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날(3월 29일)
(1)
프롤로그(prologue)
이베리아 반도에서 돌아온 후 국내의 장거리 여정 루트를 탐색했으나 실패한 후 궁여
지책으로 택한 곳이 일본의 1200km 시코쿠헨로다.(스페인 사아군에 소개된 길이다)
준비하는 중에 문득 우리나라의 해안로가 떠올랐다.
서해에서 남해를 거쳐 동해를 걷고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이니셜(initial)을 묶었더니 놀랍게도 내가 존경하는 분의 함자(銜字)가 되어 시작하기
전부터 친근감을 느끼게 했다.
서-남-동 길을 계획은 했으나 출발점이 문제였다.
한반도의 국경은 백두산을 중심으로 서쪽의 압록강과 동쪽 두만강이다.
그러므로 명실상부한 서-남-동 길이라면 서해 압록강 끝에서 출발하여 동해의 두만강
끝을 종점으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단 현실을 거역할 수 있는가.
국경 아닌 국경인 휴전선의 양끝으로 설정했으나 그 것 역시 용이하지 않았다.
서쪽 최북단, 북위37도 58분인 백령도를 상징적 기점으로 삼으려 했으나 기상악화로
실패의 반복 끝에 인천 연안부두로 수정했다.(메뉴'서-남-동 길' 2번글 참조)
인천광역시 중구 합동1가 연안부두.
인천항 연안여객터미널을 떠난 시각은 2012년 3월 29일 10시 30분경.
맨 먼저 찾아간 곳은 남구 용현동 소재 옹진군청이다.
효녀 심청이 군 홍보의 핵임을 입증하려는 듯 효심관이 이색적이기는 하나 100개의 섬
(유인25, 무인75)에 인구 19.485명의 청사로는 호화롭다는 느낌을 주는 7층 신축건물.
내 푸념을 들은 6층 홍보과 직원들은 동정심이 일었나 늙은이의 시도에 감동했나.
상하 2권으로 된 옹진군지(甕津郡誌)와 자료들을 챙겨주는 등 지극히 호의적이었다.
해안도로(아암대로)로 진출해 남행을 시작했다.
옥련IC 밑을 통과할 때 압도해 오는 거대한 송도 신도시가 늙은이를 혼란스럽게 했다.
여기가 송도 해수풀장 자리 맞나?
여름이면 경인선 열차를 콩나물 시루로 만들었던 송도.
인천 땅이지만 송도의 추억이 없으면 서울 사람이 아니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서울
시민의 사랑을 받던 송도였는데.
인천의 역사는 475년(AD), 고구려 20대 장수왕때 시작되지만 인천(仁川)을 지명으로
사용하기는 조선 3대왕 태종 13년(1413) 10월 15일부터란다.
(인천은 이 날을 시민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개항(1883) 129년째인 오늘의 인천은 8구(區) 2군(郡)에 2.876.770명(2011년 현재)의
광역시로 발전했으며 추억의 명소(송도)는 거대한 빌딩 숲으로 변했다.
바다를 메우고 막아 도로와 유수지를 만들고 그 안에 공원과 쉼터를 조성했다.
갯골 유수지 수변공원, 아암도 해안공원, 달빛공원(月光) 호수공원 등등.
송도는 세개의 다리(송도1교~3교)로 되겠는가.
저 거대한 경제자유구역(IFEZ/Free Economic Zone)이 만원이 되면 유수 강은 복개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아암대로는 제3경인고속화도로로 이름을 바꾼 후 77번 해안국도를 업고 소래포구의
남동대교를 건너가버렸다.
다리에 인도를 추가해 줄 수는 없는가.
고잔TG에서 길게 돌아가야 하는 소래포구 길을 걸을 때는 관계당국이 원망스러웠다.
목전에 두고 멀리 돌아가야 하니 그럴 수 밖에.
고잔동과 월곶을 잇는 한화그룹 전용 철다리 한화교가 있으나 통행금지다.
일대가 옛 한국화약의 소유였음을 말해주는 다리다.
