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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운영해오던 사진관을 정리하고 미래에 대한 구상과 새로운 마음가짐을 다질 기회를 갖고 더불어 제주도 올레길의 모습을 사진기에 담아 보기 위해 두 달간의 일정으로 떠났다.
앞만 보며 열심히 살아온 보답일까. 아내는 나 혼자만의 여행을 흔쾌히 동의해주었다. 궂은 날씨 속에 시작된 올레길을 걸으면서 정말 좋은 생각을 많이도 할 수가 있었다. 한 달 동안 모든 올레길 코스를 걸었고, 나머지 한 달은 제주의 수많은 오름과 한라산 중턱과 능선의 길들을 걸으며 제주의 속살을 들여다볼 생각이었는데, 그때 마침 염소를 방목하기에 좋은 조건을 갖춘 임야가 진안에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머지 한 달의 일정은 아쉽지만 다음으로 미루고 황급히 진안으로 올라와서 마음에 품어두었던 임야를 저렴하게 계약하였다.
현장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알아보거나 세심하게 山의 상태를 살피지도 않고 그냥 좋은 느낌 하나만으로 과감하게 일을 진행하였다. 진안에 살고 계시는 분들 중에서 그간 나에게 많은 조언을 해주신 오암리 어르신과 나중에야 현장에 방문했는데 다행히 그분의 지인들이 그 이웃마을에 살고 있고 직접은 아니지만 그 마을에도 알고 계시는 분을 만날 수가 있었다. 동네 반장님을 뵙고 빈집에 대한 문의를 하면서 山에 대한 얘기도 그때서야 자세히 들을 수가 있었다. 산 전체를 둘러보면서 나의 무모함도 약간은 깨달았지만 이미 계획하고 꿈을 세워놓은 나의 마음을 바꿀 만큼 그렇게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다. 염소를 방목하여 키워본 경험을 가진 오암리 어르신께서도 그리 좋은 것은 아니지만 방목에는 전혀 문제가 없을 것 같다는 희망적인 말씀도 하셨고, 어느 누구의 손도 타지 않은 이 깨끗한 공간에서 여유롭고 평화롭게 노닐 염소들을 생각하니 나의 마음 또한 기대와 희망으로 가득 찼다.
우리가족이 머무를 빈집이 혹시 있었으면 하는 바람에 문의했지만 그 마을에는 마땅한 곳이 없음을 알게 되었고 진안 성수면 오암마을 간사의 소개로 진안 뿌리협회를 찾아 나의 계획과 현재의 진행상황을 상임이사께 자세히 말씀드리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상담하였다. 뿌리협회의 존재의미가 좀 더 쉽게 정착을 하는 데 도움을 줄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마을주민과의 관계와 빈집에 대한 정보 및 염소를 키우기 위한 축사, 울타리 설치 등 귀농에서 정착까지 실질적인 도움을 받을 길은 별로 없다는 상담내용에 다소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농사일도 중요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재능을 통해서 지역사회에 보탬이 될 수 있는 방법도 찾아보자며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가보라는 상담내용에서는 다소나마 공감이 가는 바가 있었다. 하지만 귀농이라는 큰 결정으로 인하여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도 있지만 염려 반 걱정 반으로 힘겨워하고 있는 나에게 보다 더 적극적인 상담의 자세가 다소 아쉬웠다.
다음날 염소를 대단위로 키우고 있다는 순창으로 견학을 갔다.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거의 모든 목장에서 막사를 지어서 가두어서 사료와 건초를 이용하여 키우고 있었다. 빠른 시일 내에 살을 찌우고 편리하게 키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관계자가 설명하였고 나에게도 이 방법이 아니면 아예 키울 생각을 하지 말라는 충고도 해 주었다. 많은 고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돌아오는 길에 어제 이사님께서 소개해준 분께 전화를 드렸더니 마침 시간이 되어서 만날 수가 있었고 묘목재배로 상당한 성공을 거둔 그분에게도 좋은 얘기와 정보를 들을 수가 있었다. 오암리 밭으로 돌아와서 듣고 온 좋은 얘기들을 떠올려보니 우선 5년 전 귀농을 위해 준비해 놓은 현재의 오암리 밭에서 약 20마리의 염소로 천천히 경험과 준비를 한 다음에 중리마을 山으로 향하는 게 어떨까 하는 몇 분들의 의견과 나의 마음이 같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주말에 잠시 아내가 수원에서 내려왔다. 처음으로 새로운 삶의 터전을 여기저기 같이 다녀보았다. 산을 둘러보고 마을 이장님이 소개해 준 집-물론 어느 정도 손을 본 후 들어가야 하지만-을 살펴보았고 진안읍내와 성수마을 여기저기를 돌아보았다.
