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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신자 교리 (1)
1. 인사소개와 우리 성당 소개
안녕하십니까? ****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찾아온 이곳 본당의 주임신부로 있습니다. 우리 무악재성당은 지난 2003년 9월에 신설됐습니다. 처음에는 홍제동 성당에서 ‘홍제4동 성당’이라는 이름으로 신설됐지요. 그러다가 지난해에 성당을 지금처럼 짓는 과정에서 우리가 구별하기 쉽고,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기 쉽게.... 무악재 성당으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오셨으니까, 위치를 설명하지 않아도 아시겠지요?
저는 이곳 본당에 온지 1년하고도 6개월정도 됐습니다. 신부로 살기 시작한지는 14년하고도 7개월 정도 됩니다. 그 시간의 길이라든가 숫자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이곳에는 지난 2004년 9월에 왔고, 지난해에는 여러분보다 조금 앞서서 신앙생활을 시작했던 분들의 도움을 힘 입어 이곳에 성당을 이렇게 세웠습니다. 신앙인 공동체가 일정한 장소에서 하느님을 공경하기 위해서 집을 짓는다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2. 배우고 알아야 할 것
앞으로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릴 기회는 무궁무진합니다만, 몇가지 기본적인 용어들을 먼저 말씀드려야 할 듯 합니다. 물론 여러분들이 모른다고 하더라도, 삶에서는 아무런 불편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종교와 신앙에 대해서 배우겠다는 생각으로 이 자리에 함께 하신 분들이므로, 기본적인 것은 알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 먹고 사는 문제의 해결만으로는 우리가 알아야할 것을 모두 알았다고 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문제만 해결되면 충분하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사람의 품격이나 인격을 일반 동물 수준으로 낮추어 부르고 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분명 동물이면서도 위대한 동물이 되는 것은 알려고 하는데 있고, 그렇게 알게 된 것들을 지식으로 전달할 줄 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3. 몇 가지 명칭들
3.1 그리스도교와 기독교
여러분이 듣거나 배우러오셨고 제가 말씀드리는 우리 종교를 가리켜 그리스도교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지금의 그리이스에서는 고대언어입니다. 글자의 모양은 지금과 비슷합니다. 다만 조금 변했을 것입니다. 세종대왕이 만든 글자와 지금 우리가 쓰는 글자와는 조금 다르듯이 말입니다. 우리신앙의 핵심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가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에는 로마라는 나라가 지중해지역을 통치하고 있었으나, 문화로는 그리이스 문화가 우세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제국의 공공문서에는 희랍어가 쓰였다고도 합니다. 우리가 지금 볼 수 있는 신약성경의 언어도 사실은 그리이스말로 쓰였다고 합니다. 지금은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우리말 성경이지만.
인간으로 태어나신 하느님의 아들을 가리켜 예수라고 했고, 그분이 하느님의 일을 하신 구원자로 오셨는데, 하느님의 축성을 받았다 혹은 신학용어로는 성별(聖別)되었다는 의미로서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덧붙여집니다. 그래서 지금은 예수그리스도라는 말이 고유명사처럼 되었습니다.
이 그리스도교가 한자문화권인 동방에 전파되면서, 기독교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즉 그리스도교와 기독교는 같은 말입니다. 설명한다면, 예수그리스도의 삶의 본보기를 따라 사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말로 알아들으면 충분할 말입니다. 더 부가되는 말은 훗날에 또 설명하지요.
3.2 가톨릭(=천주교)-프로테스탄트(=개신교)
세상 모든 삶에는 역사가 있지요. 여러분 각자도 언제 태어나고, 어디서 자랐으면, 배운 것은 무엇무엇이고, 관심사항은 이러저러하다고 구별할 수 있습니다. 조금전에 설명한 그리스도교라는 신앙도 역사가 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각자가 받아들이고 살아왔던 이 신앙이 그 안에 들어있던 사람들의 주장에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갈라지고 분열됩니다. 그 역사에 따라 부르는 명칭에 조금씩 차이가 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죽었다가 부활하신 다음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당시 로마제국의 수도인 로마에서 복음을 전파합니다. 그렇게 약 300년의 세월이 지난 후, 당시의 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가 로마지역을 교회의 으뜸 책임자였던 ‘교황’에게 넘겨주고, 나라의 수도를 동쪽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로 옮깁니다. 이래서 정치적인 모습과 종교적인 모습이 함께 어울어진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그리스도교가 모양을 갖춥니다.
이것과 더불어 동쪽의 정치를 따라 옮겨가고 거기에서 자연스레 자리잡은 동방교회가 훗날 1054년에 갈라집니다. 첫 번째 종교분열이지요. 그 다음에 1517년에 지금의 독일지방에서 있었던 사건 때문에 마르틴 루터를 중심으로 하는 교회분열이 생깁니다. 이것을 개신교 혹은 프로테스탄트라고 합니다. 그리고 1608년 영국에서 황제의 혼인문제 때문에 또 한번의 분열로 성공회가 생깁니다.
그 다음에 그 안에서 수차례 분열과 분열을 거듭하여 같은 예수그리스도라는 분의 가르침을 따르면서도 수많은 종교의 모습이 생깁니다. 각설하고, 여러분이 저를 통해서 배우려고 하는 신앙은 최초에 로마에서 뿌리를 내렸던 서방그리스도교, 즉 가톨릭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의 으뜸은 예수님의 선택으로 으뜸자리를 차지했던 베드로사도의 본보기를 따르는 교황님을 중심으로 모임 교회공동체를 가리킵니다. 가톨릭, 혹은 로만가톨릭, 서방그리스도교....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립니다. 가톨릭이라는 말은 ‘보편적인, 어디서나 공통인....’이라는 뜻을 갖는 말입니다.
- ‘프로테스탄트를 기독교라고 하는 것은 잘못임’
4. 함께하는 분들에게 드리는 부탁
세상에 공짜는 없지요? 공짜라면 양잿물도 먹는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양잿물이 우리 몸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는 잘 알테니까 그 말에 대한 것은 생략하고.....
제가 여러분에게 이 시간을 통해서 우리 신앙과 그 삶에 말씀을 드리면서 부탁할 것이 있습니다. 공짜는 없습니다. 돈을 받겠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이 시간에 그저 찾아와서 앉아있는 것으로 우리 신앙에 대해서 잘 알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나온지 조금 시간이 지나기는 했습니다만, 소개하는 책을 읽고, 자주 반복하시기 바랍니다. 옆 방에가면 성물판매소에서 팝니다. 구입해서 읽고 함께 하시면 좋겠습니다.
-무엇하는 사람들인가? -지은이 박도식 신부님(선종했음)
예비신자 교리 (2)
6. 지난 시간에 이야기한 기본적인 개념들 계속하기
6.1 성당과 교회
반드시 어느 한 가지 명칭만을 써야한다는 규정은 없습니다만, 천주교회를 가리킬 때에 ‘성당’이라는 명칭을 많이 써 왔습니다. 옛날에 많이 썼으니 지금도 써야한다는 규정은 아닙니다만, 일반적으로 그렇게 씁니다. 그렇게 천주교회를 부르는데에 비해서. 개신교는 ‘교회’라는 말로 많이 씁니다. 특별히 구별하기 위한 차이는 없습니다. 성당이 되었든지 교회가 되었든지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고 그 정신을 우리가 사는 곳에서 드러내는 것이 문제이지요. 그 본질을 가리켜서 그리스도의 삶을 따른다고 말합니다. 천주교회, 즉 성당이 되었든 개신교회가 되었든 그 안에 소속돼 있는 사람들이 따라 사는 중심인물을 예수그리스도라는 입니다.
성당에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우리 신앙인들에게 하느님이 함께 계신다는 표징으로 사람들이 봉헌한 빵과 포도주를 예수님의 몸이 되게하고 그것을 참석한 신앙인들이 함께 나누는 성체, 즉 미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개신교회에 미사는 없습니다. 다만 성경에 나오는 말씀을 중심으로 해석하고 설명하고 기도를 중심으로 하는 특징은 있습니다. 물론 성당에서도 말씀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만, 개신교회보다는 그 강조가 약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1517년에 갈라지고 난 다음, 개신교는 천주교와 다른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세가지 원칙을 제시합니다. ‘오로지 성서(Sola scriptura), 오로지 은총(sola gratia), 오로지 믿음(sola fidei)가 그것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삶을 통해서 보여주셨던 삶의 원칙,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 예(=본보기)를 행하라는 말씀을 서로 달리 해석하는 것이지요(Hoc facite in meam commeorationem).
6.2 성경의 권수
성경은 하느님의 뜻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성경은 하느님의 선택을 받고 그렇게 선택받은 사람들로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삶을 기록하고 있는 책입니다. 거기에는 그들이 올바로 살았던 이야기고 있고, 애석하게도 하느님의 뜻과는 반대로 갔던 내용들도 담겨 있습니다. 이 성경은 우리가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사람의 언어로 돼 있습니다. 처음부터 우리 말로 쓰인 것은 아니고, 우리 말로 번역된 책을 갖고 있습니다. 성경이라는 'BIBLE'이라는 말을 번역한 글자입니다. 바이블이라는 말은 본래, 책이라는 말의 복수라고 합니다. 즉 자세하게 이야기하면 ‘책들’이라는 정도의 뜻을 갖는 보통 말입니다. 헌데 요즘에는 고유명사가 됐지요?
성경은 세계창조에 관한 믿음의 이야기를 담은 창세기부터 시작해서......이스라엘의 역사를 담고 있습니다. 이 성경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예수님이 세상에 태어나시기 전의 이야기를 기록한 구약(舊約)성경이 앞 부분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중심인물이었던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그리스도께서 가르치고 행하신 행적을 기록한 것을 ‘복음(Gospel, Goodnews)이라고 하는데, 이 복음부터 초창기 신앙공동체 사람들의 삶을 기록한 책들을 신약(新約)성경이라고 합니다.
이 성경은 쓰여진 언어가 두 가지입니다. 구약의 대부분은 처음에 이스라엘 말이었던 ‘히브리어’로 39권이 쓰였고, 알렉산더 대왕의 그리스 문화가 퍼진 다음에, 그 땅에 살았던 사람들의 상황을 반영하여 나머지 7권의 구약성경이 그리스말로 쓰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활동과 그 이후에 대한 것은 모두 그리스말로 쓰였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언어로 쓰여진 것은 역사의 상황에 의해서 어쩔 수 없는 것이었는데, 1517년 독일에서 시작된 교회의 분열이 있고 난 후, 지금은 교회로 많이 부르는 개신교, 즉 프로테스탄트에서 이상한 논리를 적용합니다. 구약성경 가운데서, 히브리말로 쓰이지 않은 것은 성경이 아니라고 말이지요. 하느님은 이스라엘 말로만 구원을 위한 소식을 전하셨다고 본 탓일까요? 그래서 천주교, 즉 성당에서는 구약성경을 46권으로 계산하지만, 개신교에서는 39권만 계산해요. 물론 신약성경은 27권으로 같습니다. 전체를 합치면, 천주교는 73권, 개신교는 66권입니다.
분명한 것은 천주교회의 모태인 가톨릭 교회가 성경을 1500년이상 보존해왔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세상을 떠난지 1500년쯤 지난 다음에 시작된 개신교는 성경을 더 줄입니다. 천주교회의 역사는 지금까지 2000년정도, 하지만, 개신교는 지금까지 500년이 조금 넘지요.
6.3 십자가, 키로마크
십자가는 로마제국에서 사용하던 사형(死刑)도구였습니다. 그 사형도구에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다음부터 그 십자가는 더 이상 저주받은 도구가 아니라 구원(救援)을 위한 도구로 바라보는 의미가 바뀝니다. 그래서 천주교회에서는 구원의 의미를 담아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린 형상을 보고, 우리가 삶의 자세를 새롭게 할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셨으므로, 그 십자가에 예수님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천주교의 십자가 모양과 개신교의 십자가 모양은 차이가 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형태는 같지만, 그 위에 예수님의 형상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그러한 모습 역시 천주교회가 1500년을 보존해왔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우리 성당의 지붕위에 마크가 있는 것을 보셨나요? 보는 방법에 따라서는 ‘피엑스’라고도 읽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대로 된 명칭은 ‘키로(=Χριστυ?)’라고 하지요. 이 키로라는 말의 뜻은 그리스 말로 그리스도라는 말을 의미하는 ‘크리스투스’(=Χριστυ?)의 앞 두 글자를 합쳐서 만든 모양입니다. 앞의 두 글자를 그리스말 글자대로 소리내어, ‘키로’라고 합니다.
6.4 성호경
우리 교회의 상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기본적인 것을 말씀드리는 순서로 하겠습니다. 그것은 가장 많이 사용하는 성호경(聖號經)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표식을 하면서, 입으로 하는 기도인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아멘’하는 기도는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대단히 중요한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한번에 다 말씀드릴 재간은 없고, 앞으로 여러분과 만나는 시간을 통하여 자꾸만 반복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말씀드리는 이 성호경은 우리가 모임을 시작할 때나 마칠 때나 반복합니다. 우리가 신앙인임을 자랑스럽게 드러내는 표식이라는 것도 함께 기억하시고 성심성의껏 하시기 바랍니다.
예비신자 교리 (3)
7. 전례시기에 대하여
사람에게는 누구나 태어나는 때가 있고 세상의 삶을 마치는 때가 있습니다. 태어남을 기념할 때는 생일을 기억하지요? 그리고 성장해가면서 학교에 들어가는 때가 있고, 자기 삶에 책임을 지는 나이가 되어 주민등록증이 나오는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마다 정해진 때가 다르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혼인을 합니다.
그렇게 시작한 두 사람의 삶이 자녀를 낳고, 삶에서 여러 가지 일을 거치면서 다음 세대를 이루어갑니다. 그리고 일정하게 정해져 있지 않은 인생의 기간을 통하여 많은 일을 만듭니다. 그리고 사람은 결국 마지막 숨으로써 인생을 끝맺지요?
이런 인생의 과정을 따라서 우리 신앙에서도 해마다 일정한 주기에 따라 기억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가리켜 전례주기라고 합니다. 전례주기의 시작은 하느님의 뜻을 인간사이에 실현하러 오신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다리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7.1 대림시기
전례주기의 첫 번째를 대림시기라고 하는데, ‘예수님이 임하시기를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그 구체적인 시기가 언제부터인지는 쉽사리 말할 수는 없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세주를 기다려온 것은 약 4천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역사를 줄여서 4 주간에 걸쳐서 대림시기를 지냅니다.
7.2 성탄시기
대림시기가 끝나면 성탄시기입니다. 말 그대로 하느님의 아들이셨던 분이 사람으로 태어나셨음을 함께 기뻐하고 축하하는 시기입니다. 이 성탄시기의 길이는 때에 따라서 조금 다르기는 합니다만, 2주간에서 3주간 사이를 왔다갔다 합니다.
7.3 사순시기 - 부활시기
우리 그리스도교의 특징을 짧게 이야기하면, ‘부활의 종교’입니다. 그 말은 사람이 살면서 겪는 여러 가지 어려움도 있지만, 항상 희망을 갖고 살아야 한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쉽사리 쓰는 말 중에 희망을 갖는다고 뭐가 달라지겠느냐고 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절망의 자세를 갖고 사는 것보다는 낫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 신앙의 본질은 부활입니다. 개신교도 아마 그 사정은 비슷할 것입니다. 우리 천주교나 개신교나 500년 전까지는 한 나무였으니까 굳이 달라야 하는 요소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해마다 정한 부활절이 되기 40일전에는 우리가 사순시기라고 이름붙인 ‘사순절’을 지냅니다. 사순절이라는 말은 사십일이라는 뜻입니다. 특히 이 기간동안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이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수난의 길을 겪고 고통을 겪으신 주간이라는 뜻이고, 그것을 기억하는 우리도 그 삶의 정신을 지켜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사순절기간은 주일을 빼고 계산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시작부터 마침까지는 46일입니다.
그렇게 사순시기를 지내고 나서는 부활시기를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 부활의 기쁨은 50일간을 지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훗날 우리 사람들이 할 부활과는 좀 다르게 바라봅니다. 영과 육이 합쳐져 다시 하나가 된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7.4 승천과 성령강림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40일동안 세상에 계시면서 제자들에게 믿음을 더해주고 신앙을 더 강조하십니다. 그러다가 40일만에 하늘로 승천하고, 다시 10일후에는 성령이 강림합니다. 이 성령이 강림한 날에 신앙공동체인 교회가 세워집니다.
7.5 연중시기
그렇게 세워진 신앙인 공동체가 예수님이 남겨주신 삶의 정신을 기억하고 살아가는 때를 가리켜 연중시기라고 합니다. 일년중의 연중시기는 실제길이는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만, 34주간으로 나누어 기억합니다.
8. 우리가 이 시간을 통해서 알려고 하는 대상
여러분들은 이 시간에 성당에 오시면, 저를 통해서 뭔가 이야기를 듣습니다. 제가 여러분들보다 많이 알아서 여러분 앞에 서서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굳이 생각하자면, 저보다 삶의 지혜가 풍부한 분도 이 자리에는 있을 것이고, 지혜가 앞선 분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힘이 센 분도 있고, 사회에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큰 역할을 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 앞에서 제 자랑을 한다면 그런 사정을 비교해서 여러분이 시간을 낭비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 시간에 앞에 선 무악재 성당 사제를 통해서 여러분들이 듣고 배우는 것은 제 개인에 대한 것은 아닙니다. 비록 제가 사람이고, 사람의 말로 하더라도 말입니다.
이 시간에 말씀드리는 대상은 ‘하느님’에 관한 것입니다. 하느님을 봤느냐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하는 것이 정상일까요? 대답은 두가지로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눈을 중심으로 말하면, 하느님을 본 적은 없다고 해야할 것이고, 마음의 눈을 중심으로 하면 나는 하느님을 만났으면 그 분과 함께 살고 있다고 해야할 것입니다.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손에 잡을 수 있고, 눈으로 볼 수 있는 대상을 우선으로 삼니다만,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우리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수없이 많은 생물들과 사건들 가운데서 삽니다. 음식을 먹고 나면 그것이 어떤 작용을 거쳐 내가 움직일 수 있는 힘이 되는지 몰라도 우리는 움직일 수 있습니다. 반드시 우리가 눈에 봐야만 삶에 도움이 되느냐고 묻는 것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8.1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
본격적으로 우리 신앙에 대한 내용을 말씀드릴 시간이 된 것은 아니지만, 이 자리에서 말할 수 있는 하느님은 순전한 신(神)을 가리킵니다. 순전한 신이란, 눈에 보이는 것들에 의하여 영향을 받지는 않지만, 눈으로 보고 감각에는 영향을 줄 수 있는 존재(存在)를 가리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바람사항을 이야기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저것을 먹고 싶다든가, 이곳저곳에 가보고 싶다고 말하는 내용들이 그것입니다. 물론 자식된 도리로서 힘이 된다면 우리는 부모님의 뜻을 따르려고 합니다. 그러나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그 현상을 바라볼 때, 우리가 왜 그 뜻을 따르는지 생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읽고 들은 것은 부모님의 뜻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말과 의지로서 전해진 것 뿐입니다. 그렇게 눈에 보이지는 않으면서, 사람의 손에는 잡히지 않으면서 사람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것들은 있습니다. 이렇게 인간적인 설명을 하고 난 다음에 바로 하느님을 설명하는 일과 비교하는 것이 어폐는 있습니다만, 하느님에 대해서 알아듣는 것도 이런 방법과 과정을 통해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분입니다.
