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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만촌동(晩村洞), 책 읽는 선비가 많아 농사가 늦었다
개관
만촌동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지금의 만촌3동에 있었던 지장곡·각계동을 통합해 만든 동이다. 처음에는 달성군 수성면에 편입됐다가, 1938년 대구부에 편입됐다. 1980년 수성구가 신설되면서 동구에서 수성구가 됐고, 1992년 만촌1동·2동·3동으로 분동됐다. 대구부읍지(1899) 방리조(坊里條)에 “수북(守北)은 대구부 동쪽 10리에 있다. 소속된 동이 일곱이니 금정리(아양교 남쪽 효목1동), 만촌리(효목1동과 만촌1동 접경지), 각계리(만촌3동), 효목리(효목2동), 황청리(황금1동), 소지리(황금2동), 범어리(범어1동)다”는 기록이 보인다. 대구시사 ‘주거불량지역분포현황’(1984년 기준)에 만촌1동 자연부락에 주택 60동, 만촌2동 새마을촌에 영세민 78세대, 주택 50동으로 나타난다.70)
70) 대구시, 대구시사 4권, 1995, 86-87쪽.
삼덕네거리-수성교-범어네거리-남부정류장-고산으로 이어지는 옛 4호 방사선 도로 중 삼덕네거리-남부정류장 구간은 1970-80년대에 지금의 폭 50m 도로로 확장됐으며, 남부정류장-담티 고개 구간은 폭 35m로 확장됐다. 만촌네거리에서 황금동 방향에 있는 만촌육교는 1988년 준공됐다. 만촌네거리에 있었던 남부시외버스정류장은 1975년부터 2016년까지 영업했다. 운행노선은 경산·가창·청도·밀양·울산·언양 등이었다. 남부정류장 자리에는 현재 ‘만촌역태왕디아너스 아파트’가 있다. 참고로 지금의 만촌동과 1950-60년대 만촌동은 조금 다르게 이해해야 한다. 1950-60년대만 해도 만촌동이라고 하면 옛 청기와 주유소 뒷동네로 지금의 럭키골든맨션, 동원중학교 인근을 말한다.
주요 공공시설로는 대륜중고등학교, 동문고등학교, 영남공업고등학교, 오성중고등학교, 혜화여자고등학교, 동부중학교, 동원중학교, 소선여자중학교, 대구대청초등학교, 대구동문초등학교, 대구동원초등학교, 대구만촌초등학교, 대구중앙초등학교, 영남제일관, 만촌체육공원, 화랑공원 등이 있다. 주요 유적과 유물로는 청동기시대 유적을 비롯하여 삼국시대 고분군과 유물, 수령 600년 만촌동 모과나무 등이 있다. 문화유산으로 영영축성비, 대구부수성비, 독무재, 하효자 정려각, 모명재, 명정각, 영남제일관 등이 있다.
지명 유래
만촌동의 본래 이름은 '늦이·느지미' 또는 ‘각계’라 했다. 농사도 늦고, 사람도 늦고, 비 온 뒤 물 빠짐도 늦는 등 모든 것이 늦었다고 한다. '늦이'의 '늦'은 늦다(晩, 遲)는 뜻이며, 촌(村)은 '마을'이란 뜻이다. 주민들은 '늦이'를 한자로 ‘늦을 만’, ‘마을 촌’, 만촌 또는 ‘늦을 지(遲)’, ‘풀 싹 잉(芿)’, ‘지잉(遲芿)’으로 표기했다.
만촌동은 임진왜란 전후 옥천 전씨(沃川全氏)가 처음 터를 잡았다. 이후 1650년경 달성 하씨(達城夏氏), 달성 서씨(達城徐氏)가 터를 잡았다. 만촌동에 터를 잡은 세 성씨는 모두 대구 양반 가문으로 학문을 중시했다. 농사철이 되어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은 탓에 항상 이웃 마을보다 농사일이 늦었다고 한다. 그래서 농사일이 늦은 곳이라는 뜻에서 만촌동이란 동명을 얻었다고 한다. 또 일설에는 만촌동은 산세가 높지는 않지만 여기저기 언덕이 느즈러져 있는 형국이어서 ‘느지미’, ‘느짐’, ‘느지’라는 동명을 얻었다는 설도 있다. 지명조사철(1959)에는 만촌동에 대해 “옛날에 촌락으로서 늦게 생긴 부락이라 하여 ‘늦지미’라 불렀으나 변하여 ‘늦임’이라 불리다가 한자로 고친 것.”이라 기록되어 있다.
만촌1동에는 두루방산, 못안골, 무등산, 바리곧에골, 샘골, 쉬일목, 안집골, 만촌2동에는 개미마을, 교수촌·예술인촌·기자촌, 남작골, 두봉골, 모명재, 뱀골, 지장골, 형제봉, 만촌3동에는 각계골, 각계지, 사태지, 새마을, 담티, 향나무 우물 등이 있었다.
각계골(覺界谷·覺溪谷)·지계골(支界谷)
각계골은 만촌3동에 있었던 자연부락이다. 현 대구도시철도2호선 담티역에서 영남공고 입구에 이르는 골짜기다. 1980년대 초까지 이 골짜기는 경산과 대구의 경계였다. 경계라는 뜻에서 ‘지계동(支界洞)’으로 불리기도 했다. 각계골은 임진왜란 때 동래 정씨들이 피난 와서 터를 잡았는데, 도시개발 이전까지 동래 정씨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한자 표기는 각계골(覺界谷)인데 각계골 남쪽에 있었던 경주 최씨 재실 각계재에는 ‘각계(覺溪)’로 되어 있다.
