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매나무 말씀 나누기(10.09.27)
추석 명절이 지났지만 추석 연휴는 오늘이 마지막 날이다. 오늘만큼은 가는 연휴의 마지막 끝자락이라도 붙잡고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보고 싶지만 갈매나무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아침부터 바쁘게 서둘렀다. 오늘은 마침 내가 예배 순서를 맡은 날이다. 모임 장소인 달팽이 도서관에 도착하니 강현석, 허은신 내외가 일찌감치 점심 준비를 해가지고 나왔고 선창규, 이경남 부부, 하숙희님도 와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어 이정석, 정지연 부부가 도착했다. 오늘도 이문희, 김용분 부부가 늦다보다 했더니 어제 저녁 친지들과 전어와 대하를 먹고 밤중에 토사곽란이 나서 오늘 예배에 참석하기 힘들다는 연락이 왔다고 한다. 서로 추석 지낸 이야기를 나누고 예배를 시작했다.
‘고마운 사랑’을 부르고 돌아가면서 한 줄 기도를 드린 후 오늘 함께 나눌 본문인 마가복음 14장 3-9절을 봉독했다. 황재학님은 여는 말에서 1)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인의 행위에 대해 제자들의 반응과 예수의 반응이 왜 다른가? 2) 이 여인의 어떤 점이 예수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는가? 에 대해 생각을 나누어 보자고 했다.
선창규: 예수의 머리에 값비싼 향유를 부은 여인의 행위는 마가복음뿐만 아니라 마태와 요한복음에도 나와 있는 것을 보면 실제 있었던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단지 요한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에게 향유를 부은 여인이 마리아라고 나와 있으며 머리가 아니라 발에 부은 걸로 되어있습니다. 또한 향유를 부은 마리아를 나무라는 제자가 가롯 유다인 점, 또한 전후 맥락을 보면 예수의 죽음과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김정화: 예수에게 향유를 부은 마리아의 행위에 대한 기존 교회의 해석은 값비싼 물건을 바친 마리아의 행위에 대한 칭송이었습니다. 믿음의 크기가 얼마나 값비싼 물질을 바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했습니다. 물론 예수에게 향유를 바친 여인의 행위는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에 담겨 있는 마음을 헤아려 보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경남: 어디서 읽은 기억을 더듬어보면 당시 향유는 구하기 힘든 물건으로 시집가는 여인의 지참금의 의미를 갖는다고 합니다. 또한 우리나라 여인들이 시집갈 때 어머님이 구해주신 은장도처럼 자기를 지키려는 소중한 물건이라고 합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그 여인의 행위는 자신의 전부를 바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현석: 제 개인적으로는 오래 전에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많은 은혜를 받았던 구절입니다. 물론 오늘의 시점에서는 의미의 차이가 있지만 아직도 좋아하는 말씀입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생각하는 메시아 상은 저마다 달랐습니다. 베드로는 다윗과 같은 왕을 떠올렸는가 하면 유다는 무력으로 이스라엘을 로마제국으로부터 해방시킬 절대적인 카리스마를 가진 왕을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제자들은 저마다 예수에게서 다른 메시아 상을 떠올렸지만 같은 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기존의 메시아 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모든 이들에게 군림하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그런 왕을 기대했다는 것이죠. 한마디로 제자들은 예수가 말하는 하느님의 나라, 유대 민중이 바라는 하느님의 나라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인은 예수의 하느님 나라를 이해한 사람입니다. 예수의 메시지를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의 뜻과는 무관하게 예수를 자신의 뜻대로 해석하고 받아들이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선창규: 강현석님의 말씀도 일리가 있지만 그 때 예수가 말하는 하느님 나라가 어떤 의미인지를 명확히 해야만 오늘 본문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한 향유를 부은 여인이 제자들도 이해하지 못한 하느님 나라의 비전을 이해했다는 데 무슨 근거를 가지고 하는 이야기인지 알고 싶습니다.
강현석: 사람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전은 다 다릅니다. 어떠한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른 것이라 할 수 있는데 방법적인 차이일 수 있습니다.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인의 행위는 기존의 사고방식에 맞지 않습니다. 제자들의 나무람처럼 값비싼 향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어쩌면 당시 사회의 보편적인 일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여인은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이미 예수의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전을 이해한 것이죠. 여인이 이해한 예수의 상은 제자들이 생각한 군림하는 예수가 아니라 민중과 아픔을 함께 나누는 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값비싼 향유를 머리에 부어 그를 민중의 왕으로 받아들인 거죠.
이경남: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의 차이가 있지만 향유를 부은 여인은 성령의 힘으로 하느님 나라의 의미를 깨달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체험하고 깨달음을 얻어 예수의 말씀을 널리 전한 것처럼 말이죠.
김정화: 예수의 주변에 많은 여인들이 있었고 또 항간에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예수가 마리아와 결혼했다는 설도 있는데 향유를 부은 여인이 그 마리아는 아닌지 궁금합니다.
이정석: 확인된 사실은 아니지만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봅니다. 하느님 나라를 온전히 이해했다면 동지가 될 수 있는 거죠.
선창규: 초대 교회에서는 여성의 역할이 매우 컸습니다. 물론 지금도 교회에 가면 여성들이 대부분이지만 남성에 비해 하는 역할은 미미하다고 볼 수 있죠.
강현석: 원래 초대교회에서는 여성에 대한 차별이 없었으나 시간이 지나며 교회가 제도화 되면서 여성들이 배제되고 차별받기 시작했습니다.
