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중 상호 방위협정은 1949년 3월 18일 소련의 중재 아래 이루어졌다. 협정의 주요 내용은 중공군 소속 한인부대 약 2만-2만 5천 명을 북한에 출병시키기로 했다는 점과 북·중 공동방위 약속은 타국이 북한을 공격해 왔을 때 중국이 개입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김일성은, 북한이 남한을 공격하면 중국군이 참전하겠다는 점을 사전에 미리 약속을 받아 놓았던 것이다. 이 대목 역시 북한이 사전에 6·25를 철저하게 준비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방위협정대로 마침내 중공군이 전쟁에 개입하기 시작하였다.
10월 24일, 제 15연대장 조재미 대령이 중공군 포로 1명을 잡았는데, 직접 심문한 결과 중국 남부에 주둔하던 부대가 한반도에 진입했으며, 산중에 이미 수만 명의 중공군이 들어와 숨어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1950년 10월부터 북한 지역에 잠입하기 시작한 중공군은 제 4야전군 제 13병단 예하 6개 군으로서 그 병력은 18만 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11월의 2차 공세 때에는 산동반도에서 만주로 이동한 제 3야전군 제 9병단 예하 3개 군의 12만 명이 한·만 국경선을 넘어 장진호 부근으로 진출하였다.
중공군 편제상의 1개 군은 국군의 군단급과 동격으로서 대개 1개 군에 3-4개 사단이 배속되었으며, 병단은 야전군급에 해당되는 부대였다.
-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에 침공하는 중공군들 -
한국에 침입한 중공군은 주로 안동-신의주와 청성진-삭주 그리고 집안-만포진과 임강-중강진의 4개 경로를 이용하였다. 이들은 일단 한국 땅에 발을 들여놓는 다음부터는 양호한 교통망을 회피하고, 산악지대를 이용해 야간행군으로 목표 지역까지 진출하였으므로 유엔군의 항공 관측에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이들은 매일 오후 7시에 행동을 개시하여 다음날 새벽 3시경까지 하루 평균 29㎞씩 행군하였으며, 새벽 5시까지 참호를 파고 모든 흔적을 없애버린 후 낮에는 참호 속에서 잠을 잤던 것이다.
(1) 중공군의 첫 나팔소리와 피리소리, 꽹과리 소리
10월 25일 밤, 서부전선의 국군 제 1사단이 막 수복한 운산(雲山)에서 중공군의 첫 나팔소리와 피리소리, 꽹과리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30만 명으로 추산되는 중공군이 인해전술(人海戰術)로 물밀듯이 내려와 크게 위협을 주고 사기를 떨어뜨려 유엔군의 북진은 좌절될 수밖에 없었다. 중공군은 산악지대를 뒤덮고 피리와 나팔을 불면서 공포심을 유발시키며 쳐들어왔는데, 쓰러뜨리면 또 밀려오고 계속 밀고 내려와 그 전투는 전쟁이라기보다는 마치 울창한 삼림에서 벌목하는 것과 같았다.
10월 27일, 중공군 사령관 팽덕회는 39군을 운산 북쪽에 배치하여 국군 1사단의 북진을 막게 하고, 66군으로 신의주 전방 정거동까지 진격한 미 제 24사단과 영 제 29여단의 북진을 저지하게 하였다.
(2) 제6사단 7연대와 중공군의 전투
10월 29일, 제 7연대는 휘발유와 탄약 등 군수품 보급이 지연되어 고장에 그대로 있었고, 제 2연대는 중공군에 포위되어 온정에서 태평으로 포위망을 뚫고 철수하느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제 19연대는 중공군에 의해 포위되어 증원이 저지당하고 있었다. 중공군이 풍장 남쪽 2㎞까지 내려와 제 7연대를 포위하고 있었는데도 임부택 연대장은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10월 30일 오전 7시, 임부택 연대장은 항공지원을 받으며 2대대를 앞세우고 3대대, 연대본부, 1대대가 후미가 되어 100여 대의 차량으로 고장을 출발하여 풍장으로 남하하고 있었다. 남하한 지 한 시간이 지난 오전 8시, "귀 연대는 위험한 상태에 빠졌으므로 최선을 다하여 철수 작전에 성공하기 바람."이라는 사단장의 전문을 받았다.
