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산 엘지 사원아파트내에 있는 크리스마스 츄리>
국토순례여행(9) - 12월 29일: 당진에서 서산으로 가는 길
조금 일찍 잠이 깨어 조용한 곳을 찾았습니다. 말씀을 보면서 주님을 묵상했습니다. 모두가 조용한 시간에 주님과 나누는 교제는 행복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베드로 전후서를 읽으면서 초대교회 성도를 향한 베드로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습니다. 다시 잠이 들었는데 외사촌동생은 그 사이에 출근하기 위해서 찜질방을 떠났습니다. 동생의 앞길에 주님의 인도하심을 빌었습니다.
가까운 친척이어서 어렸을 때는 늘 자주 만났지만 이제 나이가 드니까 삶이 달라지니까 자주 만날 기회도 없는 것 같습니다. 종종 생각합니다. 혈연가족보다는 신령한 가족이 더 가까워지는 것같습니다. 비록 피를 나눈 사이는 아니지만 함께 거룩한 성찬에 참여하면서 주님의 사랑을 함께 나누는 신령한 가족의 교제가 더욱 행복하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진토리교회 식구들을 볼 때마다 신령한 가족의 진실된 교제를 보는 것 같아서 늘 감화를 받습니다. 비록 피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주님 모시고 살다보니까 형제보다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된 것 같습니다. 아침에 간단히 사워를 하고 간단한 아침식사를 한 뒤에 당진군청으로 갔습니다. 민원실에는 인터넷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습니다. 돈 안들이고 인터넷을 이용하는 방법이지요. 급한 성적처리를 하고 당진을 출발해서 서산으로 길을 떠났습니다.
32번 지방도는 왕복 이차선이었습니다. 34번을 만나서 갈 생각을 했는데 34번과는 연결이 되지않고 32번을 타고서 계속해서 걷게 되었습니다. 차들이 그렇게 많이 다니지는 않아서 걷기에는 오히려 편했습니다. 시골 농토사이에서 길을 걷노라니 여유가 생겼고 자연속에 홀로 걷는 행복이 있었습니다.
빈들판을 바라봅니다. 자연은 봄을 지나 여름이 되고 여름지나 가을이 되었고 이제 가을을 지나 겨울이 되었네요. 겨울에 저 산들과 논밭은 쉬고 있지만 새롭게 생명을 잉태하려는 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뚜렷한 4계절을 주셔서 계절의 변화를 경험하면서 살도록 하셨습니다. 비록 저곳에는 생명은 쉬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새로운 봄을 향하여 준비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평안한 걷기를 통해서 마음에 기쁨이 생겼습니다. 가는 길에 행정교회라는 간판이 들어왔습니다. 교회를 들어가보았습니다. 이곳이 행정리라는 곳인데 행정감리교회였습니다. 본당을 들어갔습니다. 작은 시골교회였습니다. 박제란권사를 초청해서 부흥회를 한다는 프랭카드가 걸려있습니다. 이 분이 "산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라는 유행가를 불렀던 가수입니다. 교회본당에서 요한 계시록 말씀을 읽으면서 묵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특히 오늘 떠나가는 당진군의 모든 가정들의 치유와 회복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요즘에 많은 가정들이 망가지는 모습을 보면서 가정의 회복과 치유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번의 여행의 중요한 목표중의 하나도 깨어지는 가정들을 위해서 중보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능력이 있습니다. 가정들을 위해서 믿음의 형제들이 중보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기도를 들어 응답해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가정의 치유와 회복을 위해서 중보기도운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시군구에 있는 가정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이 기도운동의 목적입니다.