현 금탑 아파트, 만촌3차 화성파크드림 아파트는 과거 이곳에 있었던 각계지를 메우고 건립한 것이다. 각계지는 ‘객지못·각지못·객기못·각기못’ 등으로도 불렸다. 1954년 항공사진에는 현 대청초등학교 일대에 20호 정도 되는 옛 각계 마을이 보이고, 현 산장맨션 남쪽 골짜기에 매립되어 사라진 작은 저수지 사태지(沙汰池)(두리지)가 보인다. 조선지지자료(1910년대초)에 각계동 일대 지명으로 지계동, 산명으로 덕가봉(德加峰), 시묘산(侍墓山), 답항산(畓項山·논이망재), 두봉산(斗峰山·드붕골) 등이 나타난다.
한편 각계골 제일 남쪽 만촌 삼정그린코아 아파트 101동 자리에 얼마 전까지 ‘각계재(覺溪齋)’ 또는 ‘동천서당(東川書堂)’이라 불린 재실이 있었다. 이 재실은 조선 후기 영남삼로(嶺南三老)로 칭송받았던 백불암(百弗巖) 최흥원(崔興遠) 선생의 묘소71) 수호 재실로 1820년(순조 20) 경주 최씨 문중에서 건립했다. 하지만 삼정그린코아 아파트 건립으로 2017년경 사라졌다. 지명조사철(1959)에는 각계에 대해 “각계라는 내가 있는데 내에 모난 곳이 있어 이 모난 곳을 각계라 불렀으며 이 내 윗쪽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을 각계라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71) 최흥원 선생 묘소는 1996년 2월 29일 동구 둔산동(옻골) 산 33번지로 이장했다.
각계지(覺界池·角溪池)·지계제(枝界堤)
각계지는 현 만촌3동 금탑 아파트, 만촌3차 화성파크드림 아파트 일대에 있었던 저수지로 당시 동명이었던 각계동에서 유래됐다. 1980년대 초 이 일대를 매립해 아파트를 지으면서 각계지는 사라지고 지금은 이름만 전한다. 대구부읍지(1899) 제언조(堤堰條)에 “지계제(각계지)는 수북에 있다. 둘레가 1,300척(394m)이고 수심이 5척이다”란 내용이 보인다. 1954년 항공사진을 보면 각계지가 만촌동 일대에서는 가장 큰 못으로 보인다. 각계지 물은 각계지에서 지금의 달구벌대로를 따라 범어네거리까지 동서로 길게 펼쳐진 논밭에 물을 공급한 것으로 보인다. 각계지 주변에는 민가가 보이지 않으며 북쪽 도로변(달구벌대로)에 민가 3-4호가 보인다. 지명조사철(1959)에는 각계지에 대해 “각계를 막아 못이 되었으므로 각계지라 불린다”고 기록되어 있다.
개미마을
개미마을은 만촌2동에 있었던 옛 지장골에 속한 마을이다. 현 만촌 태왕리더스 아파트 101동에서 무열로 건너 낙동생오리 식당을 지나 남동쪽 끝자락쯤 된다. 개미마을은 1970년대 새마을운동 때 전국적으로 동시에 출현한 새마을과는 달리 특정 사회단체 활동을 하는 이들에 의해 생긴 마을이다. 개미마을의 시작은 1968년 12월경이다. 카톨릭 노동청년회 김병수 씨와 장사익 씨가 넝마주이와 구두닦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그들의 복지를 위해 만촌동 산 358번지에 집을 짓고 산 것이 시작이다. 개미마을이란 이름은 1967년 설립된 자치생활집단인 ‘한국개미회’와 관련 있다. 부지런하고 근면한 개미의 습성을 본받자는 뜻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지금은 당시 구성원들은 마을을 다 떠나고 개미마을이란 이름만 남았다. 개미마을은 관 주도가 아니라 종교 관련 사회단체 주도로 생긴 특수한 형태의 마을이었다.72)
72) 김광순, 한국구비문학Ⅰ, 국학자료원, 2001, 187쪽.
1954년 항공사진에는 개미마을 자리에 공동묘지가 아닌 잘 관리되고 있는 문중 선영처럼 보이는 많은 묘가 자리 잡고 있다. 1969년 항공사진에는 지장골 북쪽 골짜기에 5-6호 규모의 작은 마을이 보이고, 남쪽 개미마을에는 민가와는 전혀 다른 형태를 하고 있는 건물이 2동 보인다. 1970년대 지도에는 길과 평행선을 그리며 한 줄로 죽 늘어서 잇는 직사각형 건물 8동이 확인된다.(‘지장골’ 사진 참조)
교수촌·예술인촌·기자촌
과거 만촌 2동에 있었던 마을이다. 만촌동은 나지막한 언덕이 많은 동네였다. 1960년대 이후 언덕 주변으로 새로운 마을들이 형성됐다. 교수촌·예술인촌·기자촌 등은 이때 형성된 마을이다. 이러한 마을 이름은 영리를 목적으로 한 주택업자가 특정 직업군의 사람들을 유치하고자 의도적으로 붙인 이름이었다. 처음에는 의도대로 특정 직업군 주민들이 일부 살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다양한 직업군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나중에는 보통 마을이 됐다. 하지만 초기인 1960년대만 해도 교수촌에는 교수들만 살았다는 이야기도 전한다.73) 교수촌·예술인촌·기자촌은 지금의 만촌태왕리더스 아파트 서쪽, 청구시장 남쪽 주택가 지역이다. 1980년대 지도에 청구시장 남쪽으로 구획정리가 잘 된 약 50채 건물이 보이고 ‘교수주택’이라 표기되어 있다. 당시 지금의 힐스테이트만촌역 아파트 북쪽 주택가에는 큰 가내수공업단지가 있었다.
73) 김광순, 한국구비문학Ⅰ, 국학자료원, 2001, 188쪽.
