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個性과 藝術
廉 想 涉(염 상 섭)
(1)
예술창작상(藝術創作上)으로 고찰(考察)한 개성문제(個性問題)는, 그리 용역(容易)1) 한 문제(問題)가 아님으로, 충분(充分)한 學的 연구(硏究)에 기대(期待)할 바이지만 나는 지금(只今) 일반적(一般的) 상식문제(常識問題)로서, 爲先 自我의 각성(覺醒)을 약술(略述)하고, 차(此)로 유(由)한 個性의 發見과 그 意義를 論한 後에, 예술적(藝術的) 창작상(創作上), 아서 그 가치평정상(價値評定上), 個性은 如何한 地位를 占하며 何如한 意義가 有한가를, 극(極)히 통속적(通俗的)으로 일별(一瞥)하랴한다.
대저(大抵) 近代文明의 정신적(精神的) 모든 수확물중(收穫物中), 가장 본질적(本質的)이요, 重大한 意義를 가진 것은, 아마 自我의 각성(覺醒), 혹(或)은 그 회복(恢復)이라 하겠다. 이에 對하야는 누구나 이의(異議)가 업슬 것이다. 질(質)로 近代人의 특색(特色)이 이에 잇고, 價値가 이에 잇스며, 今日의 모든 文化的 成果가, 이에서 出發하얏다 하야도 결(決)코 과언(過言)이 아닐 것이다. 勿論 르타ㅣ쓰가, 씨사를 시살(弑殺)한 그 거룩한 정신(精神)으로 보면, 당대(當代)의 라마민족(羅馬民族)은, 벌써 정치적(政治的)으로만이라도 확실(確實)히 我를 自覺하고 我를 주장(主張)하리만치, 피등(彼等)은 인류(人類)의 선각자(先覺者)라고 논단(論斷)할 수 잇슬지 모르겟다. 아서, 특(特)히 문예부흥시대(文藝復興時代) 以後, 는 종교개혁(宗敎改革)이나 불란서혁명(佛蘭西革命) 以後에, 비롯오 自我를 發見하얏다함과 가티 論함은, 돌이어 온당(穩當)치 못할것 갓기도 하다. 그러나 중세기(中世紀)의 소위(所謂) 암흑시대(暗黑時代)라는, 교권주의(敎權主義)의 절대적(絶對的) 위압하(威壓下)에서 신음(呻吟)하야 오든, 자기몰각상태(自己沒却狀態)의 몽환적(夢幻的)이면서도 암담(暗澹)하고 황량(荒凉)한 노예적(奴隷的) 생활(生活)을 일축(一蹴)하고, 엄연(儼然)히 자기(自己)의 존귀(尊貴)를 주장(主張)하며, 人間의 本然性에 돌아왔다는 사실(事實)은, 아모리 하야도 인류적(人類的) 신기록(新記錄)이라고 아니할 수 업슬 것이다. 교권(敎權)이라는 철비(銕扉)가 굿게 다치운, 그윽하고도 쓸쓸하며, 침중(沈重)하고도 졸음오는, 저ㅣ승원(僧院)의 死와 가티 신비(神秘)롭은 뢰문(牢門)을 배(排)하고 피잇고 고기잇스며, 눈물잇는 동적 세계(動的 世界), 眞正한 人間답은 生命이 약동(躍動)하는 현실세계(現實世界)에 일대 비약(一大 飛躍)을 단행(斷行)한 것이, 이 문예부흥(文藝復興)의 운동(運動)이요, 자아회복(自我恢復), 혹(或)은 발견(發見)의 위업(偉業)이엇다.
