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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6-27
북구의 여름 아내와의 여행은 늘 마음 속 깊이 고맙다. 가정을 위해 말없이 수고해 주는 수줍음 많은 아내가, 선뜩 나의 여행길에 따라 나서 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북구라파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여름은 보기 드문 이국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겨울의 백색 향연과는 대조적으로, 전통적인 여름 축제가 이루어지는 6월 말은 낮이 가장 긴 계절답게 새벽 3시에 떠오른 태양이 밤 12시가 되어도 밤의 장막을 내리지 않는다. 북쪽의 산림을 따라 내려오는 신선한 북극 바람은 그 옛적 자유를 구가하며 항해하던 Viking의 유쾌함처럼, Fjord (피요르드)의 협곡과 해변을 따라 구름 한 점 없는 초가을의 날씨를 연상케 한다. 바다와 호수가 만나는 곳에 세워진 고색 창연한 궁성들과 그 앞에 펼쳐진 수많은 섬들(다도해)은 시간의 흐름을 잊게 만들며, 물의 맑음과 신록의 싱그러움, 그리고 중후한 조각상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그 것을 가꾸고 보호하는 그 곳 사람들의 애틋한 정열이다. 북구라파는 나에게 있어 늘 꿈을 심어주는 곳이다. 그 곳에는 세계 평화를 꿈꾸는 사람들을 위한 "노벨 평화위원회/연구소 (오슬로/노르웨이)"와 "노벨 박물관 (스톡홀름/스웨덴)"이 있기 때문이다.
평화에의 꿈 다이나마아트를 발명한 알프레드 노벨의 마음 속에는 그 것이 인류의 선뿐만 아니라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는 전쟁의 도구로도 쓰여질 것이라는 데 대한 끊임없는 아픔이 있었을 것이다. 30세의 젊은 나이에 다이나마이트를 발명한 노벨은 이후 세계 각 국에 발명특허와 공장을 세워가면서 "세계 평화주의자"로서 또 하나의 꿈을 가지게 되었다. "내가 운영하는 세계 각국 공장들의 경제적 영향력이 당신들 모든 의회와 정부의 하는 일들보다 더욱 평화를 증진할 것이다 (노벨의 어록중에서)" 그의 마음 속에는 국가간의 경제 협력이, 단순한 정치 협상이나 국방력의 증가, 그리고 국제법의 적용보다도 더욱 더 평화에 기여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모든 재산을 바쳐 조국 스웨덴 한림원에 과학 분야를 비롯한 노벨상을 제정케 했던 노벨은, 자신의 조국에 의해 똑같이 압박 받았던 이웃나라 노르웨이를 기억하고 오직 "평화상"만은 그 곳 오슬로에서 주관하도록 유언하였다. 스웨덴 역시 그 자신이 이웃 덴마크의 압제 밑에 있었던 어려웠던 시절을 기억하며 독립 순교자들의 처형 장소에 노벨 박물관을 세운 것을 보면, 과연 역사는 "아픔을 겪은 자만이 같은 아픈 자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단순한 진리 속에 머무르는 것 같다.
노벨 평화상 1901년 처음으로 "국제 적십자사"에게 노벨 평화상을 수여한 노르웨이 노벨 평화위원회는, "경제 협력"을 강조한 노벨의 유언을 그대로 따르기에는 아직 미성숙한 세계의 잔인성 (1.2차 세계대전)을 목도하게 되었고, 이는 평화상이 국지적인 국제간 위기 사태를 해결하는 "정치가"들에게 주어지는 동기를 제공하였다. 최근에는 개발도상국/압제국가들의 인권운동가/단체에게 치중하게 되어 만델라. 아웅산 수지, 김 대중 대통령 등에게 수여되었는데, 이는 한편으로는 수상 당사국의 부끄러운 역사의 단면을 보여주는 지역적 특성을 띄게 되었다. (주: 김 대중대통령의 경우도 민주화 운동으로 수상. 노벨 박물관에는 당시 형무소에서의 일지 등이 전시되어 있고, 남북 관계는 주요 과제가 아님). 그러나 이제 21C를 맞아, "보편적 세계평화에의 기여"라는 노벨의 유언으로 돌아가야 할 때라는 데에 노벨 평화위원회 위원들과 그 연구원들에게 이견이 없다. 역사 교수이기도 한 Geir Lundestad 노벨 평화위원회 사무총장은 그의 국제적 명성 때문이라기 보다는, 언제나 삶 그 자체의 당당한 모습에서 나에게 감명을 준다. 완벽한 영어구사와 더불어, 악수 할 때 불구인 그의 손 감촉에 움찔 놀라는 상대방에게 과연 삶의 당당함이, 인간 승리가 무엇인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분이다. 지난 5년 전부터 같이 일하게 된 Lundestad 박사는, 내가 한국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관계로, 김 대통령의 인권기여에 대해 설명하면서도, 미흡한 남북대화에 대해 걱정해 주었는 데, 세계를 읽어가는 거인의 모습을 느낀다. 나와 동행해준 Nicole Oltaneau. (루마니아 대통령 경제담당겸 대사. 무역협회장)의 볼칸사태 설명과 WTCA/유럽 연합 (EU) 합력의 금번 9월 볼칸 무역박람회에 대해 대담을 나누다.
미래를 향해서 세계무역센터 협회 (WTCA)의 목표와 기치는 "무역을 통한 세계 평화의 증진 ("World Peace through World Trade")"이다. 18여년 전 어느 봄날 마드리드 국립대학교 교정에서, 나는 성경을 읽다가 "아브라함과 롯"의 대화에 크게 감동되어졌다. 두 부족(나라)이 다툼이 일어나 서로 어느 곳으로 옮겨 갈 것인가를 결정할 때, 아브라함은 단호히 조카 롯에게 먼저 선택하라고 양보한다. "네 눈에 보기 좋은 것을 먼저 택하라". 롯은 보기에 아름다운 곳으로 떠나갔고 아브라함은 그 반대편 황무한 곳으로 옮겨갔지만, 풍성한 약속의 땅은 언제나 "평화를 만드는 자(Peace Maker)"의 것이었다. (주: 롯의 땅은 이후 소돔과 고모라가 되었고, 아브라함의 땅은 가나안 복지가 되었음) 이는 "축복의 근원"이라는 아브라함의 별칭과도 같은 의미이며 그는 "축복하기 위해서 축복되어진 (Blessed to Bless)" 것이었다. 민족과 민족의 문제, 국가와 국가, 전쟁과 평화는 바로 "땅과 경제"에 기원하는 것이 아닐까? 평화를 위한 열쇠는 바로 베푸는 정책("선린")에 있는 것이 아닐까? 국제 관계에 있어서 경제와 정치는 역동적으로 연계될 것이 아닐까? 국제 경제와 정치를 연계해 주는 정치.경제학적 통합틀을 만들어 내는 것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국제간의 경제와 정치를 연계하는 무역의 역할을 평화의 기능적 정책 도구로 쓸 수는 없을 것인가? 이러한 극히 단순한 생각의 시작이 바로 나의 첫 번째 박사 논문의 주제를 선정하게 되었고, 아직 구 소련과 미국의 관계가 첨예한 냉전이었던 당시에 나는 "낭만주의자" "이상론자"라는 학문적 조소 속에서도, "무역이 국제정치 틀 속에서 상호 전쟁 억제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이론화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는 마드리드 국립대학교에서 "지역경제 협력론 (1989) English/Spanish)으로서 발간되게 되었으며 이후 보다 정교한 이론적 발전과 실증적 연구를 거쳐 켈리포니아 주립대학교 등에서 "지역경제협력과 안보체제" "지역경제협력과 국제화 전략" 등등으로 발간되었는 데 때마침 미국과 멕시코의 경제협력이 대두되어 나의 이론은 Maquiladora (NAFTA 협력 방안) 라는 현실 요청 속에서 미국에서 각광을 받게 되었다. 영국 옥스퍼드대학교에 건너가서도 이에 대한 소신을 꺽지 않았고, 미국에 건너와 태평양 지역 연구의 세계 최고봉이라는 Larry Krause 교수 밑에서 사사 받으면서도 이에 대한 신념은 변함없었다. 일본 교토대학교에서의 강좌에서는 이러한 방법론을 처음 일본에 소개하였으며, 미국 법과 대학원에서의 연구도 역시 무역 관계론적 통상법, 그리고 이 것이 국제 평화 형성 과정에 미치는 역할 등이었다. 어느 눈이 가득 쌓인 겨울 날, 뉴욕을 한 눈에 내려다보는 세계무역센터 105층 Window on the World에서 세계무역센터협회 Guy F. Tozzoli 총재와의 만남은 이러한 내 신념을 이루게 만든 첫 번째 만남이었다. 그 분은 WTCA의 새로운 파라다임의 도래를 바라보고 있었고, 한 꿈 많은 동양의 젊은이에게서 그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나는 내 인생을 그 곳에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무역과 세계평화 WTC의 평화 이론은 한마디로 자유경제적 국제 무역이론의 실천적 확장이라고 할 수 있다. 