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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호주다 (This is Australia)
글 - 윤필립
고대 그리스...
‘미지의 남쪽 땅’ 이 호주?
인류역사상, 남쪽 바다에 호주대륙이 있을 것이라고 맨 처음 상상한 사람들은 누구일까? 혹시 이웃국가들인 동남아시아나 중국 사람들일까? 아니면 인도나 아랍국가 사람들일까? 그렇지 않다. 정답은 고대 그리스인이다.
2600년 전, 그리스 사람들은 문헌에다 ‘Terra(땅) Australis(남쪽) Incognita(미지)’라는 단어를 남겼다. 그리스어로 ‘미지의 남쪽 땅’이다. ‘오스트레일리아’ 국명도 거기에서 생겨났다.
그렇다면 그리스인들은 왜 그런 상상을 했을까? 그들은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They theorised that the earth was round). 지구무게의 균형 때문에 남쪽에도 유럽 크기의 대륙이 있어야한다고 믿었던 것.
# ‘황금 궁전’과 ‘여인 왕국’
그들의 상상력은 황금 궁전, 전설의 새(fabulous bird), 여인 왕국(kingdom of women) 등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천동설’을 믿었던 중세에는 미신으로 억압당하면서 묻혔다. 그러나 15세기 즈음에, 유럽에서 항로개척 붐이 일면서 다시 각광받았다.
마침내 ‘미지의 남쪽 땅’을 맨 처음 밟은 사람은 유럽 출신 탐험가들이었다. 문헌에 의하면 그리스, 아랍, 청나라, 인도에서도 자바 남쪽의 바다를 궁금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여러 나라에서 ‘보물섬’ 같은 소설이 유행했고.
# 호주대륙 탐험의 역사
1453년 동로마제국의 멸망(중세의 끝)으로, 동서교역의 통로를 잃은 유럽은 나침판을 활용한 항해술의 발달 덕분에 항로개척에 나설 수 있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먼저 움직였다. 황금과 향신료를 찾아 나선 것.
스페인 출신 알베로 맨다나(1567)와 페르난데스 퀴오스(1605)가 뱃머리를 남쪽 바다로 돌렸으나 호주에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스페인과 경쟁하면서 포르투갈 탐험대가 호주 동부해안에 도착했지만 황금이나 향신료를 발견하지 못했다.
대신 모래땅, 파리 떼, 벌거벗은 야만인, 그리고 몇 가지 기이하게 생긴 동물들을 만났을 뿐이다(They found no gold or spice, only sand, flies, naked savages and a few weird animals).
# ‘신 네덜란드’의 탄생
비슷한 시기(1606)에, 네덜란드 탐험대가 호주에 도착했다. 결과는 똑같았다. 그러나 그들은 ‘신 네덜란드(New Holland)’라는 지명을 남겼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탐험대도 ‘에스프리투 산토’와 ‘주이드랜드’라는 지명을 남겼지만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1642년, 네덜란드 출신 아벨 타스만은 호주대륙 아래쪽을 탐험하다가 괜찮아 보이는 섬 하나를 발견했다. 물이 풍부하고 숲이 울창한 섬이었다. 그는 섬을 떠나면서 ‘밴 디맨즈랜드’라는 이름을 남겼다. 오늘의 타스마니아다.
# 당파싸움에 몰두한 조선
그렇게 ‘미지의 남쪽 땅’은 100년 이상 유럽인의 기억에서 지워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조선(영조, 정조)이나 청나라(건륭 황제), 일본 막부(幕府, 군사정부)가 남쪽 바다에 관심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특히 조선과 일본은 치열한 당쟁에 시달렸다.
결국 행운은 후발주자인 영국에 돌아갔다. 그러나 영국도 호주대륙을 포기할 뻔했다. 1688년과 1689년, 서부호주에 표류한 영국 출신 해적두목 윌리엄 댐피어가 쓸모없는 땅으로 식민지성에 보고했기 때문이다.
# 제임스 쿡은 스파이였다
제임스 쿡은 지혜롭고 성실한 탐험가였다. 그러나 하층민 출신이어서 신분상승욕구가 아주 강했다. 출세를 위해서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었던 것. 대영제국은 그를 유효적절하게 활용했다. 탐험가와 스파이, 그리고 비밀임무 수행자로.
그는 하와이 원주민들에게 살해당하기(1779) 전까지 지구를 세 바퀴나 돌면서 대서양과 태평양의 해도(海圖)를 그린 항로개척의 선구자였다. 그러나 대영제국 해군과 식민지성은 그에게 항상 비밀임무(secret mission)를 부여했다.
1768년, 영국 해군은 쿡 선장에게 타히티 섬으로 가서 금성의 자오선 통과를 관측하도록 했다. 그러나 진짜 임무는 따로 있었다. 식민지성에서 ‘미지의 남쪽 땅’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여부를 확인하도록 비밀임무를 부여한 것.
# 호주 가치 발견한 캡틴 쿡
귀족이 되고 싶었던 쿡 선장은 위험한 항해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첫 번째 항해(1768-71)에서 뉴질랜드 해안을 일주한 다음, 호주 동부해안을 탐사해서 최초로 정확한 해안선을 지도에 그렸다. 그러나 ‘미지의 남쪽 땅’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는 귀국하는 도중에 우연히 호주 동부해안을 지나갔다. 1770년 4월, 시드니 동부해안에 도착한 쿡 선장은 호주대륙의 가치를 알아차렸다. 윌리엄 댐피어가 발견한 서부해안과는 달리 척박한 땅이 아니었던 것.
