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전도비

병자호란 때 청나라 태종이 조선 인조의 항복을 받고 승전을 자랑하기 위해 서울 송파구 석촌동에 세운 삼전도비(三田渡碑). /자료사진 2009-04-29
병자호란 (丙子胡亂)
1636년(인조 14)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청(淸)나라의 조선에 대한 제2차침입으로 일어난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싸움. 병자년에 일어나 정축년에 끝난 오랑캐의 침입이었다고 하여 병정노란(丙丁虜亂)이라고도 한다.
배경
1627년 후금(後金;뒤의 淸)의 조선에 대한 1차침입 때 조선과 후금은 형제의 맹약을 하고 두 나라의 관계는 일단락되었다. 이후 조선은 후금의 요구대로 중강(中江)과 회령(會寧)에서 무역을 하였는데 후금이 식량과 병선(兵船)을 강요하고 압록강을 건너 민가에 침입하는 등 약탈을 자행하자 조선의 여론은 척화배금(斥和非金)으로 기울어졌다. 또한 1636년 2월에는 용골대(龍骨大)·마부태(馬夫太) 등이 후금 태종의 존호를 조선에 알리고 인조비 한씨(韓氏)의 문상(問喪)을 위해 사신으로 왔는데 그들이 군신의 의를 강요하자 인조는 사신의 접견을 거절하고 국서(國書)를 받지 않았으며 사신을 감시하였다. 이것을 알아차린 사신들이 민가의 마필을 빼앗아 도주하다가 조선조정이 평안도관찰사에게 보낸 유문(諭文)을 빼앗아 본국으로 가져갔다. 이로 인하여 후금은 조선의 태도를 알게 되자 재차 침입을 결심하였다. 같은 해 4월 후금은 나라이름을 <청>으로 고치고 태종은 그 자리에 참석한 조선사신에게 왕자를 볼모로 보내어 사죄하지 않으면 조선을 공략하겠다고 협박하였다. 이러한 요구는 척화론이 강했던 조선에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에 청나라는 조선에 재차 침입하였다.
경과
1636년 12월 청군·몽골군·한군(漢軍) 도합 12만의 대군을 심양에 모은 청태종은 스스로 조선침입에 나섰다. 마부태의 부대는 곧바로 서울로 진격하였는데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이 백마산성(白馬山城)을 굳게 수비함을 알고 이를 피하여 밤낮을 달려 10여 일 만에 서울에 육박하였다. 청군이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침입한 것을 안 조선조정은 계속 도착하는 보고에 형세가 급박함을 알고 급히 관제를 전시체제로 전환하여 도성을 수비하게 하였다. 종묘사직의 신주와 왕손들을 강화도로 피난시킨 후 인조도 강화도로 향했으나 마부태의 부대에 의해 강화도로 가는 길이 끊기자 최명길(崔鳴吉)이 청군에게 술과 고기를 먹이며 시간을 지연시키는 사이에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다. 이때 성 안에 있던 군사는 1만 3000이었는데 이들에게 성첩(城堞)을 지키게 하는 한편 명나라에 원군을 청하였다. 당시 성안의 양곡은 겨우 50여 일을 견딜 수 있는 양에 불과하였다. 청군의 선봉부대는 심양을 출발한 지 보름 만에 이미 남한산성에 이르고 청태종은 다음해 1월 1일 20만의 군사로 성을 포위하였다. 포위된 성안의 조선군은 성을 빠져나가 적을 죽여 사기를 올리기도 하고, 각도의 관찰사와 병사들이 관군을 이끌고 올라오기도 했으나 목적지에 이르기도 전에 청군의 역습으로 패배하여 중도에서 좌절되자 남한산성은 절망적 상태가 되었다.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으나, 명나라는 나라 안의 유적(流賊) 때문에 원병을 보낼 처지가 아니었다. 이때 경기·호남·경상도 등지에서 의병이 일어났으나 큰 전과는 거두지 못하였다. 남한산성으로 오는 군사가 붕괴되고 성과 외부와의 연락이 끊기자 강화론이 일어났다. 주화파(主和派)와 주전파(主戰派)는 논쟁을 거듭하였으나 주전파 역시 난국을 타개할 방도가 있던 것이 아니어서 대세는 강화론으로 기울었다. 