적대적일 수 밖에 없는 국가간 일지라도 국제 무역을 통해 그 상호 경제 의존도가 높아지면, 전쟁에 의한 경제적 대가가 점차 커져서 자연히 분쟁에 대한 가능성이 적어질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적대적인 나라들끼리도 무역을 통해 인적.문화적.경제적 교류를 증진해 갈 때 점차적으로 이해의 폭을 넓혀 분쟁의 소지를 미리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더우기 극빈하여 내부적.외부적으로 내분에 처한 어려운 나라들에게도 무역을 통한 실제적 지역 경제 이익을 확장시킴으로써 내적 분쟁의 소지를 경감한다는 취지이다. 또한 국가와 국가라는 전통적 국제정치학적 접근이 아닌, 경제적 의미로서의 지역과 지역간의 경제 협력을 강조함으로써 국가간 정치.이념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구도를 확립하였으며, 각 지역의 국제화를 통한 역내 경제 발전모델을 추구하게 되었다. (주:이로 인해 WTCA는 98개 국가간의 조직이 아니라 320개 도시/지역간의 조직으로 형성되어 있음). 또한 WTCA는 어려움을 겪는 나라들을 위해 특별히 비영리.국제 봉사단체로서 관련 전문인들로 구성된 WTC Corps. (WTC 평화봉사단-www.wtc-corps.org 참조)을 조직하였고 이는 지금 아시아.아프리카. 중남미 등의 저개발 국가에 들어가 무역을 위한 각종 교육. 사회 지원 사업을 담당하고 있다. 내 아내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전 주식을 이 곳에 기꺼이 헌금해 주었고, 나는 이를 늘 감사하게 여긴다. 아내는 지금까지 그 재단에서 가장 많이 기부한 사람중의 하나이지만, 자신의 이름을 내기를 원하지도 않고 또한 여느 명예직 자리도 사양하며, "내 아내"이기만을 고집하는 사람이다. 그를 통해 지금도 아프리카의 어린이 학교가 식수를 공급받고 있고, 전운이 감돌고 있는 볼칸반도에도 무역박람회가 준비되고 있으며, 평양에서도 무역에 대한 무상 교육이 실시된다. 이에 WTCA는 이미 만델라 대통령, 드 클라크 대통령, 고브라쵸프 대통령, 투 투 주교 등 이전 노벨 평화상 수상자들에 의해, WTCA의 창립자겸 총재인 Guy F. Tozzoli 총재님의 명의하에 노벨평화상에 이미 4번째 추천되어졌으며 이 분야 최초의 국제 경제단체로서 노르웨이와 스웨덴에서 그 업적서가 발행되어질 예정이다. 한국이 구 소련과 최초의 접촉을 시도한 것도 WTCA를 통해서였고 (박 충훈 국무총리), 북한이 김 일성 사망이후 초대한 최초의 국빈도 WTCA였다.
미래를 꿈꾸는 자 오슬로의 노벨 평화 위원회/연구소에서, 그리고 스톡홀름의 노벨 박물관에서 나는 아내와 함께 거닐며, 기도하며, 평화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동서 분쟁의 생생한 현장이었던 베를린에서는 베를린 장벽의 해체 역사를 설명해 주고, 암스텔담/헤이그에 들려서는 이 준 열사가 민족을 위해, "만국 평화회담"에서 생명을 던졌던 우리 자신의 자랑스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내와의 "평화" 여행... 그 것은, 아무리 광대한 세계 평화의 이상일지라도, 가정을 이루는 부부간의 순수한 대화와 공동의 경험 그리고 나눔에서 비로소 위대한 역사는 시작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랑과 믿음이 만나는 곳에", 언제나 꿈은 실현되고 기적은 일어난다. 나는 한 히브리의 비천한, 그러나 "끊임없이 꿈꾸던" 조그마한 이방의 청년이 당대 세계 최고의 국가인 애굽의 총리가 된 일을 추억한다. 또한 온전히 하나님의 지혜 속에 7년의 흉년과 7년의 풍년을 지혜롭게 해결하여, 주변의 모든 지역 국가와 그 주민들을 아름답게 구원한 일들을 기억한다. 난 WTCA가 평화를 위해 어떠한 역할을 세계 속에서 펼쳐갈 것인가를 알고 있다. 난 노벨이 늘 마음속에 그리던 국제 경제협력을 통한 세계 평화가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 난 미국의 무역장관이 최대 무역국으로서 세계의 경제 문제들에 대해 어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가를 잘 알고 있다. WTCA의 세계평화 기여와 노벨 평화상에의 꿈, 세계 총재에의 꿈, 그리고 미 연방 무역장관에의 꿈......... 나는 세계를 드릴 "그대"를 분명히 기억하고 있고, 내 가슴속에 두고 있는 "세계"를 확연히 알고 있다 ("세계를 그 대 품안에"). 미래는 꿈꾸는 자의 것이다.
2001-7-9
60년간의 결혼생활-회혼식 내년 5월에 맞이하는 부모님의 결혼 60주년(회혼식)을 준비하는 마음은, 한 집안의 축제일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산 사람들"의 살아있는 증언을 마련하는 자리라, 벌써부터 감사하고 마음이 설레인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60년을 동고동락하며 '검은 머리 파 뿌리'되도록 회로한다는 것은 두 분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 자손들에게도 커다란 삶의 이정표를 제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주 이씨 안흥대군 19대손으로서 1919년 생이신 아버님과 청주 한씨로서 1921년생이신 어머님은 그 동시대의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일제 강점기와 한국동란, 그리고 격변의 한국 역사를 온 몸으로 부딪치며 살아오셨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예수님 다음으로 존경하는 어머님. 그러나 나의 아버님에 대한 기억은 존경보다는 오히려 "반면교사"였다고 할 수 있다. 아버님과 뭔가 다르게(?)되려는 반항적 몸짓과 시도가 오늘의 나의 모습을 상당부분 이루어 왔다는 데에 대해, 나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60년간의 결혼생활-할아버님과 아버님 이씨 왕조의 사직을 맡은 종가로서 아버님 집안은 조선 건국 초기부터 함경남도 함흥 (주:함주군에 이 성계의 5대조를 모시고 있고 이로 인해 이 성계의 체류지로서 "함흥차사"하는 고어가 생김)에 거하게 되었고, 이는 종손 계열로써 외아들인 아버님에까지 이르렀으며, 이 것이 우리 대가 모두 서울 충무로(주: 남산의 물줄기를 따라 4대 구역으로 나누는데 이중 주로 사직 관련 전주 이씨. 학자들이 거하는 지역임. 예:성 상문 등)에서 출생하고 그 곳을 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함경도 일대뿐 아니라 을지로. 충무로를 기반으로 한 할아버님의 거대한 부(독일 폭스바겐의 최초 한국 자가용 소유자라는 기록등)는 6.25 사변때 공산군의 브르조아 숙청대상이었던 할아버님의 피납 이후, 아버지에 의해 여지없이 무너져 버렸다. 할아버님은 그 시대의 일반적 관행에도 불구하고 오직 할머님 한 분만을 아셨고, 사위들은 미리 선택하셔서 이에 모든 투자를 아끼지 않으셨다. 이로 인해 당신의 사위들은 제헌 헌법을 작성한 한 XX, 포항제철 회장을 역임한 XXX을 비롯해 주위에 제헌 국회의원등 나라의 기둥들을 두루 배출하셨다. 아버님도 일본 명치(메이지)대학교 법과 졸업 후, 학도병으로 대동아 전쟁에 참전하셨는 데 조 만식 선생과 연계된 추을부대 독립 반란사건으로 일제 군부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으셨으며, 독립유공자로서 한국 전쟁당시 군 창설등에 생명을 걸기도 하셨었다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제6권-학생운동편). 중앙청 고등고시 위원. 인사행정 초대 사장등을 역임했지만 남다른 외모와 부, 사회적 위치 등은 아마도 어머님을 외롭게 하는 데에 가장 효과적으로(?) 써졌다는 것이 나의 평가이다. 이 것이 왜 내 자신이 가정의 역할과 중요성을 더더욱 강조하고 살아가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지금도 자다가 놀라 깰 때가 있을만큼, 내 인생에서 가장 뼈아픈 실패는 대학입시였는 데, 이는 이과학생으로서 의대를 준비하던 내가, 문과로의 전격적인 전환에 기인하였다. 내 인생의 방향을 바꾼 이 좌절은, 바로 아버님의 소실이던 분이 "산부인과 의사" "병원원장"이라는 사실에 대한 어릴 적부터의 편견과 증오가 주요 원인이 되었다. 나는 재수를 당연시 하는 주위의 권고를 물리치고, "내 길" 가기를 원했으며, 내 분야에서는 내가 "최고"가 될 수 있는 "미지의 세계"를 선택했고 이 것이 외대를 지망하고 대학원 졸업후 해외 유학을 떠난 이유가 되었다. 나는 내 실패를 인정했고, 뒤 돌아보기를 원치 않았다.
