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외국인 근로자에게 집단적으로 발생한 노말헥산에 의한 하반신 마비(말초신경염에 의한 하지 약화로 잘 걷지 못하거나 심하면 스스로 일어설 수 없는 병을 말함)가 최고의 관심거리로 등장하였다.
사건은 전자제품의 부품을 만드는 사업장에 취업해 있던 불법이주 외국인근로자에게서 노말헥산에 의해 집단적으로 말초신경염이 발생하여 하반신이 마비되어 제대로 걷지 못하는 직업병이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노말헥산중독은 1960년대 일본에서 처음 보고된 이후 전세계에서 꾸준히 발생해 왔고, 우리나라에서 간헐적으로 발생해 왔다. 이 사건은 두 가지 측면에서 우리에게 충격을 주었는데, 하나는 재래형의 직업병이 집단적으로 발생하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외국인 근로자에게서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최근 국내 사업장에서 노말헥산중독으로 하반신마비를 일으킨 태국 외국인근로자들. |
건강장해를 일으키는 화학물질
화학물질하면 어렵고 복잡하게 보이지만 특성에 따라 몇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탄소 여섯 개가 단순히 일렬로 결합되어 있는 지방족 탄화수소, 즉 메탄, 프로판, 부탄과 같이 질식을 일으킬 수 있으나 신경계에 직접적인 손상을 주지는 않는다. 반면에 탄소 여섯 개가 고리모양으로 결합된 벤젠고리를 가진 방향족 탄화수소, 즉 벤젠, 톨루엔, 스티렌 등이나 염소 등이 붙어 있는 염화탄화수소류, 즉 사염화탄소, 클로로포름, 트리클로로에틸렌 등은 신경계에 손상을 주어 유기용제 중독을 일으킬 수 있다. 대부분의 유기용제 중독은 벤젠과 같은 방향족 탄화수소나 염화탄화수소류에 의해 발생하고 있다.
지방족 탄화수소는 유기용제 중독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산업보건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하였다. 그런데 1960년대 초 일본에서 노말헥산이 포함된 접착제를 사용하던 근로자에게서 집단적으로 말초신경염이 발생하였다. 위에서 설명한 지방족 탄화수소의 특성 때문에 구미 각국에서는 처음에는 노말헥산이 말초신경염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역학조사와 동물실험에 의해 지방족 탄화수소인 노말헥산이 말초신경염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고 이제는 누구나 아는 상식이 되었다.
노말헥산의 물리화학적 성질
노말헥산은 천연가스나 원유에 함유되어 있는 물질로 주로 접착제나 세척제로 많이 사용한다. 기타 도료, 약품, 화장품 등의 용제, 식용유 추출, 광물의 굴절률 측정, 온도계 내부물질, 알코올의 변성제로도 사용한다. 공업용 헥산에는 노말헥산이 20∼80% 함유되어 있고 이와 비슷한 다른 화학물이 포함되어 있다.
노말헥산은 무색의 액체로 투명용기에 넣으면 물처럼 보인다. 노말헥산의 냄새 역치(냄새를 느끼는 농도)는 70∼300ppm으로 노출기준 50ppm을 크게 넘는다. 즉 건강장해를 일으킬 수 있는 수준이 노출기준을 크게 초과하여도 냄새를 잘 맡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는 높은 농도에 노출되더라도 근로자들은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이번 사건에 대한 역학조사에서 필자도 보호구를 착용하지 않고 4시간 동안 재현 작업을 하였는데 75∼200ppm에 노출되었지만 작업시간 내내 냄새를 느끼거나 불쾌감 같은 자극을 전혀 느끼지 못하였다.
반면에 어떠한 화학물질은 아주 낮은 농도가 냄새가 나서 쉽게 인지할 수 있다. 역시 신경계의 손상을 주는 스티렌은 노출기준은 50ppm이지만 2ppm만 되도 독특한 냄새가 나므로 냄새가 난다는 것이 심각한 수준으로 노출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노말헥산의 다른 특성의 하나는 끓는점이 약 70℃ 로 낮고 증기압이 높아 상온에서 쉽게 증발한다. 그러므로 노말헥산을 뚜껑이 없는 통에 넣어 두면 쉽게 없어지고 헝겊에 묻혀서 닦으면 쉽게 마른다. 이번 사건에서는 근로자들이 노말헥산의 이러한 특성을 이용하여 노트북 컴퓨터의 플라스틱 기판에 묻은 때를 닦았던 것이다.
