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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5 전쟁(戰爭)이 나다
1950년 6월 25일 그날은 일요일이라 좀 늦게 일어나니 북(北)쪽에서 까만 전투기(戰鬪機) 2대가 날아와 왕십리(往十里)쪽에서 폭격(爆擊)을 하니 검은 연기가 하늘로 솟아오르자 전투기는 북쪽으로 가버렸다, 의정부(議政府)쪽에서는 대포(大砲)소리가 쿵 쿵 나고 다음날 저녁때가 되니 도로(道路)에는 줄지어 피난민들이 내려오기에 물어보니 의정부 포천(抱川) 미아리(彌阿里)에서 온다고 하였다 얼마 있으니 종암동 작은 집에서도 피난 간다고 하면서 가시고 우리 집도 저녁을 부랴부랴 먹고 각자 보따리를 짊어지고 피난길에 나셨다, 아랫방 완진네집 시구도 같이 나셨다,
어머니께서는 삼칠 박에 안 되는 순진이를 업고 보따리를 이고 피난길에 나셨는데 식구가 전부 가다보니 걸음도 느리고 석법 외삼촌 딸은(외숙모의 딸) 순창이 보다 한 살 아래여서 내가 업고 가는데 순창이가 나도 업어 달라 하면서 가지를 않아 하는 수 없이 달래서 교대로 업고 안국동(安國洞)까지 오니 날이 저물어서 더 갈 수 없고 마침 아랫방 완진이 친척집이 안국동에 있어 그 집에서 하루 밤을 신세지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 집을 나와 보니 중앙청(中央廳)꼭대기에 인공기가 보이고 안국동 큰 길에 나오니 인민군(人民軍)이 탱크를 앞세우고 양 옆으로는 인민군이 중앙청 쪽으로 가고 탱크 뚜껑을 열고 인민군이 나와 이층 유리창에다 권총을 마구 쏘고 탱크 위에는 국군이 수류탄(手榴彈)을 투척(投擲)하고 전사한 시체를 그 대로 매달고 가고 길가에는 붉은 깃발을 흔들면서 인민군 만세를 부르고 피난민들은 집으로 돌아가라 하였다,
우리 식구는 하는 수없이 집으로 도로 오는데 종로4가 동대문 경찰서 앞에 오니 사거리에 탱크 1대가 불에 타고 있고 을지로 쪽을 보니 을지로에서도 탱크 1대가 불타있는 것을 보고 오는데 탱크 1대가 남산(南山)에다 대고 포를 사격하는데 얼마나 소리가 큰지 모두 놀라 각자 뿔뿔이 흩어져 동대문 경찰서 앞 전매청 뒤 골목으로(피마골) 도망을 가는데 골 목안에 수많은 경찰관 시체가 늘어져있는 것을 보고 놀랐으며 가슴을 두근거리면서 집으로 왔다,
집에 오니 동네에서는 먹을 식량이 없어 모두 식량 구하는데 혈안(血眼)이 되여 야단들 이였다, 아버지도 감자를 구하여 끼니를 있고 우리 집은 마침 전매청에서 배급을 타온 쌀이 남아있어 어머니께서는 작은 그릇에다 담아 여기저기에다 숨겨놓으시고 조금씩 죽을 쑤어서 먹으려 하면 동네 아주머니들이 염체 없이 무조건 대들어 집어먹는 실정에 이르자 몰래 밤에 우리식구만 먹던 생각이 난다, 앞집에 어린이는 병(病)들어 죽을 때 밥 밥하고 죽었다고 한다,