60년간의 결혼생활-할머님과 어머님 어머님은 학자 집안으로써 대대로 우리 이씨 집안의 며느리로 맺어지던 청주 한씨 (주:외척의 영향을 방지하기 위해 학자집안을 선택하였으며, 이로 인해 할머님과 어머니가 모두 한씨이시고 서로 5대조 할아버님이 동일함) 이신데, 부친 한 종순 (나의 외할아버님)께서는 함남고녀(전국 5개 국립의 하나) 설립자겸 초대 교장, 그리고 훈육등 벼슬을 거쳐 도 교육감을 지내셨고, 북한지역 수복 직후에는 도지사를 하시다가 역시 인텔리겐챠로서 공산당에 의해 숙청 당하셨다. 맏딸로 태어나신 어머님은 아버지와 함께 일본 가정대학/법과 대학을 나오셨는 데, 우리가 당시 학교가 있던 곳으로 이사갔던 이유는, 이미 기우는 가세에도 불구하고, 어머님이 직접 설계하신 3층집 (당시에는 가장 높은 가정집)으로의 이사였다. 이 이후 우리 가족은 내가 6학년 때, 그리고 중1-2에 걸쳐 아버님의 예정된(?) 파산으로 인해 가장 어려운 시기를 가지게 되었다, 남은 것 없는 살림을 떠맡은 어머님은 3남 3녀의 교육을 위해 마지막 남은 전셋집 전세금을, 그것도 가장 공부가 부진하던 작은 형의 대학 등록금에 모두 내어 놓으셨는 데, 이는 바로 갈 데 없는 우리가 작은 어머니 집으로 들어가 동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여자로서, 한 인간으로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최대의 굴욕감을 어머님은 자식의 교육을 위해 기꺼이 받아들이신 것이였고, 배움은 선택이 아니라 바로 "사활의 문제"임을 철저히 보여주셨다. 어려움이 한창이던 국민학교 졸업시절에는 막상 졸업식에서 이에 준한 상을 받지 못하였다. 이는 당시 나의 담임선생님께서 내 급격한 가정환경의 변화를 아시고 오히려 기특하게 여겨 대표상을 주시려 했지만, 그 것이 고려 대상이었음을 안 내가 선생님께 직접 찾아가 부당성(?)을 이야기하며 단호히 거부한, 12살 나의 당돌함에 기인한다. (어머님은 이에 아직도 마음 아파하시고, 나는 당시 그 이 기적 선생님을 기억하고, 존경하며, 언젠가 꼭 뵙기를 기대하고 있다.) 어머님의 희생은 헛되지 않아, 이제 어머님의 꿈나무 들이였던 그 3남 3녀 자녀들은 누구는 커다란 재산가로, 누구는 3선 국회의원으로, 누구는 교육 원장으로, 누구는 주요기업의 중역들로, 누구는 국제무대의 주역으로 당당히 활동하게 하였으며, 무엇보다도 우리 자손들에게 '믿음'이라는 가장 큰 유산을 굳건히 심어주셨다. 이 것이 나 자신이 집안의 어떠한 도움도 없이 유학시절의 어려움을 이겨낸 힘이기도 하였다.
60년간의 결혼생활-무엇이 삶을 이기게 하는가 여자로서의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이겨내고, 자손으로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했으며, 끝내 60년의 결혼 생활을 성공적 삶으로 인도한 근본적 힘은 무엇일까? 무엇이 그 것을 가능하게 하였을까? 믿음이다. 믿음을 통해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하나가 되었고, 꿈을 나누었다. 시어머니는 그 고통받는 며느리를 믿음의 동역자로 보았고, 어려움에 혼자 허덕일때 참 빛을 나누어 주셨다 (주:할머님은 92세의 연세로 전도자로서 사시다가 가셨으며, 어머님은 할머님과의 섬김때문에 사회적으로 '훌륭한 어머니" 시상에 오르심) 눈물의 기도가 있는 어머니의 자식은 망하지 않는다. 이제 두 부모님의 결혼 60년을 준비하는 우리들의 마음은 남다르다. 믿음을 따라 산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삶이며, 축복이며, 또 영광인가를 증거하는 귀한 삶의 잔치가 되기를 원한다. 믿음은 관념이 아니라 삶의 현장, 바로 그 자체의 기록인 것을 더욱 알기 원한다. 연로하신 부모님 모두 장수와 건강의 축복을 누리시며, 아름다운 신앙생활을 하는 것에 너무도 감사한다. 세월이 흐를수록 육체는 후패하나 속 사람은 날로 새롭와지신다. 어머님의 진정한 헌신과 믿음에 감사한다며, 매 순간 사랑의 고백을 마다하지 않는 아버님이 이제는 더더욱 고맙다. 그래서 아들은 나이가 들면 아버지를 이해한다고 하는 가 보다. 2001년 7월 7일 사랑하는 딸 은혜에게 족보를 설명하며 어머님의 삶을 이야기해 주다가.
2001-11-7
강우예찬 -눈보다 비를 더 좋아하는 이유- 내리는 비는 화려하지 않고 스스로 장식하지 않는다. 눈처럼 하이얀 드레스로 덧입지 않고, 나풀나풀 무도회의 춤을 절제하는 겸허함을 안다. 논두렁 시골 아낙네의 소박한 기다림 속에, 밭고랑 물꼬를 트는 농부의 진솔함 속에, 자신을 모두 담근다. 흐르는 비는 선머슴아 들의 우정처럼 투박하다. 한 줄기 도랑이라도 이룰라치면, 씨름박질 소년들처럼 선술집을 찾아가는 어깨동무 우정들처럼, 한데 어우러져 우렁차게 소리칠 줄 안다. 눈처럼 저희만 쪼랑쪼랑 포개져 모이지 않는다. 쏟아지는 비는 세상 옷들을 벗겨내고 씻겨 준다. 눈으로 하얗게 도배질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던짐을 통해 청명한 호흡을 제공하고 온갖 더러움을 스스로 껴안아 가져갈 줄 안다. 개인 날의 비는 삶의 의미를 노래한다 사랑하되 무지개 약속을 지킬 줄 알며, 떠나가되 높푸른 추억을 남겨둔다. 햇볕과의 만남을 통해 부부가 되고 무지개 사랑의 열매를 맺는다. 길가의 아직 녹지 않는 눈처럼 구차하지 않으며 스스로 아름다워지려 하지 않는다. 적시는 가랑비는 서러운 이별에 동참할 줄 안다. 눈 내리는 날의 행복했던 추억보다 비처럼 흘러내리는 아픔의 눈물을 위로할 줄 안다. 내 눈물이 그대 눈물이 되어 빗물인양 씻겨 줄 수 있다. 기다림 속의 가뭄비는 풍성한 은혜이며 생명이다. 갈급한 논밭과 나무와 화초들의 입술을 예외없이 촉촉케 해주며 누구에게도 차별없는 관대함을 선사한다. 메마른자의 고독과 목마른자의 아픔을 포용할 줄 안다. 우뢰 비는 분노할 줄 안다. 천둥처럼 호령할 줄 알며 번개처럼 세상을 징계할 줄 안다. 눈처럼 주위에 포용된 정적인 풍경에 만족치 않으며 자신의 소리를 내며 행동하는 용기가 있다. 창문 밖의 비는 언제나 마음의 비다.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쉼 없는 추억의 쏟아짐이다. 어릴 적 뛰놀던 동구 밖 풍경들도, 잠 못 이루던 첫사랑의 기억도, 가슴아팠던 삶의 자욱들도, 이제는 버릴 수 없는 귀중한 삶의 일부로 다가와 열리지 않는 창문 저편으로 하염없이 흘러만 간다. 비가 지나간 자리엔 언제나 청명한 하늘이 있다. 무지개의 찬란함과 꿈이 있다. 기지개 펴는 새 생명들의 미래가 있다. 그리고 모든 비에게는 바다가 있다. 나는 오늘도 바다로 간다. -2001년 7월 5일 정원에서 비오는 것을 바라보며, 아내와의 대화 중에서 P.S. 한 동기의 비에 대한 좋은 글을 읽고 마음이 움직였고, 문득 몇일 전 아내와 대화한 것을 시로 써보고 싶은 생각에 올려보았습니다. 좋은 날 들 되십시오.