노말헥산은 매우 인화성이 강하며 열, 스파크 또는 불꽃에 의해 쉽게 발화한다. 노말헥산은 증기밀도가 커서 공기보다 무거우므로 작업장의 아래쪽에 깔린다. 지면을 따라 퍼지며 낮은 지역이나 밀폐(하수도, 지하, 탱크)된 공간으로 모인다. 하수도 유출물은 화재나 폭발위험을 야기할 수 있으며 용기가 가열되어도 폭발할 수 있다. 이 사업장에서도 노말헥산 중독이 사건화 되기 이전에 다른 물질로 바꾸었는데 그 이유는 밀폐된 공간에서 작업을 하다보니 스파크로 인한 화재가 두 차례가 났기 때문이었다.
노말헥산에 의한 건강장해
노말헥산은 호흡기로 빠르게 흡수되어 10% 정도는 호흡기로 배출되며 나머지는 지방이나 신경조직에 침투한다. 노말헥산은 피부에 자극을 주지만 피부로는 거의 흡수되지 않는다.
흡수된 노말헥산은 간에서 대사되어 다양한 대사산물이 소변으로 배설된다. 이 중 헥산디온(2,5-hexanedione) 농도는 공기 중 노말헥산 농도와 상관성이 높아 생물학적 노출지표로 사용된다. 노말헥산에 노출되지 않아도 소변 중에서 헥산디온이 검출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체내에서 지방이 과산화되는 과정에서 노말헥산이 생성되기 때문이다.
노말헥산에 의한 건강장해는 노말헥산 자체보다는 대사물질인 헥산디온에 의해 발생한다. 헥산디온은 주로 말초신경에서 영향을 주는데 감각신경과 운동신경 모두에게 영향을 준다. 신경계의 증상은 말단 부위에서 시작하여 중심 부위로 진행한다. 중추신경계에 영향은 크지 않으며 시신경에 영향을 주어 시신경염이나 색각 기능의 저하를 일으킬 수 있다.
초기에는 대개 하지의 감각 이상과 쇠약으로 시작하는데 두통, 식욕 부진, 현기증 등의 증상이 먼저 나타나거나 같이 나타난다. 손이나 발 부위의 감각장애가 해당 부위 근육의 쇠약 및 위축과 함께 발생하며, 조건반사 기능이 저하된다. 확진은 신경전도속도 검사로 확인할 수 있는데, 신경 섬유가 붓고 섬유를 싸고 있는 수초가 위축되는 소견을 보인다.
노말헥산에 의한 말초신경염은 노출이 중단된 후에 느리기는 하지만 대부분 완전히 회복될 수 있다. 그러나 회복되지 않고 장애가 남는 경우도 있다.
각국에서 발생한 노말헥산중독의 사례
노말헥산중독은 1960년대 초 일본의 비닐샌들 제조공장에서 처음 발생하였다. 하루 최고 14시간 동안 환기가 되지 않는 곳에서 노말헥산이 70% 이상 함유된 접착제를 사용하였다. 공기 중 노말헥산의 농도는 500∼2,500ppm으로 추정되었다. 1662명의 근로자에서 93명에게 말초신경염이 발견되었다.
대부분의 환자에서 증상은 서서히 진행되었다. 초기에는 하지의 감각이 없어지고, 근력이 약화되었다. 임상검사에서 감각신경의 저하 소견이 모든 근로자에서 나타났고, 절반에서 근력이 약화되었다. 근력 약화로 하지가 가늘어졌다. 노출을 중단한 후 3년이 지나서 절반 이상이 완전히 회복되었으나 10%에서는 5년이 지나도 감각신경에 이상이 남아있었다.
일본에서는 2003년도에도 휴대폰 케이스 제조공장에서 집단적으로 노말헥산에 의한 말초신경염이 발견되었다.
대만에서는 인쇄공장에서 노말헥산이 함유된 유기용제로 2개월 이상 세척작업을 한 59명 근로자 중 절반에서 말초신경염이 발생하였다. 중독사건 이후에 실시된 조사에서 공기 중 노말헥산 농도는 0∼190ppm이었으나 사건 발생 당시에는 더 높은 농도로 노출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일부 근로자에 대해 추적조사를 하였는데, 2년이 지나서 감각신경은 완전히 회복되었으나, 운동신경의 장해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중국에서는 다발성 말초신경염이 발생한 근로자 102명의 노말헥산 노출농도는 53.4∼2230ppm이었다. 폴란드에서는 노말헥산을 함유한 접착제를 사용하던 지갑공장의 근로자 37명에서 말초신경염이 발생하였다.
미국에서는 노말헥산 함량이 50∼60%인 에어로졸 캔을 사용하여 브레이크 청소를 한 미국의 자동차 수리공에서 말초신경병증이 발생하였다.
