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시인을 주목한다 / 나순옥 작품평
제목; 에코페미니즘과 구원의 상상력
이 재 창
현대시조의 역사는 당연히 고시조와의 연장선상에 있지만 아직도 미지의 세계와 마주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시조는 문학으로서의 자율성과 정형성,현대적 의미로서의 역사성을 내포한다. 역사성에 지나친 역점을 두면 현대시조에 있어서 현실성이나 사회성이 충분히 고려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자율성과 정형성 그리고 역사성은 분리돼 있는 것은 아니다. 현대시조도 문학의 한 장르로써 사회․역사적 산물이므로 사회성과 역사성을 동시에 띄는 문학으로서의 독자성을 지닌다. 그래서 미력하나마 타장르 틈에 끼어서라도 명맥을 유지한 까닭이기도 하다. 현대시조가 지금까지 주변의 문학으로 전락한 근본적인 이유는 형식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다는 점과 한국 현대사에 있어서의 격동의 역사를 시조시인들 대다수가 등을 돌렸다는 사실이다. 문학의 자율성은 저절로 확보되기 보다는 자유로운 문학을 억압하는 사회 역사적 조건과의 긴장관계 속에서 얻어진 것이라 할수 있다. 문학과 사회 역사와의 긴장은 현대문학의 중요한 특성이다. 현대시조의 고유한 현재성도 이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국권 상실, 해방과 분단, 냉전 체제, 군사독재, 부정부패, 산업화, 환경 오염, IMF시대 등등 모두 한국 현대문학사를 드러내는 문학적 관심사다. 이러한 한국 문학의 개별성과 변별성을 가질수 있는 최대의 장르인 현대시조는 해방과 민족문학의 모색, 전후의 현실과 문학적 대응, 산업화가 가져온 사회변동과 현실인식의 상상력의 응전 속에서 문학사적 현대성을 발견하는 데 너무도 게을리 해왔다.
한마디로 리얼리티를 소홀히 해온, 현대시조단의 실험의식이 너무 부족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적 의미에 있어서의 인물과 사건, 배경 등이 결합되는 새로운 룰을 창조해 내지 못함으로써 대중성을 얻는 데 실패 할 수 밖에 없었다. 여러 가지 이야기에 의해 구현되고 이야기는 여러 가지 설화방식에 의해 서술되는, 즉 소설의 양식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시조에서도 시도 할 수 있는 엇시조나 사설시조, 옴니버스시조 등의 형식을 활용 했더라면 현대시조도 커다란 성과를 얻었을 것이란 가정도 해보기도 한다. 그렇다고 시조 고유의 형식이나 정형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의 기본 뼈대 위에 현대적 변용은 가능 하다고 본다. 고시조의 평시조가 시대적 변화에 의해 새로운 유형의 엇시조나 사설시조가 탄생 되었듯이 현대시조도 그 외의 새로운 양식의 시조가 탄생되지 말란 법은 없다. 그 시기가 지금일 수도 있고 앞으로 백년, 이백년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은 누구도 장담할 수가 없다.
그러면 사람을 시조만큼 사랑 해 보지 못할 정도로 시조를 사랑한다는 나순옥 시인의 끈적끈적한 시조를 살펴 보자. 그녀의 시에서는 사람냄새가 난다. 현대인들이 누구나 느끼는 생활사에서의 느낌이 아니라, 잔잔한 모성적 이미지의 서정성 속에 삶의 발랄한 상상력이 어우러진 강렬함이 배어 있다. 잔잔함 속에서 삶의 욕구 분출이 마흔살쯤 되는 꽃처럼 벙그는 희망의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다.
