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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하목정을 노래한 옛 선비들의 시
프롤로그
옛 선비들은 참 많은 일을 해야 했다. 공부는 기본이요, 벼슬살이를 하지 않은 시골 선비는 농사도 지어야 했다. 주경야독晝耕夜讀이란 말이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배운 사람, 즉 지식인이란 이유로 선비는 집안은 물론 마을 공동체 일에도 솔선수범해야 했다. 또 전쟁이나 반란처럼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붓을 던지고 칼을 잡아야 했다. 이때도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일반 백성들보다 먼저 앞장서야 했다는 것이다. 만약 나서야 할 때 나서지 못한 선비는 난이 수습되고 나면 이런 저런 이유로 문중 혹은 마을 공동체 사회에서 자연도태 됐다. 물론 세상에는 이름만 선비인 가짜 선비도 많았지만, 진유眞儒라 불리는 진짜 선비도 많았다. 그랬다. 옛 선비사회는 이른바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철저했다.
선비는 때를 만나면 벼슬에 나아가 뜻을 펼쳤고, 반대로 때를 만나지 못하면 물러나 시골에서 공부하며 때를 기다렸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학문을 하는 학자이자 시인이자 문장가였다. 그런 그들이 농사짓는 백성들 눈에는 허구한 날 정자에 올라 시나 읊는 한량처럼 보였을지는 몰라도 그게 그들의 참모습은 아니었다. 하목정에는 옛 선비들이 남긴 시를 새긴 시판이 많이 걸려 있다. 시판 없는 하목정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누정문화·선유문화·구곡문화
옛 선비들이 향유한 문화 중에는 대표적으로 누정문화·선유문화·구곡문화 같은 것이 있었다. 이 셋을 ‘동動·정靜’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누정문화는 고정된 누정을 배경으로 하는 까닭에 정적인 문화, 선유문화는 배를 타고 이동을 하니 동적인 문화, 구곡문화는 동과 정을 모두 갖춘 문화라 할 수 있다.
누정樓亭 문화는 누와 정자를 배경으로 하는 문화다. 누정은 아무 곳에나 세우지 않는다. 반드시 주변 경관이 빼어나게 좋은 곳에 세운다. 그렇다고 해서 높은 산 정상이나 너른 들판 가운데 세우지는 않았다. 대체로 거주지에서 그리 멀리 않은 거리에, 산과 물을 가까이 끼고 있는 곳에 세웠다. 풍광 좋은 곳에 위치한 누정은 자연스럽게 시인묵객詩人墨客을 불러 모았다. 서울에서 아주 먼 시골이라 하더라도 이름난 누정에는 반드시 전국적 인지도를 지닌 인물들이 다녀갔다. 여행길에 다녀가기도 했고, 그 지역 관리로 부임했다가 들리기도 했다. 선비들은 이런 누정에다 자신이 다녀갔다는 흔적을 남겼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누정시樓亭詩다. 누정에서 느낀 감흥을 시로 읊었다 해서 누정시라 한다.
선유船遊 문화라는 것도 있었다. 선유는 우리말로 뱃놀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뱃놀이와 선비들이 즐긴 선유는 좀 달랐다. 선비들은 선유를 행할 때마다 반드시 ‘선유록’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 선유록에는 참석자의 신상정보는 물론 시회詩會를 비롯한 주요 행사내용이 일지형식으로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다. 특히 조선시대 대구 달성지역에서 행해진 몇 몇 선유록 자료를 보면, 배에 기생 또는 여자가 함께 탔다는 기록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이런 점을 참고해보면 과거 선비들이 행한 선유문화는 향락이 아닌 학문수양의 한 방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구곡九曲 문화는 글자 그대로 아홉 굽이 경승지를 즐기는 문화다. 구곡문화 원조는 중국 남송시대 인물인 주자朱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이다. 주자는 성리학[주자학] 창시자로 조선 선비사회에서 공자만큼이나 추앙받은 인물이다. 무이구곡은 주자가 은거했던 무이산의 아홉 절경으로, 주자는 계곡을 끼고 있는 무이산 아홉 굽이에 각각 이름을 붙이고 시를 지었다. 이 시가 ‘무이도가武夷櫂歌’다. 주자를 하늘처럼 떠받들었던 조선의 선비들. 당연히 그들은 주자의 무이구곡과 무이도가를 모델 삼아 자신들의 연고지에 구곡을 설정하고 경영하면서 구곡문화를 향유했다. 그런데 경치가 좋다고 무조건 구곡이 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구곡에 선정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갖춰야 할 몇 가지 조건이 있었다. ‘산수山水·사람·구곡시九曲詩’가 그것이다.