그러함으로 이와 가티 교권(敎權)의 위압(威壓)으로부터 해방(解放)되고, 몽환(夢幻)에 감취(甘醉)한 낭만적 사상(浪漫的 思想)의 베일로부터 버서나와 自己의 정체(正軆)를 명료(明瞭)히 응시(凝視)할 만치, 깁고 오랜 에서 여나온 近代人은, 爲先 모든 것을 의심(疑心)하기 시작(始作)하얏다. 이 의심(疑心)이야말로 어한 時代에던지 모든 文化의 효모(酵母)다. 一生을 취생몽사(醉生夢死)로 지내는 사람에게는 백반(百般)2) 의 사물(事物)에 대(對)한 의문(疑問)이나, 비평적(批評的) 정신(精神)이 잇슬 리(理)가 업지마는, 일단각성(一旦覺醒)한 以上, 自己의 주의(周圍)를 의심(疑心)하고, 비평적(批評的) 태도(態度)로 일절(一切)를 탐구평가(探究評價)하랴 할 아니라, 自己自身에지 의혹(疑惑)의 안광(眼光)을 향(向)하게 되는 것은 당연(當然)한 사(事)라 하겟다. 그리하야 자각(自覺)한 피등(彼等)3) 은, 제일(第一)에 爲先 모든 권위(權威)를 부정(否定)하고, 우상(偶像)을 타파(打破)하며, 초자연적(超自然的) 일절(一切)를 물리치고 나서, 현실세계(現實世界)를 현실(現實) 그대로 보랴고 노력(努力)하얏다. 한 이러한 思想은, 자연지세(自然之勢)로 신앙(信仰)의 동요(動搖)를 유치(誘致)한 동시(同時)에, 신성(神聖)이니, 위대(偉大)니, 절대(絶對)니, 숭배(崇拜)니 하는 등(等) 용어(用語)에 대(對)한 意義를 의심(疑心)하게 되었다. 다시말하면 지금(只今)지는 모든 것이, 미련(美麗)한 것, 위대(偉大)한 것, 경건(敬虔)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 일단(一旦) 인 사람의 눈으로, 세밀(細密)히 해부(解剖)하야 보고 검토(檢討)하야 보면, 추악(醜惡)하고 평범(平凡)하고 비속(卑俗)한 것으로 비추임을 다랏다는 意味이다. 마치 三角山은, 서울長安에서 바라보면, 淸秀4) 한 아치(雅致)잇는 자연(自然)의 선경(仙境)갓지만, 실제(實際)로 올라가보면, 고목잡초(枯木雜草)에 덥힌 살풍경(殺風景) 속에, 분뇨진애(糞尿塵埃)가 즐비낭자(櫛比浪藉)하야 변변히 소게(少憩)를 어들만한 곳이 업드라는 것과 가튼 심리상태(心理狀態)이다. 내가 年前에 폐허(廢墟) 창간호(創刊號)에 법의(法衣)라는 詩를 쓴 일이 잇섯다. 어한 女性을 상당(相當)한 거리(距離)를 격(隔)하야 볼 는 완염(婉艶)한 자세(姿勢)가 흠모(欽慕)할 만하게 보이나, 접근(接近)하야 본즉 中年에 달(達)한 졸음만흔 얼굴에 죽은가 잇드라는 실감(實感)에 비(臂)하야 신부신부(信夫信婦)의 법의(法衣)는 찬란(燦爛)하나 그 법의(法衣)를 버슨 피등(彼等)을 볼 는, 모든 경건(敬虔)을 아서 간다고 한탄(恨歎)한 것이 그 내용(內容)이 엇다. 이 역시(亦是) 자아각성(自我覺醒)의 초아(初芽)5) 가 피어온 近代人의 心理와 다를 것이 업는 것이다.
이러한 심리상태(心理狀態)를, 보통(普通) 이름하야, 현실폭로(現實暴露)의 비애(悲哀), 는 환멸(幻滅)의 비애(悲哀)라고 부르거니와, 이와 가티 신앙(信仰)을 일허 버리고, 미추(美醜)의 價値가 전도(顚倒)하야 현실폭로(現實暴露)의 비애(悲哀)를 감(感)하며, 理想은 환멸(幻滅)하야, 人心은 귀추(歸趨)를 일허 버리고, 思想은 중축(中軸)이 부러저서, 방황혼돈(彷徨混沌)하며, 암담고독(暗憺孤獨)에 울면서도, 자아각성(自我覺醒)의 눈만은 더욱더욱 크게 게 되엇다. 혹(或)은 이러한 현상(現象)이, 돌이어 자아각성(自我覺醒)을 촉진(促進)하는 그 직접원인(直接原因)이 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잇다. 하여간(何如間) 이러한 현상(現象)이 사상방면(思想方面)으로는 이상주의(理想主義), 낭만주의(浪漫主義), 시대(時代)를 경과(經過)하야, 자연과학(自然科學)의 발달(發達)과 공(共)히, 자연주의(自然主義) 내지(乃至) 개인주의사상(個人主義思想)의 경향(傾向)을 유치(誘致)한 것은 사실(事實)이다.