그는 영국 왕 조지3세의 이름으로 호주 동부지역을 대영제국의 속령(屬領)으로 선포했다. 유니언잭을 게양한 다음, 뉴사우스웨일즈(NSW)라는 지명까지 붙였다. 그는 귀국해서 귀족신분을 얻었고, 영국인 중에서 유일하게 ‘캡틴’이라는 영예로운 타이틀을 얻었다.
# 죄수유형지가 된 호주
대영제국이 호주대륙을 얻은 것은 위대한 항해가 캡틴 쿡 덕분이다. 그러나 ‘미지의 남쪽 땅’이 죄수유형지가 된 사연은 따로 있다. 식물학자 조셉 뱅크스와 식민지성 장관(내무장관 겸임)이었던 로드 시드니 때문이었다. 그의 이름이 시드니 지명이 됐다.
캡틴 쿡의 첫 항해에 동행했던 뱅크스는 호주 동부해안에 도착해서 생전 처음 보는 기이한 식물들을 발견하고는 “보타니!(식물, Botany)"라고 소리 질렀다. 시드니공항 근처가 ‘보타니베이’로 불리게 된 이유다. 그는 자신의 이름에서 따온 ‘뱅크시아’ 등 수많은 호주 토종식물의 이름을 붙였다.
그런 뱅크스가 1779년 영국 하원에서 “보타니베이에 죄수 유형지를 겸한 식민지를 건설하자”고 주장했다. 기발한 발상이었다. 1718-1783년 동안 5만 명의 죄수를 미국으로 보냈던 대영제국은 미국의 독립으로 감옥이 넘쳐나는 상황이었다.
# 애버리진 허락도 없이
로드 시드니 장관은 무릎을 쳤다. 식민지와 죄수유형지, 그야말로 ‘일석이조(One stone two birds)였기 때문이다. 그 다음은 일사천리, 퇴역 해군장교 아서 필립을 선장으로 임명하여 11척의 ‘죄수선단(The First Fleet)’을 만들게 했다.
2600년 전, 그리스인들이 황금과 아름다운 여자들이 넘치는 나라로 상상했던 ‘미지의 남쪽 땅’은 그렇게 죄수유형지가 됐다. 그러나 그 누구도 4만년 동안(12만년으로 수정하는 중) 호주대륙의 주인이었던 애버리진에게 허락을 구하지 않았다.
<예고> 이런 식으로 1788년부터 1868년까지 80년 동안 162,000명의 죄수들이 호주로 유배됩니다.
다음주에는 파라마타로드와 윈저 다리를 건설한 죄수노동자의 얘기를 소개할 예정입니다.
파라마타 로드... 죄수노동자의
피와 땀, 그리고 눈물
'이것이 호주다(This is Australia)' 시리즈를 연재하면서 무척 많은 이메일을 받는다. 한국과 미국, 중국 청뚜에서도 온다.
시리즈를 읽으면서 호주를 새롭게 알게 됐다는 의견도 있고, 호주가 너무 어둡게 그려져서 불편하다는 불만도 있다.
호주역사에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기 때문이다. 특히 식민지 개척시대의 죄수(convicts) 잔혹사는 호주 내면에 깊은 상처(trauma)를 남겼다. 그래서인지 호주에 우울증환자와 술중독자가 많고, 자살률 또한 높다.
호주는 분명히 복 받은 ‘럭키 컨트리’다. 그러나 '지상의 마지막 파라다이스'라고 얘기하는 건 지나친 과대평가다. 자칫 호주라는 실체는 사라지고 허위(虛僞) 이미지만 남을 수 있다. 그런 이미지에 중독 된 사람은 호주의 맨얼굴이 아주 불편할 것이다.
# '내안의 타자(他者)'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는 것은 사람도 마찬가지다. 나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내가 있다. 그런 측면에서 나는 1인칭이면서, 동시에 3인칭이다. 철학에서는 그 3인칭을 ‘내 안의 타자(他者)’로 정리한다.
우리는 가끔씩 내면에서 울리는 익숙한 목소리를 듣는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바로 ‘내 안의 타자’다. 혼자 있으면서도, 스스로 부끄럼을 느끼는 이유도 ‘내 안의 타자’가 나를 넌지시 바라보기 때문이다.
사르트르 철학은 그런 상태를 ‘눈초리 이론’으로 정리했다. 독일 관념철학자 헤겔의 공-존재(共-存在) 이론을 발전시킨 철학이다. ‘그대(The other) 그리고 나’... 공-존재를 증명해주는 논거다.
# 돌아오기 위한 떠남
호주도 마찬가지다. 호주 안에 이런저런 모습의 호주가 너무나 많다. ‘행복한 호주’와 ‘우울한 호주’가 뒤섞인 것. 특히 호주는 계몽주의로 열린 18세기의 사생아 같은 존재여서, 짙은 그림자가 드리울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돌아오기 위해서 떠난다. 머무는 방식으로의 떠나가는 사람도 있다. 나는 ‘행복한 호주’를 만나기 위해서 호주 백인역사 223년을 꼼꼼하게 답사했다. 어둔 역사를 극복하고 복지국가로 성정한 ‘21세기의 호주’를 만나기 위해서.
# 223년 전의 시드니 항구
1787년 5월 13일, 11척의 죄수선단(The First Fleet)이 영국 포츠머스 항구를 출발했다. 대서양과 태평양을 건너는 15,000마일의 대장정 끝에 새로운 식민지 NSW의 포트 잭슨 항구(시드니)에 도착했다.
영국을 떠날 당시, 아서 필립 선장이 이끈 선단의 총원은 1,403명이었다. 그러나 호주에 도착한 인원은 1,332명이었다. 그중에 죄수 숫자는 732명(여자죄수 189명 포함)이었다. 항해 도중에 64명이 사망하고 7명의 아기가 태어났고.
