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서 |
갈래 |
서명 |
1 |
입문 |
불교입문(불교학개론), 부처님의 생애 |
2 |
경전 |
법구경 |
3 |
보살행 |
자타가 |
4 |
수행자세 |
유교경, 초발심자경문, 보왕삼매론, 부모은중경 |
일단 경 공부에 들어가기 전에 현대 서적 들 중에서 불교에 대한 기초적인 관점을 제시해 줄 수 있는 도서를 읽고, 수행자의 마음가짐과 생활자세를 일깨워 줄 경문을 읽는 것이 좋다.
②교리 공부를 위해
순서 |
갈래 |
경명 |
1 |
원시 |
아함경 |
2 |
부파 |
구사론, 대비바사론 |
3 |
반야 |
반야경, 중론, 대지도론, 유마경 |
4 |
유식 |
해심밀경, 유식삼십송, 유가사지론, 성유식론. |
5 |
여래장(불성) |
승만경, 열반경, 여래장경, 보성론 |
6 |
유식.여래장 종합 |
능가경, 대승기신론 |
7 |
화엄 |
화엄경, 화엄경 탐현기 |
8 |
천태.법화 |
법화경, 법화경종요, 마하지관, 소지관 |
너무나 방대한 경전들이기 때문에 우선은 아함경을 먼저 읽고, 반야경 중에서 반야심경을 읽는다. 가능하면 대품반야를 죽 읽는 것도 좋다. 그리고 유마경, 해심밀경 정도를 읽고 열반경을 읽는다. 그리고 능가경과 대승기신론을 읽고 화엄경과 법화경을 읽는다. 이 중에서 법화경은 사경이나 독경용으로 많이 선택되는 경이므로 이 때에는 이 순서에 상관없이 한다. 또 화엄경은 양이 방대하므로 품별로 나누어 먼저 읽어나가도 좋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함경을 가장 먼저 보는 것인데, 아함경도 양이 많으므로 주제별로 추려놓은 현대서적을 이용하여 읽어 나가면 공부를 쉽고 재미있게 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계율이나 참선수행에 있어서도 아함경에 기초적인 내용들이 나오므로 계율과 수행법 부분을 따로 모아 읽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③계율수행을 위해
순서 |
갈래 |
경명 |
1 |
5계 |
우바새경, 우바새오계상경, |
2 |
8재계 |
지재경(재경), 사천왕경, |
3 |
10선계 |
십선경, 십선업도경, 십지경론, 십주비바사론 |
4 |
보살계 |
범망경, 우바새계경, 보살내계경, 보살선계경, 보살지지경, 유가사지론, 보살영락본업경, |
우바새경, 재경, 사천왕경, 십선경 등이 모두 아함경에 들어있으니 5계, 8재계, 십선은 아함경을 보면 기본적인 지침을 얻을 수 있으며 보다 상세한 내용은 우바새5계상경이나 우바새계경을 보면 되고, 특히 십주비바사론에서는 대승적 관점에서 각종 계에 대한 구체적인 관점들이 잘 나타나 있다. 끝으로 보살계는 5계, 8재계, 십선계가 충분히 몸에 익은 사람이 받는 계이니 이와 관련된 경을 보는 자도 마땅히 앞의 계가 충분히 익은 후라야 할 것이다. 다른 모든 경전을 읽을 때 그래야 하지만 특히 보살계는 심지계이니 범망경을 비롯하여 보살계를 설한 경론을 읽을 때에는 계의 근본 정신을 깨우치려고 애써야 할 것이다.
참고로 불살생계는 모든 계율의 근본이며 이에 대한 적극적 실천법으로 방생이 있다. 방생에 대해서는 중국 주굉스님의 <계살방생문>을 보면 좋다.
④참선수행을 위해
순서 |
갈래 |
경명 |
1 |
소승선 |
대념처경, 안반수의경, 청정도론 |
2 |
대승선 |
능엄경, 금강삼매경, 원각경, 금강경 |
3 |
조사선 |
선가귀감, 선문촬요, 육조단경, 신심명, 증도가 |
대념처경은 아함경 속에 있고, 안반수의경은 독립경이기는 하나 문장이 난해하므로 아함경 속의 입출식념경 등을 통해 익히는 것이 더 좋다. 그러므로 아함경 가운데 사념처관과 호흡관 부정관 및 37조도품에 관한 경문을 모아 읽는다. 그리고 나서 능엄경, 원각경, 금강경을 읽고 대승선의 경지를 한번 가늠해 본다. 그리고 선가귀감 선문촬요를 읽는다. 선가귀감, 선문촬요의 내용이 수행자의 배울 바에 대해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으므로 먼저 이것을 보고 나중에 경을 읽는 것도 좋다. 그리고 육조단경과 신심명을 비롯한 조사어록은 어느 정도 공부가 익은 후에 보는 것이 좋다. 이들 대승경전이나 조사어록은 수행의 경험이 없는 사람은 이해하기 힘들며, 혹 이해가 되었다 하더라도 수행을 통해 나름대로 체득한 이후에 다시 읽어보면 처음에 읽은 것과 전혀 다른 새로운 의미가 와 다을 것이다. 또한 수행 중에 자신의 경험한 바를 점검하거나 바른 방향을 제시해 주는 지침서 역할도 한다.
이렇게 갈래를 나눈 것은 편이상 이름붙여 놓은 것이지 우열을 논하는 것이 아님을 밝힌다. 어느 것이나 하나만이라도 재대로 익혀 깨달음에 이를 수 있으면 나중에는 저절로 다 통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⑤염불, 기도, 독경, 진언수행을 위해
순서 |
갈래 |
경명 |
1 |
참회 |
천수경, 정찰선악업보경 |
2 |
염불 |
아미타경, 무량수경, 괌무량수경, 반주삼매경 |
3 |
기도 |
지장경, 관음경, 약사경 |
4 |
보살행 |
보현행원품 |
위의 경전은 순서에 관계없이 상황에 따라 그때 그때 읽되 한 경을 지속적으로(천독, 만독) 읽는 것이 좋다. 앞에서 보았던 경전 중에 금강경과 법화경도 수지독송하기 좋은 경이다. 그 이유는 어느 경보다 수지독송의 공덕을 강조한 경이기도 하고, 금강경의 경우 선종의 정수를 잘 표현한 경이기 때문에 옛부터 조사스님들께서도 거기에 의지하여 불법의 이치를 설파하곤 하셨다. 또한 조계종의 소위경전이기도 하며 분량도 적어 외워서 암송하기도 좋다.
지금까지 소개한 경론과 어록은 모두 한글번역본이 있는 것들로 고른 것이다. 경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여 쉬운 개론서들만 읽을 것이 아니라, 직접 부처님과 조사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와 닿는대로 참구하고 실천해나가면 공부에 큰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3.간경수행의 갈래와 방법
간경수행은 가장 기초적인 수행법이므로 나름대로 여러 방편을 통해 이루어져왔다. 이 방편들은 크게 열 가지로 구분되는데, 이를 일러 '십종수지'(十種受持) 또는 '십종전통'(十種傳通)이라 부르는 바, 그것은 수행자가 마땅히 행해야 할 열 가지 간경법이란 뜻이다.
대승의 법을 수행하는데 열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쓰고 베낌이요. 둘째는 공양함이요, 셋째는 베풀어서 남에게 줌이요, 넷째는 다른이가 읽고 외면 한 마음으로 들음이요, 다섯째는 자신이 읽음이요, 여섯째는 자신이 이치대로 이름과 글귀와 맛과 뜻을 취함이요, 일곱째는 도리 그대로와 이름과 글귀와 맛을 나타내 설명함이요, 여덟째는 바른 마음으로 듣고 욈이요, 아홉째는 조용한 데서 이치대로 헤아림이요, 열째는 이미 뜻이 들인 것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하여 닦아 익히는 것이다.<중변불변론 무상승품>
1)서사(書寫)
서사는 부처님이 설하신 경율론를 옮겨씀으로써 법이 단절되지 않도록 이어가면서 내면적으로는 자신을 살펴보는 공부법이다. 경전을 옮겨 쓸 때에는 가장 깨끗한 바탕에 가장 깨끗한 도구로 써야 하며, 옮겨쓰는 글씨의 모양이나 속도도 한결같아야 한다. 경을 쓰면서 그 글자를 마음 속에 같이 쓰는 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그리고 경전을 옮겨 쓰기 시작하거나 끝낼 때 및 갈무리할 때 개경게나 개법장진언 등을 염송하는 것이 좋다. 옮겨 쓴 경전은 아무렇게 방치하지 말아야 하며, 깨끗하게 싸서 잘 갈무리해야 한다. 경전을 옮겨 쓰는 것은 부처님의 상을 조성하여 널리 받들게 하는 것과 같은 일이므로, 옮겨 쓴 경전도 이처럼 소중하게 여기는 이에게만 전해줄 수 있다. 다만 경전을 옮겨 쓸 때 반드시 한 경전을 대상으로 삼아 그것을 다 옮겨 쓴 다음에 다른 경전을 옮겨 쓰도록 한다.
간경 수행의 대표적인 한 방법으로 사경은 널리 행해지고 있어, 사경법회를 정기적으로 하거나 사경을 주된 수행법으로 하는 사찰도 있다. 또한 사경은 계층에 관계없이 많은 사람들에게서 실천되고 있으며, 특히 어린이나 청소년들에게 호응이 좋은 수행법이다. 요즘은 사경 교재들이 시중에 많이 나와있으므로 그런 것을 이용하면 더 쉽게 할 수 있다.
2)공양(恭養)
공양은 부처님의 경전이 있는 곳을 불사리가 있는 곳처럼 공경하고 존중히 공양하는 것이다. 경전이 곧 부처님이므로 공부하는 이는 거기에 실린 말씀을 들을 때마다 부처님께 감사드려야 하는 바, 그것이야말로 간경수행의 기초가 될 것이다. 다른 글을 보듯이 쉽게 경전을 읽으려드는 것은 부처님을 스승으로 받드는 예법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이것은 경전이 곧 부처님임을 믿으며 그 가르침을 따르겠다고 맹세하는 공부법이다.
3)시타(施他)
시타는 경전을 자기 개인의 전유물로 삼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도 베풀어 이익을 주는 실천공부이다. 경전에서 말씀하시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자비심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대승불교의 핵심적인 수행법으로 보시가 있다. 따라서 그러한 말씀이 담겨있는 경전을 보고 오히려 그것을 아끼는 마음에 베풀어 주지 않는다면 어찌 바르게 읽었다 하겠는가. 당연히 다른 사람에게 주어 읽도록 해야 할 것이다.
지금도 법보시라는 이름하에 경전이나 불서를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은 일상적으로 행해지고 있다. 특히 천도재나 49재를 지내는 경우 후손들은 망자를 위해 많은 양의 경전류를 사찰이나 동참대중에게 보시하기도 한다.
4)제청(諦聽)
제청은 다른 이가 읽고 해설하는 일체 경법을 듣고 깊이 애락(愛樂)하며 진심을 다하여 살피고 자세히 듣는 공부법이다. 옛적에 보살님이 몸을 나투셨으나 자기의 상에 빠져 뵙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처럼, 부처님께서는 언제 어느 모습으로도 오실지 모른다. 자신의 상에 빠지지 말고 부처님께서 일러주신 말씀이 들리는 곳이면 모두 부처님의 또다른 현신으로 여기는 마음을 내야 하는 것이다.
경전에 실린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라 하더라도 때로 부처님의 말씀과 같은 말을 들으면, 그를 선지식으로 여기고 고맙게 여기는 것도 물론 제청에 해당한다. 수행심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부처님이 여러 모습으로 우리 곁에 오셨음을 알게 되는 바, 자신이 가진 상으로 말미암아 타인이 하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한다면 올바른 간경행자라 할 수 없다. 기회있을 때마다 법을 청하며 법을 연설하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달려가 즐겨 들어야 한다.
5)피독
피독(披讀)은 경전을 언제나 펴서 보고 읽어 손에서 놓지 않는 공부법이다. 한번 부처님의 말씀을 들었거든 잊지 말고 기억하여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인바 이를 위해 손에서 놓지 않고 경문을 반복해서 읽는 것이다.
옛날 어떤 사람은 스승께 한 마디 말씀을 들으면 그 말씀을 다 들어 깨우치기 전에 또다른 말씀을 들을까 두려워했다고 한다. 이처럼 한 번 부처님의 말씀을 들었으면 반드시 그 말씀을 올곧게 깨우쳐야 할 것이며, 그 말씀이 스쳐지나가지 않도록 해야 하는 바, 이를 위해서는 늘 부처님의 말씀을 떠올리는 생활을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피독의 수행법이다.
6)수지
수지(受持)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 교법을 스승으로 좇아 이를 본받고 잘 갈무리하여 잊지 않도록 하는 공부법이다. 앞의 피독이 경전을 손에서 놓지 않고 읽는 것이라면 수지는 다시 그것을 마음에 새기고 생활 속에서도 잊지 않고 받아지니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피독과 수지는 간경 수행자의 필수적인 행법이라 하겠다.
7)개연
개연(開演)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을 때때로 언제나 연설하고 열어 보여 사람들에게 믿어 알도록 하는 공부법이다.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나름대로 깨침이 있었을지라도 그 깨침이 자기만의 쓰임일 수 없으니, 부처님의 참된 가르침이 무엇인지 기회 있을 때마다 함께 나누어야 할 것이다.
수지를 통해 부처님의 말씀을 자기 나름으로 갈무리했다면, 개연을 통해 그것을 바로 비추어보는 것도 필요하다. 어느 한 쪽에만 매달리면 원만한 공부가 되지 못할 수도 있는 바, 이 두 가지를 늘 아울러야 한다.
8)풍송
풍송(諷誦)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 일체의 도법을 널리 범음으로 소리내어 맑게 읊어 선양함으로써 널리 사람들로 하여금 듣기에 즐겁게 하는 공부법이다. 풍송을 할 때는 가장 깊고 맑은 소리를 내야 하는바, 잡념과 삿됨을 버리고 마음을 고요히 하며 호흡을 잘 가다듬어 발음을 정확하게 하고, 중간에 경전의 말씀을 한 소리라도 빼지 않도록 한다.
풍송을 할 때 목탁 등을 사용할 수도 있는데, 그것은 여러 사람이 함께 풍송하기 편리하게 하고, 또한 주변을 장엄하게 하여 마음에 깊이 새기려는 것이다.
9)사유
사유(思惟)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가르침을 깊이 헤아려 이치를 터득하는 공부법이다. 즉, 불법의 이치를 터득하는 비결은 사유를 통해 사유를 깨고 뛰어 넘는 데 있다. 따라서 아름알이식의 생각이 아닌 깊고 깊은 의문으로 한마음이 될 때 문득 이치가 환하게 알아질 것이다.
10)수습
피독과 수지는 경문을 손에서 놓지 않고 읽으며 마음에 새기고 받아지녀 명심하는 공부법임에 비해 사유와 수습은 거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실제로 이치를 터득하고 그것을 몸에 익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가르침대로 엄밀하게 닦아 그 열매를 맺는 공부법이다.
사유를 통해 이치를 알았다면 다시 그것을 완전히 자기 것이 되도록 수습하는 단계를 거쳐 깨달음을 완성한다. 선종에서도 화두참구 후에 보림을 하는 것도 다 그 이유이다.
4.주의사항
1)경전을 읽을 때
??①잡념을 떨치고
위와 같은 열가지 간경의 행법들에 있어서 주의해야 할 것이 몇가지 있다. 그 중에서 보다 실제적인 방법의 하나로 간경수행자의 마음가짐이나 자세를 살펴보기로 한다. 다른 수행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간경수행을 할 경우에도 수행자는 잡념을 떨쳐버려야 한다.
경을 읽을 때 잡념이 얼마나 무서운 작용을 하는지에 대한 일화가 있으니, 이를 거울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총융인 척공은 평소 <금강경>을 지송해 오던 분이었는데, 그가 월 땅에 있는 삼강이란 곳을 지킬 때의 일이다. 어떤 죽은 군사가 꿈에 나타나 말하기를 "내일 저의 아내를 그대에게 보낼 테니, 바라건대 저를 위하여 경전 한 권을 독송하여 저의 저승길을 도와 주소서" 하는 것이었다. 다음날 한 부인네가 슬피 울며 그를 뵙고자 한다기에 그 까닭을 물으니, 과연 꿈에서 들은 말과 같았다.
그가 그 부탁을 허락하고 새벽부터 일어나 끊이지 않고 경을 독송했으나, 꿈에 그 군사가 나타나 하는 말이 "그대의 큰 은혜를 입었나이다. 그러나 그대는 겨우 반 권만을 끊이지 않고 독송했을 뿐입니다. 그 가운데 경전에 없는 불용(不用)이라는 두 글자가 섞여 있었나이다" 하는 것이었다. 그는 죽은이가 그렇게 말하는 까닭을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경을 지송하는 도중에 부하가 아랫사람을 시켜 찻병을 들여올 때, 그가 멀리서 보고 손을 들어 물리친 적이 있었다. 즉 입으로는 비록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으나 마음 속으로'불용(필요없다)'이라는 두 글자를 말했던 것이다.
그래서 다음 날은 일찍부터 아예 문을 닫아 걸고 앉아 경을 지송했더니, 이날 밤 꿈에 그 죽은 군사가 사례하며, "이미 저승을 벗어나 저의 갈 길을 가나이다" 하였다. (『죽창수필』).
②경전은 곧 부처님
경전은 부처님의 또다른 현신이다. 그러므로 경전을 익히는 이의 마음가짐도 응당 살아계신 부처님을 뵙는 것과 같아야 한다. 간경수행을 할 때 경전을 펼치면서 독송하는 '개경게'(開經揭)에서도 그런 마음가짐을 확인할 수 있다.
더없이 깊고 높아라 헤아릴 수 없는 진리여
백겁 천겁 만겁을 다시 나더라도 만나기 어렵건만
나 이제 듣고 보아 간직하게 되었으니
원컨대 여래의 참된 뜻을 알게 하소서.
그렇다. 백천만 겁을 다시 나더라도 만나뵙기 어려운 것이 불법이니, 그 만남을 어찌 다른 귀중한 것들과 견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경전이 곧 부처님인 줄 모른다면, 다만 이치를 밝힌 글인 줄만 알면서 다른 책을 읽듯이 경전을 읽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간경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이루고자 하는 수행법으로써의 본래의 의미를 잃고 마는 것이다.
부처님을 만난다면 어찌하겠는가? 당연히 그분께 기대고 매달려 나의 고통을 모두 소멸하고 해탈의 기쁨을 맛보려 하지 않겠는가? 경전을 익히는 마음가짐은 바로 이런 것이어야 한다. 그밖에 어떤 것들도 이 보다 중요하지 않다. 간경행자는 늘 경전이 부처님의 현신이라 여기고 믿어 그 가르침을 실천으로 옮기려 들어야 한다.
③지식으로 견주지 말고
타고난 성품을 향해 깊이 들어가는 가운데서 넓은 지혜를 얻지 않고 바깥의 지식을 가지고 경전의 내용을 판단불별하려는 태도를 가져서는 안된다. 넓은 지혜를 가지면 나와 남이 따로 없어 다툴 일이 없지만, 좁은 지식을 가지고 아는 척하는 사람은 시비를 다투는 일만 잦아진다.
경전을 공부하면서도 마음이 시비분별하는 곳에 머문다면 그 경전은 이미 '마전'(魔典)이 되어버린 것이며, 경전이 아닌 것을 공부하면서도 마음을 다스려 성품을 밝혀낸다면 그것은 이미 달을 가리키는 여래의 가장 진실한 손가락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대상을 대하던 먼저 좋다, 나쁘다. 그저그렇다 하고 분별하고 여기에 따라 끊임없이 추측.판단한다. 이런 습관에 익숙해진 나머지 경전을 볼 때 조차도 판단분별을 쉬지 않는다. 천지 세상의 밝은 광명이 경전에 있건만 자신의 좁은 데롱을 통해서만 보고 있으니 안타깝기 그지 없다. 여래의 지혜를 자신의 좁은 소견으로 분별하고 있으니 개미가 인간의 세계를 헤아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부디 경전을 볼 때는 짧은 식견을으로 견주지 말고 세속적 가치로 분별하지 말며, 알음알이로 헤아리지 말고, 오직 부처님의 진의를 파악하는데만 마음을 써야 할 것이다.
④널리 읽어라
간경은 반드시 폭이 넓어야만 비로소 융관하여 偏執에 빠지지 않게 된다.
대개 경은 이 곳에서 건립하면 저 곳에서는 소탕하고, 이 곳에서 소탕하면 저 곳에서는 건립하여 어떤 상황과 수준을 따랐을 뿐, 일정한 법이 없기 때문이다. 가령 <능엄경>에서 대세지보살이 圓通에 들지 못한 것을 보인 것만을 읽고, 널리 정토를 찬탄한 다른 경전을 읽지 못했으면, 염불법문은 숭상할 만한 것이 못된다고 생각할 것이요, 달마가 양무제의 물음에 대하여, 공덕은 복을 짓는 것에 있지 않다고 말한 것만을 보고, 널리 육도만행을 가르친 경전을 읽지 않았으면, 유위복덕은 버려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정토만을 고집하고 선종을 비방하거나, 유위만을 고집하고 무위를 비방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경의 한 뜻에만 집착하는 자는 혜명을 잃게 될 것이다. 내가 일찍이 '<육조단경>은 지혜가 없는 자에게는 읽게 해서는 안된다' 하고 말한 적이 있었다. 이것은 이것만을 고집하여 다른 것은 버릴까 염려해서였다.<죽창수필 1집>
⑤깊이 읽어라
또한 널리 읽는 것만 중시하여 주마간산 격으로 경전을 읽지 않아야 한다. 경전은 지식 쌓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간경수행은 널리 읽는 일과 깊이 읽는 일을 잘 아울러서 공부해나가야 한다. 그리고 경전을 읽을 때는 논리를 넘어 마음으로 읽으면 거기에 담긴 진리가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서 마음을 비추게 될 것이다. 그래서 경전은 살아있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나 경전을 수천번 읽더라도 간절한 마음으로 깊이 읽고 듣지 않는다면 경전의 참뜻이 풀리지 않을 것인 바, 간경수행자는 모름지기 부처님의 말씀을 더욱 깊이 마음으로 일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간경수행자는 생각으로 짓는 알음알이가 아닌, 사유를 넘는 사유로 읽어야 한다.
⑥실천하라
경전을 보는 것은 불법수행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계속 강조했듯이 실천이 중요하다. 실천하지 않고 경만 보는 자는 이미 간경수행자가 아니다. 간경수행자가 지켜야할 여러 가지 사항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실천하는 것이다. 실천, 이것은 아무리 강조에도 지나치지 않는다.
이(理).사(事)를 아울러 중히 여기라.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차라리 사(事)를 중히 하라. 수행하는 과정에서 이(理)와 사(事)는 서로 표리의 관계요, 서로 배합하는 관계요, 서로 돕고 서로 이루어 주는 관계에 놓여 있다. 이가 있으므로 해서 사를 짓는 것이 비로소 근거가 있게 되고, 강령이 있고 목표가 있고 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요, 사가 있으므로 해서 비로소 이론을 실현할 수 있고 사실을 증거하고 이해하는 정확성을 알 수 있고 그 효과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이가 있고 사가 있는 것은 마치 이미 노정(路程)을 알고서 여행하는 것과 같을 것이요, 이만 있고 사가 없으면 이미 노정은 알았으면서 기꺼이 길을 떠나지 않는 것과 같을 것이며, 사가 있고 이가 없는 것은 길을 갈 줄은 알면서 노정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할 것이다. 이를 미루어 이미 노정을 알고서 여행을 떠나는 이와 사를 갖춘 자만이 비로소 성공할 수 있고, 그 밖의 두 가지는 모두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한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길을 떠나려는 사람이 비록 자신의 지혜가 천박하여 노정을 정확히 알고 있지는 못하더라도, 만약 前賢들이 이미 찾아내어 후인들에게 보여주신 이정표를 참고하여 길을 간다면, 역시 능히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경론이나 고덕의 저술이나 그 외 事跡이 바로 길을 가리키는 이정표인 것이다. 그러므로 후인들이 이를 참조하여 실행하기만 하면 저절로 공을 이루어 고인과 전혀 차이가 없는 지점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만 있고 이가 없는 것은 조금도 걱정할 것이 없고, 진정 걱정해야 할 일이라면, 바로 제자리에 앉은 채 입으로만 지꺼리면서 한 걸음도 내디디지 않는 이만 있고 사가 없는 자들인 것이다. 그러나 엄격히 말하자면 사가 없는 자는 또한 이도 없는 자라고 해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이미 담장이 무너질 것을 알았다면 반드시 도망하여 피할 줄도 알게 마련이다. 그대로 앉은 채 움직이지 않는다면 이는 안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불법은 일자무식의 우부우부(愚夫愚婦)는 제도할 수 있으나, 세지총변(世智聰辯)한 자나 수행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자는 제도할 방도가 없다. 그러므로 예전의 주리반타가는 매우 암둔하였으나 마침내 정혹(情惑)이 다하여 아라한과를 증득했으며, 제바달다는 총혜명민(聰慧明敏)했으나 끝내 산 채로 지옥에 떨어짐을 면치 못하였다. 이런 점에서 보면 비록 뱃속 가득 이해를 채워 두었으나 만약 실제의 수행이 없다면 무시혹업(無始惑業)이 꽁꽁 그대로 봉합되어 털 끝 만큼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니, 이런 것이 사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차라리 부뚜막 앞의 늙은 할미가 온 얼굴에 숫검정을 묻히고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 채 때때로 부처님을 상념(想念)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수행인이 만약 종신토록 그저 명상리론(名相理論)의 흙무더기 속에서 지해(知解)만을 구하여, 설사 불학박사(佛學博士)가 된다 하더라도 진실한 수행에 힘쓰지 않는다면, 이런 자를 꾸짖어 '밥을 말로만 해서는 배가 부르지 않고, 남의 보배를 헤아리는 것만으로는 마침내 가난을 면치 못한다' 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누구든 이미 이론에 밝고서 다시 능히 불사를 실행할 수 있다면, 이런 사람은 복과 지혜가 구족하고 이론과 실행이 상응하여 인과 가 원숙하여 반드시 머지 않아 일을 마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차라리 사가 있고 이가 없을 지언정 이만 있고 사는 없는 것은 옳지 않다. 불법을 배우는 자는 특히 이 점에 유의해 주기 바란다.<『정법개술』1)>
2)일반적인 독서의 원칙
그동안은 경을 대할 때의 사항에 대해서만 말씀드렸지만 경전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독서에 대한 원칙을 갖는 것도 간경행자에게 꼭 필요한 사항이 아닐까 생각되어 조선 후기 유학자가 쓴 『산림경제』를 인용하여 정리하고자 한다. 유학자들은 유교경전을 늘 읽고 그 가르침대로 생활하고자 애씀으로서 성현(聖賢)의 위에 오르고자 하였으니 이는 불교의 간경수행과 매우 유사한 수행법을 가지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그래서인지 이 책이서는 독서에 따르는 사항을 매우 자세히 제시하고 있다.
①글 읽는 방법
글을 읽을 때는 반드시 단정한 자세로 손을 마주잡고 무릎을 꿇고 앉아 책을 대하여 마음과 뜻을 분명히 함으로써 몸으로 실천할 생각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글은 글대로이고 나는 나대로가 되어 무슨 도움이 있을 것인가.
공부한 사람이 너무 많이만 보려 들면 익숙하지 못하고,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알려고 하면 정밀하지 못하여 빨리 하려는 것이 도리어 더디게 되는데 그게 바로 공부하는 사람의 큰 병통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루 분량을 적게 하여 익히 읽고 정하게 생각하면 오랜 후에는 자연히 바른 이치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글을 읽을 때에는 부지런히 익히 읽고 또 부지런히 이치를 탐구해야만 이치가 마음 속에 젖어들어 막혀서 통하기 어려운 폐단이 없는 것이다. 한 책을 읽을 때는 다른 책은 치워두고 다 알고 나서 마음을 바꾼 다음 다른 책을 보기 시작해야 한다. 만약 그 책을 숙독하기 전에 또 다른 책을 읽으면 여러 가지를 보았다는 소득은 있을지 모르지만 학문이 정밀하지 못하니 공부하는 자가 가장 경계해야 할 일인 것이다.
②글 읽는 규칙을 따르는 법
이단 등 바르지 못한 잡동사니 서적들은 잠시라도 열람해서는 안되고, 속되고 음란한 사곡이거나 그 밖의 수호지, 금병매 따위는 사람의 마음을 동요시킬 뿐만 아니라 풍속까지 해칠 염려가 있으므로 애당초 눈에 대지 말고 보면 본 대로 없애버려야 한다.
글을 읽는 사람이면 우선 병통을 예방하는 방법부터 반드시 생각해야 하는데 되도록 낮은 목소리로 많이 읽을 것이고 소리를 높여 괴로울 정도로 읽어서는 안된다. 기운이 손상될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면 오래 견디지 못한다. 책 읽는 방법은 너무 느릿하여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너무 서둘러도 안 된다.
독서는 모름지기 오경(새멱 4시부터 6시까지)쯤 청신할 때 해야 하는데, 그 효과가 진시나 사시보다 몇 배나 유익하다. 등불 아래서 독서하는 것이 정진의 효과는 크지만 세 시간 남짓 읽고는 그쳐야 한다. 만약 지나치게 읽고 나면 정신이 소모되어 다음날 피로를 더 느끼게 된다. 오경에 자리에서 일어나 글을 읽고 먼동이 틀 무렵 잠시 눈을 붙였다가 해가 뜰 즈음하여 다시 일어나 세수와 양치질을 하고 글을 읽으면 정신이 더욱 맑아진다.
독서를 많이 하여 피곤을 느낄 때면 책을 놓고 천천히 거닐면서 얼마 동안 산책을 함으로써 정신과 심목을 길러야 기민성이 있게 된다. 만약 멍청하게 괴로운 공부를 계속하면 총명한 천성을 잃을 뿐 아니라 몸이 약한 사람은 질병이 생기게 된다. 책을 읽다가 몸이 나른해질 때는 두 어깨를 힘을 써가며 앞 뒤 또는 위아래로 몇십 번 움직이면 전신에 피가 돌고 정신도 상쾌하여 모든 질병이 발생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수양가들이 말하는 녹로쌍관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배불리 먹은 후에는 어느 정도 소화가 된 다음에 책 읽기를 시작해야지 그렇게 하지 않아서 체증이 한번 발생하게 되면 그때는 책 읽기를 폐지해야 할 뿐 아니라 더러는 고질병이 되기도 한다.
이상 유학자가 밝힌 독서에 관한 규칙을 옯겨 보았다. 긴경행자에게도 동움이 되리라 생각되며, 한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책을 신중하게 선택하라는 것이다. 옛날에는 수호지 정도를 경계했다지만 오늘날에는 눈만 뜨면 접하게 되는 음란물과 혼잡스런 매체의 홍수 속에서 정신차려서 가리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방일과 들뜸과 회환 등이 마음을 흔들어 놓을 것이기 때문이다.
5.간경수행의 공덕
1)금강경
간경수행의 공덕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누누히 말씀하셨다. 그 가운데 먼저 『금강경』에서 밝히신 몇 구절을 들어보겠다.
"수보리야, 이 경이나 아니면 그 가운데 4구게 만이라도 마땅히 알아라. 이곳은 일체 세간의 천상과 인간과 아수라가 다 마땅히 공양하기를 부처님의 탑묘와 같이 하는데, 어찌 하물며 사람이 있어 능히 다 받아지니며 읽고 외움이랴. 수보리야,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가장 높은 제일가는 희유한 법을 성취하리라.
만약 이 경전이 있는 곳이면 곧 부처님과 존중하신 제자가 계심이 되느니라."
"수보리야, 장차 오는 세상에서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있어서 능히 이 경을 받아지니고 읽고 외우면 곧 여래가 불지혜로써 이 사람을 다 알며 이 사람을 다 보나니 모두가 헤아릴 수 없고 가 없는 공덕을 성취하게 되리라."
"수보리야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있어 아침에 항하의 모래수와 같은 몸으로써 보시하고, 낮에 다시 항하의 모래수와 같은 몸으로 보시하며, 다시 저녁 때에도 또한 항하의 모래수와 같은 몸으로 보시하여 이와 같이 무량백천만억겁 동안을 몸으로써 보시하더라도 만약 다시 어떤 사람이 있어 이경전을 듣고 믿는 마음으로 거슬리지 아니하면 그 복이 저보다 수승하리니 어찌 하물며 이 경을 베끼고 받아지니며 읽고 외우며 남을 위하여 해설해줌이랴."
2)법화경
조계종의 소의경전인 금강경 못지 않게 우리 나라에게 가장 많이 읽히고 있는 경 가운데 하나가 법화경이다. 법화경은 사상적인 탁월함뿐만 아니라 경문이 비유가 많고 평이하게 쓰여 있어 사람들에게 쉽게 감응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불보살님의 위신력과 다양한 진언과 행법들, 그리고 어느 경전보다 법화경 수지독송의 공덕을 강조하여 법화경을 하나의 신앙의 대상으로까지 여기게 되었다.