대구 달성은 영남권 누정·선유·구곡문화의 산실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금호강과 낙동강이 만나는 달성지역은 예로부터 이름난 누정이 곳곳에 산재해 있었다. 금호강 유역에는 다사읍 이천리에 선사재와 이강서원, 인근 달서구 강창에는 이락서당이 있었다. 낙동강 유역에는 하빈면 하산리 하목정, 다사읍 문산리 영벽정, 매곡리 아금정, 죽곡리 부강정, 구지면 이로정 등이 유명했다. 선유로는 1601년 다사읍 이천리 선사재 인근에서 행한 ‘금호선사선유’, 1899년 사문진 상화대에서 행한 ‘낙강상화대선유’ 등이 있었고, 1617년 여름 한강 정구가 신병치료차 제자들과 함께 뱃길과 육로를 이용해 46일간 동래온천을 다녀온 ‘봉산욕행蓬山浴行’ 등이 있다. 구곡은 달성군 가창면 최정산과 신천 상류 일대에 설정된 ‘수남구곡守南九曲’, 금호강·낙동강·와룡산 일대 ‘운림구곡雲林九曲’과 ‘와룡산구곡臥龍山九曲’ 등이 있었다.
이처럼 옛 선비들이 향유한 누정·선유·구곡문화는 공통점이 있다. ‘산수山水·사람·시詩’가 있다는 것. 누정·선유·구곡은 기본적으로 산과 물을 끼고 있어야 한다. 실제로 누정·선유·구곡으로 이름난 곳은 하나 같이 모두 산과 물을 끼고 있다. 다음은 사람이 있어야 한다. 제 아무리 뛰어난 산수를 갖췄다 해도 누정을 건립하고, 배를 띄우고, 구곡이라 이름 붙여주는 사람이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중국 태산도 공자를 얻었기에 천하에 이름이 났고, 대구 달성 구지면 낙동강변에 있는 이로정二老亭도 한훤당 김굉필과 일두 정여창이란 두 걸출한 인물을 얻었기에 세상에 이름이 날 수 있었다. 끝으로 시가 있어야 한다. 설령 누정이 있고, 배를 띄우고, 구곡이 설정되어 있다 해도 그 감흥을 시로 읊은 누정시·선유시·구곡시가 없으면 말짱 도루묵이요, 감초 없는 약방이다.
하목정에 걸린 누정시판
누정문화의 꽃은 아무래도 ‘누정시樓亭詩’라 할 수 있다. 누정시는 누정에서 느낀 감회를 시로 표현한 것. 우리나라 대부분 누정에는 누정시가 시판으로 제작돼 걸려 있다. 대구 달성지역 누정 중 최고로 평가받는 하목정은 예로부터 수많은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의 답사 1번지였다. 그중에는 대구 달성지역으로 부임해 온 관리도 있었고, 하목정 주인의 지인도 있었고, 그 지인의 후손도 있었다. 하목정에 시를 남긴 이들은 현재까지 열여덟 명 정도 확인된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들의 시판 중 일부는 분실하고 현재 하목정에 남아 있는 시판은 모두 열네 개다. 어떤 이들이 어떤 시를 남겼는지 한 번 살펴보자.
이제李穧
題贈霞鶩堂主人 하목당 주인에게 시를 지어 드림
故人家住洛東涯 옛 친구 집이 낙동강가에 있는데
楊柳陰陰策馬遲 수양버들 우거져 말이 더디가네
烟月一區爰得我 평화로운 한 구역 내 얻었으니
行藏半世且隨時 반평생 나아가고 물러남이 다 때가 있구나
澹臺不入言遊室 담대멸명은 언유의 집 찾지 않고
山簡頻過習氏池 산간은 제습씨 연못 자주 들렀네
試看堂名霞鶩字 하목이란 집 이름 보니
不須摸寫倩新詩 구태여 새 시 지을 필요 없구료
이제[1589-1631]는 1613년(광해군 5) 증광별시에서 이지영·이지화 형제와 함께 동방급제한 인물로 대구부사 재임[1628-1631] 중 세상을 떠났다. 이 시는 그가 대구부사 재임 시인 1629년(인조 7) 봄, 이지영의 집 하목정을 찾아 지은 시다. 시를 통해 수양버들 우거진 아름다운 하목정 풍경과 두 사람이 오랜 세월 관계를 이어왔음을 알 수 있다.
