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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을 열어보시고 느낌도 좋고 뭐든 알려주시면 학회 홈피에 올리는데 도움이 되겠습니다,. 민기식 드림
<보고서의 내력과 아쉬움>
100-1 언제부터라고 정확히 말할 수는 없으나 꽤 오래 전부터 나는 현존 교육학에 대한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이 불만은 학자가 의욕을 가지고 자기 학문에 정진하다가 보면 통상 갖게 되는 그런 종류의 연속성을 전제한 것이 아니라는데 남다른 심각함이 있었다. 나로서는 현존의 교육학이 敎育學이라고 할만한 근거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탐구대상의 모호성에서 비롯하는 온갖 혼미와 자가당착은 그것이 하나의 개별학문으로서 더 이상 용납될 수 없는 것으로 느껴졌다.
解說해설 100-1 <보고서의 내력과 아쉬움>이란 이 글은 청간 선생님께서 <재개념화> 탈고 이후 그간의 사정을 적은 것이다. 현존의 교육학을 전공하다 급기야 청간 선생님의 생명과도 같았던 전공(교육심리학)을 부정할 수밖에 없는 사정은 <중1> “1.1.1. 문제사태에 대한 깨달음의 계기”에 잘 드러나 있다. 1980년 초에 우연히 참가하게 된 두 개의 연구 프로젝트를 통해서 현존의 교육학의 정체성에 근본적인 회의와 현존의 교육학이 교육의 우군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자각하신 것이다.
학자적 삶을 지향하는 청간 선생님은 의문을 멈추지 않고 문제의 근원을 추궁하기 시작하였고 <비본질성>과 <정체혼미>로 교육학의 활로를 개척하신다.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정직하게 밝히고 고쳐나가는 것이 학문의 正道정도라고 밝히신 것이다. 문제를 자각한 때가 그의 나의 40대 초반이었으니 학자로서 웅혼한 叡智예지를 펼치신 것이다. 현존의 교육학은 간판만 교육학이지 알맹이는 교육학이 아니다! 교육학의 내용은 교육이라는 특이한 삶의 현상을 추궁해야 담을 수 있을텐데, 도대체 교육이란 무엇인가?
100-2 기존 교육학의 자율성을 부인하는 것과 그것에 대한 대안을 내놓는 일은 전혀 다른 종류의 과제다. 교육학은 그 대상의 자율성과 그 고유의 논리를 새롭게 찾아내야 한다. 이 문제는 내가 교육학자라고 자처하는 한 어쩔 수 없이 풀어야 할 숙제로 다가왔다. 사실 이 문제는 나에게 매일 매일의 긴장된 생활을 요구했다. 이전에 내가 배웠던 학문체제(교육심리학)는 이 문제를 푸는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착상의 형성을 교란하는 향수어린 유혹에 불과했다. 나는 그 동안 내가 가르치고 배웠던 정연한 知識들과 인연을 끊고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교육학을 찾는 여행을 나섰다.
解說 100-2 현존 교육학을 비판하는 것과 새로운 교육학의 모습을 제시하는 것은 어느 정도의 차이일까? 청간 선생님은 완전한 단절을 선언하시고 기약 없는 터널 공사에 돌입하신 것이다. 대강의 시기가 80년대 초이며, 사활을 건 투쟁은 1986년 <비본질성> 이후일 것이다. 한빛의 줄기를 발견할 때까지 冥府명부의 두려움과 고독과 싸우며 인내하신 것이다.
