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개의 문화
중국에서 발굴되고 있는 토기들을 보면 앙소문화 이전에 또 다른 문화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앙소문화의 가장 큰 특징은 채도문화인데 그 이전에 이미 만주와 한반도에서 주로 발견되고 있는 환저형 토기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 환저형 토기를 가지고 들어온 사람들은 바로 한국과 같이 바이칼 호수를 건너온 고아시아족의한 지류였다고 볼 수 있다.
중국역사박물관은 그 입구에서부터 섬서성 강채(姜寨) 모계씨 족 촌락의 모형을 전시함으로서 중국역사의 주역이 모계 사회로 시작된 하화족임을 강조하고 있었다. 촌락의 모습은 보통 촌락들과 마찬가지로 큰 나무를 중심으로 마을을 구성하고 그 나무 밑에서 사람들이 모여 마을 일을 의논하게 되어 있는 것으로 별로 특이할 것이 없는데도 중국은 그 마을을 모계 씨족 촌락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다만 이 마을에서 나온 생활도구들이 대개 중동지역과 같은 소맥, 대맥문화와 공통되는 것이어서 이들의 생활 습관 역시 메소포타미아쪽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중국의 앙소(仰韶)문화인데 하화족은 항하 상류의 척박한 황토 지역에서 유브라데강 상류의 하란 지역처럼 흙집을 짓거나 동굴을 이용해서 살고 있었다. 그러나 산동성의 곡부를 중심으로 하는 광야지대에서는 동이족의 가부장적인 신정(神政)문화가 전개되고 있었다. 중국 학계는 앙소문화가 용산문화보다 시대적으로 약간 앞선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중국의 대표적인 신석기문화는 앙소문화와 용산문화입니다. 시기적으로는 앙소문화가 먼저이고 용산문화가 그 다음인데 나중에 그 용산문화가 하(夏)로 계승되었지요."
그러나 중국에서 발굴되고 있는 토기를 보면 앙소문화 이전에 또 다른 문화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앙소문화의 가장 큰 특징은 붉은 색 토기의 상단에 검은 태를 두른 채도문화인데 그 이전에 이미 만주와 한반도에서 주로 발견되고 있는 환저형 토기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중국 동부에 이 환저형 토기를 가지고 들어온 사람들은 바로 한국과 같이 바이칼 호수를 건너온 고아시아족의한 지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바로 곡의 두 계승자 중 하나인 지(摯) 즉 소호(小昊)족의 문화였을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를 다시 보자.
"제 곡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지가 제위를 계승하였다. 그러나 지가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음으로 동생인 방훈이 대신 제위를 계승했으니 그가 보로 요(堯)이다.『사기』오재본기
이는 바로 환저형 회도문화의 주인공이었던 소호시대이 문화가 채도 문화를 주도했던 요(堯)의 문화로 넘어가는 상황을 보여주는 설화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요(堯)이 시대로 대표되는 이 앙소문화는 다시 동이족의 문화 즉 용산문화로 넘어가게 된다. 중국의 역사는 이것을 요(堯)가 동이족 출신인 순(舜)에게 그 자리를 넘겨 주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요는 아들 단주가 불초해서 천하를 이어받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에 권력을 순에게 넘겨주기로 했다."『사기』오재본기
사마천은 이 순(舜)을 기주 사람이라고 하여 산서성 출신인 것처럼 써놓았다. 그러나 맹자는 순이 동이족 출신인 것을 밝히고 있다.
"순은 제빙(諸憑)에서 태어나 부하(負夏)에서 살았고 명조(鳴條)에서 죽었으니 동이 사람이다."『맹자』
이 '부하' 바로 오늘날 산동서의 곡부를 말하는 것이다. 순이 비록 동이족 사람이었으나 그가 치수(治水)와 정사에 능하여 인망이 놓았음으로 요가 그에게 자리를 물려 준 것이었다.
"요는 순에게 깊은 산림과 하천, 연못에 관한 일들을 맡겨 보았지만 폭풍과 뇌우 속에서도 한 번도 일을 그르치지 않았다."『사기』오재본기
이는 순이 동이 사람이었음으로 동이인의 모든 기술을 본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동방의 군장을 만나 역법을 바로 잡고 하루의 시작을 바르게 정하고 음률과 도량법을 통일하고 오례(五禮)를 정하였다."『사기』오재본기
이렇게 제위가 요에서 순에게로 옮겨간 것은 바로 채도 중심의 앙소문화가 다시 동이족의 용산문화로 옮겨간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순은 그에게 제위를 물려준 요의 전례에 따라 역시 자신처럼 치수에 능했던 우(禹)에게 그 자리를 물려 주었다.
