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시절과 김해시절
1. 부산생활
1986년 4월에 부산시 사하구 신평동에 있는
'한영기전'이라는 회사에 입사해서 그 해 12월까지 있었다.
그곳은 조선소 납품도 하지만 다른 육상용 제품도 만들었다.
광양제철소 일도 좀 하였고
울진 원자력 발전소 들어 가는 방화문 같은 것도 좀 하였다.
주력 상품이 없으니 회사 경영이 항상 어렵다.
나 그만 두고 3년인가 있다가 문닫았다.
주일을 쉬게 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들어 갔는데
사장 아래 손아래 동서가 주일 날 출근 하지 않는다고 말이 많았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거의 다 일요일 격주제로 쉬었다.
원래 약속과 맞지 않아 다른 직장도 구하지 않고 그만 두었다.
5년 전엔가 지금 다니고 있는 직장에서 그곳에 근무 했던 사람을 우연히 만났다.
처음에 나는 그 사람을 알아 보지 못했지만 그 사람은 나를 알아 봤다.
이런 저런 이야기 하던 중에 들으니 그 동서 회사 부도 나고
자기 사업 따로 하다가 뭣이 또 잘 안되었는지 자살했다 들었다.
그 때가 34 살 정도 되어 패기가 있었다.
하지만 일요일 쉬는 직장 구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금성출판 서적 외판원도 1개월 해보고
영어 교재 비디오도 1개월 정도 해보았지만 한건도 못 올렸다.
그것 하면서 부산시내 거의 걸어서 다 다녀 보았다.
그게 남은 것이다. 다리도 튼튼해 지고.
그래서 지금도 외판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존경한다.
외판도 하나의 기술이다.
욕을 얻어먹고 따돌림 당해도 그래도 판매를 계속 한다.
하도 힘들어 언젠가 한 번은 버스 타고 근처의 감림산 기도원에 갔다가
기도원 뒷산에 올라간 적도 있다.
그러는 가운데
전국적으로 데모가 심하다.
한번은 서면에 갔다 오는데 최루가스가 숨을 막히게 하고
또 한번은 법원 쪽에 가니
데모대 학생들과 경찰이 대치중이다.
학생들은 보도블록을 깨어서 집어 던지고
경찰은 최루탄 쏘고.
결국 6. 29 선언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사생활과 별로 관계가 없었다.
그러는 중에도 부산일보 광고란에 부지런히 일자리를 찾고 있었다.
부산일보는 나와는 많은 관련이 있다.
부산일보 광고란을 보고 부산의 일자리를 구했고
부산 회사에서 부산일보 본관 앞의 신문 게시판을 만들 때 나도 관여 했으며
또 김해로 이사 올 때도 부산일보를 보고 택지를 구했다.
지금 다니는 직장도 부산일보 광고를 보고 들었왔다.
2. 김해시대
부산에서 주일 쉬는 직장이 구해지질 않아
1987년 7월 김해로 이사 왔다.
84년생 큰 애가 4살, 86년 작은 애는 그 해 6월달에 돐이었다.
이사 오자 얼마 되지 않아 마누라가 자궁외 임신 이라는 것으로 죽다가 살아 났다.
하나님의 은혜이다.
김해에서 안된다 하길래 부산 대학 병원으로 갔는데
밤 12시에 김해에서 출발하여 부산에 새벽 1시 쯤 도착했다.
보증금 20 만원 없다고 응급실에 눕혀 놓고 수술을 하지 않는다.
얼마나 열이 받든지.
부산 형님께 전화 하니 '한 밤중에 어디서 돈은 구하겠느냐?' 하는 것이다.
나도 통장에 돈이 좀 있었지만 한 밤중에 어찌할 되리가 없었다.
그 이후에는 병원도 장삿꾼이구나 하는 관념이 사로잡고 있다.
그해 여름에는 태풍 이름이 '루사'든가?
하여튼 심한 바람과 함께 엄청난 비가 김해에 쏟아졌다.
잠시 월세로 들어 온 스레트 집에 달린 창문은 들컹 거리며 열린다.
바람의 힘으로 김해 우리 집 근처 고압선 전봇대 들이 몇개 쓰러졌다.
근처 12 층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화장실에 물이 없으니
생지옥 같은 삶을 2일 계속 하였다.
넓디 넓은 김해 근처 들판이 물 바다가 되었다.
그해가 다가고
1988 년 올림픽이 열리던 해에 분양받은 조그만 택지에
조그만 집을 짔기로 했다.