서경西坰 류근柳根
一江洲渚自縱橫 강가 모래톱 여기저기 있고
三面峰巒類削成 삼면엔 산봉우리 깎아 놓은 듯 하네
霞鶩祗今增地勝 하목정은 지금 경치 더 돋보이게 하고,
烟波終古與天平 안개 낀 물결은 예나 지금이나 하늘과 나란하네
炎蒸氷雪長風至 무더위에 빙설 같은 바람 불어오고
上下瓊瑤片月明 하늘과 물에는 한 조각 구슬 같은 달이 있네
我欲從君結茅宇 나도 그대 따라 초가집 짓고자 하니
白鷗能不謝殘生 흰 갈매기야, 남은 생 나와 함께 살기를 사양치 말라
류근[1549-1627]은 1572년(선조 5) 별시 문과에 장원, 1587년(선조 20) 문신을 대상으로 한 정시庭試[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대궐 안에서 치렀던 과거시험]에서도 장원을 한 인물이다. 이조 참판, 예조·이조 판서, 대제학, 좌찬성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시문으로 뛰어난 인물의 시답게 하목정 주변의 산과 물, 하늘과 강물에 비친 달, 백구와 초가집 등 하목정 주변 경치를 잘 묘사하고 있다.
동명東溟 정두경鄭斗卿
江濶無涯涘 강은 넓어 끝이 없고
亭高入翠微 정자는 높아 푸른 기운에 드네
風帆來又往 돛단배는 오고 가고
水鳥集還飛 물새는 모였다 흩어져 나네
聞此空勞夢 들으니 (삶은) 부질없는 꿈인데
何年定拂衣 언제쯤이면 옷을 털 수 있을까
將詩爲左券 장차 시를 지어 증명할 것이니
分我釣魚磯 나에게도 낚시터 하나 나눠 주게나
정두경[1597-1673]은 백사 이항복의 문인으로 시문과 서예에 뛰어났으며, 1629년(인조 7) 별시문과에 장원급제 했다. 부수찬, 정언, 직강, 삼사를 지내고, 예조·공조 참판, 승문원 제조에 제수됐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사후 이조 판서, 대제학에 추증됐다. 이지영의 3남인 은와隱窩 이구李球의 문집인 은와집에 정두경 등과 함께 지은 시가 있는 것으로 보아 서로 친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휴정逸休亭 이숙李䎘
未到伽倻寺 가야사[해인사] 이르기 전
先登霞鶩堂 하목당에 먼저 올랐네
餘輝當晩霽 햇살은 날 저물자 사라지고
孤影帶夕陽 외로운 그림자 석양을 두르고 있네
勝槩擬滕閣 빼어난 경치는 등왕각에 견줄만하고
淸遊續武昌 맑은 유람은 무창[황학루]을 잇네
江山本無主 강산은 본래 주인이 없는데
堪笑此生忙 바쁘게 사는 내 인생이 우습구나
이숙[1626-1688]은 경상도관찰사 겸 대구도호부사[1672-1673], 이조 판서, 우의정 등을 지낸 인물로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서인西人임에도 대구와 인연이 깊어 대구 상덕사에 제향 됐다. 위 시는 경상도관찰사 겸 대구도호부사 재임 시, 가야산 해인사 가는 길에 하목당에 들러 지은 작품으로 보인다.
호곡壺谷 남용익南龍翼
題霞鶩堂主人 하목당 주인에게 써줌
三淸洞裏憶舊遊 삼청동 옛 유람 생각나
來倚河濱百尺樓 하빈 땅 높은 누각에 왔네
孤鶩落霞斜日暮 해 저물녘 외로운 따오기와 저녁노을
一聲蘆管在漁舟 한 소절 갈대피리 소리 고깃배에 들리네
남용익[1628-1692]은 조선 후기 문신이자 학자로 인조 때[1648년] 정시 문과에 급제, 효종·현종·숙종 때 경상도관찰사, 양관 대제학, 예조·이조 판서 등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특히 시문과 글씨에 능했으며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이 시는 남용익이 경상도관찰사 재임 시에 이지영의 3남인 은와 이구에게 써준 작품이다.