동네에서 아버지하고 알고지내는 분이 인민군이 오자 서류가방을 들고 동회사무실에 가서 인민의원장을 맡아 동네 치안(治安)을 하였는데 경찰관 저명인사 관직에 있는 사람들을 잡아가고 빨갱이들 하고 감정 있는 사람들도 잡아가고 죽이고 하였다 그 걸 보시고 아버지께서는 남에게 감정을 사지 말라 하시었다, 젊은 사람을 마구 잡아가고 의용군 보급대로 보내어 서울에 젊은 사람은 숨어서 살아야만 하였다 그러다 9, 28 수복(修復)하여 북진(北進)을 하다가 중공군에 밀려 후퇴하게 되니 국가 동원령이 내려 1950년 12월 2일 동사무소에서 나오라 하여 서상천이하고 가보니 무조건 도요다 일산 차 에다 태어 가지고 사범학교에다(지금은 선농단(先農壇앞 주택)에다 내려놓고 1주간 교육하여 예비사단에 배속 되었다,
* 입대에서 6, 25 전투(戰鬪), 휴전(休戰) 제대(除隊)까지 별도로 별지(別紙)에다가 6, 25 전투수기집으로 기록을 하겠습니다,
☆ 첫 휴가(休暇)
전시(戰時)에도 휴가제가 있어 고참부터 휴가를 보내는데 나도 해당이 되어 휴가를 신청하여 연대본부(聯隊本部)에 가서 신고하다가 전방에서 교전(交戰)이 벌어져 취소하고 원대복귀하고 말았다, 그 후도 두 번이나 휴가 신청하여 취소 되였다 재수 좋은 전우는 휴가를 갔다 온 전우도 있었다, 그러자 1953년 7월 27일에 휴전이 되어 1차로 휴가를 가게 되었다, 휴전 후 첫 휴가 때는 실탄(實彈)을 제외한 완전무장(完全武裝)으로 연대에 집합하였다,
연대에서 휴가비 쌀 건방 통조림하고 14일간에 보급을 주고 총(銃)을 반납하고 대검(帶劍)은 그 대로 가지고 서상천이하고 같이 휴가 길에 올랐다, 새벽에 GMC 추력을 타고 출발하여 춘천(春川)에 오니 날이 밝기 시작하였다, 시민들이 다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찌된 일인지 사람이 아주 작게 보이였다, 옆 전우보고 물으니 그 전우도 자기 눈을 의심하고 이상하다고 하였다, 아마도 전방에서 전투만 하고 민간인은 2년 만에 처음 보았기에 사람이 달리 보이는 것 같았다,
춘천을 지나 가평(加平)에 오니 부인회에서 길옆에 줄을 서서 환영(歡迎)하고 음료수 관자를 주는데 그 때서야 사람이 제대로 보이었다, 휴가 장병을 실은 차는 서울역이 목적지라 하면서 중간에서 하차할 사람은 알려달라고 하였다, 드디어 서울에 도착하여 신설동에서 서상천이하고 같이 내렸는데 이상한 것은 땅을 발부니 깊었다. 얕았다, 하여 발이 휘청거리는 것 같았다, 아마도 너무 기뻐서 그러한 것 같았다 잠시 후에는 제대로 되어 집에 도착하여 대문 안에 들어서니 순기가 진흙으로 탱크를 만들면 놀고 있는 것을 보고 내가 누군지 아느냐고 물으니 대답도 없이 휙 나가드니 얼마 후 어머님이 오시오 너무 반가워서 우시는 거시였다, 어머니 말씀이 사택 개울에서 빨래를 하는데 순기가 와서 집에 가자고 졸라 왜 그려니 하니 나뿐 사람 죽이려 간 사람이 왔어 하며 집에 가자고 하였다고 한다,
3년 만에 오니 가족들이 이상하게 보이였다, 마루에 온 가족이 둘려 앉자 대화를 하는데 옆에서 처음 보는 아주머니가 (일명 얌자이) 아기를 안아보라 하여 누구의 애기입니까 하니 여동생 순자라고 하였다 나는 처음 보고 듣는 소리다, 순자도 그 집에서 낳았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를 우편배달부만 보면 깜짝 놀라 가슴이 두 근 두근거린다고 하시었다, 편지(便紙)가 왔다하며 전사통지서였기에 놀라 시였다고 하시였다,