아뿔싸, 너무 일렀다. 조금 더 있다가 확실히 정리가 된 다음에, 그리고 집도 수리가 된 다음에 보여주었어야 했는데. 아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지 않아도 걱정하던 눈치였는데, 직접 보더니 할 말을 잃었나 싶었다. 그리고는 한참 후에 한마디 했다. 자기는 그냥 수원에서 살겠다고. 그리고는 조용히 둘째 현우를 데리고 수원으로 돌아갔다. 당분간 혼자서 해야 될 거 같다. 뭔가를 보여주지 못하면 가족이 내려오는 것은 힘들어질 거 같다. 하지만 서두르지 말자. 천천히 무언가를 만들어가자. 다음 주부터는 울타리와 염소 녀석들 집을 만들어서 빨리 데리고 와야겠다.
주일이다. 아침 일찍 차광망 울타리작업에 필요한 돌멩이들을 개울에서 모아서 준비하고 있는데 마을 어르신께서 지나가신다. 성당에 함께 가기로 하고 아침 식사 후 같이 향하였다. 누구든지 죄 없는 자가 저 여인을 먼저 돌로 쳐라 하는 강론의 말씀에 세상에 저보다 더 명언이 있을까. 말없이 떠난 아내의 모습에서 철없고 무모한 나의 모습을 나만 모르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에 다시금 내 자신을 돌아본다. 어젯밤에 부모님 사시는 집의 주인분과 통화한 내용이 생각난다. 92세의 아버님께서 이제는 가끔씩 정신줄을 놓으실 때가 있다는 말씀에 어서 빨리 진안고원의 상쾌하고 평화로운 곳으로 모시고 와야지 하는 마음이 다시금 간절하다.
성당에 함께 간 오암마을 어르신 한 분. 진안과 처음 인연을 맺은 6년 전부터 지금까지 당신 자식처럼 아껴주시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의 정착과 성공적인 귀농을 위해 온 정성을 보태주시는 그분. 돌아오는 길에 아시는 분의 다른 마을에 들러서 염소 막사에 필요한 자재를 한 푼이라도 아끼라며 남들이 필요하지 않는 헌 자재를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게 직접 주인들을 만나서 나에 대해서 좋은 얘기들을 해주시며 도움을 청해주는 그분의 모습에 눈물이 날만큼 고맙고 닮고 싶고 꼭 성공해야지 하는 마음이 다시금 나를 다 잡게 한다.
근처 중길마을 어느 분의 소개로 부모님을 모실 좋은 조건의 집을 같이 보았는데 위치나 현재의 상태 등이 너무 마음에 드신다며 마치 당신 일처럼 함박웃음을 지으며 “오늘 주일은 알비노를 위한 날이구먼” 하시면서 이제는 모든 일을 주님께 의지하며 살아가라는 사모님의 말씀에서도 세상 살아가는 참맛을 느끼게 해 주는 너무 귀한 오늘 하루다.
친구를 새로 만났다. 어떻게 알았는지 부모님 사실 집을 둘러보는 데 도울 일이 없냐며 젊은 분이 찾아왔다. 수도와 따스한 보일러가 꼭 필요한 부모님인지라 제일 먼저 손봐야 할 부분이다. 워낙 손재주가 좋은 친구라 동네의 궂은일은 도맡아서 한단다. 같이 관촌까지 가서 필요한 자재를 사왔고 보일러 시공 기술자도 알선해 준다. 염소막사 짓는 데도 기술을 가르쳐주고 하루쯤 시간을 내서 도움도 주겠단다. 물론 귀한 시간과 훌륭한 기술제공의 대가를 그냥 지나칠 나는 아니지만 불과 며칠만의 판단으로 귀농의 어려움을 푸념한 나 자신이 한없이 못나게 느껴진다.