숙왕화야, 이 '법화경'은 능히 일체 중생을 구원하며, 이 경은 능히 일체 중생의 모든 고뇌를 여의게 하고, 이 경은 능히 일체 중생을 크게 이익케 하여 일체 중생의 소원을 충만케 하나니, 맑고 시원한 못이 일체의 목마른 사람들을 채워 주는 것과 같으며, 추워 떨던 사람이 불을 얻은 것과 같고, 벗은 이가 옷을 얻은 것과 같으며, 상인이 물건의 주인을 얻은 것과 같고, 아들이 어머니를 만난 것과 같으며, 나루에서 배를 얻은 것과 같고, 병든 이가 의사를 만난 것과 같으며, 어둔 밤에 등불을 만난 것과 같고, 가난한 사람이 보배를 얻은 것과 같으며, 국민들이 현명한 지도자를 만난 것과 같고, 행상이 바다를 얻은 것과 같으며, 밝은 햇불이 어둠을 제거하여 주는 것과 같느니라. 이와 같이 '법화경'은 중생들의 일체 고통과 일체 질병을 여의게 하여 능히 일체 생사 속박에서 해탈케 하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어떤 사람이 이 '법화경'을 듣고 스스로 쓰거나 만일 다른 사람을 시켜 쓰면, 그 얻는 공덕은 부처님의 지혜로 그 많고 적음을 헤아리어도 그 끝을 알 수 없느니라. 혹은 이 '법화경'을 써서 꽃. 향. 영락. 소향. 말향. 도향과 번개. 의복과 가지 가지의 등인 소등. 유등. 향유등. 첨포유등. 수만나유등. 바라라유등. 바리사가유등. 나바마리유등으로 공양하더라도 그 얻는 공덕은 또한 한량 없느니라.
숙왕화야, 만일 어떤 사람이 이 약왕보살의 본사품을 들으면 또한 한량 없고 가이 없는 공덕을 얻을 것이며, 혹은 어떤 여인이 이 약왕보살의 본사품을 듣고 받아 지니면, 그가 여인의 몸을 마친 뒤에는 다시 여인의 몸으로 태어나지 않으리라. 만일 여래께서 멸도하신 후 오백년에 이르러 어떤 여인이 이 경전을 듣고 그 설한 바와 같이 수행하면, 그 목숨을 다 마친 뒤에 극락세계의 아미타불을 큰 보살 대중들이 둘러 있는 곳에 가서 연꽃 가운데의 보배 자리에 태어나리라. 그리하여 다시는 탐욕하려는 번뇌가 없고, 성내고 어리석은 번뇌도 없으며, 또한 교만하고 질투하는 여러 가지의 더러운 번뇌가 없으리라. 그리고는 보살의 신통과 무생법인을 얻어서 눈이 청정해지며, 이 청정한 눈으로 칠백만 2천억 나유타 항하의 모래같은 열 부처님 여래를 보게 되나니, 이때 여러 부처님들이 멀리서 칭찬하시기를 '착하고 착하도다. 선남자야, 너희들이 능히 석가모니불의 법 가운데서 이 경을 받아 지녀 읽고 외우며 사유하여 다른사람들에게 설해 주면, 그 얻는바의 복덕은 한량 없고 가없어 불도 능히 태우지 못하고 물도 능히 빠뜨릴 수 없느니라. 이러한 공덕은 1천 부처님들이 다함께 설한다 할지라도 능히 다 할 수 없으며, 너희들이 이제 여러 마군을 파하여 생사를 벗어나니, 여러 가지 다른 원수는 자연히 멸하느니라.
3)기타
관자재보살은 약차 나찰을 위하여 법을 설했다.
너희들은 잘 들으라. 대승의 경이 있는데 이름이 대승장엄보왕이다. 만약 몇 구절을 듣고 잘 받아서 가지고 독송하여 그 뜻을 해설하고 마음에 항상 생각하면 그 복덕은 한량이 없을 것이니라. 선남자야, 모든 티끌수는 내가 능히 그 수를 헤아릴 수 있으나 만약 대승장엄보왕경에 일사구게를 능히 받아 지닌다면, 그 거두는 복덕은 내가 능히 그 수량을 헤아리지 못하며, 만약에 큰 바다에 모든 물은 내가 능히 그 물방울 수를 헤아릴 수 있으나 만약 이 경에서 능히 일사구게를 받아 가지는 그 복덕은 내 능히 그 수량을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가사 십이긍가하의 모래수와 같은 여래응정등각을 십이겁 동안 함께 한 곳에 모시고 항상 의복, 음식, 와구, 탕약과 다른 모든 자구로써 이와 같이 모든 부처님께 보시하고 공양하여 얻는 복덕은 그 수량을 다 말할 수 없다. 오직 나뿐 아니라, 흑암처에서도 다 설하기 어려울 것이다.
선남자야, 또 만약 사대주의 사람이 각각 자기 사는 집으로써 정사를 만들어서 그 안에 천금보로써 천개의 불탑을 하루에 다 만들고, 여러 가지로 공양하여 얻은 복덕이 이 경 가운데 일사구게를 잘 수지하여 얻은 복덕만 같지 못할 것이다. 선남자야, 오대하가 큰 바다에 들어가듯 이와 같이 흘러들어 가는 것이 다함이 없는 것과 같이, 만약 이 대승경전의 사구게를 지니는 자가 있다고 하면 그 얻는 복덕의 흘러 들어 가는 것도 또한 다함이 없느니라.
이같은 유정들이 마음으로 오직 이 경의 이름만 생각해도 이러한 이익과 안락을 얻는데 만약 이 사람이 이 경을 듣거나, 능히 서사하여 수지독송하거나 공양하고 공경하면 이와같은 사람은 항상 안락을 얻을 것이다. 혹은 이 사람이 이 경 중에서 한 글자만 서사하여도 이 사람은 당래에 윤회의 고를 받지 않고 영원히 도아와 괴회 등 이러한 하천한 짐에는 태어나지 않고, 태어난 몸은 영원히 곱사와 앉은뱅이와 언청이와 문등병 등의 기뻐하지 않는 형상을 받지 않고, 신상이 원만함을 얻으며 제근(諸根)이 구족하여 큰 세력이 있는데, 하물며 구족하게 받아지니고 독송하고 서사하며 공양하고 공경하는 사람의 얻는 공덕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대승장엄보왕경>
선남자여, 이 경을 받들어 지니는 이는 그 마음을 얻고 잃는 것이 없이 항상 범행을 닦으리라. <금강삼매경 총지품>
경을 등는 일 귀를 거치는 게 인연일 것이니 그 결과 기쁜 복이 있으리라. 환상같은 몸뚱이야 사라지더하도 참다운 행실은 없어지지 않으리라 <선가귀감>
이상의 인용들은 모두가 곧 금구(金口)의 정성스럽고 진실하신 말씀들이요, 중생의 허망심으로 맹랑하게 이른 말이 아니다. 그러므로 지극한 마음으로 독송하는 사람은 영험이 헛되지 않은지라 언제나 부처님께서 가만히 드리워 호념해 주심을 받을 것이니 혹은 '선재로다'하고 칭찬도 하시고 손으로 이마도 쓸어 주시며 함께 여래의 옷을 덮어 섭수하고 부촉하여 위신력의 가피로 따라 기뻐하심은 물론 또한 신왕이 보호하고 하늘의 선인들이 모시며 금강신이 옹호해 따르고 제석신이 꽃비로 찬탄할 것이다.
복덕이 되는 인유(因由)를 성취함이 법계 허공의 크기와 같고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이 뛰어나서 나아가서는 항하의 모래와 같은 칠보로 인연을 베풀게 되는 것이다. 아울러 또한 신체가 영통하여 무너지지 않으며 연꽃과 같은 혓바닥에 입에는 자단의 향내가 날 것이니 한 구절만 들어도 반드시 보리심에 나아가고 반 게송만을 외워도 공덕이 부처님과 같아지리라.
이와 같아서 만일 경전을 써서 펴낸다면 욕계천상의 과보를 받고, 지니고 읽고 외우며 수행하는 사람을 공양하면 복덕됨이 부처님보다 더욱 지나리니 이를 일러서 법위덕력('法威德力)의 생각으로 헤아리기 어려운 문'이라고 하는 것이다.
만 가지 상서와 천 가지 영험이 이로 인하여 감통하며 또한 삼현(三賢)과 십성(十聖)도 이로부터 나는지라 끝없는 옛적부터 오늘날에 이르도록 아울러 범부로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삼업으로 공양하고 십종으로 받아가져 참된 말씀을 받들어 전해 오면서 면면히 끊이지 않거늘 어찌 비방하는 마음만 일으켜서 올바른 법륜을 단절케 하겠는가. <만선동귀집>
경전의 수지독송의 공덕을 설한 경전이 어디 한둘인가. 거의 모든 경전에서 경전의 수지 독송을 강조하고 있다. 이렇듯 경전의 수지독송의 공덕을 강조한 것은 주로 불법의 유포와 관계가 있다. 다른 사람에게 설해주거나 경을 베껴서 전해 주는 것은 지금과 같이 인쇄출판 및 정보통신이 발달하지 않은 사회에서 포교의 유일한 경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중요한 것은 경전은 진리의 바다, 보배의 바다이니 그 속에서 진리, 보배를 주어 자기 것으로 만들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즉 경전을 보고 그 곳에서 진리를 발견하고 깨달음을 얻는다면 그보다 더 큰 공덕이 있겠는가. 그래서 경전에서는 이루헤아릴 수 없고 비유로도 표현할 수 없는 큰 공덕이 있다고 한 것이다.
간경의 필요성 및 바른 자세와 실천 방법에 대해서는 이미 말하였으므로 더 이상 부언하지 않겠다. 오직 바른 실천을 당부할 뿐이다. 한편 많은 대승 경전에서 불보살님의 위신력이 광대원만함을 보이셨기 때문에 경전이 신앙의 대상이 되었고, 경전에 등장한 불보살님은 기도의 대상이 되어 기도, 염불, 진언과 같은 새로운 신앙형태를 탄생시켰다.
1)중국 방륜의 저서로 정토법문의 실천법을 상술함.
제 5장 염불수행
1.염불수행의 의미
1)염불의 정의
염불에서 말하는 념이란 지킴(守)을 뜻합니다. 참 성품을 늘 드러나게 하고 끝없이 기르려면 그것을 지키어 잃어버리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염불에서 말하는 불이란 깨달음이라는 뜻입니다. 깨달음이란 참 마음을 밝게 비춰서, 늘 깨어 있어 어둡지 않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한결같은 무념으로 밝고 뚜렷하게 깨닫고 이렇듯 밝고 뚜렷하게 깨달으면 온갖 생각이 끊어지니 이것을 일러 참 염불이라 합니다.(보조스님의 <염불요문>중에서)
염불이란 부처님의 명호를 소리내어 부르거나 상호를 관상하거나 공덕을 의념함으로써 부처를 보고 부처를 이루며 불국토에 왕생하는 수행법이다. 염불은 부처님 당시에서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행해지고 있는 수행법으로 가장 더욱 대중적으로 행해지는 수행법 중의 하나이다. 특히 정토불교에서는 염불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수행체계와 방법를 세워 발전시켰으므로 요즘은 염불하면 극락왕생을 떼 놓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다. 정토신앙은 한마디로 아미타불의 본원력에 의지하여 극락정토에 왕생하고자 하는 것이다. 극락정토는 아미타불이 교주(주불)이고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좌우보처 보살이다. 그래서 아미타불을 주로 하고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보조적인 염불로 한다. 이러한 정토신앙에 근거한 염불외에도 독자적인 관음신앙과 지장신앙에 기반한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 염불이 많이 행해지고 있다.
이와같이 염불이 불보살의 본원력에 의지하므로 타력신앙이라고 생각되지만 자력이 없는 타력은 결코 있을 수 없으므로 자력과 타력이 동시에 갖추어지는 수행이다. 더구나 정토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단순히 정토에 나겠다는 생각만으로는 정토에 날 수 없으며 보리심을 발하고 일심으로 염불행을 닦아야 한다. 정토가 서쪽으로 십만팔천만리 밖에 있다는 이유는 우리의 마음이 부처와는 그만큼 거리가 있다는 것으로 실제로는 십선과 팔정도를 닦으면 그 거리는 바로 사라지고 곧 정토에 왕생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서방극락정토에 계신다는 아미타부처님도 바로 우리 마음의 바탕으로서 우리 마음이 청정해지면 무량한 광명이 이 마음으로부터 밝게 빛날 것이 틀림없다. 이러한 믿음으로 염불을 하는 것이다.
지금은 다양한 염불법 중에서 칭명염불이 주가 되었는데, 염불의 염이 억념, 작의 등의 의식작용을 의미하듯이 생각이 소리와 결합되어 일념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염불이란 입으론 부처를 부르며 마음으론 본성을 찾는 일, 입으로만 부르고 마음으로 찾지 않으면 도를 닦는 데 무슨 이익 있으랴. 나무아미타불 여섯 글자 법문은 윤회를 벗어나는 지름길이다. 마음으로는 부처님의 경계를 생각하여 잊지 말고 입으로는 부처님의 이름을 부르되 분명하고 어지럽지 않도록 해야 하는바, 이처럼 마음과 입이 상응하는 게 염불이다.<선가귀감>
2)염불수행의 역사
염불의 역사는 부처님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함경에 보면 삼념, 오념, 육념, 10념 등의 염법이 있다. 즉, 염불, 염법, 염승, 염계, 염시, 염천, 염휴식, 염안반, 염신, 염사의 수행법이다. 이것은 부처님을 생각하고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며(여래 10호), 나무불을 표현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부처님의 가르침과 부처님의 승단을 생각하는 삼염법, 부처님의 계율과 가장 깨끗하며 선한 공덕이 있는 하늘을 생각하는 오념법, 여기에 보시를 생각하는 것이 더해진 육수념이 있다. 그리고 육수념에 마음의 조용함을 염하는 념휴식, 출입하는 숨을 세고 장단 등을 아는 념안반, 이 몸은 항상하지 않음을 생각하는 념신, 이 몸은 결국 죽는다는 염사 등을 더하여 십념이 되었다.
염불이 지금처럼 중요한 수행법의 하나로 지리잡게 된 것은 역시 정토신앙과 관련이 깊다. 정토신앙은 부처님의 본원에 의지하여 정토에 왕생하고자 하는 신앙으로, 정토왕생의 방법으로 염불이 권장되기 때문이다. 정토신앙은 기원 후 1~2세기에 걸쳐 대승불교 운동과 함께 출가교단은 물론 재가자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후 정토신앙은 인도에서 서역.중국을 거쳐 한국에 들어와 일본으로 전해졌다.
마명보살의 기신론, 용수보살의 십주비바사론과 지도론 또한 세친보살의 정토론 등에서도 염불은 부처님의 무량 공덕과 근본서원을 확신하는 수행이기 때문에 불.보살과 감응하고 불.보살의 가피를 입어, 마치 순풍에 돛단배와 같이 수행하기 쉽고 성불하기 쉬운 이른바, 이왕이수의 행법임을 찬양하였다. 중국에서는 혜원, 담란, 지의, 도작, 선도, 자민, 지례, 주굉 등으로 이어지면서 다양한 논의와 주장들이 있었으며 다른 종파와 결합하여 쌍수하는 모습으로 정착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시대부터 정토신앙이 대중 속에 뿌리내렸다. 원효, 자장, 의상스님 등 신라의 대표적인 스님들은 물론이고 많은 학승들에 의해 정토삼부경에 대한 번역과 각종 주석서가 집필되어 정토교학에 대한 연구가 매우 활발하였다. 고려시대에도 대각, 보조, 태고, 나옹스님들에 의해 선종을 위시하여 화엄 법상 천태 밀교 등의 각 종파에서 폭넓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독자적인 종파로는 성립하지 못하였고, 조선시대에 함허, 서산, 사명대사 등이 선과 염불을 융합한 선정일치의 견지에서 염불을 역설하여 지금도 염불은 승속을 막론하고 가장 대중적인 수행법으로 자리잡고 있다.
역사적인 예로보면 발징화상(發徵和尙)의 만일염불회가 있다. 만일염불회의 동참대중은 승려 31인, 신도 1,828인이었다. 신라 경덕왕 17년(758)에 극락왕생을 발원하고 일만일 염불정진을 시작, 29년 만인 병인년(786)에 만일이 되었다. 그 날 금빛찬란한 아미타불이 현신하여 염불대중을 차례로 극락으로 인도하였음을 <삼국유사>는 전하고 있다.
염불만일회가 처음 개설된 도량이 바로 금강산 건봉사이며 발징화상에 의하여 창도되었다. 건봉사의 염불만일회를 기점으로하여 한국의 대소사찰에는 염불당이 들어서고 만일회의 염불결사운동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현풍 도성암에서는 1624년 성범(成梵)화상의 주도로 일만 팔천일 염불회가 개설되기도 하였다. 근래들어 염불에 대한 불교인들의 관심이 커지면서 만일염불결사가 새롭게 계승되고 있다.
일본은 헤이안시대 말에서 가마쿠라시대로 들어오면서 법연이 정토종을 개창하고 그의 제자인 친란은 정토진종을 개창하였다. 또한 일편은 각지를 돌아다니며 춤추며 염불하는 법을 가르쳐 종교적인 절정을 맛보게 했으며, 신기(神祇)신앙과 아미타신앙을 융합하여 모든 것이 나무아미타불의 명호밖에 없다고 설하는 시종을 열었다. 이들 정토교의 교파는 그 후 각각 발달하여 일본불교의 큰 흐름을 형성하여 현재에 이른다. 현재 대표적인 정토교는 정토진종과 서산정토종, 시종이 있다.
3)염불 수행의 의의
염이란 마음 속으로 하는 것으로, 마음으로 생각하고 기억하여 잊어버리지 않는 것을 염이라 하는 것이다. 유교로써 비유하면, 선비가 생각 생각에 공자를 생각하고 기억하면 공자에 거의 가깝게 갈 수 있지 않겠는가. 지금, 생각 생각에 오욕을 생각하고 기억하는 것은 잘못이라 하지 않으면서, 도리어 부처를 생각하고 기억하는 것을 그르다 하는구나! <죽창수필>
참선하는 사람들이 염불을 경시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하는 말이다. 부처님을 마음 속에 모시고 잠시라도 잊지 않으려는 노력이 바로 염불이니, 생각이 곧 부처의 생각이요, 말이 곧 부처의 말이며, 행동이 곧 부처의 행동이 될 것이 아니겠는가. 이와같이 염불하는 자의 모습이 당연히 부처를 닮아갈 것이므로 성불하기 위한 방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수행의 문이 여럿이나 궁극적 경지는 하나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문으로든 자신에게 적합한 것을 택법하여 여일하게 해나가면 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염불은 누구나 쉽게 행할 수 있고 또 쉽게 증득할 수 있기 때문에 옛부터 재가불자에게, 하근기 중생에게, 말세중생에게 특히 권해졌다. 왜 그런가. 불교 수행의 목적은 성불에 있다. 성불이란 무상정등정각을 이루었다는 말이고, 우주만물의 이치를 깨쳤다는 말이고, 자성을 보아 여의지 않음을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망념을 쉬고, 마음을 비우고, 모든 생각을 내려놓아야' 가능하다. 그러나 그 일이 쉽지 않다. 너무나 간단하고 명쾌함에도 불구하고 중생심을 한 번 돌리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염불에서는 거두절미하고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라'고 한다. 거창한 이론도 복잡한 절차도 필요치 않다. 아무생각없이 염불하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중생심이 조금씩 사그러든다. 그렇게 하는 사이에 어느 순간엔가 염불삼매가 되면 망심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서 자성불이 드러난다. 또한 비록 염불삼매를 이루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 공덕은 결코 헛되지 않으니, 언젠가는 결실을 맺을 것이다. 그래서 다른 어떤 수행보다 쉽게 할 수 있으면서 공덕이 크고 부작용이 없으니 말세중생에게 권하는 것이다.
4)염불수행의 원리
염불은 자신의 본성이 부처임을 믿고 자기 마음 가운데서 부처를 찾는 것이다. 이것은 염불만의 일이 아니고 불교의 모든 수행의 목표이다. 그런데 염불이 탁월한 점은 이행도라는 것이다. 이행도의 뜻은 앞서도 말했듯이 실행하기 쉽고 증득하기 쉽다는 말이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염불을 통해 소원이 성취되고 장애가 사라지며 무생법인을 얻고, 극락왕생하며 성불하는 원리가 무엇인가. 이것은 모두 불보살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보호하는 자비심과 우리가 불보살님을 그리는 마음이 만나서 얻어지는 것이다.
대세지 법왕자가 그 동안 五十二 보살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 발에 정례하고 여쭈었다.
"나는 생각하니 지나간 옛적 항하사겁 전에 부처님이 출현하시니 이름은 무량광이시며, 열 두 부처님이 한겁 동안에 계속하여 나셨는데, 그 마지막 부처님이 超日月光이시라. 그 부처님이 나에게 염불삼매를 가르치시기를 '마치 한 사람은 專心으로 생각하거니와, 한 사람은 전심으로 잊기만 하면 이 두 사람은 만나도 만나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하는 것이요, 만일 두 사람이 서로 생각하여 생각하는 마음이 함께 간절하면 이 생에서 저 생에 또 저 생에 이르도록 몸에 그림자 따르듯이 서로 어긋나지 아니 하느니라. 시방 여래께서 중생 생각 하시기를 어미가 자식 생각하듯 하거니와 만일 자식이 도망하여 가면 생각한들 무엇하랴. 자식이 어미 생각하기를 어미가 자식 생각하듯이 하면 어미와 자식이 세세생생에 서로 어긋나지 아니하리라. 만일 중생들이 지극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생각하고 부처님을 염하면 이 생에서나 혹은 저 생에서 결정코 부처님을 뵈올 것이며 부처님과 서로 멀지 아니하여 방편을 쓰지 않고도 저절로 마음이 열리는 것이, 마치 향기를 쏘이는 사람이 몸에 향기가 배는 것 같으리니 이것이 향광장엄이니라' 하시더이다.
나는 본래 인행 때에 염불하는 마음으로 무생법인을 얻었고 지금도 이 세계에서 염불하는 사람을 인도하여 서방정토로 가게 하나이다. 부처님이 원통을 물으시니 나의 경험으로는 이것 저것을 가리지 말고 육근을 모두 가져다가 항상 염불하되 깨끗한 생각이 서로 계속되어 삼마제를 얻는 것이 제일이 되겠나이다."<능엄경>
아이가 어머니를 잃어 버렸을 때 아이가 스스로 찾는 것보다는 어머니를 부름으로써 그 소리를 듣고 어머니가 쉽게 찾을 수 있는 것과 같다. 어머니는 자식을 잃어버리면 자식이 찾는 것 보다 더 절실하게 아들을 찾는 것처럼 우리의 어버이이신 불보살님은 우리를 애타게 찾고 계시니 우리가 마음을 다해 그분을 만나고자 하면 곧 우리 앞에 나타나실 것이다. 다만 찾고나면 우리의 근본성품이 곧 아미타부처님과 다르지 않았음을 알게 될 것이다. 한치의 간격도 없이 중생심이 머물던 바로 그 자리가 법신.보신.화신의 체성과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 마음이 부처요, 이 마음이 부처를 이루는 것이며, 삼세제불이 모두 이 마음부처를 증득한 것이니라. 육도중생이 본래 부처인 줄을 왜 모르는가? 다만 미혹해서 염불하기를 좋아하지 않음이니 지혜로운 자는 이를 알아서 성품을 보고 부처를 이룬다. 앉으나 누우나 항상 부처를 여읜 것 아니며, 괴로우나 즐거우나 부처를 잊지 않나니 옷 입고 밥 먹는 것도 부처요, 어느 곳을 가나 오나 모두 다 부처일세. 가로도 세로도 모두 부처요, 생각생각이 또한 부처이며 마음마음이 다 부처일세. 손을 놓고 활발히 집으로 돌아가서 부처를 보라!
근본성품의 둥근 광명이 본래 공(空)한 체성의 부처님(空佛)이요, 한 번 굴려 한 생각을 요달하면 그 이름이 곧 부처로다. 항상 머물러 멸하지 않는 까닭에 무량수불이라 하나니 법신 . 보신 . 화신의 체성은 조금도 부처님과 다를 바 없다네.
다만 욕심과 분노와 질투로 스스로 자기 부처를 상하게 하고, 주색잡기로 천진불(天眞佛)을 그르치며, 너다 나다 시비하여 육근으로 부처를 물리치도다.
아! 한 생각 돌이키지 않으면 어느 곳에서 부처를 구할건가? 지옥 . 아귀 . 축생의 세계에서는 영원히 부처님 법을 듣지 못하리니 정녕코 서로 권할지니, 따로이 부처를 찾고자 애쓰지 말고 은밀히 빛을 돌이켜서 자기 부처에게 귀의할지어다.
(발징화상의 <권념문> 중에서)
2.정토신앙과 염불수행
앞에서는 염불수행의 원론적인 면을 다루었으나 앞으로는 실제수행의 방법론을 다루어야 할 것이다. 이에 앞어 염불수행과 뗄래야 뗄 수 없는 미타정토신앙과 연관된 몇가지 필요한 사항들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1)신(信)
총설에서도 수행에 있어 가장 근본은 발보리심과 신심이라고 했다. 정토불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정토불교에서는 수행의 기본요건으로 신.원.행의 3자량을 말한다. 첫째 신이란 아미타불과 극락정토의 실존을 믿는 것이고, 둘째 그곳에 가겠다는 원을 세우는 것이며, 셋째 실천행으로 염불을 하는 것이다.
다른 모든 수행과 마찬가지로 염불수행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믿음은 앞에서 말한대로 자신의 본성이 곧 부처임을 믿는 것이고, 염불을 통해 그것을 발견할 수 있음을 믿는 것이다. <불설아미타경>에서 석존도 '염불법문은 세간에 믿기 어려운 법문이다' 하고 인정하였다. 그러므로 이 법의 골간은 완전히 신심에 의하여 건립되었고, 신심에 의하여 지탱되는 것이다. 신심이 있으면 행동에 옮길 수 있어서 인(因 = 信) . 과(果 = 行)가 원만할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불문이 비록 넓다 하더라도 불신하는 중생은 능히 제도하지 못하는 것이다.
신 . 원 . 행을 정토의 삼자량이라 한다. 자량이란, 비유컨대 먼 길을 여행하자면 자재와 양식이 필요하여, 만약 이 두 가지가 빠지면 절대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하겠다. 이 삼자량이 다시 서로 연관관계가 있어서 차례대로 신으로 말미암아 원이 나게 되고 원으로 말미암아 행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신이 만약 구족하지 못하면 원과 행도 모두 성립되지 않는다. 의심은 도에 장애가 되어 원과 행이 생기(生起)할 수 없게 한다. 만약 신심이 있으면 자연히 그 국토에 태어나기를 원하게 되며, 그 나라에 태어나기를 원하면 자연히 법을 의지하여 행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만약 차토의 선입견에 빠져있는 채 여래의 신변(神變)과 중생의 정식(淨識)으로 종합하여 만들어진 극락세계를 비교하려 한다면, 마치 개미가 인간의 국가와 사회의 갖가지 복잡한 조직과 행동을 추측하려는 것과 같다 할 것이니, 설사 만년을 추측하더라도 도저히 미칠 수 없는 노릇임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개미는 근본적으로 인간과 다른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부처가 아닌 이상 어떻게 명백히 부처의 지혜와 신통을 알 수 있을 것인가.
기왕 분명히 알 수 없다면 함부로 추측하는 따위의 우를 범하지 말하야 할 것이요, 다만 부처님의 말씀을 믿고 실행하여 착오나 공(空)에 떨어지는 일이 절대로 없어야 할 것이다. 만약 스스로 생각하기에 '나는 매우 총명하다. 절대 그러한 속임수에는 넘어가지 않는다' 한다면, 지혜있는 자가 보기에는 이야말로 어리석고 서투른 짓이며, 복혜(福慧)가 천박한 자의 소행임을 간파할 것이요, 이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가장 얻기 어려우면서 가장 손쉬운 법문을 능히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정법개술』)
이와같이 정토왕생을 위해서는 신.원.행의 3자량이 필요하며, 그 중에서 신이 기본이다. 예를 들어 산에 오른다고 하자. 먼저 산이 거기에 있으며 오를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두 번째 산에 오르겠다는 마음을 내야 하며, 세 번째 실제로 산에 올라야 한다. 그러나 처음에 원을 세울 때 산의 중턱까지만 가겠다고 생각한다면 정상까지 갈 수 없을 것이다. 정상까지 가겠다고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중턱에서 내려다 본 경치에 만족하지 않고 끝까지 오르는 것이다. 따라서 처음의 믿음이 중요하고 다음으로 정상까지 가겠다는 발심이 중요하며, 마직막으로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오르는 행이 필요하다.
2)원(願)
이와같은 믿음을 바탕으로 일어나는 것이 원이다. 무슨 일이나 목표가 분명해야 목적지에 재대로 도착할 수 있다. 모든 불보살님도 본원1)에 의해 수행하여 그것을 성취하였다. 정토행자는 무엇을 발원해야 하는가. 먼저 법장비구의 48대원을 통해 우리가 세워야할 원에 대해 생각해 보자. 왜냐하면 우리가 염하는 아미타불은 바로 眞如實相이요, 중생이 본래 갖춘 자성이다. 따라서 아미타불이 성불 이전 법장보살 때 세운 48의 서원은 곧 사홍서원의 구체적 표현으로서, 삼세 모든 부처님의 서원인 동시에 성불을 지향한 우리 중생의 서원이요, 이상이기도 한 것이다.
