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코스에서 역 방향으로 시작한 것은 단지 손자들의 집 쪽이라는 그들의
편리성 하나가 이유였지만 불편했던 것은 부인하지 않겠다.
그러나, 같은 이유가 이번에는 마지막이 되는 8코스를 순방향 진행으로
이끌었고, 157km의 끝점에서 지체없이 완주 인증서를 받음으로서 절로
산뜻한 완결을 이루게 했다.
부수 효과도 있다.
아들 부부의 동참으로 단 하룻길일망정 3대가 함께 걷는 서울둘레길 겸
북한산둘레길이 되었으니까.
다른 점도 하나 있다.
서울둘레길이 순방향이 된데 반해 북한신둘레길은 역방향이라는 것.
2자릿수에 진입한 후로는 횟수가 무의미해진 북한산둘레길의 완주에서
도봉산 구간 외에는 역방향 진행이 처음이다.
그 때문인지 순방향 서울둘레길이 되레 생경감을 주었다는 것.
북한산둘레길과 겹치는 서울둘레길 8코스에는 북한산둘레길에는 없는
시비거리가 있다.
서울의 외곽을 걷는 길과 북한산자락을 걷는 길의 차이만큼이다.
그러나 서울둘레길이라는 이유로 북한산에 북한산둘레길 아닌 새 길을
만드는 것 또한 다른 시비거리가 되기 때문에 묻어둘 수 밖에 없지만.
옛 구파발(위)과 현 구파발(아래)
체력의 한계를 고려하지 않은 과음이야말로 우매한 만용(?)임을 충분히 자각했는데도
이따금 망각함으로서 받는 징벌을 누구 탓으로 돌리겠는가.
간밤의 도봉산 단골집에서 마신 술이다.
거북한 몸으로 약속(구파발역9시)을 지키느라 힘든 아침(2017년 1월 8일 일)이었다.
우리 3대가 만난 구파발(지하철3호선역 지상)은 내 기준으로는 한반도 남쪽에서 가장
혁명적 변혁을 이룬 곳들 중 하나다.(현재도 진행중이지만)
경기도에서 서울로 편입된 지역 중에서 가장 늦게 편입되었으나 가장 빨리, 가장 많이
발전한 곳이니까.
파발(擺撥/把撥)은 이조 후기에 공문을 급송하기 위해 설치한 역참(驛站)을 말하는데
글자대로 구파발은 옛 파발이 있던 곳이며 구파발동은 그 마을을 의미한다.
이조 초기부터 한양의 서북관문으로 중국의 사신과 상인들이 빈번하게 왕래함으로서
주막과 대장간이 번성했던 곳.
벽제관(碧蹄館/중국을 왕래하는 사신들의 숙소)으로 통하는 길목으로 경기도 고양군
신혈면 구파발리였으나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때(1914년) 이웃인 하도, 은평 2면의 각
일부를 흡수, 신도면 구파발리가 된 마을이다.
광복 후, 1973년에는 서울시 서대문구에 편입되었으나 1979년의 분구 때 은평구에 속
하게 되었다.
경계가 모호하지만 7코스(위)와 8코스(아래)가 갈리는 구파발
지난 해 12월 26일, 역방향 7코스에 들어갔던 그 곳에서 순방향 8코스를 시작했다.
아들부부와 두 손자 등 4명과 함께 은평뉴타운 따라 흐르는 실개천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북한산둘레길(8구간 구름정원길)과 만나는 약 2km미만 길의 대부분이 실개천길이다.
한겨울이라 약간 지저분한 민개천 외에는 볼 것이 없으나 다행히도 악취도 없다
겨울 효과인가 주민의 높은 민도를 의미하는가.
인구가 1천만명이 넘으며 여러 수식어가 붙은 세계 굴지의 수도라 하나 각종 개천에서
뿜어내는 악취는 저개발국가의 수준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는데.
실개천의 서울둘레길 안내는 길바닥의 노란 페인트 표지가 담당하고 있다.
널리 알려진 이베리아반도의 까미노가 대표적이다.
형광(발광) 효과와 시각적 효과가 큰 황색 페인트 노면(지면) 안내표지는 많이 사용하는
방식인데 여기 실개천 구간의 의존도는 절대적이다.
그러나 기후 조건을 감안하지 않은 절대적 의존은 큰 문제를 수반하고 있다.