8.2 하느님은 모든 일을 하신 분
하느님에게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몸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하느님은 세상의 모든 일을 하신분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사람이 반드시 몸으로만 모든 것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들이 하는 소리, ‘하느님은 모든 일을 하신 분’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하느님의 뜻을 기억하고 그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그 만큼 세상에는 많다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입니다. 회사의 높은 직책에 있는 사람이 하급자를 시켜 일을 하게 만들고도 자신이 그 일을 한 것처럼 만드는 경우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비슷한 맥락으로 판단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8.3 하느님이 사람의 몸을 취하시다.....
우리가 지금의 현실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하느님은 인간의 몸을 통해 인간의 몸으로 나신 일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세상의 역사에 등장하신 분을 가리켜 예수라고 이름 부릅니다. 그분은 하느님이셨으면서도 동시에 인간이셨기에 신적인 요소와 인간적인 요소를 함께 가지신 분이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릴 우리 신앙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는 ‘사람으로 오신 분이 알려주신 하느님의 뜻을 이해하기 위한 과정으로 알아들으면 됩니다. 삶에도 여러 가지 기초가 필요하듯이 예수님의 삶으로 표현된 하느님에 관한 내용과 그 앞에 해당하는 기초, 그분의 삶과 연결된 훗날 신앙인들의 모습에 대한 것이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내용을 이룰 것입니다.
예비신자 교리 (4)
9. 사람의 삶은 참으로 여러 가지 면을 갖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 앞에 내 삶을 드러낼때에 나쁘다거나 부족하다는 소리를 들을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생각이 평가받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삶에서 만나는 어떤 사람을 가리켜 그가 선하다 혹은 악하다고 말하는 것은 내가 판단하고 싶은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느냐에 있지 않고, 그가 어떤 삶의 모양을 보이느냐고 하는데서 결정하는 것입니다.
10. 사람이 행동으로서 판단을 받는다면, 그 어떤 사람도 악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섭섭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 사람도 자기 방식이라서 문제가 있는 것이지 분명히 자신도 사랑을 실천하면서 산다고 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11.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이기는 합니다만, 우리가 요즘 지내는 전례시기를 가리켜 사순절이라고 합니다. 사순이라는 말이 단순히 40이라는 숫자를 강조하는 것은 아닙니다. ㄱ 리고 오늘 하는 예절을 가리켜 성지주일 행사라고 합니다. 나뭇가지를 들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메시아로 모셔들인 날입니다. 이렇게 시작한 일이 결국에는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하는 일로 진행됩니다.
예비신자 교리 (5)
1. 시작기도는.....교재의 뒤쪽 편 ‘주님기도-성모송-영광송’까지.
2. 예비자 교리는 한 주를 건너뛰고, 두 주 만에 다시 뵙습니다. 그 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혹시 예비자교리를 안 하고 쉰다니까 속시원했던 분들이 있으셨나요? 사람은 같은 세상에서 같은 시간을 살더라도 그가 갖는 생각과 자세에 따라 그 결과가 크게 다른 행동을 합니다. 어떻게 생긴 사람이라고 해서 천사(天使)와 같은 삶을 살도록 정해진 사람이 없고, 어떤 모양의 사람이라고 해서 늘 남에게 욕을 먹고 손가락질 당하는 악마(惡魔)와 같은 삶을 살도록 규정된 것은 없습니다.
3. 우리 말에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의 습관이 어떤 결과를 맺는지 보여주는 격언이라고 할 것입니다. 바늘이 필요하니까 슬쩍!(?)하는 행동을 하겠습니다만, 사람이 그 일에 한번 성공하고 나면 사람은 배포(排布/排鋪, 머리를 써서 일을 조리 있게 계획함. 또는 그런 속마음)가 커지고, 자신감을 더 크게 갖게 됩니다. 이 배포라는 것이 항상 부정적인 일에만 커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일들이 하나씩 둘씩 경험을 쌓다보면 사람은 다른 일을 하게 됩니다. 그 결과에 따라 우리는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좋은 사람이 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4. 중국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하지요. 철학적인 이론이겠지만, ‘사람은 악하게 태어나지만 교육에 의해서 선해진다는 성악설’이 있기도 하고, ‘사람이 태어나는 바탕은 악하지만 그가 경험하는 세상의 일들에 의해서 점차로 악해진다고 하는 성선설’도 있다고 합니다. 어떤 것이 되었든 이 자리에 앉아있는 우리 모두나 세상 사람들의 삶을 정확햐게 구별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보다 훨씬 오래전에 살았던 사람들도 그런 고민을 하고 살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신기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이 자리에서 우리가 가져야할 것은 그런 신기한 지식 하나만 늘어나는 것은 아니어야 할 것입니다.
5. 지난 시간까지 네 번에 걸쳐서 우리 가톨릭 교회, 또는 다른 말로 천주교회에 관한 내용을 말씀드리기 위해서 뜸을 들였습니다. 신앙을 새롭게 갖는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저는 다른 예비자 교리에서 이런 말을 썼습니다. ‘신앙을 바꾼다 혹은 신앙을 새롭게 갖는다는 것은 삶의 기둥을 새롭게 세우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흔히 종교를 바꾼다는 말을 쓰지요? 내가 어떤 종교나 신념을 따라 살아왔든 그 내용이나 신앙신조들이 내 삶 이전부터 있어온 것이라면 우리들 삶은 어느 정도 설명해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온 여러 가지 자세를 특별한 경험이나 상황을 거쳐 새롭게 하는 것이 바로 여러분과 함께 하는 이 예비자교리시간이며, 신앙교육의 시간입니다.
6. 여러분이나 제가 어떤 자세로 했든 시간은 흐릅니다. 그리고 정해진 시간이 되면 우리는 내 다짐을 담아서 신앙인으로 살아가겠다고 다짐을 하고, 그 증거로써 세례라는 예절을 거치게 될 것입니다. 정해진 순서와 시간에 따라서 진행되는 일이겠습니다만, 그 시간을 우리가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소비하느냐에 따라 우리가 만들어내는 삶은 달라집니다. 이런 경우 아침이슬에 관한 이야기를 덧붙입니다. ‘뱀은 아침 이슬을 먹고 독을 만들고, 소는 그 이슬을 먹고 우유를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뱀이나 소가 모두 사람을 위해서 살아야한다는 규정이나 원칙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의 기준으로서는 그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뱀과 소가 독이나 우유를 만들어내는 것은 정해진 순서와 이치에 따라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각자의 일은 모두 자신의 삶에는 도움이 되는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대상에게는 어떤 결과로 남는 존재가 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삶은 모두 선택입니다. 그러나 한번 선택하고 난 다음, 그 선택에 대하여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람의 경우 후회한다고 해서 그의 삶을 완전히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것입니다.
7. 우리 천주교 신앙, 영어로 쓰면 가톨릭 신앙에서는 그 삶의 기준을 예수그리스도라는 인물에게서 찾습니다. 그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그가 보여준 삶의 본보기를 배우고, 그가 가르쳐준 삶의 지침을 우리도 삶에서 실천하려고 하는 것이 신앙인들이 갖는 자세의 기준이 됩니다. 물론 사람들이 모두 이 기준과 가르침, 그리고 본보기를 따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의 차이라고 할 것입니다.
8. 사람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는 것, 즉 오관(五觀)을 통한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과정을 겪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 각자가 드러내거나 맺는 삶의 열매는 다릅니다. 갖고 있는 마음자세가 달라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사람이 저마다 갖고 있다고 하는 욕심이 달라서 그런 것인지 그 차이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저마다 사는 존재들의 특징이 다양하듯이 그들이 맺는 삶의 결과도 다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다르고 갖고 드러내는 그런 특징들이 모여서 훗날 교회라는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되기는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배우려고 하는 자세가 있다면 합당하게 그 삶을 드러내야할 일입니다.
9. 우리 신앙의 근거로 생각하는 예수그리스도를 우리는 ‘하느님이요 사람’이라고 구별하고 그렇게 따릅니다. 이 내용은 지금 세상에 사는 우리가 만들거나 규정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 신앙의 전통에서 그렇게 말하고, 그보다 후대에 사는 우리는 자연스레 그 모습을 받아들인 사람으로 살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은 지금부터 대략 2000년전에 태어나신 분입니다.
10. 예수라는 인물이 지금의 이스라엘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것은 2000년전으로 생각합니다. 그 태어난 년도가 처음부터 규정되어서 정해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 설명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로마제국이 건국된지 754년에 예수님이 태어났다고 정했고, 그 해를 서기 1년으로 삼았는데, 후대 학자들에 의해서 로마건국시기가 754년이 아니라, 758년이라는 학설이 제기됐었고, 요즘에는 그것을 정설로 여깁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을 요즘에는 b.c 4년이라고 계산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점으로 삼았던 서기 1년을 바꾸기는 대단히 힘들기에 요즘에는 그렇게 계산합니다.
11. 이 예수그리스도는 어머니 마리아를 통하여 하느님의 아들로 태어납니다. 형식적으로 이어받은 혈통은 다윗가문의 요셉의 아들이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성인임금[聖君]으로 기억되는 분입니다. 그의 삶에 관해서는 따로 말씀드릴 시간이 있기는 하겠습니다만, 이스라엘 민족의 통합국가 임금으로 살았던 다윗은 몇 번의 오류가 있기는 했겠지만, 하느님 앞에서 성실하게 살려고 꽤나 노력한 사람으로 나옵니다. 요즘 우리가 읽을 수 있는 ‘시편’도 모두 그가 썼다고 하는 이론까지 있고보면 대단한 사람이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12. 하지만, 혙통으로 그렇게 태어났다고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비자 교리
사람은 목적 없는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좋은 말을 해도 그렇고,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해도 마찬가지이고, 하다 못해 내가 남에게 못할 소리를 해도 그 바탕에는 반드시 우리들 각자가 생각하는 합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가 자기 자신만의 생각을 담고 있는지, 아니면 남들도 인정할 수 있는 생각을 담고 있는지에 따라 다른 사람이 따라서 해도 좋은지 그렇지 못한지 판단을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 삶 주변의 일들을 우리가 그렇게 구별하기는 합니다만,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 자리에 나오신 여러분에게 물어도 같은 의미일 것입니다. 이 자리는 그저 그렇게 한때의 생각으로 마련된 자리는 아니고, 신앙교육을 위한 장소이고, 신앙 교육이 이루어지는 시간이라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모르셨다면, 이제부터라도 알면 됩니다.
그렇게 신앙인의 길에 들어서겠다고 한 바탕에는 감사할 일도 있을 것이고, 자신감 있게 살아가는 신앙인들은 어떤 배경으로 그렇게 살고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불안하게 느껴지는 현실에서 내가 두 발로 서기 위한 삶의 다짐을 확인하고 만들어가고 싶어서 함께 하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삶의 동기가 있다고 했습니다. 지금 갖고 있는 마음, 이 소리를 처음 듣는 순간의 마음이야 여러 가지 생각이 가능할 수도 있지만, 모든 것을 올바른 길을 따라 정화(淨化)시킬 필요는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자리에 함께 하신 목적에는 제가 말하는 지혜를 들으러 온 것은 아닐 것입니다. 또 신앙교육을 하게 되는 이 곳, 이 장소가 좋아서 오신 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서론을 길게 끄는 것은 그런 여러 가지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다는 소리를 하고 싶어서 그렇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바꾸어야 할 마음과 생각만을 고집하고 거기에 머물고자 한다면, 우리가 이 장소에 찾아오고 이 시간을 통해서 정말로 얻어야 할 신앙과 믿음이 자리할 공간이 없는 탓이고, 귀중한 시간을 내서 덜 중요한 것을 채우자고 하는 일이 옳은 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사람으로서 갖는 생각 때문이라면 지칠 날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보다는 삶의 질을 한 단계 높이는 신앙, 우리가 느낄 여러 가지 삶의 어려움을 통해서 우리가 가져야 할 요소들을 확인하는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4. 들어가는 말
성경1)은 크게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으로 구분합니다. 그렇게 구별하는 구약성경에 전도서라는 것이 있는데, 여기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코헬렛(=전도서) 11,7-12,8>에 나와 있는 말씀을 여러분에게 들려드리겠습니다.
젊음을 즐겨라
11,7 정녕 빛은 달콤한 것, 태양을 봄은 눈에 즐겁다. 그렇다, 사람이 많은 햇수를 살게 되어도 8 그 모든 세월 동안 즐겨야 한다. 그러나 어둠의 날이 많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앞으로 오는 모든 것은 허무일 뿐. 9 젊은이야, 네 젊은 시절에 즐기고 젊음의 날에 네 마음이 너를 기쁘게 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네 마음이 원하는 길을 걷고 네 눈이 이끄는 대로 가거라. 다만 이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너를 심판으로 부르심을 알아라. 10 네 마음에서 근심을 떨쳐 버리고 네 몸에서 고통을 흘려 버려라. 젊음도 청춘도 허무일 뿐이다
늙음과 죽음
1 젊음의 날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불행의 날들이 닥치기 전에. “이런 시절은 내 마음에 들지 않아.” 하고 네가 말할 때가 오기 전에. 2 해와 빛, 달과 별들이 어두워지고 비 온 뒤 구름이 다시 몰려오기 전에 그분을 기억하여라. 3 그때 집을 지키는 자들은 흐느적거리고 힘센 사내들은 등이 굽는다. 맷돌 가는 여종들은 수가 줄어 손을 놓고 창문으로 내다보던 여인들은 생기를 잃는다. 4 길로 난 맞미닫이문은 닫히고 맷돌 소리는 줄어든다. 새들이 지저귀는 시간에 일어나지만 노랫소리는 모두 희미해진다. 5 오르막을 두려워하게 되고 길에서도 무서움이 앞선다. 편도나무는 꽃이 한창이고 메뚜기는 살이 오르며 참양각초는 싹을 터뜨리는데 인간은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가야만 하고 거리에는 조객들이 돌아다닌다. 6 은사슬이 끊어지고 금 그릇이 깨어지며 샘에서 물동이가 부서지고 우물에서 도르래가 깨어지기 전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7 먼지는 전에 있던 흙으로 되돌아가고 목숨은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로 되돌아간다. 8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모든 것이 허무로다!
맺음말
지금 들려드린 이 글의 겉모양은 인생에서 느끼는 슬픔을 말하며, 이 세상의 삶은 아무런 희망도 없다고 말하는 내용인 듯 합니다. 그러나 코헬렛의 말씀을 통하여 그런 의기소침(意氣銷沈)한 것만을 느끼신다면 여러분의 삶에는 새로운 전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여러분과 함께 하는 시간을 통해서 그 방법을 찾아가자는 것이 이 장소와 이런 신앙교육을 하게된 목적입니다. 여기에서 보내는 시간이 헛되이 힘을 낭비하는 시간이 되지 않기를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5. 천주교회2)에 대한 소개
여러분이 여러분 앞에 서 있는 이 사제(司祭)를 통해서 들으려고 하는, 이 종교와 신앙을 한자를 빌려서 부르면 천주교회, 영어의 표현을 따서 부르면 가톨릭, 창설자의 이름을 넣어서 부르면 그리스도교, 한국에서 가진 특성을 감안해서 부르면 ‘성당’이라고 부릅니다. 같은 것에 대한 이름이 이렇게 다양합니다. 이제 여러분이 함께 하는 이 신앙에 대한 소개를 하겠습니다.
천주교회는 삶의 바탕을 돌이켜보게 하는 종교입니다. 말로 풀어나가기가 쉽지 않은 이 종교에 대해서 들으러 시간을 내어 찾아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그리고 제가 우리 종교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지루하게 이야기하지 않을 수 있도록 여러분들이 마음으로나마 바라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말로 풀어나가기가 쉽지 않은 종교라고 이야기는 했습니다만,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다르게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소개하려니 이런 말을 쓰는 것 뿐 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바라보는 대로 세상을 만들어갑니다. 어렵고 힘들고 불안하게 생각하면 한없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고, 그래도 살만한 곳이라고 생각하면 또 그렇게 보이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종교에 대해서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인간은 뭔가 다른 대상을 필요로 한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여러분들은 올바른 종교를 찾아오신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씀드립니다. 천주교회는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종교나 신앙중에서 가장 확실하고 믿음직한 종교입니다.
*** 창세기 18장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이야기 첨가.....
이 천주교회의 기원은 서남 아시아의 끝자락, 지중해의 동쪽 편에 면하여 있는 이스라엘 땅에서 약 2000년 전에 살았던 예수라고 불리던 인간, 그러나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들’이라고도 불린 분을 출발점으로 해서 시작한 종교입니다. 어떤 종교이든지 창시자가 없지는 않겠습니다만, 이 예수처럼 말썽이 많다고 생각했던 대상, 평가도 다양한 인물은 없습니다. 이 말썽이 많았다는 말도 앞서 이야기한 ‘말로 설명하기 쉽지 않은 종교’와 같은 의도로 사용합니다. 왜 이 예수가 말썽이 많았는가? 그것은 인간으로서 주어진 한 생을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났는데, 그것도 제 명(命)에 죽지 못하고 인간으로서 나이 33살에, 일반 죽음도 아니고 국가 반역죄에 해당하는 십자가 형벌(刑罰)의 죽음으로 이 세상을 떠난 분을 이야기하는 종교와 종파들은 무지무지하게 많기 때문입니다. 먼저 천주교와 개신교를 함께 부르는 말로서,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통일교, 여호와의 증인........ 참으로 많습니다.
그럼 그가 누구이기에 이렇게 많은 종교들이 그분을 언급하며 그를 시조(始祖)로 생각하는가? 그분은 인간으로 오셨으나, 보통의 인간이 아니었다는 것이 특별한 차이점입니다.
천주교회는 세상 만물과 인간의 기원[=출발]을 하느님으로부터 설명합니다. 흔히 과학에서 말하는 주장이나 이론으로 제시하는 것과는 그 출발점을 달리합니다. ‘그것은 신앙이지, 학문은 아니죠’라고 한다면, 응답에 대한 것은 신중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물 가운데는 우리의 눈으로 확인하지 못하지만 엄연히 존재하면서 우리의 생활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 더 많습니다. 그리고 그것의 상당 부분을 신앙이라는 영역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내 눈으로 확인하지 못하고 내 손으로 만져보지 못했다고 해서 그런 것은 없다고 주장하거나 그런 것에서 절대로 영향받지 않을 자신 있다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손바닥 위에 산다는 세균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음식을 입에 넣고, 이빨로 몇 번 씹어서 넘기기만 하면 웬만한 사람이라면 그 다음 단계는 우리가 신경쓰지 않아도 잘 돌아갑니다. 소화시키는 일, 거기서 양분을 뽑아내는 일, 내 몸에 필요한 힘으로 바꾸는 일, 그리고 마지막에 뒤로 내보는 일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몰라도 모든 일은 저절로 알아서 됩니다. 이게 정말 저절로 되는 것일까요? 정말로 이렇게 오묘하게 일이 진행되도록 한 그 배경에는 아무런 힘이나 특별한 역할을 하는 대상도 없이 정말로 저절로 되는 일일까요?