실핏줄 뒤얽히듯 얽혀버린 그 고리들을 올올이 풀어내고
한 짐의 고통 산모롱이에 부려놓은 꽃
몸에 닿는 실낱같은 인연마저 다 지우고 아늑함에 몸 맡긴 채 계절 잃고 피어나 불감 증 앓는 꽃이긴 싫어
어느 내실 수반 위 헤픈 웃음 흘리는 그런 꽃이긴 더욱 싫어
그렇지
마흔 살쯤 되는 꽃
찬서리 속에 벙그는
-<들국화>전문
시조의 형식을 들먹이자면 많은 설명과 논의가 필요 할 것으로 생각 되지만 여기서는 한 편의 현대시조가 얼마만큼의 다양성을 가지고 있는 가에 대해서 여러모로 의미심장한 생각를 할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우리의 사회구조나 일상사의 방식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분리를 통해서 사회생활이나 가정생활을 영위한다. 현대의 가부장제, 산업주의, 신과학 아래서 우리는 영혼과 정신 및 초월적인 영역을 남성의 영역으로 만들고, 대신에 자연과 대지를 여성성의 표상이라고 간주해 왔다. 이러한 남성 우월주의 속에서 살아가는 여성의 삶은 어떤 것일까, 그에 대한 의문들은 <들국화>에서 적나나한 비유를 통해 거부된다. 실핏줄의 고리와 한짐의 고통을 짊어지고 산모롱이에 나뒹구는 들국화로 비유되는 여성상에서 시대적 필요나 가족사 속의 내던져진 자신을 되돌아 보고 있다. 이 시대의 사회나 남성들에 의한 공포와 억압 때문에 실낱같은 인연 다 지우고 불감증 앓은 꽃이기 싫은 여성, 집안에 쳐박혀 집안 일이나 돌보는, 그러면서 아이들이나 키우는, 어느 내실 수반 위 헤픈 웃음이나 선물하는, 수많은 가부장제 문화속에서 어떠한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남성들을 기쁘게 해주려고 자기의 자연적인 몸을 지배하는 그러한 꽃이긴 싫은 거부감을 직시한다. 자연적인 미에 더 가까워 지기 위해 몸을 가느다랗게 빼빼 말리고, 털을 제거하고, 근육이 나게 헬스를 하고, 피부를 검게하기 위해 태양에 쬐이고, 그리고 지극히 위험스런 외과 성형 수술까지 감수한다 - 마치 여성의 자연적인 육체가 치명적인 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치장하고, 다듬고, 씻어내고, 냄새를 없애고 음식을 줄인다 - 아름다움을 위하여 문자 그대로 스스로 죽어가는 여성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시조다. 그러면서 되받아 치는 마흔의 찬서리 속에 벙그는 희망의 역설 또한 돋보인다. 여성의 억압과 자연의 위기는 유사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대두된 에코페미니즘적 사고와 서정성이 잘 녹아든 작품이다. 나순옥 시인의 체험적 시론에 나타난 모성과 결부돼 인상적이다.
횡단보도 붉은 등에 두 발이 묶였을 때
내 몸을 빠져나가는 물방울들을 보았다
끝 모를 기다림에 지칠 때
타령처럼 흘러나갔다
잠궈도 또 잠궈도 밖으로만 향하는 물
무수히 사멸하는 시간의 파편 속에
말갛게 걸러져 나와
강물을 이루었다
그 물결 뒤척일 적마다 흰피톨이 살아났다
마른 뼈는 역사 위에 불길 지피지 못했어도
천년을 살아 숨쉴 강,
옷고름을 풀었다.
-<누수>전문
위 시에서 누수는 시인의 의식이다. 인간존재 심연에 대한 인식과 그 구원의 가능성에 대한 모색의 과정 속에 시인의 기(氣)는 배태되고 있다. 내 몸을 빠져나가는 물방울, 밖으로만 향하는 물은 자아 확대의 한 방안으로서 타자와의 기다림에 대한 관심과, 산업사회에서의 사물화 기호화되어가는 소외된 자아의 인식이다. 그것은 비록 세상에 널브러진 모든 생명체나 우리 주변의 딱딱한 무생물 일수도 있는 타자와의 진정한 관계라든가 사랑이 결여된 세계를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밖으로만 향하는 시적 인식은 역설적으로 거기에 인간에 대한 사랑이 내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기다림에 지칠 때 타령처럼 흘러 나가는 물, 사멸하는 시간의 파편 속에 걸러져 이루는 강물은 기술문명 사회에서 익명화 되어가는 시인의 의식이 점차 확장되어 가는, 보드리야르적 의미에서의 삼인칭으로 전락되어 가는 자아 소외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이 굴절되어 나온 세상의 안주 또는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그러면서 살아난 흰피톨과 마른뼈, 불길 지피지 못했어도 천년을 살아 숨쉴 강에서 시인은 세상과의 사이에서 불연속적 개체로 고립되어 있는 인간이 극복할 수 있는 사랑의 연속성에 대한 동경과 어떤 존재의 기다림 속에서 옷고름을 푸는 영원한 현재의 유토피아를 꿈꾼다. 고립된 자아의 결핍된 상황이나 개별적 욕망을 넘어서 세상에 던져진 커다란 방에서 삶의 보편적 인식에 도달하고, 이를 통해 시인 자신이 자기 구원에 이르고 있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시인은 기다림과 시간의 파편에 의해 지친 삶의 헐벗음과 고독한 단독자로서 실존에서 벗어나 역사의 강 위에 자기 존재에 이르고, 마침내 자아를 회복할 수 있음을 시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텅 빈 DJ박스
무반주로 시작되는
도심의 새벽은 늘
암회색으로 눅눅했다
철 셔터 밀어 올리는
시지프스 신음 가득한…
골목을 흩고 가는
미 답의 저 종소리
파지처럼 널브러진
바람들을 주워 모아
하루는 어느 첨탑을 돌아
획을 하나 그으려나