# 80년 동안 16만5천명
영국에서 호주로 죄수를 보낸 기간은 정확하게 80년이다. 1868년 1월 10일, 서부호주에서 마지막 죄수를 받은 것. 그때까지 호주에 도착한 죄수의 총계는 165,000명이다. 그중에는 직전 수상들인 존 하워드와 캐빈 러드 수상의 조상도 포함된다.
현재 호주 인구의 약 20% 정도가 죄수의 후예들이다. 그들은 오랫동안 그런 사실을 부끄럽게 여기면서 숨겼다. 그러나 건국 200주년이었던 1988년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죄수조상 찾기에 나선 것. 왜 그랬을까?
죄수 조상들이 호주를 건설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로열호주역사학회> 돈 왓슨 교수는 “죄수 조상은 더 이상 부끄러운 게 아니다. 반대로 첫 번째 죄수선단에 포함됐던 조상은 가문의 자랑이 됐다”고 말했다.
# 식민지 건설 출정식
‘호주의 첫 동네’ 록스(The Rocks)에 유니언잭을 게양한 아서 필립 선장은 NSW 초대 총독으로 취임했다. 총독 임명장은 영국을 떠나기 전에 로드 시드니 식민지성 장관으로부터 받은 상태였다. 그의 이름이 시드니 지명이 됐고.
1788년 2월 3일, 리차드 존슨 목사의 인도로 첫 번째 예배를 가졌다. 필립 총독은 종교를 거짓된 신화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기독교를 죄수 통치의 수단으로 활용할 요량이었다.
그는 2월 7일에 거행된 ‘NSW 식민지 건설 출정식’에서도 존슨 목사에게 기도를 요청했다. 그러나 필립 총독은 식민지 건설이 최우선이었고, 존슨 목사는 죄수들을 회개시켜서 신앙심 깊은 식민지를 만들겠다는 꿈을 꾸었다.
# 인구 1,332명의 나라
호주는 세계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낮은 나라 중의 하나다. 1평방Km에 2.7명이 살고 있는 것. 참고로 한국은 486명이다. 1788년의 호주 인구가 1,332명이었으니 말 그대로 텅 빈 나라였다.
제1선단이 도착한 후, 무려 2년 5개월 만에 제2선단이 도착했다. 그나마 악천후로 배 한 척이 침몰하여 267명이나 사망했다. 1790년 6월 26일에 도착한 제2선단의 죄수노동자는 759명이었다.
# 굶주림에 시달렸던 죄수들
아무리 인구가 적어도 엄연히 나라였다. 식민지 관리나 군인, 성직자는 노동을 하지 않았다. 결국 죄수들을 독려해서 집도 짓고 도로도 건설했는데 모든 게 여의치 않았다. 기술자나 숙련공이 거의 없는 상태였고 장비 또한 부족했다.
더욱이 제2선단이 일정보다 늦게 도착하여 식량부족이 심각했다. 오죽하면 굶주림을 참지 못한 죄수가 식량을 훔친 죄로 교수형을 당했을까. 그건 관리나 군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총독이 저녁식사에 초대해도 자기가 먹을 빵을 지참해야했다,
# 죄수에게 분배한 농토
아서 필립 총독은 열심히 일한 죄수를 사면하고, 토지를 분배해서 농사를 짓도록 했다. 그럴 즈음에 파라마타 지역(당시 명칭은 로즈 힐)에서 기름진 땅이 발견됐다. 더욱이 강을 따라서 이동할 수 있어서 더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제임스 루스(James Ruse)라는 죄수는 영국에서 농사를 지은 경험이 있었고 성실했다. 총독은 그에게 파라마타 지역의 농토를 주어서 식량난을 해결하도록 당부했다. 그는 기대에 부응했다. 명문학교 ‘제임스 루스 하이스쿨’은 그의 이름에서 따왔다.
# 파라마타 로드 건설
NSW 식민지 건설 초기에, 배로 갈 수 있는 파라마타와 윈저는 중요한 농토였다. 그래서 지금 CBD에 해당하는 시드니 시내 다음으로 타운이 조성됐다. 그러나 배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었다.
마침내 마차가 다닐 수 있는 도로 건설이 시작됐다. 그래서 호주에서 가장 오래된 도로가 파라마타 로드와 올드 윈저로드다. 시드니 시내의 도로도 건설됐다. 이렇듯 필요에 따라 도로를 건설하다보니 지금도 구불구불한 길이 많다. 도로의 폭도 좁고.
“해피 크리스마스!” 해마다 이 즈음에 듣는 '7월의 크리스마스(Christmas in July)' 인사다.
호주의 겨울은 6-8월 석 달이다. 그중에서 7월이 겨울의 절정이다.
산이 높은 지역에서는 겨울 내내 눈발이 흩날린다.
그렇다면 정확하게 어느 날이 ‘7월의 크리스마스’일까?
그 질문의 답을 얻으려면 아이리시 선술집(Irish pub)에 가면 된다.
십중팔구 “7월 한 달 중에서, 당신이 원하는 하루를 선택하면 된다”라는 답변을 들을 것이다.
나는 해마다 ‘7월의 크리스마스’를 즐긴다. <쉰들러 리스트>를 쓴 호주 작가 토머스 커닐리 덕분이다.
1991년 7월 어느 날, 나를 아이리시 선술집으로 데려가서 ‘7월의 크리스마스’를 소개해주었다.
아이리시인 그와 함께 곤드레만드레! 취했고.
호주에서 ‘7월의 크리스마스’를 즐기는 사람들은 주로 아일랜드 이민자들과 가톨릭 신자들이다. 왜 그럴까?