황재학: 강현석님이 향유를 부은 여인은 예수가 말하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이해가 있었다라고 했는데 그 근거를 생각해 보니 당시 유대 사회에서 여성은 사회적 약자입니다. 또 복음서에 나오는 마리아 중에는 창녀의 신분을 가진 여인도 있는 것을 볼 때 그 여인도 밑바닥 인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 나라는 밑바닥 인생들의 소망이 담긴 나라입니다. 제자들이 그 여인의 행위를 나무란 것은 그들이 밑바닥 인생을 철저히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저마다 머릿속으로는 서로 다른 꿈을 꾸면서 예수 덕에 한 자리 차지해 보려는 제자들의 시각에서는 예수의 하느님 나라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거죠. 예수는 바로 그런 제자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제자들을 꾸짖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정화: 최근에 명품녀 사건이 있었습니다. 어떤 칼럼을 보니까 만약에 돈 많은 사람이 명품으로 온몸을 치장하고 자기를 과시 했다면 문제가 되지 않았을 수 도 있지만 그저 그런 사회적 신분을 가진 사람이 온 몸을 명품으로 치장하고 나왔을 때 사람들은 참지 못한다는거죠.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제자들이 향유를 부은 여인을 나무라는 장면과 유사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똑같은 문제가 발생해도 강자보다는 사회적 약자이기 때문에 더 많은 비난을 받는 예가 우리 사회에 많다는 거죠.
황재학: 제자들이 그 여인의 행위를 나무랄 수도 있겠죠. 향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제자들의 나무람은 언뜻 타당해 보이기도 합니다. 제자들에겐 값비싼 향유가 우선입니다. 아까운 거죠. 그러나 예수에게는 사람이 우선입니다. 그 여인의 처지가 안타까운 거죠. 제자들은 그 여인의 형편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 여인이 고통스러운 삶은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는 그 여인의 고통스러운 삶에 눈길을 준 겁니다. 만약에 부유한 사람이 예수에게 향유를 부었을 때도 제자들이 이 여인에게 한 것처럼 나무랄 수 있었을까? 아니면 부유한 사람이 예수에게 향유를 부었을 때에도 예수가 이 사람을 기억하라고 했을까요? 아닙니다. 따라서 예수는 향유를 부은 행위 보다는 그 여인의 처지에 주목을 했던 거라고 봅니다. 어려운 처지에도 귀한 향유를 바칠 수 있는 그 여인의 마음을 본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이 여인은 하느님 나라의 비전을 이해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강현석: 향유를 부었다는 행위는 여인이 가지고 있는 전부를 바친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황재학: 저는 바친다라는 의미를 ‘재물을 바치다’, ‘몸을 바치다’라는 의미보다는 ‘참여하다’라는 의미로 바꾸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느님에게 재물과 몸을 드린다기 보다는 하느님 나라 운동에 참여하는 것이 더 올바른 뜻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선창규: 본문 말씀은 지금까지 예수의 가르침과는 모순된다고 생각합니다.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라는 제자들을 향해 ‘왜 그를 괴롭히느냐’ 라고 말씀하시는 모습은 어딘지 이상하다고 여겨집니다. 성경을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려는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파악하지 않으면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황재학: 어떻게 보면 제자를 나무라는 예수의 행위가 모순되어 보일 수 있지만 예수는 제자들의 마음과 여인의 마음을 꿰뚫어 보신 거죠.
강현석: 이명박 정권이 서민 정치를 한다면서 나눔을 강조하고 있지만 나눔과 같은 뜻을 지닌 분배를 강조하면 빨갱이라고 몰아갑니다. 비슷한 의미지만 나눔이 개인적이고 윤리적인 차원의 문제라면 분배는 사회정의적인 차원의 문제라고 할 수 있죠. 어떻든 기존의 지배체제 하에서 나눔은 한계가 있는 거죠. 테레사 수녀의 예에서도 확인되듯이 그러한 행위는 오히려 지배체제를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는 기존 체제에서 나눔의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던 거죠. 그런 점에서 예수는 우리에게 기존의 삶의 양식을 버리고 새로운 삶의 양식(가치)를 찾으라고 하십니다.
이경남: 옥합을 깨뜨린다는 것은 자신의 전부를 예수께 내어 놓는 것입니다. 즉 기존 가치에 물들어 있는 자아를 버리는 것입니다. 물질에 대한, 권력에 대한, 명예에 대한, 성공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이러한 거짓 자아에 이끌려 사는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정지연: 오늘 본문의 전후 맥락을 살펴보면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을 3차례나 예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예수의 죽음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인은 예수의 죽음을 알아차렸습니다. 예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이 결국 예수를 죽음으로 내몰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거죠.
하숙희: 아멘
허은신: 기존에 가지고 있는 것을 뒤엎지 않고는 새로운 세계에 들어갈 수 없는 거죠. 예수의 하느님 나라는 바로 그런 나라인 것 같습니다. 또 이 시간에 예수를 통해 자신의 야망을 이루려 한 제자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처럼 생각되었습니다.
강현석: 남성의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힘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이룰 수 없습니다. 부드럽고 포용적인 여성의 힘이 필요합니다.
황재학: 오늘 우리도 제자들처럼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있지나 않은지 돌아보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의 하느님 나라는 기존의 질서나 가치와는 다른 새로운 질서와 가치로 이루어지는 나라이며,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인처럼 하느님 나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랜 시간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오늘 있을 예정이었던 추석맞이 윷놀이는 윷을 준비하기로 한 이문희님의 갑작스러운 병으로 다음 주로 연기하기로 하고 10월 모임에는 둘레길 산행 예배를 드리자는 의견을 나누고 황재학님의 기도로 모든 순서를 마쳤습니다. 이어 점심식사 시간에는 강현석님이 준비한 돼지등뼈찜과 어머니가 직접 산에서 뜯은 고사리나물, 총각김치로 모두가 흐뭇한 점심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다 1시40분경에 헤어졌습니다. 푸른 하늘이 가을이 성큼 다가왔음을 알려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