고잔-논현지구의 아파트 단지 역시 한화그룹이 거의 독점 개발했다.
한국화약은 고잔, 월곶은 물론 옛 군자지구 매립지까지 소래만을 차지하고 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한화그룹의 모기업인 한국화약이 어떤 연고로 이 일대의 영주가
되었는지는 모르나 내게 한국화약의 이미지는 최루탄이다.
5.16군부쿠데타 이후 민주화 과정에서 가장 호황을 누린 기업이니까.
오이도를 오늘의 골인점으로 삼고 있는데 벌써 해가 사라졌다.
송도에서 고잔, 논현지구로 이어지는 대규모 개발로 완전히 탈바꿈되어 있는 소래포구
입구의 한화교 옆 둑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한 영감이 돕기를 자청해 왔다.
아마, 그에게는 내가 어떤 도움을 받아야 할 영감으로 보였던 듯.
자기 몸 관리도 벅차보이는 84세 어벙한 영감의 갸륵함에 감동되어(?) 디카에 담았다.
사진 받을 방법을 가르쳐주었건만 아직껏 무소식이다.
소래포구를 매립한다면?
소래어시장과 횟집들이 불야성이다.
천수답 하늘 바라보듯 서울을 비롯해 먼 데 손님만 기다리던 외진 소래가 아니다.
지역 고객만으로도 유지될 만큼 지근지역이 혁명적 발전을 했으니까.
게다가 송도 ~ 오이도 간의 수인선 전철의 개통으로(6월 30일?) 더욱 활기찰 것이다.
그러니, 내가 만일 지역 발전을 위해 남동대교를 방조제로 대체하고 포구를 매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나는 아마 온전하지 못할 것이다.
어민과 상인은 물론 시민단체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날 것이니까.
아왕 당할 것이라면, 송도와 대부도 사이를 막았다면 더 용이하고 더 효율적이었을것
이라고 말하겠다.
생활의 터전을 잃게 되는 사람들이 한사코 반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합리적인 대체활로를 보장하면 이들의 문제는 의외로 쉽게 해결될 수 있다.
그러나 NGO에 대한 대책은 막막하다.
그들의 단골메뉴인 생태계 파괴는 상당한 세월 외에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간만 차가 심한 서해의 갯벌은 세월이 가면 절로 생성되지만 그들이 반대를 유보하고
그 세월을 기다려 주겠는가.
원래의 수인선은 수여선과 함께 일제가 수탈을 극대화하기 위해 개설한 협궤철도다.
여주일대의 질좋은 곡물과 소래지역의 고품질 소금의 효율적 운송을 위해서.
광복 후에도 상당 기간 소래지역의 소상인들과 추억쌓기 여행자들이 애용했으며 아직
껏 살아있는 철교는 소래어시장 상인과 일부 지역주민이 활용하고 있다.
소래대교가 건설되었음에도 멀리 떨어져 있다는 이유지만 안전진단을 받아본 적 없는
이 다리에서 참사가 발생한 후에 비로소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식 대책을 세우려나?
소래대교의 양쪽은 인천시 남동구 논현동과 시흥시 월곶동이다.
소래와 월곶 양해안에 멋진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모두 거창한 고층아파트가 들어섬으로서 생긴 웰빙로다.
비록 밤길이기는 해도 때마침 포구로 몰려오는 밀물소리를 리듬으로 걷는 늙은나그네
길은 행복로였다.
오이도로 가려면 월곶대교를 건너 서울 구로구 남부순환도로에서 분기해 부천 소사를
거쳐 달려온 서해안로를 택해야 한다.
서해안도로는 제3고속화도로에 업혀 남동대교를 건너온 77번 도로를 정왕교차로에서
인수해 옥구공원을 지나간다.
옥구공원의 야경을 감상하며 첫날을 마감했다. <계 속>















































첫댓글 저도 70년대에 송도를 가 본 적이 있는 데 많이 변했겠군요. 군 해안초소(포대)는 여전하군요. 아직 어쩔 수는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