선생님은 본래 과학적 실증주의 방법론으로 단련되어 교육심리학을 전공하시다가 한국에서 교수 생활하시면서 삐아제 연구를 통해 구조주의 방법론을 접하셨다고 한다. 새로운 학문의 정립이 방법론과 관계된다고 생각하시고 유럽의 현상학과 구조주의적 방법으로 전체 현상이 수면위로 부상할 때까지 교육과 교육 아닌 것의 경계 설정을 통하여 끊임없이 교육 현상이 아닌 용어를 배제하는 작업을 감행하셨다고 한다. 현존의 교육학이 교육현상이 명확하게 파악되지 않는 혼돈의 도가니라면 선생님께서는 무분별하게 혼용된 쓰레기 더미 위에서 교육을 가장한 교육 아닌 현상과 용어를 배제하는 색출(?) 작업을 지속 하셨다. 평소 교육과 관계된 떠오르는 생각을 카드에 적고 계속 반추하다 방학이 되어 그동안 쌓인 카드를 전부 펼쳐놓고 전체 구조와 현상을 떠올리며 교육 아닌 용어가 적힌 카드를 제거했을 때 엄청난 쾌감을 느꼈다고 한다. “카드 배제 방법”은 헝클어진 머리 속을 정리하여 그동안 쓸데없이 붙들었던 쓰레기를 버리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선생님 체험으로는 버리면 머리 속에 새로운 아이디어 샘솟았다고 한다. 막연한 두려움과 고독만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교육학을 찾는 여행”으로 비유하지 않았을까?
100-3 이 과정에서 가르치는 내용은 완벽해야만 된다는 생각을 극복해야만 했다. 학생들보다 더 열심히 교육학의 문제에 몰두하고 그 내용을 그들에게 가르치는 불확실하고 당돌한 생활이 계속되었다. 서가에 정돈된 지식을 외면하고 강의시간 몇 분 전에야 정리된 야성적인 생각을 가지고 강의실에 허둥대고 들어서는 자신을 보고 나는 몇 번이고 큰 병이 들었다고 생각했다. 내 학문생활 가운데 진실로 내가 여기서 원형으로 삼고자 하는 교육을 체험했다면 바로 이 때가 아니었던가 싶다.
解說 100-3 교육본위론에서는 기존의 배움과 가르침, 학습과 교수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상구와 하화는 청간 선생님의 체험에 입각한 특별한 용어다. 교재도 없이 미리 제시할 구체적인 아이디어도 없이 암흑 속에서 대학생, 대학원생들과 맞닥들인 것이다. “너희들은 교육학이 있는 줄 알지만, 실은 없다.” 이 한마디를 먼저 던지고 강의를 진행하는 청간 선생님을 떠올려보라. 학문의 최전선에서 가장 치열한 공방전이 이루어지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이루어지는 상구와 하화야말로 선생님께서 선사한 원형으로서의 교육적 체험 아닐까? 오로지 먼저 상구하는 선생님과 상구하고자 불나방 같이 덤벼드는 학생들 속에서 1991년 어느 날 느닷없이 교육본위론의 설계도가 펼쳐진 것이다. 상구와 하화의 힘찬 가속에 힘입어 크게 깨닫는 경우가 생길 때 “교육의 불꽃놀이”로 이름 짓는다. <논어> 술이편에 공자 스스로 자신의 삶의 자세를 자부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청간 선생님과 비유될 만하다고 생각한다(論語 第07卷 述而, 葉公問孔子於子路,子路不對。子曰:「女奚不曰:其為人也,發憤忘食,樂以忘憂,不知老之將至云爾。」 섭공이 공자의 사람됨에 관하여 자로에게 물었다. 근데 자로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 일에 대해 공자는 나중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었다: “자로야! 너는 왜 말하지 않았느냐? 우리 선생님의 사람됨은, 분발하면 먹는 것도 잊고, 즐거움을 느끼면 세상 근심을 다 잊어버린다오. 그러기에 늙음이 다가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라오.”). 선생님의 본 보고서는 교육의 불꽃놀이를 경험하시고 엄청난 자신감과 희열 속에서 내딛는 첫걸음이다.
100-4 본 연구는 그 동안 생각했던 것들을 정리해 보겠다는 의도에서 시작되었다. 연구라는 것이 속성상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것이지만 이 연구의 경우는 그것이 심했다. 자료가 수집되면서 개념이 뒤집어지고 개념화가 되면 다른 자료를 수집해야 하는 순환이 계속되었다. 어떤 안정성 있는 체제에 도달할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했다. 점차 보고할 내용은 방대해지고 다른 한편으로 연구물에 대한 보고서 작성을 독촉 받는 二重苦이중고에 시달려야 했다. 이 두 고통에서 해방되는 방안이 연구내용의 일부를 먼저 발표하는 것이었다.