눈이 많이 내리는 겨울에는 걷지 말라는 것과 다름 없으니까.
근래에, 북한산둘레길을 걸을 때 전에 없던 빨간 우체통의 등장을 괴이쩍게 생각하며
지나쳤는데 서울둘레길을 걸으면서 비로소 용도를 알게 되었다.
e-메일로 인한 종이 편지의 급감(다른 이유들도 있지만) 현상으로 날로 늘어나는 폐기
우체통이 서울둘레길의 스탬프 부스로 재활용될 줄이야.
머리를 쓰면 폐기물의 재활용효과는 무궁무진한데 이 좋은 머리들을 왜 아끼고 있는지.
(위: 아들 가족/부부와 두 아들)
손자들의 활력이 넘쳐나는 듯이 보였다.
부자와 모자의 동행인데 아니 그러겠는가.
사다리 오르기 사고를 활용한다 해도 2세대가 넘는 간격의 늙은이에게는 한계가 있다.
나는 이미 모든 것을 놓아버렸고 모든 것에서 저만치 밀려나버렸지만 자라는 세대에게
부모의 막중한 무한 책임을 재확인하며 걷는 걸음이라 손자들과 달리 무거웠다.
"내리 사랑은 있어도 치 사랑은 없다"(下愛有上愛無) 잖은가.
무한경쟁 시대에 안팎의 공격으로 샌드위치가 되고 있는 세대가 손자에게는 부모지만
내게는 자식이기 때문이다.
북한산둘레길은 늙은 아내도 걸은 길이다.
서울둘레길과 겹치는 구간뿐 아니라 '난이도 상'인 도봉산 구간까지 완주했다.
지금은 전설이 되어버린 듯, 불가사의한 일인 듯 하나 교통사고 당하기 전에는 그랬다.
아들도 초등학생때와 중학생때 이미 계룡산 종주와 설악산 대청봉 코스를 너끈히 해냄
으로서 주목을 받았지만 사회인이 된 후 유감스럽게도 산이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이 길은 즐거운 소풍 또는 나들이 길에 다름아니다.
나는 소위 1.4후퇴 기간 외에는 서울을 떠나지 않았으며 귀경 이후에는 환갑이 넘는 긴
세월을 북한산의 앞(수유 우이동 일대)과 뒤(불광동지역)에서 보냈다.
(1960년대 말부터는 현재의 누옥 붙박이가 되었지만)
그래서, 둘레길이 난 북한산의 앞과 뒤 자락의 변모를 대부분 눈에 담고 있는 나에게는
추억의 반추를 부추기는 북한산둘레길이다.
서울의 강북에서는 최대의 역사(役事)인 은평뉴타운은 정치적 산물이다.
"낙후지역 개발 정비로 서민의 주거생활 안정과 주거환경 개선, 지역 균형발전"은 명분
일 뿐 30여년을 묶어둔 개발제한 구역을 푸는 힘은 권력 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헌법 개정 보다 더 어렵다는 그린벨트(green belt)를 이런 이유로 푼다?
강북의 광대한 개발제한지역에서 서북권역 관문도시 조성만 중요하고 시급한가?
개발지역에서도 권력은 무소불위의 힘을 쓴다.
북한산이 국립공원(경관지역)이라는 이유로 고도를 제한하고 있지만 북한산자락 은평
뉴타운의 고층아파트들이 산 중턱까지 치솟아 있다.
동남은 정면(얼굴)이라는 이유로 묶어야 하고 서북은 뒤통수니까 풀어도 된다?
앞과 뒤의 차이가 아니고 권력의 차이일 뿐이다.
선림사(위)와 둘레길(아래)
선림사 뒤로 난 둘레길은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낸다"는 속담의 실연장이다.
북한산자락 숲속에 호젓이 있던 사찰(禪林寺)이 돌연 소음에 시달리게 되었다는 것.
은평뉴타운폭포3차지구 고층아파트 주민들의 목소리가 커졌기 때문이란다.
뒤늦게 들어선 아파트의 주민들이 아파트단지를 관통하는 둘레길의 이설을 요구했고,
민원에 굴복한 둘레길 당국은 사찰 뒤쪽 산자락을 깎아 우회로를 냈다.
문제는 우회로와 데크계단들로 인해 이곳 둘레길은 그 전(2011년 11월)에 비해 상당히
맛이 갔다는 점이다.