다음날 염소 막사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농장 주변작업이 시작되었다. 자재를 동네 후배와 직접 싣고 와서 뼈대를 세우고 차광망으로 녀석들이 따뜻하게 지낼 수 있게 정성껏 만들었고 나는 울타리를 세울 지주목과 차광망을 준비하였다. 자재와 필요한 연장 등 이것저것 준비해야 할 게 정말 한두 가지가 아니었고, 예상했던 비용보다 훨씬 많이 들 거라는 생각이 절실해진다.
중길마을에 우리 가족과 부모님께서 평화롭게 지낼 공간을 이웃들의 소개로 구입하였다. 약 2년 전에 새로 지은 조립식건물인데 실내외가 완벽하게 갖춰져 있다. 땅주인은 서울사람인데 근처에 있는 묘지 관리만 해주면 계속 거주하는 데 별 문제가 없을 거 같다. 워낙 오래 비어있어서 내부는 그야말로 엉망이다. 고원 진안의 추운 날씨 때문에 거의 모든 수도파이프와 난방시설은 얼어서 터져있었고 남아있는 음식물들과 냉장고속의 상태는 아침저녁으로 꼬박 3일을 청소하고 나서야 겨우 들어 설 수가 있었다. 정성을 다하여 쓸고 닦아서 점점 깨끗한 모습으로 변해가는 희망의 터에서 문득 창밖을 보니 새털구름 사이로 점점 해가 저물어간다.
마당에는 전에 지내던 할머니께서 심어 놓으신 딸기싹이 살짝 얼굴을 내밀고 있고 돌나물을 비롯한 이놈저놈 새 생명들이 싹을 틔우고 있다. 어머님은 아마도 이놈들에게 모든 사랑을 쏟을 테고 현우와 현준이 그리고 나의 권꽁(아내의 애칭)이 달콤한 딸기를 맛있게 먹고 있을 모습을 상상만 해도 흐뭇해진다. 내일 아침 다시 떠오를 해처럼 땅을 맞이하는 지금의 마음 그대로 평화가 늘 깃들길 소망한다.
드디어 수원에서 먼저 부모님을 모시고 내려왔다. 약간의 차멀미에 고생은 좀했지만 잘 견디어 주었다. 고생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준비한 공간에 도착한 순간 어머님은 또 나를 지금까지 힘들게 했던 말과 행동들이 나타난다. 고생을 사서하고 이리도 먼 거리에 언젠가는 당신들만 홀로 살게 될 것이라는 괜한 걱정을 미리 하고서는 다시 수원으로 가신단다. 며칠만 생활해보고서 그래도 마음이 편하지 않다면 다시 모셔다 드리겠다고 하고선 성수면사무소에 가서 정식으로 진안 군민임을 확인하는 주민등록 전입신고를 마쳤다. 집을 온전하게 만드는 데 보일러실과 보일러 교체 그리고 수도 연결 등 상당한 비용을 지출했는데 혹시 귀농빈집수리비로 지원이 되지 않느냐며 담당공무원에게 물었더니 수리하기 전에 신청절차를 거쳐야 했는데 지금은 이미 수리가 끝난 상태라 소급해서 지원이 안 된다는 말에 정말 나 자신의 한심함을 깨닫고 아직도 삶의 방식에서는 더 많은 경험과 배움이 필요함을 절실하게 느낀다.
두 가구가 귀농을 해서 집이 하나 더 필요한 상황이라 오암리 밭에 있는 컨테이너를 집으로 개조하는데 혹시 지원이 되지 않을까 해서 군청에 직접 들러서 문의했지만 법적으로 불가능이라는 힘 빠지는 말만을 듣고는 터벅터벅 군청문을 나섰다. 내일처럼 직접 나서서 챙겨주는 그런 사람들이 있었으면 좋겠다. 귀농 담당 부서에서는 가능할거란 말만 하고는 다른 부서를 들러보라는데 거기에서 또 처음부터 자초지종을 얘기해야 하고 그런 다음에는 법을 얘기하며 곤란하다는 말만 듣고…. 지원의 가부를 떠나서 정말 반가운 손님처럼 마음으로 맞아주었으면 하는 생각, 공무원사회를 내가 잘 몰라서 하는 무리한 바람일까….