2001-7-15
돈자병법-"확실하게 돈 버는 법"I 나는 돈 버는 것으로 부름 받지는 않았지만,이름 자체가 "(희)돈"인데다가 (주: 일전 나의 "성명 풀이학" 참조) 경제학도 남이 할만큼은 공부했고, 집안 내력도 다소 그러하고 (만일 내가 부계 쪽을 닮았다면), 또 국제 경제관련 기관에서 일하다 보니, "최소한" 나처럼 얼뚠한 사람정도라도 돈 정도는 벌 수 있다는 것을 체험하였다. 돈자의 10원칙 경제 병법! ****************************************** 1. 아무도 익살꾼을 사지 않는다. 모든 분야의 최고 결정권자들은 중요 결정을 할 때 진지하지 못한 사람에게서는 어떠한 제안도, 물건도 사지 않는다. 최고급 자동차나 다이아몬드 판매에 Cartoon(삽화)이나 Comics (만화)를 동원하는 광고를 보았는가? 아무도 익살꾼에게서는 물건을 사지 않는다. 미팅(학창시절의 경험담)에서 여자들은 익살꾼에게 웃음은 주되, 자기의 파트너로 삼지는 않는다. 익살꾼은 사람 좋다는 소리는 들어도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 2. 돈버는 것은 게임이다. 게임에 진다고 해서 당신이 무가치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게임에 이긴다고 해서 당신이 위대해지지 않는다. 게임은 게임일 뿐이다. 게임에는 당당해야 하며, 또한 정해진 룰을 지킬 줄 알아야 멋이 있다. 게임은 즐겁게 할 때 반드시 이긴다. 또 한 가지! 게임이 끝나기 전까지는 푼수처럼 미리 선심을 쓰지 말라. 승리를 망칠 수 있다. 마지막까지 이겼을 때 관대하게 나누어주고 모두 같이 즐길 수 있으며, 이 것이 "기부의 문화"이다. 3. 당신 자신에게 먼저 팔아라 자기 물건에 대한 자신이 없는 사람에게서는 아무도 물건을 사지 않는다. 신념이 없는 사람은 돈을 벌 수 없다.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확신, 자기가 파는 물건과 서비스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있어야 돈을 번다. 당신 스스로를 먼저 고객으로 확보하라. 이를 위해 당신이 가진 것에 대해 절대적 확신을 가져라. 이러하기에, "내 아내"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변하지 않는 유일한 미의 척도인 것이다(주: "아내를 사랑하는 줄 아는 이유" 참조) 4. 가장 좋아하는 일로 비즈니스를 하지 말라. 가장 좋아하는 일이란 취미생활로는 적합하되 비즈니스는 되지 않는다. 골동품 애호가는 골동품상을 하지 말아야 한다. 수집한 후 사고 파는 장사 이익보다는 그 애착에 빠지기 쉬우며, 계속 소장은 할지언정 팔려고 하지 않으며, 어떠한 희생을 치러서라도 예술품을 자기 손에만 넣으려 한다. 돈을 번다는 것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버릴 줄 아는 것이며, 원하는 것을 포기할 줄 아는 것이며, 원하지 않았던 것도 수용할 줄 아는 삶의 행태이다. 그렇다! 첫사랑도 가슴 시리게 아름다우나, 대부분 결혼까지 이르지는 못한다. 5. 내 것이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비즈니스 협상(deal)의 가장 중요한 도구는 상대방을 "유인"할 수 있는 incentive (자극적 보상물)인데 이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탐욕(greed)"을 연결 고리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 것이 아닌 것에 대한 확실한 포기"를 언제든지 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다면 누구인들 당신을 제대로 요리할 수 있겠는가? 버릴 때 확실히 버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바로 협상의 주도권을 보장한다. 또한 잃어버린 것, 지나간 일에 대해서 미련을 갖지 않는다. 어짜피 내 것이 아니었으니까! 삶이라는 것도 결국 계속되는 Deal들의 연장이라 할 수 있다. 내 돈이 아닌 것은 내 돈이 아니며, 내 아내가 아닌 것은 내 아내가 아니며, 내 인생이 아닌 것은 내 인생이 아니다.
돈자병법-"확실하게 돈 버는 법"II 6. 차선을 준비하라 "최선을 다하는 자세"와 "최상 (the Best)의 선택"과는 다르다. 완벽주의자가 대부분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는 최상이 아닌 차선(Second Best)을 선택하는 지혜와 용기를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지니스에는 차선이 항상 준비돼 있어야 하며, 오히려 차선의 선택이 실제 상황에서 80%이상을 차지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또한, 더 나은 미래를 바라보는 "최선을 다하는 삶"은 모든 경우에 필수적이다. 모자라는 분야는 보충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진통하듯 미련한 곰처럼 노력을 해야 한다. 소를 잡으려던 칼로는 닭이라도 잡을 수 있지만, 닭 잡으려던 칼은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다. 7. 한 분야에서 프로가 되라 자리는 많으나 제대로 된 쓸 사람이 없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어떤 사람은 성실(Sincerity)한데 실력(Capability)이 없고, 실력은 있는 데 성실하지 않으며, 두 가지를 갖춘 사람이 참 드물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성실과 실력, 이 모두를 갖춘 사람이 프로다. 그렇다고 모든 분야에 일류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피곤한 일이므로, 최소한 어느 한 분야에서는, 아무도 안 하는 하쟎은 분야 일찌라도, 당신 분야에서는 최고가 되라. 내 학창시절에 누가 WTC라는 말을 이해라도 했었겠는가? 8. 하나님을 빚지우게 하라. 성경은 "너의 선한 일에 대한 대가로, 축복을 누르고 흔들어 넘치게 하여 7곱배로 안겨주리라"고 약속하셨다. 당신이 가진 물질을, 가장 작은 것일지도, 어떠한 모양으로라도 선하게 활용하라. 이는 하나님을 빚지우게 하는 것이며, 빚지고 살수 없으신 하나님(빚지고 살면 그 분이 어디 하나님이시겠는가?)이 여러 풍성한 모양으로 7배 이상으로 되돌려 주시는 것을 의미하며, 더욱 중요한 것은 당신이 돌려 받자마자 또다시 하나님을 7갑절로 빚지우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얼마 안 있어 (국민학교 수준 산수로 계산해 보아도)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기하 급수적인 부가 당신에게 쌓임을 목도할 것이다. 하나님을 당당하게 하라! 당신이 그분을 위해 일하면, 그분이 당신을 위해 일하신다. 이처럼 확실한 장사가 세상 어디에 있을 것인가? 9. 주인의 소유를 활용하라 비즈니스의 가장 든든한 배경, 그 것은 믿을 수 있는 대자본가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전통적인 "선한 청지기"란 자신의 주어진 임무에 최선을 다하는 도덕군자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오히려 현대에 바람직한(?) 청지기 상은 (어차피 모두가 도덕군자일 수는 없을 테니까), 악(?)했으나 (돈에 집착은 했으나) 재물의 활용에 지혜로왔던 성경상의 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자기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대비해, "주인의 재물"로 인심을 베풀어 자기의 미래를 철저히 대비한 것이다. (주: 성경에서 칭찬받은 "악(?)한 청지기 이야기" 참조) 당신이 진정 성공을 원하면, 돈 많고 신뢰할 수 있으며 관대한 대자본가이신 하나님을 당신의 비즈니스 파트너로 만들라. 또한 지혜로운 청지기는 활수하되 낭비하지 않는다. 길에 떨어진 1 penny를 멸시하는 사람은 100달러 짜리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작은 시간을 아낄 줄 모르는 사람은 큰 시간이 주어줘도 준비할 줄을 모르며, 큰 기회를 기다리되 매 순간 자기를 스치고 지나가는 작은 기회를 무시해 버린다. 10. 영화의 주인공이 되라 "내가 반드시 이긴다"라는 확신보다 더 효과적인 승리의 방법은 상대방에게 "당신은 반드시 진다"라는 믿음을 주입시키는 것이다. 사실 어둠의 지배자가 영원히 패배할 수 밖에 없는 이유도, 십자가 권세아래의 굴복이 이미 예정되어 있다는, 제 스스로의 사실적 확신에서 성경의 장대한 파노라마는 펼쳐진다. 당신 스스로도 스릴 넘치고 감동적인 당신 자신의 영화 주인공이 되라. 비즈니스 게임의 상대자들에게 "그들은 당신에게 반드시 진다"라는 확신과 이유를 보여주며, 당신 자신의 엑션 영화를 제작해 보라.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삶의 책임감과 더불어, 삶 자체를 객관화하라. 영화가 시나리오 없이 찍을 수 없듯이, 확실한 삶의 지도를 가지고 살아야한다. 무엇을 하고있고, 무엇을 지향하는 지, 또한 궁극적인 제작자요 투자가인 당신의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 지 확실히 알아야 한다. 내 삶이 영화로 찍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책임감 있게 살자. 보다 멋있고, 보다 낭만적이고, 보다 열정적이고, 보다 아름다운 삶을 그린 각자의 영화 주인공이 되어보자. -2001년 7월 15일 새벽 4시. 1. 토요일 낮에 Shopping하는 아내를 따라갔다가 상점에서 기다리는 것을 불평한 후, 현재 Home Office로 쫒겨나 자숙 중입니다. 2. 오늘 일기중의 일부입니다.