남작골·암자골·감자골
남작골은 만촌2동에 있었던 자연부락이다. 남작골은 현 담티 고개 북쪽 골짜기다. 옛날부터 암자가 있어 '암자골'로 불리다가 임진왜란 후 두사충 장군 묘를 쓰고 난 후부터 ‘남작골’로 불렀다고 한다. 이 골짜기에 암자가 있으며 한때는 많은 신도가 출입했는데 개발제한구역에 묶여 번창하지 못하고, 옛 암자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74) 위 ‘두사충 장군 묘를 쓰고···’라는 내용을 참고하면 남작골은 지금의 모명재가 있는 골짜기가 된다. 지금도 모명재 골짜기에는 죽림정사, 보림사 등이 있다. 하지만 ‘담티 고개 북쪽 골짜기’라는 기술을 참고하면 담티 고개-명복공원-동대사75)로 이어지는 서당골 입구로도 볼 수도 있다. 1954년 항공사진에는 담티 고개에서 명복공원 들어가는 초입에 4-5호 민가가 보인다. 반면 지금의 모명재가 자리한 골짜기에는 모명재와 정효각을 제외하고는 민가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1970-80년대 지도에 명복공원 들어가는 골짜기를 ‘감자골’로 표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남작골로 추정된다. 지도에 국립화장장으로 표기된 곳이 명복공원이며, 아래 탐지고개는 탐티고개를 말한다.
74) 대구시, 대구지명유래총람, 2009 제보자: 지산동, 김정동, 76세, 남, 채록일자 2009.1.12.
75) 옛 지도를 참고하면 동대사는 1998년 지도에는 천불사, 2005년 지도에는 우암사로 표기되어 있다.
담티 고개·담현(墻峴)·담터·탐지·담치·당테·당터
대륜 중·고등학교 교문 앞쪽에 있는 고개로 수성구 만촌동과 고산의 경계다. 담티 고개는 몇 가지 지명 유래설이 전한다. 본래 담티 고개는 황금동 두리봉에서 만촌동 형제봉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로 1980년대 초까지 대구와 경산의 경계였다. 지금의 담티 고개가 생긴 것은 일제강점기 때로 많은 인부를 동원해 산을 관통해 만들었다. 이때 산을 뚫은 것이 마치 담을 틔우듯 했다고 ‘담티’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전한다.
담티 고개에는 또 다른 유래설도 있다. 명나라 장수 두사충과 관련된 유래설이다. 두사충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원군으로 조선에 왔다가 임란 후 조선에 귀화해 대구에 살았다. 그는 풍수지리에 밝았는데 이순신 장군을 비롯한 당시 많은 사대부의 묘터와 집터를 잡아준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자신의 묘터로 수성구 성동 고산서당 터를 미리 점지해 두었다. 만년에 아들과 함께 자신의 묘터를 살피기 위해 세 번이나 길을 떠났다. 하지만 매번 담티 고개에 이르면 숨이 차고 가래가 끓어 결국 고개를 넘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 두사충이 ‘담티가 나 넘지 못한 고개’라는 뜻에서 담티 고개란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결국 두사충은 고산서당 자리가 아닌 담티 고개 직전인 지금의 모명재 뒷산 형제봉 자락에 묻혔다.
조선시대 문헌에는 담티 고개를 ‘장현(墻峴)’으로 기록하고 있다. 장현은 담장고개라는 뜻인데, 나중에 ‘담치’76)→‘탐지’→‘담티’가 됐다는 설도 있다. 1954년 항공사진에는 대륜 중·고등학교 자리는 야산을 낀 논밭이며, 대구 도심 방향에서 담티 고개로 올라가는 초입에 민가 4-5호가 보인다. 담티 고개 관련해 청도군지(1834)에 흥미로운 내용이 보인다. “新官到任時慶山仇火驛大馬一匹步從二名兵房色領率待候於慶山潭峴(신관 사또가 도임하면 경산 구화역의 대마(大馬) 1필과 보종 2명을 병방색이 거느리고 경산 담현에서 신관 사또를 기다린다)”는 기록이다. 지명조사철(1959)에는 담티고개에 대해 “옛날 성리당(城理堂)이 있었던 곳이므로 당제를 모셨다는데 일제 시 이를 헐어 버리고 대구와 경산을 통하는 도로를 만들어 지금은 흔적이 없어지고 당테고개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그 후 음이 변하여 당터고개라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76) 1970년대 지도에는 담티를 담치로 표기하고 있다.
독무재(獨茂齋)와 돈목재(敦睦齋), 그리고 달성 하씨
독무재(만촌동 188-1)는 조선 후기 대구 출신 유학자 열암(悅菴) 하시찬(夏時贊·1750-1828) 선생을 기리는 재실로 대구시문화유산자료다. 하시찬은 대구 만촌동에서 출생, 당대 석학 경호(鏡湖) 이의조(李宜朝)와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 선생 문하에서 공부했다. 저서로는 예서(禮書)인 팔예절요(八禮節要)와 문집 열암집이 있다. 독무재는 하시찬 사후 그의 제자들과 지역 사림에 의해 1800년대 중반에 건립됐다. 독무재는 본래 ‘독무암서(獨茂巖棲)’였다. 처음 위치는 현 독무재에서 서쪽으로 약 500m 떨어진 효목동 철로 변이었는데,77) 1968년 도로가 나면서 현 위치로 옮기고 독무재라 이름했다. 독무암서는 하시찬이 40세 되던 1789년(정조 13)에 건립한 강학소로, 당시만 해도 제자들의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현 독무재는 건물구성이 좀 특이하다. 하시찬의 생전 강학소였던 독무재(독무암서), 사당인 경덕사(景德祠), 판본을 소장했던 장서각 등을 모두 갖췄기 때문이다. 참고로 대구에서 서원을 제외하고는 독무재처럼 강학·제향·소장 공간을 모두 갖춘 재실은 찾아보기 힘들다. 만촌동 달성 하씨의 대표적인 문중 의례는 하시찬 선생을 기리는 경덕사 춘향제(春享祭)로 음력 3월 상정일(上丁日)에 독무재 혹은 돈목재에서 거행한다. 돈목재(敦睦齋)는 독무재 인근에 있는 또 다른 달성 하씨 문중 재실이다. 경덕사 향사는 지역 유림을 초청해 진행한다. 과거에는 150명이 넘는 유림이 참석했지만, 지금은 40명 정도 참석하고 있다. 독무재 관리와 향사 운영 등 문중 행사 및 재실 관리에 소요 되는 비용은 문중 자산으로 충당한다. 참고로 지금의 만촌동과 1950-60년대 만촌동은 조금 다르게 이해해야 한다. 1950-60년대까지만 해도 만촌동은 독무재가 자리한 지금의 동원중고등학교 인근을 중심으로 망우당공원 일대까지를 말한다.
