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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선집 49권 1편
주관성 복귀 (훈독본) 9300
1971.10.03 (일), 한국 전본부교회 말씀선집 49권 1편
기 도
말 씀
땅 위에 살고 있는 수많은 인류는 물론이고, 그 가운데 하나인 우리 자신도 현재의 자리에서 희망을 가지고 그 무엇인가 보다 높은 것을 더듬어 나가고 있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더 높고 더 좋은 것을 추구하는 인간
남녀노유를 막론하고, 역사과정을 놓고 보나 시대적 현실을 두고 보나 미래를 두고 보더라도, 높고 낮음의 계층을 초월하여 사람이면 누구든지 더 높은 것을 바라 나왔습니다. `나'라는 개체를 중심삼고 최후의 기준, 절대적 기준까지 연결시키고 싶은 것이 우리 마음이 요구하는 길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본성의 세계에 지고지대 (至高至大)하신 어떠한 분이 계신다고 하면, 역시 자기가 그분과도 관계를 맺고 싶어할 것은 두말할 바 없는 것입니다.
통일원리가 제시하는 소망의 기준
이제부터 우리가 가야 할 노정, 우리 원리가 지시하는 노정은 개인복귀, 가정복귀, 종족복귀, 민족복귀, 국가복귀, 세계복귀, 천주복귀노정까지 있습니다. 천주복귀만 하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중심삼고 절대자 앞에 상대적 절대권을 갖추어 가지고 통일성을 기할 수 있는 자리까지 우리는 바라보고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주의 중심은 인간
오늘날 세계의 모든 존재물을 보면 반드시 원형(圓形)을 닮아 있습니다. 지구도 그러하지만 우주도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도는 작용의 인연을 갖고 움직이는 세계이니만큼 자동적으로 원형을 갖추어야 된다는 것은 필연적인 사실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도 역시 하나님의 자리에 계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돌아야 됩니다. 돌기 위해서는 반드시 출발과 목적점을 이을 수 있는 과정적인 존재가 있어야 합니다. 그 존재는 바로 사람인 것입니다.
따라서 하늘이 기원되어 있는 모든 것은 내 마음을 통하고, 외적인 세계가 기원되어 있는 모든 존재들은 내 몸을 통해야 합니다.
현재의 인간에게 있어 중요한 문제
어떤 동기를 갖고 과정을 거쳐 목적을 찾아 나가는 천운이 있다면, 그 천운은 반드시 그 동기와 목적을 접근시키고 단축시킬 수 있는 어떤 매개체를 통해야만 됩니다. 그런 매개의 자리를 확정짓는 사명을 해야 할 우리 인간인데도 불구하고, 그 무엇을 확정짓지 못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라면 천운은 그를 통해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아무리 희망을 걸더라도 희망의 한때를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알아야 할 것은 인간은 본래의 중심의 자리에 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 자체가 스스로 본래 어떠한 중심적인 자리를 결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출발의 기원도 되지 못하고 목적의 결과도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정적인 내연을 통하여 연결시켜 주는 그 자리를 어떻게 자각하느냐 하는 문제가 인간에게 있어서 보다 큰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가 현재 처해 있는 자리는 어떤 자리이냐? 이 자리는 기원도 아니요, 결과도 아닌 중간 매개체의 자리입니다. 중간 매개체는 동기와 더불어 일치하고, 결과와 더불어 일치할 수 있는 그런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그 자체의 위치를 결정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가치의 내용을 분석할 수 없는 거예요.
본성의 세계 회복과 개인의 가치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있다면 오늘날 이러한 인생의 길을 해결짓기 위해서, 우리 인간들을 동기의 자리라든가 목적의 자리로 끌고 가는 일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까지 종교를 통해서 섭리해 나오셨는데, 종교를 통해서 마음과 더불은 생활을 강조해 나오셨던 것입니다.
재림주님을 통해 완성의 표준을 찾을 수 있다
기독교는 지금까지 역사노정에서 숱한 희생을 치러 왔고, 순교한 선열들의 피의 대가로 그 제단을 이어왔는데, 기독교가 지금까지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주도적인 원동력이 어디에 있었느냐? 믿고 천당 가는 데 있었습니다. 또, 주님이 오실 그날을 맞기 위해 노력한다는 양면적 소망을 가지고 기독교는 지금까지 나왔습니다. 천국이라는 것은 본성의 세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끝날에 주님을 맞이해야 한다는 것은 주님을 만나 가지고 천국 가자는 것입니다.
하나의 남성을 표준해 가지고 그것을 교리화시켜서 그것을 중심핵으로 사모해 나온 대표적인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신부의 종교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교가 바라고 있는 오시는 주님은 어떠한 분이냐? 그분을 찾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개인적으로 완성할 수 있는 하나의 표준을 갖출 수 있는 것이요, 가정적인 표준을 찾을 수 있는 것이요, 또한 종족의 표준, 민족의 표준, 국가의 표준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재림사상
재림사상은 무엇이냐? 본성의 인간을 추구하고자 하는 소원을 이루는 데 불가피한 것입니다. 타락이 없었다면 인간은 본래 본성의 인간으로 출발했을 것인데, 타락이 있었기 때문에, 본성의 기준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다시 그것을 추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복귀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역사과정에서 수많은 희생을 치러 나왔지만, 그 섭리역사노정에서 한 사람만 잘나면, 한 사람만 승리하는 날에는 그 한 사람의 승리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자고로 수고하였던 모든 수고의 가치는 전부 다 드러나는 것입니다. 수고를 했으면 했을수록 그 가치가 감소되는 것이 아니라,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전체의 가치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수고를 했으면 했을수록 그 가치가 더 빛나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하나님은 지금까지 한 아들을 찾아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여기에서 `주관성 복귀'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주관성 복귀! 그러면 그 한 사람이 무엇 때문에 오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창조주로서 인간을 지었던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러한 한 사람을 기필코 이 땅위에 탄생시켜야 되는 것입니다. 탄생시켜서 그 사람을 다리로 해서, 그 사람을 기점으로 해서 사방으로 관계맺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절대적 신념을 가진 신부를 찾아오시는 재림주
그러면 그 아들이 오는 데는 무엇 때문에 오느냐? 상대를 찾아오는 것입니다. 신부를 찾아오는 거예요. 상대적 기준을 중심삼고 주체와 절대적으로 하나될 수 있는 입장에 선 신부를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절대적인 신부는 어디에서 찾아지느냐? 절대적인 희망과 절대적인 욕망과 절대적인 행복과 절대적인 요구를 중심삼고 찾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반대적 기준을 통해서 찾아지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 서기 위해 비참한 자리에 들어가 가지고 희생하는 자리에서 찾아지는 거예요.
절대적으로 믿었다는 기준이 성립되는 자리
그러면 영원토록 절대적으로 믿는다는 믿음의 내용은 무엇을 중심삼고 결정짓느냐? 죽고 사는 자리에서 결정짓는 것입니다. `그대로 가게 되면 죽는 것이요, 그대로 가지 않으면 사는 것이다. 살기 위해 가는 길은 배반하는 길이요, 죽기 위해 가는 길은 찾아가는 길이다'하는 이러한 자리에서 그 도수를 결정지어 나간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세계를 구해야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냐? 세계를 구하는 것입니다.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 주님도 오시는 것입니다. 세계를 위해서 가정도 필요한 것이요, 세계를 위해서 교회도 필요한 것입니다. 나라가 먼저가 아니예요. 세계를 위해서 여러분을 맨 구렁텅이로 쓸어넣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빼놓고는 절대적 통일이 있을 수 없어
여러분, 절대적이어야 돼요. 그러면 신랑과 신부, 신부와 아버지 사이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할 수 있는 기준이 무엇이냐? 오늘날 타락한 인간 자체로서 소망과 욕망을 품고 다짐하는 그런 내용을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것을 청산지어야 돼요. 타락인간은 누구나가 공식적으로 수난길을 가지 않고서는 복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경지에서는 모든 것이 통한다는 것입니다. 법을 넘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법을 넘어갈 수 있다는 말은 사망선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절대적인 사랑을 중심삼고, 자기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고 전체를 위하는 사랑을 중심삼고 맹세하는 그 자리는 무엇보다도 강한 기준이 세워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도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인 출발의 동기도 하나님의 사랑이요, 역사적인 과정도 하나님의 사랑이요, 역사적인 결과도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빼놓은 기준에서는 일체화라는 것이 없습니다. 절대적 통일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이요, 그 아들이 사랑하는 신부요, 하나님의 사랑받는 신부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때, 사랑의 일체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지간에는 엄연히 상하의 질서가 있는 것이지만, 사랑을 중심삼고 볼 때에는 종적 질서가 횡적 질서로 바뀐다 하더라도 무리가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명령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아들이 `아버지, 이리로 오세요'할 때 아버지는 안 갈 수 없는 거예요. 암만 두 살 난 딸이라도 `아빠, 이리 와' 하면 아버지는 안 갈 수 없다는 거예요. 종적인 기준이 횡적으로 움직이는 엇갈리는 자리라 하더라도, 모순과 상충이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가치적인 기준을 찬양할 수 있고 도리어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이 기준은 사랑에 의해서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 세계를 사랑으로 포괄된 세계를 만들지 않고서는 천국을 이룰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은 네 마음 속에 있다고 하신 것은 예수님 자신을 중심삼고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천국 이념은 외적으로 너희들도 사랑하게 하기 위함이요, 내가 너희들을 필요로 하는 것은 너희를 사랑의 기수로 만들기 위함이다. 너희들이 나와 같이 가면 너희의 마음에 나의 이념과 사상이 자동적으로 옮겨지기 때문에 너희의 마음에도 천국이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 천국관념은 자기를 위주한 것이 아니라 전체를 구원하고, 전체를 잘 거느려 주고, 전체를 주관해 주기 위한 것입니다. 주관하는 것도 강제 주관이 아니라 자원에 의해 주관해야 합니다.
주관성 복귀의 방법
그러면 주관성을 어떻게 복귀해야 되느냐? 악한 사탄세계에서는 주관성을 강제로 복귀하려고 합니다. 하늘은 시대를 초월할 수 있는 주관성을 제시해 나온 것입니다. 그것이 희생과 사랑입니다. 희생과 사랑의 테마를 앞세우고, 갖은 수욕과 갖은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면, 그 환경에 있는 사람들이 자동적으로 주관성을 취해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수단 방법으로 주관하려는 거기에 복귀의 뜻은 세워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희생해 가지고, 세계를 사랑하기 위하여 자기 일신을 가눌 수 있는 일체의 환경을 포기해 버리고 세계를 가누어 주고 하나님의 사정을 헤아려 드리기 위해 자기 일신을 제물로 삼고자 하는 생활과정에서만이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법도가 제정되는 것이요, 그 사랑을 중심삼고서야 새로운 주관성의 터전이 넓혀져 나오는 것입니다.
본성의 주관권
아담 해와를 중심삼고 볼 때, 원래 아담은 찬란히 빛나는 자연의 질서 정연한 모습과 그것들이 화동 화합하는 상대적 이상세계를 바라보는 아담은 `이 이상적인 상대권의 세계는 우리를 찬양하기 위해서 존재하고 있구나. 아! 좋구만. 우리는 여기에 중심 핵이 되어 있구만' 해 가지고 그것을 품고 나서 아내를 사랑해야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야 그것이 참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아내를 보고 그 미모를 찬양하고, 아내의 음성을 듣고 화동하고, 아내와 더불어 생활환경에서 냄새를 맡고, 음식을 먹고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본성의 주관권입니다.
타락하지 않은 우리 인류의 본성적 부모의 기준을 중심삼고 보면, 우리가 하늘땅을 품고 나가게 되어 있는 거라구요. 하늘땅도 우리에게 끌려 다니는 것입니다. 우리가 좌로 가면 하늘땅도 좌로 가고, 우로 가면 우로 가고, 올라가면 올라가고, 내려가면 내려가고, 동하면 동하고, 정하면 정하는 거예요. 다시 말하면 주관성을 중심삼고 천지의 대권한을 가지고 치우침이 없는 중심권의 자리, 모든 것을 지휘하고 모든 것을 가리는 자리, 모든 것을 주관하는 자리에서, 그런 터전 위에서 개인의 사랑의 인연이 맺어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남편된 그대들이여, 아내를 사랑하기 전에 하나님을 사랑했고, 인류를 사랑했다는 증거를 가져라! 그런 증거를 가지고 아내를 사랑해야 그 사랑은 참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세계와 하늘을 위하여 우는 사람
그러면 본성적 세계 기반은 어디에서 나올 것이냐? 그 세계 기반이 한꺼번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개인에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개인으로부터 나와야 되는데, 세계를 위하여 우는 사람이요 하늘을 위하여 우는 사람으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세계를 위하여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즐거워하는 사람이 아니라, 세계 때문에 하나님 때문에 우는 환경밖에, 그 길이 아니고는 갈 길이 없다고 하며 그 길을 자처해서 가는 사람, 그런 무리가 아니고는 금후의 이 길을 헤쳐 나가 해방적인 권한을 갖출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놀음을 하지 않고는 될 수가 없기 때문에, 완전한 해방과 최후의 해방의 기수가 되어야 되고 완전 건국, 최후의 건국의 용사가 되어야 되기 때문에 이들은 누구보다도 신음에 신음의 과정을 거쳐야 될 것입니다.
여기에는 억천만 사탄이 공격할 것입니다. 악의 권속에 속해 있는 영인들은 물론이거니와 땅 위에 있는 악당의 후손들까지도 모두 여기에 반기를 들 것입니다. 그러나 반기를 드는 그 고난까지도 소화시키고 넘어 최후의 승리의 천국을 향해 가는 길이, 하늘을 신봉하고 하늘의 정통적인 사상을 이어받아 절대적인 신뢰의 기준을 세워 나가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참아들딸의 도리를 세우기를 바라고 나가는 그들이 가야 할 지극한 정상적인 길이 아니냐. 그 한계선까지 우리는 투쟁해야 합니다.
먼저는 하나님과 뜻을 사랑하라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미치고, 세계를 사랑하기에 미쳐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사랑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 세계를 구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은 가정을 구해 가지고 나가는 것이지만, 가정이 생겨났으면 그 가정은 자기 가정만을 위해서 사는 가정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세계를 위해서 사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전통적 기준인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과 세계를 사랑하기에 미쳐야
나는 하늘을 사랑했고 세계를 사랑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세계에서 과거의 성인들을 만나더라도 당신들과 나는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하는 거예요. `나는 하나님을 이런 심정적 기준에서 사랑했다. 아버지와 자식의 입장에서 사랑하고, 남편과 아내의 입장에서 사랑하고, 부자관계의 사랑을 중심삼고 피땀을 흘리며 정성들여 나왔기 때문에 너희들과는 다르다' 이것입니다. 질이 다르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그들을 대해서 `세계를 사랑하는 데 있어서 너희들은 나한테 배워야 돼'이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무엇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기적 심정을 중심삼고 결과적 심정권내에 있어서 일치된 그 자체를 집중시켜서, 오늘의 세계를 붙안고 나라를 붙안고 수많은 종족을 연결시켜 같은 인류로서 사랑할 수 있는 심정의 터전을 내가 어떻게 확보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제부터는 구체적으로 사랑하자
지금까지 막연하게 세계를 사랑했던 것을 이제는 구체적으로 사랑해야 돼요. 덮어놓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축복받은 아내와 남편은 서로 세계를 대신하고 하늘땅을 대표한 자리에서 사랑을 해야 합니다. ‘신랑으로 찾아온 예수와 땅 위에서 신부로 맞고 싶었던 신부가 만날 수 있는 대표적인 귀한 날, 우리 일대에서 가질 수 있는 가장 거룩한 날이 축복의 날이다. 이제 만났으니 사랑을 해보자. 사랑의 해방권에서 기원과 과정과 결과가 일치된 자리, 어느 누가 참소 하더라도 걸리지 않는 자유 해방권이요 절대적 기준 앞에 있어 가지고 하나의 남성과 하나의 여성이 사랑할 수 있고, 거기에서 태어난 아들딸을 사랑할 수 있고, 친척을 사랑할 수 있고, 비로소 나라를 사랑할 수 있고, 세계를 사랑할 수 있고, 하늘땅을 사랑할 수 있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이러한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기준이 오늘날 우리 일대에서 결정된다면 그 이상의 행복이 어디에 있겠느냐’ 이러면서….
그 기준이 벌어지게 될 때는 하나의 남성이 하나의 여성을 대해서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어야 됩니다. 부모와 자식간에도 막힘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려면 말없는 가운데 사랑을 심어야 됩니다. 이제는 구체적인 입장에서 하나의 남성과 하나의 여성이, 주체와 대상으로서 서로 하나님과 세계를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사랑하고, 아들딸을 사랑하고, 종족을 사랑해야 합니다. 나아가 그러한 종족이 합해서 민족을 사랑하고, 그런 민족을 통한 하나의 주권국가를 이룬 후 그 국가를 넘어 세계를 사랑할 수 있는 그런 터전이 되어야 비로소 주관성 복귀가 가능한 것입니다. 즉, 본성적으로 주관할 수 있는 복귀된 개인과 가정이 성립되는 것이요, 그런 가정을 중심삼고 복귀된 종족권이 성립되는 것이요, 그러한 종족을 중심삼고 민족권이 성립되는 것이요, 그러한 민족을 중심삼고 국가권이 성립되는 것이요, 그러한 국가를 중심삼고 세계권이 성립되는 것이요, 그러한 세계를 중심삼고 천주권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천주권이 이루어지면 하나님과 우리 인간을 중심하고 영원무궁한 지상과 천상의 천국, 통일된 세계, 하나님의 사랑만이 길이길이 드높이 들릴 수 있는 곳이 이루어지게 되는 거예요. 그런 세계가 벌어져야만 본성적 주관성이 복귀된 천주가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어요.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앞으로 통일교회 교인들이 회사 사장이 되면 그 아내도 사흘에 한번씩은 회사에 출근할 때가 올지 모릅니다. 그것이 안되면 일주일에 한번씩이라도 출근하여 남편의 사장 노릇을 대역할 수 있는 때가 와야 될 것입니다. 그때는 그녀가 일자무식장이라도 그 명령 앞에 절대 복종하는 놀음을 해야 될 것입니다.
그래서, 통일교회 선생님 대신 어머니가 나와서, 아무것도 모르지만 여러분에게 명령을 하게 되면 여러분이 절대 복종해야 하는 그런 일이 있을지 모른다구요. 외적으로 그런 형태가 벌어지지 않고는 내적으로 그런 가정의 기준이 자리잡을 수 없는 거예요. 또 국가적으로 그런 기준이 벌어지지 않고는 종족적으로, 민족적으로 자리를 잡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그러한 터전이 벌어지지 않고는 국가적으로 안식의 터전이 벌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하고저를 막론하고 전부 다 안팎을 중심삼고 중심이면 중심으로 모실 수 있는 아량이 여러분에게 있어야 돼요. 그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남편이 사장이면 사장 혼자가 아니라는 거예요. 가정입니다. 가정이예요. 이런 문제가 벌어져요. 그 가정 전체가 사원 전체와 통해야 됩니다. 나라면 나라를 이끌어 가는 주권자를 중심삼은 모든 것이 어느 가정에도 통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세계가 되어야만 본성의 천국이념이 벌어질 것이고, 그러한 이념권이 벌어져야만 주관성 복귀의 천국이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기 도
주관성 복귀
1971.10.03 (일), 한국 전본부교회 말씀선집 49권 1편
기 도
사랑하는 아버님, 오늘은 1971년 10월 3일, 이달 들어 처음 맞는 안식일이옵니다. 또한, 오늘은 이 나라의 건국을 축하하는 날(開天節)임과 동시에 결실을 찬양하며 조상들을 찾아보고 기념하는 날(仲秋節)이기도 하옵니다. 이 세 가지 의미를 가진 이날을 중심삼고 세상에서는 외적인 면에서 축하를 하고 있지만, 저희들은 이 나라와 이 세계를 대신하고 하늘을 대신하여 내적으로 축하를 해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이 자리에 좌정하시옵소서. 저희 각자의 심령을 투시하시사 지극히 높고 거룩하신 권위를 가지고 개개인의 심성을 통하여 명령하시고, 친히 아들이라 딸이라 할 수 있는 인연을 맺어 주시옵소서. 이 아침, 찾아오신 아버지 앞에 부끄러움을 남겨 드리는 자신들이 되지 않기 위하여 부족함이 있거든 솔직히 직고하고, 수많은 영인들 앞에, 조상들 앞에 부끄러움이 없는, 시대적인 책임을 진 사명자가 되겠다고 스스로 결의하고 다짐하는 이 시간이 되어야만 되겠습니다.
아버지, 저희들은 각자 다른 과거를 갖고 있고 현재에도 각자가 분담된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금후에도 그러한 책임 과정을 거쳐 나가야 할 생애노정이 남아 있는 자신들임을 아오니, 아버지께서 긍휼히 보아 주시옵소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가치를 비교할 때, 미래의 가치가 과거와 현재의 가치보다 더 크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저희들이 현재보다 가치 있는 미래를 맞기 위해서 지성을 다하고 성심을 다하는 오늘의 정성어린 자체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느끼게 되옵니다. 여기에 모인 저희들은 그러한 정성의 제단을 묶어 세계를 대신하고, 나라를 대신하고, 하나의 종단을 대신하고, 하나의 가정을 대신하여 아버지 앞에 대표적으로 엎드린 자녀들이 되어야만 되겠사옵니다.
저희들이 이와 같은 대표자로서의 책임을 진 자리에서 세계를 위하고, 나라를 위하고, 가정을 위할 수 있는 자신을 아버지 앞에 봉헌하고자 할 때, 아버님께서 보시고 `과연 내 아들이요, 내가 바라던 가정을 대표한 자요, 내가 바라던 나라와 세계를 대표한 자'라고 하시며 기쁘신 마음으로 저희 앞에 나타나실 수 없게 될까봐 염려하는 마음 가지고 이 자리에 부복한 무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각자 처해진 위치 나름대로 개개인에게 이 시대에 필요한 적절한 사명이 있을 줄 알고 있사오니, 특별히 이 아침에 아버지께서 불꽃 같은 눈으로 개인의 심령을 살피시사 악한 여건을 제거하시고, 선하지 않은 일체를 부정하시옵소서. 그리하여 당신의 소성에 일치될 수 있는 선한 마음과 선한 본성을 일깨워 주시고, 당신의 영원한 생명의 이념과 결부 시키시어 이들이 스스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과 더불어 서 있는 자신들임을 발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자고로 타락한 인간의 후손으로 태어난 한을 품고 나온 저희들이기에 이 한의 고개를 넘어야 되겠습니다.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이 고개를 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탕감복귀의 원칙을 배운 저희들은 이 눈과 귀와 코와 입을 통한 모든 감각까지도 하늘과 더불어 이 정상의 고개를 넘어야 되겠습니다.
지금까지 들었던 과거지사를 잊어버리고, 지금까지 보았던 과거지사를 잊어버리고, 지금까지 느꼈던 일체의 감각과 소성을 잊어버리고, 하늘을 기원으로 한 인연을 맺어서 자기 생애의 출발을 보아 가지고 지금까지 지내 왔다는 새로운 인식을 가지고, 자기 인격을 평가하고 자기 생활감정을 다시 더듬을 줄 아는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하는 이 시간이 되어야만 되겠습니다.
저희의 눈이 아버지를 처음 바라보지 못하였던 것이 원통한 사실이요, 저희의 귀가 아버지의 거룩하신 사랑의 음성을 듣지 못하였던 것이 원통한 사실이요, 저희의 코가 죄 없는 에덴에서의 아버지의 사랑의 향기와 꽃동산에서 풍기는 모든 향기를 맡지 못하였던 것이 한이옵니다.
죄악권내에 있는 만물이 아니라, 선하고 거룩하신 당신의 해방의 동산에 있는 만물을 먹지 못하였던 이 입이 한을 품고 있습니다. 이 감정으로 느꼈던 일체, 이 촉감에 느껴진 일체를 당신과 반대되는 자리에서 느끼고 접촉하였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저희들은 더럽혀지고 더렵혀졌던 타락인간의 후손인 것을 자각하고, 거룩하고 해방된 선한 모습을 간절히 추앙하는 마음으로 그곳에 도달하여, 그곳에 서서 하늘을 우러러보며 찬양하며 당신의 권고를 듣고, 당신의 분부를 받을 수 있는 날을 그리워 해야 되겠사옵니다. 자연을 당신이 허락하신 향기나는 축복의 동산으로 바라보면서 자신이 느끼는 일체의 감정이 당신 앞으로 귀화할 수 있는 자리에 서지 못한 것을 자탄해야 되겠습니다.
지금까지 그런 것을 애호하였던 퇴폐적인 자체를 포기해 버리고, 스스로 하늘이 수호하고 싶었던 본연의 자체를 그리워하면서 나갈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들은 그런 자체가 될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 여기에 모여든 당신의 자녀이옵니다. 저희의 일체의 감정이 더렵혀져 있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저희의 마음과 감정 전체가 아버지를 동기로 하고 아버지와 인연을 맺어 아버지로 말미암은 결과를 맺게 하시옵소서.
자신의 일체를 아버지 앞에 찬양함과 동시에, 전체의 환경과 나라와 세계를 들어 아버지의 본성이 나타난 세계라고 찬양할 수 있는 생애를 살지 못할까봐 염려하는 마음 가지고 모인 무리가 통일의 무리이옵니다.
