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닌 중학교는 남녀 혼합 학교였다. 그렇다고 반마다 남녀 혼합은 아니었다. 우리 학년은 총 4 반이다. 입학 초기 남녀 따로 반을 나누다가 어정쩡하게 남녀가 남게 되자 한 반을 남녀 혼합 반으로 배정하였다. 그중에 난 남녀 혼합 반에 들게 되었다. 초등학교 때와 달리 남녀의 성장이 두드러지게 차이가 났다. 대개 여자가 남자보다 성장이 빨랐다. 앳된 얼굴이 갸름해졌고 엉덩이가 커지면서 가슴이 봉긋하게 솟아올랐다. 지금은 초등학교 때 사춘기를 겪을 정도로 성장이 빠르다지만 당시만 해도 중학교나 올라가야 사춘기를 겪었다. 나 역시도 키는 작지만 감정은 남들 사내들과 다를 게 없었다. 어쩐지 여학생을 정면으로 쳐다보질 못하였다. 초등학교 땐 여자애들과 곧잘 말을 섞곤 하였는데 중학교에 들어와선 이건 뭐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여자들 앞에선 묵묵부답이었다. 어쩌다 여자 동급생이 내 이름을 부르기라도 하면 닭살이 돋았다. 속으론 좋아하면서도 겉으론 안 그런 척 무진 애를 썼다.
혼합 반이라서 나쁜 점은 체육시간이다.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땐 단체로 학생복을 입고 다녔다. 그러다 체육시간이 다가오면 단체로 체육복으로 갈아입었다. 문제는 남녀 혼합 반이라서 교실 안에서 옷을 갈아입는 다는 게 퍽이나 까다로웠다. 암묵적으로 남자들이 옷을 갈아입는 동안 여학생들은 복도로 나갔다. 일단 옷을 갈아입은 남자들은 무조건 운동장으로 나가야만 했다. 그제야 여학생들이 하나 둘 교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운동장에 나왔다.
혼합 반인데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남녀가 따로 수업을 들어야 할 과목이 있었다. 남자들에겐 농업시간이 그랬고 여자들은 실과(후에 기술가정으로 과명이 바뀜)시간이 그랬다. 실과는 주로 여자들이 익혀야 할 가정생활 같은 걸 배우는 과목이었고 농업은 남자들이 시골에서 해야 하는 농업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왜 굳이 과목을 구별했어야 할까 남자라고 여자라고 서로의 직업에 관심이 없는 게 아닐 텐데 싶지만 당시엔 남녀가 해야 할 일이 따로 있다고 여기던 시절이었다.
어느 날 여학생들의 실과 시간에 무슨 튀김인지 뭔지를 만드는 날이었다. 여자들은 당일에 있을 실습을 두고 아침부터 소란스럽게 떠들어 댔다. 궁금해서 물어보면 네들은 신경 쓸 일 없다는 표정으로 일관했다. 남자들은 교실에서 농업을 배우고 여자들은 실습실로 우르르 몰려갔다. 잠시 후 어디선가 고소한 기름 냄새가 물씬물씬 풍겨왔다. 공부하다 말고 남자들은 하나같이 코를 벌름거렸다. 그러면서 표정이 ‘계집애들 아침부터 요란을 떨더니만 오늘은 뭔가 제대로 만드나 보지’ 하며 속으로 생각을 하는 듯하였다. 수업이 끝나자 여학생들이 하나 둘 교실로 돌아왔다. 그러면서 커다란 쟁반에 무슨 튀김과자를 만들어가지고 교탁 위에 올려놓고 큰 소리로 “이거 우리가 만든 거다 한 번 먹어봐”하며 자랑스러워한다. “와”하고 남자 애들이 교탁으로 나아가 네모난 모양의 튀김과자를 집어 먹었다. 세상에 이렇게 고소한 과자가 있었다니 과자는 삽시간에 독나버리고 쟁반 위엔 부스러기만 어지럽게 놓여있다. “네들이니까 이거 먹는 거다 딴 반은 어림도 없지” 그러고 보니 혼합 반에 속한 우리 반이니까 여자들의 선심을 받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려 고맙다 오늘 같은 날은 써먹을 만 하구만” 짓궂은 남자들의 농담에도 여자들은 오늘만큼은 웃음으로 넘겨주었다.
난 공부엔 워낙 젬병이었다. 중학교에 입학하고서 첫 중간고사를 봤다. 예상했던 대로 같은 학년 총수 사백여명 중에 사백 몇 등을 하였다. 동네 창피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땐 교실 벽면에 등수와 이름을 붙여 놓았다. 학년 별로 성적을 두고 경쟁심을 불러 일으켜 공부에 집중하란 선생님들의 꼼수였다. 그러니 이건 뭐 감출내야 감출 수도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여자들 앞에서 고갤 들 수가 없었다. 그때 음악 선생님이 아주 독종으로 이름이 났다. 육십 점 밑으론 한 문제 틀릴 때마다 봉걸레 자루로 엉덩일 맞아야 했는데 그게 장난이 아니었다. 한 대만 맞아도 개구리가 회초리 맞고 쪽 뻗듯이 그만 그 자리에서 엎어질 정도였다. 난 호되게 엉덩일 얻어맞았다. 눈물이 찔끔거렸다. 시험을 못 본 것도 서러워죽겠는데 몽둥이 타작이라니 정말이지 억울했다. 그러나 마땅히 대들만한 건덕 지도 없었다. 이후로 안 돌아가는 머리지만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굳게 하였다. 시험이 끝나면 전교생이 모인 운동장에서 우등생 시상식이 있었다. 그 자리에 꼭 빠지지 않는 사람 중에 한 명이 같은 동네에 사는 두 살 위의 형이었다. 그 형은 매 학기 시험 때마다 일등을 차지했다. 어떻게 공부하면 저런 자리에 올라갈 수 있을지 여간 궁금한 게 아니었다. 그 형님은 나중에 삼성에 무슨 연구원인지 뭔지 하는 곳으로 취업을 하였다. 여름방학에 그 형을 찾아갔다. 그리고 형과 함께 방학숙제를 하며 모르는 것을 물어보고 배웠다. 말하자면 개인교습을 받은 셈이다. 수학문제와 국어문제 등을 형에게 묻고 형은 인내심을 갖고 나를 차근차근 가르쳐 주었다.
