유 양란이 끝난 직후인 1598년[선조 31] 12월 17일, 이곳 하빈면 묘골에서 시를 한 수 지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호민이 시를 짓던 그 당시의 상황은 그리 녹록지가 않았다. 전쟁 직후인데다가 유람을 즐기는 상황은 더더욱 아니었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가 묘골에서 시를 짓던 400년 전 그날의 상황에 대해 알아보자.
임진·정유 양란이 끝나고 명나라 사신 서관란·진효·정응태·양조령 등이 그들의 군사를 이끌고 묘골로 들어왔다. 이에 우리 측에서는 접반사(接伴使)로 공조판서 신점(申點)·동지중추부사 이호민·형조참판 윤국형(尹國馨)·용양위상호군 백유함(白惟咸)·권지승문원부정자 소광진(蘇光震) 등이 나섰다. 이때 묘골의 주인이었던 박충후[박팽년의 5세손]는 이들 일행을 묘골에서 3일간이나 극진히 대접을 했다. 전쟁 직후에 지방에서, 그것도 관아가 아닌 시골의 한 작은 동네에서 개인이 명나라 사신단 일행을 대접한 것이었다. 그것도 3일간이나 말이다. 여하튼 이 엄청난 일의 뒤에는 당시 묘골의 주인 박충후가 있었다.
참고로 당시 명나라 사신들은 자신들에 대한 3일간의 대접에 대해 묘골에 보답을 했다. 묘골 서쪽 낙동강 동편에다 그들의 군사를 동원해 넓은 면적의 농토를 개간해준 것이다. 이 땅은 낙동강변에 명나라 대장기[纛·독]를 세우고 개간한 땅이라고 하여 지금까지도 ‘뚝밭·독밭[纛田]’이라 불린다.
한편 당시 조선과 명나라의 양측 참석자들은 명나라 사신 대표였던 서관란의 권유로 자신의 직책과 이름을 기록한 방명록을 하나 남겼다. 그와 동시에 서관란은 우리 측 접반사였던 오봉 이호민에게 만남을 기념하는 시 한 수를 부탁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탄생한 시가 바로 태고정 대청에 게시되어 있는 이호민의 오언율시이다.
그런데 이 시판은 참으로 난해하기 그지없다. 초서로 휘갈겨 놓은 시판인데 범부의 수준으로는 도무지 무슨 글자인지 알아볼 수가 없다. 초서라는 게 본디 그렇기는 하지만 이건 정말 좀 심하다 싶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오봉선생문집의 도움을 받았다. 해당 부분을 원문 그대로 옮겨놓고 해석을 해보면 다음과 같다.
-------------------------------------------------------------------------------
萬曆二十六年十二月十七日。欽差東征徐給事觀瀾,陳御史效,梁按察祖齡,丁主事應泰,給事接伴申點,御史接伴李某,布政接伴尹國馨,王事接伴白惟咸,御史接伴從事蘇光震相從過大丘河濱朴忠後莊。朴君迎勞甚勤。相與題名如右
만력 26년 12월 17일. 흔차동정급사 서관란, 어사 진효, 안찰 양조령, 주사 정응태, 급사접반 신점, 어사접반 이호민, 포정접반 윤국형, 왕사접반 백유함, 어사접반종사 소광진이 대구 하빈 박충후의 장원을 방문했는데 박충후가 이들을 맞이하는데 노고를 다했다. 이에 서로의 이름을 남겼다.
朴氏忠賢後(박씨충현후) 박씨는 충현의 후예요
河濱舜所陶(하빈순소도) 하빈은 순임금이 질그릇 굽던 곳이라
今朝繡衣過(금조수의과) 지금 명나라 조정의 대신들이 찾아왔으니
是處里門高(시처리문고) 묘골의 마을 문이 높도다.
水繞開林館(수요계림관) 물은 감돌고 숲속의 집은 열렸으며
山回隱節旄(산회은절모) 산은 감싸고 절모는 숨겼도다.
從今天下士(종금천하사) 지금부터 천하의 선비들은
談勝數江皐(담승수강고) 경승을 이야기함에 이 강 언덕을 헤아릴 것이니라.
--------------------------------------------------------------------------------
이 시에서 유독 필자의 눈을 사로잡은 구절은 수련(首聯)인 1·2구의 ‘朴氏忠賢後 河濱舜所陶(박씨충현후 하빈순소도)’이다. 해석하자면 ‘박씨는 충현의 후예요, 하빈은 순임금이 질그릇 굽던 곳’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평소 필자가 묘골 육신사 해설의 주요 키워드 중 하나로 설정한 ‘하빈 = 순임금 = 묘골 박씨’라는 등식과 정확히 일치한다. 따라서 ‘하빈 = 순임금 = 묘골 박씨’라는 설정은 지금으로부터 400년 전 이호민에 의해 먼저 설정되었던 것이다. 평소 이 설정의 원조(?)라고 자칭했던 필자였다. 하지만 이 시를 알고부터는 원조 자리를 내놓았다. 솔직히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좋다. 400년 세월을 뛰어넘어 옛 선인과 교감을 나눌 수 있었다는 게 어디 보통 일인가!
‘그래, 오봉 선생은 이 시로써 명나라 사신들에게 특별한 메시지를 전달했던 게야. 당신들이 3일간 머문 이곳이 순임금이 질그릇을 굽던 하빈이요, 충신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묘골이란 점을 간과하지 말라고 말이야. 한마디로 한 방 날린 게지.’
------------------------------------------------------------------------------
이호민은 문장에 뛰어났다. 특히 임진왜란 때에는 왕명으로 각종 글을 작성하였는데 그가 지은 교서(敎書)는 내용이 간절하고 표현이 아름다워 보는 이의 감동을 자아냈다고 한다. 그러나 교서 등의 글보다는 한시에 뛰어나다는 평을 들었다. 의주에 있을 때에 일본의 수중에 있던 서울을 삼도의 군사가 연합해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지은 시 「용만행재하삼도병진공한성(龍灣行在下三道兵進攻漢城)」은 절창으로 널리 애송됐다. 저서로는 오봉집(五峰集) 16권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중에서
--------------------------------------------------------------------------------
오봉집 권3. 붉은 표시 안에 묘골과 관련된 내용과 함께 오봉 이호민의 시가 보인다.
첫댓글 묘골에 꼭 가봐야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