77) 2차 비스타동원 아파트 인근. 1954년 항공사진에 구릉지 동쪽 사면과 경부선 철로 사이에 옛 독무암서가 보인다. 경내에 큰 나무도 한 그루 보인다.
두리봉
두리봉(212.8m)은 황금동과 만촌동 경계에 있는 산이다. 태초에 세상이 모두 물에 잠겼을 때 산 정상이 두루미 한 마리가 앉을 정도만 남았다고 두리봉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지명조사철(1959)에는 두리봉에 대해 “원형으로 둥근 봉이라 하여 두리봉으로 불린다.”고 기록되어 있다.
두봉골(斗峯谷)
두봉골은 만촌3동에 있었던 자연부락으로 현재 오성중고등학교와 수성대학교가 자리한 골짜기다. 두봉골 유래설은 두 가지가 전한다. 하나는 태초에 세상이 모두 물에 잠겼을 때, 두봉골 산 정상이 두루미 한 마리가 앉을 정도만 남아서 ‘두리봉’, 그 아래 골짜기를 ‘두봉골’이라 했다는 설이다. 다른 하나는 ‘두 개의 봉우리 사이에 있는 골짜기’에서 유래됐다는 설이다. 두봉골 뒷산 두리봉(212.8m)은 이 일대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두봉골은 두리봉 아래 음지 쪽에 있어 음지(陰地) 마을이라고도 한다. 조선지지자료(1910년대초)에 만촌동 산 중에 ‘두분산(斗墳山)·말무덤산’이 등재되어 있는데 두봉골 뒷산인 두리봉으로 추정된다. 1954년 항공사진에는 두봉골에 민가 10여 호가 모여 있는 마을이 보인다.
두한필(杜漢弼) 명정각(命旌閣)
두한필 명정각(만촌동 산 360-3)은 소남(小楠) 두한필(杜漢弼·1823-1893)의 효행을 기리는 효자 정려각으로 수성구 향토문화유산이다. 두한필은 임진왜란 때 조선에 귀화한 명나라 장수 두사충의 7세손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효행으로 이름이 났다. 병든 어머니를 위해 엄동설한임에도 산에서 송이버섯을 구해 어머니께 죽을 쑤어드리는 효행을 보였다. 그가 죽고 난 뒤 이런 사연이 세상에 알려져, 1909년 순종 황제로부터 효자 정려와 함께 정3품 통훈대부 규장각 직각 벼슬이 내려졌다. 명정각은 기와를 얹은 흙돌담에 둘러싸여 있다. 정면 1칸, 측면 1칸 홑처마 맞배지붕 양식으로 정면은 붉은 살대를 꽂은 홍살벽이고, 나머지 3면은 흙벽이다. 명정각 안에는 정려비와 정려 내력을 기록한 정려기를 포함 다섯 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만촌동 모과나무
만촌동 모과나무는 만촌동 2군사령부 영내에 있다. 본래 이 나무는 대구시 북구 팔달동 장태실이란 마을에 있었는데, 장태실 주민들이 2군사령부에 희사한 것이다. 나무 모양은 뿌리 부분에서 네 개 가지가 나 있으며, 지상 1.5m 정도에서 Y자형으로 줄기가 갈라져 있는데, 대형 분재처럼 수형이 아름답다. 수령 약 600년, 높이 7.7m, 둘레 3m이며,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모명재(慕明齋)와 두사충(杜師忠)
모명재(만촌동 715-1)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 귀화한 명나라 장수 모명 두사충을 기리는 재실로 수성구 향토문화유산이다. 그는 명나라 장수로 임진·정유 양란에 걸쳐 두 번이나 조선에 원군을 왔다. 난이 끝난 뒤 그는 자신의 나라 명나라로 돌아가지 않았다. 명나라가 오랑캐국인 청나라에 의해 유린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오랑캐의 신하가 되느니 중화의 맥을 잇는 조선인이 되겠다며 두 아들과 함께 조선에 귀화했다.
모명재는 1700년대 초에 건립되었다고 하는데 자세한 내력은 알 수 없다. 1913년 경산 객사를 해체한 재목을 사들여 다시 지었고, 1966년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췄다. 현재 모명재는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모명재 뜰 한쪽에는 ‘두사충 신도비’가 있고, 모명재 전면 기둥에는 이순신 장군이 두사충에게 보낸 시 ‘봉정두복야(奉呈杜僕射)’를 새긴 주련이 걸려 있다. 인근에 둘레길, 소공원, 두한필 명정각, 두사충 묘소, 전통문화체험관 등이 있다.