세인(世人)은 왕왕(往往)이 자연주의(自然主義)를 지칭(指稱)하야, 성욕지상(性慾至上)의 관능주의(官能主義)라 하며, 개인주의(個人主義)를 박(駁)하야, 천박(淺薄)한 이기주의(利己主義)라고 오상(誤想)하는 者가 잇는 모양이나 이것은 큰 오해(誤解)이다. 이에 대(對)한 상세(詳細)한 고찰(考察)은, 지금(只今) 나의 소론(所論)에 그리 필요(必要)치 안흠으로, 후일(後日)에 양(讓)하거니와, 자연주의(自然主義)의 사상(思想)은, 결국(結局) 자아각성(自我覺醒)에 의(依)한 권위(權威)의 부정(否定), 우상(偶像)의 타파(打破)로 인(因)하야 유기(誘起)된 환멸(幻滅)의 비애(悲哀)를 수소(愁訴)6) 함에, 그 대부분(大部分)의 意義가 잇다. 함으로 세인(世人)이 이 主義의 作品에 대(對)하야 비난공격(非難攻擊)의 목표(目標)로 삼는, 성욕묘사(性慾描寫)를 특(特)히 제재(題材)로 택(擇)함은, 정욕적(情慾的) 관능(官能)을 일층(一層) 과장(誇張)하야, 독자(讀者)로 하야곰 열정(劣情)을 유발(誘發)케 하고 저급(低級)의 쾌감(快感)을 만족(滿足)시키랴는 것이 목적(目的)이 아니라, 현실폭로(現實暴露)의 비애(悲哀), 환멸(幻滅)의 애수(哀愁), 는 人生의 암흑추악(暗黑醜惡)한 일반면(一反面)으로 여실(如實)히 묘사(描寫)함으로써, 人生의 진상(眞相)은 이러하다는 것을 표현(表現)하기 爲하야, 理想主義 혹(或)은 낭만파문학(浪漫派文學)에 대(對)한 반동적(反動的)으로 일어난 수단(手段)에 불과(不過)하다.
예(例)를 들어 말하면 불국(佛國)의 모팟산의 作品 「女의 一生」과가티, 미혼(未婚)한 처녀(處女)가 自己의 남편(男便)될 사람은 위대(偉大)한 人物이라고 상상(想像)하고, 결혼생활(結婚生活)은 신성(神聖)하고 자미(滋味)7) 스럽은, 男女의 결합(結合)이라고 생각하얏든 것이, 급기야(及其也) 결혼(結婚)하고 보니 평범(平凡)한 男子에 不過하고 男女의 관계(關係)는 결국(結局) 추외(醜猥)한 성욕적(性慾的) 결합(結合)에 不過함을 닷고 비탄(悲歎)하는 것이, 자연주의(自然主義) 작품(作品)의 골자(骨子)다. 以上은 이위(已爲)8) 자연주의(自然主義)에 언급(言及)하얏기로 약간(若干) 논지(論旨)의 기로(岐路)에 나온 듯하나, 一言의 변해(辯解)를 한 것이어니와, 하여간(何如間) 소위(所謂) 자연주의운동(自然主義運動)도 역시(亦是) 각성(覺醒)한 自我의 규호(叫呼)며 그 완성(完成)의 도정(途程)인 것만 이해(理解)하면 고만이다.
그 다음에, 近代人에게 개인주의색체(個人主義色彩)가 농후(濃厚)함은 사실(事實)이나, 결(決)코 이기주의(利己主義)와 혼동(混同)할 바가 아니라, 이 역권위부인(亦權威否認), 우상타파(偶像打破)의 자기각성(自己覺醒)에 출발점(出發點)이 잇는 것이다. 재래(在來)의 思想으로는 개체(個體)는 그 전체(全體)에 대(對)하야 예속(隷屬)한 이부분(一部分)에 불과(不過)하다고 생각하얏스나, 개인주의사상(個人主義思想)으로는 그 위치(位置)와 가치(價値)를 전도(顚倒)하야, 개체(個體)의 존엄(尊嚴)을 주장(主張)함으로써 무엇보다 먼저 自己에게 충실(忠實)하라, 그리함이 自己를 함유(含有)한 전체(全體)에 대(對)하야 충실(忠實)한 소이(所以)라는 것이 이 主義의 主張이다. 보통(普通) 近代의 文明은, 神을 인격화(人格化)하고 人을 신격화(神格化)하얏다함과 가티, 神도 自己업시는 존재(存在)할 수 업다고 주장(主張)한다. 그는 하여간(何如間) 이 主義의 시비곡직(是非曲直)을 막론(莫論)하고, 각성(覺醒)한 自我가 自己의 존엄(尊嚴)을 굿게 주장(主張)함에 불외(不外)함은 췌언(贅言)9) 을 불요(不要)하는 바이다.
(2)
그러하면 自我의 각성(覺醒)이니, 自我의 존엄(尊嚴)이니 하는 것은, 무엇을 意味함인가. 이를 약언(略言)하면, 곳 人間性의 각성(覺醒), 는 해방(解放)이며, 人間性의 위대(偉大)를 발견(發見)하얏다는 意味이다. 아서 일반적(一般的) 意味를 나, 개인(個人)에 취(就)하야 일층심각(一層深刻)히 고찰(考察)할 지경(地境)이면, 개성(個性)의 자각(自覺), 개성(個性)의 존엄(尊嚴)을 意味함이라고도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近代人의 自我의 發見이라는 것은, 인반적(一般的) 意味로는 人間性의 自覺인 同時에, 개개인(個個人)에 취(就)하야 고찰(考察)하면, 個性의 發見이요, 고조(高調)요, 굿센 주장(主張)이며, 새롭은 가치부여(價値賦與)라 하겟다.