봄비가 오후부터 내리기 시작했고 구름에 둘러싸인 마이산의 봉우리들은 점심을 걸러 텅빈 내 마음처럼 애처로워 보인다. 전화가 온다. 예전에 부탁한 산판일을 같이 해보자는 반가운 전화다. 마령에서 그분을 만나고 다음 주 월요일부터 시작하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내일부터 주말까지 울타리와 막사 작업을 끝내고 염소 녀석들을 맞이해야 한다. 돌아오는 길이 칠흑 같은 어둠이다. 언젠가는 이 어둠을 걷어내고 제주에서 아침마다 맞이했던 찬란한 태양처럼 눈부신 밝은 날이 곧 다가올 것을 나는 확신한다. 내일도 비가 온 댄다. 그래도 쉴 수 없다.
비를 맞으며 종일 울타리작업을 하였다. 비오는 날이 쉬는 날인 농촌에서 나는 하루를 덤으로 얻은 마음으로 여유롭게 일을 한다. 제주 올레길 마지막 코스에서 하루 종일 비를 맞으며 걸었던 생각이 난다. 배고픔과 추위에서도 늘 함께해준 카메라는 항상 나의 동반자였고 힘든 과정 뒤에 묵묵히 나를 반겨주는 제주에 함께 들어간 나의 애마는 편안함을 기꺼이 제공해 주었다. 이제는 염소들과 토종닭과 오리들은 내 아이들의 친구이며 우리 가족의 삶에 많은 부분을 제공해 줄 것이다. 평생 사람들만을 상대하고 접했던 생활을 접고 이 녀석들과 호흡하며 살게 되는 앞으로의 내 인생이 과연 어떻게 펼쳐질지 기대와 염려가 교차한다.
모처럼 맑고 청아한 아침이다. 부모님 아침을 챙기느라 조금 늦게 일을 시작한다. 산 중턱에서부터 실제 울타리를 치기 시작해서 점점 모양이 되어간다. 모든 준비와 과정 그리고 작업내용 전체를 혼자 하다 보니 힘들고 더디게 진행되어 가지만 그래도 하나하나 완성되어 가는 모습을 보니 내 자신이 참 대견해 보인다. 이런 마음과 모습을 아내가 알아주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에 잠시 쉬는 시간에 집에 전화를 하니 아내가 기대와는 달리 힘 빠지는 소리를 한다. 귀농의 결정을 혼자 했던 상황이라 늘 미안한 마음이었는데 이번에는 정말 화가난다. 내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는 마음을 가지면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그런 생각을 해달라고 수차례 부탁했건만 이거 또한 내 생각만일까. 잠시 포기라는 말이 생각난다. 울타리 지주목을 힘차게 망치질하던 손이 솜방망이 하나도 잡지 못할 만큼 힘이 빠진다. 아니다 하며 다시금 나를 다잡는다. 가장 가까이 있는 소중한 사람에게 기대와 믿음을 줄 수 있을 때까지 다시금 힘차게 망치질을 해야 한다. 2월 매서운 겨울 바닷바람 맞으며 팔뚝보다 훨씬 커다란 방어를 낚아 올리던 제주의 어부들처럼 내일 또 모진 바람이 불지라도 다시금 배를 띄워야 한다. 힘차게 망치질을 계속해야 한다.
드디어 울타리가 완성되어, 순창에 견학 갔을 때 안내를 해주었던, 평생을 흑염소와 함께 해오신 그분께 새끼를 밴 녀석들로 20마리와 수놈 한 마리를 며칠 후 데려오기로 약속하였다. 막사도 거의 완성되어가는 참이라 그리 많은 손이 가지 않는다기에 산판일도 시작하였다. 아침 5시에 일어나서 6시까지 출근하고 7시부터 본격적인 일을 시작하였다.