<법장비구의 48대원>
1.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에 지옥과 아귀와 축생의 삼악도가 있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2.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중생들이 수명이 다한 뒤에 다시 악도에 떨어지는 일이 있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3.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 중생들의 몸에서 찬란한 금색 광명이 빛나지 않는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4.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 중생들의 모양이 한결같이 훌륭하지 않고 잘나고 못난이가 따로 있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5.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중생들이 숙명통을 얻어 백천억겁의 옛 일들을 알지 못한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6.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중생들이 천안통(天眼通)을 얻어 백천억의 모든 세계를 볼 수 없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7.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중생들이 천이통(天耳通)을 얻어 백천억의 많은 부처님들의 설법을 듣고 그 모두를 간직할 수 없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8.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중생들이 타심통(他心通)을 얻어 백천억 모든 국토에 있는 중생들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9.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중생들이 신족통을 얻어 순식간에 배천억의 모든 나라들을 지나가지 못한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10.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중생들이 모든 번뇌를 여이는 누진통을 얻지 못하고 망상을 일으켜 자신에 집착하는 분별이 있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11.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중생들이 만약 성불하는 정정취(正定聚)에 머물지 못하고 마침내 열반을 얻지 못한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12. 제가 부처가 될 적에, 저의 광명에 한량이 있어서 백천억의 모든 불국토를 비출 수 없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13. 제가 부처가 될 적에, 저의 수명이 한정되어 백천억겁 동안만 살 수 있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14.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 성문들의 수효가 한량이 있어서 삼천대천세계의 성문과 연각들이 백천겁 동안 세어서 그 수를 알 수 있는 정도라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15.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중생들의 수명은 한량이 없으오리니. 다만 그들이 중생제도의 서원에 따라 수명의 길고 짧음을 자재로 할 수는 있을지언정, 만약 그 수명에 한량이 있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16.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중생들이 좋지 않은 일은 물론이요 나쁜 이름이라도 있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17. 제가 부처가 될 적에, 시방세계의 헤아릴 수 없는 모든 부처님들이 저의 이름을 찬양하지 않는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18. 제가 부처가 될 적에, 시방세계의 중생들이 저의 나라에 태어나고자 신심과 환희심을 내어 제 이름을 다만 열 번만 불러도 제 나라에 태어날 수 없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19. 제가 부처가 될 적에, 시방 세계의 중생들이 보리심을 일으켜 모든 공덕을 쌓고, 지성으로 저의 불국토에 태어나고자 원을 세울 때, 그들의 임종시에 제가 대중들과 함께 가서 그들을 마중할 수 없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20. 제가 부처가 될 적에 시방세계의 중생들이 제 이름을 듣고 저의 불국토를 흠모하여 많은 선근공덕을 쌓고, 지성으로 저의 나라에 태어나고자 마음을 회향할 제,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한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21.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중생들이 모두 32상(相)의 훌륭한 상호를 갖추지 못한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22. 제가 부처가 될 적에, 다른 불국토의 보살들이 제 나라에 와서 태어난다면, 필경에 그들은 한 생만 지나면 반드시 부처가 되는 일생보처의 자리에 이르게 되오리다. 다만 그들의 소원에 따라, 중생을 위하여 큰 서원을 세우고 선근공덕을 쌓아 일체중생을 제도하고, 또는 모든 불국토에 다니며 보살의 행을 닦아 시방세계의 여러 부처님을 공양하고, 또한 한량없는 중생을 교화하여 위없이 바르고 참다운 가르침을 세우고자 예사로운 순탄한 수행을 초월하여 짐짓, 보현보살의 공덕을 닦으려 하는 이들은 자재로 그 원행에 따를 것이오나, 다른 보살들이 일생보처에 이르지 못한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23.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보살들이 부처님의 신통력을 입고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기 위하여 한참 동안에 헤아릴 수 없는 모든 불국토에 두루 이를 수가 없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24.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보살들이 모든 부처님에게 공양드리는 공덕을 세우려 할 때 그들이 바라는 모든 공양하는 물건들을 마음대로 얻을 수 없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25.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보살들이 부처님의 일체 지혜를 연설할 수 없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26.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보살들이 천상의 금강역인 나라연과 같은 견고한 몸을 얻지 못한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27.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중생들과 일체 만물은 정결하고 찬란하게 빛나며, 그 모양이 빼어나고 지극히 미묘함을 능히 측량할 수 없으오리니, 만약 천안통을 얻은 이가 그 이름과 수효를 헤아릴 수 있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28.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보살들을 비롯하여 공덕이 적은 이들까지도, 그 나라의 보리수 나무가 한없이 빛나고 그 높이가 4백만리나 되는 것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29.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보살들이 스스로 경을 읽고 외우며 또한 남에게 설법하는 변재와 지혜를 얻을 수 없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30.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 보살들의 지혜와 변재가 한량이 있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31.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불국토가 한없이 청정하여, 시방 일체의 무량무수한 모든 부처님세계를 모두 낱낱이 비쳐봄이 마치 맑은 거울로 얼굴을 비쳐보는 것과 같지 않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32. 제가 부처가 될 적에, 지상이나 허공에 있는 모든 궁전이나 누각이나 흐르는 물이나 꽃과 나무나, 나라안에 있는 일체만물은 모두 헤아릴 수 없는 보배와 백천가지의 향으로 이루어지고, 그 장엄하고 기묘함이 인간계나 천상계에서는 비교할 수 없으며, 그 미묘한 향기가 시방세계에 두루 풍기면, 보살들은 그 향기를 맡고 모두 부처님의 행을 닦게 되리니, 만약 그러지 않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33. 제가 부처가 될 적에, 시방세계의 한량없고 불가사의한 모든 불국토의 중생들로서, 저의 광명이 그들의 몸에 비치어 접촉한 이는 그 몸과 마음이 부드럽고 상냥하여 인간과 천상을 초월하오리니, 만약 그러지 않는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34. 제가 부처가 될 적에, 시방세계의 헤아릴 수 없고 불가사의한 모든 부처님 세계의 중생들이 제이름을 듣고, 보살의 무생법인과 깊은 지혜 공덕인 다라니 법문을 얻을 수 없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35. 제가 부처가 될 적에, 시방세계의 헤아릴 수 없고 불가사의한 부처님 세계의 여인들이 제이름을 듣고 환희심을 내어 보리심을 일으키고 여자의 몸을 싫어한 이가 목숨을 마친 후에 다시금 여인이 된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36. 제가 부처가 될 적에, 시방세계의 헤아릴 수 없고 불가사의한 모든 부처님 세계의 보살들이 제이름을 듣고 수명이 다한 후에도 만약 청정한 수행을 할 수 없고, 필경에 성불하지 못한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37. 제가 부처가 될 적에, 시방세계의 헤아릴 수 없고 불가사의나 모든 부처님세계의 중생들이 제 이름을 듣고 땅에 엎드려 부처님을 예배하며 환희심과 신심을 내어 보살행을 닦을 제, 모든 천신과 인간들이 그들을 공경하지 않는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38.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중생들이 의복을 얻고자 하면 생각하는 대로 바로 훌륭한 옷이 저절로 입혀지는 것과 같으오리니, 만약 그러지 않고 바느질이나 다듬이질이나 물들이거나 빨래할 필요가 있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39.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중생들이 누리는 상쾌한 즐거움이 일체 번뇌를 모두 여왼 비구와 같지 않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40.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보살들이 시방세계의 헤아릴 수 없는 청정한 불국토를 보고자 하면, 그 소원대로 보배나무에서 모두 낱낱이 비쳐 보는 것이 마치, 맑은 거울에 그 얼굴을 비쳐 보는 것과 같으오리니 만일 그러지 않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41. 제가 부처가 될 적에, 다른 세계의 여러 보살들이 제이름을 듣고 부처님이 될 때까지 육근이 원만하여 불구자가 되는 일이 없으오리니 만약 그러지 않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42. 제가 부처가 될 적에, 다른 세계의 보살들이 제 이름을 들은 이는 모두 청정한 해탈삼매를 얻을 것이며, 매양 이 삼매에 머물러 한 생각 동안에 헤아릴 수 없고 불가사의한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고도 오히려 삼매를 잃지 않으리니, 만일 그러지 않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43. 제가 부처가 될 적에, 다른 세계의 보살들이 제 이름을 듣고도 수명이 다한 후에 존귀한 집에 태어자지 않는 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44. 제가 부처가 될 적에 다른 세계의 보살들이 제이름을 듣고 한없이 기뻐하며 보살행을 닦아서 모는 공덕을 갖추오리니, 만일 그러지 않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45. 제가 부처가 될 적에, 다른 세계의 보살들이 제 이름을 들으면 그들은 모든 부처님을 두루 뵈올 수 있는 삼매를 얻을 것이며, 매양 이 삼매에 머물어 성불하기까지 언제나 불가사의한 일체 모든 부처님을 뵈올 수 있으오리니, 만일 그러지 않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46.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보살들은 듣고자 하는 법문을 소원대로 자연히 들을 수 있으로리니, 만약 그러지 않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47. 제가 부처가 될 적에, 다른 세계의 보살들이 제 이름을 듣고 나서 일체 공덕이 물러나지 않는 불퇴전의 자리에 이를 수 없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48. 제가 부처가 될 적에, 다른 세계의 보살들이 제 이름만 듣고도 바로, 설법을 듣고 깨닫는 音響忍과 진리에 수순하는 柔順忍과 나지도 죽지도 않는 도리를 깨닫는 無生法忍을 성취하지 못하고, 모든 불법에서 물러나지 않는 불퇴전의 자리를 얻을 수 없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법장비구는 중생구제를 위한 간절한 염원으로 48가지 서원을 세우고 그것을 모두 이루어 극락정토를 완성하고 스스로는 아미타불이 되었다. 우리도 이와같은 원을 세우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염불행자의 서원으로는 사홍서원과 여래십대발원을 둘 수 있다. 이 외에도 각자 자신의 처지에 맞는 서원을 세우기 바란다. 이를테면 병이 많은 사람을 위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병고로부터 벗어나 건강하기를 발원합니다. 이 세상사람들 중에 베고픔으로 고통받거나 죽어가는 사람들이 없기를 발원합니다. 이 세상에 전쟁과 다툼이 없기를 기원합니다 등.
영원토록 삼악도를 여의옵기 원하오며
하루속히 탐진치를 어서 끊기 원하오며
한결같이 불법승을 듣기를 원하오며
부지런히 계정혜를 닦기를 원하오며
한결같이 부처님법 배우기를 원하오며
변함없이 보리심 지키기를 원하오며
결정코 극락세계 태어나기 원하오며
하루속히 아미타불 만나뵙기 원하오며
온 세상에 나의 분신 두루하기 원하오며
한량없는 모든 중생 제도하기 원합니다.
3)행(行)
아난아, 이렇듯 법장비구는 세자재왕부처님 앞에서 범천과 마왕과 용신 등 팔부대중과 그 밖에 많은 대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러한 48가지 원을 세우고 한결같이 뜻을 오로지 하여 불국정토를 건설하고자 굳은 결심을 하였느니라
그가 세우려는 불국토는 한없이 넓고 청정미묘하여 비할 데가 없으며, 또한 그 나라는 영원 불멸하여 모든 것이 변하지 않고 쇠미하지 않는 곳이니라. 법장비구는 이러한 청정하고 장엄한 정토를 세우기 위해 다시 불가사의한 영겁의 오랜 세월 동한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보살행을 닦았느니라. 그는 탐냄과 성냄과 남을 헤치는 생각은 내지도 않고 일으키지도 않았으며, 감각기관의 대상인 모든 형상이나 소리나 향기나 맛이나 촉감이나 분별하는 생각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았다. 또한 어려움을 참아내는 인욕의 행을 닦아 어떠한 고통에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고, 적은 욕심에 만족할 줄 아는 소욕지족의 마음으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삼독에 물들지 않았으며, 항상 삼매에 잠겨서 밝은 지혜는 어디에도 걸림이 없었느니라.
남을 대할 때는 거짓과 아첨하는 마음이 없이 언제나 온화한 얼굴과 인자한 말로써 미리 중생의 뜻을 조금도 굽히지 않고, 청정결백한 진리를 추구하여 모든 중생에게 은헤를 베풀었느니라.또한 그는 불법승 삼보를 공경하고 스승과 어른을 받들어 섬겼으며, 갖가지 수행을 쌓고 복과 지혜의 큰 장엄을 갖추어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공덕을 성취하게 하였느니라. <무량수경>
법장비구는 어떻게하여 48대원을 모두 이룰 수 있었을까? 그것은 이루헤아릴 수 없는 무수한 세월 동안에 수없는 보살행을 통해 가능했다. 애초부터 법장비구의 결심은 그 무엇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철두철미한 것이었다. <무량수경>에 보면 법장비구는 세자재왕 부처님께 정토를 이루는 수행법을 가르쳐 달라고 청하였다. 이에 세자재왕 부처님은 "비록 바닷물이라도 억겁의 오랜 세월을 두고 쉬지 않고 품어 내면 마침내 그 바닥을 다하여 그 가운데 보물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바닷물을 퍼내는 심정으로 보살행을 닦았던 것이다. 그렇다. 지금 우리의 결심도 이러해야 한다. 내가 비록 무수한 세월동안 무명에 덮혀 있었으며, 이 세상이 탐진치 삼독으로 물들어 헤어날 날이 기약없지만 언젠가는 그 마음이 청정하고 이 땅이 청정할 정토를 완성할 수 있으리라 믿고 그 날을 향해 쉼없이 가야 한다. 법장비구의 본원이 아니었다면, 정토도 아미타불도 없었을 것이다. 법장비구의 48대원과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시간 동안의 수행력에 의해 중생은 구원의 빛을 만날 수 있게 되었으니, 그 비결은 바닷물을 퍼낸다는 세자재왕의 비유처럼 그렇게 지성으로 진리를 구한 때문이다. 거룩하고 거룩하셔라, 찬탄하고, 감격하지 않을 수 없네. 감사하고 감사할 따름이다. 비록 우리의 행이 보잘 것 없는 것일지라도 산골짜기 도랑물이 멈추지만 않는다면 바다에 이르는 것은 의심할 일이 못된다. 다만 사람이 행하지 않고 좁은 소견으로 의심을 일으키는 것이 안타까울뿐이다.
그렇다면 염불행자의 수행법은 어떤 것이 있는가. <무량수경>에는 삼배왕생의 길이 있다고 한다. 첫째 상배는 출가사문이 되어 보리심을 발하고 한결같이 아미타불을 염하며, 여러 가지 공덕을 닦아 극락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자라 하였다. 둘째, 중배의 사람은 재가의 신자로서 마땅히 위없는 보리심을 내고 한결같이 아미타불을 염하며, 보시.지계 등 선근 공덕을 쌓아 이것을 회향하여 극락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자다. 셋째 하배는 여러 가지 공덕을 쌓지는 않더라도 마땅히 위없는 보리심을 발하고 생각을 오로지하여 다만 열 번만이라도 아미타불을 염해서 극락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자다. 모두 보리심을 발하고 일념으로 염불해야 하며, 그 외에 공덕에 따라 상배와 중배, 하배로 나뉜다.
<관무량수경>에서는 극락왕생의 수행법으로 먼저 세가지 복을 닦으라 권한다. 첫째, 부모에게 효도하고, 스승과 어른을 받들어 섬기며, 자비로운 마음으로 살생하지 않고, 지성으로 열가지 선업을 닦는 것이다. 둘째,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여 여러 가지 계율을 지키며, 거동과 예의를 바르게 하는 것이다. 셋째, 보리심을 일으켜 깊이 인과의 도리를 믿고 대승경전을 독송하며, 한편 다른 이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힘써 권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구체적인 수행법으로 16관법을 행한다. 16관법 중에 제14 상배관과 15 중배관, 16 하배관을 보면 중생이 근기가 각기 달라 수행하는 모습과 극락왕생하는 모습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이것을 보면 근기에 따라 지향해야 할 바를 알 수 있고, 하근기라하여 절망할 필요가 없음을 알 수 있다.
4)아미타불
믿음의 원천인 아미타불에 대해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아미타부처님은 이미 성불하신지 10겁이나 되었으며 그때부터 지금까지 설법하며 교화하고 계신다고 한다. 1겁이란 예를 들면, 둘레가 40리나 되는 돌산을 장수하는 사람이 백 년에 한 번씩 비단결 같은 얇은 옷으로 스쳐서 이 돌산을 없애도 아직 1겁이 안 되었다고 한다. 때문에 1겁이란 실제로 무한한 시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영원한 시간 속의 현재에 주하면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설법하시는 '영원한 현재불'이라는 의미이다.
아미타부처님은 이와 같이 열반에 들지 않고 영원토록 중생을 교화하시는 부처님이다. 따라서 아미타불은 무량수불 또는 무량광불이라고 부르는데 그 의미는 수명이 무량하고 빛이 무량한 부처님이라는 뜻이다.
사리불아, 그대 생각에 저 극락세계의 부처님을 어찌하여 아미타불이라 부르는지 아느냐? 사리불아, 저 부처님의 광명은 한량이 없어 시방세계의 모든 나라를 두루 비추더라도 걸림이 없기 때문에 아미타불이라 하고, 또한 그 부처님의 수명과 그 나라 사람들의 수명이 한량이 없고 끝이 없는 아승지겁이기 때문에 아미타불이라 이름하느니라. <아미타경>
아미타부처님은 법장비구 때의 수행력에 의해 한량없는 위신력을 갖춘 부처님이 되었다. 그 위신력의 빛은 무량한 곳을 두루 비추고 계시니 그 빛을 만나면 고통이 사라지고 해탈을 얻는다. 또한 그렇게 하시기를 끝없는 과거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고 또한 미래에도 계속하실 것이니 수명이 끝이 없다. 이렇게 수행을 통해 결과를 얻으신 부처님으로 아미타부처님을 보신불이라고 한다. 그러나 어떤 곳에서는 법신불이라고도 하고 화신불이라고도 한다. 그 이유는 현실에 나타난 화신불이건 수행의 과보를 보이신 보신불이든 진리 그 자체인 법신불이건 체성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미타부처님이란 나의 자성불이자 법신불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부처님이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몰라 밖으로 부처를 찾을 뿐이니, 우리가 모든 생각과 반연을 끊고 일심으로 염불할 때 그 속에서 나는 거짓 나를 벗어나 진실한 나, 즉 부처와 하나가 된다. 망상의 내가 자리를 비키고 나면 바로 그 자리에서 나의 진면목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다만 내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어찌할 바를 몰라하며 죽어도 놓지 못하고 생을 거듭하며 붙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두터운 무명의 벽도 염불 공덕으로 무너져 내리고 부처의 광명이 빛을 발한다. 이때 현실에서 아미타불을 만나고 나의 본래면목을 발견하며, 정토에 왕생한다.
5)극락정토
우리가 이루고자 하고 도달하고자 하는 정토는 어떤 곳인가. 우리는 왜 정토왕생을 원해야 하고 또 어떻게 그것을 이룰 수 있는가.
①정토의 정의
아미타불의 본원으로 건립된 정토의 이름이 극락정토이며 흔히 극락세계라 하는데 범어 수하마제(須訶摩提)의 뜻 번역이다. 그런데 극락정토란 청정하고 안락한 국토의 뜻으로서 다섯가지 흐린 것(五濁)이 없고,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비롯한 모든 괴로움이 없으며, 오직 즐거움만 있는 세계로서, 생사윤회하는 삼계를 뛰어넘은 영원한 낙토(樂土)임을 경전에서는 찬탄하여 마지 않는다. 그래서 극락정토는 모든 불 . 보살이 수용하는 청정한 보토(報土)인 동시에 중생들 또한 번뇌 업장만 소멸하면 금생과 내세를 가리지 않고, 스스로 보고 느끼고 누릴 수 있는 상주불멸(常住不滅)한 실상의 경계인 것이다.
이렇듯 극락세계는 시간 . 공간을 초월한 영생의 세계인데도 경에는 십만억 국토를 지난 아득한 서쪽에 있다고 한 것은 번뇌에 때묻은 중생의 분상에는 실재하지 않는 꿈같은 세계이기 때문에 중생의 차원에 영합(迎合)한 비유와 상징적인 표현임을 경전을 정독 음미할 때 충분히 짐작하고 남음이 있을 것이다. 범부의 망정(妄情)을 여윈 성자의 정견(正見)에는 사바세계 그대로 극락세계일지라도, 온갖 번뇌에 얽매이고 가지가지의 고액이 충만한 현실에 시달린 고해(苦海) 중생에게는 영생 안온한 극락세계란 역시 너무나 머나먼 이상향이 아닐 수 없다. 그러기에 우리 중생은 필경 돌아가야 할 본래 고향인 극락세계를 동경하고 흠모하며, 거기에 이르기 위한 간절한 서원을 굳게 세우고, 한량없는 선근공덕을 쌓아야 할 것이다.2)
정토란 맑고 깨끗한 땅으로 번뇌가 없는 곳이란 뜻이다. 번뇌가 있는 중생이 사는 곳이 예토이고 번뇌가 없는 불보살이 사는 곳이 정토이다. 그래서 정토를 불토 또는 불국토라고 한다. 따라서 정토란 사후에 가는 곳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현실에서 한 마음 돌려 깨달으면 바로 정토에 남을 알아야 한다. 이 정토는 흔히 말하는 천상(천당, 천국)과는 달라 3계와 6도를 벗어난 곳이다. 천상은 6도 윤회 중의 최상의 곳으로 사람들의 흠모의 대상이 되는 곳이지만 이곳도 업에 끌려가는 윤회의 세계이므로 복이 다하면 다시 3악도에 떨어질 수도 있다. 이에 반해 정토는 욕계 색계 무색계를 벗어났으며 6도 윤회를 벗어난 세계이므로 그곳은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른 세계이다. 그곳은 고통이 없고 기쁨이 계속된다는 점에서 극락이라고 하는데 이 즐거움도 천상의 즐거움이 비길 것이 못된다. 왜냐하면 천상의 즐거움은 한계가 있는 즐거움으로 유루복에 그치지만 정토의 즐거움은 진리 속에서 나고 진리와 함께 하는 법락으로 무루복인 것이다. 따라서 천상의 복덕으로는 따라갈 수 없는 공덕이 있으니 바로 성불의 터전인 것이다. 정토의 구체적인 모습은 앞의 법장비구의 48대원을 이룬 것이 정토이니 그것을 그대로 그려보면 될 것이다. 또한 <관무량수경>과 <아미타경>에도 정토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정토란 한마디로 성불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이 잘 갖추어져 있는 것으로 그곳에 태어나면 성불이 보장되는 곳이다. 그러므로 불자들은 천상에 나기를 바라기 보다 정토에 왕생하여 윤회로부터 해탈하고 부처를 이루기를 마땅히 원해야 할 것이다.
②유심정토와 타방정토
그렇다면 이러한 정토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이에 대해 타방정토설과 유심정토설이 있다. 타방정토란 이 세상 밖 어느 곳에 정토가 실제로 있다는 것이고, 유심정토란 우리 마음 밖에 따로 찾아야 할 정토는 없으며 마음이 청정하면 그 곳이 곧 정토라는 것이다.
유심불토라는 것은 마음을 깨달아야 비로소 날 수 있는 곳이니, <여래부사의경계경>에 이르기를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따로 있는 바가 없고 오직 自心에 의지한다. 보살은 이와 같이 모든 부처님과 모든 법이 오직 마음의 현상임을 분명히 알아서 수순인(隨順忍 ; 화엄의 '十忍品'에 나오는 보살이 무명번뇌를 끊고 온갖 법이 본래 적연한 줄 깨달을 때 생기는 열 가지 安住心 가운데 第二忍. 따라서 忍은 認의 뜻이 있다. 이 忍은 지혜로 온갖 법을 생각하고 관찰하여 진리에 기꺼이 따름을 말한다)을 얻고는 혹은 초지에도 들며 몸을 버리고는 묘희세계에도 나며 혹은 극락의 정토에도 나는 것이다" 하였다.
그러므로 알라. 마음을 알면 바야흐로 유심인 정토에 나거니와 경계에 집착하면 다못 반연하는 바의 경계 가운데만 떨어질 것이니, 이미 이와 같이 인과가 차이가 없는지라 곧 마음 밖에는 법이 없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평등의 문'과 '무생의 뜻'을 비록 교에 의지해서 믿기는 하지만 당인(當人) 스스로를 살펴보아 역량은 미흡하고 관력(觀力)은 얕으며 마음도 또한 분주히 들뜬다면 반연하는 바의 경계는 강하고 무시겁래로 사사로이 익혀 온 습기는 무거운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이러므로 이런 이들을 위해 제불께서 방편문을 베푸시었으니, 간절한 원력과 가피의 힘으로 모름지기 불국에 나서 인연따라 인력(因力)을 쉽게 이루고 속히 대승의 보살도를 행할 것을 권하신 것이다. 이를테면 <기신론>에서 "중생이 처음 이 법을 배워 올바른 믿음을 구하려 하나 마음이 성략(怯弱)하므로 이 사바세계에서 항상 부처님을 만나뵙고 친히 공양하지 못할까 근심하기를 '신심을 성취하기 어렵다' 하여 뜻이 물러나려 하는 이는 마땅히 알라. 여래께서 뛰어난 방편을 두어서 신심을 섭호(攝護)하셨나니, 뜻을 오로지 하여 부처님을 염하는 인연을 지으면 원(願)을 따라 타방불토에 득생하여 항상 부처님을 친견하며 또한 악도를 기리 떠날 것이니, 이른바 수다라에 설하기를 '만일 어떤 사람이 오로지 서방 극락세계의 아미타불을 생각하며 닦은 바 선근을 회향하여 저 세상에 나기를 간절히 원한다면 뜻따라 곧 왕생하게 되리라'고 하신 것이다. 항상 부처님을 뵙는 까닭으로 마침내 물러남이 없으리니, 이와 같이 저 부처님의 진여법신을 관찰하여 부지런히 닦아 익힌다면 반드시 원생함을 얻어서 정정(正定)에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고 한 것 등이다. <만선동귀집 제2장>
유심정토와 타방정토 설을 모두 긍정하고 있다. 상근기 보살은 마음을 깨달아 정토에 나니 유심정토가 맞는 말이나, 하근기 중생은 마음을 깨닫기가 어려우므로 부처님이 방편으로 베푸신 타방정토에 의지해야 한다고 하였다. 서로 상반될 것만 같은 유심정토와 타방정토가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 다음의 예문을 보면 알 수 있다.
어떤 이가 "내 마음 밖에 따로 정토가 없으니(唯心淨土), 10만억 찰 밖에 어찌 따로 정토가 있으랴" 하였다. 이 유심정토의 설은 원래 경에서 나온 것으로, 결코 그릇된 것은 아니다. 다만 이 말만을 인용하여 근거로 삼는다면 그 뜻을 잘못 안 것이다. 대개 마음이 곧 경계로서 마음 밖에 경계가 없는 것이요, 경계가 곧 마음으로서 경계 밖에 마음이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경계가 바로 마음이라면 어찌 굳이 마음에만 집착하여 경계를 배척할 수 있겠는가. 경계를 버리고 마음만을 주장하는 자는 마음을 깨닫지 못한 자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죽창수필 2집>
마음 밖에 경계가 없으니 또한 경계 밖에 마음이 없다. 이러한 마음과 경계의 관계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정토가 마음 안에 있느니 밖에 있느니를 따지는 것이다. 경계라는 것이 마음을 떠나 있을 수 없으나, 경계는 분명히 있으니 유심정토라고 하는 것과 타방정토라고 하는 것이 근기에 따른 구분임이 명백하다. 이것을 모르면서 부질없는 의심을 일으켜 이것저것 따져본 들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서쪽으로 십만팔천리 밖에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제자가 항상 보오니 승속간에 흔히 아미타불을 염하여 서방에 태어 나기를 원하옵는데 과연 저 곳에 태어날 수 있는 것이옵니까? 청컨대 화상께서는 이 의심을 풀어 주옵소서" 하고 자사가 또 여쭈었다.
"사군이여, 잘 들으라. 혜능이 말하리라. 세존께서 왕사성 안에 계실 적에 서방으로 인도 교화하는데에 대한 말씀을 하셨는데, 경문에 분명히 '여기서 멀지 않다' 하셨고, '만일 현상계의 공간 거리로 말한다면 잇수로 10만 8천이라' 하셨느니라.
이것은 곧 몸 가운데 10악과 8사를 가리킨 것으로서 멀다는 말씀인 것이다. 멀다고 하신 것은 낮은 근기를 위함이고 가깝다 하신 것은 높은 근기를 위함인 바, 사람에게는 두 가지가 있지만 법에는 두 가지가 없느니라. 미하고 깨달음이 다르기에 견해가 더딤과 빠름이 있나니 미한 사람은 염불해서 저 곳에 태어나기를 구하고 깨달은 사람은 제 마음을 스스로 깨끗이 하나니,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그 마음의 깨끗함을 따라서 곧 불도가 깨끗하다' 하시니라.
사군이여, 동방 사람이라도 마음이 깨끗하면 죄가 없는 것이요 서방 사람이라도 마음이 깨끗치 못하면 역시 허물이 있는 것이니 동방 사람이 죄가 있을 때에는 염불함으로써 서방에 태어나기를 원하거니와 서방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에는 염불하여서 어느 나라에 태어나기를 원할 것이냐? 어리석은 범부는 자성을 모르므로 제 몸 속의 정토를 알지 못하고 동방이니 서방이니 원하지만 깨달은 사람은 어디에 있으나 한 가지이니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머무는 바 곳을 따라서 항상 안락하다' 하셨느니라.
사군이여, 마음 자리에 착하지 않은 것만 없으면 서방이 여기서 멀지 않으려니와 만일 착하지 못한 마음을 품고 있다면 아무리 염불을 해 봐도 태어나기 어려우니라. 내 이제 여러 선지식들에게 전하노니 먼저 10악을 없애는 것이 10만리를 가는 것이고 8사(邪)를 없애는 것이 8천리를 지낸 것이니 생각 생각 성품을 보아 항상 평등하고 곧 바르게 행하면 이것이 손가락 한 번 튕기는 사이에 문득 아미타불을 보는 것이니라.<육조단경>
유심정토와 타방정토는 근기에 따른 설명의 차이일뿐 결코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니, 낮은 소견으로 감히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마음밖에 경계가 없으니 마음이라고 해도 경계라고 해도 본래 둘이 아닌 것이다. 다만 깨달은 사람은 둘이 아닌 줄 알거니와 어리석은 사람은 그것을 모르고 하나만을 고집하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으로 본성을 깨닫고 모든 악을 여의면 곧 정토에 나려니와 10악과 8사3)를 끊지 못하면 정토는 멀 수밖에 없다.
3.염불의 갈래와 방법
1)계율을 바탕으로
법장비구의 제18원에 따른 칭명염불이 극락 왕생을 위한 주된 수행법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칭명염불 외에도 관무량수경에서는 부처님의 상호와 공덕을 생각하는 관상염불이 설해져 있고 실천행으로써 십선업과 발보리심 등을 권하였다. 중국이나 한국, 일본에서는 선정쌍수에 의해 실상염불, 또는 염불선이 강조되기도 했다. 이러한 다양한 염불수행법을 계율울 바탕으로 하나로 체계화시킨 것이 보조국사의 <염불요문>에 나오는 열가지 염불법이다. 십선업이란 계율수행에서 보았듯이 대승계율로써 신구의 삼업을 맑히는 것이다. 따라서 보조스님은 계율을 바탕으로 삼업을 청정히 한 후 염불수행이 가능하다는 열단계 염불법을 제시하였다.
아미타불의 큰 깨달음을 증득하려면 마땅히 열 가지 염불을 수행해야 합니다. 열 가지 염불이란 어떤 것입니까. 몸가짐의 염불인 계신(戒身)염불, 말가짐의 염불인 계구(戒口)염불, 마음가짐의 염불인 계의(戒意)염불, 움직이면서 하는 동억(動憶)염불, 움직이지 않고 하는 정억(靜憶)염불, 말하면서 하는 어지(語持)염불, 말하지 않고 하는 묵지(默持)염불, 부처님 모습을 그리면서 하는 관상(觀想)염불, 무심하게 하는 무심(無心)염불, 부처님이 부처님을 염하는 진여(眞如)염불이 그것들입니다. 이 열 가지 염불은 모두 한결같은 참 깨달음의 자리에서 피어나 부처님과 하나를 이루게 하는, 더할 수 없이 지극한 수행법입니다.
①계신염불
죽이고, 훔치고, 음행하는 것들을 말끔히 없애어 몸을 청정하게 해서 계율의 거울이 밝고 뚜렷해지게 합니다. 그런뒤로 몸을 단정히 하고 바르게 앉아서 합장하고 서쪽을 향해 마음 다해 공경히 나무아미타불을 염하되, 그 수가 끝이 없도록 합니다. 그리하여 생각생각에 끊어짐이 없어 마침내 앉아 있음마저 없어져서, 앉아 있지 않을 때도 염하는 일이 한결같이 밝고 분명합니다. 이를 계신염불이라고 합니다.
②계구염불
실없는 말, 속이는 말, 두 말, 험한 말짓들을 말끔히 없애고 입을 지켜 마음을 거둡니다. 몸을 맑히고 입을 깨끗이 한 뒤에 마음 다해 공경히 나무아미타불을 염하되 그 수가 끝이 없도록 합니다. 그리하여 생각생각에 끊어짐이 없어 마침내 입마저 없어져 입으로 부르지 않을 때에도 스스로 염하는 일이 밝고 분명합니다. 이를 계구염불이라고 합니다.
③계의염불
욕심부리고, 화내고, 어리석은 마음을 말끔히 없애고 뜻을 거두고 마음을 맑힙니다. 마음 거울에 번뇌의 때가 사라진 뒤에 마음 다해 깊게 나무아미타불을 염하되 그 수가 끝이 없도록 합니다. 그리하여 생각생각에 끊어짐이 없어 마침내 마음마져 없어져 마음을 내지 않을 때에도 스스로 염하는 일이 밝고 분명합니다. 이를 계의염불이라 합니다.
④동억염불
열 가지 모질고 나쁜 짓거리를 말끔히 없애고 열 가지 계를 올바로 지닙니다. 움직이고 오고 감의 한 틈에도 염불하고 찰라에도 염불하여 마음 다해 늘 아미타불을 염하되 그 수가 끝이 없도록 합니다. 그리하여 생각생각에 끊어짐이 없어 마침내 움직임이 다해서 움직임이 없을 때에도 스스로 염하는 일이 밝고 분명합니다. 이를 동억염불이라 합니다.
⑤정억염불
저 열 가지 계율이 이미 깨끗해져서, 고요할 때나 일 없을 때나 깊은 밤 홀로 있을 때나 염불하는 마음이 한결같아 마음 다해 나무아미타불을 염하되 그 수가 끝이 없도록 합니다. 그리하여 생각생각에 끊어짐이 없어 마침내 고요함이 다해서 움직일 때도 스스로 염하는 일이 밝고 분명합니다. 이를 정억염불이라 합니다.
⑥어지염불
사람을 맞이해 말을 나누고, 아이를 부르며, 함께 일하고, 일을 시킴에 밖으로는 그런 일들을 따르되 안으로는 염불하는 마음이 흔들림이 없습니다. 한 마음으로 아미타불을 고요히 염하되 그 수가 끝이 없도록 합니다. 그리하여 생각 생각에 끊어짐이 없어 마침내 말이 없어져서 말을 하지 않을 때도 스스로 염하는 일이 밝고 분명합니다. 이를 어지염불이라 합니다.
⑦묵지염불
입으로 부르면서 하는 염이 다하고 다해 생각의 때가 없는 염이 됩니다. 자나깨나 어둡지 않으며 움직일 때나 고요할 때나 늘 잊어버리지 않고 마음 다해 나무아미타불을 말없이 염하되 그 수가 끝이 없도록 합니다. 그리하여 생각생각에 끊어짐이 없어 끝내 말없음마저 없어져 염하지 않을 때에도 스스로 염하는 일이 밝고 분명합니다. 이를 묵지염불이라 합니다.
⑧관상염불
저 부처님의 몸이 법계에 가득하며 묘한 광명 눈부신 금빛이 모든 중생들 앞에 두루 나타남을 관합니다. 또 부처님의 맑고 밝은 자비의 광명이 나의 몸과 마음을 비추고 계심을 깨닫습니다.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보이는 것 들리는 것들이 모두 부처님의 빛임을 밝게 깨달아서,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무아미타불을 끝까지 염하되 그 수가 끝이 없도록 합니다. 그리하여 생각생각에 끊어짐이 없어 하루 내내 다니고 머물고 앉고 누움에 늘 삼가고 늘 깨어서 찰나도 어둡지가 않습니다. 이를 관상염불이라 합니다.
⑨무심염불
염불하는 마음이 오래 되어 공을 이루면 차차로 무심삼매를 얻게 됩니다. 생각의 때가 없는 진실한 염이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들리고 알음알이의 티끌이 없는 참 지혜가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뚜렷해집니다. 받음이 없이 받아들이고 함이 없이 다 이룹니다. 이를 무심염불이라 합니다.
⑩진여염불
염불하는 마음이 이미 끝머리에 이르러 깨달음이 없이 깨닫습니다. 스스로 心, 意, 識이 본디 텅 빈 것임을 알아서, 한 가지 밝은 성품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모자람 없는 깨달음의 큰 지혜가 밝고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이를 진여염불이라 합니다.
염불하는 이치가 이와 같으니, 만약 먼저 열 가지 악과 저 여덟 가지 행복한 삶의 길인 팔정도에 맞서는 여덟 가지 그릇됨을 끊어 버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저 열 가지 계율의 맑고 깨끗함을 따를 수 있겠습니까. 또 몸이 맑고 깨끗하고 계율의 거울이 환히 밝지 않으면 어떻게 저 열 가지 염불법과 한 몸이 되겠습니까. 그러니 몸을 맑고 깨끗하게 한 뒤에야 진리의 온갖 보배들을 쌓고 모을 수 있으며, 계율의 거울을 환히 밝게 한 뒤에야 부처님께서 자비의 빛을 드리워 주실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장 뛰어난 맛을 지닌 제호를 얻더라도 보배 그릇이 아니면 그것을 담아 두기 어렵다" 그러니 염불하는 수행자가 몸이 청정하고 계율의 거울이 밝고 뚜렷하면 어떻게 진리의 기막힌 맛을 부처님만이 담아 지닐 수 있다고 하겠습니까.