解說 100-4 그동안 갈구하던 이상으로 엄청난 아이디어가 용솟음칠 때 그것을 어떻게 수습하겠는가? 기존의 언어와는 다른 아이디어들이 터져 나올 때 기존의 지식체계는 뒤집어질 수밖에 없다. 머리 속이 완전히 새롭게 세팅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안정된 지식 체계가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려야하는데도 어쩔 수 없이 글을 써야하는 상황이라면 외적을 무찌르고 개선 장군으로 돌아오자마자 휴식 없이 또다시 전쟁터로 나가야하는 입장일까? 누군가에게 글을 써서 자신의 입장을 이해시키고자 한다면 하화의 한 측면일텐데, 아이디어는 계속 밀어닥치는 상구와 결속되어 있으니 二重苦이중고라고 하셨나보다. 우린 선생님의 이중고 덕분에 福音복음을 얻었으니 세상 은 끊임없이 反轉반전하나보다.
100-5 애초의 계획에 따르면 이 연구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부분은 현존 교육학의 형성과정을 지금의 불만스러운 상태와 관련시켜 깊이 있게 분석한다. 학교연구와 교육학, 그리고 교직과목과 교육학을 구분하고 교육학은 새롭게 출범해야 함을 밝힌다. 둘째 부분은 새로운 교육학을 정초해나가는 개념의 틀을 제시한다. 교육학의 진로를 밝혀 줄 어떤 다른 학문도 없다. 교육학은 기존 학문이 미치지 못하는 고유한 탐구영역을 확보하고 거기에 정착해야 한다. 그 고유한 영역은 낯선 곳이며 따라서 새로운 개념체제가 요망된다. 셋째 부분은 교육학의 제반 하위 탐구영역을 서로가 문제 풀이에 협조할 수 있는 방향으로 분할시킨다. 시작이 늦은 만큼 교육학의 전도도 멀다. 둘째 부분은 확정된 것이 아니라 셋째 부분을 찾아내기 위한 잠정적인 이해구조로 봐야 한다. 전이해구조의 어떤 부분이 아직 불확실한가, 어떤 특수한 문제제기가 여기서 제기될 수 있는가, 서로 다른 문제영역이지만 이들이 어떻게 교육학 전체의 퍼즐을 해명하는 데 공조할 수 있는가 따위를 밝힌다.
解說 100-5 본 보고서는 선생님께서 구상한 세 부분 중 두 번째에 해당한다. <학문과 교육> 시리즈와 관련지으면 첫째 부분은 <중1>“제 1장 교육학의 근본문제”가 해당하고, 셋째 부분은 <중3>에 해당한다. 선생님께선 우선 현존교육학의 대안이 무엇인가를 늘 압박 받으셨기에 급한대로 새로운 교육학인 교육본위론의 토대와 뼈대를 보이신 것이다. 교육연구의 새 지평과 교육의 맥락과 양상이 어떻게 짜여지느냐에 따라 교육본위론 전체의 퍼즐이 달라질 수 있기에 본 보고서의 아이디어는 매우 소중한 것이다. <학문과 교육> 전체 5권, 4000페이지의 위용은 본 보고서에서 출발한다. 본 보고서는 교육본위론의 濫觴남상이다. 남상과 大海대해는 연결되어 있다.
100-6 본 보고서는 이 세 가지 부분 가운데 두 번째 부분만을 먼저 제시한 것이다. 필자가 굳이 보고서의 내력을 밝히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어떤 독자는 첫 번째 부분을 생략하고 이 글의 내용에 접하기 때문에 왜 이런 엉뚱한 생각이 나오게 되었는지를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다른 독자는 셋째 부분을 생략했기 때문에 여기에 제시된 생각이 그대로 하나의 신념체제로 확정된 것인 양 오해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지적한 사정 때문에 이 보고서는 애초에 계획했던 많은 부분을 생략하는 아쉬움을 남긴채 인쇄되었다. 그러나 나머지 부분의 자료는 이미 수집된 것이기 때문에 가까운 시일 내에 발표될 것이다. 이 때는 보고서보다는 저서의 형식을 취할 것이다.