구청(區廳)에서는 전투수당을 지급하는데 생존자는 돈을 적게 주고 전사자는 많이 주는데도 돈을 던지고 통곡하는 것을 보고 아버지는 조금을 받아도 내 자식이 살아있으니 기분이 좋았다고 하시었다, 또한 부모님이 말씀하시기를 마루 뒷문을 가리키면 저 밭을 보아라. 하시면서 네가 휴가 온다고 하였기에 오면 줄려고 돈을 조금 모았는데 뒤 밭 90평짜리가 나와 순영이와 순택이가 돈을 보태어도 모자라 유억길(柳億吉)부인에게 좀 돌려서 땅을 샀다고 하시면서 기뻐하시는 것을 보고 그 때 휴가를 못간 것이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되었구나 하고 생각을 하였다,
저녁이 되자 동회장님과 파출소 소장님이 금일봉을 가지고 오시오 상부에 지시라 하시면서 위로하면서 무엇을 도와 드릴까 요하시면서 돌아 가시였다, 아버지께서 말씀이 동회에서 군인가족에게는 우대(優待)하여 배급도 우선 주었다고 하였다,
사고방지를 위하여 휴가 장병은 관할헌병대에 신고하게 되여 있어 다음날 서상천이 하고 성북경철서에 파견 나온 헌병대에 가서 신고를 하니 헌병이 대검(帶劍)(총에 꽂는 칼)은 사고 날 위험성이 많으니 반납하고 귀대할 때 가주고 가라면서 전방근무 하시다가 후방에 오시면 눈에 거슬리는 것이 많으니 절대로 싸우지 말고 우리에게 열락하면 적극 협조 하겠다 하였다, 처음에는 휴가증만 가지면 전차 극장(劇場)이 무료이고 서울역 앞에 휴가 장병 대기소(그 당시 서울역 근처에는 폭격으로 모든 건물이 파괴 되여 허허 벌판이다, ☞ 위치는 서울역 지하철 3번 출구 입구 쪽 봉래동 1가)에는 기차시간을 기다리는 장병 또한 이북 출신들 중 갈 때 없는 장병을 위하여 허허 벌판에다 천막을 쳐서 많든 곳이다, 그 곳에 가서 휴가증만 제시하면 침대 식사 간식 오락기구도 이용할 수가 있고 귀대할 때까지도 무료로 먹고 자고하는 곳이다,
둘째 작은어머니와 순정이가 청계천 5가 쪽에서 다방(茶房)을 한다하기에 한번 찾아갔더니 커피를 주어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상이군인 와서 행패를 부리고 있었다, 그 당시만 하여도 상이군 에게 대책이 없어 자력으로 생활 하다 보니 민폐(民弊)를 많이 기치고 다닐 때였다, 나는 상이군인을 보니 어디서 많이 본 듯하여 자세히 보고 생각하니 전방에서 내가 분대장으로 있을 때 우리 분대에 배속되어 바로 포탄에 부상을 당한 전우였다, 나는 그대서 야 너 누구 아니냐 하니 상이군인은 어물어물 하면서 안녕히 계시라 고 하고 살아졌던 일도 있다,
6, 25 사변 때 청년들이 영장 없이 군에 가서 군번을 받지 못하고 전사하여 전사자로 인정을 밭지 못한 예가 많았다, 그래서 같이 나간 사람의 보증이 있어야 심사해서 인정을 할 때였다, 내가 첫 휴가를 오니 도춘원(陶春元)의 어머니, 강장남의 처남(이름 미상) 이재수(李在壽)의 아버지 분들이 보증을 부탁하여 보증을 섰는데 도춘원 이재수는 인정이 되었고, 감창배(金昌培)는 미아리에서 전사하였는데도 이웃에 감정으로 인하여 인정을 받지 못 한일 있었다, 영수는 상이군인으로 제대하여 실설동 노타리 부근에 산다하여 가보니 순수 창수 남매(男妹)가 놀고 있고 결혼한 아내가 만삭(滿朔)이었다,
♡ 결혼(結婚)을 하다