요즈음 욕심투성이인 옳지 않은 무리들이 열 가지 악과 여덟 가지 그릇됨을 끊지 않고, 또 다섯 가지 계율과 열 가지 착함을 닦지 않고도 그릇된 앎과 혼자만의 생각으로 헛되이 염불수행법을 찾아 그릇된 바람들을 드러내 놓고 극락 세계에 태어나고자 합니다. 이것은 모난 나무로 둥근 구멍을 막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는 염불수행을 한다고 생각할 지 몰라도 부처님의 뜻이야 어찌 그런 삿된 생각과 함께 하시겠습니까. 쉼없이 파계하는 몸으로 순간 순간 부처님을 비방하면서도 되려 실없이 참되고 깨끗한 세계를 구하는 죄는 참으로 풀어 줄 수 없고 무겁기 그지없는 죄인 것입니다. 죽어 지옥에 떨어져 스스로 몸과 마음을 해치는 것이 그 누구의 허물이겠습니까.
여러분은 계율로 벗을 삼고 이제까지 밝힌 이치를 거울삼고 비춰보고, 먼저 열 가지 악과 여덟 가지 그릇됨을 끊고 이어서 다섯 가지 계율과 열 가지 착함을 굳게 지녀서 앞서 저지른 잘못들을 참회하고 깨달음의 열매 얻기를 굳게 다짐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다짐과 더불어 힘쓰고 애쓰며, 나고 죽음을 벗어나겠다는 뜻을 야무지게 다져야 합니다. 해마다 선악의 업이 드러난다는 정월, 오월, 구월에 하는 수행을 닦듯이 염불수행을 놓지 않아야 합니다. 또 날씨가 엇바뀌는 여덟 절기마다 염불수행을 새롭고 새롭게 힘써 닦아야 합니다. 그리고 달마다 여섯 재일의 가르침을 본받아 저 열 가지 염불로 참 살림살이를 삼아야 합니다.
오래 공들이고, 있는 힘을 다 모아 저 진여염불과 하나를 이루면 날마다 시간마다 가고 오고 앉고 누움에 아미타불의 참 모습이 그윽히 앞에 나타나셔서 그대 머리 위에 향기로운 손을 얹으시고 길이 길이 피어나는 큰 기쁨을 주실 것입니다. 또 목숨을 마칠 때에 이르러서는 아미타 부처님께서 몸소 극락세계의 아홉 층 연꽃세계로 맞아들이사 반드시 가장 뛰어난 저 아홉번째 연꽃 세계에서 여러분을 맞으시고 길이길이 그 곳에 머물게 하실 것이니, 아, 부디 애쓰고 애쓰십시요.
2)지명염불방법
여러 가지 염불법 중에서 가장 대중적인 방법이 지명염불이다. 이것은 법장비구의 48대원 가운데 열 여덟 번째 원에 의거한 것으로, 후대 정토교가들은 이것을 '염불왕생원'이라하여 칭명염불을 극락왕생의 수행법으로 가장 중시하였다. 어떻게 이름만 불러서 정토왕생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해 청화스님은 "부처님 말씀을 안 믿을 수가 없는 동시에, 생각해 본다 하더라도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어찌 그런고 하면, 원래 부처님인지라 또는 부처님의 이름은 사람 이름과 달라서 부처의 공덕을 거기에 간직해 있는 것입니다. 사람 이름도, 그 사람 이름을 자꾸만 부르게 되면 그 사람 영상이 떠오르는데, 하물며 부처님 이름은 우리가 본래 부처인 동시에 부처님의 공덕을 거기에 다 간직한 이름인 것인데 말입니다. 그러기에 명호부사의(名號不思議)라. 이름 자체가 부사의란 말입니다. 우리 같은 김아무개, 누구 아무개 이것은 부사의한 것이 아닙니다. 중생이 아무렇게나 지은 이름이지마는, 부처님 이름은 부처님께서 친히 무량공덕을 거기에 갊아있게(藏) 담게시리 만든 진리 이름이기 때문에 이름만 불러도 우리의 업장이 녹아져 옵니다. 또 우리가 본래 부처고 말입니다. 따라서 자꾸만 외우면 외울수록 우리 마음에 부처의 종자가 더 심어지고, 업장 종자는 차근차근 감소가 됩니다. 그렇게 되어서 부처를 생각하는 마음은 더욱 한결 강해지고 드디어는 우리 마음에 부처님을 생각하는 마음만 남으면 그때는 성불하게 되겠지요. 원래 부처니까 말입니다. 따라서 염불만 해도 성불한다는 말씀이 조금도 틀림없는 말씀입니다."하였다.(『전통선의 향훈』)
지명염불의 공덕은 의심할 바가 없으나 앞서 보조스님이 말씀하신대로 자신의 업을 청정히 하지 않고 입으로만 염불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에 대해 휴정스님도 "마음은 바로 부처님의 경계를 생각하여 끊임이 없고, 입은 부처님의 명호를 분명히 불러 흐트러지지 않게 한다. 이렇듯 마음과 입이 서로 응하면 그 한 생각 한 소리에 능히 80억겁 동안 생사에 헤매는 죄업을 소멸함과 동시에 80억 겁의 수승한 공덕을 성취한다."(청허 휴정스님 청어당집)고 하였다.
지명염불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구체적인 방법을 알아보자. 염불할 때의 환경이나 심경, 혹은 염불하는 사람의 근기에 따라서 그 적절한 염불하는 방법이 갖가지로 다를 수 밖에 없다. 방법마다 모두 나름대로의 작용과 특징이 있으니, 행인이 염불할 때 아래에 열거한 적합한 방법을 스스로 잘 선택하여 실행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만약 어떤 방법으로 염불할 때 이것으로는 그 당시의 심경을 진정시킬 수 없다고 생각되면 다른 방법으로 바꾸어도 해로울 것은 없다. 다만 그 상황에서 능히 마음을 안정시키고 망념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 것이다. 비유하면 병을 치료하는 데는 병을 치료하기에 좋은 것이 곧 양약인 것과 같은 것이니, 중생의 망념이 병이요, 부처님의 명호가 약이요, 염불하는 것이 바로 묘약을 먹는 것이다. 이하 『정법개술』에서 인용한다. 매우 구체적이고 다양한 염불방법들이 제시되고 있으니 초보자들도 쉽게 따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①고성념(高聲念)
염불할 때 큰 소리로 전신의 힘을 다하여 '나무아무타불'하고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것이다. 이 방법은 기운을 소모하고 목을 쉬게 하므로 오래 지속할 수는 없다. 다만 혼침과 게으름을 대치하여 계속 일어나는 잡념을 제거하기에 좋은 방법이다. 행자가 염불할 때 혼혼하여 잠이 오려 하거나 생각이 흐리멍텅하면 용맹스럽게 정신을 차려 큰 소리로 또렷또렷하게 염하면 금방 머리가 개운하고 정념이 회복되어 전과 같이 무궁한 활력과 강력한 작용이 솟아나는 것을 느낄 것이며, 아울러 곁에서 이 소리를 듣는 자로 하여금 염불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할 것이다.
옛날 영명 선사가 항주 남병산에서 염불할 때, 산 아래 길 가는 사람이 그 소리가 천락(天樂)이 허공에서 울리 듯 분명하고 크게 들려오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하니, 바로 이 염불 방법을 쓴 것이다.
②묵념(默念)
염불할 때 겉으로 보기에는 입술만 움직일 뿐, 소리는 내지 않으나 '나무아무타불'하고 염하는 것은 행자의 심식 중에서 분명하고 또렷또렷하므로 마음이 다른 곳으로 달아나지 않고 정념이 한 덩이를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그 효과는 소리를 내는 것에 비하여 부족함이 없다. 이 방법은 누워 있을 때나 목욕할 때나 병이 들었을 때나 변소 갈 때 등에 적합하며, 그 외 소리를 내기에 불편한 상황이나 공공 장소에서 적합하다 하겠다.
③금강념(金剛念)
염불할 때 음성이 크지도 작지도 않고 중간으로 하되, 한편 염하면서 한편 그 소리를 자신의 귀로 듣는다. 넉 자(아미타불)나 여섯 자(나무아미타불)를 막론하고 한 자 한 자를 분명히 염하고 들으면, 생각이 다른 곳으로 달아나지 않고 자연히 마음이 안정된다. 이 염법은 효력이 매우 크므로 금강에 비유한 것이다. 금은 긴밀함을 비유하였으니, 긴밀하면 외경에 빠져들지 않을 것이요, 강은 견고함을 비유하였으니, 견고하면 잡념이 능히 파괴하지 못하는 것이다. 각종 염불방법 중에서 이것이 가장 널리 쓰이고 있다.
④각조념(覺照念)
염불할 때 한편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면서 한편으로는 자성을 회광반조(回光返照)하는 방법이다. 이렇게 하면 나의 마음과 불심, 나의 몸과 불신이 한 덩이가 되어 환하고 또렷또렷히 시방에 꽉차며, 모든 산하대지의 방사나 기구가 일시에 소재(所在)를 잃어버리며, 내지 자기의 사대색신도 어느 곳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이와 같이 되면 보신이 죽기 전에 이미 적광을 증득하며 불호를 처음 부를 때 곧 삼매에 들어가서 범부의 몸으로 부처님의 경계에 참예할 수 있으니, 이보다 빠른 법은 없을 것이다. 애석한 것은 상상근인이 아니면 능히 깨닫고 실행할 수 없으므로 제도할 수 있는 근기가 비교적 좁은 것이 흠이라 할 것이다.
⑤관상념(觀想念)
염불할 때 한편으로는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면서 한편으로 부처님의 존엄한 신상이 분명히 나의 앞에 서 계시면서, 손으로 나의 머리를 어루만지시기도 하고 혹은 옷으로 나의 몸을 덮어주시는 것을 관상하는 방법이다. 또한 관음세지가 부처님 곁에 서 계시며 현성(賢聖)이 나를 위요(圍繞)함을 관상하며, 혹은 극락국의 금지(金池)와 보지(寶池), 화개(花開), 조명(鳥鳴), 보수(寶樹), 라망(羅網) 등이 빛나고 화려한 것을 관상한다. 만약 관상이 깊어지면 몸이 그대로 극락국토에 노닐 것이요, 설사 깊지 못하더라도 염불의 조연(助緣)이 되어 정업(淨業)을 성취하기에 손쉬울 것이다. 만약 오래오래 관하고 성숙하게 하여 평소에도 심목(心目) 중에 또렷이 있어서 하루 아침에 보체(報體)가 죽더라도 차방 진연(塵緣)에 끌리지 아니하면, 극락국의 승경(勝境)이 일제히 앞에 나타날 것이다.
⑥추정념(追頂念)
염불할 때 위의 금강념과 같은 방법을 쓰되, 다만 글자와 글자 사이와 글구와 글구 사이를 연속하여 지극히 긴밀하게 하여, 한 글자가 한 글자를 뒤쫓으며 한 글구가 한 글구를 이어서 중간에 조그마한 틈도 없이 함으로 추정념이라 말한다. 이렇게 앞을 뒤쫓아 서로 긴밀하게 하여 조그마한 틈도 두지 않기 때문에 잡념이 들어올 틈이 없는 것이다. 이 법으로 염불할 때는 정신이 긴장하고 마음과 입이 항진(亢進)하여 정념으로 하여금 잠깐 사이에 고요한 경지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이 염법은 효력이 지대하므로 정업행인이 흔히 이 방법을 채용한다.
⑦예배념(禮拜念)
염불할 때 한편으로 염불하면서 한편으로 절을 하는 방법이다. 다만 일구를 염하고 한 번 절하거나, 자구는 상관하지 않고 염하면서 절하고, 절하면서 염하여 염과 절을 병행하여 몸과 입을 합하게 하며, 게다가 마음 속에 부처님을 생각하면 삼업이 집중하고 육근이 모두 섭수하게 된다. 이 방법은 우리 몸에서 능히 작용을 발생하는 기관을 모두 염불하는데 쏟아넣어 염불 이 외의 일이나 염불 이 외의 생각은 조금도 용납치 않는 방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방법은 특별한 정진이므로 효력도 특별히 크다. 다만 절을 오래하면 몸도 피로하고 숨도 차므로 다른 방법과 겸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요, 이 방법만을 전용하는 것은 무리일 듯하다.
⑧기십념(記十念)
염불할 때 염주로써 수를 헤아리되, 열 번 불호를 염하고 한 알의 염주를 넘기는 방법이다. 이와 같이 마음속으로 염불을 하면서 수를 기억해야 하므로 전념하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전념해 지는 것이요, 만약 전념하지 않을 때는 수목(數目)이 착란해 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방법은 억지로 전념하게 하는 방편이므로 잡념을 퇴치하는 데에 지극한 공효(功效)가 있다.
⑨십구기념(十口氣念)
염불할 때 다만 추정법을 써서 염하되, 한 번 숨을 들이마셔서 내뿜을 때까지 계속 염불을 하는 것을 일구념이라 하고, 이와 같이 열 번 하는 것을 십구기라 한다. 이 방법은 염불할 여가가 없이 매우 바쁜 사람을 위하여 특별히 시설한 방편법으로, 십구기를 마칠 때까지는 대략 5분 남짓 소요된다. 이렇게 매일 한 번씩만 십구기를 하여도 능히 극락국에 왕생할 수 있으니, 비록 매우 바쁜 사람일지라도 능히 이렇게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미타 제18원에 '시방 중생이 나의 나라에 태어나고자 하면서 십념만 하고서도 만약 왕생치 못하면 정각을 이루지 않겠나이다' 한 원문(願文)을 근거하여 시설한 것이다. 고인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소위 십념이란 곧 십구기를 두고 말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를 보면 부처님의 원력이 매우 광대하며 정토법이 또한 매우 진실한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니, 그러므로 비록 십념만 하더라도 임종에 부처님이 와서 반드시 영접하는 것이다.
⑩정과념(定課念)
염불하는 데 있어서 가장 걱정스러운 것은, 처음은 부지런히 시작했다가 나중에 가서는 나태하여 항심(恒心)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고금의 행인이 염불할 때에 하루에 일정한 양을 정해놓고 어김없이 실행함으로 해서 도심이 물러가지 않게 하는 방법이다. 불호의 양에는 구애됨이 없이 고인들은 매일 십만념 혹은 칠만, 오만 등을 정해놓고 항상 이를 실천하였으니, 그 정진력을 알 수 있겠다. 다시 말하면 이 방법은 환경과 자신의 역량을 참작하여 일정한 양을 정하되, 한 번 정한 후에는 어떤 바쁜일을 막론하고 기필코 정한 수를 채워야 할 것이요, 부득이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다음날 반드시 부족한 양을 채워서 염불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만약 처음 시작할 때는 용기 백배하여 너무 많은 양을 정했다가 뒤에 가서는 감당치 못하면 이것도 좋지 않으며, 처음부터 너무 적게 정하면 나태하기 쉬우므로 이것도 옳지 않다. 그러므로 양을 결정할 때는 자세히 요량해야 할 것이다.
⑪사위의중개념(四威儀中皆念)
행자가 정종(淨種)이 순숙해지면 염불이 저절로 정진이 되어 양을 정하는 것으로 만족치 않고, 양을 정한 외에 낮이나 밤이나 상관없이 잠들기 전에는 거의 염하지 않을 때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사위의중개념으로서, 이렇게 오래하여 습관이 되면 일구의 미타가 영원히 입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예는 고인의 왕생전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어떤 대장장이는 쇠를 두들기면서 염불을 끊이지 않았으며, 어떤 두부장수는 콩을 갈면서 염불을 잃지 않더니, 최후 염불소리가 끊어지면서 그대로 서서 죽었던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모두 우리의 본보기가 될 것이다. 과연 이런 정도에까지 이를 수 있다면 양을 정하든 정하지 않든 그런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⑫염불념개념(念佛念皆念)
위에서 말한 사위의중개념은 구념을 가리킨 것이나, 여기서 말하는 염불념개념의 개념의 염자는 심념(心念)을 지적한 것이다. 곧 입으로 염하거나 입으로 염하지 않거나 관계없이 심중에서 늘 염불하고 있으며, 입으로 염불하지 않을 때에도 심중에서 염불하는 것이니, 곧 지명 외에 관상이나 관조할 때에도 바로 지명 중에 있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단지 구념할 때만 관상하는 것과는 같지 않다. 행자가 만약 이러한 경지에 이를 수 있으면, 어느 때 어느 경우와, 입으로 염하든 입으로 염하지 않든 관계없이 심중에서 늘 부처님을 생각하여, 정념이 견고하기가 철벽과 같아서 바람이 불어도 들어올 틈이 없고, 차 넘어뜨리려 하여도 파괴되지 않아서 조그만한 세념(細念)이나 잡념도 없을 것이다. 이때는 염불삼매가 이루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루어져서 저 국토에 태어나는 것은 마치 보증서를 받아 둔 듯하리라.
고인이 말하기를 '염하되 염하지 않으며, 염하지 않으면서 염한다' 한 것이 바로 이러한 경계이다.
만약 염불한 지가 오래되고 공행이 순숙하지 않으면 절대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없을 것이니, 그러므로 초학자가 능히 행할 수 있는 법은 아니다.
3)십념의 방법
이상은 『정법개술』을 인용한 것으로 더 이상 설명을 붙이지 않아도 충분히 다양한 염불법이 제시되었다고 생각된다. 다만 지명염불의 근간이 되는 10념에 대해서만 설명을 더 하고자 한다.
하품하생하는 이란 매양 악업을 짓는 중생으로서, 오역죄와 십악 등 가지가지의 악을 지어 그 무거운 죄업의 과보로, 응당 지옥 . 아귀 . 축생 등 삼악도에 떨어져 오랜 겁 동안 한량없는 괴로움을 받을 사람을 말하느니라. 그러나 이와 같은 어리석은 사람도 목숨이 다하려 할 때 선지식을 만나게 되어 선지식이 그를 위하여 여러가지로 안위하여 주고 미묘한 법문을 들려주어 지성으로 부처님을 생각하도록 가르쳐주느니라. 그러나 그는 괴로움이 극심하여 부처님을 생각할 경황이 없느니라. 그래서 선지식은 다시 그에게 '그대가 만약 부처님을 생각할 수가 없다면 다만 아미타불을 부르도록 하여라'고 타이르니라. 그래서 이 사람이 지성으로 소리를 끊이지 않고 아미타불을 열 번만 온전히 부르면, 그는 부처님의 명호를 부른 공덕으로 염불하는 동안에 80억겁 동안 생사에 헤매는 무거운 죄업을 없애느니라. 그리고 목숨을 마칠 때는 마치 태양과 같은 찬란한 황금의 연꽃이 그 사람 앞에 나타나, 그는 순식간에 바로 극락 세계의 보배 연못 연꽃 속에 태어나느니라. <관무량수경>
이 경에서 하배의 십념을 말하였는데, 그 말 속에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으니, 이른바 현료의(顯了義)와 은밀의(隱密義)이다. 은밀의란 제3대(對)의 순정토(純淨土)의 과에 의해 십념의 공덕을 말한 것이니, 이것은 <彌勒發問經>에 말한 것과 같다. 즉 "그때 미륵보살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부처님께서 아미타불의 공덕 이익을 말씀하시면서, 만일 십념을 끊어지지 않게 계속해 그 부처님을 생각하면 곧 왕생할 수 있다고 하시는데, 그러면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은 범부의 생각이 아니요 나쁜 생각이 아니며 잡된 번뇌의 생각이 아니니, 만일 그런 생각을 두루 갖추면 곧 안양국토에 왕생하게 될 것이다. 무릇 십념이 있으니 그 십념이란 이른바, 첫째는 모든 중생에 대해 항상 인자한 마음을 내고 모든 중생에 대해 그 행을 비방하지 않는 것이니 만일 그 행을 비방하면 끝내 왕생하지 못할 것이다. 둘째는 모든 중생에 대해 슬퍼하는 마음을 일으켜 해칠 생각을 버리는 것이며, 셋째는 법을 보호할 마음을 일으켜 신명을 아끼지 않고 일체의 법을 비방하지 않는 것이요, 넷째는 인욕하는 가운데서 결정하는 마음을 내는 것이며 다섯째는 신심이 청정하여 이양(利養)에 물들지 않는 것이다. 여섯째는 일체종지(一切種智)의 마음을 내어서 날마다 늘 생각하면서 잊지 않는 것이며, 일곱째는 모든 중생에 대해 존중하는 마음을 내어 아만을 버리고 겸손한 말을 쓰는 것이며, 여덟째는 세속 이야기에 맛을 붙이지 않는 것이며, 아홉째는 각의(覺意)을 가까이 하여 갖가지 선근의 인연을 깊이 일으키고 시끄럽고 산란한 마음을 멀리 떠나는 것이며, 열째는 바른 생각으로 부처님을 관하면서 모든 감관을 제거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해석하기를 "이런 십념을 가지면 이미 범부가 아니다. 그러므로 초지(初地) 이상 보살이라야 십념을 두루 갖출 수 있는 것이며 순정한 국토에 대한 하배의 인이 되는 것이니, 이것을 은밀의의 십념이라 한다." 현료의의 십념의 모양을 나타낸다는 것은 제4대(對)의 정토를 잡아 말하는 것이니, 이 <관경>에 "하품하생이란 어떤 중생이 오역 십악 등 갖가지 악업을 갖춰 짓다가 임종 때에 이루러 선지식을 만나면...이와같이 지극한 마음으로 그 소리를 끊어지지 않게 하며, 십념을 갖추어 나무불이라고 일컫는데.....". 어떤 마음을 지극한 마음이라 하며 어떤 것을 십념의 계속이라 하는가.
구마라집이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광야에서 나쁜 도적이 창을 휘두르거나 칼을 빼어 들고 곧 쫓아와 죽이려 하자 그는 부지런히 달아나다가 한 강에 이르렀는데, 만일 그 강을 건너지 못하면 목숨을 보존하기 어려웠다. 그때 그는 다만 그 강을 건널 방편만을 생각한다. 즉 '나는 지금 강가에 이르렀다. 옷을 입고 건너야 할까? 옷을 벗고 건너야 할까? 옷을 입고는 건널 수 없고 옷을 벗으려 해도 그럴 겨를이 없다.' 오직 이 생각만 있고 다른 생각이 없어, 강을 건너려는 생각은 곧 그 일념 뿐이니 이런 십념에는 다른 생각이 섞이지 않는다.
수행하는 사람도 또한 그와 같아서 부처님 명호를 생각하거나 부처님 상호를 생각하거나 끊임없이 부처님을 생각하여 십념에 이르러야 하나니, 이런 지극한 마음을 십념이라 하며 이것이 곧 현료의 십념의 모양이다"라고 하였다. <무량수경종요>
평상시 악업만 짓던 사람이 임종시에 십념만으로 왕생한다고 하니 어떻게 십념을 해야 그런 일이 가능한가. 이에 대해 원효스님은 현료의와 은밀의로 설명하고 있다. 먼저 은밀으로서 열가지 마음을 내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렵기 때문에 현료의로서 지극하기만 하면 십념을 갖춘 것이라고 하였다. 하기야 죽음을 눈앞에 두었으니 마음이 얼마나 급하겠는가. 그때 간절한 그 십념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러나 임종시에는 정신이 혼미하여 이런 바른 생각을 내기 어렵다. 또한 정신차릴 경황도 없이 갑자기 죽을 수도 있고 질병의 고통과 싸우느라고 마음을 모을 수 없고, 죽음에 대한 공포와 거부감에 몸부림치다가 죽을 수도 있다. 따라서 임종시에 일념으로 염불할 수 있으려면 평상시에 극락왕생의 원을 세우고 늘상 입에서나 마음에서 염불을 놓치지 말아야 가능한 일이다. 또한 죽음이 늙은이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안이하게 세월을 보내며 염불은 나이가 더 들면 하겠다고 생각한다면 생사의 본질을 모르는 무지의 소치이다. 죽음이 언제 찾아올 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 노소를 불문하고 때어나면 곧 죽음과 가까이 있음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4)관상염불
관상염불은 부처님의 상호를 관하거나 공덕을 생각하는 염불방법으로 <관무량수경>에는 극락왕생을 위한 16관법이 제시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대표적인 몇가지 관법만 소개하고자 한다.
①해를 생각하는 관(日想觀)
부처님께서 위제히 부인에게 말씀하셨다.
"부인과 중생들은 마음을 가다듬고 생각을 한곳에 집중시켜 서쪽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모든 중생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소경이 아니니 눈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해가 지는 것을 볼 것이므로 서쪽을 향해 단정히 않아서 해를 똑똑히 보도록 하시오. 그리고 나서 마음을 굳게 간직하여 생각을 움직이지 말고, 곧 지려는 해를 보고 난 후에도 눈을 감으나 뜨나 그 영상이 한결같이 분명히 보이도록 하시오. 이것을 해를 관하는 일상관이라 하고 최초의 관이라 합니다."
②형상 생각하는 관(像想觀)
부처님께서 아난과 위제히 부인에게 말씀하셨다.
"이미 연화대를 관했으면 다음에는 부처님을 생각하여라. 왜냐하면 모든 부처님은 우주에 충만해 있는 진리이고 그 장용인 법계신(法界身)이기 때문에 일체 중생의 마음 속에도 들어계시느니라. 그러므로 그대들의 마음에 부처님을 생각하면 그 마음이 바로 부처님의 32상의 뛰어난 모습이 되고 80가지 특징을 가지게 되느니라. 그래서 이 마음으로 부처를 이루고 또한 이 마음이 바로 부처니라. 모든 부처님의 위없는 바른 지혜는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니, 마땅히 일심으로 생각을 골똘히하여 아미타불과 그 지혜공덕인 여래, 응공, 정변지를 깊이 관해야 하느니라.
아미타불을 관하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부처님의 형상을 생각해야 하느니라. 눈을 뜨거나 감거나 마음을 한결같이 하여 염부단금의 자마금색과 같이 찬란한 하나의 부처님 형상이 저 연꽃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을 관조해야 하느니라.
그리고 이와 같은 부처님의 형상을 보고 나면 마음의 눈이 열려서 저 극락세계의 칠보로 장엄된 보배 땅과 보배 연못과 줄지어 서 있는 보배 나무와 그리고 그 위를 덮고 있는 천상의 보배 휘장과 또한 온갖 보배로 아롱진 보배 그물이 허공에 가득함을 분명히 보게 될 것이니라. 그리고 이러한 영상을 마치 자기 손바닥을 보듯이 더욱 뚜렷하게 관조해야 하느니라.
그리고 이와 같이 보고 난 다음에는 다시 한 송이의 커다란 연꽃이 부처님 상(像)의 왼편에 있는 것을 생각하여라. 그것은 부처님 상의 연꽃과 같아서 조금도 다르지 않느니라. 또한 그와 똑같은 연꽃이 또 한 송이 부처님 상의 오른편에 있는 것을 생각하여라. 그리고 한 관세음보살의 상이 왼쪽 연꽃 위에 앉아 있고, 한 대세지보살의 상이 오른쪽 연꽃 위에 앉아 있는데, 그 금색 광명은 한결같이 부처님의 상과 같음을 생각하여라.
그리하여 이러한 생각이 이루어지면 부처님의 상과 두 보살의 상은 모두 광명을 발하느니라. 그래서 그 찬란한 금색 광명은 모든 보배 나무를 비추느니라. 그리고 그 낱낱 보배 나무 밑에는 또한, 세 송이의 큰 연꽃이 있고 연꽃 위에는 각각 한 부처님의 상과 두 보살의 상이 있는데, 이렇듯 아미타불의 상과 두 보살의 상이 저 극락세계에 두루 가득하느니라.
그리하여 이와 같은 생각이 성취되었을 때, 관(觀)하는 수행자는 극락세계의 흐르는 물과 광명과 모든 보배 나무와 기러기와 원앙새 등이 모두 미묘한 법문을 아뢰고 있음을 알아듣게 되느니라.
그래서 선정에 들 때나 선정에서 나올 때나 항상 미묘한 법문을 들을 것이니, 수행자는 선정에 들었을 때 들은 바를 잘 기억하였다가, 선정에서 나온 뒤에 경전의 가르침과 맞춰보도록 해야 하느니라. 그것이 만약 경전과 맞지 않으면 이를 망상이라 하고 경전과 합당하면 이를 거친 생각으로 극락세계를 보는 것이라 하느니라.
그런데 이와 같이 부처님과 보살의 형상을 생각하고 관조함을 상상관(像想觀)이라 하고 또한 여덟째 관이라 하느니라. 그리고 이러한 관조를 하는 사람은 무량 억겁 동안 생사에 헤매는 악업을 없애고 현재의 이 몸으로 염불삼매를 얻게 되느니라.
③부처님 몸 생각하는 관(眞身觀)
부처님께서 다시 아난과 위제희 부인에게 말씀하셨다.
"이러한 생각이 이루어지면 다음에는 아미타불의 몸과 그 광명을 관조하여라. 아난아, 잘 알아 두어라. 아미타불의 몸은 백천만억 야마천의 자마금색과 같이 빛나고, 부처님의 키는 60만억 나유타 항하사 유순이니라. 그리고 미간의 백호는 오른쪽으로 우아하게 돌고 있는데 마치 다섯 수미산을 합한 것과 같고, 부처님의 눈은 사대해(四大海)의 바닷물처럼 그윽하여 푸르고 흰 동자가 분명하느니라.
몸의 모든 모공에서는 수미산과 같은 큰 광명이 흘러나오고 부처님의 원광은 백억 삼천대천세계와 같으니라. 그리고 그 원광 속에는 백만억 나유타 항하사의 화신불이 계시고 그 화신불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화신보살들이 모시고 있느니라.
그리고 아미타불에게는 8만 4천 가지의 상(相)이 있고, 그 하나하나의 상에는 각각 8만 4천의 수형호가 있으며, 그 낱낱 수형호마다 또한 8만 4천의 광명이 있느니라. 그리고 그 광명은 두루 시방세계를 비추어 부처님을 생각하고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염불 중생들을 받아들여 그 한 사람도 버리지 않느니라. 그런데 이러한 모든 광명과 상호와 화신불을 이루 다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니, 다만 깊이깊이 생각하여 마음의 눈으로 보도록 하여라.
이와 같이 볼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시방의 일체 모든 부처님을 볼 수 있으며, 모든 부처님을 볼 수 있으므로 염불삼매라 하느니라. 그래서 이와 같이 관조함을 '모든 부처님의 몸을 관한다'고 말하느니라. 그런데 부처님의 몸을 볼 수 있으면 또한 부처님의 마음도 볼 수 있는 것이니, 부처님의 마음 곧 불심(佛心)이란 바로 대자대비이며 모든 부처님들은 이러한 무연자비(無緣慈悲)로써 모든 중생을 섭수하시느니라. 이와 같이 관조할 수 있는 사람은 내생에는 여러 부처님의 회상에 태어나, 생사를 깨닫는 무생법인을 얻게 되느니라.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을 오로지 하여 착실히 아미타불을 관조해야 하느니라. 그리고 아미타불을 관조할 때는 한 가지 상호로부터 보아들어가야 하는데, 오직 미간 백호만을 관조하여 그 영상이 분명하도록 관하기도 하느니라. 그래서 미간 백호를 볼 수 있으면 부처님의 8만 4천 상호가 저절로 앞에 나타나는데 이렇듯 아미타불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시방세계의 헤아릴 수 없는 모든 부처님을 볼 수 있느니라. 또한 무수한 부처님을 볼 수 있으므로 부처님으로부터 미래에 성불한다는 수기(授記)를 받게 되느니라. 이러한 것을 일체 부처님의 몸을 관조하는 진신관(眞身觀)이라 하고 또한 아홉째 관이라 하느니라. 그리고 이와 같이 관조함을 바른 정관(正觀)이라 하고 달리 관함을 그릇된 사관(邪觀)이라 하느니라."
④관세음보살 생각하는 관(觀音觀)
부처님께서 다시 아난과 위제희 부인에게 말씀하셨다.
"아미타불을 분명하게 뵈온 다음에는 관세음보살을 관조하여라. 이 보살은 키가 80만억 나유타 유순이며, 몸은 자마금색으로 빛나고, 정수리에는 상투같이 솟은 육계가 있으며, 목에는 원광이 있는데, 그 지름이 백천 유순이나 되느니라. 그 원광 속에는 5백의 화신불이 계시는데 모두 나(석가모니불)와 같으니라. 그리고 한 분의 화신불마다 각기 5백의 화신보살과 헤아릴 수 없는 천인들이 모시고 있느니라.
그리고 관세음보살의 온 몸에서 발하는 광명 속에는 지옥 . 아귀 . 축생 . 인간 . 천상 등 오도 중생의 일체 모든 현상이 나타나 있느니라. 관세음보살의 머리 위에는 마니보주로 된 천관(天冠)이 있고 그 천관 속에는 화신불 한 분이 서 계시는데, 높이가 25 유순이니라.
관세음보살의 얼굴은 자마금색으로 빛나고 미간의 백호는 칠보의 빛깔을 지녔는데, 8만 4천의 광명이 흘러나오느니라. 그리고 그 낱낱 광명 속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화신불이 계시는데, 그 화신불들은 또한 각기 수없이 많은 화신보살들이 모시고 있느니라. 이와같이 자재로 변화하여 시방세계에 가득함이 마치 찬란한 붉은 연꽃이 수없이 피어 있는 것과 같으니라.