그러한데 以上에, 나는, 自我의 각성(覺醒)은, 정(靜)으로부터 동(動)에 혈(血)잇고 육(肉)잇고 루(淚)잇는, 지정의(知情意)의 활약(活躍)잇는 생명적(生命的) 비약(飛躍)이라고 말하얏다. 함으로 近代人이 自我를 각성(覺醒)함으로써, 각개(各個)의 개성(個性)을 발견(發見) 확립(確立)하고, 그 위대(偉大)와 존엄(尊嚴)을 자각(自覺)하며 주장(主張)함도 한 생명적(生命的) 용약(勇躍)10) 이 아니면 아닐 것이다. 그러하면, 소위(所謂) 개성(個性)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즉(卽) 개개인(個個人)의 품부(稟賦)한 독이적(獨異的) 생명(生命)이, 곳 그 각자(各自)의 개성(個性)이다. 함으로 그 거룩한 독이적생명(獨異的生命) 생명(生命)의 유로(流露)11) 가 곳 개성(個性)의 표현(表現)이다. 이것은 一見하면 심(甚)히 난해(難解)한 듯하나, 백사만물(百萬事物)에 개성(個性)이 업슴이 업고 그 개성(個性)은 곳 그 사물자체(事物自體)의 생명(生命)임을, 용역(容易)히 요해(了解)할 수가 있는 것이다. 지금(只今) 일례(一例)를 거(擧)하야 비유(譬喩)할진대, 일반(一般)으로 지류(紙類)는 공통(共通)한 사명(使命)잇는 것이다. 즉(卽) 동일(同一)한 수용적(需用的) 가치(價値)가 잇는 것이다. 경언(更言)하면 지류(紙類)로서의 공통(共通)한 생명(生命)이잇다. 그러나 양지(洋紙)는 철필(鐵筆)로 씨우거나 도벽(塗壁)에 적당(適當)하고, 조선지(朝鮮紙)는 모필(毛筆)로 씨우거나 창호지(窓戶紙)로 사용(使用)될 지품(紙品)을 향유(享有)한 것이다. 물론(勿論) 양종지류(兩種紙類)의 용도(用途)를 절대(絶對)로 전환(轉換)하야서는 아니 된다 함은 아니나, 그 특성(特性)을 아서 적용(適用)하여야 충분(充分)한 효과(効果)를 어드리라 함이다. 함으로 철필(鐵筆)로 씨우거나 도벽용(塗壁用)으로 사용(使用)되는 데에, 양지(洋紙)의 개성(個性)이 잇고 아서 그 생명(生命)이 잇는 것이며, 조선지(朝鮮紙)는 모필(毛筆)로 씨우며 창호지(窓戶紙)에 수요(需要)되는 거긔에, 조선지(朝鮮紙)된 특장(特長) 즉(卽) 개성(個性)이 표현(表現)되며, 생명(生命)이 유로(流露)되는 것이다.
함으로 以上에 내가, 일반적(一般的) 인간성(人間性)이라 하고, 독이적(獨異的) 생명(生命)이라고 한 것도 역시(亦是) 이러한 意味에 불외(不外)한다. 인간성(人間性)이니 개성(個性)이니 하얏지만, 도시(都是) 생명(生命)의 발현(發現)인 점(點)은 일반(一般)이다. 함으로 自我의 각성(覺醒)이 일반적(一般的) 인간성(人間性)의 자각(自覺)인 동시(同時)에 독이적(獨異的) 개성(個性)의 발견(發見)이라 함은, 결국(結局) 지류(紙類)는 공통(共通)한 사명(使命)과 同一한 수요가치(需要價値) 즉(卽) 공통(共通)한 생명(生命)이 잇는 동시(同時)에, 개적(個的) 특성(特性)이 잇다 함과, 이곡동음(異曲同音)이다. 이를 요(要)컨대 개성(個性)의 표현(表現)은 생명(生命)의 유로(流露)이며, 개성(個性)이 업는 곳에 생명(生命)은 업다는 것만 다르면 될 것이다.
그러하면 소위(所謂) 생명(生命)이란 무엇인가.