"순 임금은 하늘에서 우를 천거하여 계승자로 삼았다."『사기』하본기
우는 동이족 사람이 아니고 사천 사람이었다.
"우는 석뉴에서 났으니 식뉴는 지금의 사천이다."『제왕서기』
요는 동이족이 순에게 자리를 물려 주었고 순은 하화족의 우에게 대권을 넘겨 주었는데 우는 요와 순의 전례를 따르지 않고 자신의 아들인 계(啓)에게 물려주었기 때문에 이 때부터 전자제가 시작되었고 이를 하화라 불렀음으로 사가들에 의해 서방은 하화족으로 불리우게 되었던 것이다.
중국 역사박물관의 유웨이챠오 관장이 언급한대로 하(夏)는 용산문화를 그대로 계승했으나 하(夏)의 14번째 지도자가 되었던 걸의 실정 때문에 동이족의 탕(湯)이 이를 제거하고 신정국가(神政國家)인 은(殷)을 세웠다. 은은 용산문화를 계승하여 7백 년간을 유지했으나 하화족의 창(昌)에게 정권을 빼앗기고 주(周)의 시대가 된 것이다.
"문왕은 기주에서 나고 필영에서 죽었으니 서이(西夷) 사람이다.『맹자』
창 즉 주의 문왕은 은의 정권을 찬탈한 것이 천명이라 하여 동이족의 천명 사상을 계승한 것처럼 했으나 이 때로부터 조상신을 섬기는 종묘(宗廟)와 지방신을 섬기는 사직(社稷)이 시작되었고 867년 간 존속되었던 주가 멸망하자 춘추 전국의 대혼란 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중국의 역사는 동이족과 하화족이 번갈아 가면 대권을 주고 받았으나 진(秦)의 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한 후 동이족의 유생들을 학살하는 등 대박해를 시작했고 이를 계승한 한(漢)은 공자의 학문을 복원한다면서 그 저작의 대부분을 변조함으로서 동이족의 사상과 문화는 하와족의 대권에 굴복하게 되었고 이로서 하화족은 중국의 역사를 주도하는 세력으로 그 위치를 확고히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중국의 고대사를 주도해 온 두 세력의 실상을 알아보기 위하여 우리 탐사대는 요(堯)의 치세가 시작된 임분(臨汾)과 동이족이 중심지였던 곡부(曲阜)를 찾기로 하고 우선 변화하는 중국의 잠재력을 키우고 있는 '북경대학'을 찾았다.
"고대 중국 사람들은 하늘을 섬기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중국 사회학원 고고학연구소의 쑨주추(孫租初) 박사는 용산문화연구소의 특징을 이렇게 말하면서 용산문화권에서 발견된 복골(卜骨)을 예로 들었다.
"주로 하늘의 뜻을 판단하기 위하여 이 복골이 사용되었습니다. 불로 구멍을 뚫어서 나타나는 선으로 하늘의 뜻을 판단하는 것이지요."
"메소포타미아 뿐만 아니라 만리장성 동북쪽 흑룡강성 지역과도 관계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혹시 문화의 이동 같은 것도 있었다고 볼 수 있겠군요?"
"그럴 가능성이 있지요. 농업이 발달하기 이전에는 사람들의 이동이 많았으니까요."
우리는 또 중국 신석기 시대의 토기에 이미 나타나고 있는 卍 문양을 발견했다. 그것은 우리가 이스탄불박물관에서 보았던 것이었는데 쑨주추 박사도 그 卍 문양이 본래 서아시아에서 온 것임을 시인했다.
"이것은… 중국의 신석기 시대부터 특히 서부의 동북부 등에서 많이 나타나는데 서아시아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이스탄불과 앙카라박물관에 있던 아나톨리아 유물들과 유사했고 새 모양의 토기도 역시 터키의 것과 같은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은 나라 때의 궁형기(弓形器)에는 수메르 문자로 하늘 또는 하늘의 신을 상징하는 미(米)자 모양이 뚜렷이 박혀 있었다. 쑨주추 박사는 이것도 서아시아에서 온 문양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