거의 70~80도에 가까운 심한 경사에서 계곡 깊숙하게 박혀서 쌓여 있는 낙엽송에 나중에 차에 싣기 편하고 다른 쓰임새를 위해 9자씩 분필표시를 하는 게 나의 일이었다. 낙엽이 수 년 동안 쌓인지라 바닥이 보이질 않아 쌓인 나무들 사이로 굴러 떨어지길 수차례. 제주의 바다만큼이나 웅장한 온산을 진동시키는 다섯 산판꾼들의 요란한 톱 소리는 밤새 낚아 올린 힘차게 퍼덕이는 바닷고기들을 먼동이 트기 한참 전에 경매장에 올려놓고 서귀포 앞바다에 울려 퍼지던 경매사들의 힘찬 목소리 그것이었다. 약 30분 만에 한 번씩 넣어 주어야하는 기름을 등에 한가득 짊어지고 적게는 수십 년에서 수백 년에 이르는 아름드리가 몇 초 만에 산의 판을 다시 짜려는 인간의 손에 의해서 울부짖으며 넘어져가는 모습에서 한동안 서글픔이 몰려들었다. 어릴 때 부엌에서 금불을 넣으며 힘들고 버거운 삶의 무게를 한탄하며 그냥 구전되던 옛 가락에 맞추어 혹여 누가 들을세라 가만 가만히 불러대던 내 어머니의 한 맺힌 가락이 지금 이 나무들의 울음소리와 너무나 닮아 있었다. 당장 그만두라고 말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의 생각. 이분들의 삶의 터전이고 나보다 훨씬 더 많이 생각하고 경험한 현명한 분들께서 심사숙고해서 내린 판단이겠지 하며 거기까지만 생각하기로 하고 다시금 잣대와 분필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이 일도 그리 오래 하지는 못할 것 같다. 표시가 필요한 낙엽송이 매일 있는 것도 아니고 항시 일을 하려면 톱을 사용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는데 정식으로 배우려면 강원도의 어느 곳에서 두 달 정도 과정을 거쳐야 한단다.
처음 일을 시작한 다음날 역시 별달리 일감도 없고 마침 염소도 다음날 들어오니 준비도 해야 되지 않느냐며 내일은 나올 필요 없단다. 다음 주에 불러주겠다고 반장님께서 약속하였다. 순간 본능적인 나의 감각이 작용하여 그러면 내일은 오전에만 같이 산에 올라 일하시는 모습을 잠시 스케치하고자 허락을 구했더니 한참 생각 후에 동료들과 상의하시더니 일에 방해가 되지 않는 조건으로 카메라의 산판스케치를 허락해 주었다.
험한 산세를 이리저리 그것도 항시 고속으로 돌아가는 톱을 들고서 등에는 한 가득 기름병을 짊어지고서도 마치 다람쥐가 나무들을 오가듯이 이동하는 산판꾼들의 모습을 카메라 가방 하나 메고서도 스케치 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30m 이상 되는 나무들이 어느 방향으로 넘어질지 모르는 상황인지라 항시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산판꾼들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고 촬영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항시 정해지고 고정되어진 피사체에서 긴장과 흐름을 가지고 계속적으로 움직이는 피사체를 시간의 흐름 속에 뚝 떼어내서 고정시키기는 정말로 어려운 일이었다. 세 시간 정도 정신없이 헤매다 새참 먹을 때쯤 인사드리고 산을 내려왔다.
다음날 드디어 염소22마리가 나와의 첫 만남을 가졌다. 수놈 한 마리와 나머지는 암놈들로 그중에서 10마리는 뱃속에 새끼가 들어있었다. 나름대로 울타리와 막사 등 준비를 한다고 했고 순창에서 오신 염소 박사님도 이만하면 방목을 해도 문제가 없겠다고 해서 서서히 나의 목장에 녀석들을 풀어놓았다. 가두리 막사에서만 지내던 녀석들이라 펼쳐진 공간에 적응하기 위해서인지 울타리 둘레를 줄지어 서너 바퀴를 뛰어다녔다. 녀석들이 다칠까봐서 가시 철망 대신 차광망을 사용해서 울타리를 만들었기 때문에 녀석들이 뛰어다니며 가끔 기댈 때 마다 울타리가 휘청거려서 조금은 걱정이 되었다. 잠시 후 박사님은 돌아가시고 관촌에 있는 축협에 가서 녀석들이 먹을 사료를 사러 잠시 농장을 비우고 한 시간 정도 후에 돌아와 보니 헉, 새끼를 가진 염소 10마리가 보이질 않았다. 