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자료는 아래 한글 프로그램으로 작업한 원고입니다.
출판된 책과는 편집, 사진, 삽화, 각주 등에 차이가 있습니다. 참고하십시오^^
유화당에서 열린 국화축제, ‘범국회’ (2)
‘유화당기’에 나타난 유화당 범국회
유화당 창건 내력에 대한 기록인 ‘유화당기’에 대해서는 앞에서 소개한 바가 있다. 이 글은 유화당을 처음 건립한 화암 이해준이 지은 것으로 현재 현판으로 제작돼 유화당 대청에 걸려 있다. 그런데 이 글에는 눈에 띄는 특징이 하나 있다. 글의 시작에서 글 마지막까지 일관되게 ‘국화’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지금으로부터 약 350년 전 국동 입향조 이성량이 국동 거처에 처음 국화밭을 조성했으며, 이후 7대 200년 세월을 내려오면서 그의 후손들도 하나같이 집에 국화밭을 가꿨다는 것.
이성량의 7세손 이해준 역시 유화당을 건립하면서 유화당 뜰에 국화밭을 조성했다. 그리고 그는 집 이름을 ‘국화 가득한 집’이란 뜻에서 ‘유화당’이라 이름 했다. 또 그가 지은 ‘유화당기’에는 조상 대대로 이어져온 국화사랑의 전통을 자신 당대에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 시킨 역사적 사실이 잘 나타나 있다. 바로 ‘유화당 범국회’에 대한 내용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우리말로 번역한 ‘유화당기’ 전문을 게재하면 다음과 같다. 참고로 옛 글은 옛 문투로 읽어야 제 맛이 난다. 하지만 옛 문투로 하면 요즘 사람들이 읽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문장은 적절하게 현대문으로 고쳤고 단어 중 일부는 옛 글 맛을 살리기 위해 그대로 두고 짧은 설명을 달았다.
유화당기
옛날 우리 간재 선조께서는 팔거 노전[태전동]으로부터 팔거현[칠곡의 옛 지명] 동쪽 국동으로 옮겨 우거하셨다. 선조께서는 터를 잡은 즉시 거처하는 집에 국화를 심고 즐기셨다. 4대를 지나 매국공 또한 국화로써 헌명[집 이름]을 삼았으니 국화는 우리 집과 더불어 서로 함께 한 것이 이미 오래 되었다. 이로부터 또 3대를 지나 불초에 이르렀다. 타고난 자질이 둔하여 선조로부터 이어온 국화의 발자취를 능히 이을 수는 없었으나, 국화를 사랑하는 마음만은 있어 스스로 그만둘 수가 없었다. 조상을 모신 곳에 당우[재실]가 없음은 불가하니 비로소 마을 뒤 가까운 숲에 좋은 땅을 잡아 집을 지었다. 그러나 재물이 적고 재주가 서툴러 그 짓기를 화려하고 크게 할 수는 없었다. 집 모습은 위에 용마루를 얹고 아래에 서까래를 대고 띠를 덮었으며, 좌우 양쪽에 두 개의 방과 가운데 마루를 두었다. 종족의 제사나 빈우[손님과 친구]와의 초하루 모임을 가지되 겨우 서로 무릎을 펼 수 있을 정도다. 또 약간의 밭을 만들어 옛 국화 떨기를 옮겨 심고 매일 가꿨다. 아침에는 이슬이 빛나고 저녁에는 꽃이 아름다웠다. 집이 이러하니 이로써 국화로 좋은 술을 빚어 국화주에 꽃잎을 띄우는 범국회를 결성하고 고하여 말하기를
이 집에 국화가 있음이여
그 담박한 모습과 황국의 빛남은 옛 선인들이 사랑함이라
떨기가 오래가고 향기 또한 오래감이여
세상에 나감을 다투지 않는 의로운 뜻을 알겠도다
도리[복숭아와 자두]의 향기 다툼을 즐기고 늦은 가을 국화 향기를 즐김이여
국화와 더불어 근면하고 검소하리라
훗날 복록과 종족이 날로 번창하여 사라지지 않을지니
어찌 백세가 지난다한들 집 지은 선조의 뜻을 잊겠는가
국화를 키워 모든 아름다움을 얻었으니 서로 이 집을 이름나게 함이여
국화를 마시고 즐기며 독서 하는 집이로다
모름지기 힘써 노력해 향기로움을 이루고 국화로써 집을 빛냄이여