휴전(休戰)이후 각도(各道)에 예비사단(豫備師團)을 창설(創設)하기 위하여 전방군인들을 대거 후방으로 발령(發令)되었다, 1954년경 전북 전주시 덕진구(全北 全州市 德津區)부근에 있는 완주군 용진면에 35사단으로 배속(配屬)되니 후방 근무라 가끔 집에 오게 되었다, 어머니께서는 결혼을 해야 되니 아는 색시가 있으면 이야기 하라하여 나는 없으니 어머니가 정해주시면 따르겠다. 하였다,
예비사단이 창설하다보니 군인가족들이 따라와 부락(部落)에서 방을 얻어 생활(生活)하니 군인 색시들은 낮에는 할 일도 없이 놀고 얼굴의 화장(化粧)만 하고 남편(男便) 돌아올 때만 기다리고 편안하게 사는 것을 본 동네 처녀(處女)들은 자기네들은 농촌(農村)에서 일만 하다가 그 광경(光景)을 보니 부러워 군인에게 시집가는 처녀들도 많았는데 대개 보면 총각(總角)보다 본처가 있는 군인들이 더 많이 결혼하는 것을 보았다, 그 동네 처녀들은 군인이 아니면 시집을 안 간다 하는 말이 나돌고 있으니 군인들의 인기가 대단하였다, 색시 집 또는 부대 부근에서 결혼 생활을 하다가 만기제대하며 일부는 색시를 버리고 몰래 도망가는 일이 있어 통곡하는 색시들이 생기게 되어 그 동네 언덕길을 우리들은 이별(離別)고개라고 부르기까지 하였다,
중대장은(직속상관이 아닌) 전라도 정읍(井邑)사람인데 내가 서울 산다하니 자기 처가(妻家)집은 제기동이라 하여 우리 옆 동네라 하니 집에 가거든 꼭 찾아보라 하여 제기동 천주교(天主敎)성당 옆에 집을 찾아가니 아주 모르는 사람도 아니다 바로 서상천 누님하고 고무공장에 같이 다니던 사람이다 그뿐 아니라 중대장 장모님께서는 나보고 어디 사는 누구시오 하여 안암동 홍순원이라고 하였더니 그럼 누구네 집하면서 이럴 수가 인나 하고 입속으로 무엇이라고 하였다 아마도 무슨 비밀(秘密)이 있는 것 같았다,
부대로 돌아가 사실(事實)이야기를 하였더니 반가워하면서 내 곳 방을 구하는 데로 대리고 온다하고 얼마 후 덕진공원(전주 이씨 시조의 묘가 있는 곳) 근처에다 방을 얻어 같이 가자 고하여 중대장하고 같이 가보았다 객지(客地)에서 동네사람을 만나니 참으로 반가웠다, 중대장 부인이 입도시나 단무지를 먹고 싶다고 하였다 내 직책이 군수과(軍需課) 선임하사(先任下士)였기에 단무지 구하기가 어렵지 않아 단무지를 갖다 준 적도 있었다, 중대장하고 가끔 집에 나가다보니 친하게 되여 나에게 말하기를 이 집주인은 농토도 많은데 신랑을 구한다 하니 소개하겠다고 하여 나는 거절하고 말았다,
부대가 넓다보니 부근에는 여려 동네가 있었다, 하루는 동네에 용한 점보는 집이 있다하여 동료들하고 같이 점을 보러 갔다, 가보니 태주점이다(태주점이란 = 어린아이 혼을 불려다 점치는 것) 점을 보는데 홱 - (휘 바람소리 같은 것)하면서 물만 마시고 답답하다고 하며 당신은 올해 사모관대(紗帽冠帶)쓸 운이고 고향에 간다고 하였다, 나는 그 소리를 믿지 않고 있다가, 집에 왔을 적에 부모님에게 점본 이야기를 하였더니 부모님은 깜짝 놀라 하신 말씀이 아버지 왜 할머니께서 양재 물을 마시여 음식을 자실 때 그러한 행동을 한다면서 그런 것을 어찌 알았으랴 하였다, 그 때 점괘대로 그 해에 결혼하고 제대하였으니 점은 용하게도 맞추었다, 제대 후 중대장을 만났는데 그 때 그 아이는 딸인데 종암초등학교에 다닌다고 하였다,