解說 100-6 본 보고서 이후의 선생님의 저술 과정은 1997년 <학문과 교육(상)> 이하 <상>으로 모아지고, 다음으로 교육학의 10가지 하위영역 중 하나인 "교육적 인식론“을 2000년 <학문과 교육(하)> 이하 <하>로 결집하신다. 본 보고서에서 아쉽게 생각하신 첫째와 셋째 부분은 나중에 2005년~2010년에 쓰셨다. 교육본위론은 단순한 교육학이 아니다. 인문학의 모든 성과를 토대로 인문학의 한계와 위기를 뚫고 피어났기에 향후 인문학을 리드할 수 있는 선진의 학문이다. 그렇기에 교육학으로 바로 진입하지 않고 <상>, <하>로 둘러갔던 것이다.
<상>의 주제는 “학문이란 무엇인가?”이다. 현존의 교육학이 학문으로 존립할 근거가 있는가를 파헤치고 학문다운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는 어떤 모색을 해야할지 궁구하고 있다. 하지만 학문 공동체인 대학의 입장에서 볼 때 학문계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광범위하게 제시하고 질서지우기에 교육학으로 한정지을 수 없는 운명을 안고 있다.
<하>의 주제는 “교육적 인식론”이다. 이 역시 교육본위론 입장에서 보자면 10가지 탐구영역 중 하나에 불과하나, 지리멸렬해진 철학계에 활기를 불어 넣어 돌파구를 제시하고 있다. 19세기 말부터 확고한 앎을 추구한 정초주의가 붕괴되기 시작하면서 20세기 세계대전과 더불어 급속히 진행된 철학의 해체 이후 한숨이 나올 정도로 허무주의에 빠진 철학계에 교육본위론이 재생의 손길로 “교육적 인식론”을 제시하고 있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그 해결의 과정이 바로 “교육 그 자체”에 있다는 이 간단한 사실을 <하>에서 어려운 언어로 제시한다.
100-7 본 보고서는 형식상 99개의 독립된 項目항목의 생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들은 한 가지 신념체제를 여러 가지 다른 측면에서 논술한 것이며 어느 項目항목 하나라도 다른 項目항목의 지원이 없이는 그 의미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어떤 특정한 기성의 학문적 개념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 만약 불가피하게 그런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의미는 본 보고서의 맥락 속에서 재해석되어야 한다. 하필이면 99 項目항목으로 만든 것에는 필자의 소망이 담겨 있다. 숫자로 “9”는 동양에서 吉兆길조의 의미가 있다고 한다. 길조를 바랄 이유가 있다. 그것은 이 項目항목들이 금과옥조가 되기를 바래서가 아니라 교육학 발전의 발판이 되었으면 하는 한 가닥의 기원 때문이다.
解說 100-7 왜 99개 항목인가? 청간 선생님은 본인의 학문을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교육의 조건으로 제시한 것이다. 보고서의 아이디어가 후진들에게 스며들어 교육본위론의 대체를 세우고, 완성도를 높이고자 高遠고원한 뜻을 피력하신 것이다. 내가 본 보고서를 해설하고자 하는 뜻은 바로 청간 선생님의 이 뜻 때문이다.
나는 아직 교육본위론에 어두운 상황이다. 99개 항목이 어떻게 유기적으로 조직되어 있는지 모른다. 솔직히 제대로 읽지도 않았다. 오늘 제대로 읽고 싶다는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으니 교육본위론의 전모를 깨닫는 길이 펼쳐진 것이다. 학회 회원님들께 진정 바라는 것은 내가 제 길을 가도록 조언을 달라는 것이다. 때로는 채찍이어도 좋다. 이 여행길에 어찌 좋은 길만 고집하겠는가? 절경일수록 험한 바위와 가파른 낭떠러지가 곁을 벗어나지 않는다.