2001-8-11
<<백합화와 사과나무>> 솔로몬은 어릴 적 여자 친구들을 가시나무들 가운데 피어난 순결한 "백합화"라 불렀고, 젊은 시절의 남자 동무들을 수풀 가운데 우뚝 선 향기로운 "사과나무"라 칭했습니다. 아름다운 시절, 그 추억의 얼굴들이 아직도 점점이 가슴에 남아 있는 한, 우리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추 혜림... 제가 기억하기로는 4-5학년때 전학을 가는 바람에 우리 몇몇이 마지막으로 초대받아(아마도 버스를 1-2번 갈아타고), 무척이나 아리따왔던 어머님의 융성한 대접을 받았던 것을 기억합니다 (도르래 덧문이 있던 집). 늘 공부 잘하고 어른스러운 모범생이었으며, 외모도 어머님을 닮아 무척 예쁘고 (전학한 관계로 사진이 없어 증명할 순 없지만), 전형적인 "현모양처"재목감 이었다고 생각됩니다. 헤어지지만 꼭 다시 만나겠다는 어린 결심에, 커서 "추"씨와 결혼하겠다고 엉뚱한 소리했다가, "이"씨와 "추"씨는 원래 시조가 같은 성이라 결혼할 수 없다는 매정한(?) 부모님의 한마디에 무척이나 상심하여, 그냥 잊고 살기로 마음 굳혔던 아이입니다. 유 경화... 역시 공부 잘하고 글 잘 짓고 특히 단정한 외모와 더불어 나이에 맞지 않을 정도로 조신한 생활이 인상적이었던 여자 아이였습니다 ("아이"라....우리도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같은 반 생활을 한 적은 없었던 것 같으나, 상급학교에 진학하면서도 늘 "모범적이고 지적인 여학생"의 상징으로, 그리고 "근접할 수 없는 고고한 이상형"으로 마음에 남아 있었습니다. 차 도현. 항상 매고 다니던 나비 넥타이가 결코 이상치 않았던, 어릴 적부터 패션감각이 남다르던 남학생입니다. 늘 경이로왔던 것은 그렇게 활발하면서도 한번도 그 나비 넥타이가 삐뚤어지지 않는 유일한 남학생이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전 사실 졸업 앨범에서 조차 삐뚤어지고 어색한 나비 넥타이 차림인데 말입니다.) 이제 커서 공식 회의에 참석하다 보면 어릴 적 친구의 그 방정함이 결코 예사롭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게 되며, 지금도 세련된 마카오 신사를 연상해 봅니다. 김 대환. 내 어릴 적 선망의 대상입니다. 뛰어난 외모와 더불어 심한 장난기조차도 결코 싫게 느껴지지 않는 친구였습니다. 이전에 올려주던 영화평에 대한 글을 보고 저도 그의 영화관을 배워가느라 많이 애쓰고 있는 중입니다. 요즈음 본 영화 중에 A.I의 사회적 의미를 보다 설명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고, 스필버그와 루카스의 S.F를 통한 표현적 차이가 어떠하며 (일본식 "Final Fantasy"의 기법은?), 왜 흥행면으로 볼 때 스필버그는 A.I와 Jurassic Park III를 같이 내 놓았는지, 또 Pearl Harbor 의 동양적 평가 시각은 어떠한지, 중국계 Action 계열의 미국 진출 등에 대해 전문가중의 전문가인 친구가 오늘 바로 그 호탕하고 재치있는 글로 모두에게 시원히 펼쳐주기를 정말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국 영화도 빼놓지 마시고 가르쳐 주십시오). 친구의 무례를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고, 또 어여쁜 동생의 소식도 계속해서 들려주십시오. 아, 아, 모두 모두 정다운 친구들, 세월이 흐를수록, 밀린 숙제를 하듯, 하나 하나 소식을 전해가며 주옥같이 아름다운 그들의 서로 다른 삶을 사랑합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우정은 "사랑이라는 이름의 깃발"입니다. (솔로몬의 "사랑의 노래"중에서) 추신: 1) Laser 시력 교정수술을 받아서 지금 흐릿한 가운데 쓰고 있으니, 정성만 이해해 주십시오. 2) 김 은주 동기가 오랜 시간 본적도 없는 우리들을 위해, 이토록 챙기고 기억해 주고 함께 해주는 것을 보면 참 대단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사실 진실한 사랑이란 오히려 작은 일에 거하며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느끼지 못했던 부분까지 다독거려주는 그녀의 따뜻한 손길과 어른스러움에 진심으로 감사와 감동의 박수를 보냅니다.
2001-8-15
<<고향의 삶과 해외 이주에 대하여>> 나는 죽었다 다시 태어난다 해도 한국 땅에서 살고 싶다. 이 세상 어느 낙원에 태어난다해도 나는 한국 땅에 돌아가 살고 싶다. 인생은 어차피 나그네 삶이라며 청운의 꿈을 가지고 위로 삼는다 하여도, 나는 삶의 질펀한 냄새 있는 내 고향으로 돌아가 살고 싶다. 자기 나라에 있을 때는 세계가 아름다운 꿈으로 다가서지만, 정작 그 곳에 뿌리를 내리려 하면 세계는 이미 척박한 생존의 황무지로 변할 뿐이다. 사랑하는 부모와 같이 산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우애를 나눌 수 있는 형제가 내 지척에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운인가. 세계 각 곳의 아름다운 자연이 경이롭다한들, 내 어릴 적 추억이 있는 동구 밖 네 계절 풍경에 비할 수 있을 손가. 여행을 간다는 것과 거기에 정착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주제의 이야기이다. 한국에서의 삶이 치열하다한들, 낯설고 말 다른 이역만리에서 몸에 맞지 않는 음식에 풍습조차 알 수 없는 피부색 다른 사람들과 만원버스 속을 헤집듯 살아가는 것만큼 하겠는가.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는 말은 여전히 우리에게 진리다. "신토불이"라는 조상의 말은 아직도 내 식성에 유효하며, 최고급 양식 파티 후에도 부꾸막 식은 종지밥과 함께 곁들여지는 김치 한 점의 시원함을 나는 사랑한다. 멋들어진 다리와 흰 피부, 가슴 큰 금발의 서양 여자보다, 밭일하는 부군의 점심 찬을 머리에 이고 논이랑을 넘어질 듯 걸어가는 햇빛 그을린 우리의 촌여인네가 더욱 매력적이며, 교양 넘치는 사교적인 외국의 여성보다, 집에서 아이들 키우면서 그 자녀수에 따라 목소리 높아가는 엉덩이 큰 우리의 아줌마들이 아직도 더욱 사랑스럽다. 서구의 고색창연하고 웅장한 궁정보다 조그마한 나라 한국의 경복궁과 창경원에서 거니는 연못과 벚꽃이 더욱 가슴 뛰게 한다. 끝도 없는 초원에서 말 달리고 흐드러지게 골프 치는 것보다, 뒷마당에서 어깨 부딫혀가며 활쏘아서 세계 정상에 오르는 한국의 낭자들을 나는 더 환호한다. 해외 유명대학 석학들과의 교류도 좋은 일이지만, 삐꺽거리는 책상 위에서 다리에 얼음물 담그며 친구들과 머리 맞댈 때, 세계의 이상은 더욱 우리를 뜨겁게 한다. 산뜻한 이태리 정장과 구두보다 Made in Korea의 와이셔츠 하나에 더욱 더 긍지를 갖는다. 혀 꾸부러진 영어 한마디 구사에 자지러지는 넋 나간 아이의 부모보다, 김치 달라고 졸라대며 "우리나라는 언제나 좋은 나라"라고 우겨대는 아이의 부모가 더욱 더 존경스럽다. 코 크고 이름조차 발음하기 어려운 서구의 위인들에 대한 경외심보다는, 머리 깨지게 싸워도 그래도 내 나라를 걱정하는 한국의 지도자들이 아직은 더욱 따스하다. 자녀 교육을 위한 이유로 다른 나라에 간다 하여도, 잘해 보았자 대부분은 그 나라에 자녀를 빼앗기고 만다. 해외 이주는 잘해야 본전인, 피할수록 이익 나는 장사이다. 될성 싶은 나무는 어디에 심어져도, 부모의 진정한 사랑만 있다면, 열매를 맺는 법이다. 이래도 굳이 밖에 나와서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운이 없어도 지지리 없는 사람들이다. 좁은 나라를 떠나는 것이 발전적 사고라고 외치는 사람들은 그 자신들을 먼저 내보내 버려야 한다. 오직하면 제 나라를 떠나 살까. 나는 어쩌다 황당한 꿈을 꾸어서 처음부터 길을 잘못 들었다. 가진 것이 없고 월급장이 소박한 꿈이 너무 작다고 투정하는 여자의 말에 이를 갈며 고향을 떠났다. 그러나 사랑을 잃은 것도 실수였지만 해외로 떠난 것은 더욱 더 큰 실수였다. 세상적으로 성공하면 무엇한단 말인가? 그 여인은 때가 되니 지극히 평범한 직장인과 결혼하고 아이 낳아 내캉네캉 불평 한마디 없이 잘 만 살고 있는데..... 해외에 살고 미래를 꿈꾸며 세계 속에서 날개 짓 하지만, 그래도 고추장과 된장의 뒷맛은 날이 갈수록 더욱 구수해지고 세련되어진다. 내 어릴 적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주며, 자라나던 시절의 그 마음 그대로 포옹해주는 사랑하는 이들이 살아가는 곳, 나를 이를 조국이라고 부른다. 나는 언제나 한국인이다. 자랑스런 세계 속의 한국인이다. 주: 이민가기로 결심하고 보내온 친구의 서신을 읽고
2001-9-1
1. 바다이야기-"잃어버린 배를 찾아서" 아시아로 가고자 그토록 애쓰던 바울의 복음은, "마케도냐 (Macedonia)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환상 (행 16:9)과 함께 아시아의 드로아 항구 (Troas-현 터어키의 소아시아 지역)에서 역사적인 방향 전환을 하게된다. 이후, 세계를 지배하던 로마 황제 시저 (Caesar)의 이름을 본 딴, 속국 이스라엘의 가이사랴 (Caesarea) 항구를 떠났던 작은 배 (행 25:6/행 27:1)는 바울이라는 한 사람의 죄수를 태우고 있었지만, 이는 서구의 새로운 역사 자체를 로마로 싣고 가는 것이었으며, "세상을 뒤집어 놓는 (These who have turned the world upside down-행7:6)" 영광된 행전 (Acts)의 시작이었다. 죄수로서 호위되어 로마를 향해 떠나던 바울 일행은 "아시아 해변 각처로 가려하는 아드라뭇데노 (Adramyttium-상기 드로아 항구와 인접한 무역항-행 27:2-이며, AEolis라 불리어지다가 현재 터어키의 Edremit에 해당) 배"에 올라 행선하여 루기아 (Lycia) 지방의 무라 (Myra-행 27:5)에 이르고, 이 곳에서 지중해를 가로질러 이탈리아로 가는 식량 무역선 (행 27:38)인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배(행 27:6)에 오르게 된다. Adramyttian Ship ("에드리미시안")! 이 것이 바로 아시아와 서구 역사의 대 분수령을 이루게 한 우리의 잃어버린 열쇠이다. 마게도냐의 환상을 통해 바울이 유럽으로 복음의 방향을 전환하던 바로 그 현장의 배, 그리고 로마로 가기 위해 첫 번째 승선하던 그 역사의 배! 이 작은 배는 우리 조상들을 세계의 주역으로 인도했었을, 바로 우리 자신의 아시아 발 무역선이다.