아버님이여, 당신이 이들 앞에 새로운 이념을 부여하심으로 말미암아, 이들은 새로운 세계관과 새로운 국가관과 새로운 종족관과 새로운 가족관과 새로운 개인관을 갖고 나타난 당신의 자녀들이라고 하겠사오니, 이제 이들은 스스로 세상과 구별된 자체를 공고히 결정지어 가지고, 내 갈 길은 확정지어져 있다고 타락으로 인한 원한 가운데 사무쳤던 역사를 대신하여 자랑하고, 타락으로 말미암은 고난 가운데서 신음하고 있는 이 시대를 대신하여 자랑해야 되겠고, 앞으로의 선한 세계를 추구하게 될 그 나라를 위하여 타락한 세계와는 다른 길을 가는 그 나라의 형태를 바라보는 자리에서 찬양해야 할 자신인 것을 스스로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런 지고한 자신의 모습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니 억천만세의 흐름이 아무리 악하더라도 아버지의 선함을 더럽힐까봐 염려하며 스스로를 수호할 줄 아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수호할 뿐만 아니라 선을 대신한 주체성을 가지고 악에 대한 심판의 권한을 대행할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이들은 마음이 그리는 본연의 심정이 어떻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자신의 감각을 통하여 스며드는 일체의 느낌이 아버지와 상관되어 있지 않은 그것이 비통한 사실이요, 억울한 사실이요, 이것이 눈물 겨운 사실인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이들이 자각하여 눈을 통하여 흘리는 눈물이 있거든 그것은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눈물이요, 말하고 소리를 지르는 그런 무엇이 있거든 그것은 아버지를 그리며 아버지를 만나 보고 싶어 절규하는 음성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느끼게 하여 주시옵소서. 악한 세상에서 느꼈던 감정이 있거든, 최고로 느꼈던 어떤 기준이 있거든, 그 천배 만배의 기준을 하늘과 더불어 느끼기 위해 몸부림치지 않으면 안 될 타락의 후손이 된 것을 저희는 증오해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일체를 거부해야 되겠습니다. 또 이와 같은 환경을 제거해야 되겠습니다.
찾아오시는 아버지의 걸음을 멈추게 해 놓고 `오직 내 한 개체를 찾아 오시기에 수난길을 극복하신 아버지여' 하며 눈물로써 모셔들여야 되겠사옵니다. 속죄의 인연을 다할 수 없는, 내일의 희망이 없는 절망의 자리에서, 하늘을 동정하고 하늘을 그리워하며 하늘만이 일체 새로운 소망의 출발이 될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지고 아버님을 모시고자 하는 무리가 이지구상의 종단 가운데, 신자들 가운데 있어야 될 것을 생각할 때, 아버지, 여기에 모인 무리 가운데 그러한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당신이 찾아오신 그 걸음은 서러운 걸음이 아닌 줄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 저희의 마음과 몸이 당신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마음과 몸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하면 안 되겠습니다. 저희가 지닌 사고방식과 사상의 일체가 당신으로 말미암아 지녀진 것임을 느껴야 되겠습니다. 그러지 못하면 하늘의 서러움의 상징이 될 것이요, 하늘의 고독을 자극시킬 수 있는 원통한 사실이 될 것을 이 시간 느끼오니, 아버님, 찾아오시옵소서.
저희들이 본래 당신의 자식이라는 것을 아시는 아버지께서 본성의 마음을 통하여 저희들을 찾고자 하실 때, 얼마나 기가 막히시옵니까? 그러기에 저희가 부족한 자체에 아픈 곳이 있어도 아프다고 말할 수 없고, 상처가 났어도 상처 났다고 말할 수 없으며, 보기에 추한 것이 있어도 추하다고 당신께 보여 드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아버지의 자비와 긍휼과 동정을 바라는 마음을 갖고 나타나게 될 때, 그 상처를 바라보시는 아버지께서는 그 고독한 모습을 바라보시고 슬픈 눈물과 더불어 세상의 무엇보다 비참한 마음을 넘어서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저희를 당신이 위로받을 수 있는 곳까지 끌어올리고자 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저희는 복귀의 심정이 더듬어지는 그 자리를 바라고 있사옵고, 당신의 거룩함이 새로이 인연되어지는 그 자리를 고대하고 있사오니, 부디부디 그 자리에 처할 수 있는 자녀로 받아 주시옵소서.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10월 3일을 맞았사오니 내일은 10월 4일입니다. 우리 통일교단에 있어서 잊을 수 없는 한날이 저희 앞에 찾아오고 있습니다. 슬펐던 때를 지나고 해방의 한날을 맞이하였던, 16년 전 그때를 저희들은 생각 하고 있습니다. 억울한 과거지사가, 하늘과 더불어 슬픔을 같이하였던 그때가 우리 통일교단의 역사 가운데 있는 것을 저희들은 망각하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하늘과 더불어 기쁠 수 있는 한날을 가졌던 무리라는 사실을 저희들은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바로 그 전날인 오늘 10월 3일에 생각하건대 자비의 아버지, 긍휼의 아버지, 용서의 아버지, 저희들이 10여년 동안 한다고 하였지만 그 생활 가운데 아버지 앞에 부족하였던 것이 얼마나 많은지 말로 다 할 수가 없사옵니다.
저희들이 격한 마음을 가지고 아버지 앞에 맹세하던 그날이 있었다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민족 앞에 자부하고 나섰던, 승리의 한날을 표방하고 고난을 극복하겠다고 마음으로 다짐하면서 참고 참고 또 참았던 그날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아버지, 옷깃을 여미고 지난날의 부족 불충하였던 것을 다시 한 번 사죄하면서 오늘 이 시간 자비의 아버지, 긍휼의 아버지, 동정의 아버지의 성상을 바라고 있는 자녀들을 찾아와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 대한민국 땅을 사랑하시는 아버지시여, 이 나라를 찾아오시는 아버지시여, 이 백성을 버려서는 안 될 것을 저희도 알거니와 당신은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십니다. 수난길에서 당신이 흘리시던 눈물을 계승할 자가 없는 것을 원통해 하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하시옵고, 핍박도상에서 자신을 가눌 수 있는 자리를 갖지 못한 불쌍한 아버지이셨음을 아는 당신의 자녀들이 모인 이 자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수많은 하늘편의 사람 사람들이 원수의 총칼에 쓰러질 때에 그것을 직시할 수 없어 눈을 돌려야 했던 아버지의 사정을 아는 통일의 무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한이 있어도 저희의 한을 갖기 전에 하늘의 한을 이어받아야 되겠사옵고, 슬픔이 있어도 저희의 슬픔을 표시하기 전에 아버지의 슬픈 가슴을 이어받아야 되겠사옵니다. 고통의 길이 있거든 하늘의 고통을 극복하는 길을 이어받은 자리에서 그것을 탕감해야지, 그 길을 가기 전에 스스로의 고통을 생각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되겠사옵니다. 스스로가 받는 핍박과 스스로의 고독을 생각하는 무리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아버지, 저희들이 아버지편에 선 아들과 딸이 되게 될 때 아버지께서 얼마나 얼마나 대견하게 생각하시겠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이날 이 나라 이 백성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금후의 삼천리 반도, 이 한반도를, 아버지, 품으시옵소서. 이 나라는 당신의 높으신 권한을 나타내야 할 나라인데도 불구하고 당신 앞에 배신과 반역의 깃발을 드높이는 나라가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런 나라가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러한 악한 무리가 있거들랑 아버지여, 제거시키시옵소서.
하늘의 때를 위해서 밟히면서도 슬픈 눈물과 더불어 하늘을 위로하기에 몸부림치는 무리를 두시어 낮았던 것이 높아지고, 높았던 것이 낮아지는 천지의 인연을 따라 하늘의 자주적인 권한을 갖추어 영광의 나라를 세워서 그 영광을 세계 만방에 떨쳐 찬양할 수 있는 그날이 이 민족을 통하여 어서 속히 오게 해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더욱이 오늘 이날, 통일교단에 속한 어린 딸들이 남한 각지에 널려 있사오니, 남들이 기쁨으로 이날을 축하하며 왕래하는 것을 바라볼 적마다 자기의 남편을 생각하고 자녀를 생각하는 어린 아낙네들의 마음을, 아버지,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이 흘리는 눈물이 있거들랑 그 눈물이 헛되지 말게 하시옵소서. 당신의 마음이 거기에 어리게 하여 주시옵고, 당신의 심정이 거기에 깃들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이렇게 이 교단을 붙들고 싸워 나가고 있습니다. 부족한 정성이나마 모아서 정성의 표준을 세우고자, 거기에 미달한 정성의 생활을 하고자 몸부림치는 이들을 바라보시는 아버지, 그래도 이 민족을 대신할 수 있는 무리는 이들밖에 없다는 것을 아시는 아버지시여, 긍휼의 손길을 펴 주시옵소서. 눈물을 흘리는 딸들이 있거들랑 당신과 더불어 눈물을 흘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자기의 육정(肉情)을 중심삼고 눈물을 흘리는 자가 되지 말고, 천정(天情)을 중심삼고 나라를 가진 백성이 되지 못한 원한을 느끼면서, 나라를 갖지 못한 자주적인 국민이 되지 못한 것을 느끼면서, 2천년 전 이스라엘을 잃어버리신 아버지의 슬픔을 탕감해 드리기 위해 새로운 민족, 새로운 국가를 바라보며 눈물 흘리는 무리로 남아지게 하시옵소서. 그렇게 될 때는 결코 망하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에 당신께서 저희들을 이런 자리에 내세우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 그 자리를 지켜 주시옵소서. 가정에서 몰림받고, 혹은 직장에서 혹은 학교에서 혹은 사회에서 몰림받던 외로운 아들딸들, 이 교단을 지키고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정성을 다하는 자리가 있거들랑, 아버지, 그 자리를 떠나지 마시옵소서. 눈물의 골짜기를 이어받기 위하여 몸부림 치는 그들 앞에, 수난의 역사를 이어받기 위하여 몸부림치는 그들 앞에, 당신의 자비의 마음이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모든 일체를 잊어버리고 당신만을 소유하고자 하는 그들을 아버지시여, 아버지나마 모른다 마시옵고 지켜 주시옵기를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제가 그러한 자리에 설 적마다 당신이 분부해 주시던 역사적인 인연을 생각하옵니다. 하늘만을 위하여 발벗고 나서는 걸음은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그들이 고독한 자리에 있지만 불쌍하지 않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자리에 당신께서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이들이 하나로 합하여서 이 민족과 이 세계를 바라보며, 혹은 하늘의 뜻을 이어받아 왔던 기독교를 바라보면서 눈물짓는 그 눈물은 거룩한 눈물일 것이옵니다. 비록 그 누구도 모르는 자리에서 눈물을 흘렸다 할지라도, 수확의 때가 되면 거두게 될 것을 아옵니다. 봄이 되면 싹이 트고 여름이 되면 꽃이 피고 가을이 되면 결실이 되는 것은 천리의 원칙인 것을 알고 있사오니, 누가 보나 안 보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어떠한 계절의 변화가 있더라도, 저희의 마음은 변하지 않고 생명의 결실로 거두어지기 위한 싸움의 노정을 더디 가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여기 모인 당신의 자녀들이 그 누구를 위하여 모였사옵니까? 자기 스스로를 생각하고, 자개 개체의 이익을 더듬는 마음을 가지고 모인 생명은 단 한 생명도 없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직 남겨져야 할 당신의 자비와 사랑과 긍휼이 그리워 모인 무리이오니 이들이 흘리는 눈물이 헛된 눈물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개체의 구원을 염려하는 눈물보다도 민족과 세계와 하늘을 구하기 위한 눈물을 흘려야 되겠습니다. 여기 이 자리가 마음을 다지면서 심정의 흐느낌을 자아내는 자리가 되고, 당신의 심금을 울려낼 수 있는 인연을 자아내고, 새로운 매듭을 짓는 느낌을 갖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전국에 널려 있는 자녀들이 이곳을 바라보면서 무릎을 꿇고 축수하는 자리마다 축복하여 주시옵고, 전세계에 널려 있는 외로운 통일의 무리를 아버지께서 지켜 주시옵소서. 스승을 만나기를 고대하면서 눈물어린 심정을 가지고 아시아의 한 끝 이 한반도를 바라보면서, 이 서울을 생각하면서 눈물짓는 자리마다 당신의 무한하신 자비와 사랑으로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몸은 비록 갈라져 있더라도, 마음과 영은 일체의 생활권내에서 동감적 심정을 체휼하면서 살 수 있게끔 그들을 품으시옵고, 이끌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오늘, 이날을 맞아 승리의 날을 다짐하게 하시옵소서. 영계의 수많은 영인들은 이 땅 위의 후대 인간들이 하늘의 주권을 복귀하여 민족적인 자주권을 가지고 지르는 해방의 함성을 듣기를 얼마나 고대하고 있는가를 저희들은 알아야만 되겠사옵니다. 그 시간이 가까와오면 가까와올수록 저희는 밤이 되어도 밤을 잊어버리고, 낮이 되어도 낮을 잊어버리고 오직 아버지를 사모하는 마음만으로 주야를 주관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나라를 이루기 위한 충성심만이 남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이 아침에 헛되이 왔다가 돌아가는 무리가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고, 당신의 자비로움과 긍휼과 동정과 사랑 가운데 잠겨드는, 혹은 그것을 체휼하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일체를 뜻과 더불어 주관하시옵소서. 아버지, 10월부터 남아진 이해를 맡으시옵소서. 악의 권한을 밟으시고 선의 권한을 세우시어서 심판의 행사를 드러낼 수 있는 세계적인 영광의 때가 어소 속히 오게 하여 주옵기를 바라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땅 위에 살고 있는 수많은 인류는 물론이고, 그 가운데 하나인 우리 자신도 현재의 자리에서 희망을 가지고 그 무엇인가 보다 높은 것을 더듬어 나가고 있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더 높고 더 좋은 것을 추구하는 인간
남녀노유를 막론하고, 역사과정을 놓고 보나 시대적 현실을 두고 보나 미래를 두고 보더라도, 높고 낮음의 계층을 초월하여 사람이면 누구든지 더 높은 것을 바라 나왔고, 바라고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못난 사람이라도 자기 자신을 중심삼고 전체가 인연되어지기를 바라고 있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나'라는 개체를 중심삼고 최후의 기준, 절대적 기준까지 연결시키고 싶은 것이 우리 마음이 요구하는 길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자기가 갖고 있는 그 무엇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보다도 더 좋은 것이 있게 될 때는 그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보다 더 좋은 것이 있으면, 또 그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물건이나 여건도 그렇지만 우리 개체를 중심삼고 보아도 그렇습니다. 우리 개체에 마음이 있는데 그 마음의 깊이가 얼마나 깊으냐고 묻는다면 그 누구도 대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마음은 깊다면 말할 수 없이 깊은 것입니다. 또, 마음이 얼마나 넓으냐 할 때에 넓다면 한량없이 넓은 것을 우리는 느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무한한 범위를 차지하고도 남음이 있을 수 있는 마음의 세계를 더듬어 보면 그 마음세계의 중심이 있을 것입니다. 마음세계의 중심이 있으면 그 깊은 중심, 혹은 높은 중심을 그냥 그대로 나와 상관없이 남겨 두고 싶으냐 할 때,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상대적 세계를 중심 삼고 높은 곳이 있으면 그것을 자기와 더불어 관계맺고 싶어하는 것이 우리의 개체인 것을 두고 볼 때, 마음의 세계, 본성의 세계에 지고지대 (至高至大)하신 어떠한 분이 계신다고 하면, 역시 자기가 그분과도 관계를 맺고 싶어할 것은 두말할 바 없는 것입니다.
마음세계의 맨 처음에서부터 몸을 통한 상대적 세계의 맨 끝까지, 근본의 출발점에서부터 목적지인 종착점까지 어느 것 하나라도 나를 빼놓고는 생각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나를 중심삼고 인연을 맺고 싶어하는 것이요,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욕망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될 것입니다.
통일원리가 제시하는 소망의 기준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현재 여러분이 처해 있는 자리는 어떠한 자리겠느냐? 우리 본성의 어떠한 중심이 있어 가지고, 그 무한한 가치의 중심을 기점으로 생각해 볼 때 현재에 도달한 나까지의 거리는 얼마나 멀 것이냐? 이제부터 우리가 가야 할 노정, 우리 원리가 지시하는 노정은 개인복귀, 가정복귀, 종족복귀, 민족복귀, 국가복귀, 세계복귀, 천주복귀노정까지 있습니다. 천주복귀만 하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중심삼고 절대자 앞에 상대적 절대권을 갖추어 가지고 통일성을 기할 수 있는 자리까지 우리는 바라보고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생각해 볼 때, 통일원리가 제시하는 소망의 기준은 지금까지 역사상에 있었던 모든 사상이 제시한 이상의 기준이라고 우리는 자부하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생각해 보게 될 때, 하나의 원이 그려지기 전에, 하나의 평면이 그려지기 전에 하나의 선을 그어야 됩니다. 선을 긋는 데 있어서는, 혹은 인간의 본성을 놓고 보면 출발된 본성의 기원이 되는 한 점이 있을 것입니다. 또 그것이 한 점이라면 인류가 바라는 소망의 종착점이 있을 것입니다. 그 종착점이 또 한 점이라면 그것을 이을 수 있는 선이 있어야 될 것입니다. 그 선이 곡선이 되어야 되느냐, 직선이 되어야 되느냐? 그것은 곡선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먼저는 직선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직선을 그어야 합니다.
직선을 긋는 데 있어서는 그냥 그을 수 있느냐? 그냥 그을 수 있다면, 만일에 모든 존재의 출발이 하늘로 말미암아 되어졌다 할진대, 그 직선을 그냥 그대로 그을 수 있다면 하늘의 슬픔이니 탄식이니 혹은 고통이니 하는 명사는 역사상에 나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종교라는 하나의 테두리가 생겨나서 하늘을 추앙하는 놀음은 필요 없을 것입니다.
기원에서부터 결과까지 직선을 자유롭게 그을 수 있는 기준이 되었더라면, 오늘날 하나님도 걱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존재하고 있는 세계는 그 직선을 따라서 가게 되어 있지, 일체의 어떠한 존재라도 그어 놓은 그 직선을 넘을 수 있는 힘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그러한 기준이 세워져 있다면, 어느누구든지, 어떠한 존재든지 자동적으로 소망의 자리에 처해 있는 것이요, 이상의 자리에 처해 있음과 동시에 자동적으로 미래의 소망의 자리로 갈 수 있을 것이로되 그렇지 못한 사실을 보게 될 때, 이 직선이 그어져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원인과 결과의 기준을 이을 수 있는 직선이 그어지지 않은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직선은 누구로 말미암아 그어질 것이냐? 직선이 그어지기 위해서는 원인과 결과의 소성을 언제나 연결시킬 수 있는 하나의 중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여러분이 원리를 배워서 아는 것처럼 우리 인간은 영적인 세계를 총합한 실체상이요, 육적인 세계를 총합한 실체상입니다. 영적·육적 세계가 하나의 사람을 중심삼고 총합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을 소우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소우주라고 해서 단순히 작은 우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핵(核)을 대신할 수 있는 입장에서 소우주의 자리를 차지했다고 보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직선을 긋되 어디를 통하여 그어야 되느냐? 반드시 사람을 가운데에 놓고 그어야 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만약에 원형에다 직선을 긋는다면 이런 직선을 긋습니다. 이 중앙선을 긋기 전까지는 천갈래 만갈래의 선(線)이 있습니다. 선을 그을 때 이런 선을 긋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최고의 선을 그어야 되는 것입니다. 최고의 선이 어디냐? 그 최고의 선은 하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중앙점을 통한 선입니다. 최고의 선은 반드시 여기에서 그어지는 것입니다. 중앙점을 통해야만 최고의 선이 그어진다는 것입니다. (칠판에 그리면서 설명하심)
우주의 중심은 인간
오늘날 세계의 모든 존재물을 보면 반드시 원형(圓形)을 닮아 있습니다. 지구도 그러하지만 우주도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주 전체가 평면적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원형을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도는 작용의 인연을 갖고 움직이는 세계이니만큼 자동적으로 원형을 갖추어야 된다는 것은 필연적인 사실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도 역시 하나님의 자리에 계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돌아야 됩니다. 돌기 위해서는 반드시 출발과 목적점을 이을 수 있는 과정적인 존재가 있어야 합니다. 그 존재는 어떤 존재냐 하면 전체를 대신할 수 있는 존재요, 전체의 위치를 결정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것이 어떤 자리냐? 이 점입니다. 이 점에 나와야 할 존재가 바로 사람인 것입니다.
이것을 절반으로 가르면 한쪽은 영계가 되는 것이요, 한쪽은 육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걸 절반으로 가르면 상하가 되는 것이요, 좌우가 되는 것입니다. 전후좌우상하가 서로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 또 서로 크고 작고 하는 것이 아니라 좌와 우, 상과 하, 전과 후가 모두 같다는 일체의 평등기원을 결정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자리가 어디냐 하면 요 중앙점인 것입니다. 전부 다 같은 것입니다. 이 자리를 통해 가지고야 전체의 통일성을 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높은 것은 높은 것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낮은 것을 돕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또한 낮은 것은 낮은 것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높은 것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오른쪽은 오른쪽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왼쪽을 돕기 위해 있는 것이요, 또 왼쪽은 왼쪽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오른쪽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전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자체를 위하는 것보다도 존재원칙을 두고 볼 때, 상대를 위하는 자리를 결정지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자리가 어떠한 자리냐? 그것을 영원히 정(正)이라고 판정할 수 있는, 어느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절대적 기준을 확정지을 수 있는 자리가 어떤 자리냐 하면 중심자리요, 그 한계선은 중심선이라는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몸과 마음을 보더라도 그것은 별개의 방향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게 되면 각기 딴 것입니다. 몸은 몸대로 마음은 마음대로 각기 다른 방향을 갖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타락이 무엇이냐? 중심과의 간격을 넓혀 놓은 것입니다. 악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이 거리가 넓은 사람입니다. 이 간격이 멀어질수록 점점 악해지는 것입니다. 이 중심점으로부터의 이탈범위를 확대시키는 작용이 악의 작용입니다. (판서하면서 설명하심)
때문에 악의 작용과 반대로 중심점에 일치시키고자 하는 작용이 있어야 되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선의 작용입니다. 악은 무한히 분립시키는 작용을 하는 것이요, 선은 무한히 통일시키는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선이라면 절대적 통일을 해야 하는데, 그 통일은 영원히 가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절대적인 악이 있다면 그 악은 확산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개인 개인이 분열되어 가지고 세계 끝까지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한 가정으로서 살면서 영원히 통일의 가망성을 보지 못하는 가정은 악한 가정인 것입니다. 나아가 한 나라의 국민이 국민성이라든가, 혹은 애국애족의 사상 등을 통해 볼 때, 하나될 수 없는 국민이라 할 때 그 나라는 영영 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 종합된 하나의 기원을 확정지어야 할 그 자리는, 인간 세상을 두고 보나 우주를 중심삼고 보나 하나님도 아니요, 어떠한 목적에 있는 것도 아닌 우리 인간 자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하늘이 기원되어 있는 모든 것은 내 마음을 통하고, 외적인 세계가 기원되어 있는 모든 존재들은 내 몸을 통해야 합니다. 이것이 엇갈린 자리에서 이중으로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직선상에 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갈라진 인간을 반대로 접근시키는 놀음을 해 나오는 것이 도의 길인 것입니다.
현재의 인간에게 있어 중요한 문제
불교에서 참선하는 사람들이 마음이 무엇이냐를 놓고 생각하는데, 마음이 도대체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생각할 때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한 그런 경지까지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있다는 것은 상대 관념을 가져야만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혼자서는 느끼지 못해요, 혼자서는. 상대적 관념이 강하면 강할수록 자기의 존재 가치도 강해지는 것입니다. 상대적 관념이 희박해지면 희박해질수록 자기의 존재 가치도 희박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자식을 가진 부모가 보람을 느낄 때가 언제냐 하면 무엇보다도 부모와 자식간에 하나될 수 있는 내적 인연, 즉 상대적 관계가 공고화할 때 보람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방으로 커지면 커질수록 더 불안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더 보람을 느끼는 것입니다. 입체적 형태를 갖추면 갖출수록 더 불안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더 보람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여건이 희미해지게 될 때는 고독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 위의 현세는 어떠한 때냐? 모든 것을 망각해 버리는 시대권내로 들어가는 때입니다. 세계가 어디 있느냐, 나라가 어디 있느냐, 가정이 어디 있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그것도 부정하고 있습니다. 또 자기 개체, 개인이 어디 있느냐 할 때, 미확실한 근거에서 존재하고 있는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확정지을 수 있는 근거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미확정된 자리에서 확정을 짓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자체마저 부정해 버리는 이러한 시대권내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왜 그러냐? 그것은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출발점도 목적점도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어떠한 기원에 인연되어 연결된 것이 아니요, 어떠한 목적을 향해 갈 수 있는 길에 인연되어 연결된 것이 아니라 둥둥 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 있기 때문에 `나라가 뭐야, 세계가 뭐야, 박애주의가 다 뭐야' 하며 전부 다 거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있다면 그 하나님은 그러한 자리에 있는 사람을 중심삼고 어떠한 힘을 작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 작용을 하면 할수록 마이너스가 되기 때문입니다.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손해보는 놀음은 안 하시는 것입니다. 천륜도 손해보는 놀음은 절대로 안 하는 것입니다.