이 신앙이라는 것도 인간 사회 주변에, 인간 사회에 영향을 끼치려다보면, 인간의 언어로 표현해야 하고, 인간이 쓰는 말로 그 체제를 설명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신앙에 대한 설명은 우리의 글로 모든 것이 설명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제가 미리 여러분들에게 복선(複線)을 까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우리가 아무리 알고 싶어해도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우리의 머리로 확인할 수 없는 이상, 그 해결방법이 없는 일들은 분명 있는 법입니다.
천주교회에서는, 인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로써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었으며, 그분을 이 세상에 낳으신 인간의 어머니는 ‘마리아’였고, 그분을 사람으로 기르신 인간의 아버지는 ‘요셉’이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분은 이스라엘 부족의 하나인 유다인으로 오신 분이고, 인간으로서 하느님의 특징을 지니신 분이고, 하느님이면서 인간의 고통과 아픔에 동참할 줄 알았던 분이라고 가르칩니다.
1) 성경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으로 나눕니다. 가톨릭의 구약성경은 모두 46권이고, 신약성경은 27권, 합계 73권입니다. 개신교에서는 구약성서의 숫자를 39권으로 계산합니다. 희랍어로 쓰여진 7권의 성서를 ‘외경’이라 칭하고 합계에서 제외합니다. 그래서 개신교는 66권만을 성서로 인정합니다.
2) 천주교는 영어문자 ‘catholic’의 번역어입니다. 올바른 번역 언어는 ‘가톨릭’이고 ‘보편적’이라는 의미를 갖는 낱말입니다. 그에 비해서 흔히 우리가 알기에 기독교로 칭하는 개신교는 ‘protestant’입니다. 그 의미는 ‘증거하다, 항의하다’는 뜻을 갖습니다. 기독교라는 말은 영어의 ‘Religion of Christ<그리스도교>’의 번역어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따르는 전체 종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대칭의 방법으로 설명하자면, 천주교-개신교, 가톨릭-프로테스탄트입니다. ‘구교’-‘신교’로 대립하여 설명하는 방법은 왜곡된 심성을 갖고 표현한 악의(惡意)적인 생각이 깃든 잘못된 것입니다.
6. 신앙을 안내하는 일정소개
신앙이라는 것은 단순히 우리의 머리에 무엇인가를 넣고 가는 지식은 아닙니다. 그리고 사회에서 한 자락 할 수 있는 자격증을 주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기에 제가 여러분들과 만나는 이 시간이나 자리는 지식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님을 먼저 분명하게 말씀드립니다. 아마도 지식을 주고받는 자리이고, 뭔가 자격증을 얻어야 하는 자리라면 이 자리에 오실 분들도 없을 것입니다. 이곳에서 인정하는 뭔 자격증을 갖는다고 해서 세상 살이에 쓸모 있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기 쉬울 것입니다. 적어도 세상의 기준에 따라서 남들 앞에 서거나 돈을 벌수 있는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말입니다.
이 자리는 세상의 기준에 비교해서 뭔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그런 세상을 살게 하는 힘에 대한 배경을 설명하고, 우리 삶의 자세를 새롭게 보게하는 자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 교육을 일정한 기간까지 다 마쳤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신앙인으로 살 것을 다짐하는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 이 소리는 사제(司祭)로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는 우리 신앙의 내용에 대해서 자신감이 없다는 소리는 아닙니다. 무늬만 그런 것보다는 내용까지도 실제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강조로 말씀드립니다.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이 되는 것은 아니지요?
물론 호박이나 수박이나 각자 나름대로의 씀씀이는 따로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호박을 수박으로 보이게 하려면.....이라는 조건으로 드리는 말씀이지요.
그래서 제가 여러분과 함께 하는 아주 긴 기간--그래봐야 12월 초순까지이지만--을 다 마치고 난 다음에 뒤따르게 되는 세례에 관련하여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생활로 행동으로 표현할 준비를 갖추지 않은 입장에서 ‘세례만 덜렁하니 받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때문에 드리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것처럼, 진정 세상을 빛나게 하는 힘은 머릿속에 든 지식이 아니지요. 두 주전 목요일에 황우석 교수에 대한 검찰의 견해가 있었습니다. 검찰에서는 과학계의 성수대교 붕괴사건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했습니다. ‘사기와 연구비의 업무상 횡령 그리고 생명윤리법 위반 등의 혐의’로 불구속한다고 했습니다. 한 때는 우리나라에 떠오른 샛별이었지요? 복제한 돼지 몇 마리만 가지면 온 세상 사람들이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편하게 살 수 있게 될 거라고생각하게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황우석 박사에 대한 것이 말이지요.
검찰의 마지막 결론은 이렇습니다. “난치병을 앓고 있는 환자나 가족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 남겼다”는 것입니다. 실험실패에 대한 중압감 때문에 줄기세포를 섞어심고, 논문의 조작을 지시했으면, 수많은 사람들이 냈던 성금을 개인적으로 유용하고, 생명의 근원인 배아를 돈을 주고 사고 팔았다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불교신자인 이 황우석 박사에게, 600억원을 무조건 희사하겠다고 했으니,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
세상의 이런 모습이 신앙에는 없습니다. 갑작스레 우리 삶을 화들짝 놀라게 하는 사건이 신앙에는 없습니다. 세상에서 표현하는 말대로라면, 쇼킹하고 자극적인 것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때로는 아주 지루해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현상에 임하는 우리들 각자가 제대로 살 것을 전제로 하는 이야기가 바로 신앙에서 말하는 내용이고, 여러분 앞에 서 있는 사제인 저를 통해서 여러분들이 들을 이야기입니다. 맥이 빠진 자세로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7. 종교에 대한 개인의 견해 묻기
다음으로는 본인들의 현재 종교에 대한 생각을 물고 싶습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우리 신앙을 말로 풀어가는 데에 참조할 수 있어서 여러분들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종교가 다양하게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사람들의 필요성에 따라 살아온 삶의 기준이 달랐다는 소리도 됩니다. 여러 종류로 표현할 수는 있겠지만 몇몇 종교에 대해서 여기 참석하신 여러분들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돌아가면서 한 분씩 말씀해 주셔도 좋고,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같은 부분을 이야기해주셔도 좋습니다.
** 진행순서 : 먼저 말을 듣고, 전체적으로 요약하기**
8. <개신교. Protestant>
개신교는 1517년이래, 가톨릭에서 갈라져 나간 종교입니다. 그래서 성공회와 더불어 가톨릭에서는 이들을 가리켜 ‘갈라진 형제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부릅니다.
역사배경에는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베드로 대성당-건축에 100년, 완전히 꾸미는데 200년 더 걸린 건물.-의 신축과 관련이 있습니다.
당시 아우구스티노회 수사 신부(神父)였던 마르틴 루터를 시작으로 해서 훗날 캘빈, 쯔빙글리등 많은 개신교 신학자들에 의해서 틀이 잡힌 믿음의 체계입니다. 그들이 공경하는 대상이 하느님이요, 그리스도 예수라는 사실에 천주교와 다른 점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의 경우에는 개신교 신자가 약 2500만 명이라고 하는데 비해서, 천주교 신자는 약 360만 명 정도 됩니다. 그러나 이 숫자는 하나 하나를 셈한 것이라고 인정하기는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또한 중복 계산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 사건에 대하여, 학생들에게 가르칠 때에는 말들에 대한 몇 마디 추가하고자 합니다. 흔히 가톨릭을 구교(舊敎)라 하고, 개신교를 신교(新敎)라 합니다. 글자만 생각한다면, 구교보다는 신교가 낫겠지요? 새로운 것이니까요?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것도 세상에는 있습니다. ①장맛이 그렇지요? ?친구의 우정이 그렇지요? ?역사의 길이도 그렇고, 경험도 그럴 것이고....
또 한 가지 마르틴루터의 이 행동을 가리며 종교개혁(宗敎改革)이라고 자신감있게 설명합니다. 하지만, 개혁은 아니지요. 개혁이란 말의 뜻은. ‘제도나 기구 따위를 새롭게 뜯어고침/ 1. 새롭게 뜯어고침. 2. 합법적 절차를 밟아 정치상·사회상의 묵은 체제를 고쳐 새 체제로 바꿈.’ 이 말대로라면 묵은 것에 해당하는 그 변혁의 대상이 되었던 가톨릭은 없어져야 정상이라는 소리가 되겠지요? 그래서 이 표현은 적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상적인 표현은 ‘분열’입니다.
물론 개신교를 통칭할 때, ‘기독교’라는 표현도 합당치 않은 표현입니다. 기독교라는 말은 영어로 표현하면, 그리스도교를 한문으로 표현한 소리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좀 더 큰 의미로, 천주교와 개신교를 합쳐 부르는 말이고,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를 합쳐 부르는 말입니다. 또 다른 말로 하면, 구교와 신교를 합쳐서 부르는 말이고.....
혹시, 개신교에서 생각하는 대로, 없어져야 할 대상이라고 하면, 천주교를 빼고서 굳이 개신교를 부른다면............기독교라는 말이 통할지도 모르지요.... 제갸 좀 길게 이야기했습니다.
9. <불교 >
불교는 인도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기원전 약 500년경 인도의 카탈라 왕국 왕자가 사람이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모습과 그 원인을 깨우치기 위하여 출가(出家)했고, 보리수나무 몇 년간의 수련을 거친 후, 그 나무 아래에서 대오각성(大悟覺醒)하고 훗날 종교로 성립된 믿음입니다. 이 불교에서는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사람을 가리켜 ‘석가모니1) 혹은 부처’라고 합니다. ‘깨달은 자’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부처[佛]에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은 승(僧)이 되어 법(法)을 지키며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종교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부처의 길로 갈 수 있게 노력하고 움직이는 ‘대승불교(大乘佛敎)’와 개인의 구원을 우선적으로 삼고 수행을 거치는 ‘소승불교(小乘佛敎)’로 나누어집니다. 한국에 전파된 불교는 대승불교라고 합니다. 개인만이 아니라, 더 많은 공동체가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기를 바란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을 것입니다.
10. <유교.>
유교는 중국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공자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효도와 인의를 중시하는 가르침이요, 종교입니다. 서양에서 규정하고 정의하는 방법에 따르면, 이 유교는 종교의 범주에 들지 아니하고 인생사의 가르침 정도로 분류합니다. 종교학에서 구분하는 이유를 따른다면, 이 종교에는 내세(來世)의 개념이 없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11. <무교>
이 무교(無敎)는 가장 효율적인 종교입니다. 사실은 종교라고 하는 측면에 들지도 않습니다만, 그렇게 구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말로는 쌍수교(雙手敎)라고도 하지 않을까 합니다. 자신의 힘을 믿는 종교입니다. 이것이 종교라면, 대단히 효율적이라고 할 것입니다. 편안하고 아무런 문제없을 때는 이것처럼 효율적인 종교도 없으나, 지나치게 자신을 과신하는 나머지 문제가 생겼거나 삶의 어려움에 부딪혔을 때 이 종교의 신봉자들은 그 해결책을 어떻게 찾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12. 이렇게 다른 종교의 이야기를 하는 데에 특별한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이미 한가지 이상 믿음을 지니고 살아오셨을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올바른 종교에 입문하기 위한 방법이었다고 생각한다면, 앞으로 가톨릭이라는 종교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그 방법을 찾기 위해서 시작한 것입니다.
13. ‘종교’ 또는 ‘믿음’은 우리가 사용하는 말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럴 수도 없습니다. 다른 종교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가톨릭의 입장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리고 몇 마디의 말로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종교와 믿음에는 아무리 뛰어난 지혜로 설명하려고 해도 우리의 지성이나 인식수준이 가 닿을 수 없는 부분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을 만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모조리 거부하는 방법과 그것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자리에 오신 것은 말로 알아듣고 수용하기 위해서,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방법에 따르기 위해서 오신 것이라 믿고 싶습니다. 아마도 반대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오신 분은 없을 거라 생각하고 싶습니다.
14. 가톨릭의 특성 : 가톨릭, 천주교는 ‘설명하기 쉽지 않은 골치 아픈 종교’입니다. 왜 그렇게 말씀을 드리는지 그것은 여러분들에게 교리를 설명해 드리면서 이야기할 시간이 있을 것입니다. 제가 그렇게 말을 시작했다고 해서 가톨릭의 종교를 받아들이거나 그 정신을 따라서 사는 생활이 고리타분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우리가 접근 할 수 없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믿어야 할 것과 따라야 할 것만 구별할 줄 안다면, 천주교라고 하는 종교는 접근하기 쉬운 종교입니다.
15. 교리의 진행 순서 :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릴 교리의 순서는 0.서론에 해당하는 ‘천주교는 어떤 종교인가’ 1편 ‘믿을 교리에 대하여’ 2편 ‘신앙인으로 지켜야 할 계명에 대하여’ 3편 ‘인간이 하느님의 은총을 받는 방법에는 어떠한 것이 있는지’을 설명하는 순서로 하겠습니다.
16. 천주교에 대한 말씀을 드리면서, 인간의 소리인 제 소리만 가지고 하는 것은 아마 힘이 없을 것입니다. 제가 아무리 말을 잘 한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소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알아듣고 받아들이실 내용은 순수 인간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것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통적인 방식으로 인정돼온 성경 말씀을 가끔씩이라도 인용하는 방식으로 신앙의 내용을 말씀드리는 순서로 진행하겠습니다.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성경(聖經)은 인간이 알아볼 수 있는 글로 현재는 번역돼 있고, 세상의 그 어떤 책보다도 많이 팔리는 책입니다. 이 성경의 내용을 제가 여러분들에게 모두 말씀드린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럴만한 시간도, 능력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톨릭 교회의 신앙을 설명하고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릴 만한 수준에서 여러분과 함께 성경을 사용할 것입니다.
1) 불교의 시조. 과거칠불의 일곱째 부처로, 세계 4대 성인의 한 사람이다. 기원전 623년에 지금의 네팔 지방의 카필라바스투 성에서 슈도다나와 마야 부인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29세 때에 출가하여 35세에 득도하였다. 그 후 녹야원에서 다섯 수행자를 교화하는 것을 시작으로 교단을 성립하였다. 45년 동안 인도 각지를 다니며 포교하다가 80세에 입적하였다.
제 1 부 서론 : < 천주교는 어떤 종교인가? >1)
( 320개 항목 중에서 1 -12번까지)<2006-06-02>
천주교회를 외형으로 관찰할 수 있는 12가지 특성을 순서에 따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가 12가지 특징이요, 특성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이제까지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소리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잘 사용해오던 말과 글을 사용하여, 사람의 세계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세계, 하느님나라에 우리가 함께 하기 위한 사정을 인간의 말로 설명합니다. 설명하는 그 내용이나 범위가 순전히 사람의 세계에 한정되는 것이라면, 누구라도 쉽고 편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것들일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언어를 사용해서 말을 합니다만, 순순하게 사람의 세상만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기에 분명히 사람의 말로 설명하는 것에 한계가 있습니다. 아래의 12가지 특성에도 나오는 말입니다만, 천주교회는 하느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설명이 가능한 계시(啓示) 요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가톨릭교회, 흔히 쓸 다른 말로는 천주교회에 대해서 알려고 오셨으니, 설명을 시작하겠습니다. 각각의 번호와 답에 나와 있는 내용들든 자꾸만 반복하셔서 외우지는 못하더라도 입과 머리에서 쉽게 나올 수 있는 내용들이 되게 하신다면, 좀 더 나을 것입니다.
1. 천주교 (1항-12항)
1. 사람이 무엇을 위하여 났느뇨?
: <답> 사람이 천주(=하느님)를 알아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세상에 났느니라.
제 1 번의 문-답은 사람의 존재에 관한 관찰이고, 그에 대한 교회의 응답입니다. 사람이 자기자신이 태어나는 목적을 알고 세상에 울음을 터뜨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부모되는 사람이 맺은 사랑의 결과이지요? 그렇다고 생각할 수 있다면, 부모가 그 목적을 기억하고 말해줄 수는 있어도 태어나는 생명체가 자기 탄생의 목적을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 사항에 대하여 교회공동체는 그 목적을 이야기합니다.
태어나는 일에 대해서만큼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없습니다. 나라를 선택하는 것도, 부모님을 골라서 만나는 일도, 그리고 형제와 자매를 선택하는 일에 대해서도 우리가 가진 권리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자발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닌 만큼 자신이 스스로의 삶의 목적을 결정할 수는 더더구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 목적을 심어준 대상을 찾아, 우리가 왜 태어났는지, 나를 왜 태어나게 했는지, 나를 태어나게 한 그 목적은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 가장 정확하고 손쉬운 대답이 될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 대상은 바로 하느님입니다. 즉 내가 하느님을 만나야 그 대답을 들을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 첫 번째 항목에서 묻는 내용은 인생의 목적은 무엇이겠는지 묻는 것입니다. 이런 질문과 대답을 하지 않고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자신이 원하지 않고 미처 느끼지 못해도 삶의 목적이 있는 법입니다. 그 질문에 대해서 천주교회에서는 위의 <답>에 나온 표현처럼 응답합니다.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인생의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는 하느님을 공경하고 당신의 계명을 따라 선하게 살고 죽은 후에는 그 영혼이 당신의 나라 천국(天國)에 들어가 당신의 복락(福樂)을 함께 누리게 하려는 뜻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려면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알아야지요? 우리 사람들이 사는 것이 우리를 만드셨다고 하는 하느님의 의도와는 얼마나 일치하는지 알아야 하겠지요? 그 질문을 하지 않고, 그 대답이 없이 사는 것도 삶의 방법은 될 수 있지만, 뭔가 부족한 삶이 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여기서 잠깐 이야기를 더 말하기 전에,
세상 만물의 태동과 발전에 관해 과학에서 말하고 받아들이는 이론은 ‘진화론(=모든 생물은 지극히 원시적인 종류의 생물로부터 진화해 왔다는 학설)’입니다. 영국사람이었던 찰스 다윈(=Charles Robert Darwin (1809-1882))이라는 사람이 주장한 이론입니다. 그에 대한 생각이야 오래전부터 있었을지 모르지만, 이 세상에 등장하지 200년이 채 되지 않은 이론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이 시간은 과학에 대한 것을 말하는 시간은 아니기에, 과학의 이론은 이 정도만 말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는 같은 사안에 대하여 설명하는 이론을 가리켜 ‘창조(=1. 전에 없던 것을 처음으로 만듦. ↔모방./ 2. 신이 우주 만물을 만듦)론’이라고 합니다. 창조(創造)라는 말은 인간보다 우월하고 월등한 힘인 하느님에게서 세상 만물과 사람의 출발 근원을 찾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손에 의해서 창조되는 것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신앙인들이 그렇게 받아들이고 그렇게 믿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내용은 성서의 첫 번째에 실려있는 구약성서2) 첫 번째 권 <창세기>에 나옵니다.
