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윤정(許允禎) 시인을 안지도 꽤 오래 전부터다. … 허윤정 시인은 <빛이 고이는 잔>을 비롯하여 <무상의 강> <어느 하늘 빈자리> <자잘한 풀꽃, 그 문전에> 등 4권의 시집을 냈다. 그 시집 속의 시들 중 서정적 풍경의 묘사들이 좋다. 그는 참 격조 높은 시를 쓰는 진실한 시인이다. 허 시인은 어떤 때는 노오란 황금색 장미꽃을 사와 나의 서재 유리병에 꽂아 놓고 가기도 하고, 가끔은 풀꽃 같은 화분을 사다 놓고 간다. 마음이 고향같이 따뜻하고 고운 시인이다.”
수필가 금아(琴兒) 피천득 선생이 붙인 발문 중 일부다. 금아 피천득 선생과 더불어 초정(草丁) 김상옥 선생, 파하(巴下) 이원섭 선생의 문하생으로 총애를 듬뿍 받은 허윤정(본명 허정희·69) 시인. 그는 1974년 사임당기념 주부백일장에서 시 부분 장원을 차지하며 문단에 나왔다. 이어 1975년 <여성중앙> 백만원고료 문예공모전에서 입상했고, 1977년 <현대문학>에 초회 추천된 후 1980년에 추천 완료되어 문단에 입성했다.
허윤정 시인은 1997년까지 발간한 4권의 시집 외에 2001년 <크낙새의 비밀>, 2006년 <별의 나라>로 꾸준한 집필활동을 보이고 있다. 그는 제1회 백자예술상을 수상했고, 시문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한국여성문학인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초정 김상옥 선생의 제자로서 그의 시 정신을 잇는 동인지 <맥(脈)>에서 편집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수필가 금아(琴兒) 피천득 선생이 붙인 발문 중 일부다. 금아 피천득 선생과 더불어 초정(草丁) 김상옥 선생, 파하(巴下) 이원섭 선생의 문하생으로 총애를 듬뿍 받은 허윤정(본명 허정희·69) 시인. 그는 1974년 사임당기념 주부백일장에서 시 부분 장원을 차지하며 문단에 나왔다. 이어 1975년 <여성중앙> 백만원고료 문예공모전에서 입상했고, 1977년 <현대문학>에 초회 추천된 후 1980년에 추천 완료되어 문단에 입성했다.
허윤정 시인은 1997년까지 발간한 4권의 시집 외에 2001년 <크낙새의 비밀>, 2006년 <별의 나라>로 꾸준한 집필활동을 보이고 있다. 그는 제1회 백자예술상을 수상했고, 시문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한국여성문학인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초정 김상옥 선생의 제자로서 그의 시 정신을 잇는 동인지 <맥(脈)>에서 편집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뉴스한국
초정 김상옥 시인과 맺은 영원한 관천지교
허윤정 시인은 금아 피천득 선생 외에 초정 김상옥 시인과 맺은 인연이 남다르다. 1987년 당시 초정 김상옥 선생은 그와 맺은 인연에 대해 말하기를 “허윤정 여사는 지금을 거슬러 30년 전 명문 경남여고 시절 문예반에서 시를 공부하던 학생이었다. 나는 그때 그 학교의 교사로 허 여사와 사제의 인연을 맺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이들의 인연은 매우 돈독하다.1939년 경남 산청에서 태어난 허윤정 시인은 그 지방 한학자인 관천 선생의 손녀다. 그가 자란 곳은 ‘두류산 양단수(지리산의 별칭)’가 흐르는 산청 기슭으로 조선시대 퇴계 이황과 학문의 경지를 겨루던 성리학자 남명 조식 선생의 유적지가 있는 곳이다. 때문에 “두류산 양단수를 녜 듣고 이제 보니 도화 뜬 맑은 물에 산영조차 잠겼에라. 아희야 무릉이 어디오, 나난 옌가 하노라”란 남명 선생의 시조로 일찍이 명성을 얻은 곳이다.