어떤 동기를 갖고 과정을 거쳐 목적을 찾아 나가는 천운이 있다면, 그 천운은 반드시 그 동기와 목적을 접근시키고 단축시킬 수 있는 어떤 매개체를 통해야만 됩니다. 그런 매개의 자리를 확정짓는 사명을 해야 할 우리 인간인데도 불구하고, 그 무엇을 확정짓지 못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라면 천운은 그를 통해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아무리 희망을 걸더라도 희망의 한때를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실존철학을 중심삼고 볼 때도, 인간은 현재에서 신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재의 세계에서 어떻게 인간의 가치를 추구해 낼 것이냐 하는 문제를 중심삼고 신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서는 아무리 가치를 찾겠다고 해도…. 그 가치적 기원이 누가 되어야 하느냐 하는 데 대한 논거(論據)를 세워야 되는데, `그 가치의 기원이 누구냐? 사람이냐, 국가냐?' 이런 문제를 따지고 들어가게 될 때, 그 기원이 모호 합니다. 거기에는 확정적인 가치의 기준을 결정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으로 귀결되는 것을 생각해 보게 될 때, 금후의 이 세계는 어디로 갈 것이냐? 문제가 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 소외를 부르짖고 있는 이때에, 누가 인간을 소외시켰느냐, 아니면 인간 자신이 그렇게 되었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할 때 그것도 확정짓지 못하고 있습니다. 소외를 당했느냐, 나 스스로 소외되도록 만들었느냐 하는 그것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해결 방안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제 인간이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이냐? 이제 알아야 할 것은 인간은 본래의 중심의 자리에 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자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인간 자체가 스스로 본래 어떠한 중심적인 자리를 결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출발의 기원도 되지 못하고 목적의 결과도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정적인 내연을 통하여 연결시켜 주는 그 자리를 어떻게 자각하느냐 하는 문제가 인간에게 있어서 보다 큰 문제인 것입니다.
`나'라고 하는 자체를 볼 때, `나'라는 자체는 결과적인 존재임에 틀림 없는데도 불구하고 어디를 통한 결과인지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나' 라는 결과를 가만히 따져 보면, 나라는 존재는 옛날 개인으로부터 종족을 거치고 국가를 거쳐 지금의 세계 끝까지 찾아 나온 것입니다. 수많은 전쟁을 거쳐서 오늘의 `나'를 남겨 놓은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의 `나'라는 존재가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새로운 이상을 제기시키기 위해서는 얼마만한 수난길과 얼마만한 투쟁길을 넘어야 될 것이냐? 그런데 그것을 넘기 위해 스스로의 결의를 다짐할 수 있는 그 무엇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오늘의 `나'라는 것을 생각할 때, 이는 절망의 자리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재 우리 세계인의 고민사(苦悶事)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현재 처해 있는 자리는 어떤 자리이냐? 이 자리는 기원도 아니요, 결과도 아닌 중간 매개체의 자리입니다. 중간 매개체는 동기와 더불어 일치하고, 결과와 더불어 일치할 수 있는 그런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그 자체의 위치를 결정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가치의 내용을 분석할 수 없는 거예요.
본성의 세계 회복과 개인의 가치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있다면 오늘날 이러한 인생의 길을 해결짓기 위해서, 우리 인간들을 동기의 자리라든가 목적의 자리로 끌고 가는 일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까지 종교를 통해서 섭리해 나오셨는데, 종교를 통해서 마음과 더불은 생활을 강조해 나오셨던 것입니다. 마음과 더불은 생활을 강조함과 동시에 이 세상과 더불어 생활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끝날 이후의 세계, 이 세상을 넘어선 끝의 세계의 생활 인연을 강조해 나오신 것입니다. 기독교를 보더라도 이 현실 세계를 중심삼고 살라고 가르쳐 주는 도리는 하나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살라고 가르쳐 준 그런 무엇은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마음세계에서의 평화를 부르짖고 나오는 것입니다. `천국이 어디에 있느냐? 이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네 마음속에 있다. 마음세계에 천국이 있고, 또한 천국은 끝날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가르치며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 끝날의 천국이라는 것은 이 세상과는 상관이 없는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천국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역사과정을 거쳐가는 인간들이 필요로 하고 중요시하는, 역사과정의 내용을 가르치는 도리가 아닌 것입니다. 종교라는 것은 본래 그래야만 되는 것입니다. 만일 과정의 도리를 가르치고 그것을 표준으로 하고 목적으로 하는 종교가 있다면, 그 종교는 순수한 종교적인 견지에서 보게 될 때 사교인 것입니다.
마음의 세계를 다짐하고 본성의 세계를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본성의 세계에서의 내 개인의 가치가 어떤 것이냐? 이게 문제입니다. 본성의 세계에 있어서 내 가정의 가치가 어떤 것이냐? 그걸 모르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 마음의 세계, 본성의 세계의 국가관, 세계관이 어떠한 것인지를 모르고 있어요. 예수님께서 천국은 네 마음속에 있다고 말씀하셨는데도 불구하고, 그 마음속에 있다는 천국의 구체적인 내용이 어떻게 되어 있는 것이냐에 대해서는 기독교에서도 지금까지 확정짓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마음의 천국이 외적인 세계의 천국으로 연결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여기에 대한 구체적 방안이 성서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날에 와서 기독교가 갈 길을 못 가리는 것은 기독교가 그런 자리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불가피한, 결론적인 위치가 아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본성의 세계에 있어서의 마음의 천국은 어떻게 되어 있느냐, 천국의 본질이 어떻게 되어 있느냐, 이게 문제입니다. 앞으로 후대에 오게 될 본성의 세계, 천국이 어떻게 되어 있는 것이냐? 이것이 우리가 문제시해야 할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중심이 누구냐? 물론 사람을 통해야 되겠지만, 사람은 기원도 아니요 전체적인 목적의 결과도 아니기 때문에 그 기원이 될 수 있는 것과 완전히 일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여기에서 그은 선이 반드시 여기에 도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늘이 작용하면 반드시 여기에 와야 된다는 거예요. (그림을 가리키며 설명하심) 그 작용은 어디에 미쳐야 되느냐? 나라에 미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개인에게 미쳐야 됩니다. 특정한 민족에게 미치기 전에 특정한 개인에게 미쳐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세계적이고 역사적인 섭리를 해 나오신다 하더라도, 그 섭리가 아무리 크고 넓고 긴 역사적인 섭리라 할지라도 반드시 개인을 통해서 접근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 개인은 어떠한 개인이냐? 하늘을 위하는 개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절대시하는 개인입니다. 동기를 자기 생명보다도 더 중요시하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개인을 통하여 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개인이 확정되면 그 개인을 통하여 가는 것입니다. 그 개인이 이렇게 가는 것이 아니라, 그 개인을 통해 가지고 여기서 사방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판서 하시면서 말씀하심) 그 중심으로 결정되기 전에 사방에 금을 그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었다가는 화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종교의 폐단이 그거라구요. 지금까지 역사과정에 남아진 종교의 폐단이 무엇이냐 하면, 이 중심 자리에 오기 전에 요런 놀음을 한 것입니다. 그어 놨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세계적 틀거리를 잡으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오실 때에 그 완전한 개인과 접선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의 때인 것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완전한 개인과 하나님이 접선할 수 있는 세계적인 중앙지인 동시에 국가적인 중앙지요, 종족적인 중앙지요, 가정적인 중앙지요, 개인적인 중앙지였습니다. 그 자리가 바로 요 자리, 모든 일체의 중심자리인데, 하나님은 그 한 점을 중심삼고 결정지으려고 섭리해 나오셨는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가 국권과 교권을 중심삼고, 자주적 권한을 중심삼고 세계에 적응하고, 거기에 하나되지 못하는 일체를 제거시켜 버린다는 입장에 섰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간 것입니다.
재림주는 역사와 세계의 중심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러한 과거의 역사적인 사실들을 미루어 보게 될 때, 과연 하나님은 오늘날 인간세계 가운데에 하나의 중심적인 핵을 이어받을 수 있는 점을 결정지어 놓았느냐 하면, 그것을 결정짓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땐가는 그것을 결정지을 수 있는 한날이 와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반드시 그것을 결정지을 수 있는 한날을 남겨 놓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의 세계에서 말하는, 기독교로 말하면 재림사상입니다. 다시 주님이 와야 된다는 거예요. 고차적인 종교일수록 재림사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시 와야 된다는 기준이 뭐냐? 그 기준이라는 것은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요 중앙점을 결정지을 수 있는 기준입니다. 그러한 가치적인 기준을 세우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시다면 기필코 세워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끝날이 와야 됩니다. 그 끝이 무엇이냐? 하나님은 요 하나의 기준을 결정짓기 위해서 지금까지 역사를 동원해 나오셨는데 그 동원된 역사가 끝나는 날입니다. 그 한날을 찾음으로 말미암아 전체의 중심이 잡히게 됩니다. 그 중심은 개인의 중심이 되는 동시에, 가정의 중심도 되는 것이요, 종족의 중심도 되는 것이요, 국가의 중심도 되는 것이요, 세계의 중심도 되는 것이요, 하늘땅의 중심도 되는 것입니다.
그 중심이 잡혀야 됩니다. 그 중심이 잡혀지지 않고는, 이 인간세상에서 우리가 눈으로, 오관을 통해, 감각기관을 통해 우리의 중심이 어떻다 할 수 있는 기준이 결정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정되지 않았는데도 이상세계의 출현을 바라는 것은 망상입니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소원이 어디에 있느냐? 한 분 앞에 있는 것입니다. 그 한 분을 찾기 위해 나라도 부정하고, 자기 생애도 부정하고, 자기 가정도 부정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식이고 뭐고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기독교가 강조하고 주장해 나온 주의입니다.
한 점에 전부 다…. 그 한 점을 못 찾아 가지고는 나라도 잃어버리기 때문에 그렇게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절대시하는 것은 그것이 전체의 내용을 결정지을 수 있는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핵이기 때문이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그렇게 가르쳐 줘야 되는 것입니다. 만일 그러한 결정적인 기원의 내용이 아닌 것을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쳐 줬다면 하나님은 사기한 것입니다, 사기.
그러나 하나님은 결정적인 그 한 점을 통해서, 역사의 방향이나, 개인의 신앙의 방향이나, 민족의 모든 소원의 방향까지 전부 다 그 점에 접근되게끔 지도해 나오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접선된 길은 남아지는 것이요, 여기에 가까이 처할 수 있는 어떠한 단체나 국가는 남아지는 것이요, 여기에서 먼 것은 악한 것이니 그건 전부 다 제거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역사적 방향이 어떻게 흘러가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봅시다. 기독교는 지금까지 역사노정에서 숱한 희생을 치러 왔고, 순교한 선열들의 피의 대가로 그 제단을 이어왔는데, 기독교가 지금까지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주도적인 원동력이 어디에 있었느냐? 믿고 천당 가는 데 있었습니다. 또, 믿고 천당가는 것도 가는 것이지만, 주님이 오실 그날을 맞기 위해 노력한다는 양면적 소망을 가지고 기독교는 지금까지 나왔습니다. 하나는 천국가는 것, 또 하나는 끝날에 주님을 맞는 것, 이 두 가지 소원을 가지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천국이라는 것은 본성의 세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끝날에 주님을 맞이해야 한다는 것은 주님을 만나 가지고 천국 가자는 것입니다. 무슨 천국이냐? 영계의 천국이 아닙니다. 지상의 천국을 가자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상천국과 영원한 천국을 우리는 그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종교의 이념입니다.
하나의 남성을 표준해 가지고 그것을 교리화시켜서 그것을 중심핵으로 사모해 나온 대표적인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신부의 종교라고 보는 것입니다.
모든 역사는 여기에 귀결되는 것입니다. 이 하나의 중심핵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국가가 존재할 수 있는 가치 기준이 결정되는 것이요, 이 하나의 중심핵이 결정됨으로 말미암아 세계의 가치 기준이 결정되는 것이요, 이 하나가 결정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가치의 기준을 비로소 지상에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상에 한 기점을 삼을 수 있고, 그 중심적인 기준으로 인간을 표준화시킬 수 있게 될 때 비로소 천지는 바로 그 점에서 통일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통일된 그 자리에서 바라는 인생관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인생관과 통하는 것입니다. 또한 거기에서 바라는 가정관은 하나님이 바라는 가정관과 통하는 것이요, 거기에서 바라는 국가관과 세계관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국가관, 세계관과 통하는 것입니다. 일체가 상충이 아니라 일체가 통일된 자리에서 출발을 볼 수 있는 그 거점지가 바로 그 중심자리라는 것입니다. 그 자리가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교가 바라고 있는 오시는 주님은 어떠한 분이냐? 이런 세계적 사명을 대표적으로 지고 오시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을 찾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개인적으로 완성할 수 있는 하나의 표준을 갖출 수 있는 것이요, 가정적인 표준을 찾을 수 있는 것이요, 또한 종족의 표준, 민족의 표준, 국가의 표준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승리하면 하나님의 역사적 수고가 드러나게 돼
사람은 일대(一代)에 있어서 전체를 다 소유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20대의 청소년들에게 `너,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면 `세계를 내 것 만들겠다'할 것입니다. 열 살만 넘으면 벌써 세계를 내 것 만들겠다는 그런 마음을 갖게 된다는 거예요. 국민학교 다니는 학생들에게도 `너, 이다음에 커서 무엇이 될래?' 하고 물으면 `대통령 되지요' 이런다는 거예요. `무슨 대통령?' 하면 `세계 대통령' 이러는 것입니다. 다 그렇게 말한다는 거예요. 그것은 생각할 줄 아는 때에서부터 일생을 마치고 죽을 때까지 바라는 소원입니다. 그것은 개개인이 전부 다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지 이 땅 위에 수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지만 그 사람들이 전부 그러한 소원을 가졌던 것입니다. 오늘날 이 땅 위에 30억 인류가 살고 있지만 30억이 전부 다 그러한 소원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소원이 무엇이냐 할 때, 세계를 내 것 만들겠다고 하는 것으로 귀결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렇게 소원하는 것을 한 번도, 단 한 번도 성취하지 못하고 간다면 그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만일 절대적인 하나님이 계시다면…. 과거도 그렇고 현재도 그렇고 미래도 그러한 인간의 소원 그 욕망은 언제까지든지 남아질 것이어늘, 그 욕망이 한 번도 성사되지 않는다면, 그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절대자가 있다면 인간이 그렇게 바라는 욕망이 이루어질 때가 한번 올 것입니다. 그때가 어떤 때냐? 이 지상의 천국과 천상의 천국이 갈라져 가지고 나타나는 때가 아니라, 자체내에서 화(和)한 천국으로 나타나게 될 때입니다. 그렇게 화한 천국권내에 사는 개인은 개인이로되 세계를 대표할 수 있는 개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는 아무리 낮은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낮은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자리에만 서 있으면 높은 자리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돌아가는 하나의 원형과 마찬가지입니다. 낮다고 낮은 것이 아니예요. 낮은 것은 높은 것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낮으면 낮을수록 그 상대되는 것은 높은 것입니다.
`나'라는 것이 `나' 자체를 위하지 않고 상대를 위했다고 할 때 비로소 공동적인 관계성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관계성을 갖고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협조적이고 통일적인 내용을 중심삼고 결속되는 데서만이 그 가치를 주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 서면 홀로 있지만 홀로의 가치가 아니라 상대적 가치를 가한 가치의 자리에 섰기 때문에 전체로 보게 되면 이중적 가치를 겸한 자리에 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느끼는 행복은 자기 개인만의 행복이 아니라 이중적 세계를 대표한 행복을 주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의 가치를 찾은 기준이 아직까지 인간 세상에서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세우기 위해 하나님은 역사시대로부터 섭리하시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중간 입장에 누가 있어야 되느냐? 우리 통일원리에서 가르쳐 주고 있듯이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인간이 있어야 됩니다. 본성의 인간이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종교가 주장하는 재림사상은 무엇이냐? 그게 다 뭐냐? 본성의 인간을 추구하고자 하는 소원을 이루는 데 불가피한 것입니다. 인간이 본성의 인간을 추구하는 자리에 서게 된 것이 타락입니다. 타락이 없었다면 인간은 본래 본성의 인간으로 출발했을 것인데, 타락이 있었기 때문에, 본성의 기준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다시 그것을 추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복귀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다시 회복해야 된다는거예요.
그러한 운명을 피할 수 없는 역사시대에 처해 있는 인간들이기 때문에, 인간은 신음의 도를 가해 가면서…. 옛날에는 개인적인 신음의 도에서 개인적으로 신음하는 것으로 끝났지만, 이제는 그 범위가 넓어져 가지고 가정이, 종족이, 민족이, 국가가, 세계가 신음하는 최고의 정상까지 도달 했습니다. 여기에서 신음의 도를 탈피하여 본래의 무한한 개인의 가치를, 이 세계의 그 어떤 가치보다도 더 높이 평가할 수 있는 그 자리를 찾아 들어가야 됩니다. 거기에서 주장하는 통일관은 세계 전체의 끝에 가 가지고 주장하는 통일관의 가치와 대등한 것입니다. 도리어 이것이 받을 수 있는 입장에서 보면 더 넓다는 거예요.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높은 곳 끝에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한 자리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넓어지는 것입니다. 낮다고 해서 낮은 것이 아닙니다. 전체를 받아들일 수 있고, 전체를 소화시킬 수 있는 중심적인 자리라면 그 자리는 복된 자리인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을 비교해 보게 될 때, 부모는 복된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고생스럽지만, 자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고생스럽지만, 낮은 자리에서 희생을 하지만, 그 아들딸 가운데 한 사람만 높아지면 그 부모는 언제든 그 높아진 전체의 가치를 차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들 가운데 하나만 훌륭해지면, 훌륭한 아들이 하나만 있으면, 아들이 열 명 혹은 스무 명, 서른 명, 몇백 명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몇백의 자녀들을 위해 수고한 부모는 그 가운데 하나만 훌륭해지면 그 훌륭한 아들과 상대적 기준을 가지고 낮은 자리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대등적인 가치 이상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지금까지 인류를 대신하여 수고하시는 거예요.
역사과정에서 수많은 희생을 치러 나왔지만, 그 섭리역사노정에서 한 사람만 잘나면, 한 사람만 승리하는 날에는 그 한 사람의 승리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자고로 수고하였던 모든 수고의 가치는 전부 다 드러나는 것입니다. 수고를 했으면 했을수록 그 가치가 감소되는 것이 아니라,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전체의 가치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수고를 했으면 했을수록 그 가치가 더 빛나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하나님은 지금까지 한 아들을 찾아 나온 것입니다. 그 아들은 어떤 국가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이요, 이 세계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국가가 그 아들을 위해 있고 세계가 그 아들을 위해 있는 것이지, 아들이 먼저 국가와 세계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예요. 가치로 볼 때에 그 아들 이상으로 가치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아들은 중심존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여기에서 `주관성 복귀'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주관성 복귀! 그러면 그 한 사람이 왜 오느냐? 무엇 때문에 오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왜 오느냐? 물론 하나님을 통하여…. 하나님이 창조주로서 인간을 지었던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러한 한 사람을 기필코 이 땅위에 탄생시켜야 되는 것입니다. 탄생시켜서 무엇을 할 것이냐? 그 한 사람하고만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다리로 해서, 그 사람을 기점으로 해서 사방으로 관계맺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비로소 사방으로 뻗쳐지는 거예요. 이 자리에 오기 전에 뻗쳐졌다가는 사고라는 겁니다. 끝까지, 끝까지, 끝 중에서 최고의 끝은 여기라구요, 끝까지 참는자는 구원얻는 것입니다. (판서하신 것을 가리키며 설명하심)
재림주가 갖추어야 할 조건
자, 그러면 여러분들이…. 끝날에 그러한 기준이 나타나게 되면 기독교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내가 나라를 갖고 있으니 그 나라를 그냥 그대로 갖다 붙이지' 이러면 안 됩니다. 나라는 어떻게 생기는 것이냐? 나라는 한꺼번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개인개인을 통해서 나라가 나오는 것입니다. 종족을 그냥 그대로 끌어다 붙여 가지고도 안 되는 것입니다.
종족도 역시 개인개인을 통해서 형성되는 것입니다. 개인을 끌어다 붙이는 데도 함부로 끌어다 붙이는 것이 아닙니다. 나라를 절대시하고 자기 나라라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부모를 대해서 어떤 사람이, 자기의 어머니 아버지가 틀림없는데도 불구하고 어떤 제삼자가 나타나서 `야야 그들은 너의 어머니 아버지가 아니다'라고 아무리 설명해 보았자 그걸 부정시킬 도리는 없는 것입니다. 뭐 돈을 주어서나 권력을 가지고 부정시키려 해도 부정시킬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절대적이라구요. 그와 마찬가지로, 앞으로 세계의 종말시대에 오시는 그 한 분은 어떠한 분이냐? 하나님을 대해 가지고 좋은 명사를 들어서 주장한다면 최고의 명사로 주장할 수 있는 대표자입니다. 만일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면 아버지라고 하는 그것은 그 무엇으로도 부정시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역사상 아무리 많은 성인현철들이 있었다 하더라도 아무리 드높이 설명을 한다 하더라도 그 사실은 부정시킬 수 없습니다. 아무리 교활한 사탄이라 할지라도, 어떠한 수단 방법으로도 그것을 부정시킬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절대적인 공인을 제시할 수 있는 내용이 그 아들에게는 있어야 합니다.
먼저 무슨 관? 아버지에 대한 관. `저 분이 내 아버지라는 신념에 꺼릴 무엇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틀림없이 저 분의 아들이다' 이럴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만 그럴 것이 아니라, 그 아버지도 `너는 틀림없이 내아들이다'라고 할 수 있는, 부정할 수 있는 요건이 절대적으로 없어야 합니다. 부정시킬 수 있는 요건이 없어야 합니다. 절대적인 자리라야 하는 거예요. 아는 데 있어서 절대적이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건 이럴까 저럴까 하지 않는다구요. 누가 속이려고 아무런 가식된 조건을 제시해서 설명해도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구요. 천년 만년 앉혀 놓고 교육을 해도 통하지 않는다구요. 아버지에 대한 그런 절대적인 관이 설정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아들은 그래야 된다는 것입니다.
모가지를 자르더라도, 모가지를 자르면 그의 손과 발 세포까지도 그는 내 아버지라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주체적인 내용을 가진 절대적인 자리에서 아버지를 절대적으로 공인할 수 있는 아들이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또, 아버지도 그 아들을 대해서 `세상이 뭐라고 해도 부정할 수 없다! 없다! 없다! 부정이 있을 수 없는, 본래부터 그런 것이다' 이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수 있는 결정적인 내용을 가진 아들이 나타난다면 문제는 달라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를 믿고 있는 기독교 신자들에게 예수를 얼마만큼 믿느냐, 신랑으로 진짜 믿느냐 하면, `믿지요' 이럽니다. `얼마만큼?' 이러면 `그거 얼마만큼이냐고 물을 게 뭐 있소? 그저 믿지요' 이럽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절대적인 자리에서 믿어야 돼요. 생명을 다하고…. 성경에도 그렇잖아요?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첫째 가는 계명이다' 이런 말씀이 있잖아요? 하나님만 사랑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아들을 사랑해야 됩니다. 아들을 사랑하라는 것이 둘째 가는 계명입니다. 그 다음에는 상대를 사랑해야 됩니다. 이것이 세째 되는 계명입니다. 이렇게 나가는 거예요. 그러면 네째 계명은 무엇이냐? 종족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다섯째 계명은 무엇이냐? 나라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섯째 계명은 세계를 사랑하는 것이요, 일곱째 계명은 천주를 사랑하는 것이요, 여덟째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돌아가는 거라구요. 이것은 절대적입니다. 거기에 무슨 요사스러운 것이 와 가지고 반대한다고 해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계에서는 절대적인 신앙을 무조건 강조하는 것입니다. 거 의리가 있다구요. 죽어도 믿고 살아도 믿는 것입니다. 내용은 모르지만 성경에 신랑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신랑으로 믿는 것입니다. 믿다 죽는 거예요. 그런 것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아들이라면 이 아들은 아버지에 대한 절대적인 인식을 갖고 오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관념을 갖고 오는 것입니다. 역사상의 훌륭한 그 누가 아무리 이렇고 저렇고 해도 거기에 따라 움직이는 생각을 가진 분이 아닙니다. 절대적인 생각을 가진, 그러한 아들로 오는 것입니다.