우리나라의 노말헥산중독
우리나라에서는 1974년에 신발공장 근로자 17명 중 13명에서 노말헥산에 의해 말초신경염이 발생하였다. 하지의 감각 이상, 저린 증상, 근육 무력감, 근육통, 보행 및 운동장애 소견이 나타났다. 이들은 환기시설이 전혀 없는 협소한 작업공간에서 문을 닫고 하루 15시간 이상 작업하였는데, 공기 중 노말헥산 농도는 200∼600ppm이었다.
노말헥산에 의한 말초신경염이 알려진 이후 대체물질이 사용되어 한동안 노말헥산 중독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2000년에 18년간 타이어공장에서 노말헥산이 함유된 세척제를 사용한 근로자에게서 말초신경염이 확인되었다. 작업장이 개선되고 사용 물질이 변하여서 노말헥산의 노출수준은 정확히 파악되지 못했다.
2001년에는 경기도 부천의 자동차부품 제조업에서 4개월간 세척실에 근무한 2명의 근로자에서 다발성 말초신경염이 발생하였다. 사후 조사결과 작업장의 노출 농도는 160ppm 정도로 추정되었다. 휴대폰 케이스를 만들던 작업자에게서 노말헥산에 의한 말초신경염이 발생하였다.
2002년 말에는 경기도 안산에서 전자업체 부품제조공장에서 중국인 근로자에게 집단으로 노말헥산에 의한 말초신경염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2004년 12월에 노말헥산중독이 집단으로 발생하여 2005년 1월에 알려지게 되었다.
우리나라 역학조사
최근 들어 전자제품에 사용되는 플라스틱 제품의 수요가 늘면서 세척력이 좋은 노말헥산이 다시 많이 사용되어 노말헥산중독 발생의 위험이 예견되었다. 이에 산업안전공단 산업안전보건연구원에서는 2003년에 노말헥산 사용 사업장에 대한 역학조사를 실시하였다.
1999년 작업환경실태조사에서 파악된 노말헥산 사용 사업장은 약 400여개였다. 이 중에서 밀폐공정으로 사용하거나 옥외에서 사용하는 사업장을 제외하고 97개 사업장을 선정하여 예비조사를 한 후 17개 사업장을 선정하여 본조사를 실시하였다.
이번 사건이 발생한 사업장은 당시에 옥외에서 사용하고 있었으므로 조사 대상에서 제외되었다.(이 사업장은 2004년 2월에 새로 건물을 지어 노말헥산을 실내에서 사용하게 되었는데, 밀폐된 공간이 집단적인 노말헥산중독 발생의 원인이 되었다.)
역학조사 결과 일부 사업장에서 작업환경측정 결과가 노출기준을 초과하여 작업환경 개선을 권고하였고, 말초신경계의 증상을 보이는 근로자에 대해서는 정밀진단을 실시하였으나 노말헥산에 의한 말초신경염이 발생한 근로자는 없었다.
이번 사건이 주는 교훈
이 사건은 사전에 충분히 예방이 될 수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발생하였다. 그 이유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작업환경측정결과가 실제의 작업환경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고 다른 하나는 불법이주외국인근로자에게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산업안전보건법이나 산업재해보상보험법에서는 내외국인에 차별을 두지 않고 있다. 외국인도 합법과 불법에 차이를 두지 않고 있다. 그러나 산재보상의 경우에는 불법이주 외국인 근로자에 대해서는 산재인정이 되는 경우에는 법무부 출입국관리소에 신고를 하게 되어 있고 요양과 보상 후에는 강제출국을 시키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불법이주 외국인 근로자들은 산재가 발생하여도 요양신청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질병이 의심스러워도 조기에 진단을 받지 못해 이번 사건처럼 질병이 심각하게 발전된 후에야 발견된다. 이것은 노동부 차원에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여기에서는 논외로 한다.
작업환경측정 결과가 실제와는 다를 수 있다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법적인 작업환경측정 결과는 실제 노출 정도의 1/2∼1/4 수준으로 나타나서 사전 예방조치가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작업환경측정 결과가 실제 노출수준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사업주가 작업환경측정을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법에 의해 마지못해 외부 서비스기관을 이용해서 실시하는 규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일부 사업주는 작업환경측정을 하는 날에는 작업량을 조절하여 노출농도를 낮게 나오도록 하거나 심지어는 지정측정기관에 압력을 넣어 낮은 결과를 내도록 유도하기도 한다.
작업환경측정 결과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사전 예방조치는 이루어질 수 없다. 따라서 사업주가 스스로 자신의 작업장내의 유해요인을 파악하고 정확한 작업환경측정 결과를 얻어 개선에 활용하겠다는 의지가 없으면 이번 사건과 같은 일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