앞으로 청간 선생님을 “청간”으로 호칭하겠다. 책과 저자를 나의 선입견으로 대하는 적정한 해석학적 거리를 두고 싶기 때문이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데, 더군다나 회원님들의 지도 편달이 있기에 앞으로 거침없이 내달리고자 한다. 청간 선생님! 당신이 보았던 “교육의 불꽃놀이”를 회원들과 함께 보고 싶습니다. 이제 거대한 암반을 뚫고 솟은 생생한 물줄기를 타고 깊이 더 깊이 탐색해야 한다.
아래 제시한 글은 한자를 모두 노출시켰다. 의미를 더 분명히 하고자 하며, 혹시나 관심있는 일본인들을 위한 배려다. 청간 선생님께서는 교육본위론의 서구로의 번역을 일본인에 의해 이루어지리라 예상하신다. 수도계가 발달한 일본인의 역사 문화적 토대와 한자문명권의 유대감과 번역을 중시하는일본 학계의 분위기를 간파하신 것이다.
<報告書의 來歷과 아쉬움>
100-1 언제부터라고 正確히 말할 수는 없으나 꽤 오래 전부터 나는 現存 敎育學에 대한 不滿을 가지게 되었다. 이 不滿은 學者가 意欲을 가지고 自己 學問에 精進하다가 보면 通常 갖게 되는 그런 種類의 連續性을 前提한 것이 아니라는데 남다른 深刻함이 있었다. 나로서는 現存의 敎育學이 敎育學이라고 할만한 根據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探究對象의 模糊性에서 비롯하는 온갖 昏迷와 自家撞着은 그것이 하나의 個別學問으로서 더 以上 容納될 수 없는 것으로 느껴졌다.
100-2 旣存 敎育學의 自律性을 否認하는 것과 그것에 대한 代案을 내놓는 일은 전혀 다른 種類의 課題다. 敎育學은 그 對象의 自律性과 그 固有의 論理를 새롭게 찾아내야 한다. 이 問題는 내가 敎育學者라고 自處하는 한 어쩔 수 없이 풀어야 할 宿題로 다가왔다. 事實 이 問題는 나에게 每日 每日의 緊張된 生活을 要求했다. 以前에 내가 배웠던 學問體制(敎育心理學)는 이 問題를 푸는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着想의 形成을 攪亂하는 鄕愁어린 誘惑에 不過했다. 나는 그 동안 내가 가르치고 배웠던 整然한 知識들과 因緣을 끊고 내가 생각할 수 있는 敎育學을 찾는 旅行을 나섰다.
100-3 이 過程에서 가르치는 內容은 完璧해야만 된다는 생각을 克服해야만 했다. 學生들보다 더 熱心히 敎育學의 問題에 沒頭하고 그 內容을 그들에게 가르치는 不確實하고 唐突한 生活이 繼續되었다. 書架에 整頓된 知識을 外面하고 講義時間 몇 分 前에야 整理된 野性的인 생각을 가지고 講義室에 허둥대고 들어서는 自身을 보고 나는 몇 번이고 큰 病이 들었다고 생각했다. 내 學問生活 가운데 眞實로 내가 여기서 原形으로 삼고자 하는 敎育을 體驗했다면 바로 이 때가 아니었던가 싶다.
100-4 본 硏究는 그 동안 생각했던 것들을 整理해 보겠다는 意圖에서 始作되었다. 硏究라는 것이 屬性上 그 結果를 豫測할 수 없는 것이지만 이 硏究의 境遇는 그것이 심했다. 資料가 蒐集되면서 槪念이 뒤집어지고 槪念化가 되면 다른 資料를 蒐集해야 하는 循環이 繼續되었다. 어떤 安定性 있는 體制에 到達할 때까지 기다리는 忍耐가 必要했다. 漸次 報告할 內容은 尨大해지고 다른 한편으로 硏究物에 대한 報告書 作成을 督促 받는 二重苦에 시달려야 했다. 이 두 苦痛에서 解放되는 方案이 硏究內容의 一部를 먼저 發表하는 것이었다.