서파西坡 오도일吳道一
題霞鶩堂 하목당에 시를 쓰다
江路停驂故倦遊 강가에 말을 세워 느긋하게 놀았더니
晩風蘋末已生秋 저녁 바람 마름 풀에 가을 기운 생겨나네
登臨偶得神仙界 누대에 올랐다가 우연히 신선세계 만나고
邂逅還逢詩酒儔 오랜만에 시주詩酒하는 무리 만났네
天外遠烟山抱野 하늘가 아득한 안개, 산은 들을 감싸고
樹頭殘日水明樓 나무 위로 해는 지고 물은 누를 밝히네
共君收拾吟哦興 그대와 함께 시 읊조리는 흥 거두고
催理漁洲一釣舟 낚시터로 낚싯배 빨리 저어 가네
伽倻山色落前洲 가야산 빛 앞 물가에 떨어지고
晩鶩孤霞一樣秋 외로운 따오기와 저녁노을 한 모양 가을일세
勝地偶成萍水會 경치 좋은 곳에서 우연히 나그네 만나
夕陽携酒更憑樓 석양에 술 들고 다시 누각에 기대네
癸酉仲秋 계유년 중추
오도일[1645-1703]은 1673년(현종 14) 춘당대시에서 을과 1등으로 급제한 인물로, 조선 숙종 때 활동한 문신이다. 서장관, 대사간, 부제학, 도승지, 강원도관찰사, 대제학, 한성부윤, 병조 판서를 지냈다. 특히 문장에 뛰어나 세칭 ‘동인삼학사東人三學士’로 칭송받았으며, 울진 고산孤山서원에 제향 되었다. 위 시는 1693년 중추절에 쓴 작품이다.
남곡南谷 권해權瑎
次韻贈霞鶩堂主人 하목당 주인에게 차운시를 지어 드림
秋盡江湖一釣舟 늦가을 강호에 낚싯배 하나
荻花疎雨滿汀洲 갈대꽃 가랑비는 모래톱에 가득하네
山河今古幾過客 고금에 이 산하를 지나간 나그네 몇이던가
天地東南有此樓 천지 동남에 이 누각을 거쳐 갔으리
千里逢迎皆勝友 천리를 와서 만나니 다 좋은 벗이요
十年蹤跡適奇遊 십년 종적에 때마침 기이한 유람일세
烟波落木蕭蕭下 물안개와 낙엽 쓸쓸히 내리는데
把筆高吟我思悠 붓 잡고 크게 읊조리니 생각이 그윽해지네
권해[1639-1704]는 정시 문과에 급제해 홍문관 부정자를 시작으로 삼사三司를 거쳐 서장관, 경상도암행어사, 대사헌, 부제학, 도승지, 경기도·평안도 관찰사, 형조·호조 참의를 지냈다. 갑술환국으로 창성에 위리안치 되었다가 말년은 예안에서 보냈으며, 문장과 글씨에 능했다. 시판에 새겨진 ‘신해중추辛亥仲秋 권해權瑎 개옥시고皆玉詩稿’로 볼 때 위 시는 1671년 신해 중추절 작품이다. 개옥은 권해의 자字다.
귀록鬼錄 조현명趙顯命
題霞鶩堂 하목당으로 시를 지음
昔從巡撫南討 옛날 순무사 좇아 남쪽 토벌할 때
玄甲將軍若雷 검은 갑옷 장수 우레 같았네
羽箭麒麟閣畵 군공軍功으로 기린각에 초상화 그려지고
角巾霞鶩堂回 각건 쓰고 하목당으로 돌아왔네
幽期柳渚梅塢 그윽한 약속 버드나무 물가 매화 언덕이요
勝事歌樓舞臺 기뻐하며 누대에서 노래하고 춤췄네
榮辱浮雲足說 영욕은 뜬 구름이니 족히 말할게 있겠는가
願言與子徘徊 원컨대 그대와 더불어 거니세
조현명[1690-1752]은 조선 후기 문신으로 이인좌의 난 때 종사관으로 종군한 공로로 양무공신 3등에 오르고, 풍원군에 봉군됐다. 이후 대사헌, 도승지, 경상도[1730-1732]·전라도관찰사, 이조·병조 판서,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지냈다. 시호는 충효忠孝다. 위 시에 등장하는 ‘검은 갑옷 입은 장군’, ‘기린각에 초상화가 그려진’, ‘하목당으로 돌아온’, ‘원컨대 그대와’에서 지칭하는 이는 전양군 이익필을 말한다. 이인좌의 난 때 이익필은 반란 토벌군의 금위우별장, 조현명은 종사관으로 같이 활약했다. 이 시는 조현명이 그때의 인연을 떠올리며 쓴 작품이며, 이 시에 대한 이익필의 화답시가 이익필의 문집 하옹집霞翁集에 실려 있다.