지금(只今) 나는 철학적(哲學的)으로 고찰(考察)하야, 생명(生命)에 대(對)한 정의(定義)를 나리우랴는 경거(輕擧)는 물론(勿論) 피(避)하고자 한다. 그러하나 이에서 이른바 생명(生命)이라 함은 생물적(生物的) 번식(蕃殖)을 意味함이 아님은 물론(勿論)이다. 생물적(生物的) 증식(增殖)을 意味하는 생명(生命)은, 다만 수(數)나 양(量)의 문제(問題)요 피상적(皮相的) 물적(物的) 생명(生命)의 연장(延長) 즉(卽) 종족(種族)의 보지(保持)12) 라는 意味밧게 아니된다. 그러나 자아각성(自我覺醒)에 유(由)한 인간성(人間性)의 해방(解放), 개성(個性)의 고조(高調) 는 그 표현(表現)으로서 意味하는 생명(生命)은, 물적(物的) 意義로부터 초월(超越)한 심오(深奧)한 意味가 업스면 아니 될 것이다. 그러면, 개성(個性)의 표현(表現)을 意味하는 바 생명(生命)이란 무엇을 意味함인가.
나는 이것을, 무한(無限)히 발전(發展)할 수 잇는 정신생활(精神生活)이라 하랴 한다. 물적(物的) 생명(生命)의 요구(要求)나, 는 그 현현(顯現)13) 은, 생물(生物)에 공통(共通)한 현상(現象)이며, 경(更)히 일보(一步)를 진(進)하야, 희노애락애악(喜怒哀樂愛惡)의 감정생활(感情生活)이며, 사업욕(事業慾), 지식욕(知識慾), 기타(其他) 자유(自由)를 요구(要求)하고, 인권(人權)을 주장(主張)하는 등(等)으로 말할지라도, 역시(亦是) 정신생활(精神生活)의 일부(一部)의 표현(表現)이 아닌 것은 아니나, 이것도 일반적(一般的) 인간성(人間性)의 표현(表現)에 불과(不過)한 것이요, 아즉 숭고(嵩高)한 생명(生命)의 발로(發露)인 독이적(獨異的) 개성(個性)의 영역(領域)은 아니다. 五十平生에 눈물 한방을 흘려 본 일이 업다는 특례(特例)가 업지 안흔 것은 아니나 父母가 죽으면 슯허하며, 위압하(威壓下)에서는 자유(自由)를 희구(希求)하는 것은 보통(普通) 인정(人情)이 아닌가, 그러나 거긔에는 스스로 심천(深淺)14) 과 강약(强弱)의 차(差)가 잇슬 것이다. 이 심천강약(深淺强弱)의 차이(差異)가 곳 일반적(一般的) 인간성(人間性)으로부터 독이적(獨異的) 개성(個性)의 意義를 구분(區分)하는 점(點)이다. 세상(世上)의 충효열절(忠孝列節)이며 인세(一世)의 성현군자(聖賢君子)와 의분가(義憤家) 개혁가(改革家) 등(等)이 모다 각개(各個)의 개성(個性)으로부터 울려나오지 안흠이 업다. 다시 말하면 공자(孔子)의 일생사업(一生事業)은 공자(孔子)의 개성(個性)의 발전(發展)이며 표현(表現)이엇고, 석가(釋迦)의 불도(佛道)는 석가(釋迦)의 성격(性格)의 현로(現露)이엇다는 意味이다. 이와 가티 그 천부(天賦)한 개개(個個)의 천성(天性)을 자유(自由)로히 발휘(發揮)하는 거긔에, 그의 정신생활(精神生活)의 전국(全局)을 규지(窺知)15) 할 수 잇고, 그 정신생활(精神生活)이 곳 그 자신(自身)의 거룩하고 독이(獨異)한 생명(生命)의 발로(發露)라 할 것이다.
종교가(宗敎家)가 보통(普通) 고조역설(高調力說)하는 바, 영혼(靈魂)의 불멸(不滅)이니 사후재생(死後再生)이니 하는 사상(思想)도, 결국(結局)은 개성(個性)의 자유(自由)롭은 발전(發展)과 포현(表現)인 정신생활(精神生活)의 영원한(永遠)한 生活을 意味함이 아닌가 나는 생각한다. 위대한(偉大)한 개성(個性)의 소유자(所有者)는, 위대(偉大)한 생명(生命)이 부절(不絶)히 연소(燃燒)하는 者이며, 그 생명(生命)이 연소(燃燒)하는 초점(焦點)에서만, 위대(偉大)한 영혼(靈魂)이, 불가티 번쩍이며 반발약동(反撥躍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위대(偉大)한 영혼(靈魂)이 약동(躍動)하는 거긔에, 비롯오 숭고(崇高)한 정신생활(精神生活)이 향상발전(向上發展)되고, 고매(高邁)한 인격(人格)이 완성(完成)되는 것이다. 그리하야 모든 理想이 이로부터 성취(成就)되고, 모든 價値가 이로 因하야 창조(創造)되는 것이다. 경언(更言)하면 위대(偉大)한 개성(個性)의 표현(表現)만이, 모든 理想과 價値의 본체(本體) 즉(卽) 진(眞), 선(善), 미(美)로 표현(表徵)되는 바 위대(偉大)하고 영원(永遠)한 사업(事業)이 인류(人類)에게 향(向)하야 성취(成就)케 하는 것이라 함이다.