그들이 눈 덮인 모국의 겨울을 그리워하면서 ‘7월의 크리스마스’를 만들었고, 그들 대부분(89%)이 가톨릭 신자이기 때문이다.
호주에서 만나는 백인 세 명 중의 한 명은 아일랜드 혈통이라는 통계가 있다.
혹자는 그보다 많다고 말한다(some suggest well beyond that). 2
006년 인구조사 결과를 보면, 호주에 거주하는 아일랜드 이민자는 180만 명이다. 호주 인구의 9.1%.
그러나 호주에 거주하는 아이리시 후손들(Irish descents)의 숫자는 호주 인구의 30%(660만 명)가 넘는다.
이유는 영국에 거주하던 많은 아이리시가 호주로 이민 왔고, 아이리시에 대한 인종차별 때문에 출신을 숨기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 아일랜드 이민자 통계
호주 인구 중에서 아이리시의 비율을 가늠할 수 있는 통계가 있다.
2006년 종교 관련 인구조사 결과다. 호주 인구의 64%가 크리스천이라고 답변했다.
참고로, 1년에 한 번이라도 미사/예배에 참석하는 비율은 열 명 중 채 한 명도 안 되는 7.5%다.
크리스천 중에서 로만 가톨릭이 26%, 영국국교회(Anglican, 성공회) 19%, 연합교단 5.7%, 침례교회 1.6% 순이고,
그 외에 소수 크리스천 그룹이 있다. 불교와 이슬람교는 2.1%, 1.7%로 집계됐다.
<로열역사학회> 소비언 맥휴 교수는 “가톨릭 신자의 대부분이 아이리시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아이리시 중에서 비신자까지 감안하면 호주 국민의 30% 정도가 아이리시 혈통”이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 ‘하얀 깜둥이’ 아일랜드인
영국은 1천년 가까이 아일랜드를 속국이나 식민지로 지배했다.
그러다보니 영국인의 주류인 앵글로-색슨 계통이 아이리시 혈통을 업신여겼다.
오죽하면 아일랜드 국민들이 스스로를 ‘하얀 깜둥이(White Negro)'라고 자조했을까.
인종과 종교가 다르기 때문이다. 약 2500년 전부터, 영국과 아일랜드에 농경민족인 켈트족이 정착했다.
그로부터 1000년쯤 후에(AD 5세기) 게르만족의 일파들인 앵글로-색슨족이 켈트족을 밀어내고 영국을 차지했다.
끊임없이 아일랜드를 침략했고.
아일랜드는 5세기 경에 세인트 패트릭이 전해준 로만 가톨릭을 국교로 삼았다.
그러다가 1536년 헨리 8세가 아일랜드를 정복한 다음 영국국교회를 받아들이라고 강요했지만
아일랜드 국민은 끝까지 거부했다.
# 천국은 멀고 영국은 가깝고
영국과 아일랜드는 지정학적으로 이웃국가다. 그러나 끊임없이 으르렁거렸다.
인구가 적은 아일랜드가 대부분 침략과 착취를 당했다.
오죽하면 아일랜드 사람들이 “천국은 너무 멀고, 영국은 너무 가깝다”고 한탄했을까.
그런 앙숙관계가 호주까지 이어졌다.
1791년, 아일랜드에서 첫 번째 죄수선단이 도착한 이래 아이리시들은 노예취급을 받은 것.
학교나 직장에서도 그들을 무시하는 풍토가 있어 ‘아이리시 인종차별 금지(Anti-Irish racism)’ 캠페인까지 벌여야 했다.
# 모욕적인 아이리시 조크
호주에 ‘아이리시 조크’가 수도 없이 많다.
말이 조크지 대부분 모욕적인 조롱이다.
가뜩이나 영국인에 대한 적개심으로 가득 찬 아이리시들이 참다못해서 대들기라도 하면
“저 친구들은 툭하면 화를 낸다”고 빈정거린다.
“불끈한다”라는 관용구가 “Get one's Irish up"이다.
실제로 싸움이 벌어졌다하면 십중팔구 아이리시였다.
호주 백인역사 223년 중에서 ‘트러블 메이커’ 원조가 아이리시다.
1804년에 발생한 ‘카슬 힐 봉기’와 ‘툰가비 봉기’의 주동자도 아일랜드 출신이었다.
# 아이리시는 트러블 메이커?
1855년 멜번에서 출생한 네드 캘리(Ned Kelly)는 동족인 아일랜드 이민자를 괴롭히면서
그악스럽게 착취하는 지배계급에 저항했다.
그는 은행을 털어서 가난한 아이리시에게 나누어주었다.
로빈 후드를 닮은 의적(義賊)이었다.
그러나 도피하는 도중에 경찰을 죽이는 잘못을 저질렀다.
1880년, 25살에 교수형을 당하면서 “인생은 다 그런 것(Such is life)"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는 시대가 낳은 사회적 범죄자였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호주 트러블 메이커 계보는 다음과 같다.
1800년대 아일랜드 죄수노동자(Convicts)-1850년대 중국인 노다지꾼-2차대전 후에 온 남부유럽 출신 이민자
(주로 이탈리아와 그리스)-동서 붕괴 후에 온 동부유럽 이민자-1970년대 베트남 난민-1980년대 중동국가 이민자.
# 가톨릭 신자는 무지몽매?
1800년 즈음의 식민지 개척시대에 자행된 ‘죄수노동자 잔혹史’는 호주의 부끄러운 역사다.
그런데 죄수노동자 중에는 아이리시들이 많았다.
대부분 배고픔을 참지 못해서 감자를 훔친 죄수이거나 영국에 대항하면서 독립운동을 벌인 정치범들이었다.