여장을 다시 한 번 꾸려서 계속해서 서산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가는 길에 작은 송림이 눈에 띄었습니다. 소나무는 사실 좀 천대받았던 적도 있었습니다. 송충이만 많고 쓸모가 없는 나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요즈음에는 잘 생긴 소나무는 관상용으로 수백만원에 이른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소나무 숲 뒤에는 성경초등학교가 있었습니다. 이제는 학생들의 수효가 많지 않은 학교입니다. 그러나 그 옛날의 정취를 그대로 간직한 것 같았습니다. 농촌이 한창 융성할 때에 대부분의 시골학교는 학생들이 거의 오백명 이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전교생이 50명 이내인 학교가 많습니다. 농촌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떠나왔지요. 그들이 도시로 나와서 산업전선에 기여한 것이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 경제부흥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어릴 때의 교육은 참으로 중요한 것 같습니다. 교육이 백년대계라는 말이 있습니다. 교육의 결과는 오랜 후에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저 초등학교를 졸업했던 많은 사람들이 이 사회의 어느 곳에서 신실하게 삶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운동장에는 너무나 멋있게 생긴 소나무가 몇 그루가 있었습니다. 학교입구에는 이곳 출신 학생들이 학습능력평가에서 좋은 성적을 얻었다는 프랭카드가 붙어 있었습니다.
조금 길을 걷다보니까 기사식당이 있었습니다. 시장기가 있어서 라면을 시켜서 먹었습니다. 남자 식당 주인은 언젠가 나를 본적인 있다고 말하면서 그 때가 언제인지를 곰곰히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식당에 온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런 적은 없다고 했습니다. 손님이 마음에 들었는지 2,500원 짜리 라면인데 밥도 한그릇 갖다주고 오뎅반찬까지 갖다 주었습니다. 서비스가 좋았습니다. 커피 한 잔까지 마시고 나서 500원 거스름돈을 받지 않으려고 하니까 기어이 주겠다고 해서 받았습니다.
은석친구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서산에서 오후 5시 경에 대산으로 가는 엘지 사원들을 위한 버스를 타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걷는 것을 멈추고 지나가는 시내버스를 타고서 서산으로 향했습니다. 서산은 최근에 아주 발전하는 서해안 도시입니다. 서산에서 버스를 타고 대산으로 갔습니다. 엘지 사원아파트에는 공원마다 크리스마스 츄리가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아내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얼마나 반가운지 역시 아내의 사랑이 감사했습니다. 늘 결혼해서 아내를 행복하게 만들지는 못했던 것같습니다. 늘 새로운 일을 추구하느라고 안정된 삶의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으니까 아내에게 좋은 남편은 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슈퍼에서 간단한 음료수캔을 하나 사서 친구 집으로 향했습니다. 친구의 집사람은 처음 보는 사이입니다. 이 불청객을 환영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조금은 염려가 되었습니다. 친구 아내는 정말 편안하게 대해주었습니다. 식사를 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은석친구는 초등학교 5학년을 마치고 부산으로 전학을 갔습니다. 그 때는 부산은 미국처럼 먼 나라처럼 생각되던 때였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50리떨어진 속리산으로 수확여행을 간 것을 제외하면 동네를 떠난 적이 없던 나에게 부산은 먼 곳이었습니다. 친구는 부산으로 떠나가서 주로 부산 동래에 살았다고 합니다. 부인도 같은 동네에서 만났다고 합니다.
정성껏 준비한 음식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텔레비전 체널 선택의 힘은 주로 남편이 쥐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주로 여행이나 퀴즈나 다양한 교양프로그램을 좋아했습니다. 부인은 드라마를 좋아하지만 하루 종일 수고한 남편에게 체널 선택권을 주는 것이 마땅한 도리라고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빨래까지 했습니다. 그 다음날 아칭에 일어나니까 친구가 빨래를 잘 개서 가져왔습니다. 그 옷을 친구가 개었는지 친구의 집사람이 개었는지 알지는 못했지만 어쨋든 감사했습니다. 옛 친구를 환영해준 은석 친구가 감사했습니다. 이제 또 언제 만날런지 물론 초등학교 동창회에 가면 늘 만나겠지만 인생은 이렇게 만났다고 헤어지고 또 만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린 시절에 헤어져서 거의 50대 중반에 만났으니 그 세월의 흐름은 얼마였던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래서 초등학교 동창생들의 만남이 행복한지 모릅니다. 그 시기는 동심으로 돌아가는 아름다운 시기인 것 같습니다. "그래, 은석 친구야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 우리의 만남이 주님안에서 더욱 풍성하고 아름다워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