우계雨溪 김명석金命錫
次霞鶩堂重修韻 하목당 중수운에 차운하다
樓下春江不見湄 누각 아래 봄 강변 아득하고
上公居處實雄規 어르신 거처는 진실로 웅장하구나
西山疊峙浮雲外 서산 첩첩 산봉우리 뜬 구름 밖이고
南浦孤帆細雨時 남포 외로운 돛단배 가랑비를 맞네
富貴百年專寵樂 백년 부귀는 총애와 즐거움을 다했고
勳名一代被聲詩 한 시대 공명은 시詩에 올랐네
才多事少身猶健 재주 많고 일 적으니 몸은 더 건강하고
驢背閑情景物宜 한가하게 나귀 타시니 정취와 풍경 좋구나
김명석[1675-1762]은 갈암 이현일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향시에서 장원을 했으나 대과는 신경 쓰지 않고 평생토록 오직 학문에만 전력했다. 특히 시문에 재주가 있어 경승지에 대한 시를 많이 남겼다. 80세에 수직壽職으로 첨지중추부사에 올랐다. 전양군 이익필의 딸이 제산 김성탁의 아들 김제행과 혼인했는데, 김명석의 재종질부가 된다.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
用漢陰李先生韻寄題霞鶩亭 한음 이선생[이덕형] 운韻자를 써서 하목정에 붙임
雙湖宛轉一江橫 두 호수 두르고 강 가로놓여
化力何會造次成 조화가 어찌 창졸간에 이루어졌을까
魚鳥烟霞非外物 어부, 새, 안개, 노을은 바깥 세계의 사물이 아니요
樓臺鍾鼓屬時平 누, 대, 종, 북은 태평시대를 이었도다
開簾楚色斜陽遠 주렴 걷으니 나무 빛 석양에 멀어지고
俯檻天光永夜明 난간 굽어보니 하늘 빛 오래토록 밝도다
塵裏聞名空白首 속세에 이름만 나고 부질없이 희어진 머리
百年匏繫笑吾生 평생 박처럼 얽힌 내 인생이 우습도다
채제공[1720-1799]은 조선 후기 문신으로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삼정승을 모두 지낸 인물이다. 특히 정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시판에 새겨진 ‘병오중춘丙午仲春’을 참고하면 이 시는 1786년 음력 2월 채제공이 하목정을 방문해, 한음 이덕형의 시에 차운해 지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계서溪西 이희평李羲平
霞鶩亭敬次先祖板上韻 선조의 하목정 시판에 차운次韻 함
李氏亭臺洛水涯 이씨 정자 낙동강에 있어
淸秋歸客倚欄遲 맑은 가을 돌아오는 나그네 느지막이 난간에 기대네
至今先祖留芬地 지금 선조 향기 머문 자리에서
記背家君駐節時 옛날 아버님 부절 머문 때를 떠올리네
幽鳥近人聲上下 고요히 새는 사람 가까이 오르내리며 지저귀고
垂楊分路影差池 수양버들 길을 나눠 그림자 들쭉날쭉하네
南遊宦蹟餘華髮 남쪽 벼슬길에 남은 것은 하얀 머리털
百感斜陽又此詩 석양에 온갖 감정 일어 또 시를 짓네.
乙酉初秋 六世孫 金山郡守 羲平 을유년 초가을 6세손 금산군수 희평
이희평[1772-1839]은 앞서 제일 먼저 소개한 이제의 6세손으로 금산군수, 거창부사, 전주판관, 황주목사를 지냈다. 시판 말미 ‘을유 초추 육세손 금산군수 희평’이란 기록을 통해 이 작품이 1825년 초가을, 이희평이 자신의 6대조인 이제의 시에 차운한 시란 것을 알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옛날 아버님 부절 머물 때를 기억하네’라는 문장이다. 이희평[양부養父 이도영]의 생부生父 이태영은 1795년(정조 19)에서 1797년(정조 21)까지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인물로 대구 북구 칠성동 지명유래에 등장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지금도 대구지하철 대구역 광장에 놓여 있는 일곱 개 칠성바위에는 이희평을 포함한 당시 이태영 감사가 새긴 일곱 아들의 이름이 그대로 남아 있다.[이희조만 확인이 안 된다] 대구 북구 ‘칠성동행정복지센터’ 홈페이지에는 칠성바위 유래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칠성동의 유래는 선사시대 지석묘인 칠성바위에 연유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조선 정조 19년(1795년)에 경상감사 이태영에게는 아들 7형제가 있었는데, 어느 날 밤 꿈에 하늘에서 북두칠성이 광채를 내면서 밖에 떨어졌다. 비록 꿈이지만 기억이 너무나 생생해서 별이 떨어진 북문 밖으로 나가보니 어제까지 없었던 7개의 큰 바위가 북두 칠성모양으로 놓여 있는 것이었다. 이 감사는 필시 좋은 징조라 여기고 7개 바위에다 일곱 아들의 이름인 희갑羲甲, 희두羲斗, “희평羲平”, 희승羲升, 희준羲準, 희장羲章, 희조羲肇를 하나씩 새겼는데, 이상한 것은 일곱 아들이 차츰 성장하면서 얼굴이나 성품이 새긴 바위를 닮아 갔다. 그 뒤에 후손 이희두 역시 경상감사가 되어 선조의 기적을 영구히 전하기 위하여 칠성바위 주위에 나무를 심고 중앙에 정자를 세워 의북정依北亭이라 하였다. 그러나 의북정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퇴락해 헐려 버렸고 자식 없는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부귀다남을 비는 토속신앙의 대상이 되었음.