1956년 2월경 편지가 왔다 편지에는 여자 사진과 결혼 날 자까지 받아 놓았으니 올라오라 하였다, 통지를 받고 집에 갈려고 하였더니 그때 김창용(金昌龍) 저격(狙擊) 사건이 발생하여 비상령이 내려 휴가 외출은 금지 되여 출장증을 가지고 집에 오니 어머니께서는 한청(漢淸)이 어머니하고 선도보고 날자는 4월 16일 음력은 3월 2일이 결혼 날 자를 잡았으니 올라오라 하였다, 나는 파주(坡州)에 색시 집에 갈까 하였으나 그때 전국 비상령이라 가지를 못하여 색시 얼굴도 보지 못하고 귀대(歸隊)하였다,
3년을 전쟁하였기에 총각 처녀들의 결혼을 못하고 있다가 휴전이 되니 결혼을 많이 하였다, 특히 현역군인(現役軍人)에게는 대인기였다 심지어는 처녀가 셋 추력 반이라는 유행어가 날 정도로 특히 서울 사람에 대하여는 더욱 인기였다, 부대부근 처녀들은 앞 다투어 신랑을 구하다보니 부작용도 많았다, 자세히 알아보지도 안고 결혼하다가 낭패(狼狽)를 보는 일이 허다(許多)하였다,
결혼 품이 일다보니 고향에서는 결혼하라고 색시 사진들을 보내오는 일이 많았고 우리 내무반(內務班)만 하여도 약 40명에서 15명은 모두 색시 사진을 받아보고 색시 사진을 진열(陣烈)하여 놓고 서로 비교(比較)하기도 하였다, 드디어 결혼 날이 되어 결혼휴가를 받아 가지고 하루 전날 집에 오니 결혼준비가 한참 이였다, 그 당시는 서울에 결혼예식장이 얼마 있지 않아 대개 구식결혼을 많이 할 때였다, 어머니 족하 사위 동인이 아버지가 경전에 다니시어 가족이라 하여 경전예식장에서(동대문운동장 앞 흥인동) 결혼식을 하였다,
예식장에서 입장할 때에 처음 색시를 보았다, 남자는 매미 옷이라고 하는 결혼예복을 여자는 지금과 같은 면사포에다 드레스를 입고 신랑 쪽 들러리 2명 신부 쪽 들러리 2명 앞에는 어린이 남녀 들러 가 꽃가루를 뿌리면서 입장하는 것이었다, 경전직원 가족이라 하여 특별히 경전음악대(京電音樂隊)가 연주를 하여 호화스러운 결혼식을 하였다, 봉식(鳳植)이는 나보다 몇 개월 후에 결혼을 하였는데 순원이는 신식을 하는데 나는 구식결혼은 안 한다 할 정도로 신식결혼이 흔하지 안하던 시대였다
결혼식이 끝나면 신혼여행(新婚旅行)을 가는데 그 당시는 여행을 가는 사람이 만치를 않고 일부는 온양(溫陽)에 온천(溫泉)에 갔다 오는 것이 전부였다, 보편적으로 택시를 타고 시내를 돌면서 남산(南山)에 올라갔다 오는 것이 전부였다 우리들도 남산을 갈려 고하였으나 색시가 차멀미를 하여 가지를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니 동네잔치가 한참 이였다, 어머님은 마루에다 큰상을 차려놓고 상을 받으라 하였다, 큰상은 평생(平生)의 세 번 밖에 받지를 못한다, 첫째 돌상 둘째 결혼상 셋째 회갑(回甲)상이였다고 하시었다, 잔치가 한참일 때 이재수(李在壽) 할머니가 돌아 가시여 거지 때들이 초상(初喪)집에서 행패(行悖)를 부리다가 동네 유억길이란 분하고 다투다가 얻어맞고 결혼 집에 와서 화풀이로 행패를 부려 가까스로 달래 보냈다,