또한 관세음보살은 80억 광명으로 된 영락 목걸이를 걸고 있는데, 그 영락 구슬 속에는 모든 장엄한 일들이 모조리 나타나 있느니라. 그 손바닥은 5백억 가지 연꽃 빛을 띠고 그 손가락 끝마다 8만 4천의 그림 무늬가 있는데, 마치 도장의 인주과 같으니라. 그 그림 무늬마다 8만 4천의 빛깔이 있고 빛깔마다 또한 8만 4천의 광명이 있느니라. 그런데 그 광명은 부드럽고 상냥하여 두루 모든 것을 비추는데, 관세음보살은 이러한 보배 손으로 중생들을 인도하느니라.
또한 관세음보살이 발을 들 적에는 발바닥에 있는 천복륜(千輻輪)의 발금이 저절로 오백억의 광명대로 변화하고 발을 디디면 그것이 금광마니 보(寶)의 꽃으로 변하여 온 땅 위에 흩어져 그득하게 되느니라. 그런데 관세음보살의 모든 상호는 부처님과 똑같이 갖추어져서 조금도 다름이 없으나, 다만 정수리에 솟은 육계와 육계 속에 아무도 볼 수 없는 정점(頂點)인 무견정상(無見頂上)만이 부처님에게 미치지 못하느니라. 이와같이 관함을 관세음보살의 몸을 관하는 관음진신관이라 하고 또한 열째 관이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다시 이르시기를,
"만약 관세음보살을 보고자 한다면 마땅히 내가 말한 것과 같이 관조해야하느니라. 이러한 관을 하는 사람은 모든 재앙을 만나지 않고 업장을 말끔히 소멸하여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겁동안 생사에 헤매는 죄업을 없애느니라. 그래서 관세음보살은 다만 그 이름만을 들어도 무량한 복을 얻을 수 있는데 하물며 그 모습을 분명히 관조하는 큰 공덕에 있어서랴.
그런데 만약 관세음보살을 관조하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정수리의 육계를 관하고 다음에는 천관(天冠)을 관하고 그 나머지 여러 상호를 차례차례로 관조하되 뚜렷하기가 마치 손바닥을 보는 것과 같이 분명히 해야 하느니라. 이와같이 관조함을 바른 정관이라 하고 달리 관함을 그릇된 사관이라 하느니라.
⑤대세지보살 생각하는 관(勢至觀)
다음에는 대세지보살을 관조하여라. 이 보살의 크기는 관세음보살과 같으며 그 원광의 지름은 125유순이며 250유순을 비추느니라. 온 몸에서 발하는 광명은 자마금색으로서 시방세계의 모든 나라를 비추는데 인연이 있는 중생들은 다 볼 수 있느니라. 그리고 이 보살의 한 모공에서 나오는 광명만 보아도 시방세계의 무량한 모든 부처님의 청정하고 미묘한 광명을 볼 수 있느니라. 그러므로 이 보살의 이름을 끝없는 광명인 무변광(無邊光)이라 말하며 또한 지혜의 광명으로써 두루 일체 중생을 비추어 지옥 . 아귀 . 축생 등 삼악도의 고난을 여의게 하는 위없는 힘을 지니고 있으므로, 이 보살을 큰 힘을 얻은 이, 곧 대세지라 하느니라.
그리고 이 보살의 보배관은 오백 가지의 보배 꽃으로 장식되어 있고, 그 하나하나의 보배 꽃마다 또한 5백의 보배 꽃받침이 있는데, 그 낱낱의 꽃받침에는 시방세계의 모든 청정 미묘한 불국토의 광대한 모양이 나타나 있느니라. 또한 정수리의 육계는 찬란한 홍련화와 같으며, 그 위에 하나의 보배 병이 있는데, 온갖 광명이 가득하여 두루 부처님 일을 나투고 있느니라. 그리고 이 밖에 여러 가지 몸의 형상은 관세음보살과 다름이 없느니라.
그리고 이 보살이 다닐 적에는 시방세계의 일체 모든 것이 진동하며, 진동하는 곳마다 바로 5백억의 보배 꽃이 피고, 꽃마다 크고 장엄함이 극락세계와 같으니라. 또한 이 보살이 앉을 때에는 칠보로 된 국토가 일시에 흔들리는데 그것은 아래쪽의 금광불 국토에서 위에 있는 광명불 국토까지 이르느니라. 그리고 그 중간에는 무량 무수한 아미타불의 분신과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의 분신들이 구름같이 극락세계에 모여 허공 가득히 연화대에 앉아서 미묘한 불법을 연설하여 고해 중생을 제도하시느니라.
이와 같이 관조함을 정관이라 하고 달리 관함을 그릇된 사관이라 하느니라. 또한 이러한 것이 대세지보살의 색신을 생각하는 관이며 열 한번째의 관이니라. 그리고 이 대세지보살을 관조하는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이 오랜 아승지겁 동안 생사에 헤매는 죄업을 없애며, 또한 다시는 태중(胎中)에 들지 않고, 언제나 모든 부처님의 청정 미묘한 국토에 노닐게 되는 것이니, 이와 같은 관이 성취되면 온전히,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보았다고 할 수 있느니라."
4)일상생활에서
염불행자는 일상생활에서 마음을 고요하고 안정되게 해야 할 것이다. 편안한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욕심을 놓아야 한다. 욕심을 떠난 사람은 저절로 편안함을 얻는다. 이렇게 편안한 마음으로 염불을 해야 오로지 염불에만 집중할 수 있으며 일심을 얻을 수 있다. 또한 급할 때만 불보살님을 찾다가 곧 잊어버리기를 반복하지 말고 언제 어디서나 한결같이 해야 할 것이다.
혜원스님은 사람들에게 사바세계를 버리고 정토를 구하기를 권하였다. 그의 가르침을 보면 "금과 은은 마음을 더럽히는 더러운 물건이요, 벼슬은 몸을 얽어매는 고구(苦具)와 같은 것입니다. 여색은 목숨을 뺏는 도끼와 같은 것이며, 화려한 옷과 맛있는 음식, 전원과 옥택 따위는 모두 삼계에 떨어지게 하는 함정입니다. 오직 인간 세상을 벗어나 연화회상에 태어나기를 기원합시다. 더 무엇을 흠모하고 부러워하겠습니까?" 하였다......
내가 전에 <在家眞實修行文>이라는 글을 써서 세상 사람들에게 권한 적이 있거니와 그 내용은 대략 이런 것이었다.
진실로 수행하려는 자는 굳이 무리를 짓거나 모임을 만들 것은 아니다. 집안에 조용한 방이 있을 것이니, 그 곳에서 문을 닫고 염불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또한 굳이 스님들에게만 공양할 것은 아니다. 집안에 부모가 계실 것이니 효순한 마음으로 봉양하면서 염불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또 꼭 밖으로 나돌며 강의를 들으려 할 것은 아니다. 집에 경전이 있을 것이니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하면서 염불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또한 오직 절에만 시주할 것은 아니다. 가난한 친척과 이웃에게도 두루 베풀면서 염불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죽창수필 2집>
염불행자는 우선 생활이 검소 검약할 것이며, 결코 세속적 욕망를 쫓아가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일상생활 속에서 염불을 할뿐이지 굳이 밖으로 찾아 유난스럽게 하지 않는다. 가족이나 친척이나 이웃이나 직장동료들에게 그들의 뜻에 효순하고 친절과 보시를 베풀어 화합하여 내가 있는 곳에서 기쁨과 평화를 만드는 일을 하는 속에서 염불수행도 익어갈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 수행따로 생활 따로 인 사람을 종종 접하게 된다. 이런 사람은 염불을 해도 마음에 전혀 변화가 없다. 오히려, 나는 염불한다는 상을 가지고 염불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고 일상생활은 하찮은 것이라 여겨 아만만 쌓고 주변사람들에게 무관심하다. 무관심해지고 무덤덤해지는 것을 수행이 잘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인간관계에서는 이기적인 반응을 하기 쉽다. 즉 자기중심적으로 사고하고 타인에 대한 배려를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이 걸림없이 사는 모습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아무리 수행을 열심히 하고 신비한 체험들을 많이 했다고 하더라도 다시 현실로 돌아오지 않으면 안되고 현실에 뿌리 내리지 않은 열반은 단지 환상일 뿐이다.
특히 염불은 부처를 생각하고 정토를 생각하여 내 모습이 부처를 닮아 가고 내가 서있는 곳에서 정토를 일구는 수행이 되어야 한다.
4.염불수행의 공덕
염불은 불보살의 위신력에 감응하는 수행법이므로 다른 수행법과 비교할 수 없는 현실적인 위력이 있다. 염불의 이러한 위력 때문에 현실의 고난을 극복해보고자 하는 많은 중생들에게 기도성취의 문이 되었고, 수행자들에게는 수행시 나타나는 장애를 극복하는 대치법이 되기도 하였다. 특히 칭명염불에 대한 공덕은 많은 선지식들에 의해 강조되곤 하였다.
존호를 염하는 가르침은 경전에 널리 밝혀져 있거니와 실로 한번만이라도 염하면 진사겁(塵沙劫)의 죄를 소멸하고 십념(十念)을 갖추면 몸이 정토에 나서 영원히 위급한 환난을 구제하는 것이다. 업장이 녹고 원액(寃厄)을 소멸하여 길이 고통의 나루를 헤어날 뿐만 아니라 이 인연을 의탁한다면 마침내는 각해(覺海)에 도달하고야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에도 "만일 어떤 사람이 산란한 마음으로 탑묘중에 들어가서 단 한번 '나무불'을 일컬을지라도 모두가 그 인연으로 마침내는 불도를 이루게 된다" 하였고 또 "부처님의 명호를 받들어 지니는 이는 누구나 제불께서 호념하여 주신다"고 한 것이다.
<보적경>에서는 "높은 소리로 염불하면 마군들이 모두 두려워 흩어진다" 하였고 <문수반야경>에서는 "수행하는 이가 스스로 우둔해서 능히 관찰하지 못한다면 다만 생각과 소리만 계속 이어지게 하라. 그래도 반드시 불국토에 왕생할 수 있으리라" 하였다.
또 <대품경>에서는 "만일 어떤 사람이 산란한 마음으로라도 염불을 한다면 곧 고액이 없어지고 그 복이 다함 없는데 이를 것이다" 하였고, <증일아함경>에는 "한 염부제의 온갖 중생을 사사(四事)로 이바지한다면 공덕이 한량이 없으리라. 그러나 만일 어떤 이가 착한 마음이 계속하여 부처님의 명호를 잠시 동안만이라도 염한다면 그의 공덕됨은 위의 비유를 훨씬 지나서 생각할 수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을 것이다" 하였으며 또 <화엄경>에는 "자재한 마음이 염불문에 머무르면 자기 마음에 있는 즐기고 싶은 것을 가히 따름을 알 것이니 온갖 부처님께서 언제나 그 모습을 나타내시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또 비석화상의 <염불삼매보왕론>에는 "큰 바다에서 목욕한 사람은 이미 온갖 냇물을 다 쓴 것과 같이 부처님의 명호를 염하는 사람은 반드시 온갖 삼매를 한꺼번에 이루는 것이다. 또 마치 수정주를 탁한 물에다 넣으면 아무리 탁한 물이라도 맑아지지 않음이 없는 것처럼 어지러운 마음에다 염불을 던지면 아무리 어지러운 마음이라도 부처를 이루지 못함이 없는 것이다. 이미 이와 같이 계합되었다면 또한 마음이나 부처랄 것이 없나니, 함께 없어짐(雙亡)은 곧 정(定)이요 함께 비추임(雙照)은 곧 혜(慧)다. 정혜가 이렇게 균등하다면 다시 어떤 마음인들 부처가 아니겠으며 어떤 부처인들 이 마음이 아니겠는가. 마음과 부처가 이미 그렇다면 어떤 경계, 어떤 반연일지라도 모두가 삼매 아님이 없는 것이다."고 하였으니 누가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여 높은 소리로 염불한다고 다시 근심하리오.
그러므로 <업보차별경>에서는 고성으로 염불하고 송경(誦經)하는 수행에 열 가지의 공덕을 말하였으니 이른바 "능히 졸음을 막고, 하늘의 마군이 놀래 두려워하며, 음성이 시방에 가득 퍼지고, 삼악도의 고통이 멈추며, 다른 잡음이 섞여 들어오지 못하고, 마음이 산란하지 않게 되며, 용맹한 마음으로 정진하게 되고, 모든 부처님께서 함께 기뻐하시며, 항상 삼매가 현전하고, 반드시 정토에 나는 것이다" 하였다.
또 논(論) 가운데서 묻되 "무엇을 인하여 한 번 염불한 힘이 능히 모든 업장을 끊는다 하는가" 함에 답하기를 "마치 한 개의 전단향이 능히 사십유순의 이란림(伊蘭林)을 뒤덮는 것과 같다. 또 비유하면 어떤 이가 사자의 힘줄로 거문고의 줄을 만들어 쓰면 그것을 한 번 튕기는 소리에 나머지 줄은 모두 끊어지고 마는 것과 같으니, 만일 보리심 가운데서 염불삼매를 행한다면 온갖 번뇌업장이 단박에 단멸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하였다.
그러므로 알라. 부처님의 위신력이 가히 생각키 어려워 그 현통(玄通)함을 헤아릴 수 없음이 마치 돌이 쇠를 흡수함과 같고 물을 강하(江河)에 쏟아 붓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오직 자비선근의 힘이라야 능히 이와 같은 일을 볼 수 있나니, 지극한 마음으로 귀의하는 자는 참으로 신령스러운 감응이 환하게 밝을 것이다. <만선동귀집>
또한 옛적에 한 사람이 육조대사에게 묻기를 "염불에 무슨 이익이 있나이까?" 하고 묻는 말에 육조대사 답하기를 "일구(一句),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는 것이 만세의 괴로움을 뛰어나는 묘도(妙道)요, 불(佛)을 이루고 조사가 되는 정인(正因)이요, 삼계 인천(人天)의 안목이요, 마음을 밝히고 성(性)을 보는 혜등(慧燈)이요, 지옥을 깨뜨리는 맹장이요, 많은 올바르지 못한 것을 베는 보검이요, 오천대장(五千大藏)의 골수요, 팔만총지(八萬總持)의 중요한 길이요, 흑암(黑暗)을 여의는 명등이요, 생사를 벗어나는 방방(良方)이요, 고해를 건너는 배요, 삼계를 뛰어넘는 지름길이요, 최존최상의 묘문이며 무량무변의 공덕이니라. 이 일구, 나무아미타불을 기억하여 염념(念念)이 항상 나타나고, 시시로 마음에 떠나지 아니하며, 일이 없어도 이와 같이 염불하고, 일이 있어도 이와 같이 염불하며, 안락할 때도 이와 같이 염불하며, 병고가 있을 때에도 이와 같이 염불하며, 살았을 때에도 이렇게 염불하고, 죽어서도 이렇게 염불하여, 이와 같이 일념이 분명하면 또 무엇을 다시 남에게 물어서 갈 길을 찾으랴. 이른바 오직 아미타불 지니고 다른 생각 없으면 손 튀길 수고도 없이 서방극락 가리라" 하였다.<禪淨雙修集要>
이와 같은 염불의 위력에 근거하여 천태 지자대사는 사람의 근기와 원력에 따른 오방편염불문을 제시, 일체중생이 미타의 대원해(大願海)에 들기를 염원하였다.
첫째, 정토에 왕생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칭명왕생염불삼매문(稱名往生念佛三昧門)을 의지하여 닦아야 한다.
둘째, 무시이래의 업장을 소멸하기 바라는 사람은 관상염불염불삼매문(觀相滅罪念佛三昧門)을 의지하여 닦아야 한다.
셋째, 마음의 미혹을 여의기 바라는 사람은 제경유심염불삼매문(諸境唯心念佛三昧門)을 의지하여 닦아야 한다.
넷째, 세상의 욕망과 집착을 떠나기 원하는 사람은 심경구리염불삼매문(心境俱離念佛三昧門)을 닦아야 한다.
다섯째, 생사해탈과 열반을 바라는 사람은 성기원통염불삼매문(性起圓通念佛三昧門)을 닦아야 한다고 하였다.
1) 본원이란 根本誓願의 준말로서 모든 부처님들이 지난 세상에서 성불하고자 뜻을 세운 여러가지의 서원을 말한다. 본원에는 총원(總願)과 별원(別願)이 있는데, 총원은 모든 부처님들의 공통한 본원 곧 사홍서원이며, 별원은 부처님마다 중생 제도의 인연에 따라 세우신 바 아미타불의 48원이나 약사여래의 12원 등이다.
2)『전통선의 향훈』 청화선사 법어집, 대한불교 금륜회편 p.375~376
3)10악은 10선(계율참고바람)의 반대이고 8사란 8정도(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정, 정혜)의 반대이다.
제6장 진언수행
1.진언의 의미
진언(眞言)이란 글자 그대로 진실한 말이란 뜻이다. 말이란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을 전달하는 수단이다. 그런데 진언이란 이런 개념을 떠난 언어, 즉 중생의 언어가 아닌 부처의 참된 경지를 나타내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말이라기 보다는 소리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할 지도 모르겠다. 범어로는 만트라라고 하는데 찬가 또는 비밀한 말(密言)이란 뜻으로 번역하여 진언, 주문, 주(呪). 신주(神呪), 밀주(密呪), 명주(明呪)라고 한다. 만트라와 비슷한 말로 다라니가 있는데 작지, 총지, 능지, 능차 등의 뜻이다. 능히 무량무변한 이치를 섭수해 지니어 잃지 않는 념혜(念慧)의 힘을 일컫는다. 선법을 모두 지녀서 산실되지 않게 하므로 능지라하며, 악법을 막아서 일어나지 않게 하므로 능차이다. 총지라는 말은 다 지닌다는 뜻이니, 첫째 일체 나쁜 법을 일어나지 않도록 하고, 둘째 일체 좋은 법을 사라지지 않게 하며, 셋째 일체 물든 법을 없애고 깨끗한 법계를 깨닫도록 하므로 총지라 하는 것이다.
지혜론 삼장(智慧論 三藏)이 쓴 명불법근본비(明佛法根本碑)에 보면 총지는 삼장 총지, 삼마지 총지, 문자 총지 이 세가지로 분류된다. 삼장총지란 진언 다라니가 삼장 십이부경의 내용을 다 갖추고 있음을 나타낸다. 곧 다라니 한 글자 가운데서 한량 없이 깊고 깊은 묘한 뜻을 깨달아 한량 없는 뜻을 자유자재 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삼마지 총지란 다라니를 받아 지닌 힘으로 삼매가 나타나 백천 삼매를 다 깨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자 총지란 다라니를 받아 지닌 힘으로 다라니 한 글자 속에서 지금까지 듣고 외운 바 경전의 말씀을 길이 잊지 않는 큰 지혜를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종의 기억술로서의 다라니의 형식이 송주와 유사하므로 주와 혼돈하여 주를 모두 다라니라고 일컫게 되었다. 이것을 구분하여 범문(梵文)이 짦은 것을 진언 또는 주라하고 긴 것을 다라니 또는 대주라 한다.
진언은 불교 이전부터 인도에서 사용되었는데 불교 진언 가운데 흔히 나오는 '스바하'도 리그베다에서 처음 사용되었으며 '옴'이라는 말도 브라흐마나 우파니샤드에서 진언으로 사용되었다. 불교에서 진언이 사용된 것은 대승불교에 와서이다. 특히 밀교에서는 신구의 삼밀을 밀교수행의 요체로 삼아 독특한 수행체계를 세웠는데 이 때 구밀에 해당하는 것이 진언이다. 불교에서는 윤회의 원동력으로 업을 말한다. 즉 인간이 몸과 말과 마음으로 짓는 세가지 업을 정화함으로써 윤회로부터 해탈할 수 있는 것이다. 즉, 부처님의 힘을 빌어 행하는 행위가 불위에 있게 되고,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이 삼매에 있게 되고, 말하는 언어가 또한 불타의 진경을 표현하게 되면 이 몸 그대로 성불한 것이다. 이것이 밀교의 삼밀수행법이다. 이 때 삼밀은 진언에 의해 통일된다. 입으로는 진언을 송하고 마음으로 삼매에 주하며 몸은 인계를 맞는 것은 이러한 통일된 불위를 보이는 것이다. 따라서 삼밀 중에서 진언을 송하는 것이 중심이 된다. 이와같이 다라니를 입으로 송하여 마음에 삼매가 얻어지면 여래의 무상지를 얻고 즉신성불이 이루어진다.
2.진언수행의 기능과 원리
1)진언의 기능
진언은 일반적으로 수행 중의 장애를 없애고 선정과 지혜의 힘을 길러주는 기능이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지송되는 다라니들을 살펴보면서 각각의 위신력을 알아보자.
①대비신주(신묘장구대다라니)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남악알야 바로기제 새바라야 모지사다바야 마라사다바야 마하가로 니가야 옴 살바 바예수 다라나 가라야 다사명 나막 가리다바 이맘알야 바로기제 새바라 다바 니라간타 나막 하리나야 마발다 이사미 살바타 사다남 수반 아예염 살바 보다남 바바마라 미수다감 다냐타 옴 아로게 아로가 마지로가 지가란제 혜혜하례 마하 모지 사다바 사마라 사마라 하리나야 구로구로 갈마 사다야 사다야 도로도로 미연제 마하미연제 다라다라 다린 나례 새바라 자라자라 마라미마라 아마라 몰제 예혜혜 로계 새바라 라아 미사미 나사야 나베 사마사미 나사야 모하자라 미사미 나사야 호로호로 마라호로 하례 바나마 사라사라 시라시리 소로소로 못쟈못쟈 모다야 모다야 매다리야 니라간타 가마사 날사남 바라하라나야 마낙 사바하 싯다유예 새바라야 사바하 니라간타야 사바하 바라하 목카싱하 목카야 사바하 바나마 하따야 사바하 자가라 욕다야 사바하 상카섭나네 모다나야 사바하 마하라 구타다라야 사바하 바마사간타 이사시체다 가릿나 이나야 사바하 먀가라 잘마이바 사나야 사바하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알야 바로기제 새바라야 사바하
이 다라니에는 갖가지 이름이 있으니 그 한 이름은 '넓고 커 원만함(廣大圓滿)'이며, 한 이름은 '걸림없는 크나큰 자비(無碍大悲)'이며, 한 이름은 '고통을 구제해 주는 다라니(救苦陀羅尼)'이며, 한 이름은 '목숨을 늘려 주는 다라니(延壽陀羅尼)'이며, 한 이름은 '나쁜 삶의 길을 없애는 다라니(滅惡趣陀羅尼)'이며, 한 이름은 '원을 채워 주는 다라니(滿願陀羅尼)'이며, 한 이름은 '뜻을 따라 자재한 다라니(隨心陀羅尼)'이며, 한 이름은 '높은 수행의 지위를 빨리 뛰어 넘는 다라니(速越上地陀羅尼)'이니 그 이름의 뜻처럼 그렇게 받아 지니라.
대비심 다라니는 능히 삼계의 뭇 삶들을 크게 이익되게 하니 온갖 걱정거리와 고통이 몸에 감긴 자도 이 다라니로 다스리면 낫지 않은 자가 없다. 이 신묘한 다라니를 잘 받아 지니면 말라 죽은 나무에서도 오히려 새 가지와 꽃과 열매가 생기거든, 하물며 뜻이 있고 앎이 있는 뭇 삶들이겠는가. 몸에 병환이 있을 때 다라니로 다스려서 낫지 않는 일이란 있을 수 없다.<천수천안 관세음보살 대비심다라니경>
대비심다라니는 대비신주 또는 대비주라 하며 현행천수경에서는 신묘장구대다라니라고 한다. 관세음보살의 대비심을 소리로 표현한 것이니 대비주는 관세음보살의 위신력과 똑같은 위신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대비주를 염송하면 모든 액란에서 벗어나며, 관세음의 대비심을 얻어 자비와 지혜를 증득하게 된다.
②준제진언
나무 사다남 삼먁 삼못다 구치남 다냐타 옴 자레주레 준제 사바하 부림
좋은 공덕 모여 쌓인 준제진언을 고요한 마음으로 항상 외우면 여러 모든 재앙이나 어려운 일도 그 사람을 능히 침범하지 못하며 천상이나 인간이나 있는 곳마다 부처님과 다름없는 복을 받으리. 이와 같은 여의보주를 만났사오니 견줄 수 없는 진리 얻게 되리니, 칠억불의 어머니신 준제보살께 목숨바쳐 지심으로 귀의합니다.(용수보살찬)
준제는 범어 cunda의 소리 옮김으로 여섯 관음 가운데 한 이름이다. 천수관음, 성관음 등 육관음은 고통받는 중생을 교화하는데 준제관음은 육도 가운데 인도 즉 세상사람을 교화한다고 한다. <불설칠구지불모준제대명다라니경>에 의할 것 같으면, 각기 구하는 바에 따른 법식을 행한 후 '준제진언'을 7번 내지 21번.108번.1080번 혹은 1천만번 독송할 것을 말하고 있으며, 그렇게 하면 원하는 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진언독송할 때는 진언을 독송하는 자 스스로의 마음을 마치 둥근 보름달과 같이 생각할 것이며, 등근 보름달 한가운데 옴자를 놓아둔 다음 "자레주레준제 사바하" 각각의 글자를 옴자의 오른쪽 방향으로 펼쳐 둔 후 (삼매가운데) 그 글자 한자 한자의 뜻을 자세히 관해야 한다. 그리하여 마음과 더불어 상응하여 서로 차이가 나서는 안될 것인 바, 삼매 가운데 관해야 할 그 펼쳐진 각각 글자의 뜻을 말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옴'자는 끊임없이 떠도는 것으로서 불생불멸의 뜻을 가지며 동시에 일체법이야말로 제일 으뜸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자'자는 일체법이 행하는 바 없음(無行)을 뜻하며, '례'자는 일체법에 형상이 없음(無相)을 뜻하고, '주'자는 일체법이 생겨나고 머무는 바 없음(無起住)을, '례'자는 일체법에 더러움이 없음(無垢)을, '준'자는 일체법 자체에 비견할만한 동등한 깨달음이 없음(無等覺)을, '제'자는 일체법에는 취하고 버림이 없음을, '사바'자는 일체법이 평등하여 언설할 바 없음(平等無言說)을, '하'자는 일체법은 비롯함이 없이 적정하며 머무는 바 없는 즉, 열반의 의미(無因寂靜無住涅槃)를 지니게 된다고 하였다.
따라서 준제진언은 인간을 교화하시는 관세음보살의 소리이고,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인 자비의 소리이다. 따라서 이 진언을 외우면 부처님의 복락을 누린다고 하였으니 부처님의 복이란 유루복이 아닌 영원한 무루복으로 열반을 얻음을 의미한다.
③육자대명왕진언
옴마니 반메 훔
관세음보살의 광대원만한 자비심을 소리로 형상화한 또다른 이름이 육자진언이다. 따라서 이 다라니도 관세음보살의 본심에 감응하여 원하는 것을 모두 이루고 반야지혜를 증득하게 한다. 우리나리에서 가장 많이 염송되는 진언으로 밀교계통의 종단인 진각종, 진언종 등의 주된 수행법이 육자진언 염송이다.
만약 사람이 능히 항상 이 육자대명다라니를 받아 지니는 자가 있으면, 이것을 지송할 때에 구십구 긍가하사(긍伽河沙) 수의 여래가 집회하며, 또 미진수와 같은 보살이 집회하고, 또 삼십이천의 천자들이 또한 다 집회하고, 또 사대천왕이 사방에서 그를 호위한다. 또 사아라 용왕, 무열뢰 용왕, 득차가 용왕, 바소지 용왕 이와 같은 무수한 백천만구지나유다의 용왕이 와서 이 사람을 호위하며, 또 땅속의 약차와 허공신들이 와서 또한 이 사람을 호위한다.
선남자여, 관자재보살의 몸의 털 구멍속의 구치수의 여래는 휴식한 뒤에 이 사람을 찬탄하여 말하기를 "참으로 훌륭하다 선남자여, 그대가 능히 이 여의마니보배를 얻었도다. 그대의 칠대종족은 다 마땅히 그 해탈을 얻으리로다" 할 것이다.
선남자여, 그 진언을 지니는 사람은 그 배 가운데 있는 모든 벌레는 마땅히 불퇴전의 보살의 위를 얻을 것이며, 만약 또 사람이 이 육자대명다라니로써 이마 위에 이는 자가 있거나, 만약 선남자가 있어서 이 사람을 보게 되는 이는 즉 금강신을 본 것과 같고, 또 사리탑을 본 것과 같으며, 또 여래를 본 것과 같고 또한 구지의 지혜를 구비한 자를 본 것과 같으며,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있어서 법대로 이 육자의 대명다라니를 염송하게 되면 이 사람은 다함이 없는 변재를 얻을 것이며 청정한 지혜 무더기를 얻고 큰 자비를 얻을 것이다.
이같은 사람은 나날이 육바라밀다를 갖추어서 원만한 공덕을 얻을 것이며, 이 사람은 하늘의 전륜관정을 얻고, 이 사람의 입 가운데서 나오는 기운이 다른 사람의 몸에 닿으면 닿인 그 사람은 자비한 마음이 일어나서 모든 진심의 독을 버리고 불퇴전의 보살이 되어서 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할 것이다.
만약 이 염송하는 사람의 손이 다른 사람의 몸에 닿으면 닿인 사람은 속히 보살의 위를 얻을 것이며, 만약 이 진언을 염송하는 사람이 남자, 여인, 동남, 동녀와 내지 다른 종류의 모든 유정의 몸을 보면, 이와 같이 보인 자는 모두 다 속히 보살의 위를 얻고, 이와 같은 사람은 영원히 생로병사의 고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를 받지 않고, 그리고 불가사의하게 상응한 염송을 얻을 것이다. 이제 이 육자의 대명다라니는 이와 같이 설하였다.(<대승장엄보왕경>권3)
④광명진언(光明眞言)
옴 아모가 바이로차나 마하무드라 마니 파드마 즈마라 프라바릍타야 훔
광명진언은 비로자나 법신의 광명으로 무명과 업장을 걷어내고 자성의 밝은 본성이 드러나게 한다. 따라서 수행 중에 장애가 생길 때, 과거의 습관이나 업장을 조복받기 위해서, 또는 과거의 잘못을 참회할 때 이 진언을 한다. 원효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만일 어떤 중생이 어디서든 이 진언을 얻어 듣되 두 번이나 세번, 또는 일곱번 귓가에 스쳐 지나치기만 해도 곧 모든 업장이 사라지게 된다. 만일 어떤 중생이 십악업과 오역죄와 사중죄를 지은 것이 세상에 가득한 먼지처럼 많아 목숨을 마치고 나쁜 세계에 떨어지게 되었을 지라도, 이 진언을 108번 외운 흙모래를 죽은이의 시신 위에 흩어 주거나 묘 위나 탑 위에 흩어 주면, 죽은이가 지옥에 있거나 아귀, 아수라, 축생 세계에 있거나 그 모래를 맞게 된다. 그리하여 모든 부처님과 비로자나 부처님 진언의 본원과 광명진언을 외운 흙모래의 힘으로 즉시 몸에 광명을 얻게 되고 모든 죄의 업보를 없애게 된다. 그래서 고통받는 몸을 버리고 서방 극락세계에 가게 되어 연화대에 화생할 것이다. 그리하여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다시는 타락하지 않을 것이다.(원효대사, <유심안락도>에서)
⑤반야주
마하반야바라밀
반야주는 반야바라밀을 염송함으로써 반야지혜를 체득하고자 하는 것이다. 반야바라밀은 대승보살도의 6바라밀의 하나이자 부처님의 무상정등정각을 말한다. 반야바라밀에 머물면 바로 곧 모든 고통을 여의고 해탈하게 된다. 반야주는 반야심경의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가 아니라 '마하반야바라밀' 그 자체를 염송하는 것이다.
반야심경에서 "반야바라밀다는 매우 신비한 주문이며 매우 밝은 주문이며 위 없이 높은 주문이며 等等이 없는 주문이다" 하였다. 이것은 반야를 주문이라 한 것이지 '아제아제'의 四句를 가리킨 것은 아니다. 요즘 사람들은 주문은 密部에만 속하는 줄로 알고 있으나, 심경은 顯部로서 현부도 또한 주문인 것이다. 이것은 주문을 공부하는 사람이 소홀히 생각하기 쉬운 점이면서 살피지 못한 점이라 할 것이다.<죽창수필 2집>
⑥능엄다라니
<능엄경> 제7권에는 능엄다라니를 설하였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시기를 "만일 숙세의 습기가 있어 없앨 수 없거든 네가 그 사람으로 하여금 부처님 정수리의 광명으로 외운 대능엄주를 일심으로 외우게 하라. 이것은 여래의 볼 수 없는 정수리의 하염없는 마음 부처님이 정수리로 광명을 놓고 보배 연꽃 위에 앉아서 말씀하신 주문이니라."하였다.
능엄다라니는 너무 길어서 생략하고 그 공덕을 말한 부분만 인용하겠다.
아난아, 이 부처의 정수리 광명이 모여 된 살달다반달라 비밀한 가타, 미묘한 章句는 시방의 온갖 부처님을 내는 것이니 시방여래가 이 주문으로 인하여 위없는 삼먁삼보리를 이루는 것이며 시방여래가 이 주문을 듣고 모든 마를 항복 받고 외도들을 이기는 것이며 시방여래가 이 주문을 타시고 보배 연꽃에 앉아 미진 같은 세계에 들어가시는 것이며 시방여래가 이 주문을 머금고 미진같은 세계에서 법륜을 굴리시며 시방여래가 이 주문을 가지고 시방세계에서 정수리를 만져 수기를 주시며 자기의 果를 이루지 못하였으면 시방의 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느니라. 시방여래가 이 주문을 따라 시방의 선지식을 섬기되 사위의(四威儀) 가운데에서 뜻대로 공양하며, 항하사 여래의 회중에서 대법왕자가 되느니라. 시방 여래가 이 주심(呪心)을 행하여 시방에서 친한이, 인연있는 이를 섭수하여 소승들로 하여금 비밀장을 듣고도 놀라지 않게 하느니라. 시방 여래가 이 주심을 송하여 무상각(無上覺)을 이루고 보리수 아래 앉으사 대열반에 드시는 것이다. 시방여래가 이 주심을 전하여 멸도한 후에 불법을 부촉하여 구경까지 주지(住持)케 하며, 계율을 엄정하여 다 청정케 하느니라.