약산귀객藥山歸客 김횡金鑅
全陽故宅洛津頭 전양군 옛 집 낙강 나루에 있어
風物名園事事幽 풍물 이름난 정원 일마다 그윽하네
日末江湖晴入戶 해질녘 강호 맑은 기운 싸립문으로 들어오고
雨中花樹晩藏樓 빗속 꽃나무는 해질녘 누각에 감춰있네
昔年帶礪功何壯 예로부터 이어온 공훈 얼마나 컸길래
永世簪纓錄不休 영원토록 벼슬 기록 그치지 않네
吟罷高欄歸思遠 높은 난간에서 읊기를 마치니 돌아갈 생각 아득하고
明霞孤鶩半帆洲 밝은 노을 외로운 따오기, 돛배 모래톱과 짝을 이루네
丁未暮春 藥山歸客 정미년 늦봄 약산으로 돌아가는 나그네
김횡[1784-1847]은 의금부 도사, 안성군수, 홍주목사, 성주목사[1843-1847]를 지냈다. 하빈 인근 성주목사 재임 시 관내 고을 지명 중 누추하고, 괴이한 지명을 고친 바가 있다. 시판 말미 ‘정미모춘 약산귀객’을 통해 성주목사로 재임 중이었던 1847년 봄에 쓴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의 작가를 약산 김유연으로 보는 설도 있다. 하지만 시판 낙관에 ‘연안延安 김횡金鑅 경락景樂’ 여섯 글자가 있어 연안김씨 목사 김횡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경락은 김횡의 자字다. 참고로 약산 김유연은 김횡의 양자養子다.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
謹次霞鶩堂板上韻 삼가 하목당 시판 운韻에 차운次韻 함
漢坰諸作尙縱橫 한음 서경 등의 글이 종횡으로 빛나고
亭子依然見老成 정자는 의연히 노성함을 드러내네
天際山光呼欲近 하늘 끝 산은 부르면 가까워질 듯하고
江干野色望全平 강가 들판 바라보니 모두 평평하네
久携蠟履情殊倦 나막신 오래 신으니 마음이 피곤한데
乍得漁舟眼更明 고깃배 잠시 타니 눈이 다시 밝아지네
多謝水神如有意 수신에게 감사하는 마음 있으니
淸風一席晩來生 한 자락 맑은 바람 늦게서야 불어오네
이건창[1852-1898]은 강화 출신으로 가학인 양명학을 계승한 문신이자 학자다. 15세에 별시 문과에 급제해 홍문관, 동지사 서장관을 거쳐, 황해도관찰사, 충청우도암행어사, 안핵사를 지냈다. 서양과 일본의 침략을 강력하게 배격했으며, 구한말 김택영·황현과 더불어 3대 문장가로 불렸다.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
謹次霞鶩亭板上韻 삼가 하목정 시판 운韻에 차운次韻 함
入門一笑大江橫 문에 들어서 한 번 웃으니 큰 강 가로놓여
人事天功相促成 사람 일, 하늘 조화 서로 재촉해 이루었네
瓦溜細飜波浪去 기왓골 떨어지는 가는 물줄기 물결치듯 날아가고
雲帆斜幷榻床平 구름 돛 비스듬히 평상과 나란하네
欠伸坐臥天俱曠 기지개 켜고 앉고 누우니 하늘도 함께 환하고
耕牧浮沈眼共明 밭 갈고 소 치는 세상사 눈도 같이 밝아졌네
更指伽倻山色遠 다시 멀리 가야산 빛 가리키니
長烟破處數峰生 긴 안개 걷힌 곳에 봉우리 몇 개 나타나네
김택영[1850-1927]은 1891년(고종 28) 42세에 진사가 되고, 편사국 주사, 중추원 서기관 등을 지냈다. 을사조약 후 중국으로 망명해 중국에서 문학 활동을 했다. 구한말 이건창·황현과 더불어 우리나라 한문학사의 대미를 장식하는 3대 문장가로 불렸다.