인조는 청군진영에 화호(和好)를 청하는 국서를 보냈으나 청태종은 국왕이 직접 성에서 나와 청의 군문(軍門)에 항복하고 척화주모자를 결박지어 보내라고 하였다. 조선은 이에 응하지 않았으나 이때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강화수비를 맡은 김경징(金慶徵)은 청군이 강화도에는 침입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가 기습을 받자 그제서야 화약과 총탄을 나누어 주었다. 청의 대군이 들어오자 김경징과 수비를 맡은 관료들이 도망하고 남은 사람들은 빈궁과 왕자, 싸움에 익숙하지 못한 대신들이었다. 청군은 성으로 들어와 대군과 대군부인 등을 잡고 약탈을 자행하였다. 강화도 함락이 확인되자 인조는 출성을 결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홍서봉(洪瑞鳳)·최명길·김신국(金藎國) 등이 적진을 오가며 항복조건을 제시하고, 청군 진영에서도 용골대·마부태 등의 사신이 성안에 들어와 조건을 제시한 끝에 강화협약이 이루어졌다. 협약내용은 조선은 청에 대하여 신(臣)의 예를 행할 것, 명과의 교호(交好)를 끊을 것, 조선왕의 장자와 차자 그리고 대신의 아들을 볼모로 청에 보낼 것, 청이 명을 정벌할 때 조선은 원군을 보낼 것, 사신의 파견은 명과의 구례(舊例)대로 할 것 등의 11개 조문이었는데 조선으로서는 힘겨운 부담이었다. 그러나 1663년 1월 30일 인조는 삼전도(三田渡)에서 청태종에게 성하(城下)의 맹(盟)의 예를 행하고 한강을 건너 서울로 돌아왔다. 청은 볼모들을 데리고 군사를 거두어 심양으로 돌아갔다. 청군은 철수하는 도중에 동강진(東江鎭)을 공격하였는데 항복조건에 따라 조선은 유림(柳琳)·임경업을 보내 청군을 도와 싸우게 하였다. 이로써 동강진은 17년 만에 붕괴되고 조선은 명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고 청나라에 복속하게 되는데, 이와 같은 관계는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게 패전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병조호란은 비록 한 달 남짓한 짧은 전쟁이었으나, 그 피해는 상당하였다.
결과
전쟁이 끝나자 전후 처리문제가 거론되었다. 하나는 장수나 관료의 공과에 관한 문제이며, 두번째는 많은 고아의 수양문제와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의 속환문제(贖還問題)였다. 전자의 경우 강화도 함락이 남한산성에서의 출성(出城)을 재촉하게 된 것이므로 강화도 수비를 맡았던 장수들의 책임을 묻게 되었다. 그리하여 강화도수비를 맡았던 김경징 등이 죽음을 당하거나 귀양보내졌다. 한편 강화성이 함락될 때 순절한 전직관료나 부녀자에게는 벼슬을 주거나 정문을 내려 그들의 절의를 찬양하였고 단을 설치하여 죽은 사람들을 제사하였다. 두번째 고아와 포로의 문제에서는 고아들을 돌보는 것도 문제었지만 더 심각한 것은 강제납치된 사람들의 속환문제였다. 특히 청군도 납치한 양민을 전리품으로 보고 속가(贖價)를 많이 받을 수 있는 종실이나 양반의 부녀를 많이 잡아가려 하였으나 대부분 잡힌 사람들은 속가를 마련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여기에다 순절하지 못하고 살아서 돌아온 것은 조상에게 죄를 짓게 된다고 하여 속환사녀(士女)의 이혼문제가 정치·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은 1845년(인조 23)에 환국하였으나 세자는 2개월 만에 죽고 봉림대군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바로 북벌정책을 추진한 효종이다.


병자호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