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주인이신 주님을 기억하는 시간 전례
지난 4월 29일(토)~30일(일) 1박2일 일정으로 충북 제천의 베론성지 안에 있는 도미니코 관상수녀원으로 전례회 자매 8명이 피정을 다녀왔다.
세상에 잘 드러나지 않는 고즈넉하게 자리한 수녀원 마당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우리를 감싸는 차분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봉쇄수녀원이기에 대면하지 못하고 인터폰 너머로 수녀님께서 우리의 숙소를 안내해 주셨다. 안내에 따라 철통을 돌려 열쇠와 시트 등을 건네받고 방으로 들어왔다. 세상 것과는 철저하게 봉쇄하고 오로지 하느님만을 관상하며 기도하고 노동하시는 수녀님의 생활을 각자의 생각으로 상상하며 방으로 들어왔을 때 우리는 적잖이 놀라고 감동했다. 방 곳곳의 낡고 오래된 가구 사이로 정갈하게 정리해 놓으신 이불과 순례자들의 따뜻한 하루를 위해 준비한 전기요, 손수 만드신 쨈과 빵 그리고 달걀, 혹시나 해서 알뜰하게 준비해 주신 과자 등, 철통같은 봉쇄 너머로 순례자를 위한 수녀님의 정성이 우리 마음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구시경(오후 3시15분)
오후 3시 15분부터 수녀님의 구시경 기도에 참례하기 위해 우리는 짐을 빠르게 풀고 성당으로 향했다. 세월처럼 낡고 원색의 장식 하나 걸려있지 않은 가난한 외형이지만 정갈하고 깨끗하게 정리된 성당에 들어서자니 마음부터 울컥해졌다. 창살을 사이에 두고 때로는 라틴어로 때로는 우리말 성가로 수녀님들의 기도 소리는 우리들의 마음을 하느님을 느끼기에 알맞게 다듬고 있었다. ‘주님, 제게 겸손한 마음을 주소서!’
저녁 성무일도(오후 5시)
던져 놓듯 방에 내려놓은 짐을 정리할 시간도 없이 이내 오후 5시부터 시작하는 수녀님 저녁 성무일도를 따라갔다. 무엇이라 형언할 수 없는 감정들이 나를 다스리고 있음을 느꼈다. 온종일 따라다니던 생각도, 외면하려던 의지도 이미 나의 것은 아니었다. 순례자들을 반기는 마음에서였을까? 창살 너머 수녀님들은 얼굴을 가리던 수건을 벗은 채 우리를 향해 주셨다. 마음이 따뜻하고 편해졌다. 알아 듣지 못하는 기도의 구절구절에 어느 소리는 높고 어느 소리는 컸지만 굳이 맞추어 하나로 만들려 하지 않았다. ‘누구의 소리는 어떠하다’라며 본당에서 봉사하던 우리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저녁 식사
캠핑 간 아이들처럼 저녁 식사 시간이 되니 우리들의 마음도 들떴다. 십시일반(十匙一飯)으로 조금씩 준비한 음식에 수녀님들이 마련해주신 것까지 음식이 차고 넘쳤다. 누군가의 “우리 한달 동안 여기서 살아도 되겠다.”라는 말이 딱 알맞았다. 출발하기 전에 준비하면서 다른 분들의 시간을 위해 나 혼자 좀 고생하자는 마음이었는데, 모두 서로를 위해 그런 마음으로 준비해 왔나 보다. 카레라이스와 흔한 반찬 위에 행복으로 양념한 말들이 저녁 식탁을 가득 채웠다. 누군가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한 최후의 만찬을 떠올렸고, 누군가는 천국의 행복을 떠올리며 우리의 저녁 식사는 무르익었다. 오기 전에는 침묵을 지내자고 했는데, 행복에 겨워 나오는 달콤한 말들을 막을 재간이 없었다.
끝기도(저녁 8시)
저녁 8시 끝기도 시간에 맞추어 성당으로 갔다. 수녀님 두 분을 가운데 세우고 좌우로 서서 하는 수녀님들의 기도를 보고 들으며 삶의 마지막이 떠올랐다. 하루를 마무리하며 세상에서의 삶을 마무리하는 고별식을 치르는 것 같았다. 돌이켜보니 나의 시간도 아쉬울 것도 후회할 일도 없는 삶이었다. 어느 부분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있었던 자리의 흔적도 그리고 회한(悔恨)도 살아갈 자들의 몫인가 보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기도에서 수녀님들의 지향 기도가 있었다. 지금 떠나도 좋을 홀가분한 마음인데 왠지 눈물이 났다. 어느 대목에서인가 ‘두촌 성당 전례회 회원들과 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한다’는 소리에 ‘존재에 대해 무덤덤함이 그의 자유로움을 위한 배려’라는 참사랑의 깊이로 느껴져서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한 시간 넘게 수녀님들의 기도가 끝나고 이어서 우리들만 남은 성당에서 두촌 공동체를 위하여 묵주기도를 하려니, 창살 너머로 수녀님 한 분이 나를 불렀다. 이제 성당 문을 잠가야 한다고.
묵주기도
가난하지만 오순도순 정갈한 숙소의 부엌에 둘러앉아서 묵주기도를 했다. 아랫마을에서는 가끔 불편하고 누군가를 향해 마음에 맺히던 일들이 오늘 이곳에서는 맺힘 없이 너를 향한 따뜻함으로 계속 흐르고 있음을 느꼈다. 들뜨지 않고 소박하게 편안한 그런 사랑이 우리 공동체를 향해서도 흐르기를 기도했다. 내일 아침 오전 7시 미사 전에 6시부터 있을 삼시경을 생각하며 잠들었다.
아침 기도(오전 6시)
오전 6시 삼시경 기도에 맞춰 성당으로 갔다. 모든 기도에 참례하는 것이 어려울 수 있으니 자유롭게 하자고 제안했지만 어느 한 명도 기도에 빠지는 사람은 없었다. 출발 전에 우리 사이 침묵을 약속했고, 기도 참례는 자유라고 선언했지만, 침묵은 행복의 언어로 대체되고, 기도는 꼭 참례하는 무언의 약속으로 되어있었다.
주일 미사(오전 7시)와 삼시경(오전 9시)
미사 시간에는 아랫마을의 사람들도 여러 명 참례했다. 라틴어 성가와 우리말 성가를 함께 하는 미사에서 어느 수녀님이 여느 기도 때보다 큰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유년 시절 우리 집으로 많은 손님이 왔을 때 왠지 설레고 들떴던 마음이 떠올라서 미소가 지어졌다.
육시경(낮 12시)
미사 후 정오에 하는 육시경까지는 여유 시간이 있었다. 아침 식사를 간단하게 하고 둘러 앉아 우리가 느낀 사랑이 우리 공동체에서도 흐를 수 있기를 묵주기도를 바쳤다. 본당에서 미사 전에 항상 묵주기도를 바쳤건만 이렇게 애틋한 마음으로 바치는 건 처음처럼 여겨졌다. 1박 2일을 마무리하는 소회를 나누었다. 시간 전례의 의미에 대해서 말했고, 좁은 공간에서 맞대고 지낸 즐거움을, 선행은 타인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하느님께 올리는 기도라는 깨달음을, 속마음을 숨기고 살아온 자신에 대한 자각을, 스며드는 관계의 편안함에 대해 말하며 우리의 여정을 마무리 했다.
사랑이 흐르는 두촌 공동체를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