하목당 주변 경치를 노래하다, 하목당 16경
뒤에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하빈 전의이씨를 세상에 널리 알린 인물 중에 전양군全陽君 이익필李益馝이란 인물이 있다. 그는 하목정 창건주인 낙포 이종문의 현손玄孫[4세손·고손]이다. 무과에 급제한 장수로 영조 때 무신란을 평정한 공으로 양무공신에 오르고 전양군에 봉군됐으며, 사후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양무陽武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는 만년에 벼슬을 내려놓고 고향 하목정으로 내려와 자연을 벗 삼으며 여생을 즐겼다. 그는 하목정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 16곳을 선정해 ‘하목당16경’이란 시를 지었다. 칠언절구七言絶句 16수로 이루어진 한시漢詩 ‘하목당16경’은 지금으로부터 약 300년 전 하목정 주변 풍광을 아름답게 잘 묘사한 수작이다. 이 시에 등장하는 하목정 주변 경승 16경은 지금도 거의 그대로 남아 있어, 시의 가치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다.
序서
雨細王維畵裏村 가랑비 내린 왕유의 그림 속 마을
要將十六景中論 장차 열여섯 풍경 논하려 하네
年來痼疾烟霞癖 나이 들수록 고질인 안개 노을 즐기는 버릇
觸境吟哦不惜言 경치 닿는 대로 읊느라 말을 아끼지 않았네
제1경 낙하고목落霞孤鶩 - 저녁 노을과 외로운 따오기
平看飛鶩樓前過 따오기 누각 앞을 나란히 날아가고
來去明霞水上多 노을 물든 강물 위 오고 감이 많네
當日騰王亭子裏 그 옛날 등왕각 안
較吾淸致問如何 나의 맑은 정취와 비교하면 어떠한고
제2경 청풍명월淸風明月 - 맑은 바람과 밝은 달
竹塢淸風醒醉眠 대나무 언덕 맑은 바람 잠을 깨우고
梅窓明月聳詩肩 매화 창 밝은 달 시인의 어깨를 솟구치게 하네
天公餉我無邊趣 하늘이 내게 끝없는 흥취 주시니
貯得奚囊不用錢 어찌 돈 쓰지 않고 주머니에 모아 두겠는가
제3경 원포귀범遠浦歸帆- 먼 물가 돌아오는 돛단배
閒來臨水弄朝暉 한가로이 물가 이르러 아침 햇살 즐기고
曳杖逍遙上翠微 지팡이 끌고 소요하며 푸르고 아늑한 곳 오르네
忽見危檣浦外出 홀연히 내다보니 높은 돛대 포구 밖에 나타나니
風前知有客帆歸 바람타고 나그네 돛배 돌아옴을 알겠네
제4경 장교목적長郊牧笛 - 긴 들 목동의 피리소리
長郊如海抱江庄 바다처럼 긴 들판 강가 별장 감싸고
碧草春濃處處芳 완연한 봄 푸른 풀 곳곳에 향기롭네
牧笛隨風來入耳 목동의 피리소리 바람 따라 귀에 들어오고
聲聲牛背趁斜陽 소 등에서 나는 소리 석양을 뒤 쫓네
제5경 가야청람伽倻晴嵐 - 가야산 맑은 아지랑이
根盤大地聳天南 뿌리는 대지에 두고 하늘 남쪽에 솟았으니
絶景伽倻世共談 가야산 절경 세상 모두 말하네
嵐捲晩岑明似畵 아지랑이 걷힌 해질녘 산봉우리 그림처럼 밝은데
崔仙去後更誰探 최신선(최치원) 떠난 뒤 다시 누가 찾으랴
제6경 금오취잠金鰲翠岑 - 금오산 푸른 봉우리
淑氣鐘人信不虛 맑은 기운 사람을 울림은 헛되지 않아
金鰲翠色古今如 금오산 푸른 빛 예나 지금이나 같네
閉門居士遺墟在 문 닫고 살던 선비 남긴 터가 있어
萬世淸風每起余 만세청풍 매양 나를 일으키네
제7경 비슬효운琵瑟曉雲 - 비슬산 새벽구름
初升紅旭曙光分 막 오르는 붉은 태양 새벽 빛 가르는데
琵瑟遙岑半沒雲 비슬산 먼 봉우리 구름에 반쯤 잠겼네
龍寺鐘聲如在耳 용연사 종소리 귀에 들리는 듯
幾時歸伴坐禪群 어느 때 돌아가 참선하는 무리와 짝을 할까
제8경 구봉석조九峰夕照 - 구봉산 저녁 빛
九峰山色碧參差 구봉산 빛 푸르고 울긋불긋
飛鳳騰蛟體勢奇 나는 봉황 오르는 이무기 생김도 기이하네
返照入江翻石壁 반사된 저녁노을 강에 들었다 석벽을 오르니