절대적 신념을 가진 신부를 찾아오시는 재림주
그러면 그 아들이 오는 데는 무엇 때문에 오느냐? 상대를 찾아오는 것입니다. 신부를 찾아오는 거예요. 신부를 찾아오는 데 있어 어떠한 관념을 갖고 있느냐? 절대적인 신부를 찾아오는 것입니다. 뭐, 몇 면 동안 믿다 말고 자기 주장을 내세워 가지고 `아, 당신이 뭐야? 내 마음대로…' 이런 신부가 아닙니다. 상대적 입장에서 주체가 필요로 하는, 상대적 기준을 중심삼고 주체와 절대적으로 하나될 수 있는 입장에 선 신부를 찾아오는 것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절대적인 인식을 가지고 오시는 주님은 무엇 때문에 오시느냐? 신부를 찾아오시는 거예요. 어떠한 신부를 찾아 오시느냐? 이럭저럭 그저 수단과 방법을 가려서 적당히 하는 신부가 아닙니다. 그런 신부는 얼마든지 있다구요. 절대적인 신부를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한번 약속했으면 죽음길이라도 가는 신부. 일구이언하는 신부가 아니라구요. 결심한 마음을 중심삼고 행동하는 데 있어서는 엇갈림이 없는, 단 한 길밖에 모르는 신부를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신랑으로 와 가지고 그러한 신부를 찾아야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있고, 그 다음에 신부가 있는 것입니다. (판서하시면서 설명하심) 이 부자의 정(情)은 끊을 수 없습니다.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아버지와 아들의 신부와는 어떠냐? 끊을 수 있느냐? 끊을 수 없습니다. 아버지와 이 신부와의 관계도 끊을 수 없습니다. 뭐 이건 물론이고…. 절대적입니다. 아버지도 그 아들을 알고 아들의 상대를 알아주는 절대적 자리라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자리라는 거예요. 절대시 하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절대권의 통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습니다. 침범할 것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기준이 있어야 될 것 아니예요?
에덴 동산의 아담 해와를 보더라도 하나님을 대해서 어떻게 했습니까? 사탄이 와서 `야, 하나님이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다 따먹지 말라 하시더냐?' 하고 속삭속삭하니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시더라' 하니, 사탄이 다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한 것은 너희들이 그것을 따먹으면 눈이 밝아지기 때문이다' 하고 속닥속닥할 때 해와가 귀가 솔깃해 가지고 `아, 그래요?'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구요. 그럴 가망성이 있는 기준을 가지고는 안 된다구요. 그럴 때 해와가 `뭐야? 네이놈' 하고 호령을 했어야 합니다. 용서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반발, 언제나 반발할 수 있는, 그릇된 것에는 언제나 반발할 수 있는 그런 주체적인 입장에 서야 할 아담 해와였는데도 불구하고 속닥속닥했다는 거예요. 이게 문제를 다 일으킨 거라구요.
여러분, 통일교회 신앙은 어떤 신앙이냐? 통일교회도 마찬가지라구요. 누가 `너, 통일교회 교인이지?' 할 때 `그래, 통일교회 교인이다' 하고, `그래 그래 뭐 통일교회에 가면 이런 요사스러운 말이 많고, 벌거벗고 춤추고, 뭐 어떻고 어떻고 한다는데 그래도 통일교회 믿을래?' 하며 아무리 설명을 해도, 뭐 그런 요사스러운 말들은 염두에 들어오지도 않아야 되는 거라구요. 나쁜 것은 하나도 없고 그저 좋기만 하고…. 절대적이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로만 뭉쳐져 있다면 큰 문제가 벌어질 것입니다. 여기 이는 사람들만 그렇게 되어도 큰 문제가 벌어질 거예요.
여러분, 생각해 보라구요. 골통을 한번 쓱 크게 확대시켜 가지고, 대한민국만큼 늘여 가지고 바라보세요. 여러분의 마음이 얼마나 부사스러운가를…. 왔다갔다 왔다갔다, 얼마나 바빠요? 누가 뭐 어떻고, 뭐 누가 어떻고…. 생각해 보라구요. 내가 어디에 서 있어? 그렇게 생각해 보라구요. 거미줄 같은 데 포위된 기분이 나는데 거기서 그저 쉴 새 없이 왔다갔다 한다는 거예요. `내 자리가 어디야?' 할 때는 마찬가지라구요. 여러분의 자리가 어디예요? 절대적인 자리를 갖고 있어요? 누가 한번 밀치면서 `통일교회 믿겠어?' 하며 협박공갈하면 `윽-' 하고 나가자빠져 가지고 `뭐 내가 믿으려고 해서 믿은 것이 아니라 그럭저럭해서 믿게 되었지요' 이래서는 안 된다는 거라구요. 절대적인 신념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사이는 끊을 수 없습니다. 끊을 수 있어요? 끊을 수가 있어요 돼요, 없어야 돼요? 「없어야 됩니다」 또 아들과 그 아내와의 사이를 끊을 수 있어요? 또 아버지와 며느리의 사이가 끊기는 날에는 망합니다. 집안이 깨져 나간다구요. 하나만 끊기는 날에는 깨져 나가는 거라구요. 그렇게 되면 절대적인 승리권은 천지에 있을 수 없게 됩니다. 그 중 하나가 깨지면 다 깨져 나간다는 것입니다. 아들이 천만 명 되어도 깨져 나가고, 며느리가 천만 명 되어도 깨져 나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주님이 이 땅 위에 하나의 신부를 찾아온다 할 때 거 안심스럽겠어요, 불안스럽겠어요? 어떨 것 같소? 어디, 여자들 이야기해 보라구요. 안심스러겠어요, 불안스럽겠어요? 어드래요. 거, 여자들 한번 대답해 보라구요. `안심스럽소' 이럴 자신 있어요? 얼마나 조심스럽고 얼마나 불안하겠어요? 신부가 되겠다는 사람은 많은데 신부감은 없다는 것입니다. 거 무슨 말인지 알지요? 신부감이 없다 이거예요. 아, 이러한 아들이 오는데, 그 아들에게 이러한 신부가 있어야 할 텐데, 그런 신부가 없다는 거예요. 종자도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신랑이 오기는 와야 할 텐데 올 길을 연장시켜야 되겠어요, 와야 되겠어요? 왔다가 틀려지는 날에는 천지가 왕창 깨져 나가는 거예요, 왕창.
아들을 보낼래야 보낼 수 없는 아버지가 계시다면, 그 아버지가 얼마나 딱할 것이냐? 또 와야 하는데 오지 못하는 신랑이 있으면 그 신랑이 얼마나 딱할 것이냐? 그거 생각해 보세요.
누가 주님의 신부인가
또는 신부들…. 여러분 그거 생각해 봐요. 기독교인들은 서로 신부 되겠다고 합니다. 할머니도 신부, 아주머니도 신부, 처녀도 신부…. 세계적으로 보면 신부가 되겠다는 패들이 자그마치 네 가지라구요. 자기 멋대로 결혼해서 살던 패, 그 다음에 과부된 패, 과부도 있다구요. 그 다음에는 과부도 뭐도 되어 보지 못한 얼치기 신부 패, 시집도 못 가 본패가 있다구요. 그렇잖아요? 거리의 여인도 많다구요. 얼치기 신부 패, 그다음에는 처녀 신부 패가 있습니다. 신부 패도 4위기대라구요. (웃음) 우스운 이야기가 아니예요. 심각한 이야기입니다.
자, 그러면 오시는 신랑이 어디로 찾아가고 싶겠습니까? 여기, 남자들 생각해 봐요. 어디로 찾아가고 싶겠어요? 「처녀 신부요」 저, 욕심…. (웃음) 물어보나마나지요. 지금 세상에서 처녀 골라잡을 수 있어요? `처녀냐, 아니냐?' 하고 물었을 때, 아니라고 솔직히 대답할 여자가 있겠느냐? 생각해 보면 이거 큰일이라구요. 기가 막힌 놀음이라구요.
그러면 대번에 처녀를 찾아갈 수 있겠느냐? 보라구요. 신랑 될 수 있는 사람은 나이가 제일 많아야 됩니다. 그래야 될 거 아니예요? 하나님이 나이가 제일 많으니 그분의 첫번 사랑을 받고 나타나는 아들의 나이가 많겠어요, 적겠어요? 「많습니다」 나이가 많다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내가 아브라함보다도 앞서 났다'라고 할 수 있었던 거라구요. 하나님이 제일 나이 많은 분이시니, 그분 앞에 첫번 사랑을 받고 오는 사람이 제일 나이가 많다구요. 그렇잖아요? 하나님을 중심삼고 제일 나이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오시는 신랑은 공평한 분이어야 합니다. 오시는 신랑이 공평해야 되겠어요, 공평하지 않아야 되겠어요? 우리 남자들, 공평해야 되겠어요, 공평하지 않아야 되겠어요? 「공평해야 됩니다」 만일 신랑이 대번에 처녀 신부한테로 가게 된다면, 할머니 신부 패, 아주머니 신부 패, 얼치기 신부 패가 `어서 가소, 어서 가소' 그러겠어요? 그러겠어요, 안 그러겠어요? 어디, 여자들, 그러겠어요?
기독교를 가만히 보면 큰일났다는 거라구요. 전부가 신부라네요. 죽을 자리에서 신음하는, 목숨이 경각에 있는 사람도 `신랑 되시는 주님' 또 소녀들도, 뭐 15세 미만의 아가씨들도 `신랑 되시는 주님' 이런다구요. 생각해 봐요. 이거 큰 문제라구요. 그러니 예수님을 중심삼고 볼 때, 예수님의 신부가 얼마나 많아요? 이 세상 인간들은 전부 다 자신이 신부인줄 알고 있어요. 남자가 신부 되는 법이 어디 있어요? (웃음) 남자가 신부 되는 법 있어요? 없다는 거예요. 예수 믿는 사람들을 가만히 보면 딱 할 것 같아요. 남자도 신부 된다고 하고 여자도 신부 된다고 하고…. 그 남자 신부하고 여자 신부하고 같은 거예요? 무슨 전후가 있든가 안팎이 있든가 해야 할 텐데, 두루뭉수리 그저 덮어놓고 신부예요? 그저 덮어놓고 믿는구만요. 안방에 들어간다면, 남자가 안방에 들어가야 돼요, 여자가 들어가야 돼요? 남자가 사랑방 신부고 여자는 안방 신부냐, 아니면 남자가 안방 신부고 여자는 사랑방 신부냐? 뭐가 있을 것 아녜요? 지금까지 그저 두루뭉수리하게…. 뭐 이렇게 믿기가 제일 편하지요. 통일교회 문선생처럼 이렇게 해 가지고 하려니 이단이니 무엇이니 하는 소문도 나고 욕도 먹고 하지만 말예요. 모르고 그렇게 믿는 것이 제일 간단한 거라구요. 생각해 보라구요.
신랑 되시는 분은 공평해야 됩니다. 그럴 게 아니예요. 만국을 대신해서 혹은 지금까지 역사과정에서 자기를 위하여 희생해 나왔던 신부, 자기 때문에 수고하고 자기 때문에 일생을 바치면서 신부가 되겠다는 사람이 많게 될 때는 그들 앞에 공평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대번에 처녀의 신랑이라고 할 수 있어요? 할머니부터 소개받아야 된다구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신부 중에서 제일 나이 많은 신부, 백 살 이상 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부터 소개받아야 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우리 신랑님은 나에게 와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다른 신부를 소개해 줘야 됩니다.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나이 많은 할머니부터 통해 가지고 아주머니를 통하고, 과부를 통하고, 아주머니 같은 얼치기 패를 통해 가지고 처녀한테로 가야 되는 것입니다. 우스운 얘기가 아닙니다. 그러지 않으면 데모가 벌어진다는 거예요. `이놈의 사기꾼! 신랑이란 녀석이 사기꾼 아니냐?' 이런 놀음이 벌어진다는 거예요.
또, 남자도 그렇습니다, 남자도. 만약에 할머니한테 신랑 되는 분이 왔다고 하게 되면, 그 할아버지의 기분이 좋겠어요, 나쁘겠어요? 할머니 할아버지가 함께 살고 있는데, 신랑이라는 분이 와 가지고 소개하겠다고 하면, 그 할아버지의 기분이 좋겠어요, 나쁘겠어요? 「나쁩니다」 만약에 그 가정에 싸움이 벌어지면 신랑이 붙어 있겠어요, 안 붙어 있겠어요? 신랑이 붙어 있을 수 있겠어요? 어디 여기 박장로 전도관에서 온 목사, 어드래? 붙어 있겠어, 안 붙어 있겠어? 「달아납니다」 달아나요? (웃으심) 달아나게 마련이라구. 문제가 큽니다. 그러면 할아버지니까 그렇지, 그 다음에 아저씨한테 떡 갔을 때, 아주머니가 내가 당신보다 더 사랑하는 신랑 되시는 분이라고 하며 소개하고 나서게 될 때, 그 아저씨의 기분이 좋겠어요, 나쁘겠어요? 저기 문관장, 기분 좋겠어? 「나쁘겠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나? 어떻게 하겠어? 기분 나쁘면 어떻게 하겠나? `거 가소' 이러며 오는 병아리 쫓듯 할 수 있겠어요? 기분 나쁘면 어떻게 하겠어요? 주먹이 들락날락하겠지요? (웃음) 젊은 녀석일수록, 혈기가 등등 할수록 사고가 벌어지는 거예요. 사고 판국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또 거리의 여인들을 소개받았다고 합시다. 거리의 여인이라고 해서 주인이 없나요? 생각해 보라구요. 그런 놀음이 벌어질 것입니다.
남자가 신부라면 어떻겠어요? 남자 신부가 되겠다고 하는 목사 양반들, 저 교직자들이 말이예요. 주님도 남자이고 자기도 남자인데, 신랑 되신 주님이라고 해서 색시가 신랑 대하듯이 예수 앞에 `아이구, 그리우신 님이시여' 그러겠어요? 그러겠어요, 안 그러겠어요? 생각해 보세요. 어떻게 할 것 같아요. 주님이라고 그러겠어요, 당신이라고 그러겠어요? 뭐라고 하겠어요? 거기도 주님이예요? 뭐라고 해요? 당신이라고 해요? 남자들이 주님에게 `사랑하는 그대여!' 하면 주님이 `허허, 내가 본래부터 듣고 싶었던 말을 왜 지금에야 하는고?' 이러겠어요? 어디 남자들 `사랑하는 그대여!' 이렇게 한번 해보라구요. 여자 입장에서 한번 해보라구요, 기분에 맞나. (웃음) 웃을 일이 아니라구요.
또 나이가 80이 되어, 아이들이 길을 가다 만나도 `아이구, 저 할아버지 보기 싫어' 이러면서 도망갈 정도로 늙은이 할아버지가 있다고 할 때, 당장 죽게 돼 있고 옆에만 가도 늙은 냄새가 무럭무럭 나는 그런 할아버지가 있다고 할 때, 오시는 신랑이야 뭐 새파란…. 주님이 오신다면 몇 살쯤 되어서 오실까요? 예수님이 오신다면 몇 살쯤 되어 가지고 오실까요, 몇살쯤? 「서른 세 살요」 (웃음) 서른 세 살, (웃으심) 서른 세 살쯤 돼서 오신다면 이 신랑 신부 참 잘 어울리겠구만. 구십, 백 살 난 할아버지, 수염이 이렇게 나고, 눈도 이래 가지고 눈을 뜨자마자 눈꼽이 뚝뚝 떨어지는 (행동으로 표현하심. 웃음) 말하는 것만 봐도 정떨어지는 그런 할아버지가 `하하, 사랑하는 신랑님이여' 이러면 어울리겠어요? 생각해 보라구요. 그거 어울리겠나 말이예요.
덮어놓고…. 그저 덮어놓고 믿는 것이 좋기는 좋지요. 그렇지만 바른 것을 덮어놓고 믿어야 맞지, 맞는 것을 덮어놓고 믿어야 맞지, 맞지도 않는 것을 덮어놓고 믿는다면 거 맞아요? 머슴의 딸이, 그 딸 중에도 미인이라면 또 몰라요, 절름발이요 곰배팔이가 되어 가지고 `우리 주인의 아들은 사랑하는 내 신랑이지요' 이렇게 선전을 암만 해보라구요. (웃음) 어림도 없다구요. 생각해 보세요. 그러한 판국이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인 것입니다.
그런데 남자도 신부가 되겠다고 하고, 여자도 신부가 되겠다고 하니 그래 오시는 주님 앞에 어울리는 패가 남자 패예요, 여자 패예요? 어디, 여러분들 대답해 봐요. 신부 되겠다고 하는 패들 가운데 남자 패도 있고 여자 패도 있는데, 그래 어울리는 패가 남자 패예요, 여자 패예요? 「여자 패요」 (웃으심) 여자 패요? 여자 패지요. 그러면 남자 패는 뒤떨어져야 되겠어요, 앞에 서야 되겠어요? 싫어도 할 수 없이 뒤떨어져야 됩니다. 그래, 남자들 욕심에 뒤떨어질 만한 아량이 있어요? (웃음) 뒤떨어진다면 어떻게 되느냐? 신부가 어린양이기 때문에 신부들은 전부 다 신랑 되시는 예수님 앞으로 가고, 신부들 뒤에 누가 서야 되느냐? 누가 서야 돼요? 그 뒤에 남자들이 서야 된다구요. 남자들, 그거 기분 좋겠어요?
신랑 되시는 주님이 오게 된다면, 신랑 앞에는 여자가 어울리니까 여자들을 전부 다 앞에 내세우고 그 다음에 남자 신부들이 서야 되겠으니 할 수 없이 맨 뒤에 떡 서야 될 것이 아니냐는 거예요. 여편네는 주님 앞에 서고 자기는 맨 뒤에 서면 기분이 좋겠어요, 나쁘겠어요? 어디 목사님, 기분이 좋겠어, 나쁘겠어? 대답해 봐요. 「좋은 일이지요」 그거 좋은 일이라는 말을 갖다 붙일 게 뭐야. 기분 나쁘지. 좋다는 말을 갖다 붙일 수 있어? (웃음) 그렇다는 거라구요. 이거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주님의 신부로 선택될 사람
자, 할머니가 있고, 어머니가 있고, 여편네가 있고, 딸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할머니, 어머니, 여편네, 딸이, 즉 네 부류의 여인들이 전부 주님 앞에 떡 가서 `아! 그대를 그리워했습니다' 하면서 야단한다면…. 그거 가만히 생각하면 자기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거든요. 거 기분이 좋겠어요, 나쁘겠어요? 그러면서 그들이 `아이구 신랑님, 우리 집에 아무개 아버지가 있습니다. 여기에 동참시켜 주십시오' 그러게 돼 있어요? 거 와서 동참하면 거치적거리겠어요, 좋겠어요? 어디 저기 나이 제일 많은 목사님 이야기해 봐요. 머리가 제일 흰데, 왜 그렇게 희었소? (웃음) 새까만 가운데 얼른 눈에 띄니까 물을 수밖에 없잖아요. (웃음) 어떻겠어? 신랑 신부가 가만히 생각할 때, 그 가운데 도토리 같은 것이 붙어 다니면 기분이 좋겠어, 나쁘겠어? (웃음) 「기분 나쁩니다」기분 나빠? 정말 그렇소? 문제가 크다는 거라구요, 문제가.
자, 그러면 그 사람이 기분 나빠 가지고 `할머니, 어머니, 여편네, 딸을 시집 보내게 되었으니 나는 그 밑창에 가 서야지…' 이럴 수 있겠어요? 그러면 맨 끄트머리에다가 세울 것입니다. 그럴 것 아녜요. `찬양할지어다! 거룩 거룩 또 거룩 찬송합니다' 이러면 모르지만 기분 나쁜 표색을 했다가는 국물도 없을 터이니, 맨 꼴찌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땐 어떻게 하겠어요? 이런 이야기를 하려면 한이 없습니다. 이런 걸 생각하면 예수님을 신랑으로 믿는 것이 무섭다는 거라구요. 무섭다는 거예요.
만일에 남자가, 할머니가 있고 어머니가 있고 여편네가 있고 딸이 있는데 다 집어치우고 내가 신부가 되겠다 하게 되면 또 그 등살에 못 견딜 것입니다. 덮어놓고 믿어요? 그것은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절대적 신앙을 해야 되는데, 신부는 신랑을 악착같이 사랑해야 돼요, 안 해야 돼요? 「해야 됩니다」 할머니들도 해야 됩니다. 악착같이 사랑하는 데 있어서, 앞에서 말한 네 부류의 여자들이 서로가 양보하지 않으려고 하면 싸우겠어요, 안 싸우겠어요? 「싸웁니다」 싸운다구요. 그래서, 신부 될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서 추리느냐? 서로 악착같이 싸워서 이기겠다고 하는 사람 가운데에서는 못 추리게 되어 있습니다. 싸우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어서 신부가 되소'하는 사람 가운데에서밖에는 신부를 추릴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믿고 천당 가겠다고 하는 사람…. 영계에 가 보면 세상에서 훌륭하다고 했던 목사들이 전부 다 좋은 곳에 가지 못했습니다. `내 천국! 주님은 내 신랑이요, 나는 일등 신부지. 천하에 자랑하지' 이런 사람은 전부 다 천국이 거부하는 것입니다. 천국에 못 가는 거예요. 그래, 자기만 제일인가? 초대 교회시대에 목베인 사람들이 더 낫지. 그러한 가치의 내용을 가지고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라구요. `나는 죽어 거름이 되고 만민은 나로 말미암아 행복의 깃발을 들고, 만국을 대신해 하나님을 찬양할지어다' 하는 사람이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나는 빚을 진사람이라구요. 그렇지요? `개인의 빚을 지고, 세계의 빚을 지고, 우리 조상의 빚을 지고 나온 사람이다. 조상의 빚도 가라지 못한 나이니 얼굴을 들 수 없다'고 하면서 생애를 거름삼아 가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신부로 추릴 수 없는 거라구요.
그러면 제일 고생 많이 한 사람을 추릴 때 마음과 결의와 성품이 다 좋은 사람들 가운데서는 어떤 사람을 추려 내느냐? 고생을 많이 하였으면서도 `저는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느끼는 사람을 추려 낸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추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반항해요? 아무리 욕심 많고 아무리 뭐라고 하는 사람이라도 그 길을 위하여 자기보다 고생을 더 많이 했고, 자기보다 피땀을 더 많이 흘렸고, 자기보다 희생을 더 많이 치렀다면, 그것이 백일하에 드러나 가지고 만민이 공인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될 때에는 그 사람을 밟고 올라설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 그 사람을 밟고 올라서게 될 때는, 신부고 뭣이고 모가지를 잘라 놓는다는 거라구요. 신랑이 그렇게 안 하더라도 동료들이 그렇게 하는 거예요.
이렇게 생각해 볼 때, 그러면 절대적인 신부는 어디에서 찾아지느냐? 절대적인 희망과 절대적인 욕망과 절대적인 행복과 절대적인 요구를 중심삼고 찾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반대적 기준을 통해서 찾아지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 서기 위해 비참한 자리에 들어가 가지고 희생하는 자리에서 찾아지는 거예요. 그 희생의 깊이가 만국을 대신하고 역사를 대신하게 될 때는, 자고이래로 역사과정에 없었던 그 이상의 희생을 자처하면서, 그 범위는 세계적이요 천주적인 범위의 내용을 가지고 희생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 손이 수고하다가 구부러지더라도 찬양의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요, 그 팔이 수고하다가 구부러져 곰배팔이 되더라도 찬양의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요, 그 다리가 수고하다가 병신이 되더라도 찬양의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요, 그 목이 수고하다가 찌그러지더라도 영광의 상징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가치의 내용이, 욕망과 반대되는 행적의 과정을 통한 가치기준이 결정되게 될 때, 그런 자리에 선 아가씨를 빼내면 어떻게 되겠어요? 할머니들이 가만히 있겠어요? 할머니들이 가만히 있겠어요, 싸우겠어요? 그 아가씨가 할머니보다 낫다 할 때 아니라고 할 수 있어요? 거 방해를 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수난과 역경을 극복한 무리를 통하여 하늘의 승패는 결정지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공식입니다.
절대적으로 믿었다는 기준이 성립되는 자리
그러면 영원토록 절대적으로 믿는다는 믿음의 내용은 무엇을 중심삼고 결정짓느냐? 죽고 사는 자리에서 결정짓는 것입니다. `그대로 가게 되면 죽는 것이요, 그대로 가지 않으면 사는 것이다. 살기 위해 가는 길은 배반하는 길이요, 죽기 위해 가는 길은 찾아가는 길이다'하는 이러한 자리에서 그 도수를 결정지어 나간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 스스로 높고자…. 높은 길을 찾아 나가면서 스스로 높다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높아도 하늘 다음입니다. 그러기에 하늘이 영광받기 전에는 내가 영광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원칙을 벗어나 가지고 주장하는 사람 몇백만 명을 태평양 가운데에 한꺼번에 처넣더라도 법에 걸리지 않는 거라구요. 그런 사람은 하늘 앞에 상급받는 자리에 절대로 못 나간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거 문관장 대답해 봐. 박장로 전도관에 다닐 때, 무엇 때문에 다녔나? 하나님 때문에 다녔나, 박장로 때문에 다녔나? 응? 무엇 때문에 다녔어? 문관장 때문에? 대답해 보라구.「주님을 맞기 위해서 다녔습니다」주님을 맞기 위해서?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다녔으면 그 일은 주님을 위해 한거라구. 내가 박장로가 나쁘다 좋다 평을 하는 것이 아니라구요. 주님을 위해서 한 일에 대해서는 말이예요. 길을 가는 데 있어서 여관집 주인이 나쁘면 어때요? 배고픈 사람에게 밥 먹게 해주었으면 됐지. 그렇잖아요? 그런데 박장로 전도관에 다니다가 나와 가지고 `뭐 이러구 저러구, 박장로가 뭐 어떻고' 하는 사람은 내가 싫어한다구요. 이놈의 자식아, 누구를 위해 일했어…. 자기가 스승으로 모시고 나가던 사람을 놓고 입을 열어 가지고 이렇고 저렇고 하는 녀석들은 입을 가로 째는 거라구요. 하늘이나 땅이나 그런 사람은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박장로는 통일교회 문선생을 대마귀라고 한다고 그러더구만. (웃음) 뭐 기성교회는 은혜 없는 사탄이고, 통일교회는 은혜 있는 사탄이라고 하더라구요. 은혜는 왜 또 거기다 갖다 붙였나? (웃음) 생각이 다르다는 거예요. 사실은 박장로가 형무소에 들어갔을 때 그를 빼내기 위하여 배후에서 조종한 사람이라구요. 박장로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구요.