奉呈杜僕射(봉정두복야)
北居同甘苦(북거동감고) 북에서는 고락을 함께 했고,
東來共死生(동래공사생) 동으로 와서는 죽고 사는 것을 함께 했네
城南他夜月(성남타야월) 성 남쪽 타향의 밝은 달밤 아래
今日一盃情(금일일배정) 오늘 한잔 술로 정을 나누네
두사충은 명나라 장수로 조선에 귀화한 인물이자, 유명한 풍수지리가로 지금까지 이름이 나 있다. 하지만 그의 후손들은 두사충이 진정한 의미의 숭정처사(崇禎處士)78)라는 자부심을 지니고 있다. 조선에 귀화 후 두사충은 대구에 살면서 앞산 아래에 대명단(大明壇)을 쌓고 평생토록 매월 초하루와 보름이면 명나라가 있는 서쪽을 향해 예를 갖췄다. 이렇듯 두사충은 조선 땅에 살면서도 죽는 그날까지 명나라 신하를 자처했다. 이런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모명재 동쪽 방 전면 마루 위에 ‘숭정유루(崇禎遺樓)’ 편액이 걸려 있다. 이는 숭정처사의 유풍이 남아 있는 집이란 뜻이다. 참고로 수성구 ‘담티 고개’와 남구 ‘대명동’ 지명이 두사충에서 유래됐다는 설이 전한다.
78) 숭정처사는 명나라에 대한 대의명분을 지키고 청(淸)나라에 굴하지 않겠다는 뜻에서 속세를 등진 의사(義士)를 일컫는 말이다. ‘숭정’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崇禎帝)를 말한다.
못안골
못안골은 만촌1동에 있었던 자연부락이다. 1980년경까지 지금의 시립수성도서관, 화랑공원 일대에는 송곡지(松谷池)란 큰 못이 있었다. 이 못 안쪽에 작은 마을이 있어 못안골이란 이름을 얻었다. 과거 못안골에는 세 집이 있었다고 한다.79) 1954년 항공사진에는 송곡지 북쪽 현 동구 효목2동 일대에 70-80호 정도 되는 옛 효목동 큰 마을이 있으며, 송곡지 서쪽과 남쪽에 각각 민가 세 집이 보인다. 송곡지 북쪽 큰 마을을 기준으로 한다면 못안골은 저수지 서쪽 또는 남쪽 골짜기로, 세 집이 있었다는 구술자료와도 일치한다. 조선지지자료(1910년대초)에 등재된 ‘지내골(池內谷)·못안골’이 이곳으로 추정되며, 같은 자료에 등재된 ‘지내주막(池內酒幕), 못안 주막’ 역시 이곳에 있었던 주막으로 추정된다.(‘송곡지’ 사진 참조)
79) 대구시, 대구지명유래총람, 2009, 제보자: 만촌2동, 최성학, 76세, 남, 채록일자 2008.6.30.
무등산(舞嶝山·舞登山)
무등산은 만촌네거리에서 무열로 서쪽을 따라 북쪽으로 경부선 철로를 넘어 동구 효목동 진로 아파트까지 이어지는 낮고 긴 산줄기를 말한다. 지금의 만촌태왕리더스 아파트 서쪽 주택가 지역이 무등산 정상쯤에 해당한다. 무등산이란 이름은 명절 때 동네 여인들이 산에 올라 달을 벗 삼아 춤을 추었다 해서 얻었다고 한다.80) 1954년 항공사진에는 지금의 무열로와 만촌로 사이에 남북으로 길게 이어진 무등산이 뚜렷하게 보인다. 무열로는 1974년 제정된 도로명으로 ‘효목교-무열대-남부정류장’ 구간이다. 무열로란 명칭은 2군사령부 부대 명칭인 무열대(武烈臺)에서 유래됐다.
80) 김광순, 한국구비문학Ⅰ, 국학자료원, 2001, 183쪽.
바리곧에골
바리곧에골은 만촌1동에 있었던 자연부락이다. 도시개발 이전 현 대구시립수성도서관과 메트로팔레스 아파트(옛 국군통합병원) 사이에 있었던 골짜기다. 바리곧에골은 ‘바로 올라갈 수 있는 골짜기’란 뜻이다. 하지만 바리곧에골이 정확하게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1954년 항공사진을 참고하면 지금의 메트로팔레스 1·2단지 지역에 북서에서 남동으로 거의 일직선에 가깝게 뻗은 길과 그 길 남동쪽 끝에 민가 3호가 보인다. 이곳이 바리곧에골로 추정된다. 조선지지자료(1910년대초)에 등재된 ‘진골(眞谷)·바린골’이 바리곧에골이다.(‘송곡지’ 사진 참조)
뱀골
뱀골은 만촌2동에 있었던 자연부락으로 현재 2군사령부 영내에 있는 사동지 일대 골짜기를 말한다. 사동지는 2군사령부 정문 남동쪽에 있다. 뱀골이란 이름은 옛날 이 일대에 뱀이 많았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현재 2군사령부 안에 있는 사동지(蛇洞池·巳洞池) 역시 뱀골에서 유래된 이름이다.81) 1954년 항공사진에는 남쪽 형봉과 북쪽 제봉 사이에 사동지와 작은 들판, 민가 3-4호가 보이며, 무열로를 따라 남북으로 길쭉하게 펼쳐진 들도 보인다. 조선지지자료(1910년대초)에 ‘사동곡평(蛇洞谷坪)·뱀골들’과 사동제(蛇洞堤)란 못 이름이 등재되어 있다. 대구부읍지(1899) 제언조(堤堰條)에 “사동제는 수북에 있다. 둘레가 515척(156m)이고 수심이 7척이다”란 내용도 보인다.
81) 대구시, 대구지명유래총람, 2009, 제보자: 만촌2동, 최성학, 67세, 남, 채록일자 2008.6.30.