중공군은 양쪽 산에 매복하였다가 기습하여 중간중간 토막을 내면서 맹타를 가하였고, 국군은 순식간에 혼란에 빠졌으며, 제 7연대는 사단장의 추가 명령에 따라 그 많은 차량과 중포를 파괴하거나 태워버리고 포위망을 탈출하려 하였으나, 중공군의 기습을 받아 전멸 위기에 놓였다. 결국 제 6사단 7연대 장병들은 3,552명 중 878명만 남고 2,674명이 희생되었으며 12명의 중대장 중 6명만이 청천강 남안의 개천으로 살아 돌아왔습니다.
(3) 미 제1기병사단 8기병연대, 국군 제1사단과 중공군의 전투
10월 31일 오전 6시, 제 12연대, 15연대, 11연대 등 제 1사단은 미 기병사단 8연대와 함께 계속 전진하였다. 중공군 제 39군은 미 기병사단과 국군 제 1사단을 포위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으며, 미 공군과 포병대가 관측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산에 불을 놓았다. 국군 제 1사단의 진격이 부진하자 워커는 미 제 1기병사단을 투입시켜 압록강까지 진격하도록 명령하였다.
11월 1일, 전개를 완료한 중공군 제 39군은 제 115사단과 제 116사단을 투입해 공격하였다. 조양동의 국군 제 15연대와 제 11연대, 미 제 5기병연대, 제 8기병연대가 중공군에게 포위되어 위기에 봉착하였고, 모든 지원부대들은 운산에 집결하여 철수를 준비하였다.
설상가상으로 동쪽의 국군 제 2군단이 무너지면서 중공군 제 38군과 제 39군이 청천강 계곡을 통해 쇄도해 들어오자, 미 제 1군단장 밀번 소장은 '11월 1일 저녁 8시 각 부대는 방어태세로 전환할 것과 국군 제 15연대와 미 제 8기병연대로 하여금 용산동-영변선으로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 이는 낙동강선에서 북진을 개시한 이래, 최초로 하달된 방어명령이었다.
그러나 미 제 8기병연대의 철수를 엄호하던 국군 제 15연대가 중공군 제 116사단의 공격을 받아 무너지고, 미 제 8기병연대는 후퇴로가 차단되어 포위된 가운데 철수하다가 제 3대대를 비롯한 연대 병력 중 1,500명 이상이 전사하고 실종되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국군과 미군, 유엔군이 이토록 험준한 곳, 열악한 환경에서 목숨 바쳐 혼신의 힘을 다해 싸웠고 수많은 목숨들이 숨져간 이 참혹한 전쟁의 역사를, 우리 후손들은 똑똑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4) 맥아더 장군의 총 진격 명령
중공군은 1차 공세 후에 식량과 탄약이 떨어져 11월 6일부터 11월 24일까지 자취를 감추었다.
당시 맥아더 장군은 중공군의 1차 공세 시 수많은 장병들을 잃었고, 미 합동참모본부로부터 "북괴군의 완전 격멸"이라는 작전목표를 재검토하고 방어태세로 전환해야 한다는 훈령을 받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아더는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유화정책은 궁극적으로 유엔의 파멸을 자초하게 되며, 한국에 있는 적대적인 군대의 격멸을 중도에서 포기한다는 것은 한국을 통일된 자유 국가로 만들겠다는 유엔의 기본정책을 약화시키는 치명적인 처사"라고 지적하면서, 11월 24일 한국전쟁을 종전시키고 한·만국경선까지 진격하기 위한 총진격 명령(크리스마스 공세)을 내렸다.