100-5 애초의 計劃에 따르면 이 硏究는 세 部分으로 構成되어 있다. 첫째 部分은 現存 敎育學의 形成過程을 只今의 不滿스러운 狀態와 關聯시켜 깊이 있게 分析한다. 學校硏究와 敎育學, 그리고 敎職科目과 敎育學을 구분하고 敎育學은 새롭게 出帆해야 함을 밝힌다. 둘째 部分은 새로운 敎育學을 定礎해나가는 槪念의 틀을 提示한다. 敎育學의 進路를 밝혀 줄 어떤 다른 學問도 없다. 敎育學은 旣存 學問이 미치지 못하는 固有한 探究領域을 確保하고 거기에 定着해야 한다. 그 固有한 領域은 낯선 곳이며 따라서 새로운 槪念體制가 要望된다. 셋째 部分은 敎育學의 諸般 下位 探究領域을 서로가 問題 풀이에 協調할 수 있는 方向으로 分割시킨다. 始作이 늦은 만큼 敎育學의 傳道도 멀다. 둘째 部分은 確定된 것이 아니라 셋째 部分을 찾아내기 위한 暫定的인 理解構造로 봐야 한다. 前理解構造의 어떤 部分이 아직 不確實한가, 어떤 特殊한 問題提起가 여기서 提起될 수 있는가, 서로 다른 問題領域이지만 이들이 어떻게 敎育學 全體의 퍼즐을 解明하는 데 共助할 수 있는가 따위를 밝힌다.
100-6 本 報告書는 이 네 가지 部分 가운데 두 번째 部分만을 먼저 提示한 것이다. 筆者가 굳이 報告書의 來歷을 밝히는 理由는 바로 여기에 있다. 어떤 讀者는 첫 번째 部分을 省略하고 이 글의 內容에 接하기 때문에 왜 이런 엉뚱한 생각이 나오게 되었는지를 理解하기 어려울 것이다. 다른 讀者는 셋째 部分을 省略했기 때문에 여기에 提示된 생각이 그대로 하나의 信念體制로 確定된 것인 양 誤解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앞서 指摘한 事情 때문에 이 報告書는 애초에 計劃했던 많은 部分을 省略하는 아쉬움을 남긴채 印刷되었다. 그러나 나머지 部分의 資料는 이미 蒐集된 것이기 때문에 가까운 時日 內에 發表될 것이다. 이 때는 報告書보다는 著書의 形式을 取할 것이다.
100-7 本 報告書는 形式上 99個의 獨立된 項目의 생각으로 構成되어 있다. 그러나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들은 한 가지 信念體制를 여러 가지 다른 側面에서 論述한 것이며 어느 項目 하나라도 다른 項目의 支援이 없이는 그 意味를 把握하기가 어렵다. 어떤 特定한 旣成의 學問的 槪念도 여기에 包含되어 있지 않으며 萬若 不可避하게 그런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意味는 本 報告書의 脈絡 속에서 再解釋되어야 한다. 何必이면 99 項目으로 만든 것에는 筆者의 所望이 담겨 있다. 숫자로 “9”는 東洋에서 吉兆의 意味가 있다고 한다. 吉兆를 바랄 理由가 있다. 그것은 이 項目들이 金科玉條가 되기를 바래서가 아니라 敎育學 發展의 발판이 되었으면 하는 한 가닥의 祈願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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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해설 100-3 학문의 최전선에서 가장 치열한 공방전이 이루어지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이루어지는 상구와 하화야말로 선생님께서 선사한 원형으로서의 교육적 체험 아닐까? 문장이 이상하넹
해설 100-4 세상 은 끊임없이 세상은 붙여라~
解說 100-7 왜 99개 항목인가? 좀 강조해보자. 왜 하필 99개
헤설 100-7 중시하는일본 띄어쓰기 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