국화로서 집이 더욱 빛나 유화有華로니 유화有華와 더불어 무궁하리라
나 또한 유화有華로써 내 집 이름을 삼노라
1864년 갑자년 중양월 하순 7대손 해준 삼가 씀
156년 만에 재현한 유화당 범국회
지난 2020년 11월 6일 오후 2시. 도남동 도남재에서 뜻깊은 행사가 있었다. 156년 만에 ‘유화당 범국회’가 다시 열린 것이다. 2017년부터 꾸준하게 유화당에 대한 관심을 이어온 ‘팔거역사문화연구회’가 주최·주관한 행사였다. 당시 팔거역사문화연구회 배석운 회장은 유화당을 알리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유화당 범국회 역시 유화당을 알리기 위한 과정의 하나로 그의 작품이었다. 범국회 개최일을 불과 며칠 앞두고 그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송 선생! 유화당 범국회 우리가 합시다. 송 선생이 기획 한 번 해보시오.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다 처리해주겠소.”
이 전화 한 통화로 시작된 것이 2020년 유화당 범국회였다. 그런데 막상 시작하려고 하니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준비 시간이 촉박한 건 그냥 아양으로 봐 줄 수 있었다. 제일 큰 문제는 장소였다. 당시 유화당 여건상 유화당으로 손님을 초대해 범국회를 개최하는 것은 힘들었다. 결국 장소를 옮기기로 했다. 유화당 윗마을에 있는 정선전씨 재실 도남재를 사용하기로 한 것. 도남재 역시 옛 건물인 탓에 험하기는 마찬가지였으나 그런대로 범국회라는 컨셉과는 어느 정도 맞아떨어졌다. 또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때마침 이날 도남재에서는 북구문화재단에서 주관하는 ‘찾아가는 열린 음악회’가 계획되어 있었다. 주최 측 간 협의를 통해 범국회를 먼저 하고 뒤이어 음악회를 하는 것으로 조율이 됐다.
다음 문제는 국화였다. 범국회를 개최한다면서 행사장에 국화가 없어서야 되겠는가. 이 사정을 전해들은 당시 국우동 동장[조귀애]이 국화 화분을 지원해 주었다. 그런데 이렇게 준비하고 나니 또 문제가 있었다. 장소도 유화당이 아닌데다 국화 또한 유화당 국화가 아니었다. 유화당 범국회에 유화당 국화가 없어서는 안 되겠기에 유화당에 있던 국화 화분 하나를 도남재로 옮겨왔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유화당 황국 화분을 옮겨오기 전까지는 잘 가꾼 원예용 국화가 더 없이 예뻤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원예용 국화 화분 옆에 거칠게 자란 유화당 국화를 놓으니 원예용 국화의 빛이 그만 바래진 것이다. 이날 자리에 참석한 이들도 하나 같이 아무렇게나 자란 유화당 국화가 모양도 그렇고 빛깔도 원예용 국화보다 훨씬 더 예쁘다고 입을 모았다.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이날 국화 외에도 유화당에서 빌려온 것이 있었다. 유화당 편액과 유화당 범국회에 대한 기록이 새겨진 ‘유화당기’, 국화의 미덕을 논설한 ‘애국설’ 현판 등도 떼어와 도남재 툇마루에 기대어 놓았다. 이렇게 해놓고 보니 비록 장소는 유화당이 아니지만 그나마 유화당 범국회라는 상징성은 살릴 수 있어 다행이었다.
다음 문제는 범국회를 어떤 방식으로 진행할 것인가라는 문제였다. 여러 지인들에게 자문을 구했지만 마땅한 답을 얻지 못했다. 과거 범국회를 어떤 방식으로 진행했는지에 대해 아는 이들이 없었다. 결국 결단을 내렸다. 과거 고을에서 고을 원로들에게 술을 대접하던 예인 ‘향음주례’에서 힌트를 얻었다. 당시 필자가 정리한 유화당 범국회 시나리오는 대략 이러했다.