아난아, 만일 여러세계 여러 나라에 사는 중생들이 그 나라에서 나는 벗너무껍질이나 다라나무 잎새나 종이나 천이나 전에 잉 주문을 써서 향낭에 간직할 것이며 이 사람이 총명이 부실하여 외울 수 없거든 몸에 차거나 방안에 써 두기만 하여도 이 사람은 일생동안에 어떠한 독으로도 해하지 못하느니라. 아난아 내 다시 이 주문이 세상 사람들을 구호하여 두려움 없게하며 여러 중생들로 하여금 세간에서 뛰어나는 지혜를 이루게 하는 일을 말하리라. 내가 열반한 뒤에 말세 중생들이 스스로 이 주문을 외우거나 남을시켜 외우게 하면 이 중생들은 불이 태우지 못하며 물이 빠뜨리지 못하며 크게 독한 것이나 조금 독한 것이 해치지 못하며 용이나 하늘 사람이나 귀신이나 정령이나 도깨비마 마귀의 나쁜 주문들이 건드리지 못하고 마음에 삼매를 얻어서 온갖 방자와 양밥과 독한 약과 금독과 은독과 초목의 독과 벌레의 독과 뱀의 독과 만물의 독기가 이 사람의 입에 들어가면 곧 감로롤 변하며 온갖 나쁜 별이나 귀신들이나 악독한 마음으로 남을 해롭게 하는 것들이라도 이 사람에게는 감히 나쁜 짓을 하지 못하며 빈나와 야가와 악귀의 왕과 그 권속들이 모드 큰 은혜를 입었으므로 항상 이 사람을 보호하느니라. <능엄경 제7권>
위와 같이 다라니는 각기 뛰어난 위신력이 있어 이것을 염송할 경우의 공덕을 말로 다 할 수 없지만 간추려 말한다면 현실의 액란을 소멸하고 수행 중의 장애를 극복하며 마음을 잘 조복하고 계율을 능히 지키며 불법을 잘 받들어 열반에 이른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언의 기능은 간략히 무장무애, 신심견고, 구경열반이라 하겠다. 원래 주문이란 주술적인 힘을 가진 글귀를 이르는 말로 불교외에도 각 종교마다 특정한 효력을 발휘한다고 여겨지는 독특한 주문이 있다. 그러나 불교의 진언은 근본적으로 무명을 타파하고 열반을 증득하기 때문에 다른 종교의 주술적 주문과는 격이 다르다. 그래서 불교의 진언을 명주(明呪)라고 하는 것이다. 범어로 비드야라고 하는데 무명을 아비드야라고 하는데 반하여 사용된 말이다.
2)진언수행의 원리
이러한 진언의 힘은 그것이 불보살님의 마음을 담고 있기 때문인데, 진언에는 어떤 특징이 있으며 진언수행의 원리는 무엇인지 살펴보자. 소리에는 저마다 파장이 있어 나름의 기운을 가지고 있다. 그 중에서 진언은 다른 소리와 달리 파장이 일정하여 사람의 의식을 고요한 곳으로 이끄는 힘이 있다. 불경을 범어에서 한문으로 번역할 때 번역하지 않는 경우가 몇가지 있었는데 진언도 그 중의 하나로 번역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뜻이야 해석할 수 있겠지만 그 소리까지 옮겨 오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진언은 개념을 떠난 말로 개념을 없애는 방편이 된다. 이런 이유로 진언은 번역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진언 수행은 어떻게 하는가. 몸으로는 바른 자세를 취하고, 입으로는 진언을 외우면서 마음으로는 그 소리를 놓치지 않고 듣는다. 이때, 그 소리의 파장이 몸과 마음에 퍼지면서 점점 고요해지고 의식은 차츰 내면 깊은 곳으로 파고 든다. 이때 여러 가지 현상들이 나타날 수 있는데 이런 것에 신경쓰지 말고 더욱 집중하여 오로지 진언의 소리를 놓치지 않고 들으면서 몸과 마음으로 소리가 주는 파장과 에너지를 느끼도록 한다. 그렇게 하다보면 소리와 내가 하나가 되어 나도 사라져버리고 삼매에 들게되며 궁극의 경지를 경험하게 된다.
<대품반야경>에서는 소리의 모습이 실담 42자로 분류되고 <금강정경>에서는 52자로 분류된다. <열반경> 문자품에서는
가섭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무엇이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글자의 근본이옵니까?" 부처님이 답하셨다. "선남자여, 처음에 반쪽글자를 말하여 근본을 삼아 가지고 모든 언론과 주술과 문장과 오음의 실제 법을 기록하게 하였으므로, 범부들은 이 글자의 근본을 배운 뒤에야 바른 법인지, 달못된 법인지를 알 것이니라." "세존이시여, 글자라는 것은 그 뜻이 무엇입니까?" "선남자여, 열 네가지 음이 글자의 뜻이라 이름하고, 글자의 뜻을 열반이라 하며, 항상한 것이므로 흘러 변하지 않느니라. 만일 흘러가지 않는 것이라면 곧 다함 없는 것이며 다함 없는 것 이것이 바로 여래의 금강의 몸(金剛身)이니라. 이 열내가지 음을 소리의 근본이라 하느니라."
하시고, 각각의 기본 소리들이 같는 의미를 세세히 말씀하셨다. 예를들어 '첫소리 짦은 아는 파괴하지 못함이요, 파괴하지 못할 것은 삼보이니 마치 금강과 같으니라' 하셨다. 이런 소리의 의미를 살려 이루어진 것이 다라니라 할 수 있다. 다라니를 총지라고 하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다라니는 모든 공덕을 다 갖춰 지닌 존재의 참모습을 나타낸다. 따라서 대비주는 관세음보살의 광대원만한 대비심이 드러나는 한량없는 공덕의 세계이고, 광명진언은 비로자나 부처님의 진여의 세계이며. 반야주는 반야지혜를 드러내는 위없이 높은 평등의 세계이다. 따라서 이런 진언의 힘에 의해 수억겁의 업장이 일시에 녹아지고, 백천삼매가 한꺼번에 갖추어지고, 부처님의 지혜를 증득하며 현신의 몸으로 불신을 이루는 것이다.
3)다른 수행법과의 관계
주(呪)는 기도다. 세속의 신주에도 큰 위력이 있어서 주문을 외우면서 신에게 기도하면 복을 불러오지 아니함이 없고 화란 물리치지 아니함이 없다. 마하반야바라밀도 이와 같아서 네가지 덕을 갖추고 크나큰 신력이 있다. 안으로는 구비하지 아니한 덕이 없고 밖으로는 떠나지 못할 화가 없다. 만약 지성스러운 마음으로 이 명구를 외우면서 모든 부처님과 보살, 그리고 신인에게 우러러 기도한다면 구하고 원하는 바를 따라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다. 이와 같은 뜻으로 주라고 하는 것이다.(<금강삼매경론> 권 하, 진성공품)
진언수행은 진언이 불보살님의 위신력을 담고 있는 공덕장이라는 믿음과 그 힘을 빌어 현실의 액란을 소멸하고 수행력을 증진하고자 하기 때문에 기도와 유사한 성격을 갖고 있다. 또한 경 중에서는 경의 뜻을 응축하여 다라니로 표현하기도 하고, 불보살님의 공덕을 다라니로 표현하기도 하므로 간경이나 염불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 중에서도 진언의 행법을 보면 특히 기도와 유사하다.
한편 진언은 참선수행자에게 대치방편으로도 매우 유효하다.
만약 산이나 들에서 경을 외우고 좌선을 할 때 산에 사는 도깨비나 잡된 귀신들이 괴롭히고 어지럽혀서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는 자가 이 다라니를 한 편 외우면 이 모든 귀신들이 모두 다라니의 위력에 사로 잡히게 된다. 만약 법다이 외워 지녀서 뭇 삶들에게 크나큰 자비의 활동을 일으키는 자는 내가 마땅히 모든 착한 신들과 용왕, 금강밀적(손에 금강저를 들고 법을 옹호하는 천신)에게 분부하여 그 사람을 보호하여 그 곁을 떠나지 않도록 하되 마치 눈동자를 보살피듯 하도록 하겠다. (『천수천안 관세음보살 대비심다라니경』)
진언수행은 염송을 기본으로 한다는 점에서 간경, 염불과 통하고, 관법과 염법을 통해 삼매를 얻고 지혜를 증득하기 때문에 참선수행과도 통하며, 원하는 바를 이루므로 기도와도 통한다. 또한 진언을 하는 동안에는 삼업청정이 필수적이며 따라서 계율을 청정하게 지켜나가야 한다. 부처가 되고자 하는 것이 수행인 바 수행자의 행이 부처의 행이 되도록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진언수행자는 먼저 몸과 마음으로 진언의 참뜻을 체득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계율 수행과 관련된 경문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만일 말세 중생이 도량에 앉으려 하거든 먼저 비구의 청정한 계율을 받아 가져야 하되 반드시 계행이 청정한 제일가는 사문을 택하여 스승을 삼아야 하리니 계율이 참으로 청정한 스님을 만나지 못하면 너의 계율은 성취되지 못하느니라. 계율을 성취한 뒤에는 깨끗한 새 옷을 입고 향을 피우고 고요히 앉아서 부처님께서 말씀한 주문을 백 팔 번 외운 연후에 結界地를 정하여 도량을 차리고 현재 시방에 계시는 부처님네가 대비광명을 놓아 보내어 정수리에 대기를 구할 것이니라. 아난아, 이렇게 청정한 말세의 비구나 비구니나 백의 단월들이 마음에 탐심과 음욕이 없어지고 부처님의 계율을 깨끗이 가지며 도량 안에서 보살원을 발하고 나가고 들어올 때마다 반드시 목욕하고 육시로 도를 행하되 삼칠일을 자지 않고 지내면 내가 그 사람 앞에 나타나서 정수리를 만져 위로하여 그로 하여금 마음이 열리어 깨닫게 하리라. <능엄경>
진언수행에 있어서도 계율이 바탕이 된다. 특히 진언은 그 위력이 현실적으로 바로바로 나타나기 때문에 정심(淨心)을 갖지 않으면 삿된 길로 빠질 수도 있으므로 각별히 주의하여야 한다. 따라서 진언수행을 하려면 먼저 기간을 정해서(보통 21일간)하되 그 기간 동안에는 계율을 지키고 신구의 삼업을 청정히 해야 한다.
이렇듯 진언수행은 다른 수행법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러나 진언수행이 특별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원래 불교 수행법은 다 통하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중생들의 고통을 구제하고 열반으로 이끌기 위해 부처님께서 자비와 지혜로써 여러 가지 방편을 시설하여 중생이 각기 근기에 많게 수행하도록 한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산은 하나이나 정상에 이르는 길은 여러 가지인 것과 같으며, 특히 밑에서 올라갈 때는 더욱 여러 갈래의 길이 있다가, 차츰 올라가다 보면 서로 한길로 만나게 되는 경우와 같다.
3.진언수행의 방법
1)마음가짐
진언수행자는 진언을 입으로만 외울 것이 아니고 그 마음으로 진언의 본질 속으로 녹아들어가도록 해야한다. 즉, 관세음보살의 본심미묘한 진언을 외울 때에는 마음으로 광대원만하고 평등한 자비심을 이루어야 한다. 따라서 자비의 마음을 내어 관세음보살의 마음과 하나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광명진언을 외울 경우에는 자신이 광명자체가 되어 마음 속의 모든 어둠을 그 광명으로 녹여버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진언을 염한다.
관세음보살은 말씀하셨다.
"크나큰 자비의 마음(大慈悲心)이 이것이며, 치우침 없이 평등한 마음(平等心)이 이것이며, 함이 없는 마음(無爲心)이 이것이며, 물듬없는 청정한 마음(無染着心)이 이것이며, 존재를 공으로 살피는 마음(空觀心)이 이것이며, 늘 공경하는 마음(恭敬心)이 이것이며, 늘 낮추는 마음(卑下心)이 이것이며, 어지러움이 없는 평화로운 마음(無雜亂心)이 이것이며, 집착해 취하지 않는 마음(無見取心)이 이것이며, 위없는 깨달음의 마음(無上菩提心)이 이것이다. 이와 같은 마음이 바로 다라니의 모습인 줄 마땅히 알아야 하니 그대는 이러한 다라니의 모습을 의지해서 실천해야 한다."<천수천안 관세음보살 대비심다라니경>
2)염송법
가범달마 천수경에 보면 "이 진언을 외움에는 삼밀의 수행이 있으니 어밀(語密)이란 입으로 다라니를 외움이요, 의밀(意密)이란 다라니를 외우는 한 생각을 뜻으로 반조하거나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진언 범자를 생각하여, 숨이 날 때 글자가 나고 숨이 들 때 글자가 들어 글자 글자가 밝은 구슬을 꾀놓은 것처럼 환하여 끊어짐이 없게 하는 것이다."하였다. 또한 신밀(身密)은 손으로 결인을 하는 것으로 40수진언이 있다. 그 중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입으로 외우면서 귀로 듣고 마음으로 관하는 것이다. 외울 때는 소리를 내서 하는 경우, 입은 벌리지만 소리는 거의 내지 않는경우, 입도 벌리지 않고 마음으로 소리를 관하는 경우가 있다. 이 세가지 모두 귀(마음)로는 명확하게 들어야 하며 소리는 한자한자 발음을 정확하게 해야 한다. 이렇게 듣는 것을 놓치지 않고 집중해서 염송하다 보면 온옴으로 소리가 주는 파장과 기운이 느껴지고 차츰 소리와 하나가 된다. 소리와 하나가 되면 호흡도 느끼지 못하고 나도 사라져 버리고 오직 소리와 그 기운만이 느껴진다. 또는 입으로는 진언을 외우면서 마음으로는 진언의 범자를 떠올려 한자한자 정확하게 보면서 집중한다. 앞에서 본 준제진언의 경우가 그건 경우이다. 꼭 범자가 아니더라도 진언을 외우면서 한자 한자 떠올려가며 외우면 집중이 쉽게 된다. 또는 아랫배와 같이 몸의 특정한 곳을 집중하여 한자 한자 기운을 느끼면서 염송하는 방법도 있다. 그렇게해서 나도 잊어버리고 오직 진언만 있는 것이 지속되면 앉으나 서나 다니면서 언제나 진언하는 것이 저절로된다. 이렇게 익어지는 경지가 되면 부처님의 자비와 지혜를 증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한 순간이라도 삼매에 들었다면 진리의 바다에서 노닌 것이고, 산심으로라도 진언을 외웠다면 그 공덕을 결코 헛되이 사라지지 않는다. (진언 염송법도 기본적으로 염불방법과 다르지 않다. 염불수행 중에 지명염불방법을 참고하기 바람)
3)일상생활
진언행자의 마음가짐이 진언에 결맞는 것이어야 하듯이 생활도 또한 거기에 맞는 것이어야 한다. 진언을 외울때만 수행하고 일상생활에서는 여전히 탐진치의 노예가 되어 살아간다면 진정한 진언행자라고 할 수 없다. 모든 수행이 일상생활에서 일여해야 하듯이 진언수행도 생활 속에서 구현되어야 참 수행이라 할 수 있다.
관세음보살이 말씀하셨다.
"만약 훌륭한 남자와 여인으로서 이 신주를 받아 지니는 자는 깨달음의 넓고 큰 뜻을 발하고, 뭇 삶들을 건질 서원을 세우며, 몸으로 깨끗한 생활규범(齋戒)을 지니며, 뭇 삶들에 대해 평등한 마음을 일으키며, 늘 이 주를 외워 끊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계율을 지키고 중생들에 대해 평등한 마음을 일으키며 언제나 진언을 외워 끊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진언수행자의 일상생활이다. 진언을 통해 수행이 깊어지면 그 공덕으로 몸과 마음이 밝아지고 본성에 따른 마음과 행이 저절로 우러 나온다. 따라서 저절로 계율이 지켜지고 모든 존재에 대해 자비의 마음이 저절로 나온다. 또한 진언수행을 하다보면 우주가 나와 상통하고 있음을 느끼게 되고 자신감과 당당함이 생기며 다른 사람에게도 밝은 기운이 전해져 더불어 즐겁게 살아진다.
4)진언행법의 예
보다 자세한 염송법에 대해서는 천태종의 사명지례(四明知禮)가 천수경류 경전상의 규범과 법화참법 등에 근거하여 엮은 『천수안대비심주행법』을 통해 간략히 정리해 보겠다. <자세한 사항은 『천눈천손의 인식과 사랑』(법성 역해, 큰수레)을 참고하시기 바람>
①도량을 꾸밈
경에 '고요한 방에 머물러 깃발을 걸고 등을 켜며 향과 꽃 음식으로 공양한다'고 말씀하셨고, 백록(百錄 : 灌頂禪師)의 관세음을 청하는 의식에서는 '마땅히 도량을 잘 가꾸고 꾸며서, 향그러운 흙으로 땅을 바르고 여러 깃발과 일산을 걸며, 불상을 남쪽으로 향하도록 모시고 관음상을 따로 동쪽으로 향하도록 한다'고 하였다.
이제 반드시 천 손 천 눈 갖춘 관음상(千手眼觀音像)이나 마흔 개의 손 갖춘 관음상(四十手觀音)을 모시되, 이러한 상이 없으면 여섯 손이나 네 손 갖춘 관음상 앞에서 수행한다. 혹시 이러한 관음의 모습 마저 없다면 다시 석가모니 부처님의 형상이나 대세지 보살의 형상도 무방하다.
수행자가 열 사람 안짝이면 서쪽을 향하여 땅에 앉되 땅이 만약 축축하면 낮은 걸상을 놓는다. 날마다 힘을 다해 공양하되 공부 시작하는 첫 날을 정하지 못하였더라도 공양 올림을 빼먹어서는 안된다. 형계선사의 보행(補行 : 摩訶止觀補行傳弘決)은 '비록 뜻과 입으로 정성을 기울이되 반드시 복으로써 도우라'고 했으니 날마다 서서히 지어가다 점점 끌어 올려 가야 한다. 자칫 첫날부터 힘을 잡지 못할까 걱정되니 반드시 먼저 생활의 허덕임을 그만두고 온 정성을 기울이고 온 힘을 다하는 것을 보여야 한다.
경에서는 '만약 여러 중생이 현세에 원을 구하는 자는 21일 동안 깨끗이 계를 지키고 재를 지녀 이 다라니를 외우면 반드시 원하는 바를 이룬다'고 하였다. 이에 의거하면 수행자는 반드시 21일을 한 기간으로 삼아서 날짜를 줄여서는 안된다.
②몸과 입과 뜻 세가지 업을 깨끗이 함
경에 말씀하신다. '이 신묘한 다라니을 외우는 자는 넓고 큰 깨달음의 마음을 내고 온갖 중생들을 건질 서원을 세워, 몸으로는 재와 계를 지니며 고요한 방에 머물러 깨끗이 목욕하고 맑고 깨끗한 옷을 갈아 입고, 의식을 한 곳에 거두어 다른 것을 생각하지 말라.'
법화삼매는 다시 말한다. '처음 도량에 들어가면 마땅히 향기로운 물로 목욕하고 정갈하고 깨끗한 옷을 갈아 입는데, 큰 가사나 새로 물들인 옷을 입으라. 만약 새 옷이 없을 때는 묵은 옷 가운데 좀 나은 옷을 가려 도량에 드는 옷을 삼으라. 나중 도량을 벗어나서 깨끗하지 못한 곳에 갈 때는, 깨끗한 옷을 벗어 놓고 깨끗하지 않은 낡은 옷을 갈아 입고 하던 일을 마치고서는, 반드시 목욕하고 본래의 깨끗한 옷을 입고 도량에 들어 법을 행하라.'
비록 하루일 망정 더러운 곳을 가지 않았어도 반드시 한 번 몸을 씻고, 한 기간이 끝나기 까지는 잡된 말을 하지 말며, 사람들을 만나서 이러쿵 저러쿵 문답하지 말라. 한 기간이 끝나기까지는 경을 의지하여 사유를 이끌어가며, 찰나 찰나 사이에도 세상의 부질없는 일을 생각하지 말라. 대소변 볼 때나 먹고 마실 때도 반드시, 한 생각을 잘 잡아 보살펴서 흩어져 없어지지 않도록 하고, 일을 마친 다음에는 곧 도량에 들어가서 일에 매여 공부가 느려지지 않도록 한다.
수행의 큰 요점은 몸에 있어서는 일을 열어냄과 막음(身開遮)이라 할 수 있고, 입에 있어서는 말함과 침묵함(口說默)이라 할 수 있으며, 뜻에 있어서는 쉬어 그침과 살펴 드러냄(意止觀)이라 할 수 있다. 수행자는 반드시 옳은 스승을 의지하여 그 가르침을 받아 바른 길을 안 뒤에 실천해야 하니 제멋대로 할 수 있다고 해서는 안된다.
③도량의 구역을 정해 맺음
수행자는 공부 시작하는 날을 잡아서 예경하기에 앞서, 마땅히 수행하는 곳을 깨끗이 정리하고 법다이 도량의 구역을 정해 맺어야 한다. 경에 말씀한다.
훌륭한 이여, 만약 어떤 사람이 세간의 고통을 싫어하고 오래 사는 기쁨을 구하려는 자는, 한가하고 깨끗한 곳에 머물러 깨끗한 구역을 설정하고 다라니로 정화된 옷을 입고서 물이나 밥, 향이나 약을, 다라니를 108번 외우고 먹으면 반드시 긴 수명을 얻는다. 만약 법답게 깨끗한 구역을 설정하고 법에 의지하여 받아 지니면 모든 것을 이루게 된다.
깨끗한 구역을 설정하는 법은 칼을 가지고 주를 스물 한 번 외운 뒤 땅에 금을 그어 구역을 설정하기도 하며, 깨끗한 물을 가지고 주를 스물 한 번 외운 뒤 사방에 뿌려 구역을 설정하기도 한다. 또는 흰 개자를 가지고 주를 스물 한 번 외운 뒤 사방에 던져서 구역을 설정하기도 하고, 또는 생각이 이르는 곳으로 구역을 설정하기도 하며, 또는 깨끗한 재를 가지고 주를 스물 한 번 외운 뒤 구역을 설정하기도 하고, 또는 다섯 가지 빛깔의 실을 가지고 주를 스물 한 번 외운 뒤 사방에 둘러 쳐서 구역을 설정하기도 한다.
만약 경에 말씀한 법대로 받아지니면 자연히 좋은 결과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경에 꼭 어떻게 하라고 정해진 바가 없으며 모두 자신의 형편에 따라 다라니법을 실천하라고 말씀하였으니 마음으로 결계를 정하고 형편에 따라 하면 된다.
④공양 올림
수행자는 법에 의하여 도량의 구역을 정해 맺은 다음에는 천안의 거룩한 상 앞에 이르러 먼저 자리를 펴고 그 자리에 선다. 그리고 마땅히 모든 삼보와 법계의 뭇 삶들이 나의 몸과 마음으로 더불어 둘이 아니고 차별이 없다고 생각해야 하며, 모든 부처님은 이미 깨쳤지만 뭇 삶들은 오히려 헤매고 있어서 내가 뭇 삶들을 위해 헤매임과 장애를 뒤집기 위해 삼보께 절하고 받들어 모신다고 생각해야 한다.
⑤삼보님과 여러 하늘을 청함
수행자는 바른 뜻을 움직여 널리 공양한 다음, 무릎 꿇고 향을 사루어 마땅히 삼보가 이미 장애를 떠나 깨끗하나, 한 몸처럼 거두는 크나큰 자비로 뭇 삶들을 보살펴 주심을 생각하라.
만약 능히 몸과 말과 뜻의 업을 기울여 삼보를 청하면 반드시 옴이 없이 와서 삶들의 괴로움 빼내주고 기쁨을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지성으로 자리를 따라 은근히 세번 청하면 반드시 부름에 따라 느껴 내려오심이 있을 것이다.
⑥우러러 찬탄하고 정성을 보임
간곡한 정성을 펴서 말함에는 자신의 지혜의 힘에 따라 진실하게 말해야 한다. 그러나 구하는 일이 나고 죽음의 질곡을 키워 가서는 안되니, 이끌어 움직여가는 그 마음으로 받드시 중생들을 널리 이롭게 해야 한다. 오직 뜻을 오로지 하고 삼가는 곳에서 비로소 느껴 통함이 있는 것이니 쉽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⑦예배함
오체를 땅에 던져 삼보에 절함이란 오온을 살바야의 땅(一切智地)에 던져 계, 정, 혜, 해탈, 해탈지견의 다섯가지 법신의 공덕을 드러냄이다. 이에 진언행자는 범부의 몸을 던져 삼보에 예배함으로써, 삼보 속에 구현된 삶의 실상을 범부의 생활 속에 새롭게 구현한다. 그러므로 그는 인드라 그물 속 구슬과 같이 겹쳐지는 연기의 세계를 관찰하면서 시방의 삼보에 예배함으로써 서로 다함없고 겹쳐지고 스며드는 법계의 여기상을 자신의 한 생각 한 몸 속에 실현한다.
⑧원을 발하고 다라니를 지님
비구 . 비구니 . 우바새 . 우바이 . 남자아이나 여자아이로서 이 다라니를 외워 지니고자 하는 자가 있다면 뭇 삶들에게 자비로운 마음을 일으키고 먼저 나를 따라 이러한 원을 발해야 한다.
대비하신 관세음께 귀의하오니
온갖 법을 어서 빨리 알아지이다.
대비하신 관세음께 귀의하오니
지혜의 눈 어서 빨리 얻어지이다.
대비하신 관세음께 귀의하오니
모든 삶들 어서 빨리 건져지이다.
대비하신 관세음께 귀의하오니
좋은 방편 어서 빨리 얻어지이다.
대비하신 관세음께 귀의하오니
반야의 배 어서 빨리 올라지이다.
대비하신 관세음께 귀의하오니
고통 바다 어서 빨리 건너지이다.
대비하신 관세음께 귀의하오니
계정혜의 길 어서 빨리 얻어지이다.
대비하신 관세음께 귀의하오니
열반 산에 어서 빨리 올라지이다.
대비하신 관세음께 귀의하오니
무위의 집 어서 빨리 들어지이다.
대비하신 관세음께 귀의하오니
법성의 몸 어서 빨리 같아지이다.
칼산지옥 내가 가면
칼산 절로 꺽어지고
화탕지옥 내가 가면
화탕 절로 말라지며
모든 지옥 내가 가면
지옥 절로 사라지고
아귀에게 내가 가면
아귀 절로 배부르며
수라에게 내가 가면
악한 마음 조복 되고
축생에게 내가 가면
지혜 절로 생겨지다.
별행소(別行疏 : 天台觀音經疏)에 의하면 관세음은 중생들을 슬피 여기는 마음이 지극히 깊으므로, 그들을 가르치고 나를 구해 해탈케하며 자신의 이미 깨친 마음을 돌려 나의 지향에 따라 여러가지 서원을 세우니, 그것은 나의 믿는 기틀이 관세음의 원력에 나아가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에 받드시 크나큰 자비의 관세음이 곧 나은 참 모습임을 사무쳐 알아야 하니, 이제 존재의 참 모습에 돌아가려하므로 참 모습 그대로 원을 세우는 것이다. 또 이 원이 바로 참된 존재의 모습이 드러나는 작용이기 때문에 보살의 큰 원을 나도 이렇게 발하는 것이다.
원을 발하고 나서는 자신이 관세음보살과 아미타여래 앞에 서 있다고 생각하고 거룩한 이름을 부르는데 불구덩이에 빠진 자나 물에 빠진 자가 구제를 바라듯 슬프고 간절하게 해야 한다. 시간이 없을 때는 7번을 부르고 시간이 약간 넉넉할 때는 많이 불러도 무방하다. 그리고 나서 다라니를 외운다.
⑨참회함
수행자가 다라니를 외운 뒤에는 모든 생활의 장애가 다 과거의 원인으로 말미암은 줄 생각해야 한다. 과거와 지금의 생활속에서 여러 삶들과 무슨 죄인들 짓지 않았겠는가. 죄가 얽혀 이미 쌓였으니, 태어날 적마다 서로 만나 원수가 되기도 하고 친한 이가 되기도 하며 막힘이 되고 괴로움이 된다. 만약 참회하지 않으면 해탈할 길이 없으며 도법을 이룰 수 없다.
그러므로 반드시 삼보가 나를 위해 그 모든 죄 없애주기를 간절히 구해야 한다. 이에 경은 말씀한다. '모든 삶들을 위해 과거의 업으로 지은 죄를 참회하고, 또한 스스로 한량없는 오랜 세월에 지은 갖가지 악한 업을 참회하여 없애야 한다.'
법화삼매(法華三昧禮懺)에서도 이렇게 말한다. '업의 참모습은 비록 공하지만 과보는 잃어지지 않아서, 뒤바뀐 인연이 있으면 여러 무거운 죄 일으키게 된다. 이 모든 죄 참회하기 위해서는 슬픈 눈물을 흘리며 간절한 참회의 말을 해야한다.
⑩존재의 참 모습 살피는 행
수행자는 절하고 참회한 다음 도량을 벗어나서 따로 한 곳에 있는 앉을 자리에 나아가 경을 의지해 바른 살핌(觀)을 실천해야 한다. 닦아야 할 관행이란 다라니의 상모(相貌:形相)가 이에 해당한다. 즉, 대자비심과 무염심, 평등심, 무상보리심 등을 통해 끝없는 수행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현행 천수경은 근대에 우리나라에서 편찬한 것으로 우리나라에만 있으면서 가장 많이 독송되고 있으므로 우리나라 불교를 대표하는 경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구나 경의 내용이 선과 교 및 밀교를 융합하고 계.정.혜에 통하여 불교의 진수를 간직하고 있다. 특히 경의 내용들 구분해 보면 예경문, 공양문, 참회문, 발원문, 지송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천친보살의 왕생론에서 제시한 오념문과도 상응한다. 또한 지금 예시한 사명지례의 행법도 포함하고 있으므로 천수경 독송만으로도 진언수행의 모든 행법을 갖추어 행한 것이라 할 수 있다.
4.주의사항
진언은 수행 중에 나타나는 장애를 소멸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진언을 한다고 해도 이런 장애가 그냥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진언 중에 감추어져 있던 마장이 더욱 치성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오로지 진언을 믿어 의심하지 말고 더욱 일심으로 염송하면, 진언의 힘으로 능히 어떤 마구니라도 조복받지 못할 바가 없기 때문이다. 경에서 관세음보살이 서원하기를 모든 중생이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면 성불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나 "조금치라도 의심하는 마음을 일으키면 반드시 그것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하였으니 믿지 아니하면 구원받을 수 없다. 불교인들은 믿음의 의미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믿음이 있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은 외부적인 힘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의심 자체가 큰 장애가 되어 한치도 나아갈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수행에서 믿음은 필수적인 요소다.
열가지 큰 악, 다섯가지 큰 죄(五逆罪)와 사람을 비방하고 법을 비방하며 齋戒를 깨뜨리고 탑과 절을 무너뜨리며 승가의 물건을 품치고 깨끗한 진리의 행을 더럽히는 등 모든 잘못된 행위가 일으킨 무거운 죄를 모두 다 없애줍니다. 그러나 다라니를 의심하면 가벼운 업과 작은 죄도 없앨 수 없는데 어떻게 무거운 죄를 없앨 수 있겠습니까. 오직 무거운 죄만을 없앨 수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깨달음의 인연마저 멀리해 버리게 됩니다."<천수천안 관세음보살 대비심다라니경>
의심은 참선수행에서도 말했듯이 수행의 큰 장애로써 수행의 공덕을 없앨 뿐만아니라 깨달음의 인연마져 멀리하게 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불교신행은 신해행증으로 믿음에서부터 시작된다. 한편 진언을 하다가 두려움, 졸음, 혼침 등의 장애가 생기면 즉시 알아치리고 그 상태에서 깨어나서 참회하고 다시 마음을 가다듬어 진언을 외운다. 그러나 초보자의 경우 어떤 상태가 지속될 경에는 반드시 선지식을 찾아 지도받아야 한다. 또한 진언 중에 전혀 뜻하지 않은 영상이나 빛 또는 소리 등을 경험하더라도 그것은 모두 업식에 기록되어 있던 과거의 기억들이 나타난 것이니 어떤 현상이 오더라도 좋아하거나 싫어하지 말고 오직 진언염송에만 전념하다 보면 이런 현상들은 일시적으로 왔다 가는 것에 불과함을 알게 될 것이다.
진언수행에 앞서 발원과 지계를 닦을 것을 말하였다. 지계와 더불어 중요한 것은 참회와 회향이다.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서원과 이 공덕으로 모든 고통받는 중생들이 탐진치 삼독을 벗고 자비와 지혜의 광명을 만나기를 발원하는 회향의 마음을 갖아야 한다. 자기 개인적인 이익만을 위하여 진언을 행한다면 본래 가지고 있는 진언의 의미를 살리지 못함이다. 하물며 다른 사람을 저주하는 마음으로 진언을 염하는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한다.