다음으로 ‘천주(天主=하느님)’라는 말을 설명하겠습니다. 중국(中國)에서는 최고(最高) 신(神)의 개념을 ‘상제(上帝)’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상제(上帝)는 임금이기는 하지만 지상(地上)에 머무는 임금은 아닙니다. 국어사전에 보면 ‘상제(=上帝, 하느님)’이라고 설명합니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말에는 ‘옥황상제’(=도가(道家)에서 말하는 하느님.玉帝)가 있습니다. 옥황상제의 개념과 굳이 비교하자면, 천주는 이런 의미를 갖는 대상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고, 천주는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하고 다스리시는 분이고, 인간(人間)의 구원(救援)을 위하여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신 분,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신 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훗날 세상을 완성하시는 날, 또는 종말(終末)에 인간의 모든 행위를 심판하실 최고의 분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요즘에는 천주(天主)라는 한자(漢子) 대신에 ‘하느님3)’이라는 말을 씁니다. 표현이 달라지니, 뭔가 차이가 나는 것은 분명하겠습니다만, 여러분들과 함께 하는 이 자리에서는 같은 의미로 사용하겠습니다.
창조(創造)라는 말은 ‘처음으로 만듦, 또는 신이 우주 만물을 지음. the Creation’이라고 국어사전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지적하면, 구약성서 창세기에 나오는 하느님의 최초의 행위를 인간이 그 단어를 사용하여 설명하는 말입니다.
구약성서의 첫 번째 나오는 창세기는 인간의 창조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느님이 하신 세상의 창조와 인간을 창조하신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성경은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치도 하느님의 일을 어느 한쪽편에서 처음부터 모두 본 것처럼 말입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성경은 역사적인 사실의 기록을 우선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눈으로 같은 역사적인 사실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기록이기도 하구요.
그런 의미에서 굳이 설명하자면, 인간은 죽고 나면 흙으로 돌아갑니다. 영어에서는 인류를 지칭하는 낱말을 ‘homo-’라는 낱말을 붙여서 설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영어는 그 말의 기원을 상당수 라틴어에 두고 있습니다. 라틴어에서는 인간을 ‘homo'라고 표현하고, 창세기에 나오는 것처럼 인간을 만들 때, 하느님이 사용하신 재료인 ’흙‘은 ’humus'로 적습이다. 사림이나 흙은 그 말의 뿌리{=어근(語根)}이 같다고 합니다. 창조의 모습을 아무도 본 이가 없다고는 하지만, 이것은 기원을 따져서 확인하는 사람의 믿음입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사람은 죽으면 흙으로 돌아갑니다. 땅에 묻습니다. 세상에 남긴 몸을 묻을 공간이 땅이 부족하다는 소리가 나오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구약성서 첫째 권으로 나오는 ‘창세기(創世記)’에, ‘하느님은 진흙으로 인간을 만든 다음에 코에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창세기 2,7)’고 기록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숨을 잔뜩 들이마시고 죽는 사람은 없습니다. 급작스레 삶을 마치는 사람이 있다면 몰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폐에 갖고 있던 모든 숨을 내 쉰 다음에 죽습니다. 이런 사실들이 하느님의 인간창조를 설명한다고 말은 하기 어려워도, 이런 믿음을 글로 남겨 놓은 사람들은 지금부터 약 3000년전에서 2500년 전 사이에 그렇게 기록했습니다. 이것은 누가 봐서 기록한 것이 아니기에, 우리가 믿음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출발점으로 해서 생겨난 사람들이 나아가야 할 길을 처음 두 개의 항목에서는 신앙의 내용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에게서 인간이 출발했다면, 그렇게 만들어준 대상을 아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 될 것이고, 그 하느님은 인간에게 일정한 삶의 방법을 제시하시면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분으로 머무시는 것입니다. 물론 이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은 따로 있습니다.
2. 사람이 천주를 알아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하려면 반드시 어떻게 해야할 것이뇨? : <답> 사람이 반드시 천주교를 믿고 봉행(奉行=웃어른이 시키는 대로 받들어 행함)할지니라.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자신이 사람이라면 반드시 해야 할 일의 내용이 두 번째 항목입니다. 인간이 하느님을 알고, 그 분의 가르침을 배우려면, 반드시 그분의 가르침을 이야기해주고 삶의 방법을 제시하는 종교, 천주교(=가톨릭)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믿고 거기에서 제시하는 방법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천주교를 믿고 따른다는 것은 천주, 즉 하느님을 공경한다는 것이고, 자신의 영혼4)을 구원하는 행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3. 천주교는 무엇이뇨? : <답> 천주교는 천주 친히 세우신 참 종교니라.
천주교라는 종교에 대한 정의를 말하는 내용을 살필 차례입니다.
천주교(天主敎)는 그리스도교라는 종교를 중국을 통해서 전래된 종교이고, 영어로 표현하여 읽으면, 가톨릭<Catholic>입니다. 천주교는 불교처럼 인간에게 주어진 이성이나 지혜를 통해서 깨달아 생긴 종교도 아니고, 인간적인 특별한 목적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세운 종교도 아닙니다. 천주교는 하느님이 세운 종교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느님을 보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천주(=하느님) 친히 이 종교를 세웠다는 것은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 인간으로 오셨고,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이 이 종교의 초석, 출발점이 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분으로부터 유래되었으니, 창시자의 이름을 따라 ‘그리스도교’라고도 부릅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아가며 믿음을 고백하고 공동체를 이루는 단체라는 의미를 갖는 것이 바로 이 말이 갖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①반드시 천주교를 믿어야 하느냐고 질문할 수도 있습니다. 질문이야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만, 하느님이 세우신 종교가 아니라면 사람의 생각대로 해도 좋겠지요? 하지만, 변덕스러운 인간의 생각을 담아 이 순간에는 이렇게 해도 좋고, 저순간에는 저렇게 해도 좋은 것은 아닙니다.
또한 왜 하필이면 동양에도 종교가 많은데 서양에서 온 것이어야 하느냐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어디서 생겼는지가 아니라, 인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가장 올바른 신앙은 어떤 것이냐를 먼저 구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천주교를 가리켜 서양(西洋) 종교라고 말도 합니다만, 생긴 것은 서남 아시아에 있는 지금의 이스라엘 땅에서 생긴 것이고, 지금과 같은 체계를 갖춘 곳이 서양일 뿐입니다. 세계의 종교 가운데 서양에서 생긴 것은 없습니다. 종교심성은 동양이 시작된 것이지, 서양에서 생긴 것은 없습니다.
1) 여기에서 설명하는 내용은 개인적으로 설명한 글을 중심으로 하여, ‘윤형중 신부님’이 해설하신 상해(詳解) 천주교요리(天主敎要理)의 내용을 첨부, 보완한 것입니다. ‘詳解 天主敎要理’는 가톨릭 출판사에서 출판된 것이며, 1957년에 초판이 나온 책으로 상중하 3권으로 돼 있습니다. 또한 괄호안에 들어간 내용은 교리의 내용을 일부 쉬운 말로 번역한 것이며, 가끔씩은 변기영신부님이 펴내신 것을 따른 것도 있습니다.
2) 일반적으로 성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서로 취급되기도 하지만, 순수한 의미의 역사서는 아니고 실제 생활을 신학적인 반성(反省)을 거친 작품이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 성경(聖經)이 담고있는 내용에 따라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으로 나눕니다.
3) 개신교에서는 ‘하나님’이라는 말을 대등한 의미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국어학(國語學)의 어법(語法)상, 하나 둘로 셀 수 있는 대상에는 사람을 의미하는 ‘님’이 붙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느님....
4) 영혼(靈魂)은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를 가리킵니다. 그렇지만 사람을 구성하는 한 요소로 구별합니다. 사람은 육신과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육신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도구요, 영혼은 육신을 통제하고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고 그분과 일치할 수 있는 요건을 갖춘 영(靈)적인 존재입니다.
4. 천주교 요리는 몇 끝을 포함하느뇨?
: <답> 천주교 요리는 세 끝을 포함하느니, 1)믿을 교리와 2) 지킬 계명과 3)은총을 얻는 방법이니라.
여기에서 말하는 <끝>이란, 중요한 단위를 말합니다. 우리 천주교 신앙을 크게 나눌 때, 셋으로 구별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의 생활은 영아(?兒)기, 유아(乳兒)기, 청소년기, 장년기, 노년기 등으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구별하기는 해도 몇 살 때부터 어떤 시기라고 구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구별이 모호해서가 아니라, 사람마다 차이가 있고, 그 차이를 인정하다보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같은 의미에서 천주교회의 교리에 대한 것도 그렇게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천주교 신앙의 내용 구별은 믿을 교리, 지킬 계명, 은총을 얻는 방법으로 설명합니다. 하지만, 이 구별 역시도 인위적인 것입니다. 셋으로 구별을 하기는 합니다만, 내용마저 전혀 다른 차원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믿을 교리’란 사람이 가진 지능과 지식으로 미처 알아듣지 못한 내용을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인정하는 내용이며, ‘지킬 계명’이란 몸으로 실천해야 할 내용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은총을 얻는 방법’이란 하느님의 도움을 얻는 방법으로 설명하고 나중에 해당부분으로 자세한 설명을 미루겠습니다.
5. 믿을 교리는 무엇이뇨? : <답> 믿을 교리는 대충 사도신경(使徒信經)에 실려있는 것이니라.
하느님의 아들로서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직제자들을 가리켜 사도(使徒)라고 합니다. 믿을 교리의 내용을 담고있는 사도신경(使徒信經)은 사도들이 예수님께 배워서 믿고 우리에게 전해준 최고의 원리가 실려있는 경문(經文)을 가리킵니다. 기도문에 적혀 있는 사도신경을 한번 더 함께 읽겠습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 (밑줄 부분에서 고개를 숙이며)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 그리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 성령을 믿으며,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와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아멘.
이 사도신경의 내용에는 성부에 관한 짤막한 내용,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긴 내용, 성령에 대한 짤막한 내용, 그리고 교회공동체의 네가지 특성이 나옵니다.
6. 지킬 계명은 무엇이뇨? : <답> 지킬 계명은 천주십계(十戒)와 천주교회의 모든 법규니라.
천주 십계는 하느님께서 사람들에게 모세를 통하여 반포하신 10가지 계명을 가리키며, 교회 법규는 우리 신앙생활을 지도하기 위하여 교회에서 세운 규정입니다. 역사적으로 등장한 시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 땅을 탈출하고 나서 90일쯤 되던 때에, 시나이산(=호렙산)에서 하느님과 40일을 지낸 모세가 받아들고 내려온 계명판 두 개에 적혀 있었다고 한 것입니다. 구약성서 탈출기 20장과 신명기 5장에 나옵니다. 하지만, 성경에 나오는 내용과 우리가 기도문에서 볼 수 있는 십계명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주요 기도문에 나오는 십계명은 아래와 같습니다.
일.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 이.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삼.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 사. 부모에게 효도하여라. 오. 사람을 죽이지 마라. 육. 간음하지 마라. 칠. 도둑질을 하지 마라. 팔. 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 구.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 십.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마라.
가톨릭 교회의 모든 법규는 교회법전과 신앙인들 사이에서 지켜 내려져 왔던 관습과 규정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규정들에는 구속력이 있는 것도 있고, 권장 사항도 있습니다. 또한 교회법전은 1752개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법조문이 우리 신앙인들의 구체적인 생활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현재 교회에 통용되는 법전은 1982년에 요한바오로 2세 교황님의 이름으로 반포된 ‘요한바오로 2세 법전’입니다.
7. 은총을 얻는 방법은 무엇이뇨? : <답> 은총을 얻는 방법은 특별히 기도(祈禱)와 성사(聖事)니라..
‘은총(恩寵)’이라는 말은 흔히 은혜라는 말로 바꾸어 쓰기도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의 신앙에서는 이 은총이라는 말을 ‘하느님께서 주도권을 가진 인류를 향한 사랑’이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말입니다. 가톨릭 교회의 교리를 설명하면서 이 말을 사용하는 것은 신앙과 신앙인 삶의 성격을 표현하는 아주 중요한 용어입니다.
기도는 사람이 하느님과 나누는 대화라고 교회(敎會)는 가르치며, 기도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바로 하느님을 공경하는 일입니다. 성사(聖事)는 하느님 은총을 인간이 받을 수 있는 통로라고 예로부터 가르쳐왔습니다.
만일 천주교회에 ‘믿을교리’만 있다면, 신앙이나 종교가 아니라 철학체계에 불과할 것이고, 지킬 계명만 있다면 규정집에 불과할 것이고, 은총을 얻는 방법만 있다면 신비주의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가지가 조화있게 융합되어 있어 생명있는 종교를 이루었다.
8. 천주 어떻게 이 교리를 가르쳐 주시뇨? : <답> 천주 계시(啓示)로서 이 교리를 가르치사, 성경(聖經)과 성전(聖傳)에 보전케 하시니라.
하느님은 당신의 뜻을 인간이 계속해서 알아듣고 삶의 지침으로 사용하도록 배려하셨는데, 기록된 것을 성경이라 하고, 교회 안에서 전래되어 내려오는 것을 성전(聖傳)이라 합니다. 그 말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아래 10항과 11항에서 자세하게 반복합니다.
9. 계시(啓示)는 무엇이뇨? : <답> 계시는 천주 친히 진리를 사람에게 가르치사, 영적으로 그 진실됨을 증명하여 주신 것이니라..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다가오시는 방법을 표현한 항목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오관(五官)으로 감지할 수 없는 분입니다. 눈에 보이지도, 귀로 그분의 소리를 들을 수도, 냄새를 맡을 수도, 맛을 볼 수도, 스쳐서 느낄 수도 없는 분입니다. 어찌하여 가톨릭 교회에서는 이렇게 인간의 감각이 가서 닿을 수 없는 분을 공경하고 그분의 뜻을 따르겠다고 하는지 말로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사람은 감각의 동물입니다. 그래서 말로 듣는 것보다는 눈으로 본 것을 더 우선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이 보고 전달해주는 것보다는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내가 보고 내가 느끼는 것을 더 우선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것을 이러한 기준으로 계산한다면 그 기준에 맞을 것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기준을 한가지 설명한다면, 이 가톨릭 교회의 신앙은 ‘유대인’이라는 특정한 민족이 체험하고 그 체험을 정리한 것을 교회가 받아들여 발전, 정착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그 체험을 바탕으로 해서 성립된 종교요, 신앙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수한 방법으로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보이시는 첫 번째 방법이 ‘계시’라고 교회는 가르칩니다. 계시(啓示)라고 하는 말의 어원은 ‘휘장을 열어 젖히고 보여준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보통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고유영역에 해당하는 것이니, ‘그 휘장을 열어 젖히고 응답하시는 것도 하느님’이시기에 보여주시는 내용의 주도권도 하느님이 가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렇게 하느님이 알려주신 일에 대해서만 탐구할 수 있고 알아들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음은 우리의 감각이 알아듣는 방법으로 표현할 수 있는 하느님의 뜻에 대한 것으로 성경(=성서)와 성전(=전승)에 대한 것입니다.
10. 성경(聖經)은 무엇입니까? : <답> 성경은 직접 성신(=성령)의 감도(感導)하심을 따라 기록된 천주의 말씀으로, 그리스도의 강생(降生)이전에 쓰인 것은 구약이라 하고, 강생 후 사도시대에 쓴 것은 신약이라고 합니다. 이 외에 다른 성경은 없습니다.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의 단순한 역사의 기록은 아닙니다. 그런 기준에 따라서 본다면, 세세하게 모든 내용을 기록하지도 못하고 누락된 내용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며 한 국가(國家)의 역사가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그렇게 읽히지도, 책으로 인쇄되어 많이 팔리지도 않을 것입니다. 성경1)은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들의 역사를 하느님의 시각으로 반성하여 쓴 글입니다. 삶의 모습은 내가 만드는 것이고, 내가 움직이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 삶을 정리하고 돌아볼 때에 내가 과연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살고 움직였느냐....하는 입장에서 보고 기록한 것이 성경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입장은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인간의 손에 쓰여졌다는 성령 영감설을 말합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인류에게 하느님께서 의도하고자 하는 바가 있었다는 것이고, 그것을 충실하게 표현했다는 것이며, 우리는 단순한 이스라엘 역사서로 읽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같은 정신을 찾으려는 자세로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구별합니다. 기원전2)(BC) 1000년경 - BC 150년까지 기록된 것을 구약성경이라고 하고, 기원후(AD) 50년경 - AD 110년 사이에 기록된 것을 신약성경이라고 합니다. 참고로 기원(紀元)이라는 말의 전ㆍ후 구별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중심으로 합니다.
성경은 사람이 볼 수 있는 언어로 쓰여진 것은 몇 가지로 구별됩니다. 지금의 문자와 모양에 있어서는 차이가 납니다만, 그중 많은 분량이 쓰여진 것은 구약성경-히브리어, 신약성경-(꼬이네) 희랍어로 분류합니다. 물론 구약성경 가운데에는 희랍어로 기록된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희랍어로 된 구약성경을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천주교에 비해서, 성경의 숫자가 천주교보다 7권이 적습니다. 천주교에서는 73권, 개신교에서는 66권으로 성경의 권수를 계산합니다. 이미 가톨릭에서 성경을 그렇게 보존해왔는데, 1500년의 세월이 지난 다음에 다른 기준을 적용하여 떼고 분리한 것입니다.
글로 쓰여진 많은 문서들 가운데, 어느 것이 하느님의 말씀을 담고 있느냐를 정한 것을 가리켜 ‘정경(正經)’이라고 합니다. 가톨릭은 교회라는 구조가 성서를 보존해 왔다는 내용에 의거하여, 서기 90년경 얌니야 종교회의에서 규정한 구약의 경전을 그대로 인정했고, 서기 397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정한 신약의 정경을 그대로 인정하여 지금의 73 권을 성경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성경이 교회의 권위에 지나치게 종속돼 있다고 주장하며, 교회와 전승의 권위에 반발하여 히브리어와 그리스어의 원본을 중요시하는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였고 이에 근거하여 신구약 66권의 성서만이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정경으로 강조합니다.
11. 성전(聖傳)은 무엇입니까? : <답> 성전은 성경에 기록되지 아니한 천주의 말씀으로, 영구히 그르침이 없이 가톨릭 교회 안에 전하여 내려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중요한 신앙에 중요한 근거를 제공하는 것을 가리켜 성전(聖傳)(tradition)이라고 합니다. 이는 성경과 같은 대우를 받는 것은 아니지만, 중요성에 있어서 같은 효력을 갖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더 중요한 우선권을 두는지의 구별은 없습니다.
위 10번 항목과 11번 항목에서 언급하는 두 가지, 성경과 성전은 ‘인간이, 그가 가진 지혜로 하느님의 뜻을 알아들을 수 있는’ 계시(啓示)의 원천(源泉)이라고 합니다.
교리에 대한 교회의 입장이 다음 항목입니다.
12. 가톨릭 교리를 배워야 할 의무가 있습니까? : <답> 가톨릭 교리를 배워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 뜻만 배우도록 할 뿐 아니라, 그 중에 중대한 대목은 본문까지 외워두는 것이 좋습니다.