‘대서양에 떠있는 녹색 섬’ 아일랜드는 기름진 농토와 좋은 기후조건을 갖고 있다.
그러나 국토 대부분을 영국인 지주들이 차지해서, 자칫 흉년이라도 들면 굶어죽는 사람이 부지기 수였다.
‘감자 잎 마름 병’이 돌았던 해는 2백만 명이 아사했다.
그러다보니 종교에서 위안을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호주로 끌려온 죄수노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계몽주의 세례를 받은 영국 이민자들은 “저들은 미신에 가까운 가톨릭 신앙을 맹신하면서
비참한 생활을 참아내는 무지몽매한 인종”이라고 비아냥거렸다.
# 아일랜드 출신 예술인들
<걸리버 여행기>의 조너던 스위프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제임스 조이스,
<고도를 기다리며>의 사무엘 베케트, 천재작가 오스카 와일드 등이 아일랜드 출신이다.
그뿐이 아니다. 베케트를 포함하여 버나드 쇼, 윌리엄 예이츠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세계인의 애창곡이 된 ‘대니 보이(아, 목동아)’ 등의 수많은 켈트민요가 있고,
활발하게 ‘빈곤퇴치운동(Make poverty history)’을 펼치고 있는 세계 최고의 그룹 U2도 아일랜드 출신이다.
비틀즈 멤버 전원의 조상도 아이리시고.
아일랜드 국민들은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영국에게 당하면서 지냈지만 전쟁이 나면 수많은 청년들을 전쟁터로 보냈다.
살아 돌아올 기약이 없는 아들을 보내면서 늙은 아버지가 부른 별리(別離)의 노래가 ‘대니 보이’다.
“저 들꽃들이 모두 시들어 가는 계절에 /
네가 살아 돌아왔을 때 /
그 때 내가 죽었거나, 죽어 간다면 /
너는 내가 누워있는 곳을 찾아와서 무릎 꿇고 /
날 위해 작별인사를 해주겠지 /
아, 목동아, 사랑하는 내 아들아”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홀로 숲길을 걸어가는 어느 철학자의 물음으로 들린다.
아니면 종교에 심취한 사람의 화두(話頭)나 기도제목으로 여겨지는 근원적인 질문이다.
그러나 이 질문은 평생 가난하고 고독하게 살았던 화가 폴 고갱이 죽기 1년 전에 그린 그림의 제목이다.
당시, 그의 나이 54세였다.
증권회사에서 근무하다가 35살에 화가의 길로 접어든 고갱은 정식으로 그림공부를 할 기회가 없었다.
그건 빈센트 반 고흐도 마찬가지였다.
고흐는 목사가 되기 위해서 신학을 공부했고 광산마을에서 전도사로 활동했다.
30살에 화가로 변신하여 미친 듯이 그림을 그리다가 37살에 권총으로 자살했다.
화가활동 7년 동안 딱 한 점의 그림이 팔렸고.
1888년 어느 날, 고갱은 고흐가 혼자 살고 있는 프랑스 남부의 아를르로 갔다.
두 사람은 ‘노란 집(Yellow House)’ 이라고 이름 붙여진 화실에서 수많은 그림을 그렸고 그림에 관한 토론을 벌였다.
내성적인 고흐와 자존심이 강했던 고갱은 수없이 부딪쳤다.
결국 짧은 동거 끝에 고갱은 떠났고, 고흐는 귀를 잘랐다.
그 후 1년 동안, 정신병원에 머물렀던 고흐는 고갱이 떠나간 방에 놓여있던 의자를 그렸다.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의자를.
형용모순이지만, ‘슬픈 행복’이라는 게 이런 것일까.
고독했던 두 화가의 동거는 비극적으로 끝났지만, 그들은 1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생애 최고의 행복을 누렸다.
그렇다. 가난하지도, 슬프지도 않으면 무엇으로 그림을 그리겠는가?
# 20세기 인류학에 영감을 준 폴 고갱
고흐의 자살 소식을 접한 고갱이 말했다.
“나는 고흐에게 빚을 졌다. 내가 괴로울 때,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서 고독을 추슬렀다”고.
바로 이듬해에, 그는 다음해 타히티 섬으로 떠나면서, <에코 드 파리>지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아주 소박한 그림을 그리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문명에 오염되지 않은 섬으로 간다.
먼저 나의 정신세계를 뜯어고치겠다.
그런 다음, 섬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마음에 떠오르는 것들을 어린아이처럼 그리겠다.”
그의 인터뷰는 20세기 유럽 문명사에 큰 반향을 불러왔다.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내려오던 문명(유럽)과 야만(비유럽)의 2분법적 구분이 무너진 것.
고갱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수많은 인류학자들이 문명과 야만의 실체를 밝혀내기 위해서 밀림과 외딴 섬으로 들어갔다.
# 브라질 정글과 사모아 섬
폴 고갱의 문명비판은 17-18세기의 사상가 토머스 홉스와 장 자크 루소에서 비롯되었다.
유럽의 문명을 그리지 않고 타히티의 야만을 그린 고갱의 미술작업도 일종의 문명비판이었다.
20세기 인류학자 마가레트 미드와 클로드 레비스트로 등으로 그 정신이 이어졌고.
‘문화인류학의 어머니’로 불리는 미드는 1925년, 24살의 대학원 학생 신분으로
식인전통이 남아있다는 사모아 섬으로 가서 살기 시작했다.
그녀는 1939년까지 남태평양에 있는 7개 섬에 살면서 수많은 연구업적을 남겼다.
한편, 29살의 젊은 교수 레비스트로는 1937년부터 3년 동안 브라질 밀림으로 들어가서
4개 부족의 원주민과 함께 살았다.