한국의 신령한 단체로서 남아진 것은 나장로, 박장로, 통일교회 이 세패입니다. 그 가운데 한 패가 망해 들어간다고 해서 각계에서 `이놈의 자식아, 죽어라' 하면서 꼭대기를 눌러요? 그것은 하나님도 못 하는 놀음이라구요. 그런데 인간이 할 수 있느냐 이거예요.
자기가 한때나마 스승으로 모셨으면, 모시던 그 기준은 절대적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부정하면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사람은 상대할 사람이 못 된다는 결론이 나오는 거예요. 여기 박장로 패들, 알겠어?「예」기성교회 목사들이 지금 통일교회를 반대하지만 내가 여러분에게 그 목사들을 반대하라고 안 가르쳐요. 그들은 그들의 시대 시대에 정성을 들인 거라구요. 사다리를 올라가는 데 있어서 낮은 다리가 절대 필요한 거라구요. 국민학교를 나와야 되고, 중학교를 나와야 되고…. 그것 절대로 필요하지요? 그래 가지고 고등학교를 나와 대학교, 대학원을 가는 거라구요. 학박사 코스가 그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가 대학을 나왔다고 해서, 소학교 선생님이 자기보다 학식이 없다고 해서 `여보, 임자' 할 수 있어요? 그럴 수 있어요?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를 믿던 사람도 그렇다는 거라구요. 통일교회가 이렇고 저렇다고 하는 녀석들은 상대할 녀석들이 못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절대적인 사랑, 절대적인 신부가 있어야 하는데 절대적인 신랑은 어디에서 찾아질 것이냐? 오시는 주님이 호화찬란한 궁중에서 왕자의 모습으로 척 와 가지고 `여봐라, 내가 이렇게 거룩히 왔노라. 나는 신랑의 이름을 갖고 있노라' 이래서 되겠어요? 인간 세상의 누구보다도 고생을 많이 해야 된다구요. 어떠한 나라를 세우기 위해 노력한 애국자가 있다면 그 애국자가 왕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애국자 중의 애국자가 왕이 되는 것입니다. 죽지 않고 남아지면 왕이 되는 거예요. 그렇지요? 그 나라의 왕이 제일 호화찬란하게 잘살던 사람이예요? 나라를 세우는 데 있어서 남의 눈치를 살살 보아 가면서 중상 모략이나 해 가지고, 남을 때려잡고, 자신의 출세만을 꿈꾸며 살랑살랑 작전 써 가지고 올라온 사람이예요? 아니라는 거예요.
죽을 고비가 있으면 그 죽을 길을, 모진 풍파를 막기 위해서 홀로 방패를 들고 생명을 놓고 투쟁한 투사가 왕이 되는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그 일신에 상처를 많이 입고 애국애족하는 데 있어서 누구보다도 마음의 십자가를 많이 지고, 십자가를 피해 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맞아 국민이 져야 할 십자가까지 자기가 지고, 국민의 피해를 막기 위하여 선두에 서서 달려가는 사람이 있다면, 건국 후에 그가 왕위에 오르는 것은 자동적인 이치가 아니냐. 그렇지요?
마찬가지라구요. 기독교를 중심삼고 볼 때도, 세계 기독교 가운데서 권력을 자랑하고 자기 일신의 행락을 위해 행복의 길을 더듬어 가는 교역자들은 절대 신부가 못 됩니다. 그런 사람은 신랑 앞에서 밀려나는 거예요.
통일교인들은 누구보다 고생할 각오를 하라
오늘날 기독교가 공산당에게 침해를 받는 마당에, 맨 먼저 화살을 맞는 한이 있더라도 이 악당의 무리를 세계 도상에서 몰아내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깃발을 들고 선두에 나설 수 있는 투사의 행각을 자기의 생애노정으로 알고 가야 되겠다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 되지 않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교단이 있습니까? 없다구요.
그런 의미에서는 우리 통일교회가 선두에 섰다구요. 알겠어요?「예」그러면 이 선두에 선 패들을 편안히 쉬게 할 것이냐? 내가 지긋지긋하게 고생시키려고 생각한다구요. 고생시키려고 아예 작정을 했다구요. 누구를 위해서? 통일교회 문선생을 위해서 고생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먼저는 하나님을 위해서,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고생하는 겁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고생한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냐? 세계를 구하는 것입니다.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 주님도 오시는 것입니다. 세계를 위해서 가정도 필요한 것이요, 세계를 위해서 교회도 필요한 것입니다. 나라가 먼저가 아니예요. 세계를 위해서 여러분을 맨 구렁텅이로 쓸어넣어야 되겠습니다. 이거 기분 좋은 말이예요, 기분 나쁜 말이예요? 대답해 봐요. 기분 좋아요, 나빠요?「좋습니다」뭐가 기분이 좋아요, 기분 나쁘지. 그 말 자체는 기분 나쁜 말이지만 내용적으로 생각할 때는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그 말 자체는 기분 나쁜 거라구요. 어떤 아주머니가 옷을 잘입고 쓱 교회에 출석을 했는데, `아주머니 상통을 보니 고생을 지긋지긋하게 해야 복을 받겠구만' 하면, 기분이 좋겠어요, 나쁘겠어요? 그거, 원칙적인 말이라구요. `고생을 지긋지긋하게 하면 지긋지긋한 복을 받겠구만' 하고 쓱 한마디 한다면 우선 기분이 좋겠어요, 나쁘겠어요?「좋겠습니다」좋아요? 보통 `아, 거 기분 좋을 게 뭐요? 지긋지긋하게 고생한다는 말은 빼지' 그러지요? `난 지긋지긋하게 고생해야 지긋지긋한 복을 받는 것은 싫어. 나는 싫어' 이러는 사람은 지긋지긋한 복을 못 받는 것입니다. 아무리 꿈을 잘 꾸었다 하더라도 복을 못 받아요. 그러니 지긋지긋하게 고생해야 복받는다는 말이 잘된 말이예요, 잘못된 말이예요?「잘된 말입니다」잘된 말이라구요.
통일교인들 상통을 보면 뭐 잘생기지도 못했다구요. 못생겼어요. 이들을 `지긋지긋' 을 한 천년 계속하고, 고생도 `고고고…' 하고 `생생생…'을 한 만년 계속할 정도로 죽도록 고생을 시켜야 되겠습니다. 잘생기고 잘입은 아주머니도 그렇게 고생해야 한다면…. 못생긴 사람들이야 뭐 그 몇백 배몇천 배 고생시켜야 될 것 아니냐 이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에게 지긋지긋한 고생을 시켜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고생시켜 가지고 척 박아 가지고 망하게 해야 되겠다고 하면 전부다 `나는 싫어'하고 나가자빠질 것입니다. 그렇지만 반대로 지긋지긋한 행복이 터져 나온다고 하면, 다 떨어지더라도 그래도 그 가운데서 한두 녀석은 떨어지지 않고 남을 거라구요. 그렇지요? 한두 명은 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녀석이 누구냐? 남자 가운데 그런 남자가 누구냐? 여자 가운데 그런 여자가 누구냐?' 하고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내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통일교회 교인들에게 축복을 떡 해주었는데, 몇 해쯤 되니까 `남들은 다 잘사는 세상이다. 우리도 이만큼 고생했으면 이제는 남과 같이 잘살아야 되지. 고생만 하다가 20대에서 벌써 40대가 되었는데, 좋은 때도 못 보고 일생을 다 지나가 버리면 안 되겠다. 그러니 미리부터 좀 해보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안 됩니다. 뭐 쟁개비(남비) 짜박지, 무슨 뭐 장롱 짜박지, 옷 짜박지, 한 방 두 방 해 놓고 살겠다고 해요? 그래서 에이 이 멍청이, 쾅 왕창 밟아 버린 거라구요. 여편네고 남편이고 없다, 전부 다 보따리 싸메고, 여편네는 동으로, 남편은 서로, 자식은 남으로 가라 해서 다 헤쳐 놓았습니다. (웃음) 거 잘 했어요, 못 했어요?「잘 하셨습니다」통일교회 문선생을 위해서 그렇게 했는데 잘했다구요? 만약 나만 잘 살겠다고 그랬다면 여러분들이 가만히 있겠어요? 가만히 있으라고 해도 가만히 안 있을 거라구요. 그렇지만 나라를 위해서, 세계를 위해서 가라고 하기 때문에…
그래, 가 가지고 망한다면 어떻게 하겠어요? 망할 길을 뭐 하러 가요? 가만히 보아서 망할 것 같으면 가지 않아요. 그렇지만 그 길을 가고 난후에는 3천만 민족이 뭐 5천만 민족이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눈물을 흘리며 애국공신이라고 그래요, 애국공신. 머리를 숙인다는 것입니다. 그 놀음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데는 얼마만큼 사랑하느냐? 절대적으로 사랑해라. 어떤한 수난과 어떠한 곡절과 어떠한 비애와 사망의 엇갈림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나를 막을 수 없다는 절대적인 자리, 그것을 전통적인 길로 내가 상속받고 가겠다는 사나이와 아낙네들이 있다면 이 길은 절대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망한다면 세상은 다 된 거지요.
나는 모험을 많이 합니다. 하나님이 나와 같이하시겠느냐 하는 것을 하나님과 의논도 안 하고 모험을 왕창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 때문에 하느냐? 먼저는 하나님 때문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아들이 나와서 이러한 모험을 하고, 나라를 구하고 만국을 구할 수 있는 판도를 가려내기 위해 각오하고, 하늘을 믿고 자신을 갖고 나서서 그런 행로를 가주기를 얼마나 바라셨겠느냐? 이런 것은 묻지도 말라는 거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러한 자리에서 망하더라도 깨깨 망하겠습니다. 그런 절개를 가지고 망하겠습니다. 망하는 데 세계적인 대표자가 되겠습니다. 그런 전통이 없다면 그 전통을 세우는 데 기수가 되겠습니다' 이렇게 하며 실천하면 안 되는 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건 내가 생애를 통해서 얻은 많은 증거를 갖고 있어요.
고생을 많이 했다면 여러분들보다 통일교회 문선생이 더 많이 했지요? 나이 많은 분들에게는 실례되는 말인지 모르지만 사실이 그렇다는 거예요. 나라를 사랑하는 데 있어서도 나는 누구에게도 지고 싶지 않습니다. 나라 때문에 흘린 눈물만 해도 한 독이 될 것입니다. 또,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도 누구한테 지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선두에 서서 행복의 길을 갈 것을 지금까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대중의 환영을 받을 수 있는 자리가 있으면 나는 후퇴하려고 합니다. 그러니 공석에서 통일교회 문선생을 본 사람은 없을 거예요. 시민회관 같은 데에 수천 명이 모여 잔치를 하는 데서도 일본 사람, 뭐 어느 나라 사람들이 와 가지고 큰소리치고 하지만, 통일교회 문선생은 어디를 가든지 모습도 안 나타내는 것입니다.
높고자 하는 자는 낮아지는 것입니다. 낮고자 하는 자가 높아지는 거예요.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낮고자 하면, `내가 이렇게 해야 천국에 갈 수 있지' 하면 안 된다구요. `내가 이렇게 해야 주님의 신부가 된다. 내려가자, 내려가자'고 하면 안 된다구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욕심을 버려야 돼요. 타락이 욕심으로 말미암아 시작되었기 때문에 욕심을 내포한 그 자리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세계를 품고 사랑하는 자리에서 자기를 내세워야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여자들도 주의해야 됩니다. 세상을 모르고 미친 수작하는 것들이 있다구요. 분수에 넘치는 짓을 하는 것들은 두고 보라구요. 그런 사람은 하늘이 꺾지 않으면 자기 친척, 동기들이 꺾어 버리거나 본인 자신이 걸려 버린다구요.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어야
여러분, 절대적이어야 돼요. 그러면 신랑과 신부, 신부와 아버지 사이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할 수 있는 기준이 무엇이냐? 오늘날 타락한 인간 자체로서 소망과 욕망을 품고 다짐하는 그런 내용을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것을 청산지어야 돼요. 타락인간은 누구나가 공식적으로 수난길을 가지 않고서는 복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통일교회에서는 선한 선조를 말하지요? 선한 조상, 그거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선한 조상을 가져야 됩니다. 선한 조상이란 어떤 조상이냐? 공적인 입장에서 고생한 조상을 말합니다. 나라를 위해서, 대중을 위해서 희생한 조상입니다. 적선을 한다, 선을 행한다 하는 것은 남을 위하여 전체를 주는 것이 아닙니까? 줄 때는 어느 정도까지 주어야 되느냐? 자기의 아들딸까지, 자신까지 전체를 주어야 됩니다. 가정에 있어서 할머니면 할머니, 아주머니면 아주머니, 아내면 아내, 딸이면 딸을 몽땅 내줄 수 있는 사람이 되면 가정적인 주인, 가정의 책임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또한 나라를 전부 다 바칠 때는, 나라의 주권과 땅을 하나님 앞에 몽땅 바치면서 `이것을 하나님을 위해 바치고, 세계를 위해서 희생시키겠습니다'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세계를 상속받을 수 있는 자리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이구, 세계야 어떻게 되든지, 뜻이야 어떻게 되든지 내 아들딸은 못 내놓겠소. 내 돈은 못 내놓겠소'하는 것들은 망하는 것입니다. 그 아들딸이 그 어미 아비의 모가지를 자르는 것이요, 그 돈이 그들의 목을 자르는 것입니다.
끝날이 되면 자기가 제일 사랑하고 애착을 가지던 물건이 자기 가슴을 찌르는 거예요. 지식을 추구하는 학자가 있다면, 그는 자기가 배운 지식이 자신의 목을 매는 것입니다. 그것을 저 시궁창 밑으로 뭉청 집어던지고 왼발로 차 버리라는 것입니다. 차 버리고 초개와 같이 던져 버릴 수 있는 기개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는 지식이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체면과 위신이 문제가 아니라구요.
여기, 주 교수도 나왔구만. `아! 내가 무슨 교수요'라고들 하는데, 그 교수 짜박지가 하나님 앞에는 통하지 않는다구요. 과거에 목사 노릇하던 목사 짜박지도 통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목사님이 되려면 자기라는 것을 버려야 돼요. 자기를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목사님이 못 되는 거라구요. 목사 짜박지도 못 되는 것입니다. 통일교 문선생도 그렇다구요. 어떤 사람은 `통일교회 문선생이 이젠 출세했구만. 그 얼마나 좋겠소' 이러지만 나 좋지 않습니다. 옛날보다 더 심각하다구요. 쇠고랑을 차고 감옥을 출입하던 때보다 더 바쁘다구요. 더 고달프고 더 심각하다는 거예요. 아직 가야 할 길이 남아 있다는 거예요. 더 큰 분야, 더 큰 무대의 싸움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고달픈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이제는 대한민국에서 문선생이나 통일교회는 아무리 반대해도 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저 사람들은 한번 한다 하면 하는 패들이다'이건 인정한다구요.
사랑의 경지에서는 모든 것이 통해
자, 우리는 절대적인 신의를 세워야 되겠습니다. 그 무엇도 끊을 수 없는 신의를 세워야 되겠어요. 통일교회 문선생과 하나님 사이를 누가 끊을 수 있겠습니까? 끊을 수 있다 하더라도 `나는 끊을 수 없다. 못 끊는다' 하는 신념이 있으면 그 신념을 누구도 못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공산당이 제아무리 고문틀에 매어 놓고 들이 짜도 그 신념만은 못 빼앗아 간다는 거예요. 민주세계의 그 무엇도 그 신념만은 못 빼앗아 간다구요. 공산당이 아무리 뭐라 하더라도, 민주세계의 무슨 주의가 무슨 주권이 아무리 뭐라고 한다 하더라도 못 빼앗아 간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삼국을 거쳐왔습니다. 왜정과 공산당과 민주세계를 대표한, 이 대한민국 해서 삼국을 거쳤어요. 또 삼주권을 거쳐왔습니다. 자유당, 민주당, 혁명정부. 그 다음에는 삼교단을 거쳐왔습니다. 불교, 유교, 기독교. 그들은 전부 통일교회를 반대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삼 족속이 반대한 거라구요. 망할 족속, 중간 족속, 흥할 족속이 다 선생님을 반대한 거라구요. 거 왜 그래야 되느냐? 일등을 뽑으려니 할 수 없다는 거예요. 알겠어요? 일등을 뽑으려니 경쟁을 해야지요. 경쟁을 하게 되면 반대하는 거라구요. 있는 재간껏 다 해보는 것입니다.
요전에는 통일교회를 반대하던 사람이 그래요. `통일교회를 사실 반대했지만 이제는 기력을 잃었소. 아무리 반대를 해도 반응이 없기 때문에…' (웃으심) 그 무엇이 와스스 해 가지고…. 그렇잖아요? 여러분, 가을에 밤나무에 밤이 가뜩 열려 가지고 누릿누릿하게 익은 알밤들이 `내 얼굴 좀 보소' 하는 듯이 아가리를 쫙 벌려 가지고 주렁주렁 달려 있다면 아무리 신사요, 도를 닦는 도인이라 하더라도 `아이고, 저 놈 돌이라도 한번 집어 던지면 와스스 떨어지겠구만' 하며 관망하다가 도인 체면도 잊어버리고 자기도 모르게 돌을 들어 던지는 거라구요. 그렇게 되면 그것이 죄예요, 죄가 아니예요? 「아닙니다」 알고 했을 때는? 죄입니다. 자신도 모르고 했을 때는 죄가 아닙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죽을 자리에서 구함을 받을 때에는 자기가 알게 구함을 받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구함을 받는 거예요. 제일 심각한 자리에 들어갔을 때 무사통과되는 것은…. 자기도 모르게 해버리는 수가 많아요. 그럴 때에는 하나님 법에도 안 걸리고 사탄 법에도 안 걸립니다. 갖다 붙일 말이 지천이예요. `그 얼마나 밤을 사랑했으면 그랬을꼬'하는 용서가 나올 수 있는 거라구요. 그 얼마나 밤을 그리워했으면 그랬을꼬… 그 주인보다 천 배 더 그리워해 가지고 그렇게 했으면 용서받을 수 있다구요. 거기에는 무궁무진한 동정의 요인이 있다는 거예요. `그 나무의 주인은 백정놈보다 더 악한 사람이었는데 그거 잘했지'할 수도 있다구요. 악당들도 찬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 이런 것을 중심삼고 본다면, 하나님은 말이예요. 하나님이 보좌에 떡 앉아 계신다 이거예요. 그런데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너무나 그리워한 나머지…. 그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모시는 데 얼마나 엄중한 천법이 있겠어요? 그것도 모르고 그저 그리움에 취해 가지고 어떻게 할 때는 그것이 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법을 넘을 수 있는, 그분에 대한 사무침이 극해 가지고 그분을 위하는 마음이 전체를 덮고도 남을 수 있는, 공인될 수 있는 입장에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움직이는 데 있어서는 얼마든지 통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도 그렇습니다. 선생님이 옛날에는 누워서는 기도 안 했어요. 그런데 요즈음에는 드러누워서도 기도를 곧잘 합니다. 눈을 슥 감고 생각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신비로운 경지에 빠져 들어가게 됩니다. 내가 드러누워 있으면서 `하나님 앞에서는 정색을 하고 예법을 갖추어 가지고 기도를 해야 될 텐데 드러누웠다' 하는 인식이 있을 때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드러누웠다는 인식이 없는 경지, 별천지와 같은 경지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대하여 무엇을 먹자고도 이야기할 수 있고, 어디로 가자고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거예요. 몸뚱이는 드러누워 있지만 무사통과 될 때가 있다는 겁니다. 그건 왜냐?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경지에서는 모든 것이 통한다는 것입니다. 법을 넘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법을 넘어갈 수 있다는 말은 사망선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나서게 될 때는―여기서 사랑하는 마음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구요.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입니다―사랑하는 입장에서는 여자가 남자의 가슴 깊이 파고들어가더라도 남자가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반대해요? 환영하지요. 남자도 그런 거라구요. 천만세의 담이 막혀 있다 해도,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담이 있더라도 그 담을 무난히 헤치고 넘어갈 수 있는 것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하고, 전체를 투입하고 달려드는 거기에서는 그 어떤 담도 전부 무너지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애기는 어머니의 젖가슴을 헤치고 파고드는데 사랑을 빼놓고 보면 그럴 수 있어요? 그럴 수 없다는 거예요. 그렇지만 애기에게 부모의 사랑을 촉감시키고, 애기를 품음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행복하다는 것보다도 천지가 모두 평화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을 느끼고, 전체 분위기에 좋은 것이 싹튼다는 것을 느끼게 될 때에는 그 애기가 아무리 자기의 가슴을 파고든다 하더라도 그걸 용서하고 `어서 해라, 어서 해라' 할 수 있는 아량의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들은 자식을 무한히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애기는 부모의 원수라구요. 호스를 갖다 대고 자기의 피살을 빨아가는 원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머니로서의 새로운 소망의 자극, 남편에 대한 새로운 자극 등, 그 애기로 말미암아 찾아지는 것이 참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지에서는 통하는 무엇이 있는 것입니다. 그 경지는 누가 좌지우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즉, 여기에서 절대적인 사랑에 결부되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사랑을 중심삼고, 자기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고 전체를 위하는 사랑을 중심삼고 맹세하는 그 자리는 무엇보다도 강한 기준이 세워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기준 위에 서지 않고 그저 말로만, 또는 보고, 듣고, 약속하는 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빼놓고는 절대적 통일이 있을 수 없어
동서남북이 다르고 봄과 가을이 다릅니다. 여름과 겨울이 엇갈리는 거예요. 봄에 심은 씨앗이 가을 절기에 가 가지고도 그 생명의 인연을 그냥 그대로 이어 가지고 정상적인 생명과 완전히 일체될 수 있는, 또 하나의 완전한 생명의 씨로 남아지게 될 때는 춘하추동을 포괄할 수 있는 기준을 가질 수 있으되, 그것이 결여되게 될 때에는 전부 다 분산되어 버리고 마는 거라구요.
마찬가지로 모든 것에 있어서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도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인 출발의 동기도 하나님의 사랑이요, 역사적인 과정도 하나님의 사랑이요, 역사적인 결과도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빼놓은 기준에서는 일체화라는 것이 없습니다. 절대적 통일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이요, 그 아들이 사랑하는 신부요, 하나님의 사랑받는 신부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때, 사랑의 일체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지간에는 엄연히 상하의 질서가 있는 것이지만, 사랑을 중심삼고 볼 때에는 종적 질서가 횡적 질서로 바뀐다 하더라도 무리가 없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아버지가 아들에게 명령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아들이 `아버지, 이리로 오세요'할 때 아버지는 안 갈 수 없는 거예요. 암만 두 살 난 딸이라도 `아빠, 이리 와' 하면 아버지는 안 갈 수 없다는 거예요. 종적인 기준이 횡적으로 움직이는 엇갈리는 자리라 하더라도, 모순과 상충이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가치적인 기준을 찬양할 수 있고 도리어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이 기준은 사랑에 의해서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 세계를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사랑으로 포괄된 세계를 만들지 않고서는 천국을 이룰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은 네 마음 속에 있다고 하신 것은 예수님 자신을 중심삼고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천국 이념은 외적으로 너희들도 사랑하게 하기 위함이요, 내가 너희들을 필요로 하는 것은 너희를 사랑의 기수로 만들기 위함이다. 너희들이 나와 같이 가면 너희의 마음에 나의 이념과 사상이 자동적으로 옮겨지기 때문에 너희의 마음에도 천국이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 천국관념은 자기를 위주한 것이 아니라 전체를 구원하고, 전체를 잘 거느려 주고, 전체를 주관해 주기 위한 것입니다. 주관하는 것도 강제 주관이 아니라 자동적으로, 자원에 의해 주관해 주는 것입니다. 자원에 의해 주관해야 합니다. 그런 권한이 비로소 벌어질 것입니다.
이래 가지고… (그림을 그리심) 이것이 삼위일체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삼위일체가 무엇이냐? 하나님과 아들과 성신이지요? 성신은 무엇이냐면 어머니신을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에게 성신이 무엇이냐고 물어 보면 `성신이 뭐야? 성신이 성신이지' 이럽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아들과 성신은 다른 것이 뭐냐? 다른 것이 없습니다. 북쪽에서 보나 남쪽에서 보나 다른 것이 아니라구요. 올라가서 보나, 내려가서 보나, 좌우로 보나, 전후로 보나 전부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본질에 있어서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신이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중심삼고 같으냐? 세계를 사랑하는 데, 세계를 구하고자 하는 데, 세계인류를 자녀로 삼고자 하는 데 있어서 같다는 것입니다.