그곳에서 남명 선생의 학문을 받든 허윤정 시인의 조부 관천 선생은 ‘만폭탄’이라는 시를 지어 돌에 새겼다. “평생에 많고 작은 한이 쌓이고 쌓여 / 그 많은 일 끝이 없건만 / 53세에 이르러 얻은 것은 / 방장산(지리산의 별칭) 아래 흐르는 만폭탄뿐이다.” 1987년 우연히 산청을 찾은 김상옥 시인은 이와 같은 시비에 매료되어 즉석에서 시를 지어 관천 선생 시비에 바쳤다. “뭐든지 가는 것은 / 다 흐르는 물과 같다 / 관천대 옛터에 올라 / 가신 이를 생각느니 / 내 또한 / 여기 서 있어도 / 쉬임없이 가는 것을.”
그리고 이를 계기로 여학교 제자인 허윤정 시인을 자신의 문하생으로 삼고 손수 ‘수혜(水兮)’라는 호를 지어 주었다. 그것은 조부의 호인 관천(觀川)을 따라 ‘두류산 양단수 그 물(水)을 이으라’는 뜻이 십분 담겨 있는 이름이다. 그리고 <관천도교(觀川道橋)>라는 서책에 친필로 사제의 인연을 맺었다고 기록하며 허 시인에게 선물로 주었다.
“이러한 선물을 받은 사람은 나밖에 없습니다. 평소 청렴한 학자며 시조시인인 초정 선생님은 공명심이 없어 살아생전 따르는 사람을 많이 두지 않았죠. 현재 동인지 <맥>에서 활동하는 노중석 선생과 내가 그분의 몇 안 되는 제자입니다. 그런데 높으신 초정 선생님의 이름을 빛내지 못해 죄송할 따름입니다”고 겸손하게 말한다.
허윤정 시인은 매번 시집을 낼 때마다 시화서(詩畵書)에 능한 초정 선생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특히 그의 둘째 시집인 <무상의 강>은 초정 선생이 표지그림과 제호를 직접 써줄 정도다. 때문에 문단 지우들은 허윤정 시인을 부러워하며 한결같이 ‘행복한 시인’이라고 부른다. 문단의 전설이며 당대 최고의 거목인 금아 피천득 선생과 초정 김상옥 시조시인, 그리고 한학의 대가인 파하 이원섭 선생의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 초정 김상옥 선생이 직접 찍어 현상한 허윤정 시인의 젊을 적 모습.
스승의 세심한 배려가 녹아 있다. ⓒ허윤정
허윤정 시인은 어릴 적부터 두류산 양단수 물가에서 자란 덕에 시상이 풍부하고 서정적이다. 그는 일찍이 두류산 자락에서 자라난 풀꽃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고, 자갈밭에 내리 쬐는 햇살에 눈 비비며, 산모롱이를 돌아나는 꽃상여에 눈물의 흔적을 보았다고 회상한다. 또한 한학자인 조부 밑에서 성장하며 인간의 기본적 도리를 배운 반면, 허드렛일을 돕던 시야처녀의 등에 업혀 한(恨) 많은 인생의 허무함을 깨달았다고 토로한다.
일찍 여윈 아버지 대신 홀로 자녀를 키우느라 수고를 아끼지 않는 어머니를 위해 기쁨을 드리려 시작한 글쓰기가 오늘의 자신을 있게 했다고 회고한다. 그는 <여성문학>에 어머니에 얽힌 추억과 유년의 기억을 제일 많이 발표했다. 그중 ‘영혼의 모음’이라는 수필은 아직껏 못다한 어버이 사랑에 감사하는 글귀로 가득 채워져 있다. 나이가 든 지금에도 허 시인의 영원한 노래는 ‘사모곡’이다.
이원섭 선생은 일찍이 “허윤정 시인은 제 가슴에 울려오는 감흥에만 의존하는 시인인 듯 보인다. … 일상생활 속에서 때로 솟구쳐 오르는 마음의 물기둥이 일상성의 타성에서 벗어나 순수한 정서로 승화될 때 그것이 바로 시적 진실이다. 그러므로 외부의 어떤 힘도 그것을 만들어서, 우리에게 세금 매시듯 부과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내가 허윤정을 평가하는 것도, 흔들림 없이 자기 마음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여 온 데 있다”고 말한다.