부활촌
6·25 한국전쟁 직후 대구 시내 난민들이 모여 형성한 마을로 동대구세무서 삼거리 우방 만촌하이츠 아파트 동쪽 언덕 일대에 있었다. 1954년 항공사진에는 언덕 서쪽에 쉬일목으로 이어지는 길(화랑로)만 보이고 민가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1979년 지도에는 부활촌이라 표기되어 있고 16동 정도의 건물이 확인된다. 지명조사철(1959)에는 부활촌에 대해 “4287년(1954) 9월 시내 건물 철거로 인해 난민이 집단으로 부락을 이루어 부활 재생한다는 뜻으로 부활촌이라고 부르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태지(沙汰池)·두리지
사태지(두리지)는 만촌3동에 있었던 못으로 현재 산장맨션 남쪽 일대다. 지금의 화성파크드림 3차 아파트(옛 서한 아파트)에서 영남공고에 이르는 골짜기를 각계골이라 하고, 각계골 남쪽에 사태지가 있었다. 사태지란 이름은 비만 오면 사태가 심해 붙은 이름이다. 사태지는 약 1,500평의 작은 저수지로 각계지 남쪽 농토에 대한 수리시설로 광복 후 축조됐다. 당시 수리계장 구달회(具達會) 씨와 수리계 총무 구자도(具滋道) 씨 부자(父子)의 주선 및 정부 시멘트 지원과 몽리자(蒙利者·못물 혜택을 보는 사람)들의 노력 동원으로 축조됐다. 지금은 매립되어 농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1954년 항공사진에는 각계지와 사태지 사이 현 대청초등학교 일대에 20호 정도 되는 각계 마을이 보인다.(‘각계골’ 사진 참조)
삼효자비각(三孝子碑閣)과 옥천 전씨
삼효자비각(만촌동 408-1)은 효목네거리 지하차도 만촌동 방향 진출입로 동쪽, 만촌1동 치안센터 옆에 있다. 조선 후기 이곳에 살았던 옥천 전씨 화정(花亭) 전창항(全昌恒·1687-1741), 만정(晩汀) 전창익(全昌益·1689-1756), 경묵재(敬黙齋) 전창정(全昌鼎·1700-1780) 3형제의 효행을 기리는 비각이다. 조선시대 만촌동에는 크게 세 성씨가 세거했다. 옥천 전씨가 가장 먼저 터를 잡았고, 이어 달성 하씨, 달성 서씨가 뒤를 이었다. 3효자 행적은 조선 후기 대구부읍지 등에 잘 나타나 있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3형제는 숙종·영조 때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효행이 있었고, 자라서는 경학과 예학에 밝았다. 어버이에게 질환이 있을 때는 3형제가 함께 하늘에 기도했고, 상분(嘗糞·변을 맛봄)과 단지주혈(斷指注血·손가락을 그어 피를 드림)을 하는 등 지극정성으로 병구완을 했다. 1자 전창항은 아버지 상 때 슬픔이 너무 지나쳐 3년 상을 마친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2자 전창익은 어려서 어머니를 잃었는데 나이가 들어 어머니 묘 아래에 풍수암(風樹菴)이란 여막을 짓고 다시 3년 여묘살이를 했으며, 계모 상 때도 3년 여묘를 했다. 또한 10세 때 사당에 불이 나자 죽음을 무릅쓰고 사당에 뛰어들어 조상 신주를 안고 나온 일도 있었다. 3자 전창정은 학문을 하는 두 형을 대신해 집안 살림과 가족을 돌봤고, 아버지 상 때는 여묘살이를 하는 두 형을 대신해 노모를 지극정성 돌봤다.
새마을
새마을은 만촌3동에 있었던 마을로 담티 고개 남쪽 현 만촌우방타운 2차 아파트 자리에 있었다. 새마을이 형성된 것은 1971년 봄으로 신천시장 철거 때 발생한 이주민 30세대가 정착하면서 형성됐다. 새마을이란 이름은 당시 정부 주도로 전국적으로 시행된 새마을운동에서 유래된 것으로 재건의 뜻을 담은 마을 이름이다. 당시 전국적으로 새마을이란 마을이 많았으며, 자연부락으로서는 비교적 늦게 형성됐다고 할 수 있다. 대구시사 ‘주거불량지역분포현황’에 만촌2동82) ‘새마을촌’이 보인다. 1984년 기준으로 새마을촌에는 영세민 78세대, 주택 50동이 확인된다.83) 새마을이 조성되기 전인 1954년 항공사진에는 이 지역에 민가 2호가 보인다.
82) 현재는 만촌3동이지만, 조사 당시에는 만촌2동이었다.
83) 대구시, 대구시사 4권, 1995, 86-87쪽.
샘골
샘골은 만촌1동에 있었던 자연부락이다. 지금의 2군사령부 정문 건너편에 있었는데 당시 샘골의 샘물로 온 동네 사람이 가뭄을 넘기고 기근을 면했다고 한다.84) 옛날 이곳에는 민가 4호가 있었는데 모두 전주 최씨였다고 한다. 1954년 항공사진에는 지금의 2군사령부 정문 건너 무열로 119안전센터 인근에 남북으로 난 길을 따라 민가 네 채가 보인다.(‘무등산’ 사진 참조)
84) 대구시, 대구지명유래총람, 2009, 제보자: 만촌 2동, 최성학, 76세, 남, 채록일자 2008.6.30.
송곡지(松谷池)
1980년경까지 지금의 대구시립수성도서관, 화랑공원 일대에 있었던 못이다. 1954년 항공사진을 보면 비슷한 시기에 매립됐던 범어못과 규모가 비슷한 큰 못이었다. 못 북쪽 지금의 동구 효목2동 일대에 70-80호 정도 되는 큰 마을인 옛 효목동이 보인다. 도시개발 이전인 1970년대까지만 해도 못 서쪽에는 모개나무골·한골(신천4동) 등이 있었고, 남서쪽에는 옛 국군통합병원·국군간호학교 등이 1948년부터 1996년경까지 있었다. 군 병원 등이 있었던 지역은 옛 바리곧에골로 현재 메트로팔레스 아파트가 있는 곳이다.
