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m essay | 황선유
세월
그런데 당신, 점심은 드셨어요?
함께 점심 먹기로 한 약속이 취소되었습니다. 비도 오는 데 이담에 보자. 이미 눈치야 챘겠지만 이런 게 바로 나이 든 거죠. 예전 같으면 분명 둘 다 이랬을 텐데요. 비도 오는 데 우리 만날래?
비는 억수로 내립니다. 창 유리를 무모하게 부딪고 야멸치게 미끄러져 흐릅니다. 저런 제 운명을 전들 어쩌겠는지요. 삼라만상 운명을 거스른다는 게 어디 그리 쉬운가요. 그래도 뿌연 창밖으로 저 아래 동천이 방방하니 불어 보기가 좋습니다. 나는 더운 커피잔을 들고 가만 의자에 앉아서 동천의 흐름양을 보며 비 온 정도를 가늠하고 있어요. 유리 벽 하나 사이로 두 세상이 이렇게 다릅니다. 어디 사람이라고 맨 다를까요. 언제나 창밖 풍경인 그런 관계도 있지 않을까요. 물리적인 거리가 무색한 그런….
우산 쓴 사람들이 건널목을 건너는군요. 이제는 녹색 신호등이 아니라도 도시의 차들이 무척 예의 발라요. 걷는 사람들을 우선 배려하죠. 배려라는 말에는 온기가 있어요. 온기 있는 말은 온기 있는 사람들의 한몫입니다. 그때 젊은 엄마에게는 온기가 없었습니다. 어설픈 이성으로 냉철했죠. 초등학교 입학하는 봄날의 아이에게 모질었습니다. 비가 와도 마중 나가지 않을 거야.
딱 그날만은 내 수업도 일찍 끝나고 마침 비도 오고 그래서 학교 파하는 시간에 교문 앞 엄마들 틈에 끼여 내 아이를 기다렸습니다. 저쯤 운동장을 가로질러 한 떼의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잰걸음으로 다가왔죠. 친구의 우산 밑에 머리만 들이밀고 작은 몸을 비에 내맡긴 아이 하나가 눈 안으로 걸어와요. 왜 제 아이는 멀리서도 퍼뜩 알아보잖아요. 나는 아이를 부르며 달렸죠. 나를 본 아이가 나보다 더 빨리 달려와 부딪듯 안겨서 서럽게 서럽게 울었습니다. 우산이 안 펴져서 선생님께 보였더니 부서졌다고 쓰레기통에 버리더라네요. 일 학년 아이의 당혹감이 여덟 살의 난처함이 줄번호 삼 번의 부끄러움이 한데 뒤엉켜 내 안쪽을 마구 짓이겼습니다. 그런데 오늘처럼 비가 내리면 그날의 짓이김이 도지고 말아요. 당신, 사람들은 당신을 일러 약이라고들 말하는데 이런 나를 손 놓고 가만있는가요?
이 비 그치면 뒤이어 봄날은 오고 말겠죠. 나는 또 BTS의 <봄날>을 듣습니다. -보고 싶다. 이렇게 말하니까 더 보고 싶다. 그리움들이 얼마나 눈처럼 내려야 그 봄날이 올까. 보고 싶다 보고 싶다.- 이런 노래를 듣고도 어찌 BTS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지요. 또래를 죄다 트로트 가수에 빼앗기고 홀로이 저녁 어스름 동천길을 걸으며 이어폰으로 역시 BTS의 <소우주>라도 들을라치면 무단히 외로워 얄궂습니다. -이 밤의 표정이 이토록 또 아름다운 건 저 별들도 불빛도 아닌 우리 때문일 거야. 난 너를 보며 꿈을 꿔. 난 너를 보며 숨을 쉬어. 우린 우리대로 빛나. 우리 그 자체로 빛나.- 저러도록 빠른 노래가 이러도록 쓸쓸하게 들리는 현상은 다 무엇일까요.
흠, 사람이 우주의 부분이면서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우주라고 하는군요. 아, 인간은 자신이 영혼을 불어넣은 축소판 우주라고 하는군요. 이즈음에 친하다고 여겼던 사람에게 섭섭한 일을 겪고 그게 수시로 생각나서 애를 먹어요. 다른 사람에게 그 말을 하고는 괜히 했다는 후회로 이전보다 더 힘들어져서 끙끙 앓고 있답니다. 바로 이런 때에 <소우주> 노랫말은 영 뜬금없다고만 할 수 없는 무한의 위로가 되어요.
우연인지 필연인지 BTS의 <봄날>이 당신과 이름이 같은 세월호의 추모곡으로 불리는군요. 세월호…, 여직 조끔도 바래지 않은 샛노랗게 아프고 그리운 이름입니다. 봄날이 되면 더욱 보고 싶어 사무치겠죠. 차가운 바닷물 생때같은 아이들은 그 어머니에게 시공간을 초월한 총체적 존재 바로 소우주이니까요. 나는 부끄러움으로 고개를 숙입니다. 당최 기약 없을 노란 깃발 앞에서 그깟 비 내리는 날의 짓이김을 투정하고 있었다니요.
봄날은 여만치 와있습니다. 당신의 나이테에는 무량한 봄날이 쟁이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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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유
2011년 《수필과비평》으로 등단하였으며 황의순문학상, 부산수필가문학상을 수상했다. 수필집으로 『전잎을 다듬다』, 『은은한 것들의 습작』, 『몌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