-<하루는>전문
오늘날 우리 인간은 모든 것을 다 경험할 수 없고 올곧은 삶을 영위할 수는 없는 존재다. 프로이트는 인간이 과거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일러 주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과거의 경험에 기대어 미래에 대응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경험은 언제나 부족하고 빈약한 것이다. 게다가 그 실용성에 있어서는 늘 양심의 감시를 받고 있다. 여기서 요구되는 시적 상상력은 과거의 경험을 창조적으로 변형함으로서 과거의 지배로부터 벗어 나려는 노력이다. 말하자면 시인의 창조성의 회복과 상상력의 극대화이다. 텅빈 DJ박스와 도심의 새벽, 무반주와 눅눅한 암회색, 그리고 골목의 종소리와 파지의 바람은 위 시를 심적 균형과 긴장을 유발시키는 동격의 이미지다. 모든 서민들의 삶은 개인과 사회, 이상과 현실, 삶의 내면과 외면 사이에서 야기되는 여러 가지 갈등과 모순 사이에서 경험하는 고통을 모든 사물과의 서정적 교감을 통해 어무르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살아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시지프스의 신음을 간직할 수 밖에 없는 개인적 고통의 사회화 과정을 그 누구도 부인 할 수 없다는 시인의 정신적 갈등과 긴장이 역력하다. 이러한 고통은 2연에서 경험적 현실과 정신적 이상 사이의 갈등을 포용함으로써 하루는 어느 첨탑을 돌아 획을 하나 찍 긋듯이 결핍과 고통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새로운 세계를 꿈꾸며 마무리 하는 것이다.
현대시조에 있어서 쉽게 간과해 버릴 지도 모를 현대인의 삶의 조건들, 즉 죽음과 삶, 정신과 물질, 무한과 유한, 초월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의 상호 조응적인 시각을 여러 각도에서 조망하며 삶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다른 무엇이 되고자 상상력을 발휘하지만 시인이든 시인이 아니던 간에 현실적 욕망이나 쾌락으로부터 돈이나 권력으로부터 사회적 불평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시인의 고백이기도 하다. 위 시의 <획을 하나 그으려나>부분은 이러한 시인의 경험과 정신적 갈등 사이의 상상력을 극대화 시켜 주는 키 포인트다.
간략하나마 이제까지 나순옥 시인의 작품을 살펴 보았다. 나시인이 체험적 시론에서 밝혔듯이 그녀의 시에서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냄새가난다. 그리고 10여년의 절필 끝에 다시 살아난 끈끈한 시적 세계는 참으로 여성답지 않게 시조와의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지금 새로운 세기를 눈 앞에 두고 격변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이 몰락함과 동시에 민중문학은 쇠퇴해 버렸다. 노동운동 등 각종 사회운동들도 시대적 상황에 따라 힘을 쓸만한 역할들을 못하고 있다. 영상매체의 확산으로 예술에 대한 일반적 인식이 변하고 있고, 대중문화는 시의 영역 속에 파고들고, 현대성은 일상성의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이에따라 많은 시인들이 자신의 창조력을 지속하기 어려운 실정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광고처럼 가볍고 내용이 없는 시조, 천편일률적인 고시조풍의 패러디, 언어적인 면의 내용만 다를 뿐 변화가 없는, 다른 시조를 베낀듯한 이른바 혼성 모방의 형식등은 분명 전통적인 우리 시조를 답습한 훌륭한 작품인지 모르지만 현대시조의 대중화와 독자들의 편에서 바라볼 땐 흥미를 유발하거나 가까워질 명분마저 없애고 만다. 가장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 사람은 시조가 심심풀이 껌에 불과한 노인양반들이다. 그러니 정년퇴직만 하면 우습게 보고 달라 붙는 게 아닌가, 시조가 말년에 신선놀이나 하는 장르 쯤으로 생각 하고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 시조가 이 시조고, 이 시조가 그 시조이면 우리나라에 국민 정서에 맞는 몇편의 좋은 작품만 있으면 족하다. IMF시대에 고시조타령이나 하고있다면 정말 해괴망칙한 일일 것이다.
시대가 흐르고 사회가 변하면 그에 따른 현대시조의 변화도 피할 수는 없다. 사회 각 분야의 모든 상황이 예술분야 마다 영향을 미치듯이 현대시조도 상호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다. 현대시조에 있어서 가장 큰 과제는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그 사회를 따라가며 시조시인들 모두가 저마다의 창조적 가능성을 모색하며 스스로 노력하는 일이다. 사회가 변하듯 시조의 내용도 당연히 변한다. 현대시조에 있어서는 과거 즉 고시조의 리듬이나 내용에 너무 집착할 필요가 없다. 오늘을 사는 시조시인들은 좀더 장기적인 안목에서 21세기적인 관점에서 오늘의 시대와 삶을 탐구할 것을 요구 받고 있는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