이러한 규정에 따라, 강조되는 교리와 그 내용에 따라 가톨릭 교회는 현재까지 그 모습을 유지해왔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의(自意)에 따라서 교회 구성원이 되는 과정에 들어오신 분들이 여러분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교리의 모든 내용을 머리 속에 담을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자주 반복하여 그 내용을 읽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여러분에게 말씀드릴 내용은 가톨릭 교회의 본질 가운데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을 표현하는 자리입니다. 결코 우리와 다른 종교의 믿음이라든가 그 체제에 대하여 비판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는 않습니다. 간혹 다른 종교의 내용과 비교하는 내용이 있을 때라고 하더라도 같은 입장이라는 것을 알아 주셨으면 합니다.
1) 신앙을 소개하는 글 뒤에는 부록1과 부록 2로 나누어, 성서를 대하는 올바른 자세로 견진교리를 했던 강의 교안과 신구약성서 전체의 개괄서를 첨부하였습니다. 참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2) 기원전은 영어로 Before Christ<=그리스도 이전>의 축약어이고, 기원후는 라틴어 Anno Domini<=주님의 해>의 축약어입니다.
제 1 편 믿을 교리
이제 가톨릭 교리를 설명하는 세 부분 중에서 첫 번째의 장, 믿을 교리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믿는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꼭 그렇게 여겨서 의심하지 않다’는 것으로 국어사전에서는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우리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전에 나오는 말도 아니고, 우리가 쉽게 쓰는 말도 아니지만, 저는 좀 다르게 해설하려고 합니다. ‘믿는다’ 또는 ‘믿음’이라는 것에 대해서 말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눈으로 확인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사람의 눈에, 그리고 지금 내 눈에 보이는 형태를 갖추지 않는 것을 가리킬 때, 그것을 받아들이고 내 삶의 한 부분으로 수용할 때, 우리가 그 말을 사용할 것입니다. 누구도 본 적이 없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있다’라고 하는 형태로 제시하지 못해도, 우리 생활에는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은 세상에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공기가 그 가운데 대표적일 것이고, 사랑과 미움도 그런 한 자리를 차지할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의 호흡기관은 그 공기 가운데 산소와 몸에 필요한 것을 받아들여 생명이 유지돼 나가는 데 사용합니다. 이렇게 과학으로 분석하고 따질 수 있는 것이 있는데 비해서, 그렇게 과학으로 따질 수는 없지만 우리 생활에 영향을 끼치는 다른 것도 있습니다.
사람 사이에 등장하는 믿음[信]이 그 한가지일 것이고, 신앙에서 이야기하는 믿음이 또 다른 한가지 일 것입니다. 붕우유신(朋友有信)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유교의 도리를 규정하는 (삼강)오륜의 하나, 친구의 도리는 믿음에 있음’이라고 설명합니다. 친구 사이에 주고받는 많은 형태의 것이 있지만, 이 믿음[信]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상적인 관계를 맺고 큰소리치지 않고 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반드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훨씬 오래 전부터 이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강조해 왔는지도 모릅니다.
이 믿음의 힘은 대단히 강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는 이 힘을 이용해서 자기 잇속을 채우려는 사람들 때문에 참으로 좋게 남아있어야 할 믿음의 기초가 흔들립니다. 농작물을 키울 때 농약을 친 것을 ‘무농약’ 또는 ‘저농약’ 제품과 섞어서 비싼 값에 팔면서 자신과 가족이 먹을 것은 따로 경작하는 사람들도 있고, 모든 것을 다 빼내어 줄 것처럼 확신을 주면서 동업하던 사람들이 친구의 재물과 그가 투자한 모든 것을 빼앗아 달아나고, 욕심 때문에 빚이 생기자 잘못된 방법을 동원하여 보험금을 타서 해결하려고 하는 것도, 우리 사회의 한 바탕을 이루고 있는 이 믿음의 기초를 흔들고 깨는 행동이라고 할 것입니다.
제가 천주교는 말로 설명하기 힘든 종교라고 했습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믿음에 대한 것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이란 눈에 보이지 않으니, 그것을 드러내는 방법은 행동으로 보이는 것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이런 일에 대하여 강조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신약성서의 야고보 서간(2,14-17.24)에 나옵니다. 거기에 나오는 말씀의 일부분을 여러분들에게 읽어 드리겠습니다.
< 나의 형제 여러분,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행동으로 나타내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 날 먹을 양식조차 떨어졌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아무 것도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녹이고 배부르게 먹어라"고 말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믿음도 이와 같습니다.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사람이 믿음만으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을 알아두십시오.>
이런 힘든 요소를 안고 있는 믿음, 이런 믿음을 어떻게 힘들지 않게 대할 수 있는지 누구나 알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제가 한가지 방법을 제시한다면, 우리의 이성(理性)과 지성(知性)을 동원해서 가 닿을 수 없는 부분은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감히 꿈에서나 생각해보았을 달에 갔다 온 것은 벌써 옛날 일이 돼버렸고, 우주를 날아다닌 괴물이 마치 비행기처럼 착륙하고, 인간의 힘이 동물복제를 해내는 시기까지 왔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우리의 지성과 이성으로 할 수 없는 일들은 존재합니다.
그런 일들에 대한 응답의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완전히 거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어렵긴 하지만 그대로 수용(受容)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는 천주교의 신앙, 특히 이 믿음에 대한 것은 후자의 경우처럼 그대로 수용하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우리의 이성으로 아무리 따지고 확인하려고 해봐야 형태도 없죠, 눈에 잡히는 근거도 없죠. 누구도 내가 사물을 대하듯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이 바로 이 믿음의 요소에 대한 것입니다.
2. 천주(天主= 하느님) (13항-21항)
천주, 하느님은 인간의 오관(五官)으로 체득할 수 없는 분입니다. 그러나 체득할 수 없다고 해서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저 무조건 받아들이라고 강요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어설프기는 하지만 인간의 입장에서 이 분을 묘사하는 방법은 몇 개의 항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아래의 내용들은 가톨릭 교회에서 받아들이는 하느님에 대한 묘사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세상에 사는 사람 누구나 갖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은 믿는다고 생각하고, 다짐하고 선언했다가도 다음 날 다르게 말하는 것이 바로 믿음에 대한 것입니다. 친구사이의 우정이, 신의가 이익 때문에 자주 바뀌는 이 세상의 모습과 유사하게 설명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신(神)이라고 하는 대상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애초에 그렇게 보이지 않는 힘을 고백하면서 그 대상을 인간이 신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대상을 가리켜서 신(神)이라고 했다면, 우리는 그 신을 가리켜서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눈에 보인다는 것은 언젠가 사라질 수 있기에 그럴 것입니다. 제 아무리 엄청난 권력을 가진 사람 또는 사물이라고 하더라도 형태를 갖추면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중국의 진나라 ‘시황제’도 그가 가진 절대권력을 무한정 누리고싶어 불로초를 찾아 나서게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던 사실이 그 한가지 본보기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가톨릭의 신앙에서는 하느님을 ‘신’이라 부르고 그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합니다. 여러분들은 사람의 눈에 보이는 것만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마 아닐 것입니다. 과학으로도 엄연히 그 존재를 알아낼 수 있는 요소들조차도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많습니다. 우리 몸 안에 있는 장기(臟器)들이 그 중 하나입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상호 작용해서 우리를 움직이고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또 우리의 손바닥에는 얼마나 많은 세균들이 사는지 아십니까? 조그만 차 수저로 살짝 하기만 긁기만 해도 거기에는 몇백만 마리, 몇천만 마리의 세균들이 셈할 수 없을 만큼 많이 산다고 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물론 저도 제 눈으로 그 녀석들을 본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녀석들 때문에 어느 정도는 도움과 영향을 받고 사는 것입니다. 없으면 우리가 건강하게 살기 힘든 세균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다’고 말하는 것은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월권(越權)입니다.
13. 천주[하느님]는 누구십니까? : <답> 천주께서는 만선(萬善)만덕(萬德)을 갖추신 순전한 신(神)이시며, 만물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천주(天主)라고 하는 말은 하늘의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늘은 땅과 연관을 가져야만 의미 있는 것이므로, 결국 이 질문은 우주의 창조주에 대해서 묻는 질문입니다. 이스라엘의 구약성서에서는 이 하느님의 이름을 ‘야훼(Jahweh)’라고 불렀습니다. 아니, 출애굽기 3장에서 하느님은 당신의 뜻을 실천할 대상으로 모세를 택하면서 당신의 이름을 그렇게 알려줍니다. 그 이름의 뜻은 ‘나는 곧 나다’ 이어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분은 너희 선조들의 하느님, 야훼시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알려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하느님의 이름을 경외심 때문에 글자로는 ‘야훼’라고 써 놓고서도, 그 글자를 소리내어 읽을 때는 ‘아도나이<Adonai, 主>라고 바꾸어 불렀습니다.
만선만덕이라는 말은 철학 용어로 ‘무한한 완전성’을 의미합니다. 완전할 수 있는 대로 완전하여 아무런 제한도 없다는 뜻이 이 말입니다. 또한 ‘순전한 신’이라는 말의 의미는 지능과 의지를 가진 무형(無形)한 실체(實體)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물질적이지 않다는 말은 물질이 갖는 특성 즉 ‘타성적이고 파괴되고 변화되고 분해되며 무능하고 불완전한 요소’가 없다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에게 특별한 일을 해주신 분을 만물을 있게 하신 제 1 원인 창조주로 고백합니다. 하느님을 창조주로 고백하는 내용은 구약성서 창세기 1장과 2장에 나옵니다. 창세기 1장은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다음에 당신의 뜻을 이 세상에 실행할 자로서 사람을 만드는 이야기를 적고 있는데 비해서, 창세기 2장에서는 먼저 인간이 창조되고 그 인간을 위하여 세상 만물이 조성된 순서로 적고 있습니다.
사람을 포함한, 세상 만물의 창조주라고 하느님의 역할을 고백하는 것은 우라가 그저 쉽게 넘길 수 있는 요소는 아닙니다. 세상만물의 시작이 가능하도록 하신 분이라고 우리가 고백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14. 천주[하느님]께서는 영원하십니까? : <답> 천주께서는 영원(永遠)하시어, 시작도 마침도 변하심도 없으십니다.
영원하지도 않은, 자신의 온전한 정신만으로는 100년도 살지 못하는 인간은 ‘영원’에 대한 것을 질문합니다. 사실은 이런 사항을 질문하는 것 자체가 쓸 데 없는 힘의 낭비라는 것을 알면서도 하느님의 속성의 하나인 ‘영원’에 대해서 질문하고 어떤 방식으로든지 규정(規定)하고 제한(制限)하면 인간이 위대해지는 줄 알고 사람은 그렇게 질문합니다. 영원하지 않은 인간의 입장에서 영원을 질문하고 그 내용을 안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영원(永遠)이라는 말은 사람의 인식과 지식수준에서 설명할 수 있는 말은 아닙니다. 사람의 세계에서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기껏 생각할 수 있는 말이라면, ‘우리가 느끼는 한계보다도 그 삶의 길이가 훨씬 더 길다는 것 정도’입니다.
영원이라는 말의 의미는 ‘시작도 마침도 없다,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한다, 미래를 향하여 한없이 계속된다’는 의미로 사용하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존재에 대하여 인간의 표현으로 한 것 한 가지, 구약성서 시편 90,4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정녕 천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야경의 한때와도 같사옵니다.” 사람에게는 엄청날 수 있는 이 세월을 이런 표현을 사용하여 하느님을 묘사할 줄 안다면, 그 하느님은 실제로 사람의 생각을 적용하여 표현할 수 있는 분은 아니라고 해야할 것입니다. 사람이 영원하신 하느님을 생각한다는 것은 자신의 한계를 알아, 높으신 분의 뜻을 더 잘 이루려고 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의 인식수준에서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는 말을 체득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의 세계를 넘는 것으로 그렇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 정도로 알아두셨으면 합니다.
2006-06-23
15. 천주[하느님]께서는 전지(全知)하십니까? : <답> 천주께서는 전지하시어 모르시는 것이 없으시고, 사람의 은밀한 생각까지 다 아십니다.
하느님의 속성(屬性)을 질문하는 두 번째 것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지식의 한계를 넘는 분이십니다. 그것을 ‘전지하다’고 표현합니다. ‘앎의 원천’이요, ‘앎 그 자체’라는 말로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사람은 양심에 꺼리는 일을 하면 자신의 가슴이 쿵쾅거리며 뛴다는 것을 체험합니다.
중국의 임금 현제(玄帝)의 수훈(垂訓)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人間私語天聞若雷, 暗室欺心神目如電(사람들의 사사로운 비밀스러운 말도 하늘은 우레소리처럼 크게 듣고, 캄캄한 방에서 자기 양심을 속이는 것도 신의 눈에는 번갯불처럼 보인다)”. 우리가 알고 있고, 지금 다루는 개념으로서의 하느님을 말하기 전에 있었던 이 말은 하느님의 전지하신 특성을 잘 표현한 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전지(全知)’의 개념에는 ‘과거에 있었던 일과 앞으로 일어날 일을 다 아시며, 장차 태어날 사람들이 자기 자유를 어떻게 쓸 것인지도 다 안다는 의미’도 포함하며, ‘이러저러한 조건에서는 사람들이 그들의 자유를 어떻게 쓸 것인지 아는 것도 포함’합니다.
이런 이야기1)를 하나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학생이 자기 어머니께 물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지옥갈지 천국 갈지 아실 것이고 또 우리는 꼭 그대로 갈 것이 틀림없겠지요?” -- “물론이지” --“그렇다면 저 주일 미사 참례를 그만두고 소풍이나 가겠어요. 하느님께서 우리가 지옥에 가리라는 것을 아신다면 아무리 주일 미사를 열심히 해도 우리는 결국 지옥에 갈 것이니 쓸데없는 짓이고, 우리가 천국에 갈 줄 아신다면 주일미사 참례를 하지 않아도 결국 천국에 갈 것이니 주일 미사는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 “……” -- 학생이 종일 산과 들을 뛰어다니며 놀고서 저녁때 피곤하여 집에 돌아와 보니 어머니는 저녁 준비도 안하고 계셨다. 이유를 묻자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 “하느님께서 우리가 굶어 죽을 것으로 아신다면 우리가 아무리 저녁밥을 잘해 먹어도 결국 우리는 굶어 죽을 것이니 필요 없을 것이고, 굶어죽지 않을 것으로 아신다면 우리가 저녁밥을 먹지 않아도 결국 무사할 것이니 또한 필요 없는 것이다” -- 학생은 머리를 긁적이며 이렇게 말했다. -- “어머니 잘 알았습니다. 다음부터는 미사 참례 잘하겠으니 어서 저녁밥을 해주세요”
사람은 양심을 속이기도 하고, 재주껏 자기 능력을 발휘하여 세상에서 뛰어나고 독특한 일을 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드러내는 그 능력을 무시하거나 소홀이 여기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사람이 뛰어난 일을 해서 자기 영광을 구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남기더라도 그 한계를 올바로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이 오감으로는 먼저 접근할 수 없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16. 천주[하느님]께서는 무한(無限)하십니까? : <답> 천주께서는 무한하시어 유한(有限)한 모든 곳에 다 계시고도 무한히 남아 계십니다.
하느님이 계신 곳을 묻는 질문입니다. 이 세상에 일정한 공간을 차지할 수밖에 없고,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하느님에 대해 묻는 질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하느님의 존재를 묻는 경우는 자신의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나 어려움을 당한다고 생각할 때, 도대체 하느님은 어디에 계시기에 내가 이런 어려움을 당해도 모른 체 하고 있는가를 묻는 경우뿐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하느님이 어디에 계신지 우리가 장소나 시간을 제한할 수 있는 대상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 하느님을 출발점으로 해서 이 세상에 등장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내가 이러저러하게 모든 것을 규정하고 제한하더라도 불가능한 것은 있기 마련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구약성서 시편 139,7-10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7 당신 얼을 피해 어디로 가겠습니까? 당신 얼굴 피해 어디로 달아나겠습니까?
8 제가 하늘로 올라가도 거기에 당신 계시고 저승에 잠자리를 펴도 거기에 또한 계십니다.
9 제가 새벽놀의 날개를 달아 바다 맨 끝에 자리 잡는다해도
10 거기에서도 당신 손이 저를 이끄시고 당신 오른손이 저를 붙잡으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감각의 대상이 되지 않는 신(神)이십니다. 잊지 말아야 할 사실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통해서 하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 나오는 장소 언급은, 하늘나라에 우리가 들어가야만 하느님을 뵙게 될 수 있다는 우리의 한계와 입장을 설명하는 말로 알아들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항상 은총[-->상존(常存)성총(聖寵)] 가운데 우리가 살수 있다면, 하느님은 우리안에 계시게 됨을 알게 될 것입니다.
17. 천주[하느님]께서는 공의(公義)하십니까? : <답> 천주께서는 공의하시어 선(善)한 이를 상주시고, 악(惡)한 이를 벌하십니다.
마태오 복음 25,31-46이야기 참조할 것
18. 천주[하느님]께서는 전능(全能)하십니까? : <답> 천주께서는 전능하시어 무엇이든지, 원하시는 것을 하실 수 있으십니다.
19. 천주[하느님]께서는 전선(善)하십니까? : <답> 천주께서는 무한히 선하시어, 통회하는 자를 용서하시고 당신께 청하는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여기 8가지의 요소는 인간이 신앙으로 고백하는 하느님의 속성입니다. 속성이라는 말 역시도 우리가 어느 대상을 분석해서 얻어낼 수 있는 것이겠지만, 여기서는 체험이라는 단계를 생략하고 그렇게 표현합니다. 하느님은 세상 만물을 있게 하신 원동자(原動者)이며, 창조주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내용은 가톨릭 기도의 ‘사도신경’의 첫 부분에서도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믿나이다>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이 하느님의 다른 속성으로 언급하는 것이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①전지, ②무한, ③공의, ④전능, ⑤전선하다는 것입니다. 유한한 길이로 정해진 기간 밖에는 살 수 없는 인간이 하느님께 적용되는 이러한 속성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인식에서 알아채지 못하는 것도 이 세상에는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 또는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서울-부산의 거리를 보름이나 한 달씩 걸려야 이동할 수 있다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자동차, 기차, 비행기를 이용하는 방법에 따라 그 소요시간이 다르고, 전화라는 것을 이용하면 지구 반대편의 거리라고 하더라도 시간의 차이를 그다지 많이 느끼지 않고도 통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이런 시대에 하느님을 알고 그분을 받아들이고 공경하는 마음을 갖겠다고 하는 것은 보통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사람의 한계를 알고, 사람이 할 수 있는 일들의 한계를 구별할 줄 아는 사람들이라면 하느님을 찾는 것은 누구나 사람이라면 당연히 해야할 일입니다.
20. 전선하신 천주께서 이 세상 환난병고(患難病苦)를 막지 않으심은 어쩜이뇨? : <답: 이는 세상 사람들에게 죄를 보속하며 공을 세울 기회를 주시려 하심이니라.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가장 큰 관심을 가질만한 내용이 20번의 내용이요, 응답입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이 겪는 고통의 문제는 그 누구도 속시원한 대답을 줄 수 있는 간단한 문제는 아닙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교회의 가르침, 교회가 가르치려고 하는대로 믿고 따르는 내용을 말씀드린다고 해도, 모두 같은 자세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같은 문제라고 하더라도 그 대상에 따라 받아들이는 자세가 다를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다리가 부러진 고통과 내 손가락 밑에 들어간 나뭇가시가 주는 고통의 크기는 어떤 것이 더 크겠습니까? 고통의 절대적인 크기를 묻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받아들이는 심리적인 크기를 묻는 것입니다. 물론 제가 묻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세월을 두고 변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 모든 일은 변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절대적인 진리가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지금 질문으로 여러분에게 묻고 응답하는 내용은 절대적인 축에 속하지 않을 것입니다.