그는 1,2차 세계대전에서 수천만 명이 죽었다는 사실에 절망하면서,
전쟁 밖에 있었던 미개/야만인의 세계에 궁금증을 갖게 됐다.
# 문명국가의 오만에 절망
레비스트로는 3년 동안의 경험을 통해서, 유럽중심주의(합리적 이성중심주의)에 찌든 문명국가들이
열대지방에 있는 비문명 국가들보다 조금도 우월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걸 근거로 구조주의인류학의 교과서 같은 책 <슬픈 열대>를 썼고.
레비스트로가 인류학 관련 책의 제목을 마치 시집 제목 같은 <슬픈 열대>로 삼은 이유는 무얼까?
문명국가들이 주로 온대지역에 위치하는 것에 반해서, 비문명 국가들은 북회귀선과 남회귀선 사이의
열대지역에 산재하기 때문이다.
알고 보면, 인류학(Anthropology)은 유럽 제국주의 국가에서 만든 신종 학문이다.
18세기에 일어난 산업혁명을 기반으로, 19세기 내내 식민지 쟁탈전을 벌인 제국주의 학문인 것.
식민지를 효과적으로 관리/통치하기 위해서 지식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 성(性)은 나쁜 것인가?
식인풍습과 풍토병을 이유로(실제로 죽은 청년 인류학자가 있었음) 주변의 만류가 있었지만
24살의 처녀 마가레트 미드는 1925년 8월 사모아에 도착했다.
그 후 14년 동안, 미드는 7개 원주민 언어를 익히면서 연구에 몰두했다.
그녀는 3년 동안의 연구를 토대로 첫 번째 결과물인 '사모아의 성년(Coming of Age in Samoa)' 펴냈다.
사모아 청소년들의 성생활(性生活)을 주로 연구한 책이다.
이 책은 찬사와 비판을 동시에 받으면서 베스트셀러가 됐다.
성을 금기시하고 억압당하는 미국 청소년들과는 달리, 자연스런 성생활을 통해서 아무런 성적 스트레스 없이
어른으로 성장하는 사모아 청소년들의 성장과정을 긍정적으로 담아낸 것.
특히 미국 기독교계의 반발이 컸다. 미드가 세 번 이혼한 것까지 꼬집으면서.
# 오스트레일리아 애버리진
마가레트 미드의 중요한 저서 중에 ‘호주 애버리진(The Australian Aborigines)’이 있다.
시드니大 인류학과 교수였던 피터 엘킨과 함께 저술한 이 책은 오랫동안 애버리진 문화인류학의 보물처럼 대접받았다.
문화인류학 중에서 성(性)에 관심이 많았던 미드가 애버리진 청소년의 성인식에 관해서 짧게 다루었다.
남녀 모두 성인이 되기 위해서 이빨 하나씩 뽑고 팔과 가슴에 상처자국을 남긴다는 것.
특히 남자는 할례와 비슷한 성기에 상처내기까지 감수했고.
# 워크어바웃이라는 성인식
애버리진 소년의 진짜 성인식은 6개월 동안 이어지는 ‘뿌리 찾기 여행(Walkabout)’이다.
백인들이 애버리진 어린이들을 강제로 납치해서 기독교 선교기관(Mission) 등에 맡기기 전까지
모든 애버리진 소년에게 주어진 통과의례(Rite of Passage)였다.
어른이 되고, 결혼 적령기에 이른 애버리진 소년은 가족과 부족을 떠나서 혼자 사막이나 숲 속을 떠돌면서
조상의 영혼으로부터 삶의 의미와 생존방식을 배워야한다.
그게 ‘워크어바웃’이다.
위험할 것 같은데, 놀랍게도 사고가 나는 일은 거의 없다.
# 애버리진의 Songline
그 이유는 애버리진 조상들이 소년이 걸어가야 할 길을 안내해주고 물과 먹이를 얻을 수 있도록 영적으로 도와주기 때문이다.
그 길이 '노래길(Songline)'이다. 다른 말로는 '꿈길(Dreaming Tracks)'이라고도 한다.
애버리진 창세기 신화인 '드림 타임(Dream Time)’과 연계됐다.
노래길, 혹은 꿈길에는 조상들이 불렀던 노래와 이야기들, 그리고 춤의 흔적들이 남아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 그 비결은 과거-현재-미래가 하나의 정신으로 연결되어있는 애버리진 전통 때문이다.
# 니체의 철학 영원회귀와 닮아
과거-현재-미래로 연결된 영원 속으로, 잠시 들어가서 조상들과 영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
그 시간이 꿈을 꾸는(Dreaming) 시간이다. 꿈에서 깨어나면 현실로 돌아오게 되고.
그래서 애버리진 한평생은 창세기로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영원까지 계속 이어진다.
19세기 독일철학자 니체가 설파한 영원회귀(또는 영겁회귀)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거대한 원의 형태로 연결된 영원이라는 시간의 문을 열고 들어가서 생성(生成)을 끝없이 반복한다는 이론이다.
애버리진 신화와 니체의 영원회귀가 이처럼 똑같다니 놀랍지 않은가?
# 소설, 영화에 담긴 워크어바웃
한편 1971년에, 소설가 제임스 마셜이 ‘워크어바웃’을 발표했다.
니콜라스 로에그 감독이 영화로 만들어서 칸영화제에서 상을 받기도 했다.
얼마 전에 상영되었던 영화 ‘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워크어바웃’ 관련 에피소드가 삽입됐다.
소설 ‘워크어바웃’은 베스트셀러가 됐지만, 영화는 칸영화제 수상 말고는 대체로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주인공 소녀를 지나치게 선정적으로 그리는 등 할리우드 스타일로 각색했기 때문이다.