유화당 주인이 중양절 범국회를 앞두고 국화주와 국화차를 준비하고, 고을사람 9명을 범국회에 초청한다. 9명 중 3명은 큰 손님[3빈], 나머지 6명은 유화당 주인의 친구[중빈]다. 범국회 당일 주인은 유화당 대문 밖에서부터 손님을 맞는다. 손님을 모시고 대문 정효각 안으로 들어가 자리가 준비된 유화당 대청에 오른다. 이때 향음주례 예법대로 주인과 손님은 상대에게 서로 먼저 들어가고 올라가시라 세 번에 걸쳐 사양하는 예를 보인다. 주인과 손님이 모두 대청에 오르고 나면 서로 상읍례[읍으로써 인사하는 예법]를 한다. 상읍례를 마치면 먼저 국화차를 마시면서 주변의 유화당 황국을 감상하며 잠시 담소를 나눈다. 이어 잘 익은 국화주에 국화를 띄운 국화주가 나오고 주인과 손님은 서로 수작을 한다. 이때 주인은 미리 준비한 사람을 시켜 유화당에 걸린 ‘애국설’, ‘유화당기’와 유화당에서 나온 내방가사를 읽게 한다.
이날 범국회는 시작에서 끝까지 한 시간 정도 시간이 소요됐다. 주인과 손님은 모두 유건과 도포를 갖췄고, 국화차와 국화주를 준비하는 다도팀도 소품 하나하나 세심하게 챙겼다. 준비한 국화차와 국화주에 사용된 국화는 모두 유화당 황국이 사용됐다.
156년 만에 ‘팔거역사문화연구회’에 의해 재현된 유화당 범국회. 이날 필자는 행사를 다 마치고 마지막으로 한 일이 있었다. ‘유화당’·‘애국설’·‘유화당기’ 현판을 다시 유화당에 원상복구 시키는 일이었다. 현판을 원상복구 시키는 일은 현 팔거역사문화연구회 도성탁 회장과 같이 했다. 현판 하나하나를 다시 원위치에 걸 때마다 뿌듯함과 함께 마음 한구석엔 미안함과 안타까움이 교차했다. 너무나 죄송하고 또 미안했다.
2020년에 이어 2021년에도 유화당 범국회가 열렸다. 지난 10월 27일, 유화당 앞쪽에 있는 유화당 작은 집인 ‘지천댁’ 정원에서 열렸다. 이번에는 ‘북구문화원’에서 진행했는데 유화당 탐방을 겸한 약식으로 진행했다. 그래도 가을국화를 곁에 두고 국화차를 즐기고, 유화당에서 나온 내방가사를 읽고, 어린이 판소리 공연도 보고, 경전암송도 하고, 종부님과 대화를 나누는 등 할 건 다 했다.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지면을 빌려 이번 범국회 행사를 마련해 준 ‘대구북구문화원’에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에필로그
지금도 유화당에는 뜰 화단과 담장 아래에 약간의 국화가 있어 가을이면 국화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국동 문중 종부님 증언에 의하면 예전에는 남호정사와 유화당에 모두 국화가 있었다고 한다. 남호정사는 사랑채 동편과 서편에 소나무, 목단, 앵두나무 등과 함께 국화밭이 있었으며, 유화당에는 지금처럼 화단과 담장에 국화가 있었다. 이들 국화 모두 조선국화로 불리는 황국이었다. 지금도 유화당 국화는 모두 황국이다. 자기들끼리만 있을 때는 아름다움을 드러내지 않다가, 곁에 다른 국화가 놓이면 빛을 발하는 신기한 황국이다.
------------------------------------------------------
인천이씨 쌍명재공파 국동 입향조 이성량[1624-1720].
인천이씨 26세 매국헌 이희성. 동생인 이희효와 함께 쌍효자로 이름나 정효각에 정표되었다.
不肖 : 어버이의 덕망이나 유업을 이어받지 못함. 또는 그런 못나고 어리석은 사람. 자신을 낮추는 표현.
도남 1동 진걸에 있는 정선전씨 문중 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