경에 "대비신주를 외우는 자로서 모든 구하는 바를 만약 이루지 못하는 자가 있다면 이 다라니는 대비심대다라니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옳지 못한 일을 위해 외우거나 지성으로 외우지 않을 때는 제외합니다"하였다. 진언은 불보살님의 자비와 지혜의 모든 공덕을 소리로 형상화시킨 것이니 어찌 불보살님을 등지고 자기 본성을 등지는 마음으로 진언수행을 할 수 있겠는가. 진언을 할 때에는 자신이 바로 이순간 이몸으로 불보살님의 그 마음을 이루는 것임을 명심하고 진언을 염송하거나 일상생활에서도 그 마음을 여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제7장 기도수행
1.기도의 의미와 기능
1)기도의 의미
기도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도록 기원하는 것이다. 보통, 자신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떤 위대한 힘에 의지하여 이루고자 하는 행위를 말한다. 따라서 이러한 기원행위는 원시종교 탄생의 원동력이 되었다. 즉, 자연의 막강한 위력 앞에 나약하기 짝이 없는 존재인 인간으로써는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또한 그런 자연의 흐름에 순응하며 살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서 다양한 원시종교들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기도는 가장 원초적인 신앙형태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차츰 인류의 문명이 진화하면서 종교에서는 이러한 신앙의 대상에 대해 보다 합리적이고 이론적인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동양의 몇몇 종교는 이러한 원시신앙에서 출발한 신 중심의 종교관에서 벗어나 인류가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 이상실현을 목표로 한다. 불교, 유교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래서 서구 종교인들은 불교나 유교를 종교가 아닌 철학으로 구분지으려 애쓰기도 한다.
그러나 불교는 철학이 아니라 종교다. 왜냐하면 불교는 중생구제를 위한 구체적인 삶의 철학이고 방법론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교적인 면이 가장 살아있는 현장이 기도이다. 기도는 한계상황에 닥친 인간의 마지막 희망인 까닭에 불교의 자비 구세 정신은 이러한 인간들의 기원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들의 바람을 들어 줄 많은 불보살님들이 탄생한 것이다. 그들은 서원하기를 인간이 겪는 모든 고난에서 사람들을 건져낼 것이며 이 세상 사람들이 바랄 수 있는 최고의 세계를 완성하겠다 했고, 그 서원을 이루었다. 이렇게 성취되고 갖추어진 우리의 희망은 불보살님의 본원력이라는 이름으로 그 화려한 꽃을 피운 것이다. 이제 모든 것은 이루어졌고 갖추어졌다.
그러나 어디에 갖추어져 있는가. 앞에서 염불을 설명하면서 누차 강조했듯이 그것은 외부에 고정된 실체로써 존재하지 않다. 그것은 우리 생명의 바탕이자 우주의 근원인 그 자체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리가 숨쉬고 물 마시듯이 이미 그 해택 속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다. 나는 파도라면 그것은 바다이다. 지구 밖에서 지구를 보면 '나'라는 존재를 찾을 수 있겠는가. 단지 지구라는 커다란 공같은 것 속에 하나가 되어 버린 것을...... 이와 같이 우리는 각기 일어났다 사라지는 파도이니 파도가 바다를 떠날 수 없는 것과 같이 우리 자신은 근원과 둘이 아니다. 불보살님의 위신력은 나와 둘이 아니니, 단지 그것을 자각 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어리석고 의심이 많은 중생들이 이것을 믿지 못하고 고통 속에 해메이니 이러한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수행이다.
그래서 앞에서 말한 모든 수행법들은 궁극적으로 나의 본질과 우주의 원리를 깨닫고 잘못된 모든 속박과 굴레로부터 벗어나게 해준다. 그러나 이러한 어리석음은 무수한 겁 동안에 쌓여진 업장으로 굳게 뭉쳐있어 좀처럼 벗기가 어렵다. 더욱이 깨달음이란 '언제까지하면 된다'는 기약이 없기 때문에 수행의 길은 더욱 힘겹게 여겨진다. 어떤 사람은 경전의 사구게 한마디를 듣고 깨닫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평생을 해도 한발짝도 나가지 못한 경우도 있다. 바로 이런 사람에게 기도가 필요한 것이다. 내 혼자만의 힘으로는 언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지 도무지 불가능해 보인다. 그럴 때 먼저 깨달음을 얻으시고 중생구제를 위해 애쓰시는 많은 불보살님들을 생각해 보라. 그들도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태어나 무수한 세월동안 보살행을 닦은 연후에 깨달음을 얻지 않았던가. 내가 그들과 무엇이 다른가. 다만 노력하지 않았을 뿐이니 그분들을 생각하며 나도 또한 더욱 열심히 정진해야지 하고 다짐하는 것이 다. 불교에서의 기도란 바로 이런 것이며 따라서 이러한 기도는 궁극적으로 성불의 바탕이 되므로 수행법이다. 기도가 수행인가에 대한 논란이 있을 수 있으나 이런 의미에서 나는 초보자에게 꼭 필요한 수행법이라 강조한다. 따라서 수행으로서 기도란 외부의 대상에게 무엇을 이루어달라고 비는 것이 아니고, 내가 무엇을 이루겠다는 원을 세우고 그 원을 성취해가기 위한 힘을 얻기 위해 자기다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도의 의미가 이렇다고 하더라도 당장 위급한 상황에 처해있는 사람에게 원칙만 주장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기도의 원리를 이해하고 자신의 힘으로 그 길을 떠날 힘도 여유도 없다. 그들을 위해 기도라고 하는 방편은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른다. 불자라면 경전은 진실된 말씀이라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그 경전에 불보살님들의 서원이 나와있고 또 성취되었으며 그 공덕으로 모든 고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되어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데 어찌 이 말을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겠다는 간절한 염원과 불보살님의 위신력에 대한 믿음이 고통으로부터 벗아날 수 있다는 희망과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이러한 강력한 믿음과 희망의 힘에 의해 실제로 고통으로부터 구원받는다. 먼저, 믿는 동시에 안심을 찾게 되고, 희망을 갖는 동시에 삶은 이미 이전과 달라진다. 기도에 열중하다보면 일체의 번뇌가 사라지고 산만하고 불안하던 마음이 안정을 찾게 된다. 이렇게 기도를 해나가다 보면 정신이 맑고 고요해지면서 시간과 공간도 사라지고 나 조차도 없어져 버리는 삼매체험을 하게 된다. 이 때 대개 불보살님이 나타나시어 이마를 만져주시거나 미소짓는 모습을 보이신다. 또는 꿈에 현몽하시는 등의 징표가 있게 되는데 이로써 기도는 성취된다.
2)기도의 기능
기도의 기능은 근심.걱정 등 번뇌를 제거하고 몸과 마음을 맑고 밝게 하며, 두려움 없이 장애를 극복케하고, 당당함과 자신감으로 살아가게 한다. 기도의 공덕은 이루 다 말로 할 수 없겠지만 크게 세가지로 이야기 하면, 첫 번째는 바라는 바를 성취하는 것으로 이것이 기도의 가장 대표적인 기능이다. 두 번째는 업장소멸이다. 세 번째는 자기 다짐을 강화하고 스스로를 점검하는 것이다.
①소원성취
살다보면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극한 상황과 맞닥드릴 수 있다.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크고 작은 소망들이 있다. 이것들을 이루고자 기원하는 것이 기도이고 또한 기도를 통해 바라는 바를 성취할 수 있다.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기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다. 원래 누구나 다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바른 목적과 방법으로 기도를 하면 이루지 못할 바가 없다. 그 원리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다루기로 하겠다.
②업장소멸
기도가 성취되는 과정에는 필수적으로 나를 잊고 오로지 기도하는 행위에 전념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묵은 때가 씻겨 나가 신심이 청정해진다. 이것이 바로 업장소멸이다. 우리의 몸과 마음에 무수한 과거로부터 찰라전의 순간까지 쌓여온 온갖 묵은 때가 잠깐동안의 삼매 속에서 한꺼번에 녹아지는 것이다. 어떻게 산더미처럼 쌓인 죄가 한꺼번에 녹아 없어질 수 있는가. 그것은 진실한 참회가 있으면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천수경에서는 "백겁동안 쌓은 죄가 한생각에 문득 사라지는 것이 마른풀이 한꺼번에 타는 것과 같다"고 했다. 기도를 하는 중에 문득 그 동안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면서 상처받은 마음, 원한 뱆힌 마음들이 눈 녹듯이 녹아진다. 그러면서 저절로 참회가 되고, 사랑과 용서의 마음이 솟아오르며 모든 인연에 감사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이러한 정화의 과정을 통해 업장이 사라진다. 또는 직접 이런 현상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꾸준히 하는 사람은 몸과 마음의 변화를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기도뿐만아니라 모든 삼매가 갖고 있는 기능인데, 삼매는 번뇌업장을 녹이고 지혜를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다.
③자기점검
기도는 특별히 위급한 상황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고 수행자가 일상적으로 자기를 점검하고 반성하며 거듭 확인하는 과정이다. 이것이 사찰에서 실시하는 조석예불이다. 기도가 수행인가에 대한 논란이 있을 수 있는데 업장소멸과 자기정화라는 측면에서 수행이며, 또한 기도를 통해 자기를 점검하게 되므로 수행법이다. 매일의 기도는 자신을 점검하고 의지를 강화하여 하면된다는 신념과 용기를 준다. 수행에 있어 점검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귿이 강조하지않아도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따라서 자기점검으로써의 기도를 일상화하여 매일 거르지 않고 해야 한다. 아침에는 하루 생활할 원칙을 발원하고 밤에는 그것을 잘 지켰는지 반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세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는 기도수행을 지속적으로 하다보면 점점 몸과 마음이 맑고 밝아지며 이러한 맑고 밝음이 곧 깨달음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2.기도의 원리
1)자력과 타력은 둘이 아니다
모든 불보살님들은 본원과 별원에 의해 수행하여 그것을 성취하였기 때문에 무량한 공덕을 갖추고 있다. 이것을 확신하는 수행이 기도이므로 불보살과 감응하여 가피를 얻는 것이다. 이러한 타력신앙의 관점은 불교의 기본적인 입장이 자력수행이다 보니 교리적으로 모순되는 것 아닌가 하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타력이란 자력과 상관없는 별개의 타력이 아닌 자력이면서 타력이고 타력이면서 자력이다. 왜냐하면 불보살님의 위신력에 감응하여 가피를 얻기 위해서는 기도하는 자가 일심이 되어야 하는데 이 일심 속에서는 자력과 타력이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점을 잘 명심한다면 기도수행을 하는데 맹신이라는 장애와 의심이라고 하는 장애를 없앨 수 있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아난과 위제희 부인에게 말씀하셨다.
"이미 연화대를 관조하였으면 다음에는 부처님을 생각하여라. 어째 그런가하면 모든 부처님은 바로 온 세계인 법계를 몸으로 하는 것이니, 일체 중생의 마음속에 들어 계시느니라. 그러므로 그대들의 마음에 부처님을 생각하면 그 마음이 바로 부처님의 32상과 80隨形好인 것이니라. 그래서 이 마음으로 부처를 이루고 또한 이 마음이 바로 부처니라. 모든 부처님의 위없는 바른 지혜는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니, 마땅히 일심으로 생각을 골똘히 하여 저 아미타불과 그 지혜 공덕인 여래, 응공, 정변지를 깊이 관조해야 하느니라." <관무량수경>
불보살의 위신력이 분명히 있어 기도 중에 가피를 받게 되지만 그것은 외부에서 온 것이 아니고 바로 자기 마음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관무량수경>에서도 말씀하셨듯이 부처님은 중생의 마음 속에 계시며 그 마음으로 부처를 이룸을 명심해야 마구니에게 홀리지 않고 부처의 참모습을 볼 수 있다. 앞의 염불수행에서 유심정토와 타방정토가 둘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자력과 타력은 둘이 아닌 것이다.
2)기도성취의 원리
왜 자력과 타력은 둘이 아닌지, 기도성취의 원리를 보면 더욱 확실하게 알 수 있다. 기도의 첫 번째 기능은 소원성취라고 했다. 그런데 그 기도의 대상은 관세음보살일 수도 있고, 지장보살일 수도 있고, 하나님일 수도 있고, 바위일 수도 있다. 또 같은 대상을 두고 기도를 해도 어떤 사람은 이루어지고 어떤 사람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또 어떤 원리가 있길래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 현실로 이루어 지는가.
불교에서는 불보살님의 위신력이라고 하고,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권능이라고 하며 무속에서는 무당의 힘 또는 그 무당이 받드는 신의 힘 또는 바위가 신령해서 라고 한다. 과연 그런 힘이 거기에 있다면 왜 모든 사람이 똑같은 결과를 갖지 않는가. 믿음이 부족해서, 정성이 부족해서라고 말한다. 여기서 왜 믿음이라든가 정성이라고 하는 것이 중요한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문제는 간단히 풀린다. 아무리 타력이라고 해도 실은 자력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물론 무속에서 일부 신통력이나 어떤 부분적인 능력에 의해 외부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경우가 아주 없진 않지만 기도라고 할 때는 기원하는 주체가 어떤 목적과 방법으로 했느냐하는 것이 관건이지 기도의 대상은 방편일 뿐이라는 것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것을 방편이라고 하지 않고 외부의 어떤 절대적인 존재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맹신이고 이것을 조장하는 것이 사이비이다. 만일 외부에 절대적 존재가 있다면 그리하여 그가 기독교의 하나님이라면 왜 사랑의 하나님이 무조건적으로 모든 사람을 다 구원하지 않고 오직 예수를 믿는 자만, 예수를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는가. 또한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은 자비의 화신인데 왜 먼저 와서 구해주지 않고 중생이 그 이름을 불러 주기를 기다리는 것인가. 또한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은 한 모습이 아니고 상인으로도 승려로도 여자로도 남자로도 아이로도 노인으로도 나타난다 했는데 그럼 이때 도움을 준 그 사람은 관세음보살인가 지장보살인가.
불교에서는 일체유심조라고 한다. 그러므로 마음에서 한치의 의심이나 간격도 없이 온전히 부처를 이루고 관세음보살을 이룰 때 기도도 성취되는 것이다. 간절히 원하라 그러면 이루어질 것이다.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네 이름을 부르면 곧 삼재팔란을 면할 것이다. 이 모두가 "네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중생의 마음이란 변덕이 심하고 믿을만한 것이 못된다. 따라서 마음에 의지한다는 것은 습관적으로 해오던 분별하고 의심하던 알음알이를 내려놓고 본심에 의지한다는 말이다. 이 때 올바른 방편이 필요한 것이다. 중생심에 익숙해져 있던 터라 쉽게 근본으로 돌아가지지 않는다. 따라서 부사의한 공덕을 갖춘 불보살님의 명호를 부르거나 진언을 염송하는 것이다. 이때 바른 방편은 본심을 여의지 않으므로 바른 길로 인도한다. 본심을 한마음이라고도 하고 자성이라고도 하고 주인공이라고도 한다. 마음이라고는 하나 나와 너, 안과 밖이 없는 거기에 의지하면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다. 이것이 바로 기도의 원리이다.
3.기도의 대상
모든 불보살님이 본원과 별원에 의해 수행을 하고 위신력을 얻었으므로 이분들의 위신력에 의지하는 기도가 가능하다. 경전에 나오는 불보살님 명호만도 무수한 수에 이른다. 그중에서도 우리나라에서는 관음신앙과 지장신앙이 가장 대중적으로 행해지고 있으므로 먼저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이 어떤 분인지 알아보자. 왜냐하면 기도를 할 때에는 먼저 기도의 대상을 정하고 대상이 되는 불보살님의 위신력이 어떠한지 구체적으로 안 뒤에 거기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하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1)관세음보살
①관세음보살의 위신력
그 때 무진의(無盡意) 보살이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 어깨를 벗어 드러내고 부처님을 향하여 합장하고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관세음보살은 무슨 인연으로 관세음이라 하나이까."
부처님께서 무진의 보살에게 말씀하시었다.
"선남자야, 만일 한량 없는 백천만억 중생이 여러가지 고뇌를 받을 때에 이 관세음 보살의 이름을 듣고 일심으로 그 이름을 부르면 관세음보살이 곧 그 음성을 듣고 모두 해탈케 하느니라. 만일 어떤 이가 이 관세음 보살의 이름을 받들면, 그는 혹시 큰 불속에 들어가더라도 불이 그를 태우지 못할 것이니, 이것은 관세음 보살의 위신력 때문이며, 혹은 큰 물에 떠내려 가게 되더라도 그 이름을 부르면 곧 얕은 곳에 이르게 되며, 혹은 백천만억 중생이 금 . 은 . 유리 . 자거 . 마노 . 산호 . 호박 . 진주 같은 보배를 구하려고 큰 바다에 들어갔을 때, 가령 폭풍이 일어 그들의 배가 나찰귀들의 나라에 포착되었을지라도 그 가운데 만일 한 사람이 관세음 보살의 이름을 부르면, 여러 사람들이 다 나찰의 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리니, 이러한 인연으로 관세음이라 이름하느니라. 또 어떤 사람이 만일 해를 당하게 되었을지라도 관세음 보살의 이름을 부르면, 그들이 가진 칼이나 막대기가 곧 조각조각 부러져 능히 벗어날 수 있으며, 혹은 삼천대천 국토에 가득한 야차 . 나찰들이 와서 사람들을 괴롭히려 하더라도, 관세음 보살의 이름만 부르면 여러 아귀가 악한 눈으로 보지도 못하겠거늘, 하물며 어찌 해칠 수 있겠느냐. 또 어떤 사람이 죄가 있거나 죄가 없거나 고랑이 손발에 채워지고 몸이 묶였을지라도, 관세음 보살의 이름만 부르면 이것들이 다 끊어지고 풀어져 곧 벗어나리라. 만일 또 삼천대천 국토에 원적(怨賊)이 가득찬 곳을 한 상인의 우두머리가 여러 상인을 이끌고 귀중한 보물을 가진채 험한 길을 지나갈 때, 그 중에 한 사람이 말하기를 '여러 선남자들이여, 무서워 말고 두려워 말라. 그대들은 진심으로 관세음 보살의 이름을 부를지니라. 이 보살이 능히 중생들의 두려움을 없애 주리니, 그대들이 이 이름을 부르면 이 원적들을 무사히 벗어나리라'하고, 이에 여러 상인들이 이 말을 듣고 모두 소리를 내어 '나무 관세음 보살 '하면 곧 그 난을 벗어나리라.
무진의야, 관세음 보살마하살의 위신력이 이와 같이 훌륭하니라. 또 만일 중생이 음욕이 많더라도 관세음 보살을 항상 행각하고 공경하면 곧 음욕을 여의게 되며, 혹은 성내는 마음이 많더라도 관세음 보살을 생각하고 공경하면 곧 그 마음을 여일 수 있으며, 혹은 어리석음이 많더라도 관세음 보살을 항상 생각하고 공경하면 곧 그 어리석음을 여일 것이니라.
무진의야, 관세음 보살이 이런 위신력으로 이롭게 함이 많으니 중생은 마땅히 마음으로 항상 생각할 것이니라. 또 만일 어떤 여인이 아들 낳기를 원하여 관세음보살을 예배하고 공경하면 곧 복덕과 지혜가 있는 아들을 낳게 되고, 만일 딸 낳기를 원한다면 곧 단정하고 아름다운 모양을 갖춘 딸을 낳게 되리니, 덕의 근본을 잘 심었으므로 여러 사람의 사랑과 존경을 받으리라. 만일 또 중생이 관세음 보살을 공경하고 예배하면 복이 헛되이 버려지지 않으리니, 그러므로 중생이 모두 관세음 보살의 이름을 받들어야 하느니라."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
②관음신앙
관세음보살의 위와 같은 광대한 위신력에 의지한 것이 관음신앙이다. 어원은 Avalokitesvara로 '세간을 관하여 보는 신' 또는 '세상의 소리를 관하는 자'의 뜻으로 관세음, 관자재, 광세음, 관세음자재, 광세음대세지대사, 관음대사 등으로 불린다. 즉, 세상의 고통받는 중생들의 소리를 관한고 여기에 응답하는 구제자를 말한다. 특히 관세음보살은 여러 가지 다른 이름이 많은데 대표적인 것이 천수천안이다. 천개의 손과 천개의 얼굴로 중생의 고통을 보고 즉시 구원한다는 구제자의 면모를 잘 나타낸다.
관음신앙의 기원은 서력기원 전의 일로 추정되며 1세기경에 성립된 <화엄경> 입법계품에서 53선지식 중 하나로 등장한다. 이와 더불어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 <능엄경> 등에서 관음신앙의 초기형태를 알 수 있고, 1세기 경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진 관음보살상이 인도 간다라 지방에서 발견되기도 하였다. 중국에서 이들 경전이 번역되면서 관음신앙이 민간에 전래되었고, 천태교학의 전개와 더불어 더욱 확산되었다. 이러한 영향에 따라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부터 관음신앙이 유포되었다. 특히 강원도 낙산사를 비롯하여 전국 도처에 이름난 관음기도도량이 있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독송되고 있는 천수경이 바로 관음신앙을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미루어 보아 일반 불자들에게 가장 친숙한 분이 아니까 생각한다. 이런 이유로 현재 기도의 대상으로 가장 먼저 손꼽히는 분이 바로 관세음 보살이다.
2)지장보살
①지장보살의 위신력
어떤 곳이든 그가 있는 곳에서 혹 여러 유정들이 가지가지 욕구와 근심과 고통이 절박하더라도 지극한 마음으로 지장보살마하살의 명호를 부르고 생각하며 귀의하고 공경하고 공양한다면, 법다이 구하는 바 모든 것을 얻어 모든 근심과 고통에서 벗어나며, 보살은 그에 마땅한 바에 따라 그들을 천상에 나게 하거나 열반으로 이르는 길에 데려다 주느니라.
또 어떤 곳이든 그가 있는 곳에서 만약 여러 유정들이 굶주림이 핍박하더라도 지극한 마음으로 지장보살마하살의 명호를 부르고 생각하고 외우며, 귀의하고 공경하고 공양한다면, 일체에 법다이 구하는 바 음식이 충족하게 되며, 보살은 그에 마땅함을 따라 그들을 천상에 나게 하거나 열반으로 이르는 길에 데려다 주느니라.
또 어떤 곳이든 그가 있는 곳에서, 만약 모든 유정들이 가지가지 의복과 보배장식과 의약과 침상과 방석과 그밖에 생활에 필요한 자구가 모자라더라도, 지극한 마음으로 지장보살마하살의 명호를 부르고 생각하며 귀의하고 공경하며 공양하면 법다이 구하는 바 의복 . 보배장식 . 의약 . 침상 . 방석과 그밖에 온갖 생활 도구를 다 갖추게 되며, 보살은 그에 마땅한 바를 따라 그들을 천상에 나게 하거나 열반으로 이르는 길에 데려다 주느니라.
또 어떤 곳이든 그가 있는 곳에서, 만약 여러 유정들이 사랑하는 이와 이별하고 미워하는 이와 만나게 되더라도 능히 지극한 마음으로 지장보살마하살의 명호를 부르고 생각하고 외우며 귀의하고 공양하면, 그들은 모두 사랑하는 이와 만나게 되고 미워하는 이와 헤어지게 되며, 보살은 그에 마땅한 바에 따라 그들을 천상에 나게 하거나 열반으로 이르는 길에 데려다 주느니라.
또 어떤 곳이든 그가 있는 곳에서 만약 여러 유정들이 몸과 마음에 근심과 고통이 있고 또한 온갖 병고에 시달릴 때 능히 지극한 마음으로 지장보살마하살의 명호를 부르고 생각하며 외우고 귀의하며 공경하고 공양하면 모두가 신심이 안락하고 온갖 병이 없어지며, 보살은 그에 마땅한 바에 따라 그들을 천상에 나게 하거나 열반으로 이르는 길에 데려다 주느니라.
또 어느 곳이든 그가 있는 곳에서 만약 여러 유정들이 뜻이 서로 맞지 않아 여러가지로 다투게 되더라도, 능히 지극한 마음으로 지장보살마하살의 명호를 부르고 생각하며 외우고, 귀의하며 공경하고 공양하면 모두 해독심을 버리고 서로 화목하여 기쁜 마음으로 참아 견디며, 날이 갈수록 부끄러워하고 뉘우쳐 사랑하는 마음으로 서로 향하게 되며, 보살은 그에 마땅한 바에 따라 그들을 천상에 나게 하거나 열반에 이르는 길에 데려다 주느니라.
또 어떤 곳이든 그가 있는 곳에서 만약 여러 유정들이 감옥에 갇혀 있게 되고 칼을 쓰고 사슬에 묶이어 온갖 고통을 받더라도, 능히 지극한 마음으로 지장보살마하살의 명호를 부르고 생각하며 외우고 귀의하며 공경하고 공양하면, 모두 감옥에서 칼을 쓰고 쇠사슬의 묶임에서 해탈하여 자재하고 환희하게 되며, 보살은 그에 마땅한 바에 따라 그들을 천상에 나게 하거나 열반으로 이르는 길에 데려다 주느니라.
또 어떤 곳이든 그가 있는 곳에서, 만약 여러 유정들이 감옥에 갇히어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마침내 해침을 당하게 되었더라도, 능히 지극한 마음으로 지장보살마하살의 명호를 부르고 생각하며 외우고 귀의하며 공경하고 공양하면, 모든 감옥과 고문과 해침을 당하는 것을 면하게 되며 보살은 그에 마땅한 바에 따라 그들을 천상에 나게 하거나 열반으로 이르는 길에 데려다 주느니라.
또 어떤 곳이든 그가 있는 곳에서, 만약 여러 유정들이 심신이 피로하고 기력이 쇠약하여졌더라도 능히 지극한 마음으로 지장보살마하살의 명호를 부르고 생각하며 외우고 귀의하며, 공경하고 공양하면, 그들은 다 심신이 유쾌하고 기력이 강성하게 되며, 보살은 그에 마땅한 바에 따라 그들을 천상에 나게 하거나 열반으로 이르는 길에 데려다 주느니라.
또 어떤 곳이든 그가 있는 곳에서, 만약 모든 유정들이 육근이 갖추어지지 않고 혹은 손상을 입었을 때, 능히 지극한 마음으로 지장보살마하살의 명호를 부르고 생각하며 외우고 귀의하며 공경하고 공양하면, 그들은 모두 육근이 완전해져 손상됨이 없게 되며, 보살은 그에 마땅한 바를 따라 그들을 천상에 나게 하거나 열반으로 이르는 길에 데려다 주느니라.
또 어떤 곳이든 그가 있는 곳에서 어떤 유정들이 미쳤거나 마음이 어지럽거나 귀신에 집혔더라도 능히 지극한 마음으로 지장보살마하살의 명호를 부르고 생각하며 외우고 귀의하며 공경하고 공양하면, 저들은 모두 마음에 미치거나 어지러움이 없고 온갖 괴로움을 여의며, 보살은 그에 마땅한 바를 따라 그들을 천상에 나게 하거나 열반에 이르는 길에 데려다 주느니라.
또 어떤 곳이든 그가 있는 곳에서 만약 어떤 유정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과 분한 마음과 원한과 간탐과 질투와 교만과 나쁜 소견과 수면과 방일과 의심 등이 치성하여, 그의 심신이 어지럽고 괴로워 항상 안락하지 않더라도 능히 지극한 마음으로 지장보살마하살의 명호를 부르고 생각하며 외우고 귀의하며 공경하고 공양하면, 이들 모두가 탐욕 등 여러가지 나쁜 것들을 모두 여의어 심신이 안락하게 되며, 보살은 그에 마땅한 바를 따라 그들을 천상에 나게 하거나 열반으로 이르는 길에 데려다 주느니라.
또 어떤 곳이든 그가 있는 곳에서 만약 어떤 유정이 불에 타게 되거나 물에 빠지게 되거나 바람에 불리고 혹은 산이나 바위나 벼랑이나 언덕이나 나무나 집에서 굴러 떨어져 정신 차릴 수 없게 되더라도, 능히 지극한 마음으로 지장보살마하살의 명호를 부르고 생각하며 외우고 귀의하며 공경하고 공양하면 이들 모든 위험과 어려움을 여의게 되고 안온하여 손해를 입지 않으며, 보살은 그에 마땅한 바를 따라 그들을 천상에 나게 하거나 열반으로 이르는 길에 데려다 주느니라.
또 어떤 곳이든 그가 있는 곳에서, 만약 어떤 유정들이 여러 독사나 독충에게 물리고 혹은 가지가지 독약에 중독되었더라도, 능히 지극한 마음으로 지장보살마하살의 명호를 부르며 생각하고 외우며 귀의하고 공경하며 공양하면 이들 모든 괴로움과 해로움을 여의게 되며, 보살은 그에 마땅한 바를 따라 그들을 천산에 나게 하거나 열반으로 이르는 길에 데려다 주느니라.
또 어떤 곳이든 그가 있는 곳에서 만약 어떤 유정이 악한 귀신에 집혀 학질을 앓되, 혹은 날마다 앓고 혹은 하루 걸러 앓으며 혹은 3, 4일에 한 번 앓고 혹은 미치광이가 되어 심신이 떨며 정신을 잃어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게 되었더라도 만약 능히 지극한 마음으로 지장보살마하살의 명호를 부르고 생각하며 외우고 귀의하며 공경하고 공양하면, 이 모든 병에서 벗어나 두려움이 없고 심신이 편안해지며, 보살은 그에 마땅한 바를 따라 그들을 천상에 나게 하거나 열반으로 이르는 길에 데려다 주느니라.
또 어떤 곳이든 그가 있는 곳에서, 만일 어떤 유정이 저 여러 야차 . 나찰 . 아귀 . 필사차귀 . 포달나귀 . 구반다귀 . 갈타달포나귀 . 흡정기귀와 호랑이 . 늑대 . 사자 등 사나운 짐승과 버러지의 독과 해치고자 하는 기도와 온갖 나쁜 주술과 원수와 전쟁과 그 밖의 온갖 두려운 일에 둘러싸여 그 마음이 당황하고 목숨을 잃을까 겁에 질리며, 죽는 것을 싫어하고 살기를 탐하며 괴로움을 싫어하고 줄거움을 구할 때, 만약 능히 지극한 마음으로 지장보살마하살의 명호를 부르며 생각하고 외우며 귀의하고 공경하며 공양하면 이들 모든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되어 목숨을 보존하며, 보살은 그에 마땅한 바를 따라서 그들을 천상에 나게 하거나 열반으로 이르는 길에 데려다 주느니라.
또 어떤 곳이든 그가 있는 곳에서 만약 모든 유정들이 혹은 총명하게 되고자 하고, 혹은 깨끗한 계율을 갖고자 하고, 혹은 선정을 이루고자 하고, 혹은 신통을 얻고자 하고, 혹은 반야 . 혹은 해탈 . 혹은 묘한 형상 . 혹은 묘한 소리 . 혹은 묘한 향 . 혹은 묘한 맛 . 혹은 묘한 촉감을 위하고, 혹은 이익 . 혹은 명예 . 혹은 공덕 . 혹은 기술을 위하고, 혹은 꽃과 과일 . 혹은 나무와 숲 . 혹은 평상 . 혹은 방석 등을 위하고, 혹은 도로 . 혹은 재물과 곡식 . 혹은 의약 . 혹은 집 . 혹은 하인 . 혹은 채색 . 혹은 단비 . 혹은 물 . 혹은 농사를 위하고, 혹은 부채 . 혹은 시원한 바람을 위하고, 혹은 불 . 혹은 수레 . 혹은 아들 . 딸을 구하고, 혹은 방편을 구하고, 혹은 복을 닦기를 구하며, 혹은 따뜻함 . 혹은 시원함 . 혹은 기억 . 혹은 가지가지 세간이나 출세간의 온갖 이롭고 즐거운 일들을 위하여 이들을 쫓고 구할 때 생겨지는 여러가지 근심과 고통이 절박하더라도 만약 능히 지극한 마음으로 지장보살마하살의 명호를 부르고 생각하며 외우고 귀의하며 공경하고 공양하면, 이 선남자의 공덕과 묘한 定의 위신력 때문에 모든 근심과 고통을 여의고 소원을 만족하게 이루며, 보살은 그에 마땅한 바를 따라 저들을 천상에 나게 하거나 열반으로 이르는 길에 데려다 주느니라.
<대승대집지장십륜경 서품>
②지장신앙
이렇듯 지장보살의 위신력이 크므로 거기에 의지하는 지장신앙 또한 매우 널리 퍼져 있다. 지장경을 보면 지장보살은 광목여인 때에 지옥고를 당하는 어며니를 위해 서원을 세우기를 "모든 세계에 있는 지옥과 삼악도에서 고통받는 모든 중생들을 구원하여 지옥.아귀.축생 등을 악취에서 영원히 벗어나게 하고 이런 우리들을 모두 다 성불케 한 후에야 제가 정각을 이루겠나이다." 하였다. 지옥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지장보살의 서원에 따라 지장보살은 망자를 위한 구제자로 널리 신앙되고 있다. 따라서 49제 등 망자를 위한 재공양 때에는 아미타불과 지장보살이 기능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지장보살 신앙에 의해 예수제나 우란분절과 같은 신앙형태도 등장했다. 지장은 산스끄리트어로 Ksiti-garbha이다. 이 말은 대지의 모태라는 뜻이다. 즉 지장은 인간의 활동 공간인 대지의 온 중생을 구제하려는 것이다.
지장사상은 <대방광십륜경>, <대승대집지장십륜경>, <지장보살본원경> 등에서 나타난다. 지장보살은 석가모니불이 입멸하신 뒤에 미래에 미륵불이 출현하실 때까지의 부처님이 안계신 시대의 오탁악세에서 번뇌와 죄업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제도하여 해탈케하는 일을 부촉받은 보살이다. 그래서 육도윤회하는 중생, 특히 가장 혹심한 고통을 받는 지옥중생까지도 남김없이 모두 제도하려는 원력을 언제나 어디서나 행하고 계신다.