그런 허 시인은 “별의 나라는 멀리 있는 줄 알았다 / 아득하고 / 더 아득한 그 곳에 / 별의 나라는 멀리 있는 줄 알았다 / 어느 날 / 시간의 뚜껑을 열고 들여다보니 / 연기로 그을린 때 묻고 낮은 천장 / 그 속엔 정다운 사람이 모인 시골집 안방 / 그믐날 저녁이었다 / 진실은 그곳에 진을 치고 / 푸근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 설음식 준비하는 고향집 안방 / 거기가 바로 아득한 별의 나라였다”란 시로써 스승의 애정에 화답한다.
- 1995년 인촌문학상을 수상한 금아 피천득 선생(두번째)이 조선호텔 로비에서 초정 김상옥 선생(첫번째), 파하 이원섭 선생(세번째), 수혜 허윤정 선생과 함께 기쁨을 나눴다. ⓒ허윤정
지식적이고 상식적인 문학보다는 자유롭고 감성적인 순수문학을 좋아하는 허윤정 시인. 또한 침해 받거나 간섭 당하는 것을 싫어하는 그는 드러나는 봉사보다 ‘숨은 돕기’를 더 좋아한다. 때문에 그가 가진 삶의 보람은 좋은 스승을 모시고 봉양하며 살아온 데 있다. 그것을 시인으로서 누리는 최대 긍지라고 여긴다.
그는 가깝게 내왕하는 이원섭 선생의 은혜를 떠올리며 가난한 삶 속에 제자를 아끼는 스승의 가없는 사랑을 추억한다. “하루는 파하 선생님이 부르셔서 인사차 들렀더니 사모님이 노구를 이끌고 직접 장만한 음식으로 저녁식사를 대접해 주시데요. 가난한 삶이라 그리 귀한 음식은 아니지만 마음에서 우러나는 정감 어린 손길로 조물조물 양념한 음식이 감동적이었어요. 산해진미를 맛보는 것보다 더한 ‘진수성찬’이었죠. 미천하고 보잘것없는 제자를 위해 그토록 몸을 사리지 않고 맞아주시니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어려운 스승을 받들며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하는 그는 마음을 닦으며 인간 존재감을 키워야 한다고 덧붙인다. 나이 많은 문인의 어려움을 보살피고 돌보는 것이 쉽지 않으나 여력이 되는 한 그분들의 문학적 성과를 잘 조망하고 받드는 것이 후학의 할 일이라 말한다.
이어 닐스 보아와 김춘수를 통해 ‘존재는 존재하지 않으나 자기가 형상을 만듦에 있다’는 사실을 피력한다. 허 시인은 인간의 삶 역시 어둠 이전의 절대 정신을 회복하며 살아가려 노력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그는 또한 의식의 장난과 놀이에서 벗어나 자기의 세계를 개척하는 것이 중요하므로 공경과 봉사, 도리를 잘 하며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고 힘 주어 말한다.
“무의 세계, ‘정말의 세상’에서 가졌던 영성을 회복해 이곳에서 역시 ‘때’ 묻지 않은 삶을 살길 바랍니다. 맑은 영성으로 공부하며 ‘아는 것을 비워내는 진짜 공부’를 통해 진실된 사람으로 나누며 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허윤정 시인은 진실한 삶과 더불어 인위적이지 않고, 주도적이지 않고, 조련되지 않은 시를 쓰는 사람이 되기를 희망한다. 또한 원형에 가까운 ‘순수한 영성’을 가지고 자기의 창의력을 발휘하며 자기 삶 살기를 바랄 뿐이라고 한다.
아무것도 아닌 현실세계에서 그는 나직이 ‘쪽박을 깨버리고’와 ‘앎에 대하여’란 시를 낭송하며 “달그림자가 뜨락을 쓴다”고 여운을 남긴다. 앞으로 그의 더 큰 바람이 있다면 삶의 진실과 내면의 깊이를 문학의 소재로 삼아 후세에 남을 ‘좋은 시’를 쓰고 싶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