2. 바다이야기-"지중해에 안수하다" 내가 17여년 전 처음으로 대서양을 바라보고 손을 담갔던 곳은 스페인과 프랑스의 국경지역인 산딴데르 항(Santander-12제자중의 하나인 야고보가 순교한 지역-Santiago-이라는 전설이 있는 곳)이었다. 세계 각국에서 온 청운의 꿈을 품은 친구들과 함께 그 곳에서 전도하며 훈련을 받을 때 (Youth With A Mission-YWAM), 그 항구로 들어오던 Anastasis 호 (세계 각 곳의 어려운 곳을 다니며 선교와 의료, 구호 등의 역할을 하는 자선 목적의 배며, 현재는 Africa Mercy, Caribbean Mercy 등이 Logos II, Dulos호 등과 같이 세계 어려운 곳을 순회하며 봉사하고 있음)의 감격스런 모습을 잊을 수 없다. 나는 그들과 밤을 세워가며 바다의 경험담을 듣고 그 들의 간증을 읽으며, 하나님께서 언젠가는 우리를 통해서도 이러한 일들을 행하시기를 기도했었다. 세계 5대양 6대주로 몰려가는 파도들이 복음을 든 수많은 청년들의 모습으로 변하는 꿈을 꾼 후, 이에 YWAM을 창설한 Loren Cunningham의 이야기와 그에 따른 Mercy Ship의 실현 과정....... 그러나 아시아의 보잘 것 없는 젊은이가 뜬금없이 이야기하는 "최초의 아시아 Mercy Ship"에 대한 바람은 허공을 맴도는 단순한 희망사항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후 나는 고학 생활에 끼니를 걱정하면서도, 세계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는 그 지중해를 꿈꾸었고, 어느 여름날 배낭 하나를 메고 홀로 역사의 현장을 찾아 나섰다. 바울이 세상의 끝이라며 그토록 가기를 열망했던 곳, 콜롬부스가 대망의 꿈을 안고 신세계를 향해 떠나가던 바로 바르셀로나 항의 산타 마리아 호 앞에서, 나는 자랑스런 한국인 안 익태 선생의 유적지 마요르카 섬을 향해 처음으로 지중해에 손을 담갔다. 바울이 이 곳을 통해 세계 역사를 옮겨 갈 수 있었다면, 내가 이 지중해를 활용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하나님이 세상의 주인이라면 그 자녀인 우리가 오히려 이 지중해를 향해 명령치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나는 겉옷을 거두어 붙이고 한껏 팔을 뻗어 지중해에 손을 담가, 바다를 안수(?)하며 기도하였다. "역사의 현장인 지중해여, 이제 잊혀졌던 아시아의 복음의 배가 다시 이 곳을 찾아오리라" 바다에 손을 넣고 중얼거리는(?) 이 얼빠진 아시아의 청년을, 지나가던 유럽인들이 힐끗거려도 이미 내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후, 바로 그 자리에 세계적으로 아름다운 바르셀로나 세계무역센터 (http://www.wtcbarcelona.com)가 성공적으로 건립되었다.
3. 바다이야기-"수년 내에 이루소서" 멘하턴 상공을 가로질러 뉴욕 항을 한 눈에 바라보는 워싱톤으로의 항로는 언제나 나에게 배에 대한 꿈을 다시금 일깨워진다. 우뚝 선 세계 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의 타워 불빛을 중심으로 아름답게 펼쳐진 마천루의 불야성아래 세계 각국의 배들은 자유의 여신상을 포옹하며 뉴욕항으로 끝도 없이 입성한다. 언제나 비행기 창문 가에 앉는 나는, 이렇게 기도한다. "하나님, 저 많은 배들을 보십시오. 우리는 언제나 일런지요?" 미국 평화봉사단 (U.S. Peace Corps.)의 일원이었던 간호사 Trinett Foote는 오랜 타국 생활에서 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미국으로 돌아 왔는데, 어느 날 자신이 꿈에서 본 아름다운 광경, 즉 세계 각국의 온갖 인종이 함께 교역하며 평화롭게 거하는 가운데, 뉴욕의 거대한 WTC 빌딩이 중심에 자리잡고 있고 그 앞을 평화의 무역선이 유유히 지나가는 것을 표현하였다. 이 작품은 이후 WTC Corps.(WTC 평화봉사단)의 상징 (작품명 "Windows to the World")이 되어 전 세계 무역센터들에게 배포되었으며 그녀는 기적적으로 암에서 회복되어 WTC Corps.를 위해 일하고 있다. (그림 및 설명 http://www.wtc-corps.org/about/windows.htm) 수년 전 부모님을 모시고 카나다의 Vancouver를 방문했을 때, 그 수려한 항구에 그림같이 들어오는 배들을 세계무역센터에서 바라보면서, 나는 우리의 잊혀진 배를 위해 그 자리에서 무릎 꿇고 전심을 다해 기도하였다. 내 뺨에 흐르는 간절한 눈물을 바라보던 아내가 나를 가만히 감싸안고 같이 울어 주었고, 이어 나의 모든 가족이 손을 잡고 바다를 바라볼 때, 두 부모님은 정성스레 아들을 위해 기도해 주셨다. "아버지여, 속히 이루소서. 당신의 영광을 위해 수년 내에 이 일을 이루어 주소서"
4. 바다이야기-"만일 내가 하지 아니하면" WTCA를 위해 일하면서 그 동안 나는 GE Capital, Marsh, AMS, Warburg Pincus, Cap Gemini Ernst & Young 등 세계 유수 기업들과 함께 국제적 프로젝트들을 진행하여 왔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오던 중, 이번 8월 초 WTCA 본부로부터 긴급 세계이사회 소집 통고가 있었고, 이어서 관련 대기업들로부터의 여러 당면 안건이 제시되었다. 이 자리에서 기존 대주주에 관한 특례조항이 전격적으로 가결되었으며, 나로서는 전혀 예상치 않게 막대한 반사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나는 2-3주에 걸친 이 긴박한 진행에서 나에게 다가오는 하나의 의미를 분명히 읽고 있었다. "내가 이 기회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는가? 내가 만일 잠잠하여 이 일을 하지 않으면 다른 데로 말미암아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에스더 4장 14절) " 나는 그 날 밤 집에 돌아와 아내와 마주앉아 기도 중에 하나의 결정을 내려야 했다. 250만주를 구매하고 이를 우리가 꿈꾸던 배를 위해 전액 헌금하자! 일본의 미쯔비시. 미쯔이 (MITSUBISHI CORPORATION/ MITSUI & CO.)등이 1주당 6불에 산것에 비해 공로주 형식으로 나에게 부여된 특혜 가격은 너무나도 파격적이지 않은가? 지금부터 배를 위한 운영 기금을 조성하고 참가자들을 훈련하여, 2년 후 주식 매각 가능 시점인 2003년에는 전액 현금화하여 Adramyttian 배를 구입하자! 아내의 눈이 잠시 나를 응시하였다. 파출부 고용조차 과분하다고 스스로 집안 허드렛일을 하는 아내, 그리고 늘 그랬던 것처럼, 남편을 위해서는 어떤 망설임도 없이 내 편에 서 주었다. 자식의 작은 성의 표시조차도 '너의 번 돈은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써야한다'며 왠만한 거리는 아직도 걸어다니시는 어머님....나는 그 검소하고 소박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지금 필요한 자금을 흔쾌히 활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8월 29일, 나는 성공적으로 이사회의 승인을 받아 전체 금액을 완납하고 배의 기금으로 250만주를 구입하였으며, 드디어 목표로 하던 Adramyttian Fund를 구성하였다. WTCA Guy F. Tozzoli 총재님은 배 이야기에 마음이 움직이셔서 당신도 기꺼이 도우시며 희사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나는 내 최선을 다했고 믿음대로 행동했고 또 그 것을 이제 시작하였다.