고통에 대한 문제는 사람을 참으로 힘겹게 합니다. 다른 사람은 건강한데 나는 왜 그렇지 못할까? 세상에 못된 짓은 골라서 다 하는 사람은 멀쩡하고, 착하고 좋은 일을 골라서 하는 나는 왜 이렇게 지지리 복도 없이 고생해야 할까? 사람들이 현실적으로 느끼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그 대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한번 얻은 대답을 쉽사리 인정하지도 않겠지만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주는 대답은 20번에 나와 있는 답입니다. 맘에 들지는 않지요? 왜 우리는 오로지 죄를 없애고 그 죗값을 값기 위해서만 살아야 할까? 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항의하고 따진다고 해도, 우리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대답을 얻을 수 있는 재간은 없습니다. 내가 태어난 가정의 부모님은 다른 부모님과 왜 가진 능력이 다를까....하는 것과도 비교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불만을 가져도 해결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교회에서 가르치는 내용, 사람의 마음 성향을 일찍부터 꿰뚫어보았던 입장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대답이 이것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의 손으로 빚은 진흙에서 출발했고, 그렇게 시작된 사람의 삶이 연약하게도 다른 피조물(=즉, 뱀)의 꾐에 빠져서 하느님이 명하신 선의 길에서 멀어지기 시작했고, 그렇게 멀어지고 비뚤어지는 삶의 태도에서 ‘삶의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기 시작한 입장이었다고 한다면, 우리들 각자가 구체적으로 그 상황에 협조하거나 참여한 것은 아니더라도, 교회에서 설명하는 삶의 방법을 받아들일 수밖에는 없는 일입니다. 교회는 이렇게 응답을 하기는 합니다만, 무책임하게 사람들들 그냥 내버려두지는 않습니다.
21. 천주 인자하시뇨? : <답 > 천주 인자하시니 자기 죄를 통회하는 자는 용서하시느니라
사람이 겪을 수 있는 현실적인 문제에 대하여 우리가 속시원한 대답을 얻을 수는 없지만, 교회에서 신앙으로 구별하는 하느님의 속성은 ‘인자하신 분’입니다. 그 인자는 사람이 자기 삶을 돌이킬 때에 체험할 수 있는 선물이기도 합니다.
<열왕기서에 나오는 엘리야와 아합이야기. - 못된 짓은 골라서 하지만, 국가의 멸망을 예고하면서도, 통회하는 아합을 보고, 하느님은 그의 아들대에 가서 당신의 계획을 이루시겠다고 선언하신다>
<에제키엘 예언서 18장-아버지가 신포도를 먹었는데, 그 아들의 이가 시릴 이유는 없다....>
하느님은 앎의 근원, 모든 능력의 근원, 모든 선의 근원이라고 신앙에서는 고백하는데, 어찌하여 그 하느님이 만들었다고 하는 세상, 그 하느님이 다스린다고 하는 세상, 거기에 그 하느님의 특성이나 속성과는 충돌하는 모습이 횡행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20항과 관계 있는 것입니다. 조금 더 감정을 앞세우는 사람들은 이 질문에 덧붙이기도 합니다. 아무런 죄도 없이 태어난 아이가 왜 몹쓸 불치병에 걸린 채 태어나는지, 왜 전쟁은 일어나서 아무런 원인 제공도 하지 않은 어린아이와 여성들과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만 하는지 따지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질문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중요한 본질적인 응답 한가지를 빠트리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 아니라면, 이 질문에 대해서 효과적으로 응답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감정이 앞서서가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지성이 설명하고 싶지 않은 탓이고, 남을 단죄(斷罪)하던 기세(氣勢)등등한 칼날을 자신의 책임을 인정해야 하는 쪽에서는 슬그머니 내리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말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탓은 모두 조상에게 있는 것이며, 나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다는 주장이 주류를 이룹니다.
교회의 입장은 이러합니다. 적어도 예비자 교리에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릴 수 있는 내용은 이것입니다. 세상일에 이런 고통과 고난의 모습이 함께 하게 된 원인은 ‘인간에게 주어졌던 자유의지의 남용’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자유의지를 남용한 적이 없다고 하고 싶은 마음과 생각은 굴뚝같을 것입니다. 사실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에게는 사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다른 한가지를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 사회는 공동체입니다. 나는 다 잘하고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행한 일들의 영향을 받게 되어 있는 것이 사람이라는 공동체에 주어진 운명입니다. ‘강(江)의 상류(上流)’에 사는 사람이 오물을 내버리면, 강의 하류에 사는 사람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하더라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싫다고 한다면, 강을 오염시키는 상류에 사는 사람보다 더 상류로 올라가서 사는 것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피해 올라간다고 해서 세상에서 겪는 모든 문제로부터 초탈(超脫)할 수 있는가하고 묻는다면, 그것은 또한 절대로 그렇지를 못합니다.
그러므로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할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고 난 다음에 그 삶의 질곡(桎梏)에서 효과적으로 벗어날 일을 찾는 것이 올바른 순서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세상에 고통이 있고 그 고통을 통하여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교회는 <현세의 온갖 고통으로 인하여 인간들은 죄악을 보속하고 공덕(功德)을 세우게 하시는 것>이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물론 교회가 이렇게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날 수 있는 문제들을 정의한다고 해서 세상의 어려움에 ‘나 몰라라’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가오는 고통을 피할 수 있는 것이라면 피해야 합니다. 물론 없앨 수 있으려면 자신과 남을 위해서 없애야 합니다. 그러나 그 고통의 값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치뤄야 한다면, 무조건 피하는 것이 올바른 일인지는 따로 생각해 봐야 합니다.
사도신경의 말미에 보면,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가톨릭 교회의 특성을 한가지 더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이 지상에서 아쉬움 없이 살려면 어느 정도는 재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내가 번 것이라고 해서 내가 살아있는 동안 모두 쓰고 가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 흘러갈 것도 있고, 자녀들에게 물려줄 것도 있습니다. 내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지상에서 겪는 여러 가지 어려움과 고난을 겪으면서 쌓는 덕행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또한 교회의 정신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고통의 문제가 인간 세상에 싹튼 것은 인간의 죄악에 대한 것입니다. ‘악(惡)’의 존재에 대한 교회의 입장은 ‘선(善)의 결핍’이라고 합니다. 물론 악이라고 하는 것은 형태가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선이라고 하는 것에도 같은 주장을 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형태가 나타나지 않으니 그것을 없애거나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도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악에 대한 문제는 연약한 인간성에 있다고 기록합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인간은 하느님이 창조해 놓으신 세상을 올바로 관리해야 하는 존재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 인간의 어느 구석에 욕심과 자만심, 그리고 남들보다 더 높아지려고 하는 마음이 숨어있었는지, 피조물의 하나인 인간보다 훨씬 더 못하다고 할 만한 ‘뱀’으로 등장하는 힘에게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신 자율권, 자유의지를 남용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교회의 입장입니다. 이 자유의지의 남용으로 인간은 하느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는 되었지만 차라리 몰랐던 것보다 좋지 않은 결실을 거둘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리고 그 악은 점차로 퍼져갑니다. 선이 사라진 자리가 악이라고 했으니, 악의 힘은 커져 갈 수밖에 없죠.
우리 속담에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말도 같은 내용일 것입니다. 인간을 창조해주신 하느님의 명령과 훈령을 소홀히 내 맘대로 해석했으니, 형제가 서로 죽게 하는 것은 오히려 그 정도가 약한 범죄에 해당하는 것이고, 요즘 세상에 일어나는 범죄들, 다른 사람들을 상하게 하고 죽게 하고, 다른 사람을 향하여 사기치는 일은 오히려 자신에게 부담감이 덜한 죄악이 되고 말지 않겠습니까?
전통적인 이야기에서 악의 힘이 탄생한 것은 ‘하느님의 자리를 탐한 천사’의 행위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천사의 이름은 ‘루치펠<Luchiper> 또는 루시퍼<Lucifer> 또는 루이스 사이퍼<Louis Saipher>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그 역시 그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이 세상에 사는 사람으로서 악의 힘을 줄이는 방법은, 악을 극복할 수 있는 선을 더욱 많이 행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시궁창 물이 지저분하다고 해서 우리가 어디론가 퍼내어 버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그 영향을 어디선가 그대로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한 숟가락, 한 숟가락씩 우리가 맑은 물을 옮겨 넣고, 그렇게 해서 함께 머물고 있는 바탕이 맑아지게 만드는 길 외에 다른 방법이 있을까요? 그것이 고통을 통하여 인간이 죄악을 보속하고 공덕을 세우게 하려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20항의 의미입니다. 죄악은 어느 누군가 한 사람이 없애버리고 싶다고 해서 없애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1) 이 이야기는 ‘상해 천주교요리’ 1권의 65-66쪽에 나와있는 이야기를 그대로 옮긴 것임
3. 삼위일체 (22항-25항)
이제는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하느님의 속성에 대해서 말씀드릴 차례입니다. 이 하느님의 속성을 신학적인 용어로 이야기하면, ‘삼위일체(三位一體)(Trinity)(Trinitas)’라고 합니다. 셋이 한 몸을 이룬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용어로는 이렇게 설명을 하고 말씀을 드릴 수 있기는 합니다만, 설명을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가리켜 지난 시간에 언급했던 ‘계시(啓示)’라고 합니다. 계시라는 행동의 주도권은 하느님에게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성이 발달한다고 해서 그것을 알아듣거나 설명할 수 없다고 신학에서는 정의하는 용어가, 계시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하나이긴 하나인데, 역할은 셋으로 드러나는 분, 부르기는 한가지 이름으로 부르는데, 우리가 그 내용상의 구별을 따로 할 수는 없는 분, 바로 하느님이요, 우리가 믿고 따르는 하느님에 적용된 속성입니다. 이 정도로 설명을 드린 다음에, 교리에서는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22. 천주 몇이 계시뇨? : (답) 천주 다만 하나 계시니라
23. 하나이신 천주, 몇 위를 포함하여 계시뇨? : <답> 하나이신 천주, 세 위를 포함하여 계시니, 성부, 성자, 성신(성령) 이시니라.
24. 세 위 서로 관계가 어떠 하시뇨? : <답> 세 위 서로 관계가 실로 오묘하니, 성부는 성자를 낳으시고, 성자는 성부께 낳음을 받으시고, 성신(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느니라.
25. 세 위 서로 높음과 낮음과 먼저 계시고 후에 계신 분별이 있느뇨?
<답> 높고 낮음도 없고, 먼저 계시고 후에 계심도 없어 도무지 온전히 같으사 한 가지로 다만 한 천주이시니라.
이 세상에는 우리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힘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할지 모르기에 그런 요소가 더 강할 때 생각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신학을 설명하는 용어에도 이와 비슷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한 가지를 말하고 본보기로 들자면, ‘삼위일체’를 설명하는 말도 그에 속할 것입니다.
불켜진 초’에 대해서 묘사할 때도 그럴 것입니다. 거기에서는 빛과 열이 나오죠. 물론 몸체도 있습니다. 그 어느 한가지만을 가리켜서 설명할 때, 그것을 우리가 ‘불켜진 초’에 대한 설명이라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눈으로 본적은 없지만, 하느님에 대해서 학문적으로 정리한 사람들은 그러한 용어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리고 교회라는 단체에서는 그 용어를 받아들여 사용하는 것이구요.
그렇다면, 교회에서는 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사람들이 알아들은 하느님의 활동을 표현하면, 창조주요, 구원자요, 지속시키는 힘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인간의 구별입니다. 어디까지나 인간이 알아들은 몸짓입니다. 그리고 유한(有限)한 인간의 세계에서 무한(無限)하신 분을 규정한다는 것도 사실은 어렵고 무모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해야하죠. 사람으로서 이해하자면, 자꾸만 나눌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분을 거룩하신 아버지, 이 세상에 인간으로 오셔서 사시다가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그 희생(犧牲)의 본보기를 보여주신 분을 거룩하신 아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힘을 통하여 교회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며 사람들의 생활을 이끄시는 힘을 가리켜 거룩한 영이라고 구별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한 용어해설입니다.
세상의 처음, 또는 교회의 처음부터 이 용어가 등장한 것은 아닙니다. 대략 4세기경에 살았던 아우구스티누스(354-430)라는 학자는 이 신비에 대해서 탐구했던 유명한 사람입니다. 이 분에 대한 생활은 따로 전기가 있고, 자서전이 있을 만큼 파란만장한 전력이 있는 분입니다. 그 어머니 모니카 성녀 때문에 잘못된 생활에서 돌아선 유명한 분이기도 합니다. 이 분은 북아프리카 타사스테 출신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교를 믿는 어머니 모니카의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15년 이상이나 정신적인 방황을 거듭합니다. 일종의 방탕아로 산 것입니다. 그러다가 당시 유명한 사조였던 ‘마니교’를 통해서 진리를 얻으려고 9년간이나 시도하다가, 로마로 가서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오를 만나고 성바울로의 독서를 통해 개종하고 387년 부활전야에 세례를 받습니다. 그후 죽을 때까지 북아프리카 발레리우스에서 주교직을 수행한 분입니다.
삼위일체를 설명할 때, 자주 등장하는 이야기입니다. 들려드릴 이야기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체험담으로 전해지는 것입니다. 그 분이 어느 날엔가 이 신비에 대한 탐구를 하기 위해서 해변가를 거닐고 있었답니다. ‘삼위일체라는 말을 어떻게 알아들었으면 좋겠는가?’를 고민하면서 말이죠. 그렇게 걷던 도중에 파도가 출렁이는 물가 곁에 앉아서 어린아이가 모래 사이에 조그만 구덩이를 파놓고, 조개 껍데기로 바닷물을 조금씩 옮겨넣는 모습을 보았답니다. 아무도 없는 바닷가에 어린이 혼자서 말입니다. 그래서 질문을 했다는 것이죠, 왜 그렇게 하느냐고? 네가 거기에다 물을 옮겨 넣어 봐야 곧바로 모래로 스며들고 또 해야 하는데......라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그 어린아이가 한다는 정색을 하고서 한다는 말이, ‘제가 바닷물을 이 구멍에 모두 담을 수는 있어도, 아저씨가 고민하는 삼위일체라는 말은 이해하지 못한다’고 했답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고개를 들어보니, 아이는 사라지고 없더라는 것입니다.
머리가 명석했던 학자였던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제서야 ‘삼위일체’의 신비에 대해서 탐구하기를 포기하고 말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가 남긴 일화에 나오는 이야깁니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가 그 소년을 직접 보았는지 어쨌는지 우리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학자였던 사람도 자신이 탐구할 수 있는 범위였는지, 아니었는지를 빨리 구별했던 것입니다. 그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서 자신의 삶이 변화되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에, 그 소년을 통하여 계시를 접하고 인간의 행동을 빨리 접을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에 비교해서 사람의 생명을 이리저리 조작하겠다고 덤비는 요즘의 생명공학(生命工學)이 훗날에도 정말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좋고 훌륭한 결과만 맺을 것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생명 연장의 꿈이라는 총천연색 꿈을 갖고 시작을 합니다만, 정말로 그렇게만 가능하겠는지는 따로 알아야 할 일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고 해도, 인간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 헤아리지는 못합니다. 사람의 생성자체도 그렇죠. 남성의 정자와 여성의 난자가 만나 조화를 이루면, 생명이 시작됩니다. 인간 생명의 시작을 교회는 ‘난자와 정자가 여성의 몸이나 시험관에서 합쳐친 순간부터’라고 말합니다. 시작을 알지 못하면 그 다음부터는 어느 순간이라고 말해야 하는지 불분명해집니다. 그러나 국가의 법에서 규제하고 있는 것들은 그 말이 참으로 다양합니다. 난자와 정자가 합쳐지고 난 뒤, 7개월이나 9개월이 지나서 사람의 형태가 보이면 그때부터 인간이다....라고 하는 식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더 찬란합니다. 우리는 어머니 뱃속에 생겼을 때부터 나이를 계산합니다. 그렇지요? 그런데도.....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는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아직까지 말입니다. 1973년에 제정되었다고 하는 ‘모자보건법’을 아주 기가차게(=죽을만큼) 잘 이용한 결과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인구성장율이 세계 최저라고 하는 결과가 얼마전에 났습니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각설하고.....
과학이라든 생물학에서는 난자와 정자가 합쳐져서, 생명이 시작된다는 것만 알지, 왜 그런지 어떤 과정을 통해서 그렇게 되는지, 거기에 무슨 구조가 있는지 알지는 못합니다. 설사 안다고 해도, 그것을 우리가 인위적으로 진행시키지도 못합니다. 다만 돼있는 구조에서 뭔가를 바꿀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말입니다. 지금 과학에서는 생명 유지에 필요한 것들을 꽤 많이 조작할 수 있는 것처럼 말들을 해도, 아직 사람의 혈액은 만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헌혈하는 이유이지요?
인간은 없던 것을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창조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있던 것을 가지고 이리저리 조작하다가 훗날 인류에게 득(得)이 될지 실(失)이 될지는 알지 못하는 일에 매달리는 것뿐입니다.
삼위일체에 대한 것은 신비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계시에 의한 만큼만 우리가 알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사람의 설명으로 이해하거나 그 진리의 본질에 닿을 수 없는 것이 그 신비입니다.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요소 가운데는 이러한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차차 말씀드려 나가기로 하죠.
위의 24항에 나오는 내용 한가지를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인간으로 표현하면 출생에 대한 문제입니다. 애초에 하느님의 속성이라고 규정했으니, 인간의 지식과 상식수준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인데도, 이것을 인간이 지식으로 이해하고 설명하려고 한 시도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성령에 대한 것입니다. 성령이 성부에게 종속된 것이냐, 성부와 성자에게 종속된 것이냐의 문제입니다. 성서에 나타나는 시기로 보면, 성령은 분명,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이 있고 난 다음에 등장합니다. 물론 구약성서에서 이러저러한 표현이 성령의 별칭(別稱)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만, 그 얘기는 여기서 생략합니다.
수많은 세월과 역사를 두고 이루어져 왔던 이야기는 접어두고, 이 종속성에 대한 문제 때문에 동방교회와 로마가톨릭, 서방교회가 갈라지는 교리적 원인이 됩니다. 동방교회란 흔히 여러분이 아시는 러시아정교회를 가리킨다고 알면 되겠습니다. 즉 성령이 성부에게서 나오시는가, 아니면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시는가의 차이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서방교회인 가톨릭에서 받아들이는 부분은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신다’는 것입니다. 학자들만이 할 수 있는 골치 아픈 문제들이고, 이론적인 싸움입니다. 어찌되었든 한가지 분열의 원인이 되었기에 여러분에게 알려 드립니다. 사랑은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출발점이 있으면 가서 부딪히고 돌아올 수 있는 대상이 있어야겠죠. 교리를 이런 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좀 지루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이해를 위해서는 참고가 참고될 수 있을 것입니다.