우주의 근본이 되는 핵이 하나님과 예수와 성신을 중심삼고 영적으로나마 설정된 기준이 있기 때문에, 자녀를 중심삼고 횡적으로도 발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발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의 사명은 무엇이냐? 가정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식으로 말하면 사위기대를 이루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주관성 복귀의 방법
자, 그러면, 주관성 복귀, 주관성을 어떻게 복귀해야 되느냐? 악한 사탄세계에서는 주관성을 강제로 복귀하려고 합니다. `너는 내가 지배해야 되겠다'라고 하면서 채찍을 들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주관하려고 한다구요. 그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주관해야 하느냐? 본성적 주관성의 복귀는 무엇을 토대로 해야 하느냐? 오늘날 사탄세계와 마찬가지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강제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출세하기 위하여 제삼자를 희생시키고 모해하고 하는 방법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주관권은 한때밖에 못 가지는 것입니다. 그런 주권자가 있다면 그 주권자는 얼마 못 가서 끝나는 것입니다.
하늘은 시대를 초월할 수 있는 주관성을 제시해 나온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희생과 사랑입니다. 희생과 사랑의 테마를 앞세우고, 갖은 수욕과 갖은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면, 그 환경에 있는 사람들이 자동적으로 주관성을 취해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자동적인 주관성을 바란다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도 그렇다구요. 선생님이 명령을 하게 되면 그 명령이 여러분의 마음에 딱 걸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안 하게 되면 여러분의 마음이 편안하지 않아요. 하라는 대로 안 하면 편안하지 않을 거라구요. 편안해요, 편안하지 않아요? 난 모르겠어요, 여러분은 어떤지. 나 자신은 편안하지 않다구요. 만일 편안하다면 그는 통일교회 교인이 아닙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편안하지 않은 사람이 통일교회 교인이라는 거예요. 편안한 사람은 통일교회 교인이 아니라구요.
선생님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움직이지 않으니 선생님이 선두에서 달리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달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시키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먼저 가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여러분을 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게 달라요. 지금까지 내가 통일교회에서 말한 것은 내가 다 실천한 거라구요. 복귀원리는 전부 다 실천해 나온 것입니다. 개인복귀, 가정복귀, 종족복귀…. 그 종족의 선두에 서는 것입니다. 민족의 선두에 서는 것입니다. 세계의 선두에 서야 됩니다. 어떻게 서느냐? 그 방법을 여러분은 모른다구요. 가야 할 길이 있기 때문에 선두에 서서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게 가야 되느냐? 그러한 중심적인 사명을 진짜, 진짜 책임지고 가는 사람이 있다면…. 스토브는 열을 발생하는 것입니다. 스토브를 피워 놓은 방에 들어가면 그 열을 감각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마찬가지로 우리 통일교회도 그런 감각권내 스토브의 온기가 영향 미칠 수 있는 권내에 있기 때문에, 이렇게 해야 된다고 할 때 여러분이 안 하려고 하면 양심의 가책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 살아 온 사람이 있다면 그는 통일교인이 아닙니다. 그것을 오래 못 하게 되면 병이 나는 거라구요. 통일교회 오래 믿던 사람들이 끝까지 가야 할 텐데 가지 못하게 되면 병에 걸리는 거라구요. 나는 그렇게 봅니다.
그것은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한 곳으로 치우치니까, 이것이 자꾸 이렇게 기울어지니까…. 좋은 자리에서 잘 먹고, 좋은 침대에서 자는 사람보다도 도리어 지방에 나가서 꽁보리밥을 먹고, 몰리고 쫓기면서 남의 집 처마 밑에서 자는 사람이 행복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도리어 희망이 벅차오르는 것입니다. 먹지 못하고 밤을 새우는 자리에서 하늘의 반짝이는 별을 바라볼 때, 거기에 새로운 세계가 찾아드는 느낌을 느낄 수 있는 것이요, 불어오는 바람결에 느껴지는 그 환경을 생애에 처음 맞는 은사의 분위기로 차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더 행복하겠습니까? 마음의 고통을 품고 세상적으로 볼 때 좋다고 하는 자리에 선 것이겠습니까, 세상적으로 볼 때 나쁘다고 하는 자리이지만 마음의 희망을 품고 일선에 나가 몰리는 자리에 선 것이겠습니까? 세상에서 좋다는 자리가 아니라 몰리는 자리가 도리어 행복하다는 것을 알고 그 길을 찾아 가는 것이 우리 통일교회의 길이라는 거예요. 알겠어요.
선생님도 그렇습니다. 꺼떡하면 청평에 갑니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도 없어요. 내가 옛날에 이 길을 닦아 나오면서 고생하던 그 자리가 그립고, 산야가 그립고, 들려오던 바람 소리, 새 소리가 그리워서 가는 겁니다. 그 흘러 내리는 자연의 섭리를 통해서 하늘의 감동의 세계에 접촉하던 그 기분이 그리워서 가는 겁니다.
여러분, 봄이 그립지요? 여름을 맞고 가을을 맞이하면 봄이 그리워지는 것입니다. 그 그리움은 죽을 때까지 누가 빼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려운 자리에서, 배고픈 자리에서 참고 명상을 하면서 하늘과 더불어 인연맺던 그 시간이 그리워진다는 거예요. 혹은 불어오는 바람결을 느끼게 될 때, 그것이 과거의 인식을 현실의 생활권내에 재촉시켜 주기 때문에, 과거에 그것이 자극적인 동기가 되었다면 현실에서는 생활적인 동기로 현현할 수 있는 자리가 되기 때문에 그것을 좋아하는 거라구요.
내가 청평에 가 가지고는 아무것도 안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일 없이 다닌다고 할는지 모르지만, 뭐 일 없이 다녀요? 천만에요. 가 가지고 나 나름대로 가야 할 길을 닦아 나가는 거예요. 심각하다는 거라구요. 그런 무엇이 있다구요. 전쟁을 하고 나면 칼을 가는 것과 같은 그런 생활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추구하는 것은 나의 행복이 아닙니다. 내가 어떻게 해서 잘살고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은 절대 일생 동안 해본 적이 없습니다. 어떻게 잘해서 내 아들딸을 잘 입힐까 하는 생각을 안 한다는 거예요. 이 나라와 세계를 어떻게 하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생각하는 거예요. 엊그제만 하더라도 큰 판국을 벌여 놓아서 몇천만 원이 필요한데 주머니에는 딱 2천 원밖에 안 남아 있었어요. 몇천만원 써야 할 텐데 대책이 없다구요. 그렇지만 걱정을 안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걱정 안 하면 안 됩니다. 거기에는 이렇고 이렇고 이렇기 때문에 걱정 안 해도 된다, 이것은 반드시 해결된다…. 그러면 한구석에는 복닥불이 벌어지는 거라구요. 선생님이 그러한 자리에 있으면 돈 가진 사람은 못 배긴다는 거예요.
그런 놀음을 하면서 지금까지 통일교회는 발전해 나왔습니다. 모험의 연속이요, 싸움의 계속이었습니다. 투쟁 중에서도 모험적인 투쟁을 해 나온 것입니다. 그러한 혁명적인 처소에 있으면서 불어오는 풍파를 전부 다 가려 내어 오늘날 이만한 세계적인 기반을 닦아 놓았습니다. 이제 이 10월만 넘어가게 되면 내가 죽더라도 눈을 감고 죽을 수 있는 자리에까지 올라간다고 봅니다. 이 1971년만 가게 되면, 우리가 1972년도까지 잡고 있지만 말이예요. 1974년도부터는 세계적으로 났다는 녀석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높다는 녀석들은 전부 들이박을 것입니다. 그럴 때가 온다구요. 내가 생각하는 것이 틀림없고 내가 바라보는 세계관이 틀림없는 이상, 생활환경에 있어서나 세계정세 가운데서 들어맞기 때문에 그야말로 사나이로 태어난 보람을 느끼는 것입니다. 한마디 말도 그냥 그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적중한다는 거예요. 알겠어요?
수단 방법으로 주관하려는 거기에 복귀의 뜻은 세워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희생해 가지고, 세계를 사랑하기 위하여 자기 일신을 가눌 수 있는 일체의 환경을 포기해 버리고 세계를 가누어 주고 하나님의 사정을 헤아려 드리기 위해 자기 일신을 제물로 삼고자 하는 생활과정에서만이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법도가 제정되는 것이요, 그 사랑을 중심삼고서야 새로운 주관성의 터전이 넓혀져 나오는 것입니다.
본성의 주관권을 찾지 못한 입장에서 사랑하면 무엇하겠는가
그러면, 여러분이 그 세계의 모든 내용에 정서적인 문제를 결부시키는 것은 무엇이냐? 오관입니다. 오관. 눈, 귀, 코, 입, 그리고 촉각이예요. 이 오관을 통한 감정이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보고 좋아하는 것은 무엇을 보고 좋아하느냐? 실질적인 문제에 들어가서, 아내를 보고 좋아하느냐? 아내를 보고 좋아하기 전에 나라를 보고 좋아하고, 세계를 보고 좋아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아내를 보고 좋아하는 것이 본성의 자리입니다. 안 그래요?
아담 해와를 중심삼고 볼 때, 원래 아담은 찬란히 빛나는 자연의 질서 정연한 모습과 그것들이 화동 화합하는 상대적 이상세계를 바라보는 아담은 `이 이상적인 상대권의 세계는 우리를 찬양하기 위해서 존재하고 있구나. 아! 좋구만. 우리는 여기에 중심 핵이 되어 있구만' 해 가지고 그것을 품고 나서 아내를 사랑해야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야 그것이 참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아내를 보고 그 미모를 찬양하고, 아내의 음성을 듣고 화동하고, 아내와 더불어 생활환경에서 냄새를 맡고, 음식을 먹고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본성의 주관권입니다.
나라도 없이 세계도 없이 달랑달랑 다니면서 피난민으로서, 혹은 종의 새끼로 사랑하면 뭘해요? 그렇게 사랑해서 뭘하느냐구요. 그런 사랑은 시시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가치가 그런 것이 아니예요.
타락하지 않은 우리 인류의 본성적 부모의 기준을 중심삼고 보면, 우리가 하늘땅을 품고 나가게 되어 있는 거라구요. 하늘땅도 우리에게 끌려 다니는 것입니다. 우리가 좌로 가면 하늘땅도 좌로 가고, 우로 가면 우로 가고, 올라가면 올라가고, 내려가면 내려가고, 동하면 동하고, 정하면 정하는 거예요. 다시 말하면 주관성을 중심삼고 천지의 대권한을 가지고 치우침이 없는 중심권의 자리, 모든 것을 지휘하고 모든 것을 가리는 자리, 모든 것을 주관하는 자리에서, 그런 터전 위에서 개인의 사랑의 인연이 맺어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내가 자랑을 하고 싶더라도 그러한 터전을 갖지 못했거든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랑은 부끄러운 자랑입니다. 자랑을 지나치게 했다가는 하늘의 갈 길이, 자랑의 길이 막혀 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음성을 들었다 하더라도, 본성의 터전을 갖춘 주관권을 세워 놓지 않고는 내 귀가 듣고 즐거워하는 것도 전부 다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적 기준이라는 것은, 이 귀가 사악한 세상의 소란한 소리를 듣고 그 선율에 따라, 그 음률에 취하여 움직이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눈도 그렇습니다. 요사스러운 미녀를 보고 이 눈이 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생각도 그래서는 안 됩니다. 냄새를 맡는 코도 그렇다구요. 오늘날 그렇잖아요? 무슨 화장수니 향수니 하는 것들의 향기는 맡을 수 있지만, 순종의 거 뭐라고 할까, 순수한 향기를 드높이 맡을 수 있는 코가 못 되었다는 것입니다. 먹는 것도 타락권내의 사탄이가 똥칠한 것만 긁어다 먹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리에서 사랑을 하면 뭣 해요? 뭐 피 난민이 되고 감옥에 들어간 사람이 사랑이 뭐예요?
그런 자리를 떠난 입장에서는 서로 격려해 가지고 나라를 찾자고 봉기 하는 데 있어 동지로서는, 투쟁의 격려자로서는 필요하지만, 사랑의 대상자로는 필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차적인 종교인들은 독신생활을 강조해 나온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사랑을 하면 뭘하고, 아들딸을 낳으면 뭘하겠어요? 남편된 그대들이여, 아내를 사랑하기 전에 하나님을 사랑했고, 인류를 사랑했다는 증거를 가져라! 그런 증거를 가지고 아내를 사랑해야 그 사랑은 참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은 자리에서 사랑의 인연을 맺었다가는 그 여자가 방해꾼이 되는 것입니다. 그대들이 가야 할 길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하여 인간의 타락권을 벗어나는 최고의 노정이 아니냐. 그러한 노정을 가야 할 운명이 남아진 과정에서 사랑을 하며 가는 길에 짐이 되고 방해꾼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 이겁니다. 그렇게 보는 거라구요.
통일교회 문선생도 그런 면에서 상당한 고충을 느껴 본 사람입니다. 차라리 여자가 없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고 생각한 때도 있습니다. 이놈의 여자들 때문에 내가 욕을 많이 먹었다구요. 또, 차라리 남자가 없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남자면 남자, 여자면 여자 하나만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는 거예요. 여자가 없고 남자만 있는 나라였다면 내가 반대받지 않았을 거라구요. 그렇지 않아요? 여자만 있고 남자가 없는 나라였더라도 반대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중심삼은 여자들과 남자들이 살기 때문에 세계를 사랑하고 하늘땅을 사랑하자는 사상을 갖고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아- 하늘땅은 나중이고 내 아들딸이 먼저인데…' 하는 바람에 오늘날 통일교회가 이단 사교로 몰려 비참한 운명길을 걸어온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통일교회 문선생이 못난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못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구요.
그러면 본성적 주관이 가능한 곳, 한 남성으로서 본성적 기준에서 아내를 사랑할 수 있는 자유의 천국, 평화의 천국이 어디냐? 한 아내로서 남편을 사랑할 수 있는 자유와 평화가 깃든 천국이 어디냐? 마음의 천국이 외적 천국의 상대로서 그 하나의 아내를 들고 나오게 될 때, 아내 뒤에 세계와 천지가 달려 들어올 수 있는 자유의 천국기반은 어디냐? 이것이 지금까지 복귀도상에 남아 있는 과제인 것입니다.
우리는 종족적인 교회는 가졌지만 나라가 없고 세계가 없기 때문에 이 길을 가려 가야 할 운명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만민이 그리워하는 나라를 어디에 세울 것이냐? 만국이 그리워하는 이상세계는 어디에서 이루어질 것이냐? 오늘날의 민주세계도 아니요, 공산세계도 아닙니다. 두 세계 다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산세계와 민주세계를 밟고 올라서서 이 두 세계를 통합해서 다리 하나가 찌그러졌거들랑 다른 한다리에 힘을 주어 가지고 이렇게 지지하면서 하나의 세계로 가로놓아야 할 것이 하나님의 할 일이요, 오늘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충성하겠다는 사람들의 할 일이 아니냐.
우리부터 서로 사랑하자
그러면 본성적 세계 기반은 어디에서 나올 것이냐? 그 세계 기반이 한꺼번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개인에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개인으로부터 나와야 되는데, 세계를 위하여 우는 사람이요 하늘을 위하여 우는 사람으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세계를 위하여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즐거워하는 사람이 아니라, 세계 때문에 하나님 때문에 우는 환경밖에, 그 길이 아니고는 갈 길이 없다고 하며 그 길을 자처해서 가는 사람, 그런 무리가 아니고는 금후의 이 길을 헤쳐 나가 해방적인 권한을 갖출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놀음을 하지 않고는 될 수가 없기 때문에, 완전한 해방과 최후의 해방의 기수가 되어야 되고 완전 건국, 최후의 건국의 용사가 되어야 되기 때문에 이들은 누구보다도 신음에 신음의 과정을 거쳐야 될 것입니다.
여기에는 억천만 사탄이 공격할 것입니다. 악의 권속에 속해 있는 영인들은 물론이거니와 땅 위에 있는 악당의 후손들까지도 모두 여기에 반기를 들 것입니다. 그러나 반기를 드는 그 고난까지도 소화시키고 넘어 최후의 승리의 천국을 향해 가는 길이, 하늘을 신봉하고 하늘의 정통적인 사상을 이어받아 절대적인 신뢰의 기준을 세워 나가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참아들딸의 도리를 세우기를 바라고 나가는 그들이 가야 할 지극한 정상적인 길이 아니냐. 그 한계선까지 우리는 투쟁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지하 작전을 하는 것입니다. 공산당식의 그런 지하 조직이 아닙니다. 그보다 몇천 배 강력한 지하 활동을 마음 세계에…. 그 누구도 모르는 거라구요. 외적으로는 모르는 거라구요. 마음에 끓어 오르고 마음에 불타오르는 정열과 더불어 하늘나라의 해방의 권한을 소망하고 승리의 주관권을 바라보면서 활동한다는 거예요. 그때에 사랑할 수 있는 남편과 아내를, 그때에 가질 수 있는 가정과 종족과 민족과 국가와 세계를 중심삼고 하나님 앞에 승리의 천국을 봉헌해 드릴 수 있는 그날이 언제 오겠느냐? 그것이 우리가 가야 할 최후의 소원의 지점, 목적점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지금 어느 정도까지 올라왔느냐? 통일교회는 이제 통일족속을 이루었습니다. 내가 엊그제도 얘기했지만 지금까지 하나의 결실을 맺기 위해 찾아온 우리 통일교회가 오늘날 이러한 결실을 맺기까지 얼마나… 일 년 장초도 팔 년 풍파를 겪는다고 했거늘, 오늘날 섭리도상에 있어서 이만한 무리가 하나의 종족권을 이루었다는 것은 지극히 귀한 것입니다. 한 사람을 세계 이상의 가치로 보아 주고 평가해 줄 수 있는 인연으로 꽉 짜여져야 됩니다. 꽉 결속된 터전이 되어야 합니다. 통일교회가 그러한 터전이 되지 못하면 다른 어떤 것이라도 하나 있어야 됩니다. 세계에 그런 것이 없으면 우리가 그런 터전이 되어야 돼요.
선생님은 식구를 비난하고 식구를 모해하는 것을 보고는 못 견디는 사람입니다. 세계를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그 사랑을 어디서부터 해야 되느냐? 우리끼리부터 해야 되는 거라구요. 동서남북에서 가려져 가지고 하나의 인연을 따라 모인 우리 끼리끼리 서로 사랑하자는 것입니다. 보지 않으면 못 사는 거라구요. 만나지 않으면 안 되는 거라구요. 이런 인연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통일교회는 그래도 이 악한 세상과는 다른 무엇을 지니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잃어버리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은 모르지만, 한 사람이 이곳에 찾아오기까지 그 배후의 역사적인 수고가 크다구요. 수많은 선조들의 공적이 쌓여진 것입니다. 여러분, 가을에 결실을 거두어 들이는 주인이 낫질을 하는 데는 노래가 흘러 나가는 것입니다. 찬양의 노래, 지금 가을에 수고하는 것을 다 잊어 버릴 수 있는 찬양의 노랫가락이 흘러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확을 하면서 `아이고, 이거 힘들어서 해먹겠나!' 하며 탄식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주인이 아니라는 거예요. 추수의 낫질을 하는 농군의 일터는 일년의 수고가 영광으로 드러나는 그날을 기쁘게 맞을 수 있는 자리지 신음과 비통과 탄식으로 열매맺히는 자리가 아니라고요. 고통과 수고는 다 흘러가 버리고 도리어 그 낫질에서 콧노래가 흘러 나오는, 희망의 내일이 기약되는 자리가 아니겠습니까?
우리 자신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거두어질 수 있는 입장, 거두어진 알곡의 입장에 있는 우리가 끼리끼리 당하고 느끼는 모든 것을 행복의 요인으로 소화시킬 수 있는 사람들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터전을 넓혀서 국민화시키고 국가화시키고 세계화시킬 때까지 그 주체적인 정신이 일원화된 형태를 벗어나지 않아야만, 그러한 터전을 통해서 세계에 평화의 천국이 연결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너와 나의 삼각권내에서 제3자의 동서남북을 중심삼고 넷이 딱 벌려 서게 되면, 여기에는 이의가 없는 것입니다. 결속의 동기는 거기에서 마련되는 거예요.
먼저는 하나님과 뜻을 사랑하라
여기에는 원조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세계를 위하여 가정을 희생시키는 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아이고, 우리 아들딸 때문에 못 가겠소' 이런 건 통하지 않는다구요. 그것이 가능하다면, 선생님이 무엇 때문에…. 선생님이 아들딸을 버리고 이북으로 안 들어가는 거라구요. 대한민국에서 반대도 안 받는 것입니다. 반대 안 받는다구요.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미치고, 세계를 사랑하기에 미쳐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사랑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 세계를 구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은 가정을 구해 가지고 나가는 것이지만, 가정이 생겨났으면 그 가정은 자기 가정만을 위해서 사는 가정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세계를 위해서 사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전통적 기준인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교육해야 되는 것 자체가 원통한 사실입니다. `아내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세계를 위해 삽시다!' 이렇게 해야 되는 것이 원통한 사실입니다. 타락 때문에… `아들 딸아, 너희는 하나님을 잘 믿어야 된다.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교회를 잘 다녀야 된다'고 가르쳐야 되는 이것이 원통한 사실입니다.
본래는 그렇게 되어 있지 않아요. 하나님이 언제나 마음속에 계셔서 모든 것을 콘트롤하게 되어 있는 거라구요. 하나님을 소개할 필요가 없어요. 어머니 아버지가 자식에게 하나님을 소개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소개받아 가지고 하나님 노릇 해야 되는 하나님은 필요 없다구. 소개가 필요 없는 하나님과 그 아들딸이 못 된 것이 원통한 사실이라구요.
나면서 하나님을 알고,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가려 나가야 하는 인생길인데도 불구하고 타락 때문에, 이놈의 사탄 마귀 때문에. 이 사탄 마귀를 요리해야 됩니다. 치리해야 됩니다.
사탄은 본래 자기를 높이는 데에서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반대로 거꾸로 때려 넣는 것입니다. 올라가려는 녀석은 반대로 잡아 내려야 돼요. 올라가 가지고 되겠어요? 렌치를 걸어 가지고 반대로 휙 틀어대는 것입니다. `이놈 내려 와라! 어디 안 내려오나 보자' 하며 사람을 내리키는 것입니다. 종교를 통해 들이박는 거예요. 처박는 거라구요. 그러니 안 내려올 수 있어요? 이놈의 자식. 사탄이는 안 떨어져 나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탄이는 높아지고자 하니 반대로 처박는 것입니다. 세계의 사탄이를 떼어 버리려니 세계를 처박는 놀음이 벌어지는 거라구요. 알겠소. 저 박장로 전도관에서 온 목사. 지금 나이가 몇이오? 「예순 다섯입니다」 예순 다섯? 혼자 살면 장가가야 되겠구만. 장가 보내 주면 가겠소? 색시 있소? 「없습니다」 없으니 장가가야지. 장가 보내 주면 가겠냐 말이오. 「가야지요」 가야 되겠어? 그럼 청춘이지. (웃음) 장가는 젊은 사람이 가지 늙은 사람이 가나? 청춘이라구요. 늙었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거예요. 기분 나쁘다는 거예요.
선생님이 지금 그렇다는 거예요. 내가 26세에 뜻을 품고 이 길을 나서면서부터, 정열이 불타는 나의 모든 기백을 뽑아 세계를 밟아 치우고 하늘이 원하는 기수가 되어 승리를 찬양할 수 있는 이런 혈기 충천한 청춘시대를 몹시도 귀하게 여겼는데 다 흘러 버렸습니다. 기가 막혀요. 내가 잘못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대한민국 때문에, 기성교회 때문에 그렇게 됐어요. 그걸 생각하면, 쌍칼을 들어 가지고 그저 도리탕을 만들어서 전부 독수리밥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하늘의 법도가 그렇지 않은 것을 알기 때문에, 원수를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건 죽을래도 죽을 수가 없어요. 선생님이 성질이 급한 사람입니다. 말 빠른 것을 보라구요. 성질이 급한 사람이라는 거예요. 옳지 못하면…. 옛날에는 내가 도매 싸움도 많이 했습니다. 동네에 되먹지 못한 녀석이 있으면 맡아 가지고 싸움을 한 사람입니다. 지금도 그런 기백이 당당하다구요. 그렇지만 이건 딱 허리 부러진 호랑이 새끼 같구만. 그저 성질 같으면 한칼에 다 해치우고 싶은데, 하늘의 뜻을 알고 보니 아이고, 죽을 지경이라구요. 그래야 가치가 있는 모양이지요? `에이, 못 참겠는데' 하는 거기에서 참아야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반대적이지요.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선생님을 잘 택했다. 탕감복귀원칙을 두고 볼 때 딱 들어맞지' 이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기가 막히다는 거라구요. 생각해 보세요.
내가 뭐 세상에 나가서 뭘 했다면 이만한 연령에서는…. 요즈음 대한 민국에서 부자라고 하면 누구예요? 거 다 콧방귀를 뀌는 거라구요. 그들을 데려다가 내가 부려먹고야…. 그러지 못하면 죽는 거라구요. 살아 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각오를 가진 사나이입니다. 그런 소질이 있는 사람입니다. 뭐, 척 보면 벌써 전후를 판단할 줄 안다구요. 여러분 중에 누가 암만 뭐 어떻구 해도 말하는 것을 척 보면 벌써 어떻게 된 것인지를 안다는 거예요.