땅 값치르고 나니 돈이 바닥 나서 은행에서 융자해서 지을려고 하니
그것도 쉽지 않다.
그전에 주택 부금 넣는게 있어서 몇 번 융자에 대해 물어 보니 가능하다고 해 놓고
정작 대출을 받을려고 하니 이핑계 저핑계 대고 한다.
결국 할 수 없어서 시작 할 때 집에 부탁하여 건물 담 쌓는 것만 달라 했는데
그게 그것으로 끝이었다.
나중에 갚지 않았으니.
내가 살 집이고 건축할 돈이 부족해서
손수 짓기로 했다.
삽으로 기초를 파고
철근을 대충 배치하고
사람을 구해서 기초 거푸집을 만들었다.
여동생이 돈을 줘서 기초 레미콘을 붔고 그렇게 1년 가까이 지났다.
1년이 지나서 돈을 융자해서
벽돌을 구하고 벽돌 쌓는 기술자를 대려다가 담을 쌓아 올렸다.
내가 살 집을 지으니
집짔는 괴로움도 없고
재미가 있었다.
남들이 보면 별것 아니지만 나에겐 상당히 즐거웠다.
자기 일을 하는 것은 나 말고도 다 그런 기분일 것이다.
얼마나 열심히 했던지 한번은 일꾼 들여다가 벽쌓게 하도록 하고
나는 아파 들어 누운 적도 있었다.
지금 살고 있는 집 벌써 20년이 더 지났다.
남들이 보면 헌집이다.
어느곳 하나 내 손길이 닫지 않은 곳 없다.
자기 마누라가 낳아서 기른 자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그런것은 시간이 지나면 다 잊어진다.
그리하고 집 다 짓고
이것저것 생각 하다가 생산직에 다니기로 했다.
사무직 하다가 생산직 하기는 힘들었지만 그것도 나름대로 괜찮았다.
기술이 없으니 월급이 너무 적어서 그렇지.
신발공장에 2년 정도,
가구공장 2개월,
F R P 공장 2개월 정도
천정 크레인 공장 4개월
그것도 다 지나고 나니 추억이다.
그런 공장들 구경도 하고,
셍산직에 근무하는 사람들의 심정도 알 수 있고.
지금 다니는 회사는 선박 배관 부품 회사인데
1991 년 5월에 들어 왔다가 1994 년 3월 까지 다니다가 관두고
거제 친구가 소개하여 진해고등학교 기간제 기술 교사 1년 하다가
어째 다시 1995년 7월에 입사 해서 지금까지 다니고 있다.
이곳에 근무 하면서 문제가 생기면 출장을 가야 한다.
그래서 김포 제일제당 구경도 2 번 했고,
수원 삼성전자도 구경했고,
울산 카프로락탐도 구경했고,
전주의 제지 공장도 구경 했고,
구미 제일 합섬은 김해에서 구미까지 기차타고
30 일 정도 출퇴근 했다.
대형 조선소는 안가본 곳이 없다.
그 때는 일이 풀리지 않아서 죽을 맛이었다.
월급은 많지 않지만 그런대로 힘들지 않았으며
애 2 명 대학 까지 모두 마칠 수 있었다.
큰 애는 남자로 2010년 2월 부산대 기계과 졸업했다.
작은 애는 지난 해 창원대 음대 피아노 졸업했다.
나도 그랬고 애들도 그랬고 주일날은 학교 공부 안하는게 방침이다.
주일 날 공부 안해도 살아 갈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것이다.
물로 과외도 고등학교 방학 때 2 달 정도 다녔다.
엄마가 기도로 도와 준다.
보탤 수 있는게 기도 밖에 없으니.
남 들이 이야기 하는 S K Y 일류대는 아닐런지 몰라도
저들 다녔던 학교도 들어 가기 쉬운 학교는 아니다.
작은 애는 중학교 졸업 할 때만 해도 피아노 전공 할 맘 없다가
고등학교 입시 후 피아노를 할려니 나름대로 어려움이 많았다.
적게 들어 간다 한게
국립대학 들어 가는 것 만큼 들어갔다.
애 들은 자라서 취직 하고
나는 일선에서 물러나야 하는데
장차 어떻게 될란가?
고향에 가서 농사를 좀 할까?
그것은 너무 돈이 안될 같고
고향 근처에 임금 싼 공장에 좀 다닐 까?
예전에 생산직도 해보아서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과연 늙은 사람 받아 주고
그 일들을 잘 할 수 있을란지?
두고 보야 할 것이다.
건강하게 살아 가는게 좋겠지요.
끝까지 읽어 주신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THANKS TO GO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