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스스로가 “전술은 하되 창작은 아니하며, 믿고 옛 것을 좋아함을 그윽이 우리 노팽과 견주노라(述而不作하며 信而好古를 竊比於我老彭하노라 /『논어』술이편 제1장)”고 하였다. 공자는 성현들의 훌륭한 옛 내용이 많기에 스스로가 더 쓸 것은 없고, 다만 새롭게 정리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피력하시면서 은나라의 어진 대부였던 노팽을 비유하여 매우 겸손하게 말씀하신 것이다.
옛날의 선비는 국가로부터 녹을 받아서 살림을 꾸렸기에 벼슬이 없다면 살기가 매우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공자는 젊어서 미관말직인 위리(委吏)라는 창고지기 벼슬과 사직리(司職吏)라는 종묘제사에 쓸 가축을 기르는 축사 일을 맡아보기도 했는데, 언제 어디서나 배우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예법에 관해 공부하다가 미진한 점이 있자, 주나라에서 도서관 사서 직책인 주하사(柱下史)를 맡고 있는 노자를 찾아가 묻기도 하고 문헌을 수집해왔다. 우리는 고증에 철저했던 공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에 『논어』에는 고증에 충실한 공자의 모습이 나온다. “하나라 예를 내 말할 수 있으나, 후예인 기나라가 족히 증거대지 못하며, 은나라 예를 내 말할 수 있으나 후예인 송나라가 족히 증거를 대지 못함은 문헌이 부족한 까닭이니 족하면 내 능히 증거를 대리라(夏禮를 吾能言之나 杞不足徵也며 殷禮를 吾能言之나 宋不足徵也는 文獻이 不足故也니 足則吾能徵之矣로리라 / 팔일편 제9장)”고 하였다.
이 말 뜻은 무엇일까? 문헌으로 정리하려면 구전되는 말만 갖고는 어렵다는 것이다. 공자가 평생을 두고 문헌을 정리하였음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공자 당시에 공부는 대부분이 구전이었다. 종이로 된 책은 한나라 이후부터 있었고, 그전에는 일일이 필사한 죽책이 전부였기에 책을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더욱이 당시에는 이미 나라의 기강이 무너져 시서예악(詩書禮樂)이 제대로 정리될 수가 없었다. 이것은 결국 국가가 백성들에게 제시할 예법체계가 무너져 있다는 뜻이다. “천자가 아니면 예를 의논하지 못하며, 법도를 짓지 못하며, 글을 상고하지 못한다(非天子면 不議禮하며 不制度하며 不考文이니라 / 『중용』제28장)”라는 것을 알고 있던 공자였기에 나라 임금과 더불어 정사를 펼치기를 기대하며 문헌을 모아나갔다.
제자인 자공(子貢)이 공자처럼 훌륭한 선생이 재야에 묻혀 있는 것을 안타까이 여겨 “여기에 아름다운 옥이 있으니 궤에 넣어 감춰둘까요? 좋은 값을 흥정해 팔까요?(有美玉於斯하니 韞匵而藏諸잇가 求善賈而沽諸잇가)”라고 물었을 때, 공자는 “팔아야 할까, 팔아야 할까? 나는 값을 기다리는 자로다(沽之哉沽之哉나 我는 待賈者也로라 / 『논어』자한편 제12장)”라고 답변한 것은 시세에 아부하며 벼슬자리를 구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자신 같은 사람을 알아보고 등용하여 쓸 밝은 임금이 아니라면 함께 더불어 정치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沽之哉
더 이상 도가 전파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공자는 철환주유를 마치고 노나라로 돌아와 육예(六藝)인 『시경』『서경』『역경』『예기』『악경』(현재 전하지 않음)『춘추』등의 문헌을 정리 찬술하였다. 하지만 공자가 벼슬자리에 올라 시행하면서 정리한 글이 아니었기에 자신이 쓴 글을 빈말, 곧 ‘공언(空言)’이자 ‘공문(空文)’라고 낮추어 겸손히 말하였다.
육예에 대해 공자는 “그 사람됨이 온유하고 돈후하면서도 어리석지 않다면 시(詩)에 이해가 깊은 자요, 소통하고 먼 것까지를 알면서도 꾸미지 않는다면 서(書)에 깊은 자요, 도량이 넓고 성정이 조화로우면서 순하고 어질면서도 사치하지 않는다면 악(樂)에 깊은 자요, 정결하고 정미하면서도 구실을 붙이지 않는다면 역(易)에 깊은 자요, 공손하고 검소하며 장엄하고 공경하면서도 번거롭지 않다면 예(禮)에 깊은 자요, 말을 붙임에 사물을 비교하여 판단할 줄 알면서도 어지럽히지 않는다면 춘추(春秋)에 깊은 자라(其爲人也 溫柔敦厚而不愚면 則深於詩者也오 疏通知遠而不誣면 則深於書者也오 廣博易良而不奢면 則深於樂者也오 潔淨精微而不賦면 則深於易者也오 恭儉莊敬而不煩이면 則深於禮者也오 屬辭比事而不亂이면 則深於春秋者也니라 /『예기』 經解편 제1장)”고 하였다.
특히 『춘추』는 공자의 마지막 저술로, 맹자가 “세상이 쇠하고 도가 미미하여 삿된 말과 폭행이 또 일어나 신하가 그 인군을 죽이는 자 있으며, 자식이 그 아비를 죽이는 자 있으니 공자가 두려워하시어 『춘추』를 지으셨으니 『춘추』는 천자의 일이라(世衰道微하여 邪說暴行이 有作하여 臣弑其君者 有之하며 子弑其父者 有之하니라 孔子 懼하시어 作春秋하시니 春秋는 天子之事也라 / 『맹자』등문공하편 제9장)”라고 하였다. 노나라의 역사를 기록하면서 위정자들의 일을 재단하여 적었기에 공자는 “나를 아는 자도 그 오직 춘추이며 나를 죄주는 자도 그 오직 춘추라(知我者도 其惟春秋乎며 罪我者도 其惟春秋乎인저)”라고 하였다.
유학경전은 송나라가 들어서기 전까지는 육예를 중심으로 공부해갔는데 사서삼경체계가 완성된 것은 남송(남송) 때 주자(朱子, 1130~1200)에 의해서였다. 자사(子思, 공자의 손자로 『중용』을 지음) 이후 도맥이 끊어졌다고 판단한 주자는 정자의 뒤를 이어 공자의 학문을 연구하여 『예기』속에 들어있던 『大學』과 『中庸』을 독립시켜 『맹자』와 『논어』와 함께 四書로 묶고, 『詩經』『書經』『易經』을 三經으로 묶어 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익혀야 할 과정으로 두고, 『書經』을 제외한 6서에 주석을 붙였다.
유교는 청나라에 들어와서는 서구문화를 만나면서 좀 더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되어 가나 군대를 앞세운 서구문물에 무릎을 꿇게 되면서, 2천여 년 동안 국교로 숭상되었던 유교는 단절되고 청산의 대상이 되었다. 그 속에서 공자 역시 타도의 대상이 되었다가 다시 부활되고는 있으나 중국이 지나치게 자국내의 국수주의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어 우려스러울 뿐이다.
철환주유 시절 공자가 시를 인용하여 제자들에게 물었던 ‘뿔소도 아니며 범도 아닌 것이 저 광야를 헤맨다하니 우리의 도가 잘못된 것인가? 우리는 여기에서 무엇을 해야 하나? (詩云匪兕匪虎이어늘 率彼曠野아하니 吾道非邪아 吾何爲於此리오 / 『사기』공자세가)’라고 한 구절이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