千秋神筆杜陵詩 그 옛날 신필 두릉의 시로다
제9경 십리명사十里明沙 - 십리 밝은 모래
眯眼白沙十里明 눈에 가물가물 흰 모래밭 십리에 밝아
望中霜雪一般平 바라보니 서리 눈처럼 평평하네
雖當昏夜還如晝 비록 어두운 밤이라도 도리어 낮같아
傳語嫦娥莫較爭 항아에게 말을 전해 비교도 다투지도 말게 할지니
제10경 일곡창파一曲滄波 - 한 굽이 푸른 물결
淸江一曲檻前回 맑은 강 한 굽이 난간 앞에서 돌고
無限滄波日夜來 한없는 물결 밤낮 흐르는구나
長有銀鱗當鏡躍 언제나 은빛 비늘 물 위에 뛰니
不妨持比子陵臺 자릉의 돈대에 비교해도 거슬리지 않네
제11경 동호채련東湖採蓮 - 동호의 연밥따기
蓮香襲襲滿東湖 훈훈한 연꽃 향기 동호에 가득한데
十隊紅粧醉共扶 붉게 단장한 연꽃 무리 서로 의지하며 취해있네
帶雨採時看更好 (연밥)거둘 때 비 오니 더 좋아 보이고
打翻翠盖碎明珠 푸른 잎 쳐서 날리니 맑은 구슬 부서지네
제12경 형암조어兄巖釣魚 - 형제바위 고기 낚기
巖名兄弟至今存 이름하여 형제암 지금도 있으니
節義馨香萬古尊 절의 향기 만고에 높다네
寄語世間垂釣客 세상에 낚시 드리운 객에게 부탁하니
莫敎閑踏動雲根 공연히 (바위) 밟아 구름뿌리 움직이게 하지 말라
제13경 풍림어화楓林漁火 - 단풍 숲 고기잡이 불빛
月落烏啼霜滿空 달 지고 까마귀 우니 허공엔 서리 가득
江村人定細生風 강 마을 조용한데 작은 바람 일어나네
夜深漁火在何處 깊은 밤 고기잡이 불빛 어디에 있는고
一點分明楓葉中 분명 한 점은 단풍잎에 있네
제14경 유주모연柳洲暮煙 - 버들 물가 저문 안개
聖世還甘作逸氓 좋은 세상 도리어 물러난 선비가 되니
長林一帶暮煙橫 긴 숲 일대 저문 안개 가득하네
傍人錯比陶潛宅 주위 사람 잘못알고 도연명 집에 견주니
萬柳門前浪得名 문 앞 만 그루 버드나무 헛된 이름만 얻었네
제15경 관진도객官津渡客 - 관가나루 건너는 나그네
俯臨官道此高亭 관도[국도] 높은 정자에 임해 굽어보니
來徃津船不少停 나룻배 잠시도 멈추지 않고 오가네
招招舟子人爭涉 사람은 다투어 물 건너려 뱃사공 부르고
過客催程日欲冥 지는 해는 나그네 재촉하네
제16경 소촌세우小村細雨 - 작은 마을 가랑비
江村細雨滿汀洲 강 마을 가랑비 물가 섬 적시고
滴瀝茅簷夕未休 초가 처마 떨어지는 빗방울 저녁에도 멈추지 않네
烟擁酒家尋不得 연기에 둘러싸인 술집 찾았으나 찾지 못하고
騷翁無事惹閑愁 시인은 일 없이 적막한 시름만 일으키네
에필로그
맹자 「진심장상上」에 ‘관수유술觀水有術 필관기란必觀其瀾’이란 말이 있다. 물을 바라볼 때는 그 물결치는 것을 보고 물의 근원을 깨달으라는 의미로, 세상사 모든 일은 지엽말단에서 거슬러 올라가 그 근원을 직시해야 한다는 뜻이다. 옛 선비들이 늘 물을 가까이하고 관조觀照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옛 선비들이 물에 비해 산을 낮게 본 건 아니다. 논어 「옹야」에 나오는 공자 말씀처럼 산은 산대로, 물은 물대로 그 나름의 본성이 있는 법이다. 옛 선비들은 참 현명했던 것 같다. 한 쪽에는 산, 한 쪽에는 물을 끼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구봉산 끝자락 낙동강가에 자리한 하목정도 마찬가지다.
자왈 “지자요수, 인자요산, 지자동, 인자정, 지자락, 인자수.”
子曰 “知者樂水, 仁者樂山, 知者動, 仁者靜, 知者樂, 仁者壽.”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며, 지혜로운 사람은 활동적이고 어진 사람은 평정하며, 지혜로운 사람은 인생을 즐길 줄 알고 어진 사람은 오래 산다.” 논어 「옹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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