우회로는 민원 탓으로 돌릴 수 있으나 왜 불필요한 데크를 깔아 맛을 잃게 했을까.
긁어 부스럼이며 사족(畵蛇添足)에 다름 아닐 뿐 아니라 막대한 혈세 낭비다.
게다가 사찰은 소음에 시달리게 되었지만 주민들은 고요를 즐길 수 있게 되었으니
선림사는 굴러온 돌에 빼내진 돌 신세가 된 것.
절이 쫓겨나는 일은 오지 않을까.
숭유억불(崇儒抑佛)이 아닌 이 시대에 사찰이 중생의 제도를 위해 환속(還俗)한 것이
아니라 중생이 스스로 사찰 가까이 왔으니(뉴타운 개발로) 좋을 듯 싶으나 이 아파트
단지에는 독실한 불자들이 없나.
역사는 짭으나(1966년에 터잡고 1991년 중창) 급성장세인 선림사가 뉴타운 덕을 크게
보겠거니 했는데 실상이 전혀 다르니.
선림사에도 서경보(一鵬徐京保/1914~1996)의 남북통일기원시비(詩碑)가 있다.
전국에 757개나 된다는 이 시비는 하도 자주, 많이 접하기 때문인지 신선하기는 커녕
식상한데 근래의 어느 자료는 더욱 놀라게 한다.
통일기원비 757개, 박사학위 126개, 저서1042권이라고.
1993년에 저서 733권, 박사학위 73개, 통일기원비 751개, 선필 50만장이라 했으니까
입적 직전 3년동안에 저서 309권, 박사학위 53개가 늘었다.
3.5일만에 1권의 책을 펴낸 꼴인데, 100자원고지 100장 미만의 소책자 수준이라 해도
입적 순간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28매 이상의 원고지를 채운 결과다.
82년동안에 저서가 1.042권이라면 년12.7권, 28일에 1권 꼴인데 모두소책자 수준이라
해도 출생 즉시~ 죽는 순간까지 29.930일동안 매일 100자원고지 3.5장을 써야 한다.
선필 또한 출생일부터 사거일까지 매일 17장을 써야 한다.
숫자 놀음이 아니라 실제로 가능한 일인가.
내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아들네 가족 4명이 오손도손 걷는 흐뭇한 모습만 그리고 있었지 내가 외돌토리로 밀려
나게 될 것은 미쳐 생각하지 못했으니.
궁금한 것이 많으며 많이 묻고 알려고 하던 손자들이 야속하게도 할아버지는 까마득히
잊고 제 부모에게 붙어버렸으니 나는 앞서 가거나 뒤쳐지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이미 걸은 두 자릿수의 북한산둘레길에서도(도봉산구간 제외) 아내와 함께 걸었던 1회
외에는 늘 솔로(solo)였지만.
그래서 북한산둘레길 8구간중 선림사 이후, 7구간(옛성길), 6구간(평창마을길),
5구간(명상길)의 시점인 정릉주차장까지는 화제가 될 만한 새로운 거리가 없다.
손자들과 따로 이야기 나눌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구간 이야기는 메뉴 '길따라 강따라' 의 '늙은 부부의 북한산둘레길 나들이'
5, 4, 3회(20~18번) 글로 대신한다.
5구간과 4구간(솔샘길) 간의 북한산둘레길에는 기백m의 대로(보국문로/
버스길)가 있다.
이 도로는 솔샘길의 끝부분에 해당하지만.
우리는 도로를 따라서 솔샘길의 오솔길이 끝나는 지점(우리에게는시점)
까지 내려갔다.
내일의 시점을 손자들에게 미리 알려주기 위해서.
점심을 구기터널 주변의 자기네 단골집에서 포식했지만 해가 뉘엿거리는
시각인데 식성 좋은 두 손자가 잠잠할 리 있는가.
눈치 봐야 하는 의붓 할애비가 아니지만 제 부모 같겠는가.
식성이 각각인 두 손자 덕에 큰 뒷풀이를 마치고 내부순환로 아래로 난
정릉로(버스길)의 버스정류장까지 갔다.
손자들이 내일 나와 만날 정류장과 버스편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아들네
모두가 내일 손자들이 타고올 같은 버스편으로 귀가한 것. <계 속>