함으로 영혼(靈魂)의 불멸(不滅)이라는 것은, 개성(個性)의 표현(表現)인 그의 위업(偉業)의 성과(成果)가 사후기만년(死後幾萬年)에 긍(亘)하야, 자손(子孫)의 번영(繁榮)과 공존(共存)하고, 후세자손(後世子孫)의 영혼(靈魂)속에 항상(恒常) 새롭은 意義와 價値와 원동력(原動力)이 되어, 재현(再現)하고 활동(活動)함을 이름이 아닌가 나는 생각하는 바이다. 다시 말하면 그의 정신생활(精神生活)과 인격(人格)의 발로(發露)인 위대(偉大)한 사업(事業)에 내재(內在)한 그의 개성(個性)이 영원(永遠)히 빗남을, 가르처서 영혼(靈魂)의 불멸(不滅)이라 하며 사후(死後)의 재생(再生)이라 이른다 합니다. 이러한 意味로 古今의 성현(聖賢)은 그 경전(經典)과 사업(事業)이, 인류사회(人類社會)를 지배(支配)할 지, 東西의 석학(碩學)과 천재(天才)는, 그 문헌(文獻)과 작품(作品)의 생명(生命)이 존속(存續)될 지, 그의 영혼(靈魂)은 영원(永遠)히 불멸(不滅)할 것이다.
人生은 짧으고, 예술(藝術)은 유구(悠久)하다 함은 이를 이름이 아닌가 한다.
(3)
개성(個性)에 관(關)한 고찰(考察)은, 以上에 논술(論述)한 바로 대략(大略) 그 윤곽(輪廓)만이라도 요해(了解)16) 하얏스리라고 생각한다. 그러하면 예술(藝術)과 개성(個性)과는, 어한 관계(關係)가 잇는가. 별언(別言)하면, 일작품(一作品)에 대(對)하야 작자자신(作者自身)의 개성(個性)은, 여하(如何)한 활동(活動)을 하는가, 는 예술적(藝術的) 가치평정상(價値評定上) 개성(個性)은, 여하(如何)한 지위(地位)를 점유(占有)하는 가를 고찰(考察)하고자 한다.
以上에 나는, 개성(個性)의 표현(表現)은, 정신생활(精神生活)을 意味하는 생명(生命)의 유로(流露)라하얏고, 한 모든 이상(理想)과 價値의 본체(本體) 즉(卽) 진(眞), 선(善), 미(美)는 개성(個性)의 산물(産物)이라 논(論)하얏다. 그러하면, 예술(藝術)의 영지(領地)인 美와 개성간(個性間)의 관계(關係)는 어한 가를 더욱이 상고(詳考)하야 볼 필요(必要)가 잇다.
대저(大抵) 美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에 대(對)한 제가(諸家)의 철학적(哲學{的} 고찰(考察)은 고사(姑捨)하고, 美는 쾌감(快感)을 주는 대상(對象)의 상징(象徵)이라고 보통(普通)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한 정적(靜的) 외면적(外面的) 意味밧게 입는 것일가. 물론(勿論) 美는, 우리에게 쾌감(快感)을 주지 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美는, 결국(結局) 예술(藝術)의 영분(領分)17) 이오, 예술(藝術)의 내용(內容)이며 생명(生命)인 以上, 그리고 예술(藝術)의 價値가 우리에게 오즉 가헐(價歇)한 쾌감(快感)을 주는 것에 불과(不過)한 것이 아닌 以上, 美로써 쾌감(快感)의 대상(對象)이라고만은 할 수 업슬 것이다. 만일(萬一) 이러한 해석(解釋)을 시인(是認)한다 할 지경(地境)이면, 오색(五色)이 영롱(玲瓏)한 채색화(彩色畵)는, 목화(墨畵)보다, 우리에게 쾌감(快感)을 우일층(又一層) 유발(誘發)하는 고(故)로, 예술적(藝術的) 價値가, 보다 더 만타 할 것이오, 美人이나 가려(佳麗)한 풍경(風景)이나, 그 사진(寫眞)도 역시(亦是) 훌륭한 예술품(藝術品)이라 하겟다. 그러나 아모리 색체(色彩)가 영롱(玲瓏)하드래도, 그것은 생명(生命)이 움직이고 빗나는 예술품(藝術品)이 아니라, 정적(靜的) 공허(空虛)한 일현상(一現象)을 묘사(描寫)함에 불과(不過)함은, 사진(寫眞)이 예술품(藝術品)이 아닌 것과 다를 것이 업다. 