울타리를 점검해보니 녀석들이 빠져나간 부분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근처에서 염소를 기르고 있는 분들에게 상황을 말씀드렸더니 첫날이라서 염소들이 다시 찾아오기는 힘들 거란 얘기를 하시면서 염소들이 겁이 많아서 아마 멀리는 가지는 않을 거란다. 순창의 염소 박사님께서도 근처 산에 무리지어 있을 거라고 귀띔해주었다. 다소 마음을 가라앉히며 서서히 산에 오르기 시작하였다. 30분쯤 올랐을까. 정말로 산중턱의 평평한 곳에 녀석들이 무리지어 풀을 뜯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였다. 여기에서 역시 또 한 번의 커다란 실수로 나는 약 1주일 동안 이 산을 10번도 넘게 천지사방 헤매야 했다. 발견 즉시 우회를 하여 녀석들을 아래쪽으로 서서히 몰고 내려와서 차후에 몰아넣을 때의 동선을 익혀서 확보했어야 하는데 그냥 그대로 녀석들을 산의 정상으로 몰았던 것이다. 산의 정상에서 녀석들은 다시 길을 잃었고 그 대가로 나는 찔레가시에 온몸을 긁혀가며 녀석들을 일주일동안 찾아다녀야 했다. 온갖 우여곡절 끝에 다시 녀석들을 울타리 안으로 몰아넣었고 나는 울타리 보강을 위해 대구까지 가서 결국은 가시 철망을 사용하여 녀석들이 감히 넘보지 못할 정도로 보강을 하였다.
막사 안으로 몰아넣은 다음 확인해보니 또다시 한 마리가 보이질 않았다. 박사님 말씀은 이 녀석은 아마도 산에서 새끼를 낳은 거 같다고 며칠 후에 다시 한 번 산에 올라 확인을 해 보라셨는데 아직까지도 녀석의 행방은 묘연할 뿐이다.
울타리 안으로 들어온 녀석들은 그 후에 가시철망에 찔리고 또 찔리고 하면서 점점 적응을 해나갔고 지금은 세 마리의 염소가 벌써 새끼를 다섯 마리나 낳아서 나와 우리 가족에게 신기함과 귀여움을 선사해 주었다.
귀농을 다시 생각해 보겠다며 단호한 태도를 보이던 아내가 며칠간 머무르며 그간의 나의고생과 잃어버린 염소를 찾는 과정 등을 때마침 옆에서 지켜보았다. 가족이 함께하지 않으면 아무리 성공적 귀농이라도 무슨 의미가 있냐며 다시 한 번 설득하는 나에게 못 이기는 척 마음을 열었고 최대한 빨리 진안으로 이사를 준비하기로 약속하였다. 인간만사 새옹지마라 했던가. 울타리를 넘어 나를 그렇게 힘들게 했던 녀석들이 돌아오면서 아내의 마음과 나의 마음을 하나로 만들어준 커다란 선물을 우리한테 벌써 해준 것이다.
이제 시작이다. 가족이 함께하고 좋은 이웃이 곁에 있다. 자연의 이치 그대로 따르며 녀석들을 돌볼 것이다. 최대한 사람의 손길을 멀리하고 녀석들만의 문화가 자연적으로 정착되도록 나의 개입은 되도록 줄이고자 한다. 조만간 토종닭도 방목하여 키울 것이다. 어릴 때 집에서 키우던 그때 그 모습 그대로 정말 건강한 닭과 계란을 만들어 낼 것이다.
가까이 있는 소중한 모든 사람들에게 나의 마음이 가득 담긴 작지만 희망과 꿈이 함께하는 나의 농장에서 만들어지는 이 자연의 선물을 대접하고 싶다. 진안고원의 매서운 삭풍의 가위질에 맥없이 흩어지던 목련꽃 봉우리가 환한 모습으로 다시 피어나듯 이처럼 듬직하고 평화로운 자연의 너른 품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나의 모습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대해본다.
첫댓글 길고 긴 여정이었네요. 눈이 아파 꼼꼼이 읽어보지 못했지만 간절함이 느껴지는 글이었어요. 늘 행복하시길
한번 뵙고 싶어요
들러주어서 감사합니다. 언제라도 놀러오시면 막걸리 한잔 대접하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귀농이 정말 생각처럼 쉽지않은일이네요 조그만 귀농지를 알아보다가 카페에 가입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
저도 내 놓으신 땅을 보고 여기까지 찾아들었네요...
염치없이 님의 귀농의 희노애락을 엿보앗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