선생님은 무소질자(無素質者)가 아니라고요. 유소질자(有素質者)라는 것입니다. 다방면에 소질이 있다구요. 무엇이든지 소질 없는 것이 없어요. 그래 우리 아이들도 지금 걱정입니다. 무엇이든지 들이대면 못 하는 것이 없거든요. 남들이 열흘 동안 해야 될 것을 사흘만에 후딱 해치운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도리어 곤란하다구요. 그런 소질을 가진 사나이가 무엇이 못나 가지고 통일교회 선생으로서 일생 동안 감옥으로 끌려 다니고, 아이쿠…. 내가 서대문 형무소에서…. 평양에서부터 따라 나오던 식구 한 사람이 있었는데 여편네라구요. 지금도 잊혀지지 않아요. 내가 평양에 있을 때는 뭐 정성을 들인다고, 처음에는 바람을 일으키며 야단했었어요. 내가 쇠고랑을 차고 검사실에 불려 들어가는데 현관에서 떡 만났어요. 소문을 듣고 온 거예요. 와서 하는 말이 `지금도 그 놀음 하오?' 이러는 거예요. 그건 잊혀지지 않아요. 그때, `음, 이년! 내가 너만 못해서 이 놀음하는게 아니야. 네 갈 길과 내 갈 길은 앞으로 천지 차이가 벌어질 것이다. 두고 보자'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가 가는 곳은 교회고 무엇이고 다 망하는 거라구요. 이제 오래지 않아 찾아올 것입니다. 통일교 문선생은 뼈다귀 없는 사나이가 아니예요. 참고 나가는 것입니다. 하늘의 법도가 있기 때문에 저 삼팔선을 넘어야 됩니다. 분수령을 넘어야 돼요. 무슨 수모를 받고, 무슨 오해를 받고, 무슨 억울함을 당하더라도 불평하면 안 됩니다. 불평하면 그것이 거는 것입니다. 걸리면 못 가는 길이기 때문에 참고 나가는 거예요. 참기에 이제 내가 머리가 세었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죽기 전에 이 한을 풀고 갈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일에 통일교회 교인들이 뜻을 알고서…. 이들부터 엄격한 천법을 뒤집어씌울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하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세계를 사랑하기에 미쳐야
통일교회 문선생을 사랑하라고 나는 가르치지 않는다구요. 여러분이 선생님한테 와 가지고 인사하고 그러는 것을 나는 원치 않습니다. 내가 인사도 잘 안 받는다구요. 지방의 할머니들이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 눈물로 기도하고 정성들여 가지고 본부에 올라와서는 선생님을 만나자마자 뭐 눈물을 주루룩 흘리는데, 그러면서 하는 절은 내가 절대로 안 받습니다. 인사도 안 해요. 그 절은 무서운 절이라구요. 잘못 받았다가는 걸려 버리는 거라구요. `하늘이여! 이 정성은 하늘이 받으소서'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거쳐온 동기와 과정이 얼마나 간절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자리에서는 그 절을 받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모른 척하는 거예요. 하늘의 법을 알기 때문에… 모르는 사람 같으면 교만하다고 하겠지만 그래도 좋습니다. 나는 교만한 사람이 아니예요.
여러분이 아는 생활 법도와 배후에서 가려지는 하늘의 법도는 판이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앞으로 극단의 자리에 내세워 놓고, 척 벼랑에 내세워 놓고 들이 찰 거예요. 내가 그런 훈련을 받아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매정한 분입니다. 언제는 뭐 끌고 다니다가 사지에 딱 가게 되면 `에이 모르겠다'고 도망가는 거라구요. 그런 훈련을 받아 온 경력자예요. 그러니 여러분은 선생님을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생님을 믿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세계를 사랑하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자기를 믿으라는 거예요. 그렇게 믿었느냐, 안 믿었느냐 하는 것을 한번 테스트 할 때가 있을 거예요.
그래 가지고 앞으로 통일가의 족보를 꾸밀 것입니다. 알겠어요? 통일가의 족보를 꾸미려고 해요. 통일가의 족보를 꾸며야 됩니다. 그 족보에는 혼자만으로는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혼자 살다가 죽은 사람은 족보에 올라가지 않는 거예요. 가정을 가지고 양자라도 입양시키면 대가 이어져 남지만 혼자 살다가 죽으면 거기서 끊어지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의 축복이라는 말이 그래서 나온 거예요. 내가 절대적인 기준을 중심삼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하는 종족을 편성할 것입니다. 그런 원칙을 세워 놓고 선서한 기준에서 인연을 맺었기 때문에, 그 원칙에 일치되지 않는 사람은 제거되는 것입니다. 추풍낙엽같이 떨어지는 거예요.
선생님의 일대(一代)를 두고 보아도 그렇습니다. 나는 가정에서 그렇습니다. 애기들 두고도 그래요. 어제도 애기들을 데리고 창경원엘 갔다 왔지만, 그 애기들을 대해서 세상의 아버지와는 달라야 될 것이 아니냐. 내가 하늘을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하고 난 후에는 어디로 돌아갈 것이냐? 자식을 사랑해야 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렇잖아요? 세계를 사랑한 만큼 자식을 사랑하고, 아내를 사랑하고, 가정을 사랑하고, 종족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고…. 이렇게 맞추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동기가 하나님이요, 결과가 세계이기 때문에 그것을 이어받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미쳐야 되고, 세계를 사랑하기에 미쳐야 됩니다. 그런 개체가 되어 딱 직선상에 그 기준을 연결시켜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 개인만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알겠어요? 개인을 중심삼고 가정을 만들고, 가정을 중심삼고 종족을 만들고, 종족을 중심삼고 국가를 만들고, 국가를 중심삼고 세계를 만들어서 이것만 딱 갖다가 붙이면 통일적인 세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야 할 것 아녜요? 그렇게 되어야 뜻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나는 하늘을 사랑했고 세계를 사랑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세계에서 과거의 성인들을 만나더라도 당신들과 나는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하는 거예요. `나는 하나님을 이런 심정적 기준에서 사랑했다. 아버지와 자식의 입장에서 사랑하고, 남편과 아내의 입장에서 사랑하고, 부자관계의 사랑을 중심삼고 피땀을 흘리며 정성들여 나왔기 때문에 너희들과는 다르다' 이것입니다. 질이 다르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그들을 대해서 `세계를 사랑하는 데 있어서 너희들은 나한테 배워야 돼'이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무엇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기적 심정을 중심삼고 결과적 심정권내에 있어서 일치된 그 자체를 집중시켜서, 오늘의 세계를 붙안고 나라를 붙안고 수많은 종족을 연결시켜 같은 인류로서 사랑할 수 있는 심정의 터전을 내가 어떻게 확보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기에는 일본 사람이니 한국 사람이니 하는 것이 없습니다.
일본놈들은 나하고 원수라구요. 내가 왜정 때에 별의별 고문을 다 당하고 피를 토하는 그런 억울한 것이 다 있었지만, 한칼에 쳐 죽이고 싶은 원수들이지만 때가 어떻게 된다는 것을 미리 알았기 때문에 그 사람들을 전부 짐을 싸서 피난을 보낸 사람입니다. 일본이 망하기 전까지는 그랬지만, 하나님은 사탄까지도 용서해 주신다는 것을 아는데. `그 나라를 중심삼고는 억울하고 원수였지만 인간이야 무슨 원수냐. 내가 울 때 너희도 울 것이 아니냐' 이것은 틀림없다구요. `내가 슬플 때 너희도 슬플 것이 아니냐. 내가 고독을 느낄 때 너희도 고독을 느낄 것이 아니냐. 인간과 인간은 차이가 없는 것이 아니냐. 너희들과 나 사이에는 칸막이가 없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다 피난길을 가려 보냈어요.
여러분도 그래요. 금년에 일본 아이들을 한 7,8백 명, 약 천 명 가까이 수련시켰는데 그들을 바라보게 될 때, 선생님은 여러분에게 보다 더 큰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원수의 자식들이지만 그렇다구요. 또 그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거라구요. `선생님' 하면, 한국 식구들이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사랑하려고 하고 있어요. 이거 기분 나빠요, 좋아요? 기분 나쁜 놈은 도적이라구. (웃음) 왜 기분이 나빠요? 왜? 형제들 가운데에서 나만 부모를 사랑하고, 다른 사람은 사랑하지 말라는 그런 욕심을 가지면 안 되는 것입니다. 기분 좋아해야 되는 거예요.
자기는 그렇게 못 하더라고 그런 형제를 많이 가지라는 것입니다. 미국 사람이든 독일 사람이든 그런 형제를 많이 갖게 되면, 그들이 갈 때 같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시중을 들어 주고 찬양해 주면 그들이 성공한 다음에 혼자 가겠어요? 찬양하는 천사들이 필요한 거와 마찬가지로, 그때에 여러분은 그들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한국의 부장들도 보면 말이예요, `선생님은 뭐 일본 식구들만 대해 주고, 일본 식구들은 더 알아주지'라고들 합니다. 내가 사실은 새로운 얘기는 한국의 부장들이나 협회장에게 얘기 안 해줘요. 새로운 말들은 전부다 외국 식구들에게 해주는 거예요. 그래야 선생님이 다 같이 사랑했다는 조건이 되지요. 언제나 걸러 먹고 남은 찌꺼기만 주어서 되겠어요?
3대 해방을 받아라
이번에도 `앞으로 세계는 전부 다 이렇게 될 것이다. 공식적으로 이렇게 이렇게 되는 것이다. 두고 봐라! 그렇게 안 되면 원리가 틀렸다' 이러면서 불을 붙여 넣고 펌프질을 해 가지고 뺑뺑하게 만들어서 보냈다구요. 그러면 잘 뛰게 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한국 통일교회 패들은, 협회의 부장들은 `너희들이 얼마나 알아? 우리는 다 알고 있는 것인데…' 이러고들 있습니다. 천만에, 천만에, 천만에요. 그렇게 자빠져 있다가는 떨어지기 일쑤라구요.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했지요? 나는 놈 위에는 뭐가 있나요? 덮치는 놈 있다구요. (웃음) 날기 전에 덮친다는 거예요. 그것을 생각해야 돼요. 언제나 안심할 게 아니라구요. 세계적인 패권은 아직까지 결정이 안 났습니다. 달리는 때라구요.
자, 그러면 결론을 짓자구요. 주관성 복귀, 주관성을 어디서 복귀할 것이냐? 나는 요 자리에서 복귀하고 싶습니다. (칠판을 가리키며 설명하심) 이것이 선생님의 사상이예요. 그러면 여러분은? 여러분은 여기에서 둥지를 틀어 보세요. 여기에서 둥지를 틀어 봤자 소용없어요. 해보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끝날에는 다 버리고 저것을 찾아가라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대학교 총장도 그 총장자리가 문제가 아니예요. 그 보따리를 똥볼 차듯 뒷발로 차 버리라는 거예요. 그리고는 `에라, 세상아, 잘 있거라. 나는 가노라! 에이 지루하던 이 누더기 보따리를 버리게 되니 아니구 시원하다!' 하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해방 1호예요. 첫째 해방입니다.
그 다음 둘째 해방은 아들딸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아이구, 이놈의 아들딸…' 이것이 원수였다구요. 주교수도 아들딸 많은가. 적구만. 한15남매 30남매 더 낳지. 이 죽을 판국에 이것 좀 보소. 이 아들딸을 버리는 것이 둘째 해방입니다. 그 다음 세째 해방은 이 나라를 버리는 것입니다. 나라를 버리는 것이 세째 해방이예요. 이 3대 해방을 받아야 됩니다. 알겠어요? 자기가 제일 좋다고 생각하는 외적인 문제, 그리고 가정 문제, 그 다음엔 나라 문제로부터 해방, 이 3대 해방을 못 받으면 천국 백성도 못되고, 천국 가정도 못 되고, 천국 개인도 못 되는 것입니다. 그 바람에 나도 소문도 많이 났어요. `통일교회에 가게 되면 가정을 버린다'고 말이예요. 그러나 가정보다 더 좋은 나라를 찾기 위해서는 가정을 버려야지요. 또 그 나라보다 더 좋은 세계를 찾기 위해서는 나라를 버려야지요. 이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이 기준에 의해서 볼 때 여러분의 집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의 자리가 어디예요? 여러분이 학교면 학교, 자기가 처해 있는 자리가 이 자리예요, 어느 자리예요? 선생님은 이 자리에 있다구요. 여러분은, 어디로 갈래요? 이 자리에 갈래요, 어디 다른 자리로 갈래요?「선생님과 같은 자리에…」어느 자리? 요 자리?「예」그거 쉽지 않다구요. (웃음) 눈이 이렇게 바로 보는데 이 눈을 뒤집으라는 거예요. 코를 막으라는 것입니다. 귀를 막으라는 것입니다. 입을 다물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그런 때가 있다고요. 그래서 지금 새로이 출발하는 신령 교도들이, 재건교(敎)같으면 세상 사람들을 대해 `에잇 사탄 마귀' 이러는데 그거 맞습니다. 맞다는 거예요. 그들은 분별된 입장에 선 거예요.
여러분, 시집간 색시가 말이예요. 신랑 집에 가서 자기 친정집 타령을 하게 되면 그 신랑과 오래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짹하면, 기분만 나쁘면 `아이구 우리 집은 이렇지 않는데, 이 집은 왜 이래?' 이렇게 투정하면 (웃음) 쫓겨나는 거라구요. `아이구 우리집 밥그릇은 이런데, 이 집 밥그릇은 왜 이래?' 이러면 못 사는 것입니다. 절대 못 살아요. 자기 집보다 낫다는 것을 발견해야 됩니다. 자기 집에서는 금밥그릇에다 밥을 먹는데 신랑집에서는 깨진 이 빠진 사발에 밥을 퍼서 먹더라도, 바가지에 퍼서 먹더라도 `아하, 거룩한 새로운 인생길이 열렸구만. 아, 당신을 만났기 때문에 내가 이런 세상을 알게 되었니 고맙습니다' 할 때는, 남편이 `아이구구구…' 하며 (웃으심) 밑에 들어가서 받들며 살아가려고 하는 거예요. 그렇지만 `이것이 뭐야? 우리 집과 다르구만. 나는 이런 밥그릇은 처음 봐. 이거 기분 나빠' 하게 되면 남편이 뒤로 돌아서는 거예요. 암만 뭘해도 남편과 영영 이별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보따리를 싸 가지고 전쟁을 해야 할 때입니다. 알겠어요? 그렇지요? 국적을 달리해야 하고 입적을 달리해야 될 것 아니예요? 시집 장가 가려면 입적을 달리해야지요? 그렇잖아요? 입적을 달리 하고 국적을 달리해야 되는 거라구요.
그런데 `나는 우리나라에서 대통령을 했었는데 이 나라에 와서는 과장이라니, 난 싫어' 이러는 사람은 과장은 커녕 백성 자격도 못 되는 거라구요.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총장 아니라, 그보다 더한 무엇이라도 안된다구요. 하늘나라에 가면 아무것도 아니라구요. 여기서 뭐 대통령 해먹던 사람, 왕 해먹던 사람들이 저나라에 가서도 그런다면 지금까지 고생하고 죽은 사람들은 무엇이 되겠어요? 하늘을 믿다가 죽임을 당한 사람들은 무엇이 되겠느냐는 거예요. 저나라에 가서도 그렇게 되는줄 알아요? 까꿀잡이예요. 완전히 까꿀잡이예요. 저나라에서는 이 세상에서 고생한 사람이 최고가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3세계권에서, 심정권을 중심삼고 정서적 분야의 해방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날에는 자기가 제일 좋다고 하던 것이 무우 모가지 잘리듯이…. (웃음) 왜 웃어요? 왜? 좋은 것이 있으면 절대 손해라구요. 그러므로 여러분이 제일 좋다고 하는 것의 모가지를 잘라야 되는 것입니다. 전문분야라는 것은 모가지를 자르는 거예요. 그 다음에는 가정이요, 그 다음에는 나라입니다. 이렇게 3세계권의 해방을 받아야 됩니다. 기가 막히지요?
천국은 어디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하느냐
통일교회 문선생은 따라지 중의 강따라지입니다. 강따라지가 되어 가지고 왕따라지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강따라지가 무엇인지 알겠어요? 강, 강, 깡따라지 깡패, 제일 나쁜 따라지예요. 그래, 좋은 따라지라는 말이예요, 나쁜 따라지라는 말이예요? 뭐예요? 나는 세상에서 혼자입니다. 고독단신이라는 거예요.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고, 형제도 없고 말이예요. 내게는 돈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먹을래야 먹을 때에 가서 주워 먹을 수도 없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먹을 때는 전부 빌려 먹는 거예요. 값을 쳐 가지고 갚아 주겠다고 하고 먹는 것입니다. 내가 빚 안진다는 거예요.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래요.
자, 통일교회에도 지금 그렇다는 거라구요. 여러분에게 빚 안 지고 먹겠다는 거라구요. 내가 시켜 가지고 여러분이 돈을 벌었으면 병작인(竝作人)이지요? 같이 일했으면. 그렇지요? 내가 병작해 가지고 먹고 산다는 거예요. 여러분의 신세를 안 지고 있어요. 지금도 그렇다구요. 신세를 안 지려고 한다구요.
내가 지구상의 인간 중에서 맨 꼴찌라구요. 맨 꼴찌지만, 자꾸 내려가다 보면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돌아가는 거예요. 봄절기가 되면, 쓱 이렇게 되게 되면 말이예요. 이것이 내려가다 이렇게 되면 돌기 때문에 이렇게 내려가는 거예요. (행동으로 표현하심) 그래 가지고 여기서부터 점점 올라가는 거예요. 알겠어요? 내려가기는 내려가지만, 이것이 내려가기 위한 것이예요, 올라가기 위한 것이예요? 이게 맨 밑창까지 내려가게 되면, 올라가지 말래도 올라가요, 안 올라가요? 어떤 방향으로 올라가요? 다른 방향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천국은 어디에서부터 이루어지느냐? 복귀 천국은 어디에서부터 이루어 져야 되느냐? 저 감옥에서부터 되어야 됩니다. 감옥에 들어가서 주관성을 복귀한 기준의, 본성적 기준의 자율적인 평화의 심정을 지니고 콧노래를 불러 봤느냐?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옛날에 사도들이 그런 자리에 있을 때, 그것을 천국화시키기 위해 옥문을 열고 자유로 행동할 수 있는 권까지 부여했던 것 아닙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이 옛날의 그들 이상으로 소망과 기대를 가질 수 있는 자격이 되어 있습니까?
선생님이 감옥에 있을 때에 입을 닫고 가만히 있어도 영계에서 전도를 했다구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 역사를 얘기하자면 참 재미있는 얘기가 많지요. 그런 얘기는 다음에나 하지 지금은 하지 않을래요. 꽁꽁 싸놓았다가 진짜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들한테 얘기할 거예요. 이까짓 그저 뭐, 시장 바닥에서 꽹꽹이 치는 데 다리 들고 춤추는 패 같은 것들에게 얘기해 봤자 다 흘러가는 거라구요. 알뜰한 아들딸이 남기 전까지는 안 가르쳐 줄 거예요. 기분 나빠서 떨어져도 할 수 없다구요.
하나님은 언제나 같이하시는 거예요. 감옥에 있을 때도 말이예요,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을 때도…. 옛날에 엘리야에게는 까마귀를 시켜서 떡을 물어다 먹였다고 하지만, 왜 까마귀를 시킬꼬? 사람을 시켜서 얻어먹지요. 통일교회 문선생은 사람을 시켜 가지고 떡도 얻어먹고 그랬어요. 난데없는 사람들이 미싯가루를 갖다 주지 않나, 뭐 사과 보따리를 갖다 주지 않나, 많이 얻어먹었습니다. 그거 잘한 거예요, 못한 거예요? 못한 거라구요. 자랑할 게 못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을 수고시켰으니 잘한 것일게 뭐예요? 안 그래요? 수족이 꽁꽁 매어 있으니, 할 수 없으니 하나님이 그렇게 안 해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얼마나 불쌍하냐 이거예요. 그게 자랑이 아니라는 거예요. 자랑할 게 못 된다구요.
잊지 못할 사람들
지금도 그래요. 여러분, 통일교회 교인들이 문선생 밥 먹여 줘요? 누가 먹여 줘요? 하나님이 먹여 줄 게 뭐 있어요? 내가 벌어먹지. 통일교회 교인들이 선생님의 신세를 지나요, 선생님이 여러분의 신세를 지나요? 어때요? 안팎으로 신세를 지우고 살지, 내가 신세를 지지 않아요. 나는 신세를 지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구요. 신세 지고는 못 사는 거라구요.
보라구요. 내가 열 여섯, 열 일곱 살 때구만. 그때 어떤 아주머니한테…. 나는 철이 들 때부터는 점심을 안 먹었어요. 나라도 없는 주제에 밥을 세 끼씩이나 다 찾아 먹을 자격이 있느냐면서 말이예요. 밥이 그리운 생활을 참 많이 했습니다. 밥을 그리워함과 동시에 민족을 그리워하는 길을 갔다구요. `밥보다 민족을 더 사랑해야지, 나라를 더 사랑해야지' 하면서 고향을 떠나 서울에 와 있으면서 말이예요. 점심을 안 먹었습니다. 그런 생활을 했어요. 주머니에 돈이 없어 그런 것이 아니라구요. 돈이 있으면 불쌍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것입니다.
옛날에는 서빙고 앞에 모래사장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곳을 다 파버려서 모래사장이 없으니까 섭섭하더구만요. 여러분은 안 그래요? 빌딩지은 것은 좋지만, 모래사장이 없어진 것이 난 지극히 섭섭해요. 추억이 많은 곳인데…. 여러분, 명수대(흑석동)에 가면 명수대 교회가 있어요. 그 교회는 선생님과 몇몇 동지들이 지은 교회입니다. 한번은 그 모래사장에서 서빙고 교회와 명수대 교회가 합동예배를 보았는데 그때…. 거기에 자갈을 채취하는 배가 있어 가지고 자갈을 채취해다 쌓아 놓은 무더기가 있었다구요. 그때 나는 점심을 안 먹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점심 때가 되면 자리를 피해 돌무더기 뒤에 있었어요. 그때를 생각하면 참….
여러분, 청춘시대에는 그런 것이 참 필요하다구요. 별의별 생각을 다 할 수 있는 거라구요. 젊은 청년으로서 기백도 있는 것이요, 자기 나름의 프라이드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환경으로부터 고립된 입장에 서 가지고, 남들은 다 점심을 먹는데 자갈 무더기 뒤에 혼자 앉아 강물을 바라보면서 자갈을 던지면서…. 그게 엊그제 같습니다. 뭐, 그런 일이 어젯날 같아요. 생생히 살아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혼자 기도하고…. 그거 심각한 자리라구요. 그런 환경일수록 심각한 거예요. 그때 어떤 아주머니―손씨라는 부인이예요―가 빵 두 개와 우유 한 봉지를 갖다 주었는데 그것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아요. 그건 일생 동안 잊혀지지 않아요. 그것을 내가 갚아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거하고, 또 내가 감옥에 들어갔을 때 어떤 젊은 사람을 만났어요. 감옥에 들어가서 처음 만났는데, 그는 자기의 모든 것을 나에게 털어놓고, 형제보다도 더 가까운 자리에서 자기가 먹을 것도 안 먹고 나에게 주고 그랬습니다. 그 사람도 아직까지 잊지 않고 있어요. 이름도 잊지 않았어요. 앞으로 그것을 몇백 배로 갚아 줄 것입니다.
그 다음에, 피난 때에 있었던 한 가지 잊혀지지 않는 일은, 우리 고향의 친구라면 친구인, 아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때는 내가 이북의 감옥에 들어갔다가 나왔기 때문에 머리도 짧고 형편없었어요. 명주 바지 저고리가 너무 새까맣기 때문에, 껍데기는 벗겨 버리고 국방색으로 물들인 속이 겉으로 나오도록 뒤집어 입은 거라구요. 뒤집어 입으니까 그거 뭐 홑챙이 퍼런 바지지요. 그걸 입고…. (웃음) 명주 저고리는 뭐 두 달 동안 입었으니 될 대로 다 됐지요. 기름때가 배어 가지고 비가 오면 빗방울이 뚜루룩 굴러간다구요. 이래서 상거지가 다 되어 가지고 형편없이 부산에 도착하게 되었어요. 부산의 길은 외통길이라구요. 팔도강산 사람을 다 만날수 있습니다. 통길이기 때문에 일주일만 왔다갔다하면 다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 부산에 가서 적적하니까 그 통길을 다니다가 고향의 친구를 만났어요. 그 사람이 그때 돈 만 원을 나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기분 나쁜 일이 있었어요. 그래 나는 이걸 몇백 배로 갚아 주겠다, 내가 한때에 가서는 몇백 배, 몇천 배로 갚아 줄 것이다…. 그전에는 내가 누구를 만나려고도 하지 않은 사람이예요. `갚아 줄 것이다. 그때가 되면 몇천 배로 갚아 줄 것이다' 이렇게 떡 생각하고 있는데, 그 몇해 후에 그 사람의 아내가 여기 통일교회를 찾아왔어요. 그때는 통일교회 문선생이 될 줄을 몰랐지요. 자기 동네에 그저 뭐뭐 아는 사람으로 알았는데 지나고 보니 통일교회 문선생이 되었더라 이거예요. 자기네들보다 판국을 크게 벌여 나가더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여편네가 와 가지고 `아무 때에 우리가 문선생을 이만큼 도와주었으니까, 이제는 우리를 도와주어야지요' 하는 거예요. 내가 아주 기분 나빴다구요. 요사스럽게 여자가…. 나는 너희들의 아들딸을 먹여 살리겠다는, 후덕하게 갚아 주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늘 앞에 기도하며 만나기를 바랐는데, 이렇게 요사스럽게 나타나느냐 이거예요. 얼마나 기분이 나빴는지 모릅니다. 차라리 죽었다면 복이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냐. 그 사람에게는 그럴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만나 주지도 않았다구요. 그때에 만 원을 받았으니 그 이자를 계산해서 얼른 주어서 쫓아 버리라고 했어요. 일년에 얼마씩 고리대금으로 계산해서 주라고 했어요. 그러고 나서 얼마나 기분이 나빴는지…. 내가 일생 동안 그리워하고 선하다고 찬양하던 그 기준이, 피난시절에 있어서 제일 자극적인, 생애에 있어서 기념할 수 있는 그 표적이 몽창 꺽어지니까 얼마나 기분이 나빴는지 모른다구요.