가을 학기 중간고사를 보았다. 신통하게도 시험문제마다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이 나왔다. 결과는 놀라웠다. 그리고 난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전교생이 모인 운동장에서 나도 상이란 걸 받았다. 물론 우등상은 아니다. 워낙 공부 못하던 사람이 성적이 일취월장 오르면 격려 차원에서 주는 진보상이다. 얼마나 공부를 못했으면 그런 상까지 받을까 싶지만 내겐 너무도 귀한 상이었다. 그 뒤로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알게 되자 한 번 오른 성적에서 뒤로 밀리진 않았다. 한 학급이 오륙십 명 되는데 잘하면 십 등 안에 못하면 십오 등 안에 들었으니까 내 딴엔 꽤 잘한 거다 특히 음악시험만큼은 올백을 맞았다. 음악이 좋아서가 아니라 몽둥이찜질이 무서워서였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노래 부르는 건 남들만큼은 할 줄 안다. 콩내물 대가릴 그릴 줄 몰라서 그렇지 내가 작사 작곡 한 노래도 두어 곡 가지고 있다. 비록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 나만 아는 노래지만 말이다.
중학교 삼 학년 이학기가 되었다. 공부 잘하는 놈들은 인문계 고등학교로의 진학을 준비하였고 나처럼 이도 저도 아닌 친구들은 공업계 또는 상업계 고등학교를 놓고 고민하였다. 사실 인문계와 공업계의 구분도 제대로 몰랐던 난 일단은 대학은 못 갈 것이란 판단을 하였다. 더군다나 아침마다 버스표 살 돈이 없어 밥 먹듯 잔돈을 꾸러 다닐 정도인 우리 집에서 대학 등록금을 대줄만한 돈은 꿈도 못꾸었다. 그러니 일찌감치 공업계통의 학교를 나와 사회에 취직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어렴풋이나마 하고 있었다.
어느 날 학교로 고등학교 형과 누나들이 찾아왔다. 말하자면 자신들이 다니는 학교를 홍보하기 위해서 온 것이다. 공주 고등학교, 천안공고, 논산공고, 대전 동아공고 등등 몇몇 고등학교 선배들이 반을 돌며 자신들의 학교를 홍보하며 은근히 자랑을 하였다. 급우들의 눈은 하나같이 기대감에 부풀었다. 그리고 이어서 담임 선생님의 개별 면담이 진행되었다. 내 차례가 되었다. “너 어디 가고 싶은 고등학교가 있냐” 선생님은 대뜸 그렇게 질문을 하셨다. “ 잘 모르겠어요, 대학은 못 갈 것 같구요 고등학교 나와서 바로 직장생활을 하고 싶어요” 선생님은 한참을 뜸을 들이더니 “그럼 천안공고에 들어가라” 나는 대답 대신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교무실을 나왔다. 그러던 어느 날 가까운 옆 면소재지에 위치한 신풍실업고등학교에서 선배들이 학교를 선전하기 위해 교질에 들어왔다. “애, 우린 가까운 옆 면소재지에 위치한 신풍실업고등학교 학생들입니다. 공업과 농업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우리 학교가 딱입니다. 여자라면 상과도 있으니 진학하면 나중에 취직도 잘 되고 미래가 보장되는 학굡니다.” 그 소리에 내 눈이 번쩍 뜨였다.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우리 집은 농사치가 없다. 그러니 일찌감치 농군이 되겠다는 생강은 접은 지 오래다. 그렇다면 내가 배워야 할 과목은 바로 공업계통이다 게다가 가까운 곳에 위치하니 집에서도 다닐 수 있지 않겠는가. 천안공고는 집에서 너무 멀다. 자취를 하거나 기숙사에 들어가야 하는데 우리 집은 그만한 뒷감당을 못한다. 교실을 나서는 선배를 쫓아갔다. 그리고 좀 더 상세한 질문을 던졌다. “건축과, 토목과, 농과 상과 중 네가 할 만한 게 뭐냐고 물었다.” “전 수학 같은 건 잘 못하지만 그림 그리는 것은 좋아합니다.”라고 했더니 건축과에 진학하면 될 것 같다는 대답을 들었다.
짧으면 짧고 길 다면 긴 중학교 삼 년이 바람처럼 지나갔다. 남들은 사춘기다 뭐다 하며 혼란스런 시기를 겪었다고 말 하지만 난 가슴 설레거나 밤을 지새우는 등의 낯간지러운 일이라곤 일도 없이 그저 평범한 중학교 시절을 보냈다. 그렇다고 너 없으면 심심해서 못살고 할 만한 남자 친구 하나 없이 홀가분하게 학교를 떠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