한 근래(近來)에, 日本의 류종열씨(柳宗悅氏)가, 특(特)히 고려자기(高麗磁器)를 비롯하야 명종(名種) 조선(朝鮮)의 미술품(美術品)을 찬상(讚賞)하고, 조선민족미술관(朝鮮民族美術館) 건설(建設)에 분주(奔走)한 모양이나, 萬一 氏의 이른 고려자기(高麗磁器)나 기타작품(其他作品)의 곡선미(曲線美)가 쾌감(快感)을 주기 문에 예술적가치(藝術的價値)가 잇는 것이라고 논단(論斷)할 지경이면 그것은 일고(一顧)의 價値도 업슴은 勿論이려니와, 近者에 성행(盛行)하는 고려자기(高麗磁器) 모조업자(模造業者)도 훌륭한 예술가(藝術家)이겟고, 그 제작품(製作品)도 한 예술적(藝術的) 작품(作品)이라 하겟다. 그러나 다만 쾌감(快感)의 대상(對象)일 름인 곡선미(曲線美)는 아즉 예술영내(藝術領內)에 들어오지 못하며, 그 모작(模作)은 오즉 상품(商品)에 불과(不過)하야, 상인(商人)이나 감정자(鑑定者)로 하야금 진응(眞膺)의 별(別)을 석출(析出)케 하지 안는가. 그러면 진정(眞定)한 예술적(藝術的) 내용(內容)이 될 만한 예술미(藝術美)와 쾌락적(快樂的) 표현(表現)인 쾌미(快美)의 분기점(分岐點)은 나변(那邊)에 재(在)한가.
나는, 상술(上述)한 中에, 생명(生命)이 연소(燃燒)하는 초점(焦點)에서 영혼(靈魂)의 불이 다고 말하얏다. 예술미(藝術美)가 예술미(藝術美)인 소이(所以), 쾌미(快美)에 아즉 예술미(藝術美)로서의 價値가 업는 소이(所以)가 실(實)로 여긔에 잇지 안흔가, 나는 생각한다. 과연(果然) 불가튼 생명(生命)이 부절(不絶)히 연소(燃燒)하는 초점(焦點)에서, 번이며 도는 영혼(靈魂) 그 自身을 불어 너흔 것이 곳 예술(藝術)의 본질(本質)이어야 하겟고 우리는 거긔에서만, 眞正한 美를 멱출(覓出)18) 할 수 잇스며, 영원(永遠)한 생명(生命)이 간단(間斷)업시 약동(躍動)하고 유로(流露)함을 볼 수 잇다. 그러면 연소(燃燒)하는 생명자체(生命自軆)가 무엇이며, 그 초점(焦點)에서 반발(反撥)하는 영혼(靈魂)은 무엇인가. 두말할 것 업시 이것이 곳 개성(個性)의 활약(活躍)이며 표현(表現)이다.
함으로 이를 요약(要約)하야 말하면, 예술미(藝術美)는, 作者의 개성(個性), 다시 말하면, 作者의 독이적(獨異的) 생명(生命)을 통(通)하야 투시(透視)한 창조적(創造的) 직관(直觀)의 세계(世界)요, 그것을 투영(投影)한 것이 예술적(藝術的) 표현(表現)이라 하겟다. 그러함으로 개성(個性)의 표현(表現), 개성(個性)의 약동(躍動)에 美的 價値가 잇다 할 수 잇고, 동시(同時)에 예술(藝術)은 생명(生命)의 유로(流露)요, 생명(生命)의 활약(活躍)이라 할 수 잇는 것이다. 이에 이르러 상술(上述)한바 고려자기(高麗磁器)의 곡선미(曲線美)가 코매(快美)의 대상(對象)으로 볼 에는 無意味한 것이지만, 그 내재적(內在的) 생명(生命)의 유로(流露)를 볼 에는 예술적(藝術的) 價値를 인정(認定)할 수 잇스며, 그 모작품(模作品)은 상품(商品)에 불과(不過)하다는 논거(論據)가 명확(明確)히 된 줄 안다. 과연(果然), 류씨(柳氏)는 조선미술품(朝鮮美術品)을 통(通)하야, 조선민족성(朝鮮民族性)을 발견(發見)할 수 잇다 한다. 이를 환언(換言)하면 조선민족(朝鮮民族)의 민족성(民族的) 개성(個性)을 한줄기 선(線)으로부터 발견(發見)하얏다 함이다. 사천여년(四千餘年)의 역사적(歷史的) 배경(背景), 풍토(風土), 경우(境遇)로부터 전통(傳統)하야 오며 발전(發展)하야 나가는 조선민족(朝鮮民族)에게 특유(特有)한 민족성(民族性)이, 우리의 피에 사모쳐 무궁(無窮)히 흐르는 거긔에, 우리의 조선혼(朝鮮魂)이 잇고, 민족적(民族的) 생명(生命)의 리슴이 잇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여긔에 민족적(民族的) 개성(個性)이 형성(形成)되는 것이다. 