결혼잔치가 끝나니 어머님은 며느리 보는 게 기뻐서 삼일동안 음식을 먹지를 못하였다고 하시었다, 결혼휴가가 끝나니 부대로 귀대하였다, 부대에서는 하사관 이상은 영외거주(營外居住)를 하게 되어있었다 일부는 영외거주를 하고 나는 부대 내에서 기거(寄居)하였다 토요일 오후부터 월요일 아침 8시까지 출근하면 되니 서울을 자주 가게 되었다, 군용열차가 전주역에서 저녁 7시에 출발하여 용산역(龍山驛)에 새벽 4시에 도착하여 뻐쓰 타고 집에 오면 얌전이란 분이 허둥대고 하였다. 아내 말이 내가 없으면 우리 방에서 자고 담배도 피고 아침에 이불도 개지 않고 그냥 나간다고 하였다,
나는 어머니에게 왜 그러시냐고 하니 갈 때가 없어서 그러니 임시로 있는 것이니 내버려 두라 하시었다, 어머님은 참으로 인정이 많으시어 어머니를 따르는 분이 많이 있었다, 용산역에서 군용열차가 밤 10시에 출발하여 아침 7시에 전주역에 도착하면 부대 가는 통근버스가 있어서 전주에서 토요일저녁에 출발하여 다음 새벽에 집에 갔다 저녁차 타고 전주에 내려가고 하였다,
장인어른 신께서는 우리 집에 오시오 편지를 보이면서 아들이 군에 가서 편지 한 장 오고 그 후 소식이 없다 하시면서 소식을 알 길이 없느냐고 하시기에 편지를 보았더니 논산훈련소(論山訓練所) 훈련병 부대장 안부편지였다, 귀대(歸隊)후 어떻게 찾을까 걱정하던 중 중대장님이 육본(陸本)에 내 친구 육군소장이 있는데 마침 볼일이 있어 육본으로 갈 것이니 같이 가자하여 같이 육군본부 인사과에 가서 부탁하여 찾았다, 논산육군병원에 있다하였다, 병원으로 가서 찾으니 얼마 전에 훈련소 30연대로 복귀하였다, 하였다, 소속이 알아야 찾기가 쉬운데 연대만 가지고는 찾지를 못하고 다음 기회를 보자하고 부대에 돌아오니 4과(課) 사병이 자기 친척이 논산훈련소 인사과 부관으로 있으니 나를 외출을 보내주시면 꼭 찾아 가지고 오겠다고 하여 외출을 보냈더니 소속(所屬)을 알아 가지고 와서 지금 훈련 중이라 하였다,
기회를 얻어 훈련소를 찾아갔더니 야외 교육중이라 기다리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8사단에 같이 있던 부관(副官)과 동기생을 만났다, 동기생은 인사계로 있어 면회하기가 쉬었다 얼마 후 처남을 처음 만나서 얼굴을 모르고 물어보니 처남이 맞는 것을 확인하고 다음 기회에 만나자고 하면서 해어졌다, 몇 칠 후 전주시내로 외출을 가다가 덕진공원에 신병(新兵)들이 많이 있어 그리로 가보니 인솔자가 35사단으로 보충병을 인계 하러간다고 애기하는데 옆에서 누군가 서성거리고 있어 보니 처남 이였다,
사단인사과 사병계(士兵係)를 잘아 는 사이여서 전화를 걸어 내 처남이 우리 사단으로 보충을 오니 잘 부탁 한다하니 이름을 묻자 이운하라 하니 얼마 후에 전화가 왔다 선임하사님 있는 연대로 보내니 알아서 하시오 하였다 연대인사계는 내가 대대 서무계로 있을 떼 중대 서무계였기에 친한 전우 사이였다 부탁하니 잠시 후 처남을 대리고 왔다, 그 때가 10월 달 3일 연휴라 각 대대로 배속치를 못하고 연대본부에 대기상태라 인사계보고 처남을 대리고 집에 갔다 오겠다고 하니 곤난(困難) 하다면서 주의하여 갔다 오라 하여 집에 대리고 왔다, 집에 데리고 오니 아내는 깜짝 놀라면서 집에 같이 가겠다고 하여 집에 가서 다음날 돌아와 귀대하니 보충병들은 보충오자 그날로 고향집에 갔다 오니 부러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