# 테니스 스타 이본 굴라공의 워크어바웃
호주 NSW주 출신의 애버리진 테니스 선수 이본 굴라공 콜리의 얘기도 흥미롭다.
1976년에 세계랭킹 1위에 오른 굴라공은 그랜드슬램 대회에서만 단식 7회 우승, 복식 6회 우승,
혼합복식 1회 우승의 위업을 달성했다.
그런데 내내 펄펄 날던 굴라공이 결승전 2세트만 되면 죽을 쑤곤 했다.
잠깐 동안 정신적으로 깜박거리는 증상(periodic mental lapses)에 빠지곤 한 것.
이를 두고 굴라공은 “코트의 워크어바웃(Walkabout on the court)”이라고 말했다.
# 백인 청소년의 잭카루(Jackaroo)
호주 백인 청소년들이 성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농촌마을로 가서 목동으로 활동하는 걸 일컬어
‘잭카루(Jackaroo)’ 라고 한다.
특히 부유한 가정의 소년들이 방학을 이용해서 잭카루 체험을 많이 하는 걸로 알려졌다.
호주 유일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페트릭 화이트도 소년시절에 잭카루 체험을 했다.
그는 중학교부터 영국에 유학했는데, 영국에서는 ‘호주 촌놈’ 으로 무시당하고 호주에서는 ‘영국 강아지’로 따돌림 당했는데
‘잭카루’가 되어서 모든 걸 극복했다.
1973년 호주 개척시대를 그린 장편소설 '인간의 나무(Tree of Man)'으로 노벨문학상의 받은 페트릭 화이트는
상금의 절반을 ‘호주청년문학상’에, 그리고 나머지 절반을 ‘호주 애버리진 문학상’ 기금으로 내놓았다.
## 소설 ‘워크어바웃(Walkabout) 스토리 요약 ##
소설의 주인공은 시드니에 사는 여고생 메리와 남동생 피터다.
남매는 비행기 사고를 당했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남는다.
그러나 그곳은 호주 내륙의 사막, 살아서 돌아갈 가망이 없다.
음식은 떨어지고 가도 가도 모래벌판이다.
지칠 대로 지친 남매가 선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앞에 서있는 애버리진 소년을 보고 깜짝 놀란다.
소년은 아무것도 입지 않았다.
한동안 어색한 눈빛이 오갔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갈증을 해소하는 일이다.
남매는 영어로 도움을 청했지만 애버리진 소년은 알아듣지 못한다.
결국 온갖 몸짓으로 소통이 이루어졌고 소년은 웃으면서 커다란 물웅덩이로 남매를 데리고 간다.
소년들이 먹을 것을 사냥하는 동안 메리는 알몸으로 수영을 즐긴다.
# 소녀의 팬티를 입고 춤을 추다
세 사람은 여러 날 동안 사막을 통과하면서 사냥도 하고 간단한 애버리진 언어로 대화도 나눈다.
소녀의 남매는 애버리진 소년이 신기하기만 하다.
뭔가 필요할 때마다 소년은 주문을 외우면서 춤을 추었고 필요한 것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런대로 안정을 찾았지만 메리한테는 벌거벗은 애버리진 소년의 벌거벗은 모습이 불편하다.
메리가 아이디어를 냈다. 자기의 팬티를 벗어서 소년에게 입힌 것. 그걸 보고 피터는 모래 위를 둥글면서 웃어댄다.
애버리진 소년은 순간 팬티가 춤출 때 입는 장식으로 판단한다.
소년과 피터는 부둥켜안은 상태로 한바탕 춤판을 벌인다.
춤이 끝나자 애버리진 소년은 팬티를 벗어서 코를 푼 다음 버린다.
춤이 끝났으니 더 이상 입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
# 애버리진 소년의 죽음
그러나 그걸 이해하지 못한 소녀는 놀란 표정을 짓는다.
얼핏 소녀의 표정을 본 애버리진 소년은 큰 충격을 받는다.
자신의 얼굴에서 죽음의 영혼(The spirit of death)을 소녀가 깜짝 놀란 것으로 판단한 것.
갑자기 소년은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다.
*이 대목이 소설을 이해하는데 중요하다.
동생 피터가 소년에게 감기바이러스를 옮긴 것.
그러던 어느 날, 메리가 또다시 알몸으로 수영을 한다.
애버리진 소년도 물웅덩이로 들어가서 함께 수영을 즐기려하자 깜작 놀란 메리가 돌멩이를 집어 들고 위협을 가한다.
*문명과 야만의 충돌?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년은 그 후로 더욱 심하게 앓는다.
거의 죽음 직전에 놓인 상황에서 메리는 자기가 오해한 것을 깨닫는다.
메리는 소년의 머리를 안아주고 소년은 메일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사람은 생김새와 언어만 다를 뿐 모든 게 똑같다는 걸 알게 되고.
# 그들을 살려준 애버리진 Songline
메리와 피터는 애버리진 소년을 묻어준 다음 음식과 물을 무덤 앞에 남겨놓는다.
그런 다음 소년이 가던 방향으로 몇 날을 가다보니 애버리진 마을이 나타났다.
남매는 애버리진 어른들로부터 그 소년이 ‘워크어바웃’ 중이었다는 얘기를 듣는다.
그리고 애버리진 조상들이 들려주는 Songline을 따라서 소년이 사막을 걸어 다녔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한동안 애버리진 마을에서 지내면서 기력을 회복한 남매는 그들의 안내를 받아서 문명의 세계로 돌아온다.
라페루즈...
호주에서 가장 슬픈 마을
# 호주의 운명을 바꾼 8일
1788년, 8일 간격으로 유럽의 두 선단이 보타니 만에 도착했다
(Two separate European fleets visited Botany Bay).