그리하야 이 존엄(尊嚴)하고 숭고(崇高)한 민족적(民族的) 개성(個性)이, 섬세완연(纖細蜿蜒)한 일조곡선(一條曲線)에 탁(托)하야 표현(表現)될 에, 일개(一個)의 토혼(土魂)에, 영원(永遠)한 예술적(藝術的) 價値를 부여(賦與)하며, 창조적(創造的) 생명(生命)의 영원(永遠)한 생장(生長)과 발전(發展)과, 활약(活躍)이 잇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同時)에 신필부가지(神珌不可知)한 감격(感激)이, 그에 무티엇고, 민족적(民族的) 생명(生命)과 가티, 인류(人類)의 광명(光榮)이 그로 因하야 빗나는 것이다. 이를 요(要)컨대, 그 곡선(曲線)의 내부(內部)에는 작자자신(作者自身)의 개성(個性)이 표현(表現)된 동시(同時)에, 민족적(民族的) 개성(個性)이 표현(表現)되고, 민족적(民族的)으로 독이(獨異)한 생명(生命)이 잠류(潛流)하고 활약(活躍)함으로써 예술적(藝術的) 價値가 생긴 것이라 함이다. 이와가티 예술(藝術)은, 이미 개성(個性)의 독창(獨創)에, 생명(生命)이 잇는 것인 以上, 모조모사(模造模寫)에 예술적(藝術的) 價値가 업슴은 명주(名晝)를 석판(石版)에 복사(複寫)한 데에 예술적(藝術的) 생명(生命)이 업슴과 다를 것이 업는 것이다. 一作品에 就하야, 그 作者와 同一한 재료(材料) 同一한 기교(技巧) 同一한 수법(手法)으로, 얼마나 교묘(巧妙)히 제작(製作)한다 하드라도. 그것은 결국(結局) 기계(機械)요, 생명(生命)잇는 개성(個性)의 표현(表現)은 아니다. 한 예술(藝術)은 모방(模倣)을 배(排)하고 독창(獨創)을 요구(要求)하는지라, 거긔에 하등(何等)의 범주(範籌)나 규약(規約)과 제한(制限)이 업슬 것은 물론(勿論)이다. 생명(生命)의 향상발전(向上發展)의 경지(境地)가 광대무애(曠大無涯)19) 함과 가티, 예술(藝術)의 세계(世界)도 무변제(無邊際)요, 예술(藝術)의 세계(世界)의 무변무애(無邊無涯)20) 는, 개성(個性)의 발전(發展)과 표현(表現)의 자유(自由)를 意味하는 것이다. 이리하야 우리의 정신생활(精神生活)의 내용(內容)은, 더욱 더욱 풍부(豐富)하며 충실(充實)할 것이요, 영혼(靈魂)은 나날히 빗나질 것이다.
각필(擱筆)하고 보니 불충분(不充分)한 점(點)이 허다(許多)하다. 그러나 일자(日字)가 촉급(促急)하고, 분망(奔忙)하야, 일후(日後)에 더욱 명세(明細)히 논급(論及)할가한다. ……(三月十六日)……
(開闢 제22호, 1922․4)
1) 쉽다, 용이하다, 하기 쉽다
2) 여러 가지로, 백방으로, 각양각색의
3) 그들, 그 사람들
4) 용모가 맑고 빼어나다, 뛰어나게 아름답다, 아름답다
5) 처음의 시작, 싹
6) 애처롭게 호소함. 특히 환자가 의사에게 자기 증상에 대하여 호소하는 일을 이른다
7) 자양분이 많으며 좋은 맛. 또는 그런 음식
8) 다 끝나거나 지난 일을 이를 때 쓰는 말. ‘벌써’, ‘앞서’의 뜻을 나타낸다
9) 하지 않아도 좋은 군더더기 말, 쓸데없는 말을 하다
10) 용감하게 뛰어나감
11) 무의식중에 나타내다, 숨김없이 사실대로 나타내다, 드러내다
12) 유지하다, 보지하다, 지키다
13) 명백하게 나타나거나 나타냄
14) 깊음과 얕음
15) 엿보아 앎
16) 알다, 이해하다, 조사하다
17) 세력의 범위. 또는 맡은 일의 한계.
18) 찾아서 나타내다
19) 너무나 넓고 멀어서 끝이 없음
20) 끝이 닿은 데가 없 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