5. 바다이야기-"죽음에 이를 때까지" Adramyttian은 원래 아시아를 기반으로 한 무역선이었으며, 그 이름도 "죽음에 이를 때까지! ('the Court of Death'에서 유래)"라는 강렬한 소명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WTCA 기치아래 움직일 우리의 "Adramyttian (공식 선박이름)"은 현재까지의 Mercy Ship 들이 가졌던 태생적인 기능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장르를 열어갈 수 있다는 데에 큰 의미가 있으며, 현존의 Mercy Ship들이 모두 미국과 유럽인들에 의해 주동이 된데 비해 Adramyttian은 태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아시아 주도의 최초의 배가 될 것이다. 이전 아시아의 작은 도시 Adramyttium이 중세에 이르러 신성 로마제국 Isaurian 왕조의 시조 Theodosius III (715-717)를 배출하여, 일개 무역 세금 관리에서 콘스탄티노플 황제로 즉위시켰듯이, 이 배는 동방과 서방을 엮는 귀중한 평화의 가교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또한 기존의 Mercy Ship이 기독교를 외견적으로 표방/소속할 수 밖에 없는 관계로 회교나 기타 타종교 지역, 그리고 반미.반유럽 정서 지역에서 배제되었지만, Adramyttian은 세계무역센터 (WTC)의 비정치적이며 세계적인 네트웍, 그리고 실제적인 지역 경제 발전 기여. 국제적 인지도 때문에 WTCA의 공식 전문화 선박으로서 그 평화적 역할을 다할 수 있다. 더욱이, 기존의 Mercy ship은 전도를 위한 구호사업. 의료. 도서사업 등에 치중했지만, Adramyttian은 무역 활성화를 통해 직접적으로 지역사회 개발에 동참할 것이며, 선상 무역전시회, 무역 사절단 교류, 무역 금융, 무역 정보.통신, 무역 교육. 훈련 등 다양한 전문 사업을 실시할 것이다. 이제 Adramyttian은 WTCA의 깃발아래 친선 사절겸 전문화된 Mercy Ship으로서 한국의 인천 세계무역센터 (개발 진행중 www.iwtc.co.kr/ http://iserve.wtca.org/wtc/Incheon_contacts.html)와 미국의 로스엔젤레스 (Palm Springs 세계무역센터 http://iserve.wtca.org/wtc/Palm_Springs_contacts.html)를 기항으로 태평양을 순회하며, 뉴욕 세계무역센터를 본부로 하여 전세계 WTC들을 그 방문지로 삼게된다. 모든 수요 인력은 기존의 WTC Corps.를 통해 담당하고, 전문 훈련은 팜 스프링 (로스엔젤레스에서 1시간 30분 거리의 대규모 휴양지. 대통령 별장지대) 세계무역센터 지역에 들어설 대규모 세계무역센터 대학교 (World Trade Center University/ 현재 국제적 명성의 Rossetti Group-http://www.rossetti.com/이 설계중이며, 금년 10월 말에 Grand Design이 공개됨. www.wtcu.org)에서 실시하게 된다. 우리는 "죽음에 이를 때까지!" 사랑하고, 그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6. 바다이야기-"뱃사람이 되고자" Adramyttian ("에드리미시안")의 항해 중에는 자체 선상 훈련 과정을 실시하게 되는데, 그 훈련 과정을 성공적으로 끝낸 사람들은 WTC Corps. Staff으로서 편입되며, 이들은 "Myttian (미시앙)"이라는 자부심 어린 애칭으로 불려지게 될 것이다. 아내는 이미 배이름을 "애들이(청년들이) 미션(선교)"하는 배로서 부르고 해석(?)하여 아침 이슬 같은 청년들을 예고한다. 나는 가능하면 배 자체도 한국에서 한국인의 손으로 만든 한국 배를 수주하려고 하며, 한국젊은이들을 될 수 있으면 많이 이 배에 태워 세계를 통해 견문을 넓히고 젊음을 불태우게 하고 싶다. 세계 속의 사람들과 같이 호흡하고 봉사하며 훈련받으며 꿈을 심어가게 하고 싶다. 로스엔젤레스 근교의 세계무역센터 대학교(WTCU)에서 현지 교육을 받은 후, 인천 세계무역센터를 귀항으로 하여 각 지역 WTC를 방문하면서 아시아. 오세아니아의 어려운 이웃을 위해 실제적인 도움을 줄 그들.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의 빈곤한 지역에 무역을 통한 세계 평화를 전달하고 같이 일하며, 종교로 닫혀있는 회교권에까지도 무역을 통해 사랑의 복음을 행동으로 전달할 아름다운 청년들. 지구촌의 당당한 주역으로서 어려운 이웃과 같이, 울고 웃을 진솔한 우리의 젊은이들. 유럽의 항구를 방문하여 낭만의 문화를 섭렵하는 것도, 귀한 일들을 마무리한 봉사자들이 가질 수 있는 Myttian (미시앙)으로서의 특권일 수 있을 것이다. 여름이면 나도 배에 올라 이들과 같이 땀흘리며 파도 소리를 들으며 별을 헤며 봉사하고 싶다. 내가 젊은 날 꿈꾸던 그 항구에 그 바닷가에, 내 아내와 내 아들과 내 딸들과 함께, 다시 한번 돌아가 그 배 위에 서보고 싶다. 예수의 계절에 무릎으로 사는 기도의 삶을 원하며
2001-9-13
Condolence to my dear colleagues in WTC New York: Dear All; Thank you for your kind messages in various ways. As one of the first witnesses for this tragedy, I was almost dead, missing slightly the first hit on my WTC 1 tower and then seeing the plane crashed into the WTC 2 tower directly over my head. I really owe this "second-time miracle" to all sincere people like you. (Awfully, I was also the first witness of the WTC bombing in 1993). My staffs and their family members are still missing/wounded in need of your prayer and I pay a deep condolence to my victimized colleagues, WTC New York, in great distress. In the meantime, my WTC Washington D.C. does get another blackmail threatening to attack and we are still in full alert. For your further communication with me, for the time being, please use dlee@wtcu.com because our global WTCA tele-networks were burn down. I hope everything goes well with all of you, “the truly loved ones”. Looking forward to seeing to you soon. Thank you very much. Best regards, P.S. Please deliver my heartfelt thanks to every body who cares for and worries about me.