4. 천지창조, 천사, 마귀 (26항-32항)
이제부터는 하느님의 업적, 즉 하느님이 하신 일에 관련된 내용을 다루는 부분의 시작입니다. 여기에서는 천지의 창조와 천사와 마귀에 대한 요소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내용은 교회가 인정하고 받아들인, 확립한 내용들입니다.
천지 만물의 조성에 대한 것입니다. 처음에도 강조하기는 했습니다만, 신앙에서 이야기하고 믿음의 내용을 말하는 내용과 과학에서 이야기하는 방법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쌍방은 서로 대립관계가 아니라, 보충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더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알아듣지 못하고 내 눈으로 보지 못한 것이라고 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없다고 우기는 것은 분명히 인간이 행하는 월권이라는 것이죠.
과학에서는 이 지구가 생긴 기원을 45억 년 전 또는 50억 년 전 조그만 먼지에서 출발했다고 합니다. 그런 먼지들이 어느 날인가 갑자기 혼자 있기 싫어서 무슨 전기적인 충격을 받아 하나씩 둘씩 뭉치기 시작했고, 그 다음에는 거기에 생명체가 생겨서 움직이기 시작했고, 세포하나가 두 개로, 물 속에 살던 것이 땅위로..... 하는 방법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인간이 만든 전파망원경인가요 천체 망원경인가요 하는 것을 가지고 우주의 한 귀퉁이를 촬영합니다. 그러면서 한다는 소리, ‘지금도 별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과학에 의해서 설명하는 것은 필연성(必然性)이 없습니다. 왜 그래야 하는지,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을 할 수 없습니다. 기껏해야 ‘적자생존(適者生存)’이나 ‘용불용설(用不用說)’ 정도가 고작입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도 시간이 가면 또 타당성이 사라질지도 모를 이론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우주의 탄생이라는 것에 대하여 그러한 이론이 얼마나 설명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시대에 통용되는 물리학의 이론, ‘상대성이론(相對性理論)’도 다음 세대에 가면 그 이론이 바뀔지도 모른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과학을 무시한다고는 생각하지는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과학의 이론에 의해서 발명된 앰프와 스피커, 그리고 마이크의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이 예비자 교리를 시작할 때 언급했듯이, 인간을 얼마나 귀중한 존재(存在)로 볼 것인가 하는 차이입니다. 사람이라고 하는 존재가 하느님이라고 하는 대상, 인간이 쉽게 접근할 수는 없지만, 지고(至高)의 존재로부터 나온 참으로 중요한 존재인가? 아니면, 인간의 생존과 쾌락을 위해서 지지고 볶고 함부로 다룰 수 있는 동물이라든가 그보다 못한 존재들에게서 시작되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는 존재로 발전했는가 하는 차이입니다. 과학과 종교, 실험에 의한 이해와 신앙을 대립적인 관계로 보느냐 아니면 상호보완적인 관계로 보는가에 대한 차이점입니다. ‘인간은 소중하고 중요한 존재라는 차원’에서 저는 여러분에게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 겉모습은 종교요 신앙이라는 모습으로 포장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세 가지 내용을 다룹니다. 제목에도 나와있는 것처럼, 세상 사물이 생기게 된 이야기와 천사와 마귀에 대한 것입니다. 순서에 따라서 한가지씩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천지의 조성에 대한 것입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26. (문) 천지를 조성하신 자라 함은 무슨 뜻이뇨?
(답) 이는 천주 당신 전능으로 없는 가운데로조차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섭리하심으로 보존하시며 다스리시는 자라는 뜻이니라.
하느님을 세상만물의 창조주라고 고백하는 것은 엄청난 소리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눈으로 본 사실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우리는 믿음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믿음이라는 용어는 인간의 오관(五官)으로 감지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하여 인간이 겸손한 마음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보셨을 성서에는 창조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있는 곳이 있습니다. 구약성서의 첫째 권인 ‘창세기’가 그것입니다. 창세기는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그리고 있는 책이고, 이스라엘이라고하는 특정한 민족이 하느님 야훼를 기억하며 그분에 대한 믿음의 고백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창조에 대한 이야기는 두 가지로 나옵니다. 다시 강조하는 참으로 분명한 사실은 이 두가지가 단순한 사실(事實)보고가 아니라, 믿음의 고백이라는 것입니다. 그 두 가지는 1,1-2,4ㄱ 과 2,4ㄴ-2,25의 내용이 그것입니다. 성서학자들이 말하는 바를 인용하면, 역사적으로는 뒤에 것이 더 오랜 역사를 갖는 것이라고 합니다. 앞에 시기보다 약 4-500년 안팎의 시기가 앞선 것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 창조이야기는 첫 번째의 것보다 단순합니다. 진흙으로 남자를 만들고, 에덴 동산을 마련하셨으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나게 하시고, 동물들의 이름을 붙이는 아담, 마지막에는 자신의 짝이 나타났음을 보고 기뻐서 소리치는 아담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학자들의 분류에 따르면, 기원 전 950년경에 기록되기 시작한 문헌(J.E문헌) 영향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에 비교해서, 처음에 나오는 창조이야기는 바빌론 유배시대라는 때를 배경(P문헌)으로 한고 말합니다. 이스라엘보다 정치적인 입장에서 더 발전된 국가였고, 기원전 587년에 이스라엘 남쪽 국가를 멸망시킨 국가이기는 했지만, 그들이 신으로 믿고 받들어 섬기던 모든 것은 사실 하느님이 창조하시고 조성하신 사물의 한가지에 불과하다는 뜻을 담았다고 믿음을 고백하던 작성자들에 의해서 형성된 창조이야깁니다. 당시 자기 민족이 세운 국가를 멸망시키고 자기 민족을 강제로 지배했던 민족들이 섬기던 만물들이 사실은 ‘이스라엘 민족이 섬기는 하느님의 작품’이었다고 표현함으로써, 유배생활을 하고 있던 민족에 힘을 주는 의도로 작성된 문헌이고, 신앙고백이라고 합니다. 엄청난 힘이 있을 것 같은 태양과 커다란 물고기, 나무들 모두 하느님이 만드셨다는 믿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 공경하는 ‘당산(堂山)나무’도 아마 이런 범주에 속하지 않을까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내용, 교회의 신앙에서 이야기하는 내용은 저절로 세상이 생긴 것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하느님이라고 하는, 인간이 쉽사리 이해하겠다고 덤비지 못할 분이 조성하신 것이 세상이라고 믿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어떤 생각을 가져왔건 그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저도 이렇게 말씀은 드리지만, 세상의 창조모습을 보진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말씀드린 대로 받아들이고 삽니다.
27. (문) 천주 창조하신 만물 중에 가장 존귀한 것은 무엇이뇨?
(답) 만물 중에 가장 존귀한 것은 천사와 사람이니라.
28. (문) 천사는 무엇이뇨?
(답) 천사는 지력(知力)과 의지(意志)를 가진 순전한 신(神)이니, 천주 저들을 은총 지위에 두사 은총을 잘 씀으로 영복을 받게 하고자 하시니라.
29. (문) 모든 천사들은 다 은총을 잘 썼느뇨?
(답) 그렇지 아니하니, 그 중에 주의 뜻을 순(順)히 한 자는 상을 받아 천당(天堂)에서 천주를 모시는 천사들이 되고, 주의 뜻을 거역한 자는 벌을 받아 지옥에 빠져 마귀가 되니라.
30. (문) 천주 무슨 임무를 천사들에게 맡기시뇨?
(답) 천주 여러 가지 임무를 천사들에게 맡기시는 중 특별히 사람 보호하는 임무를 맡기시니, 각 사람에게 날 때부터 수호(守護)천사 하나씩 정하여 주시느니라.
31. (문) 사람이 수호천사께 할 본분은 무엇이뇨?
(답) 각 사람이 수호천사께 할 본분은 저를 경애하며 그 도움을 구하며 또한 그 잠잠히 타이름을 잘 들음이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인 천사에 대한 설명을 하는 순서입니다. 천사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 중에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는 참으로 귀중한 대상입니다. 이 귀중한 대상인 천사에 인간이 버금가는 위치를 차지합니다. 이런 내용을 듣는 우리는 인간이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 욕심과 잘못이 언제부터 들어왔는지 설명할 재간은 없습니다. 하느님이 만드신 천사들 가운데서도 인간사이에서 발견할 수 있는 욕심이 있어 마귀가 탄생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욕심은 인생뿐 아니라 모든 것의 바탕을 파괴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충실히 전하고, 인간을 보호할 책무를 지닌 천사들이 그것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고 잘못된 길로 갑니다.
옛날 교리의 내용을 담고있는 것으로 ‘요리강령(要理綱領)’이라는 책<=내가 갖고 있는 것은 1956년판>이 있습니다. 이 책은 가톨릭 교회의 교리인 사도신경(司徒神經)과 칠성사, 그리고 천주십계를 설명하는 그림책입니다. 이 그림책의 내용 가운데 사람의 삶에 관한 심판(審判)의 항목에서 사람이 드러낸 삶의 결과에 따라 수호천사도 벌과 상을 받는 그림(57번 그림)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하느님의 길을 제대로 따르지 못한 인간이 죽은 다음에 악마의 소굴인 지옥으로 끌려가는 그림이 있습니다. 그 죽은 자의 영혼이 지옥으로 떨어질 때, 그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열심히(?) 뛰었던 천사는 그저 얼굴을 가리고 하느님께로 올라가는 그림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주변을 아무리 헤치고 찾아보려고 해도 천사는 우리가 느낄 수 없습니다만, 지고(至高)한 영적 존재인 천사들이 우리들 주변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교회는 한가지 교리로 설명합니다.
32. (문) 마귀는 세상에 나와 무엇을 하느뇨?
(답) 마귀는 사람을 지옥에 빠트리려고 하여 항상 죄로 유인하느니라.
악마(惡魔)는 천사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눈에 보이지는 않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없다고 부정할 수도 없는 것이 그 힘입니다. 제가 지난 시간들의 교리설명에서 ‘악은 선의 결핍’이라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 말은 세상의 모든 것의 근원을 하느님이라고 ‘신앙고백’하는 입장에 대한 설명의 한가지입니다. 악이 선의 결핍이라는 소리는, 애초에 하느님께서 이 악을 만들지 않으셨다는 소리입니다. 이것은 우리 생활에서 일의 성공을 위하여 노력하는 사람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그 어느 사람도 실패하려고 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시기가 맞지 않고, 자금이 부족하고, 다른 사람의 적절한 도움을 받을 시기를 놓쳐서 하던 일이 좋은 결과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잘 돼야 할 것이 잘되지 않으니, 그곳에 실패가 자리잡는 것이죠. 악에 대한 설명도 마찬가지로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악의 기원과 출현에 대한 이야기를 전설과 설화를 근거로 하여 말씀드린 일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리를 탐했던 천사가 악마의 괴수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것 역시도 그 누구도 그 모습을 본 사람은 없지만, 악의 힘 그 기원은 자신을 겸손하게 보지 아니하고 남 앞에서 자신을 높이려고 하는 일은 잘못된 길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이야기입니다. 무조건 자신을 낮추고 겸손한 것만이 세상 최고의 덕목은 아니겠지만, 분수를 모르고 행동하는 것도 또한 옳은 결실을 맺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어린이들을 위한 만화영화나 어른들을 위한 영화에서 표현되는 악의 세계나 그 모습은 흉측{흉악(=성질이 거칠고 사나움, 용모가 험상궂고 모짊)망측}하거나 어둡습니다. 그래야만 그 모습을 통해서 우리가 나쁜 것과 좋은 것을 구별하여 빨리 알아듣는다고 생각하는가 봅니다. 권선징악(勸善懲惡)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세계에 드러나는 ‘악의 모습이 영화나 소설에서 그리는 것처럼 그런 모습을 갖는가?’하고 묻는다면, ‘아니다’라는 것이 교회의 설명입니다. 악의 모습은 결코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피하고 싶은 모습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정확한 구별을 하기 힘들 정도로 선(善)으로 보이는 방법으로, 그리고 자기 합리화가 가능한 방법으로 등장합니다. 도둑질을 하면 누구나 감옥에 간다는 것을 안다면, 아무도 하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들키지 않고 잘 해서 성공한다면 불로소득을 얻을 수 있고, 힘들이지 않고 쉽게 재물을 얻거나 명예를 얻는다고 생각하기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몇 백억 원씩의 부정 대출을 해준 다음에 뒷거래로 들어오는 몇 백만 원 때문에 패가망신(敗家亡身)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보곤 합니다. 이 사람들도 자기가 한 잘못된 행위가 들킬 거라고 생각했다면, 아마도 도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남들도 다 그렇게 하는데, 나라고 못할 일이 있나 라는 생각을 가지면 이미 그 사람은 악의 수렁에 발이 빠져들기 시작한 것이고, 다시 헤어나오려면 엄청난 노력과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최형락, 종교교육예화 1권. 439면에 나오는 이야기> 어느 날 마귀 네 부자(父子)가 모여서 신앙인(=信者)들을 유혹할 방법에 대해 토의하였습니다. 큰 아들 마귀가 먼저 제안했습니다. ‘세상에 하느님은 없다고 하자.’ 그 말로 사람들을 유혹하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 마귀는 그것은 안된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계시는데, 없다고 하면 안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둘째아들 마귀가 제안했습니다.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다’라고 하자. 그런데 아버지 마귀는 이번에도 안된다고 했습니다.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인 것이 분명한데 아니라고 한다고 그게 무슨 영향이 있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셋째 아들 마귀가 다시 제안하기를, ‘하느님도 계시고,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지만 그런 것들은 차차, 천천히 믿고 따라도 된다고 가르치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버지 마귀도 다른 아들들 마귀도 모두 찬성하였다. 그래서 마귀가 마음 가운데 있는 사람은 ‘우선 선한 일을 하자고 해도 차차 하겠다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연약한 인간에게 도전하는 악의 모습인 것입니다.
<최형락, 종교교육예화 1권. 440면> 마귀들의 모임에서 대장이 나타나 각각 자신들의 임무를 수행한 결과를 보고하라고 부하들에게 명령하였다. 첫 번째 부하가 말하기를 ‘나는 광야에 있는 맹수들을 풀어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달려들게 하였는데, 지금 그자들의 백골은 모래 위에 버려져 있소’라고 하였다. 그러자 두목은 ‘그것이 무슨 소용이냐, 그들의 영혼은 이미 구원을 얻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다른 부하가 말하였다. ‘나는 돌풍을 몰아다가 그리스도교 사람들이 탄 배에 충돌시켰더니 그들이 빠져 죽었소’하였다. 이때도 역시 두목은 ‘그것도 아무 소용이 없다 영혼은 이미 다 구원을 얻었느니라’ 다음으로 등장한 부하는 ‘나는 그리스도교 신자 한 사람을 작 추켜 세워서, 냉담(=신앙에 소홀)하도록 십 년을 노력하여 성공하였소.’ 그러자, 두목은 매우 기뻐하였다.
5. 사 람 (33항-43항)
다음은 사람에 대한 신앙의 진리(=교리)를 찾아보는 순서입니다. 구약성경 시편 8,2-10에 보면, 인간에 대한 찬사가 나옵니다.
<<{ 2 주 저희의 주님 온 땅에 당신 이름, 이 얼마나 존엄하십니까! 하늘 위에 당신의 엄위를 세우셨습니다. 3 당신의 적들을 물리치시고 대항하는 자와 항거하는 자를 멸하시려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것으로 당신께서는 요새를 지으셨습니다. 4 우러러 당신의 하늘을 바라봅니다, 당신 손가락의 작품들을 당신께서 굳건히 세우신 달과 별들을. 5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주십니까? 6 신들보다 조금만 못하게 만드시고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주셨습니다. 7 당신 손의 작품들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습니다. 8 저 모든 양 떼와 소 떼 들짐승들하며 9 하늘의 새들과 바다의 물고기들 물속 길을 다니는 것들입니다. 10 주 저희의 주님 온 땅에 당신 이름, 이 얼마나 존엄하십니까! }>>
이러한 찬사를 받을 자격을 갖춘 사람에 대해서 교회는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지 그 내용을 살펴볼 순서입니다.
먼저 사람을 이루는 요소에 대한 것입니다. 33항과 34항의 내용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33. (문) 사람은 무엇이뇨?
(답) 사람은 영혼과 육신으로 결합된 자니라.
34. (문) 영혼은 무엇이뇨?
(답) 영혼은 신령하여 불사불멸하는 체(體)니, 육신과 합하여 그 생명이 되느니라.
사람을 구성하는 요소입니다. 몸과 마음(혹은 정신)으로 구성된 것을 사람이라 하기도 하고, 우리 신앙의 진리(=교리)에서 말하는 것처럼, 사람은 영혼[(국어사전)=육체와 구별되어 육체에 머물면서 마음의 작용을 맡고 생명을 부여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비물질적 실체]과 육신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관으로 감지한 것만을 인정하고 싶은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으면 있다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진리에서는 사람을 영혼과 육신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은 합니다만, 세상 사람들이 모두 믿고 따른다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그렇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두 가지 요소가 하나로 합쳐져 있을 때, 우리는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고,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 가지 요소가 분리되면 죽는 것입니다.
사람의 구성요소로 등장하는 육신은 이 세상에서 움직이고 그 기능을 드러내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다른 구성요소인 영혼은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세상에 사는 눈에 보이는 육체(=육신)가 저 높은 곳, 하늘과 연결되는 매개체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알아들을 수 있는 영적인 존재이고, 세상에서 움직이는 낮춰부르려고 하는 의미를 포함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단백질 덩어리인 사람의 몸이 올바른 결실을 맺도록 이끄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물론 눈에 보이지는 않지요.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 존재가 없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 사람의 창조에 대한 것이 구약성경 첫 번째 책인 창세기에 믿음의 고백으로 나옵니다. 눈에 보이는 인간 육신의 재료는 ‘흙’입니다.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그 코에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기 2,7)고 적습니다. 이것이 신앙에서 이야기하는 인간의 기원입니다. 이 내용은 과학에서 말하는 사실성에 근거한 것은 아닙니다. 사람의 몸에 대해서 과학적인 잣대로 아무리 많이 찧고 까불러도 흙이라든가, 흙의 먼지라든가 하는 요소는 나오지 않습니다. 굳이 성분분석을 하여 흙의 원소와 비슷한 것을 찾아낼 수 있을 지는 모릅니다.
신앙에서 이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지어진 것(창세기 1,27=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이라고 적습니다. 바로 이 사실, 이러한 믿음에 인간이 다른 대상이나 동물들보다 귀중한 대우를 받아야 하는 의미가 있고, 당연한 주장이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은 흙에서 출발한 존재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그 생명이 다하면 죽으면 흙에 묻는지도 모릅니다. 출발점으로 따지면, 흙인데 서로 다른 가치와 평가를 받는 것은 보이는 인간에 하느님의 뜻이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내용으로 나오는 영혼은 신앙에 관련된 내용입니다. 하느님의 특징을 담고 있는 것은 영혼으로, 육신의 생명이 다하더라도 그 존재가 소멸하지 않는 ‘불사불멸, 영원한 존재’가 바로 영혼입니다. 훗날 다룰 내용입니다만, 사람의 몸이 세상살이 결과를 어떻게 만들었는지에 따라, 그 영혼에 대한 하느님의 판단도 달라진다고 교회는 설명합니다.