쉬일목
쉬일목은 만촌1동과 동구 신천4동 경계에 있었던 고개 이름이다. 효신네거리(옛 동부정류장)에서 옛 MBC 방송국 네거리 쪽으로 가다가 제일 먼저 만나는 고개다. 과거에는 이 고개에 돌무더기를 쌓아 만든 서낭당이 있었고 나무가 우거져 있었다고 한다. 쉬일목이란 이름은 고개를 넘던 사람들이 이곳 나무 아래에서 쉬어 갔다고 해서 얻은 이름이다. 쉬일목에는 이곳을 지나던 한 나그네와 동네 처녀의 애틋한 전설도 전한다.85) 1954년 항공사진에는 효신네거리와 옛 MBC 네거리 사이에 낮은 구릉이 보이고 그 사이로 고갯길이 보인다. 쉬일목 일대에는 민가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1980년대 지도에는 이 고갯길(화랑로)을 따라 서쪽에는 코오롱·한남·태양 아파트, 동문교회 등이, 동쪽에는 논 가운데 자리한 국군통합병원과 부활촌, 동대구주유소(현 LPG 충전소) 등이 보인다.
85) 김광순, 한국구비문학Ⅰ, 국학자료원, 2001, 186쪽.
안집골
안집골은 과거 만촌동에 있었던 자연부락이다. 골 안쪽에 집이 있어 안집골이란 이름을 얻었으며, 당시 집은 몇 채 없었다고 한다.86) 안집골이 지금의 어디쯤을 말하는지는 알 수 없다.
86) 대구시, 대구지명유래총람, 2009, 제보자: 만촌2동, 최성학, 76세, 남, 채록일자 2008.6.30.)
영남제일관(嶺南第一關)
영남제일관(만촌동 산90)은 조선시대 대구읍성의 남쪽 성문이다. 대구읍성은 경상도 관찰사 겸 대구 부사 민응수가 1736년(영조 12) 축성한 석성(石城)이다. 1906년 대구읍성과 함께 해체됐다가, 1980년 수성구 만촌동 현 위치에 중건됐다. 중건된 영남제일관은 본래의 것보다 규모가 커졌고, 문루 건축양식도 약간 변화가 있다. 영남제일관 앞쪽에 대구읍성 축성 및 보수 관련한 내력을 돌에 새긴 영영축성비, 대구부수성비 2기가 세워져 있다.
영영축성비(嶺營築城碑)·대구부수성비(大邱府修城碑)
영영축성비(만촌동 산90)는 경상감영의 성(대구읍성)을 축성하고 건립 경위를 기록한 비석이다. 재질은 오석이며 높이 260cm, 너비 90cm, 두께 44cm다. 대구읍성은 경상도 관찰사 겸 대구 부사 민응수가 1736년(영조 12) 축성한 석성(石城)으로 성 둘레 약 2.5km, 높이 약 8m, 공사기간은 5개월이 걸렸다. 대구부수성비는 경상도 관찰사 겸 대구 부사 김세호가 1870년(고종 7) 대구읍성을 보수하고 그 사실을 돌에 새긴 비석이다. 영남제일관문 앞에 세워져 있는 두 비석은 모두 대구시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두 비석은 본래 대구읍성 남문 앞에 있었는데, 1906년 대구읍성이 헐린 후 옛 달성군청(옛 대구백화점)과 대구향교를 거쳐 1980년 현 위치로 옮겨졌다.
지장골(智章谷·地藏谷)·지장지
지장골은 만촌2동에 있었던 자연부락이다. 현 만촌태왕리더스 아파트(옛 AID아파트)에서 동쪽 무열로 너머 골짜기 일대다. 지장골 유래는 두 가지가 전한다. 하나는 지장골(智章谷)로 과거 AID 아파트 자리에 있었던 지장지(智章池)와 지장서당(智章書堂)에서 유래됐다는 설이다. 다른 설은 지장골(地藏谷)로 과거 지금의 2군사령부 남쪽 운동장 인근에 있었던 지장보살을 모신 절에서 유래됐다는 설이다. 당시 지장골에는 능성 구씨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87)
1954년 항공사진에는 지금의 만촌 태왕리더스 아파트와 무열로 일대에 걸쳐 있는 지장지가 보인다. 민가는 지장지 남쪽에 1호, 동쪽에 3호가 보이고, 지장골 안에 5-6호가 보인다. 1969년 항공사진에는 지장골 북쪽 골짜기에 5-6호 규모의 작은 마을이 보이고, 남쪽 개미마을에는 민가와는 전혀 다른 형태를 하고 있는 건물이 2동 보인다. 1970년대 지도에는 개미마을 쪽으로 길과 평행선을 그리며 한 줄로 죽 늘어서 잇는 직사각형 건물 8동이 확인된다. 대구부읍지(1899) 제언조(堤堰條)에 “지장동제(地藏洞堤)는 수북(守北)에 있다 둘레가 1,070척(324m)이고 수심이 3척이다.”고 기술되어 있으며, 조선지지자료(1910년대초) 만촌동 조에도 지장제(地藏堤)가 등재되어 있다.
87) 김광순, 한국구비문학Ⅰ, 국학자료원, 2001, p185.