그러나 11월 25일, 중공군 사령관 팽덕회는 제 13병단 예하 38, 39, 40, 42, 50, 66 합 6개 군, 18개 사단으로 서부 지역에서 대대적인 2차 공세를 퍼부었다. 동부 전선에서는 제 9병단 예하 20, 26, 27군 등 3개 군 12개 사단이 장진호를 중심으로 미 재 1해병사단과 미 제 7사단을 포위하기 위해 이동을 마친 상태였다.
이들은 포위를 끝내고 호 속에서 나뭇잎과 담요 등으로 추위를 이기며 국군과 미군이 공격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맥아더 장군은 이것을 모르고 죽음의 자루 속을 향해 종전 진격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5) 영원에서 제 8사단과 중공군의 전투
11월 25일, 8사단이 첩첩산중으로 진격을 계속하는데 적이 계속 증강되고 저항이 점점 거세지자 8사단장 이성가 준장은 심상치 않아 각 연대에 "전진을 중단하고 현 전선에서 진지를 튼튼하게 구축하고 현 진지를 사수하라!"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이때 제 7사단과 제 8사단 간의 전투지경선 간격을 통해 남하한 중공군 대부대가 먼저 영원 지역으로 침투하여, 제 10연대와 제 21연대의 퇴로를 차단하고 철수부대를 공격함으로써 전방연대들은 혼란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즉 영원 지역에는 사단 규모의 중공군이 침입하여 주변의 모든 통로를 차단하고 제 10연대와 제 21연대를 포위, 공격함으로써 이 양 연대는 물론 제 50포병대대까지도 혼전 속에 말려들어 주요장비와 차량을 거의 다 파괴 또는 유기한 채 소집단으로 분산되어 탈출하였던 것이다.
(6) 장진호 지구 전투
장진호에 배치되었던 미 제 1해병사단은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죽음의 계곡'으로 이름 붙여진 유담리-덕동령-하갈우리-고토리 통로를 따라, 2중, 3중으로 형성된 중공군의 포위망을 돌파하였다.
이때 투입된 중공군은 제 9병단 예하 제 20, 26, 27군으로, 미 제 1해병사단을 11월 27일 저녁부터 포위, 공격하였다. 미 제 1해병사단 장병들은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살인적인 추위와 폭설 속에서 강인한 정신력으로 무장하여 전투기에 의한 공격 등 우세한 화력으로 완강하게 저항하였다.
12월 5일 미군 지휘부는 미 제 1해병사단에 항공 철수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사단장 스미스 소장은 이를 거부하였다.
사단 본대가 항공기로 철수해 버리면 이륙 항공기의 엄호를 위해 마지막까지 남게 될 2개 대대의 운명은 전사냐 혹은 포로냐 하는 선택만이 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해병부대 장병들은 전사자나 부상자가 생기면, 그들을 적지에 남겨두지 않고 전부 데리고 오는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더 큰 희생이 있더라도 미 해병대는 명예로운 방식의 작전을 선택하여, '철수가 아니라 새로운 방향을 향한 공격'이라는 다짐과 함께 철수 작전을 계속하였다(국방일보 2011년 1월 10일자).
- 장진호 지구에서 전투중인 미 해병 제1사단 장병들 -
당시 중공군도 혹한 속에서 물자와 식량 및 탄약이 부족한 가운데 동상자가 속출하였으며, 하갈우리에서는 미군의 식량, 연료, 탄약이 비행기에서 공중보급 되자, 비약산에 배치되었던 중공군은 공격을 포기하고 아군이 거두지 못한 보급품을 수거하는 데 주력할 뿐이었다.
미 제 1해병사단은 겹겹이 둘러싼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12월 11일 밤 11시 30분 흥남으로 철수를 완료하였으며, 이 전투에서 전사 561명, 실종 182명, 부상 2,872명의 손실을 입고, 대부분이 동상환자인 비전투손실도 3,659명이 발생하였다.