지장신앙은 중국에서 도교와 융합하여 명부시왕신앙과 습합한 형태로 민간신앙으로 뿌리를 내렸다. 그래서 사찰 안에서는 말한 나위도 없고 때로는 사찰을 떠나 독자적인 신앙형태를 띠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신라 김교각스님은 중국에서 등신불이 되어 살아있는 지장보살로 신앙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대부분의 사찰에서 지장전이나 명부전에 주존으로 지장보살이 모셔져 있다.
특히 다른 보살들은 다음 생에 성불을 하는 일생보처에 계신 분들이지만 지장보살만은 유독 모든 중생이 다 해탈하기 전에는 성불하지 않겠다는 서원을 세워 대원(大願)보살이라 한다. 그래서인지 다른 보살들은 보배영락을 드리운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지장보살만은 삭발한 수행자의 소박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래서 그 분에 대한 가슴 저린 신심이 우러나오는 것일까. 요즘처럼 혼탁한 세상에서는 말세에 부처님 안계시는 동안 중생구제를 맡으신 지장보살을 더욱 찾게되는 것일까. 근래들어 지장신앙이 다시금 확산되고 있는 것 같다.
3)기타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 다음으로 많이 기도의 대상이 되는 분이 약사여래이다. 약사여래는 인간의 병고를 치유하는 분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기원은 <약사유리광여래본원경>에 있다. 이 경은 <약사유리광칠불본원공덕경>의 칠불 중 일곱 번쩨인 약사유리광여래에 관한 경이다. 이 경에서 보면 약사여래는 중생구제를 위한 12가지 큰 서원을 발하고 성취하였다.
1. 내가 내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을 때, 나의 광명이 치연하여 무량하고 무수하고 무변한 세계를 남김없이 비추고 32대장부의 상과 80수호로서 그 몸을 장엄하며, 일체 유정이 나와 다름이 없도록 할 것을 원한다.
2. 내가 내세에 보리를 얻었을 때, 몸은 유리와 같아 안팎이 명철하고 깨끗하여 하자와 티끌이 없고 높아 몸이 안주하고 염망으로 장엄하기가 해와 달을 능가하여 유명의 중생은 모두 이 빛을 받아 뜻하는 바를 따라 모든 사업을 성취할 것을 원한다.
3. 내가 내세에 보리를 얻었을 때, 무량하고 무변한 지혜의 방편으로 모든 유정으로 하여금 모두가 다함없는 수용할 물건을 얻게 하고, 중생으로 하여금 소유가 빈약하지 않도록 할 것을 원한다.
4. 내가 내세에 보리를 얻었을 때, 만약 여러 유정이 사뙨 길을 행하면 그 모두를 보리의 길에 안주하게 할 것이며, 만악 성문과 독각승을 행하는 이가 있으면 그 모두를 대승에 안주하도록 할 것을 원한다.
5. 내가 내세에 보리를 얻었을 때, 만약 무량하고 무변한 유정이 나의 법 안에서 범행을 수행하지 않으면 그 모두에게 불결계를 얻게 하고 삼취계를 갖출 수 있게 할 것이며, 설사 깨뜨리고 범하는 일이 있어도 나의 이름을 들으면 도리어 청정함을 얻어 악취에 떨어지지 않을 것을 원한다.
6. 내가 내세에 보리를 얻었을 때, 만약 여러 유정의 몸이 하열하여 온갖 기관이 불구이거나 추악하고 천하며 완고하고 어리석거나 앉은뱅이이고 꼽추이거나, 온 몸이 곪고 미치광이이거나 하는 온갖 병고가 없을 것을 원한다
7. 내가 내세에 보리를 얻었을 때, 만약 여러 유정이 온갖 병으로 절박하여 구할 길이 없고, 의사가 없고, 약이 없고, 어버이가 없고, 집이 없고, 빈궁하고 괴로룸이 많으나 나의 명호를 한 번만이라도 귀로 들으면 그 모든 것이 없어지고 몸과 마음이 안락하고 집과 권속과 재물이 모두 충족하고 나아가서는 무상의 보리를 증득할 것을 원한다.
8. 내가 내세에 보리를 얻었을 때, 만약 여인이 있어 여자의 온갖 나쁜 것 때문에 쫒기고 괴로워하여 극히 싫어하는 마음이 나서 여자의 몸을 버리고자 원하면 나의 이름을 듣기만 하여도 일체의 여자를 변하여 남자가 되게 하고 장부의 상을 갖출 수 있고 나아가서는 무상의 보리를 증득할 것을 원한다.
9. 내가 내세에 보리를 얻었을 때, 여러 유정으로 하여금 마의 견방을 벗어나 모든 외도의 결박을 해탈시키고, 만약 온갖 악견의 수풀에 떨어지면 그 모두를 이끌어 거두어서 정견에 있게 하고 얼마동안 여러 보살행을 닦게하여 빨리 무상의 정등보리를 증득하게 할 것을 원한다.
10.내가 내세에 보리를 얻었을 때, 만약 여러 유정이 왕의 법을 어겨 묶이고 매를 맞고 옥에 갇치고, 혹은 사형을 당하게 되고, 기타 무량한 재난으로 능욕을 받아 슬픔과 근심으로 애타게하여 몸과 마음에 괴로움을 받음에, 만약 나의 이름을 들으면 나의 복덕과 위신력으로 그 모든 근심과 괴로움을 벗어나게 할 것을 원한다.
11.내가 내세에 보리를 얻었을 때, 만약 여러 유정이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괴롭힘을 받아 밥을 구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악업을 짓는다해도 나의 이름을 들을 수 있어 오롯한 마음으로 수지하면, 나는 마땅히 먼저 상묘한 음식으로 그 몸을 배부르게 하고 뒤에 법의 맛으로 필경에는 안락하게 하기를 원한다.
12.내가 내세에 보리를 얻었을 때, 만약 여러 유정이 가난하여 옷이 없고 파리와 모기에게 물리고, 추위와 더위로 밤낮 괴로움을 당함에 만약 나의 이름을 듣고 오롯한 마음으로 수지하며 그 바라는 것, 즉 훌륭한 옷을 얻을 수 있고, 또 모든 보배로 장엄한 화만(華만)과 도향(塗香)과 고악(鼓樂)과 온갖 노리개를 얻을 수 있고 마음의 뜻하는 바를 따라 모두가 만족하기를 바란다.
12원 중에서 6,7번째 원에 따라 병고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들이 약사여래를 찾게 되었다. 약사여래 외에도 법신 보신 화신의 비로자나불, 아미타불, 석가모니불을 위시하여 대지혜의 문수보살, 행이 큰 보현보살, 미래의 구원불 미륵존불 등 기도의 대상이 되는 불보살은 매우 많다. 그 중에서도 보현보살은 <화엄경> 보현행원품에서 광대한 보살행의 원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보현보살은 보살행을 실천하고자 하는 불자의 귀의차가 되고 있다.
그런데 왜 불교에서는 이렇게 많은 불보살님이 계신 것인가. 그리고 각 불보살님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하는 의문이 들 것이다. 불보살님이 이렇게 많은 이유는 중생의 근기가 다양하고 중생의 원이 다양하고 고통이 다양하기 때문에 이것을 구제하는 방편도 다양한 것이며 주된 방편을 따라 불보살님도 다양한 모습을 띠는 것이다. 즉, 이 모든 불보살님은 각기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본성에서 구제의 특성에 따라 각기 나툰 모습이 다른 것이다. 따라서 일상적인 수행으로써 기도를 할 때에는 어느 분이든 한분을 꾸준히 찾으면 될 것이요, 특별한 상황에서는 거기에 맞게 기도의 대상을 선택하면 될 것이다.
4.기도의 갈래와 방법
1)일반적인 기도의 순서와 방법
아래의 과정은 수행의 예비과정으로 일상적으로 행해야할 공양과 예경, 참회, 발원 등이 함께 있다. 앞에서 다룬 내용들이므로 간략히 하겠다.
①준비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일정한 시간과 장소를 정하여 규칙적으로 하는 것이 좋다. 또한 기도의 기간을 먼저 정하여 그 기간동안에는 8재계를 지키고 보리심을 발하며, 목욕을 하여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다. 그리고 한 번 기간을 정했으면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가능한그 기간을 채우는 것이 기도 성취에 큰 힘이 된다. 기도에 앞서 도량을 청소하고 결계라 하여 물을 뿌리거나 금을 긋는 등 도량의 한계를 정하고 청정히 하는데 이를 대신해서 사방찬과 도량찬의 게송을 외우고 정구업진언이나 정삼업진언을 외운다. 천수경의 경우에는 경 안에 이미 기도의 모든 조건들을 갖추고 있으므로 천수경 독송만으로 기도를 끝마칠 수 있다.
②공양
기도를 시작할 때 먼저 향과 초, 차(茶) 또는 청수로 공양한다. 그 의미는 앞서 말한 것과 같다. 향을 올리고 오분향례를 올리면 된다. 특히 몸이 아픈 사람은 청수를 올리고 기도를 마친 후 그 물을 마시면 효과가 있다. 그리고 일반적인 기도의 경우에도 청수를 함께 나누어 마시면 맑은 기운이 몸에 퍼져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고 가족에 대한 축원을 한 경우 청수를 마시면 소원성취에 대한 감응도 빠르게 나타난다.
③예경
먼저 불보살님의 자비가 이미 이 우주에 가득차 있으며 이 몸에 내재되어 있음을 믿고 감사하는 것이다. 그동안 오만하고 어리석었던 자신에 대해 참회하고 나의 본성이 불보살님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자각하고 나와 남의 분별이 없이 모두 하나인 그 자리에 예경하는 것이다. 시간이 허락하면 예불문에 따라 예불을 드리고 안되면 삼배를 정성스럽게 드린다. 예경은 예배와 찬탄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법회 때 삼귀의를 하고 찬불가를 부르는 것도 여기에 해당한다.
예배는 지극한 마음과 정성어린 동작이 함께 갖추어져야 한다. 불교의 예배법은 나라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으나 기본적으로는 오체투지로써 근본 정신은 자기를 낮추고 부처님을 받드는 것이다. 오체투지란 몸의 다섯 곳을 바닥에 닿게 하는 것으로 양팔꿈치와 양무릎 그리고 이마를 땅에 대는 것이다. 손은 합장하고 가슴에 모아 반듯이 선 자세에서 허리를 똑바로 한 채 무릎을 굽혀 앉은 뒤 왼손을 가슴에 가볍게 대고, 오른손을 먼저 바닥에 내리고 왼손을 내려 바닥에 닿게 하면서 고개와 허리를 자연스럽게 굽혀 이마가 땅에 닿을 때까지 숙인다. 이때 손바닥을 뒤집어 귀 높이로 올려 부처님을 떠받드는 모양을 한다. 다시 합장하고 천천히 일어선다. 이때 마음을 모아 몸이 흐트러지지 않게 천천히 정확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며 아무렇게나 하지 않도록 한다. 보통은 삼배를 하는데 108배, 1080배, 3천배 등 여러번 거듭하는 경우에도 빨리 하는 것보다는 정확하게 하는 것에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 절에서는 엎드린 상태에서 합장하고 이마에 대고 다시 한번 간절한 마음을 표한다.
예배는 그 자체로 훌륭한 수행법이 되므로 절수행은 재가불자들에게 가장 익숙한 수행법이다. 예배의 의미는 앞의 총설편에서 말한 바와 같다. 몸을 굽혀 가장 낮은 자세를 갖추고 부처님의 공덕을 생각하고 찬탄함으로써 예배는 몸과 마음과 뜻을 맑히는 기능을 하며, 특히 아만이 높은 사람에게 효과가 있다. 또한 몸과 마음이 태만해지고 감각적 욕망이 치성해질 때 절수행은 큰 도움이 된다. 108배, 1080배. 3천배 등 많은 절을 할 때, 힘들고, 그만두고 슆은 고비가 있는데 그것을 극복하고 계속함으로써 몸과 마음의 욕망을 조복받는 큰 힘이 있다. 그리고 절을 할 때 힘든 고비를 넘기고 나면 나중에는 절이 저절로 되는데 이때 무념무상의 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이 때가 절수행의 결정을 이룬다. 그러나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면 이렇게 절하고 있는 자가 누구인가?하고 의문을 가지면서 절을 한다면 더욱 큰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영명연수선사는 예배의 공덕과 의미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보현관경>에는 이르기를 "만일 어떤 이가 있어 주야로 언제나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고 대승의 경전을 읽으며 또한 第一義의 매우 깊은 空法을 한 순간만이라도 생각한다면 실로 헤아릴 수 없는 겁의 생사죄를 멸제할 것이다. 이와 같이 법답게 수행하는 이는 참으로 불자며 諸佛로 좇아 난지라 시방의 부처님과 모든 보살이 그의 화상이 되므로 이를 이름하여 '보살계를 구족한 자'라 하리니, 구태여 갈마를 애써 구하지 않아도 자연히 성취해서 마땅히 일체 인천의 공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업보차별경>에 이르기를 "부처님 전에 한 번 만이라도 예배하면 대번에 그 무릎 아래로부터 金剛際에 이르기까지 한 티끌마다 한 전륜왕위가 되어서 열 가지의 뛰어난 공덕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그 열 가지의 공덕이란 이른바 妙色身을 얻는 것, 말을 냄에 사람들이 다 믿는 것, 무리에 처하여 두렵지 않는 것, 온갖 사람들이 다 가까이 따르는 것, 하늘들이 우러러 공경하는 것, 큰 福報를 갖추는 것, 命을 마친 뒤엔 왕생하는 것, 그리고 속히 열반을 증득하는 것을 말한다" 하였다.
또 문수보살은 이르기를 "마음이 생멸하지 않으므로 공경히 예배함에도 觀할 바가 없나니, 오직 안으로는 평등을 행하고 밖으로 공경함을 닦아서 안과 밖이 함께 冥合하는 것이 곧 평등례인 것이다" 하였다.<만선동귀집 제2장>
④발원
기도를 시작할 때 이미 내가 왜 기도를 하는 가가 정해지기 때문에 사실은 별도의 발원을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기도가 의지를 강화하고 어떤 원을 성취해가는 힘을 기르는 기능을 하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발원은 매우 중요하다. 발원은 기원과 다르다. 기원은 바라는 것에 그치지만 발원은 그것을 이루겠다는 주체적인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즉, 발원은 내가 무엇무엇을 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므로 그 뜻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문장화하여 매일 반복적으로 소리내어 발원하는 것이 좋다.
⑤염송
염불과 염송을 구분하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염불, 독경, 사경, 진언 등을 모두 포함한 말로 이해해 주기 바란다. 즉, 기도는 염불, 간경, 진언을 모두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그것들과 구분하지 않고 그 안에 포함시킬 수도 있으나 구체적인 바람을 가지고 행할 때 기도라고 구분지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염송은 기도의 핵심부분으로 각 수행법에서 언급했듯이 일념이 되는 것이 관건이다.
⑥회향
기도에서 회향이 중요한 것은 지금하는 기도가 나만을 위한 기도가 아니고 이 기도공덕으로 일체중생이 함께 해탈하기를 발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의 발원을 회향의 원이라고 할 수 있는데 대개는 사홍서원으로 대신한다. 구체적인 회향의 한 형태로 축원이 있다. 축원은 누군가가 행복해지고 불법의 이치를 깨닫기를 바라며 부처님께 기원하는 것이다. 기도를 끝마치기 전에 특정인에 대한 축복에서 출발하여 차츰 범위를 넓혀 우주 만물 모두에게 축원한다. 이것은 불교의 전통 관법 중의 자비관과 흡사하다. 축원을 할 때에는 본심에서 우러나는 지극한 사랑의 힘을 가지고 상대를 구체적으로 떠올리면서 하면 좋다. 그리고 그가 이미 축복을 받아 행복해 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한다. 모든 기도에서도 마찬가지로 여기까지 마치고 나서는 기도가 성취되었음을 확신하는 관을 한다.
2)참회기도
참회란 잘못에 대해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먼저 안으로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부끄러워 하는 것이요, 다른 사람이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상처받고 고통받았을 것에 대해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끄러움은 일반적인 후회나 반성과 다르다. 후회는 잘못된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고 가슴 아파하는 것으로 주로 과거에 묶여서 오히려 현재에서 최선을 다하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자신의 잘못에 대한 엄밀한 분석을 하지 못하였고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결의도 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이때는 대개 다른 사람들의 눈에 자기가 어떻게 비쳤을까를 걱정하는 마음이 지배적이다. 따라서 후회하는 마음은 자신의 잘못을 감추고자 하는 마음과 같다. 이에 반해 반성은 자신의 잘못에 대해 인정하고 다시는 그런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갖는다. 그러나 아직 문제의 원인 규명까지는 하지 못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참회는 자신의 잘못을 감추지 않고 스스로에게나 타인에게 또는 부처님 앞에서 드러낸다. 그리고 잘못의 원인을 확실히 규명함으로써 다시는 그런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는다. 따라서 참회에는 이참과 사참이 있다. 이참은 이치적으로 무엇이 어떻게 잘못되었으면 그 근원은 어디에 있었는지를 알아 다시는 그런 잘못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요, 사참은 타인에게 사죄하거나 부처님 앞에서 절을 한다거나 하는 실제적인 참회의 행위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만이 다시는 그런 잘못을 반복하지 않게 되고 진정한 참회를 했다고 한다.
참회하는 방법에는 事懺과 理懺이 있다. 사참은 불보살께 자신의 잘못을 몸과 말과 뜻으로 드러내서 참회하는 방법(隨事分別懺悔 : 잘못한 일을 따라 반성해가는 참회법)이며 이참은 본래 일어난 바가 없는 죄의 참 모습을 관찰하여 죄에서 벗어나는 참회법(觀察實相懺悔 : 법계의 실상을 관찰하여 죄를 없애는 참회법)이다.
다시 참회법은 作法참회 . 取相참회 . 無生참회의 세가지 참회로 분류되니(금광명경문구기 권3) 작법참회, 취상참회는 사참이고 무생참회는 이참이다. 작법참회는 참회의 의례를 통해서 죄를 없애는 법이며, 취상참회는 부처님의 거룩한 모습을 관찰함으로써 죄업을 소멸시키는 법이며, 무생참회는 죄가 본래 일어난 바가 없음을 바로 살펴서 죄를 없애는 법이다.
참회의 의례는 여러 경전에서 제시되었고 역사적으로도 다양한 방법이 만들어져 전해 오고 있지만 여기서는 <점찰선악업보경>1)의 예를 인용해 보겠다. 순서는 일반적인 기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①준비
참회의 법을 닦고자 하는 이는 고요한 곳에 머물러 힘의 능하는 바를 따라 하방을 장엄하여 안에 부처님을 모시고 경전을 두고 비단 번기와 일산을 걸어 부처님을 모시고 경전을 두고 비단 번기와 일산을 걸며 향과 꽃을 구하여 모아서 공양을 닦는다. 그리고 몸을 씻고 의복을 빨아 입어 악취와 더러움이 없게 한다.
②예경
낮에는 세 때 명호를 부르되 한 마음으로 과거의 칠불과 53불을 공경하여 예배하며, 다음은 시방의 방위를 따라서 낱낱이 모두 귀의하고 마음으로 생각하면서 두루 일체의 부처님 일에 예배하는 것이요, 다음은 또 시방 삼세에 계신 모든 부처님께 모두 예배드리고 또 마음으로 생각하면서 시방의 일체 법의 갈무리에 두루 예배하며 다음에는 마음으로 생각하면서 시방의 일체 성현을 두루 예배할 것입니다.
③참회
그렇게 한 뒤에 따로 명호를 부르면서 지장보살마하살에게 예배할 것이며 이렇게 예배를 바치고 지었던 바의 죄를 설명하며 한마음으로 우러러 아뢸 것이다.
"원하옵노니 시방의 모든 크게 인자하고 높으신 이시여, 증명하여 아시어 보호하고 염려하옵소서. 저는 지금 참회하고 다시는 짓지 않겠나이다. 원하옵건대 저와 일체 중생은 빨리 한량없는 겁 이래로 십악 사중 오역의 뒤바뀜과 삼보를 헐뜯었던 일천제의 죄를 없어지게 하옵소서"라고 하고, 다시 생각하기를 '이와 같은 죄의 성품은 다만 허망하고 뒤바뀐 마음에서 일어났으므로 결정되었거나 진실되어 얻은 것이 없고 본래가 공하여 고요할 뿐이다. 나와 일체의 중생은 빨리 마음의 근본을 통달하여 영원히 죄의 뿌리를 없애기를 원하리라'고 한다.
④회향의 원
다음에 다시 청하면서 원을 세울 것이니 '원하옵노니 아직 정각을 이루지 못한 시방의 일체 보살로 하여금 빨리 정각을 이루게 하옵시며, 만일 이미 정각을 이룬 이면 세상에 항상 머물러 계시면서 바른 법의 바퀴를 굴리시며 열반에 들지 않게 하옵소서'라고 하고 다음에 다시 따라 기뻐하는 원을 세울 것이니 '원하옵노니 나와 일체 중생은 필경까지 길이 질투하는 마음을 버리고 삼세 동안에 일체의 세계 국토에서 모든 배움을 닦은 온갖 공덕을 성취한 이에게 죄다 따라 기뻐할 것이옵니다.'라고 하며, 다음에 다시 회향의 원을 세울 것이니 '원하옵노니 제가 닦은 바의 공덕은 일체의 모든 중생들을 돕고 이롭게하며, 함께 부처님의 지혜에 나아가 열반의 성에 이르게 하옵소서.'라고 한다.
⑤염송
다시 고요한 방에 나가서 단정히 앉아 한 마음으로 지장보살의 명호를 부르면서 외우거나 묵묵히 생각하여 수면을 줄여 없앨 것이며 만일 혼침이 많은 이면 도량의 방안을 돌면서 외우거나 생각한다.
밤이 와서 만일 등촉을 밝힐 일이 있으면 또한 삼시로 공경하고 공양하며 허물을 뉘우치며 발원한다. 고요한 방 안에 있으면서 한 마음으로 외우거나 생각한다.
⑥청정함을 얻음
날마다 이렇게 참회의 법을 행하면서 게으르거나 폐지하지 말 것이니 만일 그 사람이 지난 세상에 오랫동안 선한 뿌리가 있었으면 잠깐 나쁜 인연을 만나 악한 법을 지었더라도 경미할 것이요, 그 마음이 용맹하고 날카롭고 지력이 강한 이는 칠일을 지난 뒤에는 곧 청정함을 얻어 모든 장애가 없어진다. 혹은 이칠일이 지난 뒤에야 청정함을 얻기도 하고, 혹은 삼칠일이 지난 뒤에야 청정함을 얻기도 하며, 만일 과거 현재에 모두 왕성하고 가지가지의 중한 죄가 있는 이면 혹은 백일을 지나서 청정을 얻고 혹은 이백일 내지 혹은 천일을 지나고서야 청정함을 얻기도 한다. 만일 근기가 극히 둔하고 죄상이 매우 중한 이면 다만 용맹스런 마음을 내어 몸과 목숨을 돌보거나 아끼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언제나 부지런히 부르고 생각하면서 밤낮으로 돌며, 수면을 줄이고 예배하며 참회하고 발원할 것이요, 공양을 즐거이 닦아 게으르지 않고 폐지하지 않으며, 내지 목숨을 잃을지언정 반드시 쉬지 않아야 하리니, 천일 동안 이와같이 진정으로 하면 반드시 청정함을 얻게 될 것이다.
한밤중에 다시 광명이 그 방에 두루 차는 것을 보기도 하고, 혹은 유다른 좋은 향기를 맡아 몸과 뜻이 쾌연해지기도 하고, 혹은 좋은 꿈을 꾸기도 하며 꿈 속에 부처님의 색신이 오셔서 그를 위해 증명을 지으시며, 손으로 그 머리를 만지면서 칭찬하며 말씀하시기를 '착하도다. 너는 이제야 청정하여졌으므로 내가 와서 너를 증명하노라'하기도 하며, 혹은 꿈에 보살이 몸소 와서 그를 위해 증명하기도 하며, 혹은 꿈에 부처님 형상에서 광명을 놓으면서 그를 위해 증명하는 것을 보기도 한다.
이 경에서는 지장보살 염불이 들어 있지만 다른 염불이나 독경 또는 진언도 무방하다. 또 현재 많이 행해지고 있는 방법으로는 절을 하면서 하는 참회법이 있는데 108배, 1080배, 3천배, 1만배 등이 있고 예불 대참회문(108참회문)을 외우면서 절을 하는 경우도 있고 염불하면서 절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이와같은 방법은 대중이 함께 법회나 기도할 때 또는 혼자서 할 때 역시 마음 속으로 참회하는 경우이고, 공동체 내에서 열린 참회법으로는 대중 앞에서 자신의 허물을 드러내고 참회하는 법과, 다른 사람이 잘못을 지적해 주면 따라서 참회하는 방법이 있는데 이것이 포살과 자자이다.
3)예불
예불도 기도의 한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도량찬(도량석과 사물) 공양(다게.오분향례) 예경(예불문) 발원(발원문) 회향(반야심경) 등 기도가 갖추어야 할 조건들을 갖추고 있다. 특히 조석예불은 수행자가 자신의 생활을 반성하고 원을 성취할 수 있는 정진력을 키워주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아침예불은 오늘 하루도 원을 성취하기 위해 열심히 살겠습니다하는 다짐의 시간이고, 저녁예불은 아침에 발원한 것처럼 정말 열심히 노력했는지 점검하는 시간이 다. 따라서 조석예불은 수행자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여서 사찰에서는 전 대중이 반드시 예불에 참석하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가정에 불단을 모시는 경우가 드물지만 이웃나라들은 가정에 불단을 모시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다. 앞에서 수행의 장소를 마련하는 것도 필수적인 요건이라 했다. 다행이 집 가까이 절이 있어서 조석예불에 참여할 수 있으면 좋겠으니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가정에서 예불을 모셔야 할 것이다. 꼭 불상을 모시지 않더라도 경전이나 촛대, 향로, 염주, 불자(佛字) 등으로 간단하게 장엄하여도 좋다. 모든 불자들이 가정에 수행의 공간을 마련해 놓고 온 가족이 그곳을 중심으로 마음을 모으고 원력을 성취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격식을 갖춘 예불이 어렵다하더라도 자기다짐과 서원을 굳건히 하기 위한 점검법으로 아침 저녁으로 삼보를 생각하고 불법승 삼보를 생각하고 예배하는 시간을 반드시 갖도록 하자. 이 때는 절을 하던 염불을 하던 잠시 입정을 하던 자기가 정해서 단 5분, 10분이라도 시간을 낸다. 중요한건 시간과 장소가 아니라 마음이다. 진실한 마음으로 매일 자기 점검을 생활화 해야 한다. 만일 아침 저녁으로 두 번도 힘들다면 하루에 한 번만이라도 좋다. 특히 밤에 잠자기 전에 하는 기도는 무의식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효과가 크다고 한다.
5.주의사항
기도는 간절하게 하면 반드시 성취된다. 다시말해 영험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외부에 어떤 힘의 실체가 있어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이 바로 미신이다. 앞에서 누차 말했거니와 나의 본래면목이자 모든 존재의 근원, 우주의 참모습은 원래 모든 공덕이 다 갖추어져 있으며 지금 있는 그대로가 다 부처님의 모습이다. 단지 내가 그것을 알지 못하므로 삿된 견해를 세워 나다 너다 구분하고 분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기도를 간절히 하여 절을 하던 염불을 하던 그것을 일심으로 하다보면 순간이나마 그런 분별을 놓게되고 본래 그 자리로 돌아가게 되므로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기도성취 후에는 모든 존재 그 자체에 감사할 뿐, 다른 어떤 특정한 것에 공을 돌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또한 무슨 힘든 일이 있을 때만 '부처님'하고 매달리고 그것이 해결되고 나면 한참 잊어버리고 정신없이 살다가 또 힘들어지면 그제야 '아이고 부처님 살려주십시오'하지 말아야 한다. 좋고 나쁜 것을 피하려고 하거나 저항하려하지 말고 모두 내가 지은 것이니 내가 다 감당해야겠다는 마음을 갖아야 할 것이다. 역경계는 그대로 공부의 재료가 되는 것이고 순경계에는 더욱 경계하여 나태해지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니 다만 기도를 통해 그렇게 살 수 있는 힘을 기르고자 한다면 다른 수행과 마찬가지로 성불이라는 목표를 향해 가는 훌륭한 나룻배가 될 것이다.
6.기도의 공덕
앞에서 기도의 기능이 소원성취, 업장소멸, 자기점검이라고 했다. 이것들이 바로 기도의 공덕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매일의 기도는 수행자의 자세를 가다듬어주고, 이 힘으로 선업을 쌓고 악업을 멀리 여의게 하므로 계.율수행이 저절로 된다. 또 기도를 하다보면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의 원인이 나로부터 일어난 것이었음을 알게되고 저절로 참회하고 용서하며 자비스런 마음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이 과정을 통해 업장이 소멸되며 얽히었던 인연을 녹여 순조롭게 풀어나간다. 이렇게 하는 중에 삼매가 깊어지고 삼매를 통해 지혜가 밝아지며 탐진치 삼독을 멀리 여의어 마침내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다.
맺음말
수행은 어렵지 않다. 또한 쉽지 않다. 오직 삶의 전부를 걸때에만 궁극의 목표에 이를 수 있다. 삶을 건다는 것은 일상생활 24시간 전부가 수행의 시간이고 공간이라는 것이다. 일상생활을 떠난 수행은 없다. 수행을 어떤 특별한 장소와 시간 동안에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면 일부밖에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반대로 일상생활이 수행이라고 하여 아무런 노력도 없이 살아간다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따라서 부처님도 한거정처하라 하였다. 틈나는 대로 수행처를 찾아 수행법을 익힐 것이며, 일상생활에서도 수행법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아무리 높은 깨달음을 얻었다 하더라도 다시 일상생활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다. 일상생활과 단절된 깨달음은 결코 완전하지 못하니 수행과 생활의 조화를 이루어내야 할 것이다.
거듭 당부하지만 어느 하나만을 높다하여 다른 것을 그르다 하지 말며, 다른 사람과 더불어 시비하지 말아야 한다. 여기 제시된 수행법 외에도 더 많은 수행법들이 있으나 우선 이 글을 참고하면서 자기가 힘 닿는데로 힘써 실천하기 바란다. 여기에 대한 영명연수스님의 말씀을 인용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매듭짓고자 한다.
대성께서는 대자대비하시어 마침내 호광(虛광)히 베풀지 아니하시므로 팔만의 법문이 모두가 해탈법 아님이 없고, 일념의 미미한 선행이라 할지라도 낱낱히 진여로 나아가는 것이나, 다만 중생의 근기가 초심도 후심도 있어서 인(隨順忍)이나 법인(無生法忍)을 낼 따름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높은 것만을 집착하여 낮은 것을 배척하지 말 것이며 낮음으로서 높음을 시기하지 말고 모름지기 때를 알아서 스스로 근력을 헤아릴지니, 남의 좋고 나쁨을 평하여 억지로 시비를 세워서는 안되리라. 왜냐하면 말이란 재앙의 시초라 스스로 업장만 부르기 때문이다. 또 무생인을 얻은 보살로서 비록 아법(我法)의 이공(二空)을 증득하였으나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 간탐의 더러움을 파하고 오히려 소비(燒臂)하고 분신(焚身)도 하셨으니, 곧 약왕보살이나 승애와 같은 유(類)라. 그러나 만일 인을 갖추지 못한 이라면 비록 지혜의 불길로서 번뇌의 섶을 태우며, 이공(二空)을 요달하여 신견(身見)을 내지 않을 줄 안다 하더라도 혹 현행의 업장이 무거우면 상응함을 얻기 어려울 것이니, 부디 용맹심을 일으켜 진실행을 운용하며 부처님께 공양하여 은혜를 갗고 또한 중생의 고통을 대신하여 자비를 행할 것이다.
조도의 문을 이루고자 한다면 희구(希求)의 생각을 일으키지 말지니, 다만 서로 속이지만 않는다면 일마다 헛되이 버려지지 않으려니와, 그렇지 않고 혹 지안이 밝지도 못하면서 오히려 아집을 내거나 인과만을 구하거나 뜻이 귿세지 못해서 선배들의 자취를 본받기에도 의심을 내는 이들은 실로 날이 갈수록 도업과는 아득히 거리가 멀어지고 말 것이다. 대개 중생은 근기가 같지 않고 그해서 숭상하는 바도 각각이므로 부처님께서 이르시기를 "만일 중생이 허망된 마음으로도 해탕을 얻을 수 있다 한다면 나도 또한 거짓말하는 사람이리라"고 하신 것이다.
이러므로 알라. 사(事)는 비록 천갈래로 벌어지나 이(理)는 마침내 한 근원으로 돌아가는지라 모두가 대자비의 선권방편이시니, 혹은 신명을 버림으로 해서 단박에 법인에 들며, 혹은 일심으로 선정을 수습해 밝게 무생을 깨닫기도 하며, 혹은 근본이 청정함을 요달하여 실상문을 증득키도 하며, 혹은 부정관을 지어 원리도(遠離道)에 오르기도 하며, 또 혹은 칠보방사에 앉은 채 성과에 오르기도 하고 혹은 총간수하(塚間樹下)에 처한 채 열반에 나아가기도 하는 것이다. (<만선동귀집> 제2장)
1)한글대장경(구판) 77권 P.P 495~4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