또, 우리 통일교회 교일들한테도 그래 봤어요. 어느 누구를 내가 점찍어 가지고 '이 녀석은 지금 이렇게 나오고 있는데 어디 두고 보자. 내가 이 자리까지 가 보자' 하고 바라보는데, 이 녀석, 내가 용 되기를 바랐는데 미꾸라지 새끼밖에 못 되겠어요. '내가 그렇게 했는데 왜 몰라줘요.?' 이러고 있어요.(녹음이 잠깐 중단됨)
선생님은 하늘을 위해 동정해 준, 잊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최고의 것으로 신세를 갚겠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알겠어요? 그런 사람이라구요. 뜻을 따라가는 길 앞에 여러분을 고생시키고 그러지만, 선생님이 무책임 한 사람이 아니예요. 고생을 시키면 책임을 진다는 거예요. 지상에서 책임을 못 지게 되면 영계에 가서라도 책임을 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과 그런 서약을 하고 가는 사람은 복받은 사람이라고 봅니다. 나는 절대 배신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한번 믿으면 일장백이(一張百弛)이라구요. 조금도 신세를 지고는 못 사는 사람이라구요. 성품이 그래요. 하나님이 그러시거든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냐? 신세를 지고는 못 견디는 분입니다. 열만큼 자기를 위해 주면 몇백 배, 몇천 배로 갚아 주려고 하는 분이예요. 알겠어요? 여러분의 소성도 그래야 됩니다.
여기 있는 동지들간에나 지방에 가서 전도하다 인연된 사람들간에도 그래야 됩니다. 전도하는 것이 절대 나쁜 것이 아니예요. 어려운 가운데에서 인연되었던 사람들을 일생 동안 그리워하면서 복을 빌어 줄 수 있는 소망의 터전이 넓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감옥에 가나 고통 가운데 가나…. 그런 인연을 맺을 수 있는 사람은 평상시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런 걸 볼 때, 여러분이 하나님을 중심삼고 공적인 기준에 서 가지고 남을 위하는 그 자리는 지극히 귀한 것입니다. 이걸 생각할 때,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하기에 미칠 수 있는 자리에 섰다면 여러분은 절대 망하지 않아요. 그러한 원인과 결과의 자리, 그러한 기준에서 그러한 것을 좌우에 가려 가지고 그 중앙에 서 가지고, 인류를 대표하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종적인 하늘과 횡적인 세계를 중심한 그 기점에 서 가지고, 팔을 높여 이 세계를 새로운 세계로 옮겨 놓기 위한 다리를 놓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나가는 사람이 된다면 얼마나 보람이 있겠습니까? 여기에서부터, 이런 개인에서부터 퍼져 나간다구요. (판서하심)
이제부터는 구체적으로 사랑하자
지금까지 막연하게 세계를 사랑했던 것을 이제는 구체적으로 사랑해야 돼요. 알겠어요? `세계를 사랑하자. 나라를 사랑하자' 하면서도 지금까지는 막연했다는 거라구요. 그렇잖아요? 그러나 이제는 덮어놓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축복받은 아내와 남편은 서로 세계를 대신하고 하늘땅을 대표한 자리에서 사랑을 해야 합니다.‘신랑으로 찾아온 예수와 땅 위에서 신부로 맞고 싶었던 신부가 만날 수 있는 대표적인 귀한 날, 우리 일대에서 가질 수 있는 가장 거룩한 날이 축복의 날이다. 이제 만났으니 사랑을 해보자. 사랑의 해방권에서 기원과 과정과 결과가 일치된 자리, 어느 누가 참소 하더라도 걸리지 않는 자유 해방권이요 절대적 기준 앞에 있어 가지고 하나의 남성과 하나의 여성이 사랑할 수 있고, 거기에서 태어난 아들딸을 사랑할 수 있고, 친척을 사랑할 수 있고, 비로소 나라를 사랑할 수 있고, 세계를 사랑할 수 있고, 하늘땅을 사랑할 수 있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이러한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기준이 오늘날 우리 일대에서 결정된다면 그 이상의 행복이 어디에 있겠느냐’ 이러면서….
그 기준이 벌어지게 될 때는 하나의 남성이 하나의 여성을 대해서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어야 됩니다. 절대적으로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어야 돼요. 막힘이 없어야 된다는 거예요. 부모와 자식간에도 막힘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돼요. 선생님이 지금 염려하는 것은 그것입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말없는 가운데 사랑을 심어야 됩니다. 말없는 가운데 사랑을 심자는 거예요. 남이야 철이 없어서 알든 모르든 나라를 사랑하는 나, 세계를 염려하는 나가 되어서 세계를 사랑하는 대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대신, 이제는 구체적인 입장에서 하나의 남성과 하나의 여성이, 주체와 대상으로서 서로 하나님과 세계를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사랑하고, 아들딸을 사랑하고, 종족을 사랑해야 합니다. 구체적이어야 돼요. 나아가 그러한 종족이 합해서 민족을 사랑하고, 그런 민족을 통한 하나의 주권국가를 이룬 후 그 국가를 넘어 세계를 사랑할 수 있는 그런 터전이 되어야 비로소 주관성 복귀가 가능한 것입니다. 즉, 본성적으로 주관할 수 있는 복귀된 개인과 가정이 성립되는 것이요, 그런 가정을 중심삼고 복귀된 종족권이 성립되는 것이요, 그러한 종족을 중심삼고 민족권이 성립되는 것이요, 그러한 민족을 중심삼고 국가권이 성립되는 것이요, 그러한 국가를 중심삼고 세계권이 성립되는 것이요, 그러한 세계를 중심삼고 천주권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천주권이 이루어지면 어떻게 되느냐? 하나님과 우리 인간을 중심하고 영원무궁한 지상과 천상의 천국, 통일된 세계, 하나님의 사랑만이 길이길이 드높이 들릴 수 있는 곳이 이루어지게 되는 거예요. 그런 세계가 벌어져야만 본성적 주관성이 복귀된 천주가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어요. 그것은 이 자리를 통해야 이루어지는 거예요. (판서하심) 이것을 갈라 놓으면 오른쪽은 남자요, 왼쪽은 여자입니다. 윗쪽은 남편이요, 아랫쪽은 아내다 이거예요. 앞쪽은 남편이요, 뒷쪽은 아내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혼자 가는 것이 아니예요. 있더라도 혼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같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앞으로 통일교회 교인들이 회사 사장이 되면 그 아내도 사흘에 한번씩은 회사에 출근할 때가 올지 모릅니다. 그것이 안되면 일주일에 한번씩이라도 출근하여 남편의 사장 노릇을 대역할 수 있는 때가 와야 될 것입니다. 그때는 그녀가 일자무식장이라도 그 명령 앞에 절대 복종하는 놀음을 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한 사회가 될지 모른다는 거예요.
그래서, 통일교회 선생님 대신 어머니가 나와서, 아무것도 모르지만 여러분에게 명령을 하게 되면 여러분이 절대 복종해야 하는 그런 일이 있을지 모른다구요. 외적으로 그런 형태가 벌어지지 않고는 내적으로 그런 가정의 기준이 자리잡을 수 없는 거예요. 또 국가적으로 그런 기준이 벌어지지 않고는 종족적으로, 민족적으로 자리를 잡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그러한 터전이 벌어지지 않고는 국가적으로 안식의 터전이 벌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하고저를 막론하고 전부 다 안팎을 중심삼고 중심이면 중심으로 모실 수 있는 아량이 여러분에게 있어야 돼요. 그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남편이 사장이면 사장 혼자가 아니라는 거예요. 가정입니다. 가정이예요. 이런 문제가 벌어져요. 그 가정 전체가 사원 전체와 통해야 됩니다. 나라면 나라를 이끌어 가는 주권자를 중심삼은 모든 것이 어느 가정에도 통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세계가 되어야만 본성의 천국이념이 벌어질 것이고, 그러한 이념권이 벌어져야만 주관성 복귀의 천국이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기 도
오늘은 10월 3일, 안식일이옵니다. 여기에 모인 당신의 자녀들의 마음을 여시옵소서. 저희는 근원도 결과도 모르는 자리에서 스스로의 행복을 꿈꾸던 자들인 것을 미처 몰랐습니다.
아버지께서 찾아 나오시는 절대적 기준, 당신의 사랑으로 연결될 수 있는 아들과 신부의 기준을 중심삼아 삼위일체의 심정권을 세우면, 그것이 하늘을 이어받을 수 있는 중심이 되는 동시에 횡적인 기준에 있어서의 중심도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버지, 부모의 심정을 통하여 어떻게 자녀의 심정을 완벽하게 연결시키느냐 하는 중차대한 문제가, 통일가를 통해 세계적인 천국이념을 실천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이 자리에서 좌우된다는 사실을 저희는 확실히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하나의 남성으로 태어났으면, 그 남성은 자기 가진 것을 스스로 자랑할 때가 아닌 것을 아옵니다. 저희 앞에는 탕감, 청산지어 가지고 본성의 남성으로서 본성의 여성을 중심삼고, 해방권이 필요치 않은 자유분방하고 평화스러운 자리에서, 하늘을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하는 이상(理想)의 자리에서, 본연의 인류 시조가 갖추어야 했던 선한 부모의 자리를 대신해야 할, 각자 나름대로의 갈 길이 남아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한 가정을 통하여 가정에서 났다가 죽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인연을 중심삼고 그 가정을 확대시킨 하나의 주권을 세계의 주권으로 연결시키고 그 가정을 확대시켜 하늘나라의 아버님이 계시는 보좌로까지 연결시켜야 된다는 사실을 절감하는 자리에 서야 되겠습니다.
아버지가 높으시기 때문에 그 자녀 되는 저희는 아무리 낮더라도 감사해야 되겠습니다. 저희가 바라는 높은 자리라는 것이 저희가 처할 자리가 아니라, 아버지와 더불어 처할 자리인 것을 저희들은 미처 몰랐습니다. 내가 설 자리는 나 홀로 서는 것이 아니라 아내와 더불어 자식과 더불어 서야 한다는 것을 미처 몰랐습니다. 뿐만 아니라 종족과 더불어 같이 서야 한다는 것을 미처 몰랐사옵고, 국가와 세계 만민과 같이 서야 된다는 것을 미처 몰랐습니다.
통일이념을 중심한 자주적인 본성의 주관권이 통일가를 중심삼고, 여기 서 있는 이 자식으로부터 가정을 중심삼아 전통의 기원을 세워야 할 뜻을 바라볼 때, 가려야 할 십자가의 길이 얼마나 많겠는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자주적인 권한의 심정의 터전을 갖추어야 할 것을 알았기에, 어려운 일이 있으나 슬픈 일이 있으나 그것을 바라보고 극복해 나온 것을 당신은 잘 아시옵니다.
이제, 이 가정을 중심삼고 다리를 놓아야 할 것이 통일가의 사명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선생님을 사모하고 선생님을 따르는 것은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 본성의 심정이 소망하고 있는 자연적인 인연에 의해서 그러는 것임을 알고 있사오니, 그러한 인연이 자연적인 환경에서 갖추어졌거들랑 그 인연을 어떠한 무엇이 제거시킬 수 있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사옵니다.
그러려면 저희들은 순수해야 되겠습니다. 뜻 앞에 흡수될 수 있기 위해서는 물이라면 완전한 물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물은 어떠한 틈도 스며드는 것이요, 어떠한 자리도 점령하는 것이 아니옵니까? 자기의 어떤 개성이 있다 하더라도, 그 개성을 절대적 주체이신 아버지 앞에 있어서는, 사랑의 주체 앞에 있어서는 화합되고 흡수될 수 있는 요소로 변화시키는 본질적인 작용을 해야 하는 것이 사랑의 마음인 것을 알았사오니, 그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저희들은 아버지와 통일되어야 되겠사옵니다.
그러한 개체로 복귀해 가지고 가정을 중심삼고 종족, 민족, 국가, 세계까지 복귀시켜 나가야 할 전진적인 행로, 주관적인 행로가 남아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기에 반대되는 모든 요건을 저희들이 투쟁과 모략 중상으로 점유할 것이 아니라, 희생과 봉사를 하고 핍박받는 자리에서 맞고 빼앗아 나오는 하늘의 작전을 이어받아야 할 길이 남아 있는 것을 알게 될 때에, 때로는 원통한 것도 느끼고 때로는 억울한 것도 느끼며 때로는 분한 것도 느끼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그러한 길을 가고 계시기 때문에, 아버지가 남기신 전통이 그러한 전통이요 아버지의 싸움의 실적에 의한 승리의 터전이 그러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이어받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무리가 통일의 무리인 것을, 아버지여, 잊지 말아 주시옵소서.
저 자신이 그러하기 때문에 이들도 그러하기를 바라고 있는 저를 사랑 하시는 아버지여, 이들을 믿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고 원하옵니다. 바라고 있는 개인적 기준 앞에 사명적 상대기준을 못 가리게 될 때는, 가정적 기준 앞에 가정적 기준에서 그 사명을 못 가리게 될 때는, 종족적 기준 앞에 종족적 기준에서 그 사명을 가리지 못하였을 때는, 민족적 기준 앞에 민족적 기준에서 그 사명을 가리지 못하였으면, 국가적 기준 앞에서 그것을 가릴 수 있는 한날이 있어야 된다는 것을 저는 믿고 있기 때문에 이들이 배반하고 이들이 불평하고 이들이 무어라고 해도 그날을 바라보면서 참고 나가고 있사오니, 저의 이런 소신을 아시는 아버지여, 그때까지 참아 주시옵소서. 간절히 바라고 원하옵니다.
당장에 화가 치밀어 오르는 아버지의 심정을 통하여 볼 때는 망해야 할 무리, 제거되어야 할 무리가 통일의 무리요, 대한민국이요, 현재 대한 민국 내의 기독교이겠지만, 그러나 참아 주시기를 고대하는 저희들을 불쌍히 보시는 아버지시여, 그날까지 참아 주시옵소서.
저희들의 손이 미칠 때까지 저희들은 피땀 흘리는 것을 개의치 아니하고 가려고 합니다. 일신이 어떠한 비참한 자리에 부딪치더라도, 그것이 나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을 위하고 종족을 위하고 형제를 위하는 마음으로 피 흘리는 십자가의 길을 자처하여 걸어가는 무리요, 그것이 역사적인 아벨의 전통사상인 것을 알고 이어받은 무리가 통일가의 무리이기에, 저희는 이 전통을 짓밟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아버지, 저희들은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아버지가 뜻하신 세계를 맞기 위해서 저희들은 참아 나왔습니다. 죽기 전에 어서 속히 이 무리를 통하여 나라를 맞고, 세계를 맞게 해주시옵소서. 그리하여 3천만이면 3천만, 4천5백만이면 4천 5백만의 이 민족이, 이 한반도가 통일을 이루어 민족적인 제2의 해방을 맞이할 수 있게 하시옵소서.
아버지, 이 민족은 제3의 해방이 남아 있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것을 일깨워야 할 것이 오늘날 통일가의 사명입니다. 몰리고 쫓기고 밟히고 있는 통일가의 무리가 그와 같은 목적을 위하여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것을 이 민족은 모르고 있습니다. 저희가 밟히는 것을 보고 비웃는 무리가 이 민족이옵고, 하늘 앞에 악한 무리가 저렇게 되었다고 좋아하며 기도하는 무리가 기성교회이옵니다. 아버지, 그래서는 안 될 것을 잘 알고 있사오니 저희들은 그러한 자리를 지나가야만 되겠습니다.
망하는 자리에서 그들을 구하지 못하거든 저희들은 흥해야 되겠습니다. 못사는 자리에서 그들을 구하지 못하거든 저희들은 잘살아야 되겠습니다. 밤을 낮으로 삼고 달을 해로 삼아 싸우고 노력해야 되겠고, 쉴래야 쉴 수 없는 걸음으로 가야 되겠습니다. 저희들은 앉아서 무엇을 공상할 수 없는 길을 달음질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한 시 한 분 한 초를 바쁜 걸음으로 가야 할 무리가 통일의 무리인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버님, 본성적 주관의 세계를 얼마나 그리워하시옵니까?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저희를 사랑한다고 찾아오시어서 저희 마음과 몸을 샅샅이 뒤질지라도 부끄러움이 없이 그것을 자기 이상의 것으로 믿을 수 있는, 샅샅이 명령하고 샅샅이 밟고 샅샅이 헤쳐 늘어 놓고도 안심할 수 있는 아버지의 아들딸이 있사옵니까? 그러한 아들딸이 있거든 아버지여, 놓지 마시옵소서. 그러한 아들딸을 그리워하시는 불쌍한 아버지이신 것을 저는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한 아들뿐만이 아니라 그러한 딸까지 있어 가지고 아버지께서 그들을 부부로 맺어 주어서 그 가정을 천년 만년 마음대로 이용하고, 마음대로 심부름시키고, 마음대로 활용하더라도 불평하지 않을 수 있는 아들딸이 있습니까? 그런 가족이 있습니까? 있다면 아버님이여, 떠나지 마시옵소서. 천년 만년이라도 기다리시옵소서.
그 아들딸이 그 가정을 가누기에 얼마나 수고했을 것인가를 아버님은 잘 아실 줄 알고 있사오니 떠나지 마시옵기를 바라옵니다. 그런 하나의 4위기대를 갖춘 가정들이 합한 종족적 터전이 있사옵니까? 아버님이여, 태평왕국을 찬양하기 전에 승리의 가정을 중심삼고 찬양하여야 할 것을 아오니, 그런 가정을 맞으셨거들랑 천지의 어떤 주권이나 악한 사탄 국가를 대해서도 자랑할 수 있는 그 가정을 떠나지 마시옵소서.
알고 보면 저희 가정들은 영원히 떠날 수 없는 아버지의 가정들인 것을 알았기에, 그런 가정이 되기 위해 싸워 나가야 되기에 3위기대 가정을 편성하였습니다. 스승의 가정을 중심삼고 4위기대를 편성해 나가는 것이 오늘날 통일가의 가정조직의 원칙인 것을 생각할 때, 동서남북을 가려 행차하셔야 하는 아버님의 발걸음이 동방, 서방, 남방, 북방 할것없이 사방으로 뻗쳐 나갈 수 있는 가정적 출발의 기준을 마련해야 할 중심 터전이 오늘 말한 그 자리인 것을 저희들은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가정을 통해서 그 가정의 대표가 김씨면 김씨, 이씨면 이씨, 박씨면 박씨, 조씨면 조씨의 문중을 통할 수 있는 길을 가려야 되겠사옵니다. 이 가정을 통하여 사방으로 통하는 그 판도가 넓어지게 될 때 아버지께서는 자연히 충신의 가정인 그 중앙의 가정에 임재하시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저희들은 미처 몰랐습니다.
그러한 가정을 가려 가지고 동서남북을 찬양하고 동서남북에 힘을 주고 동서남북에 자극을 주고, 아버지가 임재하실 수 있는 종적인 중심의 자리, 하나밖에 없다는 그 자리, 하늘의 소원의 터전이 되고 인간세상에 있어서 소망의 기준이 될 수 있는 그러한 가정의 기원을 아버지께서 얼마나 얼마나 찾고 계시는가 하는 것을 저희는 미처 몰랐습니다.
통일가에 있어서 통일교회를 지도하는 책임자 된 이 아들이 있다 할진대는 이 아들에게 개인의 십자가가 있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가정의 십자가가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내면 아내에 대한 십자가가 남아 있는 것을 알고 있사옵고, 자식에 대한 십자가의 길이 남아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3대 십자가의 심정적 고개를, 그 정상을 저희는 넘어야 되겠습니다.
개인적 해방을 찬양할 수 있는 승리의 부활권을 이 지상에 갖추어 가리고자 하신 것이 예수님을 이 땅 위에 보내신 아버지의 6천년의 소원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 다음에 가정적 해방의 기원을 찾기 위하여, 한 나라의 터전을 갖추어 가지고 그 기준을 세우기 위하여 이 땅에 예수를 보내어 신부를 찾아 나오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그 부부가 자녀를 중심삼고 사방으로 일체될 수 있는 터전을 가지게 될 때, 하나의 종족과 민족과 국가와 세계는 현현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런 엄청난 3대 십자가가 오늘날 세계 도처의 국가에 맺혀져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내 상대와 내 아들딸 앞에 맺혀져 있다는 것을 저희들은 미처 몰랐습니다.
여기에 서 있는 아들은 이 길을 위하여 50평생을 싸워 왔습니다. 남겨진 수난길, 개인의 가시밭길도 처량했지만 가정의 가시밭길 또한 그렇게 처량한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자식을 대한 가시밭길도 남아 있는 것을 알게 될 때, 갈라져 산산조각이 되고 원한의 터전이 될 수 있는 서로의 인연이지만 여기에 천국의 복지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걸 생각하게 될 때, 아직까지 책임 다하지 못한, 아버지 앞에 면목을 세울 수 없는 저희를 아버지여, 동정하시옵소서. 아버지여, 자비와 긍휼의 마음이 떠나지 마시옵소서.
바라고 그리는 마음이 간절한 것을 아버지께서는 아시옵니다. 그러기에 저희들이 `저를 알아주십시오' 하지 않더라도 알아주시기 위하여 아버지께서는 불철주야 수고하신다는 것을 생각할 적마다 황공 망극하옵니다. 아버지께서 저희 가정을 세우고 이 가정의 울타리가 되시기 위해 뜻을 아는 무리를 이끌어 밤을 새워 가면서 쉬지 않고 기도하게 하시는 사실을 알게 될 때, 황공하옵니다.
출발한 길이 평탄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는 길도 평탄하지 않을 것이요, 머무는 길도 평탄할 수 없는 것이요, 종착점까지 가려면 평탄할 수 없는 길을 가야 할 것을 알고 있사오니, 이 길을 다 갈 때까지 아버지의 동정과 긍휼과 자비의 마음이 떠나지 마시기를 늘쌍 바라는 마음을 갖고 가는 길인 것을 통일가에 속한 무리들은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하늘의 전통을 이어받아야 되겠습니다. 개인을 희생시켜 나라와 세계를 위하고, 가정을 희생시켜 나라와 세계를 위하고 아버지를 위하고, 자신을 희생시켜 나라와 세계를 위해서 가야 되겠습니다. 아버님이여, 이제부터는 그러한 복귀도상을 가는 통일가의 가정 가정에 그러한 인연이 엮어지는 것을 알고 아침 해를 바라보고 기뻐하기 전에 하늘나라를 명상하면서 기뻐해야 되겠습니다. 자기의 자식을 바라보고 혹은 아내를 바라보며 부부면 부부로서 정서적인 분야를 다짐하는 그 자리에서 아버지를 위로하고, 아버지의 뜻을 염려하고, 세계 만민을…. (녹음이 잠시 중단됨)
여기에서 국가로, 세계로 뻗어 나갈 수 있는 당신의 심정적 주관권을 복귀시켜야 할 책임이 저희에게 있는 것을 확실히 알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아버님, 오늘 10월 3일을 맞았습니다. 날짜도 좋은 날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나라가 기억하는 날, 이 민족이 기념하는 날, 우리 교회가 기념하는 날이오니, 이 시간 복을 빌어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가는 길에 아버지께서 늘쌍 같이하여 주실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최후의 승리의 그날까지 저희는 직단거리로 가야 되겠습니다. 태산이 가로놓여 있거든 저희는 굴을 뚫어야 되겠습니다. 바다가 가로놓여 있거든 저희는 제방을 내고 다리를 놓아야 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없이 죽어가고, 말없이 묻혀지고, 말없이 소모되어야 할 무리가 많아야 될 것을 생각하옵니다. 그 길을 눈시울을 찌뿌리면서라도 가지 않을 수 없는 운명길로 알고, 기꺼이 맞아 나가는 통일의 무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남북이 엇갈린 정세를 아버지께서, 심히 염려하는 마음을 가진 통일교회 무리들…. 아버지, 이북에 있는 악당들을 아버지 무릎 앞에, 하늘의 권한 앞에, 자주적인 권한 앞에 자의적인 굴복을 통하여 하늘의 해방을 노래할 수 있는 그날이 어서 속히 오게 하여 주시옵고, 만국을 통하여 당신이 찬양을 받고, 모든 통치의 권을, 주관성을 복귀할 수 있는 승리의 때가 어서 속히 오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만만세에 당신의 은사와 사랑으로 길이 같이하여 주시옵고, 전국과 전세계에 널려 있는 자녀들과 영계에 있는 수많은 선조들이 해원성사할 수 있게끔 저희들이 책임을 다하겠다고 다짐하는 이 시간을 받아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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