당시 장진호 지구 전투는 미국과 중공이 자존심을 걸고 벌였던 한판승부의 성격이었다. 중공은 미 해병1사단을 포위섬멸하기 위하여 압도적인 병력을 투입하는등, 미국의 자존심을 꺾기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였음에도 실패하고 말았다.
중공군은 장진호 지구 전투에서 25,000-47,500명이 사살되고 12,500여 명이 부상당하였으며, 미 제 1해병사단은 중공군의 주력을 장진호 부근에 묶어둠으로써 동북전선에서 다른 부대들의 철수와 흥남 철수 작전을 보장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7) 공격 6일 만에 총 후퇴 명령
맥아더 장군은 "현 정세는 전혀 새로운 상황에서 새로운 전쟁을 한다는 기초적인 백지상태로 돌아가 판단할 필요가 있다."라고 합참본부에 보고하였다. 이후로 계속해서 중공군이 밤낮으로 쉬지 않고 공격해 오자, 공격 6일 만인 11월 29일 맥아더는 후퇴 명령을 내렸다.
11월 29일부터 12월 1일까지 미 제 2사단은 군우리에서 순천을 잇는 협곡지대인 일명 '태형의 계곡'을 통해 철수 작전을 전개하였다. 이때 미 제 2사단은 4,500여 명의 장병이 희생되었으며, 6·25전쟁이 개시된 이래 최대 규모인 114문의 화포를 잃었다.
이후 12월 3일 미군은 청천강 교두보를 포기하였으며, 12월 4일 평양, 12월 15일에는 38선 이남으로 철수하였다.
(8) 흥남 철수 작전
흥남 철수 작전은 세계 전쟁 사상 가장 큰 규모로 진행된 해상 철수 작전이다. 이때는 영하 30도가 넘는 엄동설한이었다. 철수 작전은 12월 15일 미 제 1해병사단, 12월 17일 국군 수도사단, 12월 21일 미 제 7사단, 12월 24일 미 제 3사단의 순으로 진행되었다.
미 제 10군단장 알몬드 장군은 피난민 3천 명만 데리고 갈 수 있다고 했으나 김백일 장군을 비롯한 참모들이 피난민들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데리고 가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해 군용 선박과 민간 목선을 최대한으로 활용, 제 10군단 전체 병력 105,000명과 북한 피난민 98,000여 명(일부 기록에는 91,000명)이 철수했다.
또 영하 28-3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 속에서 기적적으로 배를 타기는 하였으나 인원수가 너무 많아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고, 바닷바람을 막을 장치가 없어 배 위에서 얼어 죽는 자가 많았다. 목선을 빌어 탄 사람들은 너무 많은 사람이 타는 바람에 얼마 가지 못하고 그대로 가라앉기도 했다.
당시 북한 주민들이 왜 이토록 유엔군을 따라 남으로 피난을 가고자 했는지는 많은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참으로 북한 주민의 흥남 철수의 그 비참상은 말로 글로 표현할 길이 없다. 사정없이 마구 퍼붓는 폭설이 무릎까지 쌓여 발을 떼어 놓기에도 힘이 드는데, 등에 짊어지고, 머리에 이고, 어린아이까지 잡아끌어야 하는 피난길은 너무도 먼데다가 굶주림까지 겹쳐 몰려온다. 가는 곳마다 부모 잃은 어린이가 헤매고 있고 가깝게 들려오는 포성이 마음을 불안하게 한다. 이런 일을 피부로 겪은 세대들은 몸서리치던 그때의 참상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흥남부두의 이별을 노래한 대중가요 '굳세어라 금순아'는 전쟁 때문에 가족, 연인과 생이별을 하고 피난지에서 장사치로 일하면서, 흥남부두에서 헤어진 '금순이'에게 자신의 안부를 전하고, 다시 만날 때까지 굳세게 잘 지내기를 바라는 내용으로, 실향민의 기원과 그들의 아픔을 토로한 절절한 가사를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