1월 18일에 도착한 영국 선단은 아서 필립 선장이 이끈 11척의 죄수선단이었다.
그로부터 꼭 8일 후에, 라페루즈 백작이 이끄는 프랑스 선단이 도착했다.
역사에서 만약이라는 가정은 무의미하지만,
라페루즈가 하루라도 먼저 도착해서 프랑스 식민지로 선포했다면 지금의 호주는 어떤 모습일까?
# 캡틴 쿡의 꿈, 그 너머까지
프랑스 ‘태양 왕’ 루이14세는 캡틴 제임스 쿡이 성취한 영국의 항로개척 성공에 큰 자극을 받았다.
그래서 라페루즈 백작에게 프랑스의 항로개척을 당부했다.
그 당시 유럽의 판도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기울고 영국과 프랑스가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라페루즈는 원주민 창에 찔려서 죽은 캡틴 쿡을 누구보다 존경했다.
지구를 세 바퀴나 돌면서 세계지도를 완성한 탐험가였기 때문이다.
라페루즈는 제2의 캡틴 쿡을 꿈꾸면서 1785년 8월 1일 출항했다.
# 아, 슬픈 보타니 베이
호주대륙의 동쪽 끄트머리에 붙어있는 보타니 베이에서 애버리진 카메이갈 부족이 수만 년 동안 살았다.
비교적 풍요로웠고 숫자도 많았다. 1770년 4월 29일, 캡틴 쿡의 ‘Endeavour호’가 도착할 때까지.
캡틴 쿡은 8일 동안 그곳에 머물면서, 새로 발견한 땅을 대영제국 조지3세의 토지로 선언했다.
그때부터 호주 땅은 크라운 랜드(Crown Land)가 됐다.
그로부터 18년 뒤, 최초의 죄수선단(The First Fleet)이 같은 장소에 도착했고.
# 2년 7개월의 항해 끝에
죄수선단을 이끈 아서 필립 선장은 보타니 베이에서의 식민지 개척 가능성을 조사했으나
적절치 않다고 판단했다.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서 북쪽으로 13Km 정도 이동하다가 포트 잭슨 코브(지금의 시드니)를 발견했다.
1788년 1월 26일 아침, 아서 필립은 포트 잭슨에 유니언 잭을 게양하고 대영제국 식민지로 선포했다.
바로 그 순간에, 라페루즈의 프랑스 선단이 보타니 베이에 들어왔다.
장장 2년 7개월의 항해 끝에 도착한 것.
# 패자를 도와준 아서 필립
아서 필립 선장은 라페루즈의 도착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 대비책으로 전투를 준비했고, 서둘러서 식민지 선포식을 가졌다.
라페루즈는 낭패감을 느꼈으나, 다급한 식량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반가움이 더 컸다.
그러나 아서 필립도 식량이 넉넉하지 않았다.
그는 최소한의 긴급식량을 라페루즈에게 건네면서 각종 편의를 제공했다.
라페루즈는 항해일지와 편지 등을 프랑스 정부에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 남태평양에서 사라지다
라페루즈는 자신의 운명을 감지했던 것일까?
경쟁국가의 선장에게 국가기밀문서를 프랑스에 전해달라고 부탁했으니 말이다.
그는 6주 동안 배를 수리한 다음, 뉴칼레도니아를 지나서 사모아로 항해하던 도중에 실종됐다.
라페루즈의 항해일지와 편지는 정확하게 프랑스 정부에 전달됐다.
라페루즈의 봉인(封印)은 완전한 상태였다고 한다.
필립 선장이 불과 8일 차이로 자신에게 패배한 라페루즈에게 최상의 예의를 갖춘 것.
# 호주에 있는 프랑스 마을
라페루즈 근처에 프랑스어로 된 지명이 여럿 있다.
나중에 총독이 된 아서 필립이 라페루즈의 실종 소식을 듣고 그 일대의 지명을 프랑스식으로 지은 것.
라페루즈기념관, 프랑스커뮤니티센터도 그곳에 있다.
아름답다고 소문난 시드니에서도 라페루즈는 빼어나게 예쁜 동네다.
기념관 앞에 라페루즈 동상이 서있다. 태평양 건너, 그의 조국 프랑스 쪽을 향해서.
1990년 3월, 동상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개를 목격하고 시 <바다 건너>를 썼다.
개의 고향은, 분명히 바다 건너 / 천길 허공중에 있으리라, 오늘도 / 어제처럼 물결은 높고 / 개는 바다기슭을 어슬렁거린다 // 여기는 남의 나라 땅, 밤마다 / 꿈자리 뒤숭숭한 이 세상의 끝. (후략)
# 영화 ‘미션 임파서블 2’
톰 크루즈가 나오는 영화 ‘미션 임파서블 2’를 라페루즈에서 촬영했다.
톰 크루즈가 악당들과 격렬한 추격전을 벌였던 베어 아일랜드 요새(Bare Island Fort)는
저녁노을이 슬프도록 아름다운 섬이다.
2000년 이후부터, 수많은 관광객들이 그곳을 찾는다.
라페루즈 유적지가 아니라, 영화 ‘미션 임파서블 2’ 촬영지였기 때문이다.
나는 가끔씩 한국에서 오는 문인들이나 언론인들을 데리고 그 바닷가로 간다.
바다기슭에서, 불운했던 라페루즈의 생애를 추억하면서 쓴 詩 <바다 건너>를 낭송해준다.
거품 가득한 흑맥주를 마시면서 태평양을 건너온 도요새의 고단한 착륙을 바라본다.
찻잔에 톡 떨어진 정부(情婦)의 눈물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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