Make My Day, though! ("그래도 나의 날을 만들라!) 지난 금요일 (9월7일), 구름 한 점 없는 수많은 별 들 아래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멘하턴의 바다 야경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다. L.A 근교에 지어질 WTC 대학교 설계/건설 담당의 WTC 팜스프링 사장, 그리고 새로운 국제 여행관련 프로그램 제작자들을 불러 뉴욕 WTC 쌍둥이 건물과 맞닿은 세계금융센터 (World Financial Center) 바닷가에서 우리의 계획을 이야기하며 뉴욕의 바닷가재요리를 즐겼다. (이 것이 내가 바라본 마지막 WTC Tower의 밤 풍경이 되고 말았다). 화요일(9월 11일)은 이번 10월 WTCA 상파울로 회의에서 결정될 후계 선정 및 훈련과정을 심의하는 세계이사회 5인 집행위원회 모임이라 무척이나 긴장되고 많은 준비가 필요로 되어졌다. 밤 늦게까지 서재에 머무르다 침실로 가니 평소에도 몸이 약한 아내가 아침에 마신 커피 탓인지 잠 못이루고 뒤척이고 있었다. 앞으론 커피를 안마시게 하려고 눈 앞에 커피 자체를 보이지 않게 하기위해 '나도 커피를 끊을 터이니 모든 집안의 커피를 치우라'고 하였다. 새벽에 일어나 7시발 비행기를 타려고 공항으로 나서는 데 늘 습관처럼 마시던 커피였지만 어제 한 말이 생각나 차마 들고 나설 수가 없었다. 공항에 도착해 평상시 같으면 바로 탑승할 터이지만 이 날은 커피를 사러 잠시 상점에 들렸고, 기다리던 사람이 너무 많아 이전엔 전혀 마시지 않던 얼음 채운 딸기주스를 대신 받아들었다. 갈증도 심하고 기내까지 가져가지 않으려고 몇 모금 더 마시니, 갑자기 속이 거북해 왔다. 뉴욕으로의 항로는 이날 따라 너무나 아름다운 높고 푸른 초가을의 날씨를 보여주어, 세계무역센터를 중심으로한 마천루, 그리고 자유의 상을 감싸안는 선박들의 모습이 아침 햇살에 눈이 부신 한 폭의 풍경화였다. 공항에 예정대로 8시에 도착해 바로 차편에 올라야 했으나, 갑자기 아까 마신 주스때문인지 속이 뒤틀리는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화장실로 향해야만 했다. 9시까지 도착해야할 중요한 모임이어서 걱정이 되었으나 어쩔 수 없이 15분이상을 지체하고 차에 올랐다. U.N.본부를 지나 WTC 본부에 가까워지자 나는 조금 늦기도 하고 또 재차 점검하고자 수석부총재에게 전화하였고, 내가 탄 차는 브루클린 브리지를 거쳐 막 터널을 빠져나가는 찰나였다. 갑자기 나와 통화중이던 부총재가, "불이다. 모두 나가야 한다..."는 외침과 함께 전화를 끊었고, 가끔 있는 훈련이나 오보려니 생각하는 동안, 차는 이미 WTC 1 (북쪽 tower)에 접근하고 있었다. 무슨 소동인가 싶어 잠시 윗쪽을 올려다 보는 순간 조그만 연기 정도가 피어오르는 것 같았으며 (바닷가 쪽 길에서는 불길이 잘 보이지 않았음), 걱정은 되었으나 워낙 시설도 잘 돼있고 또 유럽에서 온 세계 이사들이 염려되어 그들의 숙소인 WTC 5번째 빌딩인 호텔에 접근하라고 부탁하였다. 순간 연기만 보이는 것 같던 불길은 정상적인 불길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항공기 연료이므로) 끈적한 화염이 되어 순식간에 사방으로 치솟으며 번져나갔고 이어 고층에서 잔해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차는 이때 갑자기 몰려든 소방대원들과 장비로 WTC1과 WTC4 타워사이에 갇히게 되었는데, 바로 이 순간 머리 위로 한 대의 대형 여객기가 낮은 고도에서 전 속력으로 달려오더니 제 2 WTC tower를 정면으로 들이받는 것이 아닌가. 얼마나 지척이였는 지 지금도 그 비행기 배면에 새겨져있던 각종 작은 글자들이 눈에 선명한 데 그 비행기에 타고 있던 사람들, 특히 보스톤에서 이 곳으로 오고 있던 내 동료의 심정이야 어떠했었겠는가? 불길이 하늘로 치솟고 피격된 상하 4-5층이 순식간에 괴멸되는 순간, 나는 이제 이 것이 내 생의 마지막 순간이구나 하는 생각을 의심없이 가졌으며, 동시에 너무나 간결하게도 "여보, 안녕!"이라고 나도 모르게 되내이고 있었다. (죽을 때는 참 멋있는 말을 할 줄 알았는 데 막상 당하고 보니 사람은 가장 진솔한 마음의 표현 이상을 못 벗어나는 가 보다.) 일반적으로 고층 건물은 그 정도의 충격이면 옆으로 꺾여 넘어지거나 무너져 내리기 때문에 (일반 영화 장면처럼), 바로 지척에서 그것도 전혀 이동할 수 없는 상태에서 도대체 무슨 이변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WTC tower는 철근 축으로 엮듯이 지어졌기 때문에 (WTC 설계사들이 늘 자랑스럽게 이야기해 왔지만) 일정시간 버티어 주었고, 내 차는 마침 소방시설에 의해 통제되고 있던 반대편 차선을 넘어 서너대의 주차 차량 옆구리를 들이 받으며 바로 전 나왔던 터널 속으로 대피할 수 있었다. 위에서 떨어지는 수많은 파편들이 뒤따라 덮쳤으나 차는 이미 터널로 들어왔고, 이어 일정한 거리를 벗어난 후에 WTC는 붕괴되었다. (터널 안에 계속 남아 있던 차들은 붕괴 후 모두 파괴됨). WTC 1 (북쪽 Tower)를 쳤던 첫 번째 비행기는 내가 모임을 위해 올라가던 바로 그 장소로 돌진해 들어왔는 데 공항에서 15-20분정도 화장실에서 지체되지 않았으면 나는 영락없이 그 층에 있었을 것이고, 그 곳 상하 4-5층의 모든 사람들이 충돌 직후 모두 생명을 잃었다. 1 WTC (북쪽 Tower)의 77층에 위치한 WTCA 본부 직원들은 바로 위 층에서 화재 경보가 울리자 평상시의 훈련대로 잘 따라주어, 일부가 부상을 당하고 시설들이 이전할 여유도 없이 순식간에 파괴돼 버렸지만, 인명 피해는 최대한 줄일 수 있었다. 하지만 1 WTC의 105층에서 일하던 WTC Private Club의 모든 직원이 일순간에 목숨을 잃었다. 지배인으로부터 웨이터에 이루기까지 늘 반갑고 친절하게 맞아주던 그 정다운 얼굴들을 이제는 다시 찾을 수 없다. 흑인으로서 자부하며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일하면서 동양인도 성공할 수 있으니 자기도 할 수 있다던 20여세의 야심 찬 젊은 웨이터, 스페인 말을 하는 내가 친근한지 사무실을 언제나 정성스럽게 치워주던 멕시코 출신의 청소부 아줌마, 남이 가장 싫어하는 화장실 청소를 25년이나 했음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스스로를 "WTC 터줏대감"이라 부르는 환갑을 얼마 안남겨 놓은 아저씨, 내가 Tozzoi 총재님과 동행하면 '아들이 아버지 닮지않은 의심스런(?) 부자'라고 우스개 소리하던 스넥바의 아줌마.... ....그 들의 모습을 이제 볼 수가 없다. 세계 금융을 논하며 세계 경제의 주축임을 자랑하던 미국 엘리트, 그 절친했던 친구들의 모습도 무너져 내린 WTC tower 속의 회색 연기 속에서 이제 다시 찾을 수 없다. 나와 마지막 통화했던 Herbert 수석 부총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이 가장 사랑하고 자랑스럽게 여기던 아들의 시신을 찾으려 그 폐허를 헤매고 있다. 자신의 목숨을 아들과 맞바꿔달라고 울부짖으며... 같이 웃기도 하고 다투기도 하며 그러나 같은 목표를 위해서 서로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던 그 친근한 동료들을 이제 어디서 찾아야 할 것인가. 쌍둥이 빌딩이 세워진 후 WTC의 제안에 따라 추후 건축된 세계 재정 센터(World Financial Center)마저 오늘 불에 휩싸여 처참히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며 나는 애통함을 참을 수 없다. 하루 종일 비상수습책을 세워가면서 오늘 Tozzoli 총재님이 나에게 해주신 말씀이 마음에 더욱 새롭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평화 진작을 위해 그렇게 많은 기여를 해온 WTCA가 이토록 악의적이고 파괴적인 행위의 희생이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참담한 모순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대규모 시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WTCA을 위해 설정했던 그 주요 목표들을 향해 우리 자신을 다시 한번 헌신하여할 때이다. ("It is indeed a cruel irony that the WTCA, which has done so much to promote peace among all nations, is the victim of such a malevolent and destructive act. In spite of this enormous setback, however, this is the time to rededicate ourselves to the important objectives and program that we have established for the WTCA") 아마도 다시금 WTC tower가 이 곳에 지어지려면 적어도 5-8년이 소요될 것이며, 어쩌면 그 때에는 이미 Tozzoli 총재님은 내 곁에 계시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설정한 공동의 목표("무역을 통한 세계평화"-World Peace through World Trade) 를 성취하기 위해, 새로운 지도부가 새로운 기치를 들고 새롭게 국제 경제질서를 움직여 갈 것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렇다. 이 WTC가 처음 세워졌을 때에도 건축할 땅이 없다고 하자 간척지를 만들어 땅을 만들어 내었고, 자금이 없다고 하자 비젼의 사람 록펠러가 신념을 갖고 제창자가 되 주었고 미국이 고립주의를 표방하며 국내 경제에만 집중할 때 국제 무역을 통한 세계의 경제 주역으로 비상하였으며, 5개의 세계무역센터로서 만족할 때 우리는 98개국 320개의 세계 무역센터와 65만여의 회원사를 창출해 내었다. WTC 폭탄 테러가 있을 때에도 Tozzoli 총재님과 나는 그 현장에 있었고 그리고 살아남았다. 나는 이제 이 황량함 가운데 다시 세워질 멘하탄의 새로운 세계무역센터와 그를 담당할 WTCA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기를 다시 한번 선언한다. 2001년 9월 12일 무너져 내린 WTC Tower의 폐허와 세상을 떠난 동료들을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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