35. (문) 인류의 으뜸 조상은 누구뇨?
(답) 인류의 으뜸 조상은 ‘아담’과 ‘하와’니, 천주 저들을 낙원에 두사, 주의 계명을 잘 지킴으로 죽지 않고 바로 천당에 오르게 하고자 하시니라.
36. (문) 천주 원조(元祖) 두 사람을 어떻게 내시뇨?
(답) 천주 아담의 육신은 진흙으로 만드시고 하와의 육신은 아담의 갈빗대를 취하여 만드시고 그 둘의 영혼은 아무 재료도 없이 창조하여 주시니라.
37. (문) 성경에 천주 사람을 당신 모상대로 내셨다하니 이는 무슨 뜻이뇨?
(답) 이는 천주 사람에게 다만 본성에 적합한 지력과 자유와 의지를 주실 뿐 아니라, 또한 과성(過性=조력성총)은혜와 초성(超性=상존성총)은혜로 저를 아름답게 꾸미셨다는 뜻이니라.
35항에서 38항은 구약성경의 내용을 따라가는 신앙의 내용, 사람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이 제대로 지켜지지 아니한 모습이기도 하고, 우리가 어떻게 하면 다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삶으로 돌아갈 수 있겠는지에 대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 내용은 조금 전에 말씀드린 내용에도 언급되어 있듯이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믿음의 기록인 성경에 나오는 바에 따르면, 최초의 인간이 살던 곳을 ‘에덴 동산’(창세기 2,8)이라고 합니다. 역사가 흐르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 낙원(樂園)을 찾으려고 애를 썼지만 아직 그곳을 찾았다는 소식은 없습니다. 여러분도 찾지 마시라는 이야깁니다. 창세기에 기록된 내용에 따르면 지금의 이란의 어느 지방일 것입니다.
이렇게 에덴지방에 살던 최초의 인간은 흙에서 나왔습니다. 처음 인간은 남자요, ‘아담(ADAM)’이라고 합니다. 말의 어원을 따르면, 사람과 흙이라는 말은 어원이 같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인간은 단순히 흙이 변형된 것이라고 하기보다는 흙과는 전혀 다른 물질이요, 물체이고 또 생명체입니다. 이런 설명하는 방법을 가리켜서 신학에서는 ‘실체변화(實體變化)’라는 용어를 씁니다. 출발점을 이야기할 수는 있지만, 지금은 전혀 다른 형태를 가졌을 때에 사용하는 말입니다. 훗날 언급하게 될 예수님의 몸과 피인 성체와 성혈에 설명할 때도 같은 용어가 사용될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는 갈빗대의 개수가 차이 난다고 합니다. 제가 여성의 갈빗대를 세 본 적은 없으니,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 원인은 위 39항의 응답에 나오는 것처럼, 여인의 탄생은 남자의 갈빗대 뼈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이 말은 과학적인 사실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고, 세상에서 큰소리로 호령하는 것은 남자이지만, 여성도 같은 정도의 중요성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소리가 될 것입니다. 여자는 남자에게 있어서 열등한 존재도 홀대받을 수 있는 존재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심장이 뛰어야만 참으로 살아있는 생명체라고 하듯이 그 생명을 지켜주는 갈빗대도 같은 중요성을 갖는다는 것이고, 여성은 그 역할을 하는 갈빗대를 근거로 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과학적인 사실을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자체로써 귀중하다는 사실을 하느님의 업적을 통하여 우리가 인정하고 그 믿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模像: 모형의 상, 모방하여 만든 상)대로 태어났다고 신앙은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모습을 틀로 삼아서 그 모습을 우리가 간직하고 있다는 믿음입니다. 모상(模像)을 쉬운 말로 바꾸면, ‘흉내’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모습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겉모양으로 같거나 똑같이 보이는 것을 우리가 ‘모상’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사람이 하느님의 모습과 속성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우리들 각자는 하느님의 고귀한 성격을 지니고 있기에 귀중한 대우를 받아야 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마찬가지로 귀중한 대우를 해야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말이 하느님의 모상을 간직했다는 말의 의미가 되기도 합니다. 여러분 각자 자신은 귀중하죠. 속된 말로 먹는 분량으로 생각하면 동물보다 훨씬 못한 가치를 지닌 것이 인간입니다. 몇 몇 가지의 동물들이 가진 특성을 비교해봐도 세상의 모든 동물들과 견주어서 모든 방면에서 뛰어난 능력을 갖지 못한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인간을 가리켜서 ‘만물의 영장(靈長)’이라고 합니다. 무엇이 그렇게 만드는 요소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느님의 특성을, 하느님의 형상을 우리가 나누어 가졌다는 말의 다른 표현일 것입니다.
다음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허락하신 은혜 또는 은총에 대한 것입니다. 은총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 보이는 인간에게 어떠한 방법으로 당신 사랑의 열매를 주시겠습니까? 모르긴 해도 그것은 보이지 않는 방법일 것이고, 하느님을 향하여 제대로 마음을 연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형태일 것입니다. 그 은총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눕니다. 함께 읽어보시죠.
38. (문) 천주 원조(元祖)에게 주신 초성(超性)은혜는 무엇이뇨?
(답) 천주 원조에게 주신 초성은혜는 은총과 성덕(聖德)이니 이로 인하여 저들이 천당 영복을 누릴 자격을 얻게 되니라.
39. (문) 천주 원조(元祖)에게 주신 과성(過性)은혜는 무엇이뇨?
(답) 이 은혜는 사욕(邪慾)편정(偏情)이 없고 지혜가 밝고 고통이 없고 죽지 아니하는 은혜니라.
40.(문) 천주 이런 은혜를 원조에게만 주시뇨?
(답) 그렇지 아니하니, 인류의 시조(始祖)되는 아담으로써 전 인류에게까지 전하여 주시고자 하셨느니라.
은총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고,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받을 수 있는 선물입니다. 그래서 은총의 주도권은 하느님에게 있는 것이지,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다만, 사람들이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고 실천하력고 노력한다면, 그 은총을 받을 수 있는 생활에 가까이 갈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총이란 계시의 영역에 속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구원 사업을 돌이켜보고 신앙으로, 믿음으로 그 내용을 고백한 사람들은 은총을 구별합니다. ‘초성은혜’ 즉 ‘인간의 본성을 초월하는 은혜’와 ‘과성은혜’ 즉 인간에게 본래부터 부족한 요소라서 여러 가지로 상처받고 변형될 수 있지만 이 은혜로써 그 잘못된 방향으로는 덜 나아갈 수 있는 은혜를 가리킵니다. 이 은혜를 우리가 구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최초의 인류에게 이 모든 힘을 주셨습니다. 창세기 1,28에 고백하는 믿음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내려주시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을 기어다니는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사물의 관리를 인간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인간에게 그만한 능력과 힘이 있다고 인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느님의 그 믿음을 지속하여 간직하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제약의 굴레에 얽어맵니다.
다음, 41항부터는 최초의 인간이 행했던 행동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41. (문) 천주 낙원에서 원조의 충성을 어떻게 시험하시뇨?
(답) 천주 지선악수(知善惡樹) 실과를 먹지 말라는 계명으로써 시험하시느니라.
42. (문) 원조 주의 계명을 지켰느뇨?
(답) 원조 주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였으니 마귀 유인에 빠져 금한 실과를 먹음으로 교만한 죄와 순명(順命)치 아니한 죄를 범하였느니라.
43. (문) 천주 원조를 어떻게 벌하시뇨?
(답) 천주 원조에게 주신 초성은혜와 과성은혜를 도로 거두시고 저들을 낙원에서 내치사 마귀 지배에 버려두시느니라.
세상에는 권리가 많으면 의무도 그만큼 많이 따라 붙습니다. 그러나 같은 세상을 살면서 권력은 누리려고 하고, 의무는 몰라라 하는 일들이 생기기에 세상은 혼란스러워지는 것입니다. 국민의 세금을 도둑질 해 먹은 사람중의 하나가 자기들 끼리끼리 모여있는 곳(=국회)에서 투표하고, 구속을 면하게 되었다고 환호하는 모습을 보신 일들이 있으시지요? 인간은 그런 것입니다. 자신들의 위치가 머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부터 그런 식으로 움직입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우리는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를 골라서 또 우리의 일꾼으로 뽑아야 합니다. 악순환의 연속입니다. 그런 것을 생각한다면, 세상에 오래 산다는 것 그것이 슬픔의 요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을 우리가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을 ‘자유의지(自由意志)’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자유에는 항상 책임이 따라 붙습니다.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자유는 제약받을 수밖에 없고, 그것은 당연하다고 할 것입니다. 자유의지라는 말을 쓸 때에는 책임도 제대로 감당할 줄 아는 경우를 가리켜 하는 말입니다.
이제 이 세상에 악한 힘이 어떤 방법으로 들어왔는지를 살피는 차례입니다. 좋은 것이 드러나려면, 나쁜 것이 주변에 있어야 더 빛을 낼 수 있기도 합니다만, 최초의 인간으로 등장하는 아담과 하와가 범한 죄악 때문에 인류는 기나긴 슬픔의 길로 갑니다. 갈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최초의 사과<malum, I. n. 악, 불행, 결점 또는 능금, 사과>사건이라고도 합니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인류에게 악이 함께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줍니다. 보통 문제가 아니죠.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였기에 하느님께 직접 일치할 수 있었던 여러 가지 은혜와 은총을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교리에서는 가르칩니다. 그렇게 인간은 스스로 악의 길을 찾아들어가 그 안에 순종하면서 자유를 느끼고 산다는 착각을 하게 됩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이것저것***)을 하지 말라고 하면, 그 말이 우리의 행동을 제약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불만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다른 설명을 하자면 이렇습니다. 세상 만사 모든 일의 한가지 한가지에 대하여 할 수 있는 일을 설명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덩치 크게 하지 말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시간도 절약되고 여러 면에서 유익합니다.
신약성경 로마서에, ‘인간이 스스로 똑똑한 체 함으로써 불멸의 하느님을 섬기는 대신 썩어 없어질 인간이나 새나 짐승이나 뱀 따위의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1,22-23), 인간이 하느님을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올바른 판단력을 잃고 해서는 안될 일을 하게 내버려두셨다(1,28)’고 했습니다. 수많은 세월을 그런 바탕에서 지내왔기 때문에 인간이 악(惡)에서 다시 돌아선다는 것은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이제 악에서 돌아서는 방법을 찾아보기 위해서, 최초의 악에 대한 이야기로 진행하겠습니다.
6. 원죄(原罪) (44항-49항)
이제는 인간의 역사에서 말하기가 그 중 힘들고 어려운, 그리고 부담스러운 문제로 갈 차례입니다. 이 세상에 죄악이 생긴 원인에 대해서 교회는 어떻게 이야기하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야기가 그 원인에 대한 것을 말하는 데서 끝나는 것은 아니고, 그 해결방안까지도 다뤄야 할 순서입니다. 그 내용은 죄에 대한 것입니다. 그 가운데 처음 다루는 이 원죄(原罪)는 내가 범한 죄도 아니고, 내가 범할 의지도 없었고, 나는 참여하고 싶었다고 말할 수 있는 죄에 대한 것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죄에 대한 것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원죄는 사람들 안에 있는 것으로 말할 수 있는, 악(惡)으로 기울어질 수 있는 인간의 성향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는 순서입니다. 함께 읽죠.
44. (문) 아담의 죄와 그 벌이 후손에게 미치지 아니하였느뇨?
(답) 아담의 죄와 그 벌이 대대손손에게까지 미쳐 내려오느니라.
45. (문) 아담이 끼쳐준 죄를 무슨 죄라 하느뇨?
(답) 원죄(原罪)라 하느니라.
성경에 나오는 원죄의 모습은 하느님의 명(命)을 어긴 것으로 우리의 본성에 달라붙은 죄악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이 만드신 에덴 동산을 최초의 인간인 아담에게 다스리게 하셨습니다(창세기 2,15). 그러면서 그 동산 한 가운데에 있는 나무에 대해서 보통과는 다른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된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창세기 2,16-17).
“왜 먹지도 못하게 하는 나무를 동산에 만드셨을까?” 하는 것은 우리가 하는 질문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런 나무를 만들고 열매를 달리게 해놓고, 사람이 그 명령을 지키는가, 지키지 않는가 노려보려고 했던 하느님이 참으로 못됐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질문과 응답은지금 세상에 사는 우리가 하는 소리일뿐입니다. 아담은 그런 불만 섞인 질문을 하느님을 향하여 하지도 않았고, 하느님의 명령을 그대로 수용합니다. 처음에는 말이죠. 왜 아담은 우리가 요즘 할 수 있는 것처럼 하느님을 향하여 항의하지 않았을까요? 성경에서 우리가 아담의 말과 생각을 읽어볼 수는 없으니, 그가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는 것은 우리가 추측할 방법은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아담과 같은 입장이었더라면, 하느님을 향하여 어떻게 질문하거나 항변하시겠습니다. 왜 그렇게 인간을 불완전하게 만들었는지 탓하고 따지겠습니까?
우리의 응답은 뒤로 접어두고, 하느님의 슬픔을 먼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기껏 세상을 만들어놓고 그것을 제대로 다스리라고 능력을 주어 파견했더니, 알량한 자유의지로 내 속마음을 후벼 파? 이런 인간을 세상에 그냥 놔두고, 내가 창조한 사물들을 다스리도록 내버려둬?”하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생각을 적용한다면, 그냥 놔둘 수가 없죠. 그러나 참으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흙으로 만든 그릇에 해당하는 인간을 통하여 그래도 뭔가 하실 일이 있으셨기에 그러셨을 것입니다.
신약성경 고린토 후서 4장 6절과 7절에 보면,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시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또 같은 신약성경 로마서 9,19-21에 보면, ‘이제 그대는,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왜 사람을 여전히 책망하십니까? 사실 누가 그분의 뜻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을 것입니다. 아, 인간이여! 하느님께 말대답을 하는 그대는 정녕 누구인가? 작품이 제작자에게 “나를 왜 이렇게 만들었소?” 하고 말할 수 있습니까? 또는, 옹기장이가 진흙을 가지고 한 덩이는 귀한 데 쓰는 그릇으로, 한 덩이는 천한 데 쓰는 그릇으로 만들 권한이 없습니까?’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지도 못했던 세상 최초의 인간들이 저질렀다는 ‘원죄(原罪)’에 대하여 우리가 왈가왈부하며 슬퍼하기보다는 우리 모습, 우리 삶에 남아있는 그 찌꺼기들을 어떻게 하면, 치워낼 수 있는지를 살피고, 그 과정을 실천하는 것이 것이 오히려 합당한 순서가 될 것입니다.
이어지는 항목은 이 원죄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내용에 대한 것입니다. 읽어보겠습니다.
46. (문) 모든 사람이 다 모태에서부터 원죄가 있느뇨?
(답) 성모 마리아 외에는 모든 사람이 다 모태에서부터 원죄가 있느니라.
47. (문) 마리아는 어떻게 원죄에 물듦이 없이 잉태되시뇨?
(답) 마리아는 천주의 특별한 은혜로 예수의 공로를 미리 입으사 원죄에 물듦이 없이 잉태되시느니라.
48. (문) 마리아의 이 특별한 은혜를 무엇이라 하느뇨?
(답) 무염시태(無染始胎)라 하느니라.
49. (문) 천주 인류를 원죄 중에 그저 버려두시뇨?
(답) 그렇지 아니하니 천주 무한하신 자비로 즉시 구세주를 허락하시고 후에 과연 보내시니라.
첫 번째 항목은 교회의 신앙이요, 믿음입니다. 신앙과 믿음은 논리(論理)로 해설할 수 없습니다. 애초에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 생활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을 가리켜서 ‘원죄’요 그 찌꺼기의 역할이라고 한다면, 그것에서 탈출 할 수 있는 방법은 다음에 나오는 구세주에 대한 내용으로 설명할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라는 여인에 대해 처음 언급하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에는 ‘마리아’라는 이름이 참으로 많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남산에서 돌 10개 던지면, 몇 개는 어느 성씨(姓氏)가 맞을 거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 처지입니다. 많고 많은 마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들 가운데,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인간으로서 참여한 특정한 여인을 가리켜 우리가 ‘성모 마리아’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여인이 하느님의 업적에 참여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신약성서 루가복음 1장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소설과 같은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천사가 찾아왔고,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갖게 될 것이라 전하고, 고민하다가 받아들이고, 천사는 돌아가고..... 이 과정을 기도문으로 바꾼 것이 ‘성모송’입니다. 시작기도 시간은 아닙니다만, 함께 하시지요....
이 여인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몸을 취하시어 태어나실 때, 그 바탕이 된 분이십니다. 하느님을 모셔들이기에 합당(合當)해야 했으니, 바로 거기에 교회의 신앙은 보통의 인간들처럼 ‘원죄에 물들지 않고 태어나셨다’라는 믿음을 더하여 그에 대해서 특별한 삶의 자세를 가진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인간으로서도 귀한 것과 덜 귀한 것을 구별합니다. 다른 사람의 사진은 귀중하게 여기지 않아도, 부모님의 사진이라면 우리가 갖는 마음자세는 달라집니다. 그리고 그 사진에 대하여 누군가 모독한다면, 우리는 흥분합니다. (2006년 월드컵에서, 프랑스 사람인 지네딘 지단이 이탈리아 선수 마테리치를 박치기로 들이박아서 쫓겨났지요? 그 원인도 그것중의 하나라는 소리가 나왔습니다.) 왜 그럴까요? 사진이란 똑같이 종이에 옮겨놓은 그림에 불과한 건데...라고 말하면.....‘무식하기는....왜 그렇게도 몰라.....’라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은 여러분들도 잘 아실 것입니다.
이 여인의 순종을 통해서 하느님이 원하신 것은 무엇일까? 바로 인류의 구원사업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역할을 인간세계에 하신 ‘그리스도’를 ‘예수’라는 이름으로 이 세상에 낳게됩니다. 역사학자들은 이 예수는 기원전 4년경에 태어나서 기원 후 30년 4월 7일에 이 세상을 떠났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분을 통하여 세상의 창조주요, 최고 관리자로서 우리가 굳이 구별하자면 성부로 부르는 하느님이 의도하신 구원 사업을 수행하시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업적은, 최초의 인간들이 자유의지를 행사하여 하느님의 뜻을 거슬려 멸망의 길로 나아갔던 것에 비해서,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순종으로서 하느님의 아프신 마음을 위로해 드린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같은 원칙이 적용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길 터인데, 우리 신앙에서는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참여한 인간인, 마리아에 대해서 달리 말합니다.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입은 사람이 마리아였다고 말입니다. 그녀에게 주어졌던 은총 가운데 오늘 말하는 내용은 ‘무염시태’입니다. 마리아가 그의 부모(=안나와 요아킴)의 가정에 잉태될 때부터 특별한 은총 가운데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인류의 구원사업은 하느님의 뜻을 담아 계속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