하효자 정려각(夏孝子旌閭閣)
하효자 정려각(만촌동 389-9)은 고려 이부시랑(행안부장관격) 하광신(夏光臣)의 효행을 기리는 정려각으로 대구시문화유산자료다. 독무재에서 서쪽으로 약 150m 거리에 있다. 하효자 정려각은 ‘실물’이 아닌 ‘기록’ 상으로만 보면 대구·경북에서 가장 오래된 ‘효자 정려’ 중 하나다. 하광신에게 정려가 내려진 것은 고려 충숙왕 14년(1327)의 일이다. 익히 잘 알려진 영천 ‘포은선생 효자비’, 안동 ‘상촌 김자수 효자비’ 등도 고려시대 것이기는 하나 하효자 정려 보다는 시기적으로 늦다. 본래 이 정려각은 과거 달성 하씨 종중산인 대구시 남구 수도산 인근에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 이후 1781년(정조 5) 만촌동 형제봉 인근으로 옮겨 중건했다가, 일제강점기 때 다시 현 위치로 옮긴 것이다. 하광신의 효행에 관한 대표 일화는 다음과 같다.
하광신은 어려서부터 효행이 지극했다. 추운 겨울 어느 날 중병으로 몇 해를 병상에 누워 있던 노모가 복숭아를 먹고 싶어 했다. 하지만 엄동설한이라 복숭아를 구할 방도가 없었다. 어느 날 밤 호랑이 한 마리가 그의 앞에 나타나 등에 타라는 시늉을 했다. 그는 영문도 모른 채 호랑이 등에 올라탔다. 한참을 달리던 호랑이는 어느 외딴 오두막집 앞에 그를 내려놓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때마침 그 집에 제사가 들었는데 제사상 위에 복숭아가 놓여 있었다. 하광신은 그 집 주인으로부터 복숭아 한 개를 얻어와 노모에게 드릴 수 있었다.
한골·대곡동(大谷洞)·한골못·대곡지
옛 MBC 네거리 부근에 있었던 마을이다. 마을에 한골못이 있었는데 매립되어 MBC 네거리가 조성됐다. 지명조사철(1959)에는 한골에 대해 “옛날 한(大)이라 하면 큰 것을 의미하는데 큰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다 하여 한골이라 불렀다 하며 그 후 한자로 대곡동(大谷洞)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향나무 우물
만촌3동에 있었던 향나무 우물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향나무 우물은 임진왜란 때 부산 동래에서 피난 온 동래 정씨 일가가 이곳에 자리를 잡으면서 판 우물로 알려져 있다. 물맛이 좋고 양도 풍부해 500년 가까이 마을 공동우물로 활용됐다. 우물가에 수령 500년 된 향나무 한 그루가 서 있어 향나무 우물이라 불렀다. 이 향나무는 하나의 뿌리에 가지가 크게 둘로 나눠 있었다. 한쪽 가지는 열매를 맺고 다른 쪽 가지는 열매를 맺지 않았다.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가 열매 맺는 가지를 얼싸안고 있는 형상이라 사람들은 이 나무를 가리켜 암수 한 쌍의 향나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향나무 우물도 1981년 상수도 공사 준공으로 없어지고 지금은 향나무만 동래 정씨 가문의 내력과 우물가의 온갖 사연들을 간직한 채 묵묵히 자리만 지키고 있다.88)
하지만 지금은 향나무도 사라지고 없다. 향나무 우물 위치는 지금의 만촌3동 성당(만촌동 886-8) 부근이다. 지금의 성당은 본래 이 자리에 있었던 주택은행 사택 건물을 성당으로 리모델링한 것이다. 아마도 사택 건물을 지을 때 향나무가 사라진 것 같다.
88) 대구직할시 교육위원회, 우리고장대구, 1988, 355쪽.
형제봉(兄弟峰)89)
형제봉(193m)은 2군사령부 영내 남쪽에 있는 산이다. 형제봉은 두리봉-모봉-형봉-제봉으로 이어져 있는데 이중 두리봉(212.8m) 다음으로 제일 높은 봉우리를 형제봉 혹은 형봉이라 부른다. 모봉·형봉·제봉은 인근에 있는 고모령과 관련해 여러 전설이 전한다. 전설에는 봉우리 이름처럼 엄마·오빠·여동생이 주로 등장한다. 가장 대표적인 전설이 ‘힘센 오누이 산 쌓기’ 전설이다. 오빠와 여동생이 산 쌓기 내기를 했다. 저고리 앞섶으로 흙을 나른 오빠보다 치마폭으로 흙을 나른 여동생이 더 빨리 산을 쌓았다. 화가 난 오빠는 큰 바위를 들어 동생이 쌓던 산 정상을 눌러버렸다. 이 때문에 지금도 형봉 정상은 뾰족하고 제봉은 평평하다고 한다. 이를 지켜보던 엄마는 속이 상해 집을 나갔다. 어느 산 정상에 이른 엄마는 오누이가 화해했는지 궁금해 뒤를 돌아보았다. 그 봉우리를 모봉(母峯), 인근 고개를 엄마가 뒤를 돌아보았다는 뜻에서 ‘되돌아볼 고’, ‘어미 모’, ‘고개 령’, 고모령(顧母嶺)이라 한다는 전설이다. 형제봉 남쪽 모명재가 자리한 마을을 ‘형제봉골’ 또는 ‘양지마을’이라 불렀다.
한편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과거 형제봉은 기우제 제단으로도 영험했다고 한다. 수성구청에서 발간한 대구광역시 수성구의 무형문화유산(2021)에 의하면 형제봉 동쪽 팔현 마을, 고모 마을 주민들은 비교적 최근까지도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제단은 형봉과 제봉 사이에 위치한 범굴이라는 커다란 바위 아래 샘이었다. 기우제 과정에서 봉우리에 암장(暗葬·남몰래 쓴 묘)된 묘가 발견되면 주민들이 다 함께 파묘(破墓)했다고 한다. 1954년 항공사진에는 지금의 2군사령부 영내에 해당하는 형봉과 제봉 사이는 대부분 구릉지로 이어져 있고 간간이 논밭만 보일 뿐 민가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89) 고모동, ‘모봉(母峰), 형봉(兄峰), 제봉(弟峰)’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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